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꽃 글 한 조각

 


  내가 인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일을 떠올립니다. 열두 해 학교를 다니며 내가 알아보는 꽃은 몇 가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도시 한복판에 흐드러지는 들꽃은 퍽 드뭅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보내느라 학교 바깥 골목꽃이 피고 지더라도 들여다볼 겨를이 없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교과서에 목련을 노래하는 시가 나올 때에 비로소 목련 이름을 듣습니다. 그러나 글로 적힌 목련을 읊을 뿐, 목련꽃을 두 눈으로 들여다본다거나 목련꽃이 피는 목련나무가 어떤 씨앗에서 비롯해 어떤 나무로 크는가를 찬찬히 살피며 배우지 못합니다. 교과서에 진달래 노래하는 시가 실릴 때에 비로소 진달래 이름을 듣습니다. 그러나 막상 도시 한복판에 진달래가 피고 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도시를 떠나 들판이나 멧등성이로 나아가야 겨우 진달래를 바라볼 만하지만, 진달래가 흐드러지는 아침이나 한낮에 교실 아닌 들판을 뒹굴 수 있는 아이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시 이런 학교라 하더라도, 민들레만큼은 어디에서나 뿌리를 내리며 노란 꽃봉우리를 터뜨립니다. 민들레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봅니다. 다만, 민들레가 꽃봉우리 터뜨리기 앞서까지는 민들레풀인지 아닌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꽃송이가 오르고 꽃봉우리가 터질 무렵 드디어 알아봅니다.


  아이와 함께 들길을 거닐다가, 민들레 곁에서 나란히 피고 지는 제비꽃을 바라봅니다. 앉은뱅이꽃 두 가지가 나란히 피고 집니다. 제비꽃이 스무 날 즈음 먼저 피었고, 이제 민들레꽃이 어깨동무를 합니다. 한동안 두 꽃을 바라보다가 일어섭니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제비꽃이 피고 지더라도 제비꽃을 볼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간다면 제비꽃을 보지도 못하지만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제비꽃을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할 때에는 제비꽃 이야기를 떠올리거나 쓰지 못합니다. 제비꽃을 모를 뿐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동안에는 제비꽃을 사랑할 수 없고, 제비꽃을 그릴 수 없어요. 누군가 제비꽃을 노래하더라도 가슴으로 훅 끼치도록 맞아들이지 못해요.


  아는 만큼 바라볼 수 있지 않습니다. 살아내어 몸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새길 때에 비로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라볼 때에 알 수 있지 않습니다. 바라보며 마음을 열고 사랑을 피워낼 때에 바야흐로 알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꽃이 피고 새롭게 바람이 불며 새롭게 햇살이 드리웁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꽃은 피고 집니다. 누가 국회의원이 되든 바람이 불고 멎습니다. 누가 시장이나 군수가 되든 햇살은 온누리 곱게 비추며 따사로이 보듬습니다. (4345.4.8.해.ㅎㄲㅅㄱ)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주 2012-04-09 00:15   좋아요 0 | URL
저는 '앉은뱅이 꽃'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제비꽃'이라고 부르는 걸 더 좋아해요.앉은뱅이라고 부르면 너무 가엽잖아요.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제비가 좋아요^^
우리가 어떻게 부르든 꽃은 저혼자 참 이쁘게도 피지요~~^^

파란놀 2012-04-09 17:26   좋아요 0 | URL
앉은뱅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꿈을 꾸면서
홀가분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해요.

멀리멀리 꽃씨를 날려
이듬해에는
온 곳에 꽃누리를 이루거든요~

2012-04-09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2-04-09 15:09   좋아요 0 | URL
음.. 글쎄... 둘 다 똑같은 듯하네요 @.@

2012-04-25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2-04-25 17:0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글에서는 그러할 수 있지만,
입으로는 흔히 그렇게 말해 버릇해서요.

곰곰이 생각해 볼게요~ ^^
 


 시외버스 시집

 


  두 아이와 함께 순천 나들이. 마실거리·먹을거리·아이들 옷가지 담긴 커다란 가방에 얇고 작으며 가벼운 시집 하나 챙긴다. 둘째 아이는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러 사십 분 남짓 면소재지로 걸어가는 동안 내 품에서 잠든다. 첫째 아이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에 닿아 순천으로 넘어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나서 내 무릎에서 잠든다. 첫째를 눕혀 재우고 한참 있다가 시집을 꺼내어 들춘다. 싯말 몇 가락 읊는다. 골이 띵해 더 읽지 못하고 가방에 넣는다. 몇 줄이라도 읽었으니 기쁘다 여기자 생각한다. 돌아보면, 어버이 품과 무릎에서 잠드는 아이들이 온통 싯말이요 이야기책이며 사랑덩어리라 할 만하다. 나는 두 아이 어버이가 되어 이 아이들 작고 따스한 품을 날마다 느낀다. 작고 아리따운 얼굴로 짓는 웃음을 언제나 받아먹는다. 작고 튼튼한 몸뚱이로 짓는 꿈을 한결같이 살피며 내 삶을 이룬다.


  나들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는 둘째가 내 무릎에 누워 달게 잔다. 고흥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는 너무 거칠어 책을 꺼낼 엄두를 못 낸다. 1시간 달릴 길을 자그마치 45분 만에 달린다. 멀미도 나지만, 새근새근 자는 아이가 깰까 싶어 이리 흔들 저리 덜컹 하는 시외버스에서 아이를 다독이느라 진땀을 뺀다.


  좋은 하루가 지나간다. 좋은 하루가 새로 열린다. 좋은 하루를 새삼스레 누린다. 고단한 아이들은 아침 느즈막히 더 눕혀 재운다. 새 하루는 좀 늦게 열고 좀 천천히 맞아들이자. (4345.4.8.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강낭콩 분도그림우화 22
에드몽드 세샹 지음, 이미림 옮김 / 분도출판사 / 1984년 8월
평점 :
품절


누가 내 사진을 찍을까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5 : 에드몽드 세샹, 《강남콩》(분도출판사,1984)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어른이 어린이와 푸름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학교 어린이나 푸름이가 학교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을 사진으로 찍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이든 중학교이든 고등학교이든, 또 대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어느 학교에서든 학교 선생님이나 어른이 학생인 어린이나 푸름이를 사진으로 찍을 뿐입니다.


  거의 언제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찍습니다. 거의 늘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가르칩니다. 거의 노상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살펴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어른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어떤 이야기를 엮고 싶을까요. 사진기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은 어떠한 꿈과 사랑을 사진 한 장에 싣고 싶을까요.


  글을 쓰는 어른은, 그림을 그리는 어른은, 노래를 부르는 어른은, 밥을 짓는 어른은, 아이들 입는 옷을 만드는 어른은, 저마다 어떠한 꿈을 꾸고 어떠한 사랑을 담을까요.


  아이들이 먹는 과자를 만드는 공장 일꾼인 어른은 이 과자를 먹을 아이들이 어떠한 먹을거리를 아끼면서 어떠한 삶을 사랑하기를 바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세우고 교과서를 마련하는 어른은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 동안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일놀이를 누리는 슬기로운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라거나 꾀할까 궁금합니다.


  사진으로 일구는 이야기란 무엇일까요. 아이들 웃는 얼굴을 사진으로 담는다면, 이 웃음 어린 사진 하나는 어떤 이야기를 빚을까요. 아이들 슬픈 얼굴을 사진으로 옮긴다면, 이 눈물 서린 사진 하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조그마한 사진책 《강남콩》(분도출판사,1984)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책 《강남콩》은 에드몽드 세샹 님이 ‘연출해서 엮은’ 이야기입니다. 햇볕 한 줌 제대로 들지 않는 작고 가난한 살림을 마지막으로 꾸리는 할머니가 강낭콩 씨앗 하나를 심어 돌보며 누리는 사랑을 찬찬히 보여주는 사진 이야기입니다. 강낭콩이든 배추이든 상추이든, 작은 꽃그릇에 씨앗 하나 심어 돌보는 사람은 퍽 많습니다. 어디에서나 어렵잖이 마주할 만한 모습입니다. 따로 ‘연출해서 엮지’ 않아도 얼마든지 얻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콩씨 하나 심으며 날마다 들여다보면, 또, 사진쟁이 스스로 가난한 골목집 할머니와 사귀거나 함께 지내면서 날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더없이 살가우며 참으로 포근한 사진책 하나 태어날 만하리라 느껴요.


  사진책 《강남콩》은 연출해서 엮은 사진이기 때문에 어떤 줄거리 하나 산뜻하게 보여줍니다. 사진책 《강남콩》은 연출해서 엮은 사진인 탓에 할머니가 콩씨 하나 갈무리해서 심는 삶에 감도는 사랑을 ‘할머니 목소리로 들을’ 수는 없어요. 곧, 사진을 찍은 사람 목소리는 찬찬히 듣지만, 사진으로 찍힌 사람 목소리는 하나도 들을 수 없습니다. 사진책 《강남콩》에 나오는 할머니는 그저 배우요 연기자요 모델이기만 합니다.


  나는 《강남콩》이 아쉽거나 모자라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이 사진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즐기다가 문득 한 가지가 떠오를 뿐입니다. 어른들이 찍는 아이들 사진이란 얼마나 ‘아이 삶’을 아이 눈높이와 마음결과 꿈길에 따라 보여준다 할 만할까요. 어른들이 담는 아이들 사진이란 어느 만큼 ‘아이 이야기’를 아이 키높이와 마음밭과 사랑길에 따라 들려준다 할 만할까요.


  이제는 판이 끊겨 다시 만나기 힘든 사진책 《강남콩》입니다만, 아이들이 이 사진책을 들여다보면 ‘아, 나도 콩씨 심어 콩을 얻어 콩밥 먹은 적 있어요.’ 하고 말하는 아이가 있고, ‘아, 나도 콩씨 심어 기르고 싶어.’ 하고 말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참으로 포근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참말 따사로운 이야기를 꽃피우는 사진책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빛그림은 고이거나 멈추지 않거든요. 사진은, 움직이는 사람을 움직이는 결로 보여줍니다. 사진은, 살아가는 사람을 살아가는 결로 드러냅니다. 사진은, 꿈꾸는 사람을 꿈꾸는 결로 빛냅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아이들은 따로 몸짓을 꾸미지 않더라도 사랑스레 보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나는 아이들과 오래도록 마주하며 지내다가 문득문득 사진기를 살며시 들어 단추를 누릅니다. 하루에 한 장씩 차곡차곡 이야기가 쌓입니다. 콩알 하나 꽃그릇에 심고는 날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결이 사랑스레 찾아듭니다. 사진기를 곁에 둔 나는 콩줄기와 콩꽃과 콩잎이 맑고 푸르게 빛나는 모습을 살갗으로 느끼다가는 슬며시 사진 한 장 얻습니다.


  따순 햇살처럼 내리쬐는 사랑을 담는 사진입니다. 고운 바람처럼 싱그러운 꿈을 옮기는 사진입니다. 좋은 삶처럼 좋은 이야기 샘솟는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사진입니다.
 (4345.4.8.해.ㅎㄲㅅㄱ)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2-04-09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순 햇살처럼 내리쬐는 사랑을 담는 사진입니다." - 저도 이런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특히 어떤 대상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찍었을 때, 그런 게 느껴져요.

잘 읽었어요. 그런데 된장님, 강남콩은 강낭콩을 잘못 쓴 걸까요?

파란놀 2012-04-09 15:07   좋아요 0 | URL
'중국 강남'에서 자라던 콩이라서 '강남콩'이에요.

"강남 갔던 제비 돌아온다"는 속담 아시지요?
그 강남이 바로 이 강남콩입니다.

그런데, 1990년부터 국립국어원에서
갑자기 맞춤법을 바꾸었어요.
앞 'ㅇ' 받침과 뒷 'ㅇ' 받침 사이에
'ㅁ' 받침이 들어가니 소리내기 나쁘다 해서
뚱딴지처럼 낱말이 바뀌었어요.

'강남콩'이 옳은 말이지만,
이제는 엉터리 맞춤대로 '강낭콩'으로 적어야 합니다...

페크pek0501 2012-04-09 15:1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안타까운 일이군요.
 

‘live’는 ‘生방송’인가
[말사랑·글꽃·삶빛 4] 바로바로 생각하는 말

 


  오늘날 초등학교가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이던 1980년대 첫무렵, 어린 나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해피라면’을 90원 치르고 사다 먹었습니다. 이무렵 라면은 오늘날처럼 ‘엠에스지’를 안 쓴다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라면도 화학조미료와 화학성분이 많이 깃들지만, 이무렵에는 어떤 화학조미료와 화학성분을 쓰는지 따로 밝히지 않았어요. 이와 같은 라면을 거의 생각 없이 사다 먹었기에, 이제 어른이 된 내가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이들한테 아토피가 여러모로 나타날밖에 없다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내 어릴 적을 떠올리면 나와 동무들은 ‘두드러기’가 곧잘 나타났습니다. 이를테면 꽃가루라든지 닭고기라든지 마늘이라든지 어떤 먹을거리에 두드러기를 보이는 아이가 있었어요. 내가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생으로 지낼 무렵, ‘두드러기’라는 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무렵 사람들은 이즈음 더 도드라지게 나타나거나 더 모질게 드러나는 두드러기는 여느 ‘두드러기’라 할 수 없고 ‘알레르기(Allergie)’나 ‘알러지’라고 따로 가리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두 가지는 똑같다 할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국어사전을 뒤적여 두 낱말을 찾아보았을 때에는, 두 낱말을 굳이 달리 써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해요. 왜냐하면, ‘두드러기’를 영어로 옮기거나 독일말로 옮기면 어떻게 적어야 하느냐를 떠올린다면, 궁금함은 쉽게 풀려요.


  서양사람은 ‘수레’를 가리키는 영어 ‘car’를 오늘날 싱싱 내달리는 자동차한테도 똑같이 붙여요. 한국사람이 ‘자동차’라 할 때에는 1930년대에 처음 들어온 탈거리한테뿐 아니라 1960년대 탈거리나 2010년대 탈거리한테도 똑같이 ‘자동차’예요. 더 맵시나거나 더 빠르다 해서 ‘자동차’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아요. 기름 먹는 자동차가 아니라 물이나 햇볕을 먹는 자동차가 나오더라도 똑같이 ‘자동차’예요. 곧, 낱말 하나를 고스란히 살리면서 새로운 모습과 구실과 쓰임새를 더 넓고 깊게 담아내는 셈입니다.


  한국말 ‘두드러기’는 새 모습과 구실과 쓰임새를 나타내는 자리에 쓸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낱말뜻을 넓히면 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으면 ‘두드러기’ 같은 낱말은 오늘날 아이들 병치레를 가리키기에 걸맞을 만한 낱말이 될 수 없어요. 시나브로 사라지다가는 국어사전에 자그마한 자국으로 남는 낱말로 머물겠지요.


  나는 어릴 적에 ‘해피라면’에서 ‘해피’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둘레 어른 가운데 이 라면 이름을 따지거나 나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둘레 어른이 따지는 이야기는 딱 하나, ‘소고기라면’이 맞느냐 ‘쇠고기라면’이 맞느냐였어요.


  어른들이 두 가지 이름을 나란히 쓰니 아이인 나로서는 헷갈리기만 합니다. 참말 어느 쪽이 맞을까요?


  어른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이름을 붙이지 않으며 툭탁거리셨는데, ‘소고기’이든 ‘쇠고기’이든 둘 모두 틀리다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소의 고기”라 해서 “소 + 의 + 고기” 꼴로 ‘쇠고기’로 적을 수 있습니다. 한국말은 ‘-의’를 애써 안 붙이며 새말을 빚기도 하는 만큼 “소 + (-의) + 고기” 꼴로 ‘소고기’로 적어도 돼요. 말이든 돼지이든 양이든 그냥 말고기, 돼지고기, 양고기라고만 가리켜요.


  더 생각해 보면, 염소를 잡아서 삶는 고기라 하면 ‘염소고기’라 합니다. ‘염쇠고기’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시금 생각합니다. ‘닭고기’라고 말하지 ‘닭의고기’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달걀(북녘은 닭알)’이라 하지 ‘닭의알’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오리알’ 아닌 ‘오리의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들풀 가운데 ‘닭의장풀’이 있어요. 흔히 ‘달개비’라 일컫는 풀인데, 닭장 밑에서도 잘 자란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더군요. 가만히 보면 올바르지 않다 싶은 ‘닭의장풀’ 꼴이에요. 왜냐하면 닭장 밑에서 잘 자라는 풀이라 하면 ‘닭의 장(에서 자라는) 풀’이 아닌 ‘닭장(에서 자라는) 풀’이라 이름을 붙여야 올바르거든요. 시골 흙일꾼이든 도시내기이든 ‘닭장’이라고 말하지 ‘닭의장’이나 ‘닭의 장’처럼 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씀이를 헤아리면,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살피거나 바르게 쓰지 못한다 할 만합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높이 여기거나 꼼꼼히 따진다지만, 막상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할 수 있어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한국말 문법’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한국말 씀씀이를 옳고 바르며 알맞게 배운다 하기 힘들다고 느껴요. 사랑스레 쓰는 말이 못 되고 슬프게 깎아내리는 말입니다. 아름다이 쓰는 글이 못 되고 아무렇게나 쓰는 글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생각합니다. 왜 라면공장 어른들은 ‘행복(幸福)라면’이라 이름을 못 붙이고 ‘해피(happy)라면’이라 이름을 붙였을까요. 아니, 왜 라면공장 어른들은 ‘즐거운라면’처럼 처음부터 한국말로 곱게 이름을 붙이는 길을 걷지 못했을까요. 누런쌀로 빚는 기름을 만드는 어느 공장에서는 ‘라온현미유’를 내놓습니다. ‘현미(玄米)’는 쌀겨 가운데 겉껍질만 벗겨 누렇게 보이는 쌀을 가리킵니다. 곧 ‘누런쌀’입니다. 속껍질까지 벗겨 하얗게 보이는 쌀은 흰쌀, 이른바 ‘백미(白米)’입니다. ‘현미유(-油)’란 현미로 짠 기름, 그러니까 누런쌀로 짠 기름인 셈입니다. 한국말로 이름을 붙이자면 ‘누런쌀기름’입니다. 포도씨로 기름을 짜면 ‘포도씨기름’이에요. 누런쌀로 기름을 짜 마련한 물건에 ‘라온’이라는 이름은 붙이지만, 뒤따르는 낱말은 더 살뜰히 보듬지 못해요.


  ‘라온’은 ‘즐거운’을 뜻하는 한겨레 옛말입니다. 곧, ‘라온현미유’란 “즐거운누런쌀기름”을 뜻하는 셈입니다. 예전에 ‘참나무통맑은소주’라는 술이름이 한 번 태어난 적 있으니, 이처럼 말뜻과 말결을 고이 살리며 이름을 붙이면 대단히 어여쁘지만, 이렇게 이름을 붙이며 말빛과 말삶을 살찌우자고 생각하는 어른이 아주 적습니다.


  길을 걷다가 어느 빵집에서 길가에 내놓고 팔던 ‘바로빵’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날그날 바로바로 구워서 팔기에 ‘바로빵’이라 했어요. 이와 비슷한 꼴이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끓여 먹는다는 ‘즉석(卽席) 라면’이 있어요. 이른바 ‘즉석 식품’입니다. 어느 은행에서는 현금인출기를 ‘바로바로 코너’라고 일컫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돈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어릴 적 동네 동무들이 “야 지금 바로 나와!” 하면서 부른 적 있습니다. 1980년대 일인데, 동무들과 한창 골목에서 노는데, 만화영화라든지 프로야구라든지 사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 텔레비전에서 나오면 “바로 나와!” 하고 외치면서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서 보자고 했어요. 어른들도 으레 이런 말을 했어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 저기 바로 나오네!” 하고.


  나는 그때에나 요즈음에나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예전 동무들이나 어른들이 으레 톡톡 내뱉던 ‘바로’가 바로 ‘live’나 ‘生방송’을 일컫는 한 마디였습니다.


  일본사람은 영어 ‘live’를 한자를 빌어 ‘生放送’으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사람은 일본사람이 영어를 번역한 낱말을 글꼴만 한글로 적어 ‘생방송’이라 말합니다. 처음에는 ‘생방송’이라 하는 일본 한자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였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이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쓰면 나쁘다 하여 ‘현장 방송’으로 고쳐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국립국어원 국어사전 풀이를 살펴도 ‘생방송’은 바로잡아야 할 낱말로 다룹니다. 그렇지만,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생방송’을 ‘현장 방송’으로 고쳐쓰거나 바로잡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현장 방송’이라는 낱말이 썩 안 어울린다고 여겨 안 쓰거나 아예 눈길을 안 두기 때문일 텐데, 이러하다면 한국 방송국에 알맞을 만한 새 한국말을 지어야 하겠으나, 새 낱말을 지으려고 생각을 기울이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방송국 일꾼도 스스로 모르게 “자, 이제 바로 찍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마디에서 ‘바로’는 ‘현장(現場)’을 가리킵니다. ‘바로’는 ‘이곳’과 ‘이때’를 아울러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곧, 일본 한자말 ‘생방송’을 한국말답게 적바림하려 했다면 ‘현장 방송’보다는 ‘바로 방송’이라 적바림했어야 한결 걸맞았으리라 느껴요. 텔레비전 화면 한쪽에 ‘生’이나 ‘생’이나 ‘live’라는 낱말을 넣기보다는 ‘바로’라는 낱말을 넣으면 참 잘 어울립니다.


  다만, ‘바로’가 아무리 잘 어울린다 하더라도 이 낱말을 스스로 써 버릇하지 않으면 익숙하게 쓰기 어렵습니다. 여느 때에 제대로 이 낱말을 쓰지 않으면, 이 낱말 쓰임새가 얼마나 넓은지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알맞게 쓰지도 못합니다.


  생각을 할 때에 사랑스럽게 쓰는 말입니다. 생각을 기울일 때에 아름답게 빚는 말입니다. 생각을 펼칠 때에 슬기롭게 가다듬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생각하는 꿈이 없습니다. (4345.4.8.해.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페크pek0501 2012-04-09 15:16   좋아요 0 | URL
이 글을 보며 생각한 건데요, 이런 바른 한국말 사용은 몇몇 사람들이 애쓸 게 아니라
아예 방송국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전파력이 강할 것 같아요.

휴대폰이라는 말을 요즘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표현인 것 같아요. 휴대 라는 한국말과 폰이라는 영어의 합성어라서요. 그냥 영어로 핸드폰이든지 한국말로 휴대전화 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ㅋ

무엇보다 된장님처럼 우리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우선 과제이겠죠. ㅋ

파란놀 2012-04-09 17:24   좋아요 0 | URL
방송국은 시청율로 광고비를 벌어들여야 하니까,
말이든 넋이든 삶이든
옳게 바라보도록 애쓸 수 없는 얼거리예요.

그런데, 방송국뿐 아니라,
여느 자리 여느 사람들 또한
하루하루 밥벌이 일자리에 매달리면서
스스로 말과 넋과 삶을
사랑스레 보듬는 데에서
자꾸 동떨어지고 말아요...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ㄱ. 그림책을 헤아린다
 그림책이란
 그림책을 누가 읽을까
 그림책을 누가 만들까
 그림책을 읽는 어른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린이
 그림책에 담는 이야기
 그림책이 태어나는 밑바탕

 

ㄴ. 어린이 삶을 생각한다

ㄷ. 그림쟁이 넋을 돌아본다

ㄹ. 옛날 한국 그림책

 

그림책을 헤아린다
― 그림책이란

 


  그림책은 그림으로 이룬 책입니다. 오늘날 ‘그림책’이라 말하면, 으레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빚은 책으로 여깁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기 앞서까지만 하더라도 ‘그림책’이라는 낱말을 꺼내기 수월하지 않았고, 이러한 낱말을 받아들이는 어른이 썩 많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도 그림책이 나왔고, 한국에서도 그림책을 그리는 어른이 있었지만 아직 몇 분 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읽히기 몹시 힘들었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으레 ‘글로만 엮고 그림은 사이사이 곁들이는’ 동화책만 읽히면 된다고 여겨 버릇했거든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이들한테 동화책 읽히는 일도 아이들로서는 고맙게 여길 만했습니다. 1980년대나 1970년대에는 아이들 책이라 하면 흔히 ‘전집’만 생각했으니까요. 더욱이, 1970년대나 1960년대를 헤아리자면, 집안에 전집을 들여놓을 만한 살림이 되는 아이가 매우 적었어요. 돌이키면, 1960년대나 1950년대에는 아이들한테 ‘책을 읽힌다’는 일부터 꿈꾸기 어려웠구나 싶어요. 이무렵에는 ‘교과서 한 권 사 주기’조차 만만하지 않다고 여기던 살림이기 일쑤였어요.


  곧, 한국땅에서 아이들이 그림책을 누린 때는 2000년대부터라 할 만합니다. 1980년대까지는 거의 아무런 싹이 없었고, 1990년대에 비로소 싹이 조금씩 움트며 2000년대에 줄기가 부쩍 올랐다 할 만합니다.


  오늘날 둘레를 살피면 큰 책방에서 가장 널따랗게 자리를 얻는 데는 ‘교과서·참고서’ 다음으로 ‘어린이책’ 칸입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교과서와 참고서 자리가 가장 널따랗기 때문에 무척 슬프지만, 입시지옥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찌할 길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무튼, 어린이책 칸 가운데에서는 그림책이 가장 널따랗게 자리를 얻습니다. 그림책이 싹을 트고 줄기를 높이 올린 지 고작 스무 해가 안 된 한국 책마을이라 할 만한데, 그림책 마당은 아주 빨리 매우 넓게 퍼집니다.


  한국과 이웃한 일본은 그림책 마당이 꽤 일찍부터 열렸고, 몹시 넓고 깊게 뿌리내렸습니다. 일본만 돌아보더라도 ‘어린이책 전문서점’이 튼튼할 뿐 아니라, 어린이책을 빚는 크고작은 출판사가 아주 많습니다. 한국 출판사에서 내놓는 그림책 가운데 적잖은 부피를 일본 그림책이 차지합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유럽 같은 서양 또한 그림책 뿌리가 깊으며 그림책 마당이 넓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해마다 ‘좋은 그림책’을 뽑아서 상을 주기도 하며, 이렇게 상을 받는 그림책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지고 읽혀요.


  한국에서도 여러 해 앞서부터 ‘좋은 그림책’을 뽑아서 상을 주는 제도가 생깁니다. 아쉽다면 출판사마다 제가끔 마련한 상이기에 더 넓고 깊게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출판사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해요. 어린이책을 아끼고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어른과 어린이 모두)이 모여 해마다 새로 나오는 그림책 가운데 몇 가지를 손꼽으면서 북돋우는 자리가 있으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이만 한 밑바탕이 서자면 더 기다려야 걸맞다 싶기도 합니다. 너무 일찍, 또는 섣불리, ‘좋은 그림책 북돋우는 자리’만 마련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어른과 어린이 스스로 ‘그림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짚고 살펴야 한다고 느껴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림책은 그림으로 이룬 책입니다. 만화책은 만화로 이룬 책일 테고, 글책은 글로 이룬 책일 테지요. 사진은 사진으로 이룬 책이 될 테고요. 그런데 그림책이든 만화책이든 글책이든 사진책이든, 이 가운데 ‘어린이부터 즐겁게 보도록’ 헤아리며 엮는 책은 오직 그림책 하나입니다.


  그림책 가운데에는 ‘어른이 함께 읽는’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그림책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를 뺀 어른만 읽는’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그림책은 따로 없어요. ‘푸름이(청소년)가 읽는’ 그림책 또한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아니, 아직 한국에는 ‘푸름이 그림책’은 없다 할 수 있겠지요. 푸름이 문학조차 제대로 서지 못하거든요.


  만화책은 아이들도 즐겨 읽는다지만, 푸름이 즈음부터 읽을 수 있는 만화가 따로 있고, 어린이부터 읽을 만한 만화가 따로 있으며, 열아홉 살 넘은 나이부터 읽는 만화가 따로 있어요. 만화책은 금이 아주 또렷합니다. 글책과 사진책도 엇비슷해요. 읽히는 나이를 또렷하게 갈라 내놓습니다.


  그림책은 오직 어린이를 헤아리며 빚습니다. 더군다나, 그림책은 어린이를 ‘갓난쟁이’부터 열서너 살 나이까지 촘촘히 살피며 빚습니다. 세 살 아이까지 즐길 그림책, 다섯 살 아이까지 즐길 그림책, 일고여덟 살까지 즐길 그림책, 열 살까지 즐길 그림책, 열두어 살까지 즐길 그림책, 으레 이처럼 눈높이를 가누면서 엮어요. 그림책 겉이나 간기 자리를 살피면, 어느 나이 아이들한테 읽히면 좋은가 하고 밝히곤 해요.


  저도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에 그림책을 참 많이 장만해서 읽히고 읽습니다만, 아이들과 살아가며 그림책을 읽히고 읽다 보면, ‘아이 나이에 따라 가른 눈높이’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갓난쟁이부터 세 살 아이한테까지 읽힐 만한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다섯 살 어린이한테도 즐겁기 마련이고, 열 살 어린이나 스무 살 젊은이도 즐겁게 읽을 수 있어요. 일고여덟 살이나 열두어 살 어린이한테 걸맞도록 엮었다는 그림책이라지만, 두 살이나 세 살 아이가 재미나게 읽기도 합니다. 다만, 두어 살 아이가 그림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글을 읽지’는 않아요. ‘그림을 읽’어요.


  그러니까, 그림책이란 “그림을 읽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글책은 글을 읽는 책이고, 사진은 사진을 읽는 책입니다.


  그림책은 그림을 읽는 책인데, 그림책에서 읽는 ‘그림’이란, 사람이 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갈무리해서 나누려 하는 넋입니다. 그림책은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는 책인 만큼, 열 살이든 서른 살이든 쉰 살이든 쉽고 즐거이 읽을 수 있는데, 누구보다 가장 어린 나이일 어린이가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쉽고 즐거이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책인 셈입니다.


  그림으로 담는 이야기는 모두 “지구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수학 원리를 알려주든, 과학 지식을 보여주든, 이웃사랑이나 꿈나라를 들려주든, 모든 이야기는 “사람 삶”이라는 데에 눈길을 맞춥니다. 어린이가 어버이 사랑을 차근차근 받으면서 아름다운 넋으로 씩씩하고 착하게 설 수 있도록 “사람 삶”을 슬기롭고 예쁘게 보여주는 그림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삶”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그림책이란 ‘현실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오늘 바라보는 이곳 모습을 고스란히 담는 그림책이 아니라, 어린이가 하루하루 새롭게 자라나면서 누리는 한삶을 언제나 즐겁고 아리땁게 스스로 사랑하도록 돕는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에서 대수롭게 살필 대목은 ‘현실이냐 판타지이냐’가 아닙니다. ‘교훈이냐 재미이냐’가 아닙니다. ‘철학이냐 과학이냐’가 아닙니다. ‘정보냐 지식이냐’가 아닙니다. ‘예쁜 그림이냐 멋진 그림이냐’가 아닙니다. 그림책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맺는 아름다운 삶을 사랑스레 보여줄 수 있을 때에 그림책이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사랑스레 보여주는 그림책”은 어느 한 갈래에 따로 매이지 않습니다. 그림책은 아이들한테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고, 신나는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깊은 생각이나 슬기로운 꿈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일구거나 빚는 힘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림 솜씨를 뽐낸 작품이라 해서 아이들이 즐겁게 맞아들일 그림책이 되지 않아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대단한 밥 솜씨를 뽐내어 밥을 차려 준다고 아이들이 맛나게 먹지 않아요.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이 담긴 밥을 맛나게 먹어요. 아이들은 비싸게 치른 밥이라서 더 맛나게 먹지 않아요. 아이들은 값싸게 차린 밥이라서 더 맛없게 여기지 않아요. 아이들은 사랑 담은 좋은 밥을 맛나게 먹어요. 아이들은 사랑 담은 좋은 그림책을 오래도록 수없이 되풀이해서 읽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을 시나브로 익혀요.


  또 한 번 이야기하지만, 그림책은 그림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림 하나로 온 넋과 꿈과 사랑과 믿음과 삶과 말을 보여줍니다. 쪽수가 제법 되는 그림책이 더러 있으나, 웬만한 그림책은 쪽수가 퍽 적습니다. 그림 한 장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담거든요. 그림 하나에 짙고 깊은 이야기를 알알이 싣거든요.


  훌렁훌렁 넘길 때에는 그림책을 읽지 못합니다. 꽃 한 송이를 오래도록 들여다볼 줄 알고, 풀 한 포기를 날마다 새롭게 들여다볼 줄 아는 어린이 매무새처럼, 그림책 그림 한 칸은 오래오래 차근차근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맛과 멋을 알아챈다 할 만합니다.
 (4345.4.7.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