산들보라 업혀 자기

 


 산들보라가 어머니 등에 업혀서 잠든다. 아침에 잠을 깨면 어김없이 두 차례 똥을 누는 산들보라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신나게 놀더니 졸립다고 칭얼거리다가는, 어머니가 포대기로 업고 당근을 씻고 갈아 물을 짤 때에 스르르 잠든다. 온 집안이 조용하다. (4345.1.2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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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이야기 2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네가 어머니가 됐을 때
 [만화책 즐겨읽기 112] 모리 카오루, 《신부 이야기 (2)》

 


 내가 아이였을 때 나한테 ‘앞으로 네가 커서 아버지가 되면’ 하고 말문을 여는 어른이 있었나 하고 떠올려 봅니다. ‘네가 아버지가 되면 네 아이한테’ 하고 이야기 물꼬를 트던 어른이 있었나 하고 되새겨 봅니다. ‘네가 아버지이자 어버이로서 아이들과 어떻게’ 하고 나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들려주던 어른이 있었나 하고 곱씹어 봅니다.


- “참 예쁘네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네? 어떻게? 이런 걸로 적당히, 이렇게.” (12쪽)

 


 있었을까, 없었을까, 곰곰이 생각하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습니다. 개구지게 놀던 나를 타이르거나 달래면서 착하고 참답게 살아가라며 이끌던 어른이 있었나 없었나 생각해 보지만,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꽃 피우던 어른이 있었으나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좋은 이야기꽃 피우던 어른이 없었기에 생각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어찌 되든, 두 아이와 복닥이는 오늘 나 스스로 착하며 참답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두 아이 아버지로 살아가는 오늘 내 모습을 곱고 맑게 추스를 수 있으면 돼요.

 

 하루하루 살아가며 내 모습을 돌이킵니다. 나는 얼마나 아버지답고, 나는 얼마나 어버이다운가 생각합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한테 ‘너희가 커서 어머니가 되면’이나 ‘너희가 커서 아버지가 되면’ 하는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얼마나 들려줄 수 있을는지 헤아립니다.


- “전 건방지다는 소리를 곧잘 들어요.” “그런가요?” “그래요.” “건방진가요?” “네? 아니! 다들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고! 물론 저도! 건방진 건 좋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하지만요! 조심하려고, 하는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조심하고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 그렇군요.” (18쪽)
- “파리야는 언제나 예쁜 옷을 입고 다니잖아요.” “아뇨, 이건. 반쯤은 부모님이 도와주셨달까.” “도와주셔요?” “아뇨, 물론 저도 하지만요. 전부는 아니고, 뭐랄까, 마지막 마무리? 랄까. 죄송합니다!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아니, 너무 힘들어요! 손재주도 별로 없고요!” “그런가요? 하지만 파리야, 빵은 잘 만들잖아요.” “빵은 괜찮아요, 빵은! 자수는 너무 섬세해서 짜증이 난다고요!” “짜증이 나는군요.” “짜증나요! 차라리 옷감을 짜라면 짜겠지만!” (140∼141쪽)

 

 


 나는 내가 하루를 보내는 모습 그대로 아이한테 보여줍니다. 아이는 제 아버지가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아버지 삶을 느끼고, 제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버이가 착하게 살아가면 아이 또한 착하게 살아갑니다. 어버이가 빽 소리를 지르거나 얄궂은 말을 일삼는다면, 아이도 빽 소리를 지르거나 얄궂은 말을 일삼아요. 씨앗을 알뜰히 건사하면서 심을 줄 아는 어버이라면, 아이 또한 씨앗을 알뜰히 건사하면서 심겠지요. 나무를 곱게 어루만지며 아끼는 어버이라면, 아이 또한 나무를 곱게 어루만지며 아낄 테지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어버이 따라, 아이들은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밥하기를 즐기고 빨래하기를 기쁘게 맞아들이는 어버이 곁에서, 밥하기를 어깨너머로 배우고 빨래하기를 곁눈질로 익히는 아이예요.

 

 곰곰이 따지면, 어버이나 어른은 따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더라도 ‘네가 앞으로 어버이로 살아갈 때’에 어떠한 매무새여야 아름다운가를 가르칩니다. 어버이나 어른은 굳이 말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더라도 ‘네가 머잖아 어른으로 살아갈 적’에 어떠한 몸짓과 마음씨여야 즐거운가를 알려줍니다.

 

 열중쉬어 시키고는 뙤약볕이나 강추위를 견디도록 하면서 길디길게 늘어놓는 교장선생 이야기보따리여야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적힌 글줄이어야 아이들을 일깨우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이야기여야 아이들이 받아먹을 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곁에서 마주하는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늘 함께 살아가는 나날이 가르침이고 배움입니다. 오늘 하루 차려서 먹는 밥이 삶이자 앎이요 꿈이고 사랑입니다.


- “아미르는 돌려줘야겠다. 네게는 과분한 아내였으니. 뭐, 다른 상대를 찾아봐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미르는 저와 결혼했으니, 어떻게 할지는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38쪽)
- “어디서 기어오르고 앉았어! 이 자식아!” (87쪽)
- “뭔가 하고 싶은 말 없어? 있다면 뭐든지 말해 줘.” “하고 싶은 말.” “난 아미르를 보낼 생각도 없었고, 보내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아미르에게는 가족들이 있잖아.” (113쪽)

 


 모리 카오루 님 만화책 《신부 이야기》(대원씨아이,2010) 둘째 권을 읽습니다. 중앙아시아 들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조곤조곤 실린 만화입니다. 중앙아시아 들판을 보금자리로 삼는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집에서 살아가는가 하는 이야기가 ‘만화대사’로 딱히 드러나지 않더라도, ‘만화배경’으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사진으로 보여주지 않더라도, 꼼꼼한 그림책으로 내보이지 않더라도, 이렇게 만화책으로 멋스러이 드러낼 수 있구나 싶어 놀랍습니다. 아니, 만화책이기에 사진과 그림으로 보여주기 힘든 대목을 찬찬히 짚으며 한결 재미나면서 새롭게 선보일 수 있구나 싶어요. 사진과 그림이라 해서 자유롭지 않으란 법이 없으나, 만화는 한껏 홀가분하게 꿈과 사랑을 꽃피우는 이야기밭이거든요.

 

 모리 카오루 님이 그린 다른 만화 《엠마》는 아직 읽지 않았는데, 《엠마》도 차근차근 장만해서 읽으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 “손님이다!” “손님!” “손님이야!” “착하게 굴어야 해!” “착하게!” “우리 착해!” (128쪽)
- “여기 있으면 매일 흥미가 끊이질 않아요. 게다가 마음도 푸근하고요. 정말, 생각보다 오래 있기는 했군요.” (161쪽)
-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시간과 수고, 그리고 마음과 기도가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 모습에서는 부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담소를 나누며 바느질을 하고, 일하는 짬짬이 실을 잣는다. 그러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며, 다시 말해 생활인 것이다.’ (170∼171쪽)

 

 


 만화책 《신부 이야기》에 나오는 ‘신부’는 ‘새색시’라 할 수 있고 ‘며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개 댁’은 아닙니다. 태어날 때에 받은 이름을 그대로 이어갑니다. ‘아무개 집안 사람’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신부를 낳은 어버이’ 집안을 잊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혼인을 일컬어 두 집안이 만나는 일이라 하는데, 두 집안도 만나고 두 사람도 만납니다. 두 문화가 만나고 두 삶이 만나요.

 

 마땅한 노릇이에요. 저마다 다른 삶과 삶터와 삶자락을 잇던 사람이 함께 살아가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어우러지는 삶’일 뿐 아니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집안에서 살아오던 결’이 만나기 마련이에요. 이 대목에서 서로서로 슬기로이 어우러지면 즐겁습니다. 이 대목에서 어느 한쪽이 뾰족거리면 고달픕니다.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기쁘게 어깨동무할 때에 즐거이 빛나는 나날입니다. 신부는 신부대로 어린 나날부터 제 앞날을 꿈꾸며 한 땀 두 땀 수를 놓습니다. 신랑은 신랑대로 어린 나날부터 제 앞날을 꿈꾸며 한 방울 두 방울 땀을 흘립니다.

 

 그야말로 아득하다 할 만큼 오랜 나날에 걸쳐 숱한 손길을 들여 바느질을 하는 일이란 ‘단순노동’으로 바라볼 수 있으나, 이 ‘단순노동’을 이야기꽃 피우며 도란도란 즐깁니다. 수많은 다른 일을 치르는 사이사이 꾸준하게 잇습니다. 몇 해에 걸쳐 양탄자를 뜨고, 여러 해에 걸쳐 살림살이 하나를 마련해요.

 

 땀이 깃들기에 사랑이 자랍니다. 사랑이 자라기에 오래도록 건사합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살림살이는 없습니다. 내치거나 등돌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깊이 아끼는 삶이기에 깊이 아끼는 사랑이에요. 깊이 아끼는 사랑인 만큼 서로서로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 “저희는 딸이 다섯이나 돼서 예단 준비가 힘들었지요.” “그거 정말 힘들었겠구먼.” “어찌저찌 다들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덕분에 아무것도 안 남았습니다.” “준비한 것만도 대단하이. 비단은 어디서 했나?” (132∼133쪽)
- “얘, 똑바로 앉아서 제대로 하렴.” “재미없어요.”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야. 뭐든지 만들 수 있어야지. 네가 어머니가 됐을 때 아이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잖니?” (146∼147쪽)
- “기다려 봐라. 이걸 보면 알기가 쉽지. 보렴 티레케. 이게 우리 거다. 이 무늬는 6대조모님이 만드셨어. 두 색깔만 가지고도 참 화사하지? 꽃을 이렇게 수놓는 방법은 5대조모님이 생각하신 거란다. 이것 말고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멋있는 무늬를 많이 만드셨지. 다들 따라하고 그랬어. 고조모님은 이 포도무늬를 좋아하셔서, 수를 놓으실 때는 꼭 이게 들어갔단다. 이 무늬는 증조모님 거구나. 어느 것이나 밝고 산뜻하지? 당신께서도 참 재미있는 분이셨다.” “이걸 전부 증조할머님이 수놓으셨어요?” “그렇지.” “……. 전부 기억하세요?” “기억하다 마다.” (151∼154쪽)

 


 한겨레는 예부터 어떤 ‘신랑 이야기’와 ‘신부 이야기’를 빚었을까 궁금합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어떤 보금자리에서 어떤 꿈을 키우면서 저마다 앞날을 꿈꾸었을까 궁금합니다.

 

 임금님이 없고, 관료도 계급도 땅임자도, 자질구레한 신분이나 권력이란 없이 사랑스레 얼크러졌을 지난 어느 날, 이 한겨레는 예부터 어떤 사랑을 빚는 살림살이를 일구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려고 군대를 키우지 않던 지난 어느 날, 무기를 만들어 이웃마을을 잡아먹으려고 하지 않던 지난 어느 날, 이 한겨레는 어떠한 사랑과 어떠한 꿈과 어떠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아름다이 보살폈을는지 궁금합니다.

 

 옛날 옛적 한겨레는 옷 한 벌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까요. 옛날 옛적 한겨레는 집 한 채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까요. 옛날 옛적 한겨레는 밥 한 그릇 어떻게 흙을 일구어 얻은 다음 지었을까요.

 

 아름답게 살아가는 마을에서는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꿈을 키우면서 아름답게 아이를 낳고 돌보는 살림살이에 온마음 쏟았겠지요. 평화를 지키는 힘은 군대나 무기가 아니라, 평화로운 넋과 말과 삶입니다. 평화를 누리는 힘은 경제개발이나 산업화가 아니라, 평화로운 땀과 꿈과 사랑입니다. (4345.1.29.해.ㅎㄲㅅㄱ)


― 신부 이야기 2 (모리 카오루 글·그림,김완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0.9.23./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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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희망 - <월든>의 작가 소로우가 들려주는 숲의 언어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씨앗
 [환경책 읽기 28] 헨리 데이빗 소로우, 《씨앗의 희망》

 


- 책이름 : 씨앗의 희망
- 글 : 헨리 데이빗 소로우
- 옮긴이 : 이한중
- 펴낸곳 : 갈라파고스 (2004.5.18.)
- 책값 : 9800원

 


 (1) 나무씨앗, 사람씨앗


 내가 심은 나무라서 더 어여쁠 수 없습니다. 내가 심지 않은 나무라서 함부로 꺾어도 되지 않습니다.

 

 내가 심은 나무에는 내 사랑이 곱게 스며들어 기쁘고, 내가 심지 않은 나무라 하지만 이 나무들을 처음 심은 이들 사랑이 곱게 배어서 반갑습니다. 내가 심은 나무는 나뿐 아니라 내 둘레 모두한테 좋은 웃음이고, 내가 심지 않은 나무는 나한테까지 좋은 선물입니다.

 

 내가 심는 나무에는 내 사랑을 담습니다. 나와 내 살붙이와 내 동무와 내 이웃이 함께 내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내 이웃이 심은 나무는 내 이웃 사랑이 스며, 이 사랑이 내 이웃을 비롯한 뭇사람한테 고루 퍼집니다.


.. 풀 속에 돋아난 이끼처럼 보이던 작은 생명들은 나무들로 자라서 2백 년은 거뜬히 살 것이다 … 비단처럼 곱게 반짝이는 잎(씨앗의 섬세한 솜털 낙하산에게는 안성맞춤인)은 아기 왕자를 눕혀 두고 흔들어 주는 비단 테를 두른 요람 같다. 씨앗은 이렇게 매끈매끈한 천장 아래에 마른 채로 잘 보관되어 있다. 궂은 날씨에 오랫동안 닳아버린 거친 바깥 부분만 보면 이끼 가득한 지붕 같다. 그러니 길가의 흙에 내려앉는, 그저 여름 끝에 나오는 갈색의 낡은 것으로만 알았던 이것은 사실 귀한 보물이 든 작은 상자인 것이다 ..  (27, 116쪽)


 우리 집 뒤꼍에서 자라는 모과나무를 들여다봅니다. 우리가 심은 모과나무가 아닙니다. 우리 이웃 할아버지가 심은 모과나무입니다. 아마 이웃 할아버지가 조금 더 젊은 할아버지였을 적에 심은 모과나무였을 텐데, 이웃 할아버지는 이 모과나무를 심어 꽃을 보고 열매를 봅니다. 이웃 할아버지가 심은 모과나무 한 그루 뒤꼍에서 자라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고마이 모과꽃과 모과열매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겨울에는 가지마다 자그맣게 올라온 새눈을 바라보며, 이 새눈이 싱그러이 피어날 봄을 기다립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사랑을 심습니다. 고이고이 자라날 사랑을 나무씨앗 하나에 담아 심습니다. 나무씨앗은 어린나무로 크고 어른나무로 우뚝 섭니다. 조그마한 나무씨앗 한 알이 우람한 어른나무로 자라기까지는 퍽 오래 걸립니다. 오래오래 살아갈 나무인 만큼, 어른나무로 우뚝 서기까지는 꽤 오랜 나날이 걸리겠지요.

 

 가만히 보면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아주 조그마한 사람씨앗이 어머니 몸속에서 열 달을 자랍니다. 어머니 몸속에서 나온 뒤로도 갓난쟁이를 거치고 어린이를 거쳐 푸름이로 자라면서 비로소 씩씩한 젊은이로 우뚝 서요. 한 해 다섯 해 열 해 스무 해에 걸쳐 씩씩하고 튼튼한 어른으로 거듭납니다. 곧, 사람씨앗이 싱그러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나날을 들여야 하듯, 나무씨앗 또한 싱그러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나날을 들여야 해요.

 

 하루아침에 꽃을 피우는 나무는 없어요. 하루아침에 열매를 맺는 나무 또한 없어요. 하루아침에 꽃을 피우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루아침에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나요.

 

 목숨을 낳아 목숨을 돌보면서 목숨을 잇는 일이 거룩하다면, 오직 하나뿐인 목숨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목숨이 어여삐 빛을 내면서 싱그러이 사랑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씨앗이나 사람씨앗 모두 어여삐 빛을 냅니다. 우뚝 선 나무와 사람 모두 싱그러이 사랑을 나눕니다.

 숲은 나무가 있어 아름답습니다. 지구별은 사람이 있어 아름답습니다.


.. 나는 처음에 이 바위가 어떻게 강물과 기슭 사이에 끼어들었나 궁금했는데, 사실 이 느릅나무들이 무사히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이 바위 덕택이다. 바위는 떠다니던 씨앗을 붙잡은 다음 싹이 터서 자라는 어린나무들을 보호했고, 지금은 나무들이 자랄 수 있도록 흙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먼 옛날 목처지에 굴러온 둥근 바위는 결국 한 무리의 나무를 자라게 했고, 지금은 그 나무들의 잎에 가려 모습을 감추고 있다 ..  (67쪽)


 아름다운 숲이지만, 돈을 바라며 함부로 베거나 망가뜨리면서 무너지는 숲이고 맙니다.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돈을 꾀하며 아무렇게나 뒹굴면서 망가지는 사람이고 맙니다.

 

 숲은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가꾸며 스스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이 숲에 돈벌이 꾀하는 사람들 손길이 퍼지면서 그예 망가집니다. 사람은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가꾸며 스스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돈벌이에 홀리는 또다른 사람들 손길에 휘둘리거나 휩쓸리면서 그만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애써 가꾸어야 살아나는 숲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힘써 가르쳐야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숲은 숲 스스로 오래도록 이어온 사랑과 목숨을 스스로 돌볼 수 있을 때에 싱그러이 살아나며 숨쉽니다. 사람은 사람 스스로 먼먼 옛날부터 이어온 사랑과 목숨을 스스로 깨달아 보살필 수 있을 때에 싱그러이 살아나며 숨쉬어요.

 

 헬리콥터로 ‘벌레 잡는 약’을 뿌려야 숲을 지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따로 솎아베기를 해야 나무가 잘 자라지 않습니다. 숲 스스로 나무를 다스리고, 나무 스스로 씨앗을 건사해요.

 

 학교에 보내야 삶을 배우지 않습니다. 회사를 다녀야 사랑을 나누지 않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가슴속에 자리한 빛줄기를 알아채면서 곱게 어루만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스스로 일구는 삶을 바라봅니다. 사람들 누구나 마음속에 모신 꿈을 북돋울 때에 바야흐로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누립니다.


.. 나는 작은키참나무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벌목꾼이 보기에는 쓸모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가장 흥미로운 나무 중 하나며, 흰자작나무와 마찬가지로 뉴잉글랜드와는 떼놓을 수 없는 나무다 … 어떤 씨앗은 우리로서는 현미경으로나 봐야 할 정도로 작지만 그들에게는 엄연히 하나의 견과다 ..  (193∼194, 197∼198쪽)


 나무는 찬바람을 맞으며 겨울을 납니다. 나무는 한겨울에도 따순 햇살을 받아먹으며 씩씩하게 섭니다. 나무는 흐드러진 별빛을 받으며 저녁에 잠듭니다. 나무는 뭇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새벽을 열고, 들판을 가득 채운 풀들이 바람 따라 일렁이는 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한낮을 함께 즐깁니다.

 

 사람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꿈과 사랑을 먹으며 마음을 살찌웁니다. 사람은 어버이와 함께 땀흘려 움직이고 일하며 몸을 다스립니다. 두 다리는 흙을 밟습니다. 두 손은 흙을 만집니다. 두 눈은 흙을 바라봅니다. 코로는 흙내음을 맡습니다. 두 귀로는 흙에 깃든 목숨들이 내는 소리를 듣습니다. 살갗으로는 햇살 머금는 흙이 얼마나 촉촉한가를 느낍니다.

 

 나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려 하는가를 말없이 지켜봅니다. 사람은 나무들이 어떻게 숲을 이루어 아름다운 누리를 이루는가를 조용히 지켜봅니다.

 


 (2) 나무꽃, 사람꽃


 한 사람이 살아가자면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 사람이 목숨을 잇자면 푸성귀이든 고기이든 곡식이든 얼마나 먹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 사람 목숨을 잇는 먹을거리는 얼마만한 땅에서 거둘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넓은 집에서 살림살이를 얼마나 많이 건사하면서 살아야 아름답다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농부는 감자를 캐고 옥수수를 따면서도 이웃 숲 속에서 다람쥐가 자기보다 더 부지런히 리기다소나무의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 후손을 퍼뜨릴 씨앗이 필요하다면, 자연은 다람쥐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만 가지고도 만족하는 모양이다 … 웅덩이 곁에서 자라는 도깨비바늘이나 험한 절벽 위에서 자라기도 하는 도둑놈의갈고리는 자기들의 씨앗을 운반해 줄 짐승이나 사람이 그리로 지나갈지 어쩌면 그리도 잘 알까! ..  (31∼32, 35, 127쪽)


 우람하게 자란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냅니다. 느티나무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냅니다. 뽕나무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냅니다. 단풍나무도, 후박나무도, 살구나무도, 오얏나무도, 포도나무도, 모두 꽃과 열매와 씨앗을 내요.

 

 우람한 나무 둘레에 흙땅이 있으면, 이 흙땅에는 어김없이 씨앗이 떨어져 씩씩하게 뿌리를 내립니다. 우람한 그늘 밑이라 햇살 한 조각 받아먹기 만만하지 않지만,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다섯 해 차츰차츰 뿌리를 깊이 내리고 줄기를 높이 올립니다.

 

 나무는 사람들이 따로 어린나무를 심어야 자라지 않습니다. 나무는 처음부터 어미나무가 씨앗을 내어 흙에 떨구면서 퍼져 자랍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낳아 돌봅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먹으며 자라는데, 따로 학교를 다니거나 회사를 다녀야 어른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햇살을 먹고 흙에 뿌리내리며 바람과 물을 마시며 자라는 나무이듯, 햇살 같은 사랑과 흙 같은 믿음과 물 같은 꿈과 바람 같은 이야기를 어버이한테서 받아먹으며 자라는 아이입니다.


.. 여새와 울새는 야생 벚나무가 어디 있는지 죄다 알고 있는 것 같다. 벌이나 나비를 구경하려면 엉겅퀴를 찾아보면 되듯이 이 새들은 벚나무를 찾아보면 틀림없이 구경할 수 있다 … 우리는 적어도 씨앗을 심지 않고서는 정원에 무언가를 자라게 하기 어렵다. 그러니 무언가가 저절로 씨앗을 퍼뜨리는 것을 보면 놀라게 마련이다 ..  (93, 105쪽)


 햇살을 받아먹지 못하는 나무는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흙이랑 물이랑 바람을 받아먹지 못하는 나무는 그만 시들시들 말라죽고 맙니다.

 

 햇살 같은 사랑을 받아먹지 못하는 아이는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흙이랑 물이랑 바람 같은 꿈과 믿음과 이야기를 받아먹지 못하는 아이는 그만 시들시들 아픔과 생채기가 쌓이고 맙니다.

 

 햇살을 받아먹으면서 가슴속에 햇살을 품는 나무입니다. 이 햇살을 꽃으로 피우고 열매로 맺고 씨로 내는 나무입니다.

 

 햇살 같은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가슴속에 햇살 같은 사랑을 품는 아이입니다. 이 햇살 같은 사랑을 꽃 같은 꿈으로 길어올리고, 꽃다운 믿음으로 나누며, 꽃처럼 곱게 이야기보따리 펼치는 아이입니다.


.. 땅 자체가 바로 곡물창고이자 온상(묘상)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지표면을 거대한 생명체의 표피로 여기는 것이다 … 소나무가 잘리기 전에 씨앗은 이웃의 들판으로 날아가서 후손을 퍼뜨렸다. 가장자리를 따라 작은 소나무들이 온통 싹을 틔운 것이다. 이 소나무들은 너무 빨리 빽빽하게 자라서 이곳 사람들조차 7.5미터 길이의 무성한 소나무숲을 갈아엎거나 베어내지 못했다. 더욱이 이들 소나무 사이에 섞인 씨앗을 맺는 큰 참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좁고 긴 땅은 흔히 그러하듯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묘목이 가득했다 ..  (204, 224쪽)


 나무는 제 어미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씨앗에는 어미나무 온 사랑이 감돕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이어받습니다. 참으로 자그마한 씨앗에는 어버이 온 사랑이 깃듭니다.

 

 나무로 살아갈 모든 꿈과 사랑이 녹아드는 씨앗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나누거나 펼칠 모든 꿈과 사랑이 녹아드는 씨앗입니다. 씨앗으로 갈무리하는 나무 넋이고, 씨앗으로 그러모으는 사람 얼입니다.

 

 꽃이 피기를 꿈꾸는 씨앗입니다. 새롭게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씨앗입니다. 다시금 씨앗을 내며 빛나는 목숨을 나누고픈 씨앗입니다. 씨앗은 새로운 씨앗을 낳지만, 새로운 씨앗만 낳지 않아요. 씨앗은 먼저 꽃을 피워요. 꽃을 피우기까지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잎과 줄기를 내요. 푸르디푸른 잎사귀로 온누리를 푸르게 가꿔요. 씨앗은 꽃을 피우면서 천천히 열매를 맺어요. 씨앗은 새로운 씨앗으로 퍼지기 앞서, 달콤한 밥을 나누어요.

 

 나무꽃뿐 아니라 사람꽃도 이와 같아요. 어버이가 맺는 사랑씨앗은 아이들이라는 새 목숨만 낳지 않아요. 어버이부터 스스로 아름다이 일구는 삶꽃을 피워요. 어버이부터 스스로 착하게 돌보는 꿈을 맺어요. 어버이부터 스스로 참다이 아끼는 보금자리를 뿌리내려요. 아이라고 하는 사랑꽃·사람꽃·꿈꽃이란 어버이 스스로 누리는 고운 삶꽃이 밑바탕이 되어 태어나요.

 


 (3) 《씨앗의 희망》 읽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이 일군 책씨인 《씨앗의 희망》(갈라파고스,2004)을 읽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이 내놓은 책 가운데 《월든》이나 《시민의 저항》은 꽤나 읽히지만, 《씨앗의 희망》은 그닥 읽히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 왜 이토록 아름다운 책씨는 옳게 읽히지 못하는가 궁금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한국에서 《씨앗의 희망》이 읽히기는 몹시 어렵겠구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무와 눈높이를 맞추고 들풀과 삶높이를 맞추는 이야기를 천천히 적바림하는 《씨앗의 희망》은 지식이나 정보로는 읽을 수 없어요. 지식을 얻거나 정보를 챙기려는 마음으로는 이 책을 읽을 수 없어요.

 

 자연 지식을 얻자 하면서 읽는 《씨앗의 희망》이 아니에요. 시골살이를 노래하는 《월든》이 아니에요. 도시 물질문명을 거스르자는 뜻을 보여주는 《시민의 저항》이 아니에요.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스스로 누리면서 작은 씨앗을 뿌리려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삶을 고치거나 손질하려는 뜻이 있을 때에, 비로소 이 책에 깃든 사랑씨를 맞아들일 수 있어요. 사랑씨를 맞아들이며 내 삶을 바꾸려고 해야 바야흐로 이 책을 따사로이 품을 수 있어요.


.. 박주가리 하나가 믿음을 갖고서 씨앗을 무르익게 하고 있는데 세상이 이번 여름에 끝장날 것이라는 대니얼이나 밀러의 예언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 자연은 풀 베는 사람에게 잎은 내줄지언정 씨앗만은 지켜내는 것이다. 홍수가 와서 씨앗을 날라다 주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  (124, 133쪽)


 좋은 책은 추천도서가 아닙니다. 좋은 책은 고전이나 명작이 아닙니다. 좋은 책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아닙니다.

 

 좋은 책이라 하는 이름을 붙이자면, 나 스스로 좋은 삶으로 거듭나도록 이끄는 책이어야 합니다. 좋은 책이라 하는 이름은, 나 스스로 좋은 삶을 사랑하도록 돕는 책에 붙습니다.


.. 놀랍고 원통하게도 스스로 그 땅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린 참나무들을 모조리 태워 버리고 겨울에 호밀을 뿌려 버린 사실을 알았다! 그는 틀림없이 1∼2년 뒤에는 참나무가 다시 자라도록 내버려둔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호밀이라도 조금 심으면 분명히 돈이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234∼235쪽)


 이 나라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옳게 읽히지 못하는 일은 슬프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널리 읽힌다 한들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씨앗의 희망》을 옳게 읽기 앞서, 사람들 스스로 내 좋은 삶을 옳게 읽으며 새로 태어날 수 있어야 기쁩니다. 《씨앗의 희망》을 널리 읽기 앞서, 사람들 스스로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꿈을 나누어야 즐거운 나날인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 반갑습니다.

 

 책 하나 더 읽는대서 나쁘지 않아요. 책 하나 안 읽었대서 나쁘지 않아요.

 

 삶을 사랑할 때에 좋아요. 사랑할 만한 삶을 착하고 참다이 느껴 맑고 밝게 어깨동무할 때에 좋아요. (4345.1.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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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1-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과 열매 냄새가 가득해지시겠네요.
못 생겼다고 하지만, 정말 향이 좋죠.. 그윽하네요.

글을 읽으면서 햇살 비치는 숲길을 상상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한겨울, 문득 좋네요. ^^

파란놀 2012-01-28 13:23   좋아요 0 | URL
한겨울은 한겨울대로 좋은 나날이기에
새봄은 새봄대로 좋을 수 있어요~

페크pek0501 2012-01-2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라 하는 이름을 붙이자면, 나 스스로 좋은 삶으로 거듭나도록 이끄는 책이어야 합니다. 좋은 책이라 하는 이름은, 나 스스로 좋은 삶을 사랑하도록 돕는 책에 붙습니다." - 이것, 당연한 말씀인데도, 제게 누군가가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인가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할 자신이 없네요. 그래서 한 수 배워 갑니다. ㅋ

파란놀 2012-01-29 06:33   좋아요 0 | URL
모두들 잘 아는 이야기일 테지만,
너무 바쁘거나 매이는 삶 때문에
그만 잊고 말아서
스스로 좋은 책하고 멀어지지 않느냐 싶어요.

oren 2012-01-29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의 글을 읽어보니 어린 시절 시골에 살면서 온갖 풀과 나무와 씨앗들과 함께 뒹굴고 놀던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립게 느껴집니다.

그 시절엔 나무도 많이 심고, 또 가끔씩 열매나 과실을 얻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기도 하고, 밤이나 대추를 많이 얻을 욕심으로 나뭇가지도 많이 꺾었던 기억도 나네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와 제대로 교감을 나누지도 못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에서의 무미건조한 삶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고, 그런 삶을 너무나 당연시해 왔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게 됩니다.

파란놀 2012-01-29 06:36   좋아요 0 | URL
언제나라도 느낄 때가 가장 이를 때라고 했어요.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풀 나무 꽃 흙 햇살 바람 물
아낄 수 있는 길을
저마다 예쁘게 찾아나서면 즐거우리라 믿어요.

oren 2013-10-1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초에 쓰신 글이지만 오늘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방금 쓰신 글처럼 읽혀서 좋습니다.
 


 국립공원 마을에 화력발전소 짓지 마셔요

 


 왜 자꾸 시골에 화력발전소를 지으려 할까요? 왜 자꾸 시골에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려 할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 아버지로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참말 시골에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발전소를 지여야 하는 까닭이 무언가 깊디깊이 헤아려 봅니다.

 

 아무래도 시골은 땅값이 쌀 테지요. 아무래도 시골은 반대하는 목소리가 낮겠지요. 아무래도 시골에 발전소 짓겠다 하면 서울이나 큰도시에 있는 언론사에서 취재를 나오는 일도 드물겠지요.

 

 시골사람이 전기를 많이 써서 시골에 발전소를 짓는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 식구도 시골에서 살아가지만, 우리 집이나 이웃 어르신들은 전기를 얼마 쓰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 시골사람은 무척 적기도 한 만큼,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에서는 햇볕힘으로 고흥군 전기를 모두 댈 만큼 얻을 수 있어요. 전남 고흥은 굳이 화력발전소이든 원자력발전소이든 덧없습니다. 햇볕힘 얻는 전지판을 더 놓으면 돼요. 집집마다 지붕에 햇볕힘 전지판을 붙이면 됩니다.

 

 포스코건설에서 전남 고흥이라는 데에 2020년까지 화력발전소를 짓겠다고 합니다. 포스코건설은 처음에는 포항시에서 화력발전소를 지으려다가 주민 반대에 계획을 접었다고 하는데(2011년), 전남 고흥에 7조 원을 들여 화력발전소를 짓는다고 해요(2012년). 전남 해남에는 다른 건설회사에서 이 또한 7조 원을 들여 화력발전소를 지으려 한답니다.

 

 고흥도 해남도 전기가 모자라서 이곳에 발전소를 짓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전라남도 큰도시에서 쓸 전기가 모자라다고 여길 테고, 어쩌면, 부산이나 서울에서 쓸 전기를 이곳에서 뽑아내자고 여기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서울이나 인천이나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나 대전이나 울산이나, 이곳 큰도시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스스로 짓지 않습니다. 서울 초·중·고등학교 급식이나 대학교 구내식당 먹을거리는 ‘서울에서 흙을 일구어 얻은 곡식이나 푸성귀나 고기’로 마련하지 않습니다. 모두 ‘서울 아닌 시골’에서 흙을 일구어 얻은 곡식이나 푸성귀나 고기로 마련합니다. 서울에서 아파트를 짓거나 길을 닦을 때에, 모래나 흙이나 자갈은 어디에서 가져올까요. 서울에서 얻을까요, 시골에서 가져올까요.

 

 지구환경이 크게 무너진다고 하면서, 쿠바에 있는 생태도시 아바나를 눈여겨본다고들 합니다. 쿠바 아바나가 얼마나 생태도시다운가는 제가 아바나를 찾아가지 못했으니 모릅니다만, 생태도시라 할 때에는 100%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더라도 웬만큼 자급자족을 한다는 뜻입니다. 아바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는 밥을 아바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텃밭을 일구어 얻는다는 뜻입니다.

 

 시골땅 전남 고흥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식구들 깃든 전남 고흥이 아름다운 시골마을로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7조 원을 들여 화력발전소를 짓는다 할 때에, ‘특별지원 가산금’이 ‘건설비 5/1000에다가 세수입이랑 초기건설비 15/1000’라 합니다. 건설회사에서 내놓은 자료에 ‘3525억 원이 고흥군에 주어지’며 ‘고용창출 연인원 432만 명’이라고 밝힌다는데, 이 어마어마한 돈과 이 어마어마한 고용창출을 놓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문득 무척 궁금해요. 화력발전소를 짓는다면서 왜 3525억 원이나 고흥군에 주는가요? 화력발전소가 얼마나 ‘좋은(?)’ 시설이기에 3525억 원을 거저로 고흥군에 준다고 하나요? 고용창출 432만 명이라면, 발전소를 짓는 막일꾼 고용창출이 432만 명이나 된다는 뜻인가요? 고흥군 사람들은 거의 모두 흙을 일구거나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데, 고작 7만 명이 될락 말락 하는 작은 군 모든 사람들이 몽땅 막일꾼으로 일하더라도 432만 명은 턱도 없는데, 1만 명 고용창출도 아닌 432만 명 고용창출이 된다 한들 무엇이 어떻게 발돋움할는지 궁금합니다.

 

 전남 고흥군에 짓는다는 화력발전소는 ‘나로도 우주센터’ 곁이요, 이곳 봉래면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입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나로도 우주센터부터 국립공원에 짓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지만 짓고야 말았습니다. 고흥군 봉래면 바닷가가 국립공원이라 한다면, 군과 정부는 이곳 국립공원을 어떻게 돌보고 어떻게 지켜야 걸맞을까를 제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화력발전소를 지어 3525억을 거머쥐면, 이 돈으로 자연 터전을 지키는 데 쓸 마음인가요.

 

 아무래도, 해가 갈수록 전기가 모자라기에 발전소를 더 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싶습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이렇게 걱정할 만합니다. 그러면, 왜 전기가 모자란지를 생각해야겠어요. 우리는 전기를 왜 이토록 많이 써야 하나요. 발전소를 더 지으려고 애쓰기보다, 전기를 덜 쓰고 석유를 덜 쓰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나요. 자가용을 줄이거나 자가용하고 헤어져야 하지 않나요. 자꾸자꾸 도시로 몰려들어 돈만 더 벌어들이는 삶길이 아니라, 내 사랑스러운 식구들 먹을거리부터 내 손으로 땀흘려 일구는 착한 삶길을 찾아야 하지 않나요.

 

 화력발전소를 짓는다는 7조 원은 7조 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화력발전소에서 땔 석탄값을 생각해야 합니다. 화력발전소에서 나올 매연과 쓰레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화력발전소를 짓는 중장비와 짐차가 내뿜을 배기가스를 생각해야 합니다. 화력발전소로 석탄을 실어나를 배가 오가며 바다에 흘릴 석유와 매연을 생각해야 합니다.

 

 화력발전소가 한 번 서면 7조 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전기를 얻는다며 들여야 하는 돈과 뒷치레가 너무나 큽니다. 7조 원이면 햇볕힘 얻는 전지판을 몇 개쯤 붙일 수 있을까요. 앞으로 화력발전소에 들일 자원값에다가 환경피해분담금을 햇볕힘 얻는 전지판을 집집마다 붙이는 쪽으로 쓴다면, 이 나라 대한민국은 얼마나 깨끗하며 환하게 빛나는 삶터로 거듭날까요. 고흥군이 눈먼 3525억 원이 아니라, 공장도 고속도로도 골프장도 기차역도 없이 정갈한 삶터로 이어가도록 더 힘쓴다면, 지구별 사람들은 쿠바 아바나만 생태도시로 바라보지 않고, 전남 고흥 또한 아름다운 생태마을로 여겨 숱한 사람들 발길이 찾아들어 저절로 지역살림을 발돋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돈에 홀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돈에 파묻히지 않으면 좋겠어요. 돈을 바라보며 우리 보금자리를 망가뜨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랑스레 살아갈 터전을 사랑스레 보살피면 좋겠어요. 사람은 종이돈이든 쇠돈이든 우걱우걱 씹어먹을 수 없고, 국을 끓여 먹지도 못해요. 사람은 맑고 기름진 흙에 씨앗을 심어 얻은 열매와 푸성귀와 곡식을 먹을 뿐이에요. 맑고 기름진 흙을 화력발전소로 더럽히고, 맑고 파란 바다를 화력발전소 매연과 쓰레기로 더럽힌다면,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어른들부터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요. 한국땅 깨끗한 삶터에는 끔찍한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를 끝없이 지은 다음, 깨끗하다 하는 머나먼 나라에서 거둔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값싸게 사들여서 돈을 치러 사먹어야 하나요. (4345.1.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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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26) 어제의 1 : 어제의 카레

 

.. “냉장고에서 약간 굳은 어제의 카레를 따뜻한 밥 위에 얹어, 녹여 가면서 먹는 거지.” ..  《아베 야로/조은정 옮김-심야식당 (1)》(미우,2008) 23쪽

 

 ‘약간(若干)’은 ‘조금’이나 ‘살짝’으로 다듬습니다. “먹는 거지”는 “먹지”나 “먹는 셈이지”나 “먹는단 말이지”로 손봅니다.

 

 어제의 카레를
→ 어제 만든 카레를
→ 어제 먹고 남은 카레를
→ 어제 미리 만든 카레를
→ 어제 해 놓은 카레를
 …

 

 만화영화 〈아따맘마〉를 한국말로 보다가 일본말로 보며 아래쪽에 뜨는 글을 읽으니, ‘한글로 옮긴 글’ 가운데 적잖이 ‘일본말’인 대목이 보입니다. 〈아따맘마〉뿐 아니라 다른 만화영화도 이와 비슷할 텐데, 사람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한글로 옮긴 글’이나 ‘한국말로 옮긴 말’이 참말 한국말인지, 껍데기만 한국말인지, 일본말을 고스란히 옮긴 말인지를 살피지 못합니다. 살필 겨를이 없다 할 만하고, 살필 마음이 없는지 모르며, 살필 까닭을 못 찾는지 모릅니다.

 

 일본 만화책 《심야식당》을 한국말로 옮긴 책에서 읽는 글 또한, 이 글이 옹글게 쓴 한국말인가 아닌가를 헤아리는 사람은 몹시 드물거나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지 않으랴 싶어요. 아니, ‘심야’와 ‘식당’이라는 낱말을 이렇게 한글로 적바림하면 한국말이라 할 수 있는가를 돌아보는 사람은 있기나 할는지요.

 

 이제 ‘심야(深夜)’ 같은 한자말은 아주 익숙히 쓰는 한국말로 삼을 만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심야’는 남달리 쓸 만한 낱말은 아니에요. 그저 “깊은 밤”을 뜻할 뿐입니다. “깊은 밤”을 가리키는 한국말은 ‘한밤’이에요. 그러니까, 만화책 《심야식당》을 옳게 한국말로 옮기자면, 먼저 “심야식당” 아닌 “한밤식당”이어야 합니다.

 

 ‘식당(食堂)’ 같은 한자말 또한 널리 쓰는 한국말로 삼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식당’이란 딱히 새롭거나 뜻깊은 낱말이 아니에요. 그저 “밥집”이나 “밥가게”를 가리킬 뿐입니다. 곧, 만화책 《심야식당》을 찬찬히 한국말로 헤아리자면, 바야흐로 “한밤 밥집”이나 “한밤 밥가게”인 셈이에요.

 

 어제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서 살짝 굳힌 카레
 어제 미리 해 놓고 냉장고에서 하루쯤 굳힌 카레
 어제 해서 냉장고에서 하루 굳힌 카레
 …

 

 오늘날 사람들은 ‘나이트’나 ‘미드나이트’ 같은 영어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온갖 영어를 온갖 자리에 버젓이 씁니다.

 

 오늘날 사람들 말버릇은 먼 옛날부터 고이 이어졌다고 느낍니다. 먼 옛날부터 한국말 아닌 중국말을 이웃 한국사람이랑 생각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버젓이 쓰던 흐름이 고스란히 이어졌으니, 지난날에는 중국말을 한국말인 듯 거들먹거리며 썼다면, 오늘날에는 영어를 한국말인 양 거들먹거리며 씁니다. 지난날에는 중국말을 마치 한국말을 하듯 아무렇지 않게 썼다면, 오늘날에는 영어를 꼭 한국말이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 않게 써요.

 

 어떻게 살아가야 아름다운 내 나날인가를 생각할 때에, 내 삶과 넋과 말이 아름다이 꽃피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며 사랑할 때에 기쁜 내 하루인가를 돌아보아야, 내 삶과 넋과 말에 사랑이 깃드는 꿈을 어떻게 건사할 수 있는가를 깨닫습니다.

 

 생각을 잃으니 말을 잃습니다. 사랑을 잊으니 말을 잊습니다. 생각을 찾으며 말을 찾습니다. 사랑을 빛낼 때에 말을 빛냅니다. (4345.1.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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