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2.1.31.
 : 시골집 달밤 촉촉한 길

 


- 해 떨어진 저녁나절 첫째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에 다녀오기로 한다. 오늘은 집에서 저녁밥 차리지 말고 바깥밥을 먹자고 생각한다. 시골마을 면내에서 사먹을 만한 바깥밥은 마땅하지 않아, 중국집과 닭집과 빵집, 이 셋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 중국집과 닭집은 전화로 시킬 수 있고, 빵집은 자전거를 타고 다녀와야 한다. 어느 쪽으로 할까 하다가 빵집으로 고른다.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실한 지 퍽 되었다고 느껴, 한겨울 1월 저녁나절이지만 자전거를 몰고 싶다. 겨울철 자전거마실은 찬바람 듬뿍 마셔야 하지만, 전라남도 고흥은 한겨울에도 꽤 따스하다. 오늘 저녁은 바람이 그닥 안 부니까, 낮까지 비가 흩뿌려 길바닥이 젖었어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 예전에 쓰던 수레에 달린 등불을 뗀다. 새로 쓰는 수레에 등불을 달려 한다. 그런데, 등불 받침대가 톡 하고 부러진다. 드라이버로 받침대를 풀어 새 수레에 달려고 조이다가 이 모양이 되다니. 자전거에 붙이는 등불 받침대가 쇠붙이라면, 또는 스테인리스라면 얼마나 좋을까. 플라스틱은 너무 잘 부러진다. 하는 수 없이 등불만 수레 뒤쪽에 유리테이프로 붙인다.

 

- 밤길을 달린다. 한겨울이라 하지만 이곳은 늦가을과 같다. 살짝 서늘하면서 손이나 얼굴이 얼어붙지는 않는다. 풀벌레 소리는 듣지 못하나, 자전거 달리는 소리만 듣는다. 수레에 탄 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저기 달이 떴네. 구름이가 깜깜하지 말라고 달이 하얗네.” 하고 말한다. 자전거가 달리니 “달이 따라오네.” 하고 말한다.

 

- 굽이진 길에서 뒷거울로 아이를 살피다가 깜빡 굽이를 놓치며 미끄러질 뻔하다. 옆으로 미리 꺾어야 했는데, 등불 없는 시골길을 달리면서 굽이에서 미리 돌지 못한 탓에 서둘러 꺾다가 살짝 삐끗했다. 마주 달리는 자동차이든 뒤따르는 자동차이든 하나도 없기 때문에 건너편 찻길까지 넘어가면서 오른돌이를 한다.

 

- 수레에 앉은 아이가 노래를 부른다. 등불 없이 깜깜한 시골길에 아이 노랫소리가 울려퍼진다. 혼자서 마실을 한다면 그냥 싱싱 빨리 달리겠지만, 이처럼 아이를 태운 저녁나절 마실길이니 느긋하게 달리면서 노래를 즐길 수 있다.

 

- 면에 닿아 빵집에서 빵을 산다. 가게에 들러 마실거리를 산다. 집으로 천천히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등불은 없다. 아이는 이 깊은 시골 저녁 자전거마실을 어떻게 느끼려나. 우리 시골에서는 이맘때, 그러니까 저녁 일곱 시를 살짝 넘은 이맘때만 되어도 그냥 깜깜한 밤이다. 도시에서라면 저녁 일곱 시는 한창 불 밝히며 번쩍번쩍할 때라 하겠지. 아침을 빨리 열고 저녁을 일찍 닫는 시골 터전이, 풀과 나무와 사람과 들짐승 모두한테 가장 걸맞다 할 보금자리가 아니겠느냐고 새삼스레 생각한다.

 

- 집으로 돌아가는 깜깜한 찻길에 마주 달리는 자동차를 둘 만난다. 이 자동차는 어쩐 일로 이 외진 시골을 구비구비 돌며 달릴까. 그나저나, 이 자동차 두 대는 등불을 위로 치켜든 채 달린다. 앞에 자전거가 마주 달리는 줄 뻔히 알면서 등불을 밑으로 내리지 않는다. 왼손으로 눈을 가린다. 마주 달리는 자동차가 불을 치켜들면 자전거를 모는 이는 길을 볼 수 없다. 길이 더 깜깜해진다. 밤에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마주 달리는 자동차나 자전거가 있을 때에 마땅히 불을 내리깔아야 한다. 걷는 사람이 있을 때에도 불을 내리깔아야 한다. 마주 달리는 자전거와 사람을 가장 헤아리는 이라면 아예 불을 끈다. 예전에 여덟아홉 시간쯤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리다 보면, 아주 드물게 ‘등불을 끈 채 마주 달린’ 자동차를 만났다. 이처럼 마음을 살뜰히 쓰는 운전자는 한국에서 만나기 너무 힘든가. 아니, 자동차를 모는 이로서 밤에 등불을 내리까는 일은 ‘밑마음’이 아닐까. 등불을 내리깔 줄 모르는 운전자라 한다면, 운전면허를 취소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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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희 님이 쓰거나 옮긴 책을 되도록 거의 모두 사서 읽는다. 아직 내가 못 찾은 번역책이 있을는지 모르나, 사진 이야기를 오롯이 들려주는 참 반가우며 고마운 분이다. 이분이 스스로 연 안목 출판사 사진책은 참 남다르다. 지난겨울에 새로운 책 하나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책이 무엇인가는 오늘 비로소 알았다. 즐겁게 장만해서 즐겁게 읽고 즐겁게 널리널리 소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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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책- 한 사진가와 살아온 14권의 사진책들
박태희 지음 / 안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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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2-0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스트로 담아두셔서 땡스투를 할 수가 없어요.
페이퍼로 써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박태희님이 쓰거나 옮긴 책을 다 사서 읽어요^^

파란놀 2012-02-02 10:19   좋아요 0 | URL
아, 이번 주에 주문하려고 여기에 이렇게 적었어요 ^^;;;
에구궁~
저는 땡스투를 안 받아도 괜찮답니다~
목록을 죽 살피니,
저도 여태껏 박태희 님 책을 모두 사서 읽었더라구요~
 

 

 산들보라 새근새근

 


 한낮, 졸음에 겨운 나머지 응애응애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어르며 돌아다니다가는 자리에 앉아 살살 달래니, 아버지 무릎에서 눈을 살살 감고 잠듭니다. 고요히 잠든 아이를 무릎에 더 누입니다. 무릎이 뻑적지근할 즈음 아이를 안고 자리에 눕힙니다. 아이가 깨지 않습니다. 이불을 여밉니다. 따순 햇살 한 조각 아이 누운 자리로 예쁘게 스며듭니다. (4345.1.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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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31 13:46   좋아요 0 | URL
화아~! 정말 사랑스럽군요.
정말 예쁘시겠어요.
저렇게 살 땐 예쁜데 깨어나면 좀 덜 예쁘시죠?ㅋㅋ

파란놀 2012-01-31 14:05   좋아요 0 | URL
음... ^^;;
두 시간쯤 자고 일어나면 예쁩지요!!

마녀고양이 2012-01-31 14:12   좋아요 0 | URL
보라 얼굴, 정말 편안하네...
아빠 생각해서 두시간 쯤 자고 일어나길! ^^

파란놀 2012-01-31 18:13   좋아요 0 | URL
오늘은 어김없이 1분도 안 자고 두 번이나 일어나더군요... ㅠ.ㅜ
 
커피 한 잔 더 3
야마카와 나오토 지음, 오지은 옮김 / 세미콜론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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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하루
 [만화책 즐겨읽기 104] 야마카와 나오토, 《커피 한 잔 더 (3)》

 


 무언가 답답하니 말을 안 합니다. 무언가 꽁 하고 맺히니 말문을 못 엽니다. 무언가 괴롭기에 말을 안 합니다. 무언가 슬픈 나머지 말길을 못 틉니다.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이 나라에서 내가 쓰는 말은 한겨레말입니다. 내가 오늘 쓰는 말이랑 오백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쓰는 말은 꼭 같지 않을 테지만 모두 한겨레말입니다. 천오백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나 이천오백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쓰는 말 또한 서로 같지 않을 테지만 모두 한겨레말이에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겨레는 언제부터 말을 나누었을까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겨레는 언제부터 입으로 생각을 털어놓으며 살림을 꾸렸을까요. 십만 해쯤 앞서는, 백만 해쯤 앞서는, 어떤 겨레가 어떤 말로 어떤 생각을 주고받았을까요.


- “저기, 괜찮으세요? 어디 안 좋으신 데라도?” “……. 그러는 자네는 잘 진나? 상태는 괜찮은가?” “……. 좋은 밤 되세요∼.” “음냐 음냐.” (10쪽)


 말이 넘치는 온누리입니다. 글이 춤추는 지구별입니다. 날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지고, 나날이 갖가지 책이 태어납니다.

 

 나는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말을 내놓을까요. 내 이웃이나 동무는 어떤 삶을 즐기면서 어떤 글을 쓸까요.

 

 서로서로 생각을 나누려고 말을 하나요. 서로서로 사랑을 꽃피우려고 글을 쓰나요. 다 함께 따순 마음이 되고자 말을 하나요. 모두 함께 좋은 꿈을 이루고자 글을 쓰나요.


- “부르는 소리 전혀 안 들렸어? 우산 써.” “요다 형.” “아무 말도 안 하고 연습 중에 나가 버리면 어쩌나.” “죄송합니다.” “그 가방은 뭐야.” “돌아갈 생각이었나?” “죄송합니다.” (25쪽)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하루입니다. 좋은 이야기이든 나쁜 이야기이든, 반가운 이야기이든 고달픈 이야기이든, 기쁜 이야기이든 슬픈 이야기이든, 서로서로 한 마디 두 마디 주고받는 하루입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웁니다. 어버이는 둘레 이웃이나 동무한테서 새로운 말을 듣고 배웁니다. 새로 겪는 삶은 새로 일구는 말이 됩니다. 새로 마주하는 삶터는 새로 샘솟는 글이 됩니다.

 

 날마다 빨래를 하더라도 날마다 새로운 빨래입니다. 날마다 호미질을 하더라도 날마다 새로운 호미질입니다. 날마다 자전거를 몰거나 두 다리로 걷더라도, 날마다 새로운 자전거 타기가 되고 날마다 새로운 걷기가 돼요.

 

 서른 해를 살아온 사람은 서른 해하고 하루를 더 살면, 서른 해하고 하루를 더 산 만큼 이야기를 합니다. 이틀을 더 살면 이틀을 더 살아낸 이야기를 합니다. 하루를 즐거이 누렸으면 하루를 즐거이 누린 만큼 말꽃을 피웁니다. 하루를 슬프게 보냈으면 하루를 슬프게 보낸 만큼 말잎이 돋습니다. 즐거워도 말이고 슬퍼도 말입니다. 튼튼해도 말이며, 아파도 말이에요.


-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그래도 요다 형, 형님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전에 말했잖아요.” “다 사정이 있다. 그것보다 더 뭐 사왔나 보자. 포테이토칩, 커피? 너 인마, 남의 집에 올 때는 좀더 생각을 하고 사오란 말이야. 잘 먹겠다만.” (33쪽)


 사람들은 생각을 말로 빚습니다. 사람들은 생각 아닌 꿍꿍이나 속셈이나 꾐수 따위를 말로 빚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말로 짓습니다. 사람들은 사랑 아닌 미움이나 시샘이나 따돌림이나 들볶음 따위로 말을 짓기도 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떤 무늬 어떤 결 어떤 내음 어떤 빛깔 어떤 소리일 때에 나부터 즐겁고 내 이웃과 동무 모두 즐거이 받아들일까요. 내가 듣는 말은 어떤 무늬 어떤 결 어떤 내음 어떤 빛깔 어떤 소리일 때에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부터 즐거우면서 내게 즐거운 선물을 나누어 줄까요.


-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팔꽃의 묘목을 받았다. 이가라시 형이 매일 아침 물을 주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이가라시 형, 담배도 피우지 않았더랬지.’ (80쪽)


 야마카와 나오토 님 만화책 《커피 한 잔 더》(세미콜론,2010) 셋째 권을 읽습니다. 꼭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되는 만화책이라 셋째 권부터 읽습니다.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만화책은 아니고,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만화책 또한 아닙니다. 커피가 되어도 좋고 맥주가 되어도 좋으며 맹물이 되어도 좋습니다. 아무것 없어도 돼요. 서로서로 예쁘게 살아가고픈 꿈으로 예쁘게 나눌 이야기를 생각하는 나날을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랑은 억지스러울 수 없습니다. 삶은 억지스러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억지스러울 수 없습니다.

 배움이나 가르침은 억지스러울 수 없습니다. 일이나 놀이는 억지스러울 수 없습니다. 밥이나 집이나 옷 모두 억지스러울 수 없어요.

 

 정치를 하든 경제를 하든 문학을 하든 억지스럽다면 정치도 경제도 문학도 아닙니다. 신문기사이든 방송소식이든 늘 같습니다. 억지스레 만들 때에는 억지스러울 뿐이에요. 아무런 이야기가 샘솟지 않아요. 돈을 버는 자리에서든 자격증을 따는 곳에서든 억지스러운 틀에 매인다면 좋은 삶을 일구지 못해요. 틀에 갇힌 돈과 틀에 박힌 재주로는 아무런 꿈이 피어나지 않아요.

 

 수수하게 살아가며 수수하게 어우러지는 수수한 사람입니다. 수수한 이야기로 수수한 나날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밥 한 그릇이 수수하고, 옷 한 벌이 수수하며, 집 한 채가 수수합니다. 수수한 햇살과 수수한 흙과 수수한 바람과 수수한 물이 얼크러지며 모든 아름다운 목숨이 태어납니다. (4345.1.31.불.ㅎㄲㅅㄱ)


― 커피 한 잔 더 3 (야마카와 나오토 글·그림,오지은 옮김,세미콜론 펴냄,2010.7.16./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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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3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만화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억지스러운 게 넘 많잖아요.
나의원 성형수술비 550만원밖에 안 썼다는 것도 억지스럽고.
더구나 딸래미랑쓴 게 그 정도라면 믿겠습니까?
자연스러움조차 억지스럽게 짜맞추듯이 하는 세상이니...ㅠ

파란놀 2012-01-31 14:06   좋아요 0 | URL
억지로 꾸미려 하는 이야기 아니고
수수하게 펼치는 이야기라서
꽤 포근하게 읽을 만한 만화로구나 싶어요.

아쉽다고 한다면,
왜 한국 만화쟁이는 이렇게 수수한 멋 담는
만화를 못 그리느냐... 하는 대목이에요... ㅠ.ㅜ
 
너구리와 도둑쥐 내 친구는 그림책
오오토모 야스오 글 그림 / 한림출판사 / 1989년 9월
평점 :
절판



 훔치는 마음과 빼앗는 마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30] 오토모 야스오, 《너구리와 도둑쥐》(한림출판사,1989)

 


 누군가한테서 무언가 빼앗으면, 빼앗은 사람은 어떤 삶을 누리고 빼앗긴 사람은 어떤 삶을 이을까 헤아려 봅니다. 예부터 때린 사람은 잠을 못 이루고, 맞은 사람은 두 발을 뻗고 잔다 했는데, 빼앗은 사람은 잠을 못 이루고, 빼앗긴 사람은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을까 곱씹어 봅니다.

 

 빼앗으려 하는 사람은 무언가 안 가졌기에 빼앗을 마음일까요. 빼앗기는 사람은 무언가 가졌으니 빼앗겨야 하나요. 제대로 못 가졌거나 넉넉히 못 가졌기에 다른 사람한테서 무언가 빼앗아야 비로소 배를 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요.

 

 빼앗기는 사람은 빼앗기더라도 삶을 이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빼앗는 사람은 자꾸자꾸 빼앗고 또 빼앗아야 삶을 누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빼앗으며 돈과 이름과 힘을 누리는 이들은, 이 돈과 이름과 힘으로 얼마나 좋은 삶을 누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가 가진 무언가를 훔치는 이들은, 이렇게 훔쳐서 그야말로 기쁘거나 즐겁거나 반갑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 “앗! 누가 집 안에 들어왔었구나!” “감자자루가 없어졌어요!” “콩도 마구 흘려놓고 갔어요!” ..  (4쪽)


 너무 배고픈 나머지 이제 견디지 못해 훔치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고프지 않을 뿐더러 배고픔을 겪지 않았으나, 버릇처럼 훔치거나 빼앗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이 세다며 윽박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이 없기에 주눅들며 올려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있어서 돈으로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벌고 다시 벌어도 돈이 그예 줄줄 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토모 야스오 님이 빚은 그림책 《너구리와 도둑쥐》(한림출판사,1989)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야기 얼거리는 산뜻하고 재미나다 할 만하지만, 아이들한테 이 그림책을 읽을 만한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이 지구별에 워낙 훔치는 사람 많고 워낙 빼앗기는 사람 많아, 참 슬프며 안타까운 일이 끝없이 벌어집니다. 도둑쥐가 훔친 감자랑 콩은 아무것 아닙니다. 도둑쥐한테 감자와 콩을 빼앗긴 너구리는 아무것 아니에요. 이처럼 서로 사이좋게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지구별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요.

 

 나는 어릴 적부터 ‘소값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내 어린 나날을 보낸 1980년대부터 두 아이와 살아가는 2010년대까지 해마다 빠짐없이 ‘소값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1980년대 첫무렵부터 2010년대 첫무렵까지 하나하나 살피면, 1980년대는 1990년대보다 값이 나았다 할 만하고, 1990년대는 2000년대보다 값이 나았다 할 만해요. 다만, 숫자로 치면 이렇다뿐, 해마다 자꾸 떨어지는 소값이니까 ‘예전을 생각한들 하나도 나은 삶’이지 않아요.

 

 새로 찾아올 해에는, 또 다시 찾아올 해에는, 이 다음이나 그 다음 해에는 소값이 얼마나 더 떨어질는지 모르는데, 올해에는 숫젖소 한 마리 값이 고작 1만 원까지 떨어졌어요. 소 한 마리 값 1만 원이란 그야말로 웃기지 않은 값이요 터무니없는 값이지만, 거짓말이 아닌 값이에요.

 

 누가 이렇게 소값을 떨어뜨릴까요. 이렇게 소값이 떨어지면 누가 뒤에서 돈을 챙길까요. 이렇게 소값이 떨어지면 누가 눈물을 흘릴까요. 어느 한쪽이 돈을 번다면 어느 한쪽은 돈을 잃겠지요. 다 함께 돈을 버는 삶이 아니라, 한쪽은 빼앗기고 한쪽은 빼앗는 삶이 더 골 깊어지겠지요.


.. 화가 난 너구리 가족은 뛰어가 쥐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  (13쪽)


 그림책에서 너구리는 감자농사와 콩농사를 짓습니다. 그림책에서 쥐는 너구리가 지은 감자랑 콩을 훔칩니다. 쥐는 이밖에도 너구리네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훔칩니다.

 

 자연 터전에서 살피면, 너구리는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자연 터전에서 살피면 쥐는 놀잇감이나 뜨개실을 훔치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그린 분은 빗대어 말하려고 너구리와 쥐를 들었겠지요.

 

 그림책을 읽으며 어쩐지 내키지 않습니다. 아니, 이 그림책에서 너구리와 쥐를 바꾸어 놓아야 비로소 우리 터전하고 걸맞다 할 만한 이야기, 곧 ‘우화’가 되지 않으랴 싶어요.

 

 작은 쥐들이 서로서로 두레를 하며 애써 감자랑 콩을 지었더니, 너구리 식구들이 이 감자랑 콩을 훔쳐 가는 줄거리일 때에 비로소 걸맞으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이들은 ‘작은 쥐’처럼 ‘힘이 여리고 이름이 없으며 돈이 없’는 목숨입니다. 소값을 비롯해 돼지값이나 쌀값이나 배추값이 떨어지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흙일꾼입니다. 도시에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나 쌀이나 배추를 사먹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샛장수나 농협이나 정부기관이 무너지거나 쪼들린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요. 흙일꾼은 농약을 마시며 숨을 끊지만, 농협 일꾼이나 샛장수 가운데 스스로 숨을 끊을 만큼 가난에 시달리거나 ‘애써 흘린 땀방울을 빼앗기는’ 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어요.


.. 얼마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엄마너구리가 말했습니다. “좋은 수가 있어요. 감자를 연못으로 옮겨 주세요.” 모두가 힘을 모아 감자를 날랐고 엄마너구리는 연못에서 감자를 씻었습니다 ..  (19쪽)


 이 그림책은 얼거리가 달라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힘없는 쥐들이 지은 곡식을 너구리가 훔치고, 쫄쫄 굶으며 괴로운 쥐들이 너구리를 찾아가서는, 슬기를 맑게 빛내어 너구리를 꾸짖고, 너구리를 꾸짖은 다음 ‘더 슬기로운 사랑’으로 너구리한테 ‘너구리 너희들이 손수 흙을 일구면 싸울 일도 아플 일도 없지 않겠니?’ 하고 타이르는 얼거리로 거듭나야 한다고 느낍니다.

 

 꼭 아이들한테 읽히는 그림책이라서 이렇게 얼거리를 바꾸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 눈길로도, 여느 어른 눈길로도, ‘포식자 너구리’가 ‘여린 목숨 쥐’를 너그러이 봐준다는 흐름은 어딘가 얄궂구나 싶어요. 마치 임금님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굽어살핀다는 느낌이에요.


.. “집을 짓겠다고?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그러자면 우선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하는 설계도가 필요하지.” 아빠너구리가 한 마디 하자 쥐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했습니다 ..  (23쪽)


 너구리이든 쥐이든 사람이든, 좋은 생각을 꽃피우면서 좋은 삶을 일굽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가멸찬 사람이든, 밝은 꿈을 키우면서 밝은 삶을 나눕니다. 어린이이든 어른이든, 따순 사랑을 보듬으면서 따순 삶을 누려요.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서로서로 기쁜 하루입니다. 서로서로 손을 맞잡으면서 고마운 나날입니다.

 

 밥 한 술 나누는 사랑을 아이들과 누리고 싶어요. 천천히 함께 호미질을 하면서 밭을 일구고 싶어요.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으려는 어른들은 생각과 마음과 꿈과 사랑을 조금 더 따스하면서 너그럽고 포근하고 어여삐 북돋우면 좋겠어요. (4345.1.31.불.ㅎㄲㅅㄱ)


― 너구리와 도둑쥐 (오토모 야스오 글·그림,이영준 옮김,한림출판사,1989.9.3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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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2-02-03 09:34   좋아요 0 | URL
너구리와 쥐의 입장이 바뀌여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ㅋㅋ

저는 이 그림책 엄청 좋아해요. 쥐가 너구리의 음식을 훔치고 너구리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래도 외면하지 않고 쥐가 자립할 수 있도록 농사 짓는 법을, 그리고 쥐의 집을 지어주잖아요. 특히나 저는 쥐의 설계도 같은 집은 넘 맘에 들던데요.

파란놀 2012-02-03 11:37   좋아요 0 | URL
네, 일본사람은 너구리를 퍽 좋아하잖아요.
너구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땅님(하느님)과 비슷한 신으로
섬기기도 하고요.

폼포코 만화영화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보다 앞서, <게게로의 기타로>에서
이런 대목이 곧잘 나타나요.

그래서, 이 그림책에서 너구리는 피해를 받으면서도
너그러이 사랑을 베푸는 결로 나오는구나 싶더군요.
그렇지만, 이 그림책이 한국에서 번역되어
한국 아이들한테 읽힐 때에는
일본에서 너구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화를
하나도 모르거나 하나도 살피지 않을 테니,
이러한 테두리에서 한국 어른들이
새롭게 빚는 그림책이 있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림책 완성도는 참 훌륭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