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에도 슬픔이 - 청년사 만화 작품선 03
이희재 지음 / 청년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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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루하루 먹는 걱정으로 보내다
 [만화책 즐겨읽기 115] 이희재, 《저 하늘에도 슬픔이》

 


 내 어릴 적 ‘이윤복 일기’를 학교에서 학급문고로 읽은 적 있는지 잘 모릅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이윤복 일기’를 말하는 교사는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 국민학교 무렵 교사로 일한 분들은 당신이 어릴 적에 ‘이윤복 일기’를 책으로 읽거나 영화로 보거나 했을 텐데, 나는 국민학교 여섯 해를 통틀어 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떠오릅니다.

 

 나이가 제법 들고 난 뒤, 어린이책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하며 헌책방을 꾸준히 다니다가 ‘이윤복 일기’ 첫판을 한 번 만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판이 사라진 다음 새로 나온 판을 만납니다. ‘이윤복 일기’ 첫판은 국민학생 때 못 봤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나온 판은 언뜻선뜻 본 듯하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만화쟁이 이희재 님이 그린 《저 하늘에도 슬픔이》(대교출판)를 만화책으로 보면서, 어, 이 만화를 어릴 적에 어디에선가 보지 않았나 하고 떠올렸습니다.


- “니 껌 파는 아이가? 그 껌 한 통 얼마고?” “요고 전부 다섯 개 들었는데 십 원입니더.” “한 통 팔면 얼마 남노?” “사 원 남아예. 사실랍니껴?” “니 아부지 계시나?” “예.” “엄마는?” “없어예.” “엄마 와 없노?” “묻지 마이소.” “고생 억수로 했겠고마. 니 우리 집에 가자. 배고팠나?” (20∼21쪽)
- “윤복이는 (체육을) 왜 신발을 벗고 하지?” “신발이 닳을까 봐 그런대요.” (171쪽)


 2004년에 청년사에서 다시 펴낸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처음 보던 2004년에는 좀 울컥하며 반갑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지나지 않아 이 만화책은 ‘품절’이 됩니다. 그럭저럭 사랑받기는 했으나, 이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출판사에서는 아무래도 팔림새를 따질밖에 없을 테니, 몇 차례 더 찍은 일로 흐뭇하게 여기며 판을 접을 노릇이구나 싶어요. 어쨌든, 청년사에서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뿐 아니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만화책도 되살렸거든요. 한국 만화 발자국에 길이길이 남을 만하다고 손꼽을 두 작품한테 새 옷을 입힌 일은 앞으로 두고두고 아름다운 손길로 남으리라 생각해요.


- ‘저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길래 저렇게 잘 입고 다닐까?’ (26쪽)
- “가시나, 학교 안 가면 안 된다.” “돈 많이 벌어 내년에 다시 학교 댕기면 안 되나.” “그게 어디 쉬운 줄 아나.” “학교 안 갈란다.” “미쳤나, 가시나!” “정말이다. 나 돈 많이 벌 기다.” (35쪽)

 


 마흔 고개에 일찍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갔다는 이윤복 님한테 어린 나날은 하루하루 먹는 걱정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동생들 끼니를 이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껌팔이를 합니다. 밥동냥을 다니고 허드렛장사를 하지만, 좀처럼 밥구멍은 뚫리지 않아요. 어머니는 일찌감치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몸이 아파 골골대며, 어린 윤복이와 길바닥에서 허드렛장사를 하던 동생 순나도 집을 나갔습니다.

 

 밥그릇 하나 변변하게 없는 살림에 ‘어떻게 일기를 쓰느냐’ 여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 윤복이는 학교에서 숙제로 내던 일기쓰기에 제 온 넋을 기울였어요. 집안에서도 집밖에서도 어린 윤복이한테 쌓이는 고단한 눈물과 힘겨운 웃음을 털어낼 말벗이 없거든요. 오직 일기장 하나가 윤복이한테 애틋한 동무입니다.


- “오빠야, 오늘도 나가지 마라. 또 잡으러 온다 카드라.” “누가 그라드노?” “그기 직원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다 들었다.” ‘왜 그 사람들은 우릴 못 잡아 먹어 안달일까?’ (30쪽)
-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다.” “경애야, 고맙다는데 왜 골을 내노?” “누가 선생님께 보이라 카드노?” “누가 갖다 논 것인 줄 알고 싶어서 그랬다.”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다고 막 놀리잖아.” “나는 참말로 모르고 그랬다.” (164∼165쪽)

 


 어린 윤복이는 일기쓰기를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냅니다. 일기에 제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송두리째 담으면서 꼬르륵거리는 배고픔을 견딥니다. 연필을 꾹꾹 눌러 한 글자씩 적바림할 때마다 허름한 집살림을 잊습니다. 한 줄 두 줄 이을 때마다 그리운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한 장 두 장 채울 때마다 가녀린 동생들을 따사로이 얼싸안습니다.

 

 차디찬 사람들 많고, 모진 이웃들 많습니다. 그러나 어린 윤복이네는 아주 굶어죽지 않고 가까스로 삶을 잇습니다. 죽지 못해 산다 할는지 모르나, 살려고, 참말 살려고 용을 쓰며 몸부림을 치기에 살아갈 수 있어요. 구시렁거리더라도 껌을 사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얕보거나 깔보면서도 껌을 사 주는 사람이 있어요. 못난 동무가 있으나 착하며 고운 동무가 있습니다.

 

 어린 윤복이는 어쩜 이렇게 슬프며 고달픈 나날인가 하고 눈물짓지만, 착하며 고운 동무와 이웃들 사랑을 꾸준히 느낍니다. 이 고마운 사랑을 받아먹으며 기운을 되찾아요.


- “아부지예, 와 밥을 안 드셔예?” “너희들이나 많이 묵어라. 배부르다.” “뭣 좀 잡수셨어예?” “내 아까 떡 좀 묵었다.” “떡은 어디서 났는데예?” (81쪽)
- “잘 왔다, 윤복아, 야구하자!” “안 된다. 나는 시내로 장사 나가야 한다.” “야, 같이 놀자. 장사 나중에 하면 되지, 뭐 그러나?” “어어, 칠구야, 이거 놔라.” (131쪽)

 


 하루하루 먹는 걱정입니다. 무얼 먹어야 할까 걱정입니다. 입는 옷은 둘째입니다. 씻는 일은 셋째입니다. 추위와 더위는 넷째입니다. 책이라든지 텔레비전이라든지 영화라든지 아예 젖힙니다.

 

 교육은 무엇일까요. 예술은 무엇인가요. 사회와 정치와 과학은 무엇일까요.

 

 어린 윤복이한테나, 아픈 아버지한테나, 슬픈 어머니한테나, 외로운 동생들한테나, 참말 교육이고 예술이고 사회이고 무엇인가요.

 

 하루하루 무엇을 먹으며 내 목숨을 이어야 할까요. 날마다 어떤 일을 해서 어떤 돈을 번 다음 어떤 밥을 마련해서 내 목숨을 이을 때에 아름다울까요.

 

 어린 윤복이네는 무엇이라도 배를 채울 수 있으면 고맙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얻어 내 배를 채우는 하루를 보내는지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배를 곯는 사람이 있는데 왜 전쟁무기를 만들까요. 겨울에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는데 왜 4대강 삽질을 하나요. 푸르며 싱그러운 바람과 햇살이 줄어드는데 숲과 들판을 돌보는 데에는 눈길조차 두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루하루 먹는 걱정을 해야지 싶습니다. 어떤 밥을 먹어야 할까 걱정해야지 싶습니다. 어떤 볍씨를 심고 어떤 씨앗을 가꾸어야 하는가를 날마다 걱정해야지 싶습니다. 참말 먹는 걱정을 하지 않고서야 목숨이 목숨다울 수 없다고 느낍니다. (4345.2.7.불.ㅎㄲㅅㄱ)


― 저 하늘에도 슬픔이 (이희재 그림,이윤복 글,청년사 펴냄,2004.4.8./12000원)

 

 

이윤복 일기를 새로 엮은 책은 '산하' 출판사에서 다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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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2-02-07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등학생 때 책으로도 읽었고
텔레비젼에서 재방송 해주는 영화도 봤어요.
참 많이도 울었죠.
아...이윤복 님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떴군요.
마흔을 겨우 넘기고 갔다니 안타깝네요.

파란놀 2012-02-07 09:23   좋아요 0 | URL
만으로는 38이고, 한국 나이로 40이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형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모두들 너무 힘들게 살아가지 않으셨나 궁금해요.

예나 이제나 인세는 제대로 받는지도 궁금하고요...
 

새로 생긴 어느 누리신문에서 우리 말 이야기를 써 달라는 말을 듣고는,

새롭게 우리 말 이야기를 쓰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새 글은 새 게시판에!

이리하여,

새 우리 말 이야기는

새로운 이름, "국어사전 뒤집기"로 붙입니다 ㅋㅋㅋ

 

..

 

송창식 님한테 트리뷰트하는 뮤직
[말사랑·글꽃·삶빛 1] 좋은 노래를 바치고 싶어요

 


 노래하는 송창식 님을 기리는 노래잔치를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송창식 님을 ‘노래하는 사람’, 곧 ‘노래꾼’이라 생각합니다. 송창식 님이 지난날 부르거나 지은 노래를 한 자리에 그러모아 젊은 노래꾼이 ‘새롭게 엮어’서 부릅니다. 그러니까, 여러 노래꾼이 송창식 님 노래삶을 ‘기리’는 뜻으로 ‘노래잔치’를 열었어요. ‘노래한마당’이라 할 만합니다.

 

 국어사전을 들추면, ‘기리다’ 뜻풀이를 “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따위를 추어서 말하다”로 적습니다. 뜻풀이에 ‘위대(偉大)한’이라는 한자말이 나타나서 다시 국어사전을 들추어 ‘위대’를 찾습니다. ‘위대’는 “도량이나 능력, 업적 따위가 뛰어나고 훌륭하다”로 적습니다. 곧, ‘기리다’ 뜻풀이는 겹말인 셈입니다. 잘못되었어요.

 

 이러한 뜻풀이를 살피면서 ‘뛰어나다’라는 토박이말을 ‘偉大하다’라는 한자말로 적는 줄 깨닫습니다. 곧, 한겨레 사람들은 두 가지 말을 한 자리에서 쓴다 할 수 있어요.

 

 이번에는 국어사전에서 ‘트리뷰트(tribute)’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국어사전에는 이 낱말이 안 실립니다. 국어사전이니까 영어사전에 실을 낱말은 안 실어야 옳겠지요. 영어사전에서 ‘tribute’라는 낱말을 찾습니다. 이 낱말은 “(특히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나 찬사”라고 풀이합니다. 이제 ‘헌사(獻辭)’와 ‘찬사(讚辭)’라는 한자말이 궁금합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우리 국어사전에는 한국말 아닌 중국말(한자말)이 참 많이 실립니다. 한자사전 아닌 국어사전, 곧 ‘우리 말 사전’이지만, 참말 우리 말이라 할 만한 낱말을 실었는지 온갖 말을 골고루 실었는지 알쏭달쏭해요.

 

 ‘헌사’는 “축하하거나 찬양하는 뜻으로 바치는 글”이라 합니다. ‘찬사’는 “칭찬하거나 찬양하는 말이나 글”이라 합니다. 이제는 ‘찬양(讚揚)’이라는 낱말이 궁금합니다. 다시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찬양’은 “아름답고 훌륭함을 크게 기리고 드러냄”이라 풀이합니다. 이리하여, ‘헌사-찬사-찬양’으로 이어지는 한자말은 모두 “아름답거나 훌륭한 누군가를 크게 기리는 일”을 가리키는 자리에 쓰는 줄 깨닫습니다. 한 줄로 갈무리해 보겠습니다.


― 노래하는 송창식 님을 기리는 노래잔치
― 노래꾼 송창식 님한테 바치는 노래마당


 나는 이 글월을 얻고 싶어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여러 차례 뒤적입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꾼 송창식 님과 얽힌 ‘노래말’을 내 나름대로 예쁘게 밝히고 싶어 이렁저렁 생각을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앞서 “송창식 선생님께 트리뷰트하는 음악”이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리고, 어느 노래꾼이 “아들아, 아빠가 뮤직 열심히 해서 받은 상이야” 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하겠지요. 누구나 둘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하고 생각을 주고받는 말로 생각꽃을 피우겠지요. 송창식 님은 ‘죽은 이’가 아닌 ‘산 이’인 만큼, 영어 낱말뜻을 헤아리더라도 ‘트리뷰트한다’고 말하는 일은 옳지 않아요. 유치원을 다닌다는 아들한테 아버지가 ‘뮤직’을 바지런히 한다고 말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모르겠어요.

 

 송창식 님을 곱게 기리면서 좋아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나 이웃 아이들하고 즐거이 노래를 부르면서 노랫말에 담긴 어여쁜 꿈과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4345.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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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06 19:21   좋아요 0 | URL
어제인가 그제인가, TV에서 송창식 님의 <불후의 명곡>이 있었는데
새삼 송창식 님의 노래가 얼마나 좋던지, 넋을 빼고 들었어요....
전 <사랑이야>를 너무 좋아해요.

노래꾼 송창식 님을 기리는 노래 마당. 저는 이게 좋네요.
잔치나 마당 말고 다른 말은 없을까요? 네? 머랄까, 많이 당기지는 않아서요.. 헤헤.

파란놀 2012-02-07 05:22   좋아요 0 | URL
익숙하지 않아서 당기지 않기 마련이에요.
익숙하지 않은 까닭은
듣기 어렵거나 스스로 생각하며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노래나라, 노래누리, 노래물결, 노래꽃, 노래나무...
이름은 누구나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대로 붙이면 되니까요,
이러한 틀을 생각할 수 있으면 돼요~

재는재로 2012-02-06 21:18   좋아요 0 | URL
왜불러 고래사냥 이두노래가 가장 좋던데 ㅋㅋ

파란놀 2012-02-07 05:24   좋아요 0 | URL
어릴 적 송창식 님을 버린 어머니 때문에
응어리진 아픔을 담은 <왜 불러>는
그야말로 송창식 님 스스로와 당신 어머니한테 바치는
슬프면서 아름다운 노래예요.

<왜 불러> 노래말은,
송창식 님 어머니가 나중에 송창식 님이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얼굴을 보고 싶다며 찾아와서 대문 앞에서
자꾸 당신 이름을 불러서
너무 괴로웠다면서 지은 노래라고 하거든요.

이 노래말을 곱씹으며 이 노래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릅니다.
 
사진과 책 - 한 사진가와 살아온 14권의 사진책들
박태희 지음 / 안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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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담는 책을 읽으면서 살아간다
 [찾아 읽는 사진책 58] 박태희, 《사진과 책》(안목,2011)

 


 박태희 님이 쓴 《사진과 책》(안목,2011)을 읽습니다. 아주 느긋하게 읽습니다. 무척 빠르게 읽습니다. 매우 보드라이 읽습니다. 참 애틋하게 읽습니다.

 

 나는 이렇게 사진과 책과 사진책을 말하며 웃음짓는 글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이처럼 삶과 사람과 사랑을 말하며 눈물짓는 글을 바랐어요.

 

 삶을 짓듯 웃음을 짓습니다. 사랑을 짓듯 눈물을 짓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를 짓듯 사람들은 사진으로 책을 짓습니다.

 

 “(사진책 한 권에는) 한 사람의 삶이 통과해야 할 수많은 의미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고스란히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12쪽).” 하는 이야기처럼, 사진에는 책에는 사진책에는 숱한 삶자락에 찬찬히 깃듭니다. 이론으로 밝힌다든지 비평으로 가름한다든지 역사로 따져야 할 사진도 책도 사진책도 아니에요. 예나 이제나 이 땅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 스스로 사랑하며 아낄 사진이고 책이며 사진책이에요.

 

 

 

 193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1930년대에 태어난 사진과 책과 사진책을 사랑하며 받아들입니다. 195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1930년대에 태어난 사진과 책과 사진책부터 1950년대에 새로 태어나는 사진과 책과 사진책을 나란히 사랑하며 받아들입니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193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는 동안 나고 지는 숱한 사진과 책과 사진책을 두루 돌아보며 사랑하고 받아들여요.

 

 내 할아버지가 지은 사진을 내가 누립니다. 내 할아버지가 나만 한 나이에 지은 사진을 내가 머잖아 할아버지가 되어 누립니다. 내가 오늘 지은 사진을 내 아이가 머잖아 내 나이가 되어 누립니다. 내 아이가 앞으로 지을 사진을 나는 앞으로 할아버지가 되어 누리겠지요.

 

 “사진기를 집어 들어 셔터를 누를 마음이 생기려면 먼저 대상과 공감해야 한다. 누군가의 사진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사진에 찍힌 것과 바라보는 내가 공감하지 않으면 분명 눈으로 보았지만 얼마 후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29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과 책》은 박태희 님 삶으로 곰곰이 삭힌 꿈과 사랑과 빛이 무엇인가 하고 밝힙니다.

 

 

 

 더 나은 사진이란 없으니까요. 덜 떨어지는 사진이란 없으니까요. 모든 사진은 모든 사람들 삶이자 사랑이고 빛이니까요. 어떠한 사진이든 사진을 빚은 사람들 이야기가 알알이 스며드니까요.

 

 때로는 목소리 드높이는 사진이 태어나고, 때로는 목소리 드높이는 글이 태어납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며 외치는 목소리로 가득한 사진이나 글이 있습니다.

 

 아프니까 외치기 마련입니다. 짓밟히니까 소리치기 마련입니다. 빼앗기니까 울기 마련입니다. 사진은 글은 그림은 목소리가 되고 노래가 되며 춤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 삶인 사진이고 글이고 그림이지만, 때와 곳에 따라서는 온힘을 쥐어짜내는 피울음이 돼요.

 

 그런데, 피울음 되는 사진이든 노래하는 목소리가 되는 사진이든 꾸밈없이 살아가는 넋이 감도는 사진이든, 언제나 튼튼히 다지는 밑바탕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이 있을 때에 글을 써요. 사랑이 있을 때에 그림을 그려요. 사랑이 있을 때에 사진을 찍어요. 사랑으로 짓는 밥입니다. 사랑으로 짓는 옷입니다. 사랑으로 짓는 집입니다. 곧, 우리 모든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 아닌 무엇으로도 삶을 이루지 못합니다. 내 좋은 옆지기도, 내 애틋한 아이들도, 내 고마운 보금자리도, 내 따사로운 마을도, 내 맑은 하늘과 바람과 물과 흙과 햇살도, 온통 사랑입니다.

 

 “그림은 왕이나 귀족, 신화 속의 신들처럼 중요한 사람을 그리고 중요한 사건을 기념했다. 그런데 사진은 그림과는 다르게 익명의 사람을 남겼고 하찮은 것들을 기념했다(54쪽).” 하는 이야기를 곱씹습니다. 그림 가운데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사람들을 담은 그림이 없지는 않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참말 그림은 대장장이 고기잡이 흙일꾼 삶을 찬찬히 담으려 하지 않았어요. 아기한테 젖 물리는 여느 어머니, 부엌에서 불을 때며 솥에 밥을 짓는 할머니, 멧골에서 도끼로 나무를 베고 장작을 패는 아버지, 나물을 뜯거나 캐는 누이, 동생 기저귀를 빨래하는 언니, 짚신을 삼는 형과 같은 여느 자리 여느 삶자락 여느 사람들을 그림으로 담는 일은 아주 드물거나 거의 없어요. 임금이나 사대부를 담는 그림이었습니다. 임금님이 어딘가를 오가는 모습을 담는 그림이었습니다. 궁궐을 담고 성곽을 담는 그림이었지, 여느 흙집과 풀집을 담는 그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진밭을 돌아볼 때에, 한국 사진쟁이는 얼마나 “하찮은 것들을 기념”하는 사진 자리에 설까요. 얼마나 ‘여느 사람 삶과 삶자락과 사랑을 기리’는 사진 자리에 있나요.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사진가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진실이다(63쪽).” 하는 말은 참 옳다고 느껴요. 사진쟁이가 살아가며 가슴으로 받아들인 꿈과 넋을 사진으로 보여줘요. 글쟁이가 살아가며 가슴으로 아로새긴 꿈과 넋을 글로 들려주겠지요. 노래쟁이가 살아가며 가슴으로 북돋운 꿈과 넋을 노래로 들려주겠지요.

 

 사진은 대단하지 않아요. 글은 대단하지 않아요. 대통령은 대단하지 않아요. 대학교수는 대단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대통령이 되고 판사가 되고 과학자가 된다고 꿈이 이뤄진 것일까 … 로버트 아담스에게 잃어버린 풍경은 잃어버린 꿈과 같았다(91쪽).” 하는 말처럼, 사진기를 쥔 사람은 사진기로 꿈을 이루는 길을 걸을 때에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연필을 쥔 사람은 연필로 사랑을 이루는 나날을 빛낼 때에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남한테 보여주는 사진이란 없어요. 나 스스로 내 삶으로 누리는 사진이에요. 남한테 읽히려는 글이란 없어요. 나 스스로 내 삶을 되새기며 즐기는 글이에요.

 

 “잊지 못할 기억을 지닌 모든 이들의 시계는 이렇게 한 순간 멈춰 버릴 수도 있다(144쪽).” 하는 말을 돌아봅니다. “늘 마주하는 일상의 모습에서 ‘난생 처음으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담는다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예민하게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156쪽).” 하는 말을 헤아립니다.

 

 

 

 내 삶이 있어야 사진이 있습니다. 내 삶이 없으면 사진이 없습니다. 집시들 삶이나 문화를 보여주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집시들과 함께 살아가거나 어깨동무하는 ‘내 삶과 꿈과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만 있습니다. 철거민 눈물이나 아픔을 보여주는 사진이란 없어요. 철거민들과 함께 살아가거나 스스로 철거민으로 지내는 ‘삶과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만 있습니다.

 

 사진으로 무엇을 고발할까요. 사진으로 무엇을 외칠까요. 사진으로 무엇을 밝힐까요.

 

 사진은 오로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글은 오직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은 그예 ‘내가 숨을 쉬는 하루하루 이야기’입니다.

 

 멀리에도 따로 없고 가까이에도 따로 없는 사진이에요. 커다란 사진감이나 작은 사진감이나 따로 없는 사진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그 스타일이 무엇이든, 그 안에서 표현되는 내용의 결과 질에 달려 있는 것이다(170쪽).” 하는 이야기를 《사진과 책》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진 기법은 부질없습니다. 사진 장비는 덧없습니다. 사진 갈래는 뜻없습니다. 사진 역사나 사진 계보나 사진 문화나 사진 예술이나 사진 작가나 어느 하나 남달리 돌아볼 만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 사진을 보면 돼요. 오로지 하나 사진에 담는 삶을 보면 돼요. 그예 한 가지 사진에 담는 삶에 감도는 사랑을 느끼며 얼싸안으면 돼요. 사진은 삶에서 태어납니다. 사진은 사랑에서 샘솟습니다. 사진은 사람들 곱고 착한 꿈에서 씨앗을 틉니다. (4345.2.6.달.ㅎㄲㅅㄱ)


― 사진과 책 (박태희 글,안목 펴냄,2011.12.19./25000원)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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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0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사진 찍으니, 우리 벼리가 정말 아가씨 같네요.
손가락 길고 이쁘게 자라겠다... 예뻐요.

파란놀 2012-02-07 05:25   좋아요 0 | URL
좋은 꿈 펼치며 이루는
어여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랍니다~

songbee1223 2025-10-05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담긴, 부드럽고 따스한 글 고맙습니다

파란놀 2025-10-05 12:27   좋아요 0 | URL
읽어 주시는 마음이야말로 고맙습니다
 


 한동안 조용히 아늑한 때

 


 아이 하나와 살아가던 나날에도 복닥복닥했지만, 아이 둘이랑 살아가는 나날에도 시끌시끌합니다. 아이 셋이나 넷, 다섯이나 여섯, 일곱이나 여덟이 한집에서 얼크러지며 씨름한다면 얼마나 시끌벅적할까 절로 그림을 그립니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이라 한다면, 여느 학교 여느 교실을 떠올릴 법하지만, 막상 하루 스물네 시간 숨 고를 짬 없이 뛰고 노래하고 기고 춤추고 하는 아이들 모습을 옳게 그릴 수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나는 이제껏 생각힘이 그리 좋지 않았구나 싶어요. 스스로 겪거나 치르거나 부대끼는 일이 아니라 하면 좀처럼 마음속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살아가며 아이들이 어떤 삶을 물려받거나 무슨 이야기를 받아먹으며 자라야 좋을까를 찬찬히 그림으로 그리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곱고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사랑스러운 나날을 일구어야 재미날까를 낱낱이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어요. 어버이 스스로 그림으로 그릴 때에 좋은 삶이 되고 좋은 이야기가 되며 좋은 밥이 될 테지요. 어버이 스스로 그림으로 그리면서 어버이부터 좋은 하루가 되고, 아이들과 살붙이 모두 좋은 나날이 되겠지요.

 

 하루 가운데 아주 살짝 한동안 조용히 아늑한 때를 맞이합니다. 밥을 다 먹고, 빨래와 설거지를 마치고, 마른 옷가지를 개고, 방과 마루와 부엌을 쓸고닦아 속이 후련하다 싶을 무렵, 이 한때가 더없이 조용하며 아늑하다고 느낍니다.

 

 곰곰이 돌이키면, 아이와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걸을 때에도 조용하고 아늑합니다. 따순 물을 받아 두 아이를 차근차근 씻길 때에도 조용하고 아늑합니다. 수북한 기저귀와 옷가지를 빨래하고 널 때에도 조용하고 아늑합니다. 밥을 마련하고 차리고 함께 먹은 다음 치울 때에도 조용하고 아늑합니다.

 

 내 생각이 조용하고 아늑하다면 언제라도 조용하고 아늑합니다. 내 생각이 어수선하거나 어지러우면 어느 때라도 어수선하거나 어지럽습니다. 바야흐로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4345.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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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06 14:20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된장님이 조용하고 아늑하셔서.
꼭 수행하시는 분 같아요.^^

파란놀 2012-02-07 05:21   좋아요 0 | URL
음... 좋은 길을 찾으려고 생각하니,
한자말로 하면 '수행'이 되겠네요 ^^;;

마녀고양이 2012-02-06 19:24   좋아요 0 | URL
내 생각이 어수선하거나 어지러우면 어느 때라도 어수선하거나 어지럽습니다.
=> 이게 현재의 제 모습이네요. 주위를 아무리 치운들 무엇하겠어요.
제 속이 시끄러운데... 크게 숨을 쉬면서, 가라앉히는 중이랍니다.

파란놀 2012-02-07 05:20   좋아요 0 | URL
아무쪼록 느긋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기쁘게 찾으시기를 빌어요~
 

 산들보라 젖떼기밥 먹기

 


 스스로 수저를 손에 쥐어 밥을 오물오물 냠냠 씹을 수 있을 때까지 아이는 어머니젖이랑 젖떼기밥을 먹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기 앞서 첫째한테 똑같이 했을 테지만, 첫째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날마다 함께 먹을 밥을 살피느라, 첫째한테도 젖떼기밥을 먹이던 일을 떠올리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둘째와 함께 살아가며 이 아이가 제 두 다리로 튼튼하게 서고 제 두 손으로 야무지게 수저를 쥘 때까지 얼마나 짙고 깊게 사랑을 쏟아 밥을 먹여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4345.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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