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장난감 3 - 애장판
오바나 미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는 무엇이 갖고 싶을까
 [만화책 즐겨읽기 139] 오바나 미호, 《아이들의 장난감 (3)》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자격증을 딴 어른입니다. 교육대학교나 사범대학교를 마치면서 교원자격증을 거머쥐어야 비로소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수 있습니다.


  교원자격증이란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라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자격을 가리킵니다. 다만, 교사라는 자리에 선대서 모두 아이들을 가르칠 만한 그릇이지는 않습니다. 교과서에 담은 지식을 학교에서 알뜰히 들려줄 수 있다뿐입니다.


  교사가 되는 자격증은 ‘아이를 사랑하는 넋’이 어떠한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교사가 되는 자격증에는 ‘아이를 믿는 마음’을 담지 않습니다. 교사가 되는 자격증은 ‘아이가 스스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이 어떠한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교사가 되는 자격증에는 ‘아이가 즐거이 누릴 삶’을 담지 않아요.


  아이들 스스로 국어나 영어나 수학이나 과학을 배우고 싶다 말했기에 초·중·고등학교에서 이런저런 과목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도덕이나 국민윤리를 가르치는 까닭은, 세계사나 한문을 가르치는 까닭은, 일본말이나 컴퓨터를 가르치는 까닭은, 환경이나 가정을 가르치는 까닭은, 모두 ‘어른이 만든 사회에 아이가 맞추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초등학교이든 대학교이든, 어른이 미리 만든 사회 틀거리에 아이들이 몸과 마음을 맞추어 들어와야 한다고 밀어넣는 셈입니다. 아이들 나름대로 새 얼거리나 줄거리를 짜도록 문을 열지 않아요. 아이들 나름대로 새 삶이나 꿈을 빚도록 길을 트지 않아요.

 


- “하지만 어렸기 때문이라고 해서 용서될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겠지?” “네.” “낳았으면 키운다, 개나 고양이 다람쥐도 다 아는걸. 어째서 모르는 인간이 있을까?” (44쪽)
- “하야마는 생일파티 같은 거 한 적 없어?” “없어. 매년 성묘만 갔어.” ‘윽, 칙칙하다. 이러니 인간이 비뚤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91쪽)


  국회의원은 국회의사당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국회의사당은 법을 만드는 곳입니다. 국회의사당은 한 나라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법을 만드는 사람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한대서 법을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지킬 법이란 무엇일까요. 법을 만드는 밑바탕이란 무엇일까요.


  법이 없어도 착하고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을 모르지만 참답고 즐거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이란 무엇일까요. 법은 왜 있어야 할까요. 나라가 서고 정부가 있기에 법이 있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니까, 많은 고을들을 거느려야 하니까, 이래저래 법을 만들지 않을까요.


  나라에서는 세금을 거둡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돈이 든다며 세금을 걷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왜 만들고 왜 다스려야 할까요. 나라가 없으면 무엇이 흔들리거나 무엇이 걱정스러울까요.


  먼먼 옛날부터 나라이든 정부이든 ‘군대를 키우는 데’에 돈을 가장 많이 쓰고 사람품을 가장 많이 들였습니다. 이 다음으로는 궁궐이나 공공기관 건물을 짓는 데에 돈을 많이 쓰고 품을 많이 들였습니다.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공공복지나 사회문화를 북돋우거나 돌보는 데에는 돈이나 품을 얼마 쓰지 않습니다. 숲과 자연과 들판과 고을을 곱게 건사하는 데에는 돈이나 품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고위공무원은 왜 까만 자동차에 까만 양복에 수많은 심부름꾼을 두어야 할까요. 왜 작고 값싼 자동차를 타지 않고, 왜 버스나 자전거를 타지 않으며, 왜 스스로 일을 하지 않을까요.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책만 읽는대서 삶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시골마을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는대서 어느 시골마을 삶을 알 수 없습니다. 몸소 시골마을로 찾아가 살아내야 비로소 시골마을 삶을 조금 짚을 만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든 법을 만들든, 스스로 마을사람이 되어 ‘낮은’ 자리에서 살아갈 때에 바야흐로 ‘어떤 정치와 법’이 아름답게 빛날 만한지 깨달을 만합니다.

 

 


- “14살에 낳았다고? 아, 앞으로 2년 반만 있으면 내가 14살인데? 우와, 놀래라! 으음, 그럼 버릴 수도 있었겠네요. 버리겠다, 버리겠어! 아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난 버려 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하니까. 지금의 생활이 정말 좋거든요!” (49쪽)
- “사나,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면 안 될까. 언젠가 사나와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못해요. 난 도저히 당신을 엄마라고 생각할 수 없고, 분명히 말해서 당신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 당신과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보면, 엄청 무서운 게 있어요. 그게 뭐게요? 만일 당신이 날 지워 버렸다고 생각하면, 정말 무서워요. 왜냐하면, 그러면, 난 지금 여기 없을 테니까.” (62∼63쪽)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다닐 아이들 스스로 교사를 뽑지 못합니다. 대학교에서는 듣고픈 강의를 학생 스스로 고른다지만 새로 강의를 만들지 못합니다. 주어진 몇 가지 틀에서 골라야 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마음 착한 교사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마음 따스한 교사와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마음 사랑스러운 교사하고 어우러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몽둥이나 주먹을 흔드는 교사를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시험점수로 윽박지르는 교사를 사귀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들볶는 교사하고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교사를 고르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교원자격증을 거머쥐면 마음결이 어떠하든 교사 일을 하면서 다달이 돈을 법니다. 아이들은 교원자격증을 거머쥔 어른 가운데 누가 저희랑 한 해를 지내거나 세 해나 여섯 해를 보내야 하는가 걱정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교과서를 스스로 고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배우고픈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배우며 어떻게 살아가야 즐거운가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꽁꽁 틀어막힙니다. 언제나 ‘위에서 어른이 틀을 만들어 내려보내는’ 학교 울타리요 교과서 지식이요 교사들뿐입니다.


  어른들은 말합니다. ‘아이가 사회에서 살아가자면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알아야 한다’고. 그런데 아이가 살아가야 할 사회가 썩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것도 비뚤어지거나 저것도 기울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겠다며 눈물을 흘립니다. 터무니없다는 무역협정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청 높이 외칩니다. 엉뚱한 데에 쇠삽날 들이대며 삶터와 자연을 망가뜨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즐거이 살아갈 만한 사회를 이룩하지 않으면서, 슬픈 사회 굴레에 아이들이 몸을 맞추어 안 좋은 삶을 꾸리라고 밀어넣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누리고 싶고 무엇을 갖고 싶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참으로 좋아하며 아름다이 여길 꿈과 사랑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른들은 어른들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길을 생각하지 않아요. 어른들부터 어떠한 삶일 때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빛나는가를 생각하지 않아요.

 

 


- “네가 하야마 아키토지?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그 따위 태도냐? 초등학교에서 꽤나 문제를 일으켰었나 본데, 중학교에서는, 특히 내 반이 된 이상엔 그렇게 안 될걸? 각오해 둬라.” “굉장히 즐거운가 보네요.” “뭐라고?” “왕따 시켜먹을 녀석을 발견한 질 나쁜 녀석 같은 눈빛인걸요. 교사도 어차피 인간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194∼195쪽)


  오바나 미호 님 만화책 《아이들의 장난감》(학산문화사,2004) 셋째 권을 읽습니다.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들이 무엇을 갖고 싶을까 하는 대목을 조곤조곤 풀어내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아이들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오직 하나, ‘사랑’을 갖고 싶다 말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에 아로새겨진 생채기를 잊지 못합니다. 생채기는 차츰 아물지만, 다른 생채기가 쌓이고 쌓이면 아이들 마음은 슬픔으로 무너지고 눈물로 얼룩집니다.


  몇 해에 한 차례씩 국회의원과 대통령과 지자체 우두머리 뽑는 날을 맞이합니다. 이들 정치꾼을 뽑을 수 있으려면 고등학교를 마친 나이쯤 되어야 합니다. 열여섯이나 열세 살 아이들은 투표권이 없습니다. 열두 살 아이나 열 살 아이 또한 투표권이 없습니다. 아이들 삶에도 크게 물결칠 일을 벌이는 정치꾼이지만, 정작 아이들한테 투표권을 주지 않습니다.


  너무 마땅한 노릇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아이들은 거짓스러운 어른한테 표를 줄 일이 없을 테니까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거짓스러운 일을 벌이거나 꾀하는 굴레에서 허덕이기 때문에, 아이들한테 투표권을 못 줄 만하구나 싶어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도 약속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사회에서 어떤 삶을 꾸리고 싶은가를 묻고, 이 물음에 대꾸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바라는 사회를 이루도록 땀흘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즐거우며 사랑스레 살아갈 만한 사회가 되게끔 힘을 쏟아야 합니다.

 


- “츠요시 군, 저 녀석한테 뭘 갖고 싶은지 물어 봐. 자연스럽게.” “응?” … “‘사랑’이래.”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물어 보란 말이야!” (97쪽)
- “잘 들어. 하야마 아키, 한 번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엔 시효 따위 없는 거라구.” (201쪽)


  아이는 어머니랑 아버지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다고들 말합니다. 아마 그럴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아이 스스로 먼먼 곳에서 제 어머니랑 아버지 될 사람을 생각하고는 그리로 찾아가는지 모릅니다. 알 길은 없어요.


  어찌 되든, 아이는 제 어머니랑 아버지한테 늘 바랍니다. 즐겁게 놀아 달라고 바라고, 맛난 밥을 달라고 바랍니다. 좋은 보금자리를 일구어 달라고 바라고, 좋은 물과 바람과 햇살을 먹게 해 달라고 바랍니다.


  아이들은 자가용이나 아파트를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책이나 컴퓨터나 비디오를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돈이나 부동산이나 주식투자를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놀이공원이나 외국여행이나 텔레비전을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오로지 한 가지만을 바라요. 어머니 아버지가 따숩게 빚어 예쁘게 나눌 사랑 한 가지만을 바라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한테뿐 아니라 이웃 어른한테도 똑같이 바라요. 그저 밝은 사랑과 맑은 꿈으로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요. (4345.4.11.물.ㅎㄲㅅㄱ)


― 아이들의 장난감 3 (오바나 미호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4.11.25./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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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 물결 글쓰기

 


  한겨울 흰눈 소복히 덮어쓰기도 하면서 추위를 고스란히 담아낸 마늘밭 푸른 잎사귀가 물결처럼 넘실거린다. 마늘쪽은 가을날 선선한 바람과 햇살을 먹으며 뿌리를 내렸고, 겨울날 차가운 눈바람과 햇볕을 머금으며 줄기를 올렸고, 봄날 따사로운 비바람과 햇빛이 스며들며 씨알이 굵는다.


  가을을 누리며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이하다가 여름을 누비는 사람들 몸과 마음은 해마다 어떻게 거듭날까. 웃음과 눈물이 갈마들고 기쁨과 슬픔이 넘나드는 사람들 살갗과 넋은 나날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까.


  마늘밭 물결은 아름답다. 주름살이 이랑고랑 패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여쁘다. 꾸덕살 박히며 울퉁불퉁한 손마디가 아리땁다. 아이들은 한 살 두 살 먹으며 키가 무럭무럭 큰다. 예쁘다. 모두 좋은 삶이다. (4345.4.1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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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ds 문명 저편의 아이들 - 박하선 사진집
박하선 사진 / 상출판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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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진은 ‘누가 바라보는 눈길’입니까
 [찾아 읽는 사진책 89] 박하선, 《문명 저편의 아이들》(상,2005)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에는 ‘고인돌 공원’이 있습니다. 한국땅 곳곳에 고인돌 공원이 있다고 하는데, 전남 고흥에 있다는 고인돌 공원을 말하는 사람은 아주 드문 듯합니다. 우리 식구도 고흥으로 살림을 옮길 때까지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따로 고인돌 공원에만 고인돌이 있지 않아요. 공원 아닌 들판 곳곳에 고인돌이 있어요. 논에 물을 댈 못을 만들며 고인돌을 옮기며 고인돌 공원이 생기기도 할 테지만, 멀디먼 옛날부터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곳곳에 고인돌을 하나둘 마련했으리라 느껴요.


  순천에 있는 헌책방 〈형설서점〉 나들이를 하며 《우리 고장 고흥》(고흥문화원,1983)이라는 낡고 작은 책 하나를 보았습니다. 고흥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한테 읽히려고 마련한 책이로구나 느끼며 살피는데, 1920년대에 고흥군에 ‘한길이 처음 생겼다’고 적은 대목이 눈에 뜨입니다. ‘한길’이란 ‘신작로’를 가리킵니다. 한길이라 하더라도 흙길일 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아마, 1920년대까지 고흥에서 자전거가 다닌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고흥과 벌교를 잇는 길이 열린 지 아직 백 해가 되지 않았어요. 더욱이, 고흥군을 빠져나가는 길은 2010년대까지도 오직 하나요, 멧등성이를 구비구비 도는 좁다란 길 하나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기찻길이 놓이네, 자동차가 다니네, 전기가 들어오네, 전차가 오가네, 자전거가 달리네, 이러저러할 때에도 고흥 같은 두멧자락에서는 겨우 ‘한길’ 하나 놓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흙에 기대고 바다에 안기며 살아가던 사람들 터전입니다. 흙을 느끼고 바람을 맞으며 햇살을 누렸겠지요. 1920년대나 1930년대에 한국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이 어김없이 있었을 텐데, 이들은 어디를 다니며 사진을 찍었을까요.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을 마주하며 사진을 찍었을까요. 한국을 찾아왔을 일본 사진쟁이나 서양 사진쟁이는 한국땅 어디에서 어떤 한국사람을 마주하며 ‘한국 겨레 사진’을 빚었을까요.


  봄비가 촉촉히 들판을 적시는 낮나절, 두 아이와 옆지기하고 들길을 거닐다가 고인돌을 만납니다. 얼마 앞서는 돌기둥 하나 만나기도 했습니다. 들판 한복판에 덩그러니 선 돌기둥은 즈믄 해 넘게 살았다는데, 누가 왜 무슨 뜻으로 들 한복판에 덩그러니 돌기둥을 세웠을까 궁금합니다. 이 돌기둥은 어떤 넋을 담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졌을까 궁금합니다. 들판 한복판에 가만히 놓인 고인돌은 어떤 얼일까 헤아립니다. 비를 맞고 이끼가 끼는 커다란 고인돌이 여럿 있습니다. 고인돌 밑에 누운 사람은 누구요, 이녁을 눕히고 고인돌을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고인돌 하나는 지난날 사람들한테 어떤 뜻이었고, 오늘날 사람들한테 어떤 빛일까요.

 

 


  깊은 새벽녘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박하선 님 사진책 《문명 저편의 아이들》(상,2005)을 생각합니다. 소쩍새는 소쩍새가 보금자리 마련할 만한 숲속에서 웁니다. 소쩍새는 사랑하는 짝꿍 소쩍새하고 얼크러지며 새끼를 낳을 만한 둥지를 지을 만큼 넉넉한 멧자락에서 웁니다. 즈믄 해 앞서도 소쩍새는 울었겠지요. 고인돌이 놓이던 무렵에도 소쩍새는 울었겠지요. 사람들이 낫과 쟁기를 쓰는 오늘날뿐 아니라, 아니, 사람들이 경운기와 트랙터를 쓰는 오늘날뿐 아니라, 돌칼을 쓰고 돌낫을 썼을 지난날에도 울었겠지요.


  문득 궁금합니다. 자연사박물관이나 고대사박물관을 짓는 오늘날 사람들은 지난날 사람들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궁금합니다. 고이 이어오는 우리 한아비로 여기는지, 이 땅에서 목숨 고이 건사하며 꿈과 사랑을 키우던 옛아비로 여기는지 궁금합니다.


  박하선 님은 《문명 저편의 아이들》이라는 사진책에서,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몰려든 유목민으로 오히려 내가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땅에서 이방인인 내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미소를 띠고 얌전히 그들의 관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카메라를 들었더니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거부한다. 손짓발짓을 섞어 어렵게 대화를 하던 중 한 아이가 낡아빠진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면서 뭐라고 하는데,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를 찍으면 이렇게 나온 사진을 주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이들에게 사진을 갖다주겠는가. 그러나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찍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31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박하선 님은 ‘우리와 다른 문명’, ‘우리와 다른 겨레’, ‘우리와 다른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사진을 찍습니다. 온통 서양사람 눈길로 바라보는 ‘문명과 겨레와 터전’이 아닌, 한국사람 눈길로 바라보는 ‘문명과 겨레와 터전’을 이야기하고자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모습”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문명의 때가 묻은 모습”이란 어떤 모습이 될까요. 한국땅 서울이나 부산 같은 곳 사람들 모습은 문명 때가 묻은 모습일까요. 한국땅 제주나 원주나 익산 같은 곳 사람들은 문명 때가 얼마나 묻은 모습일까요. 한국땅에서 흙을 일구거나 바닷물을 만지는 사람들 모습은 문명 때가 얼마쯤 묻은 모습이라 할 만할까요.


  서양 사진쟁이나 일본 사진쟁이가 티벳이나 몽골이나 이란이나 칠레나 베트남이나 버마나 인도나 네팔로 찾아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들 사진쟁이는 제 나라와 겨레를 떠나 다른 나라나 겨레를 찾아가서 무슨 모습을 보고 싶을까요. 어떤 삶을 바라고 어떤 사랑을 꿈꾸는가요.


  박하선 님은 이야기를 잇습니다. “허전한 마음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데 이방인을 따라온 마을 아이들도 내 눈길을 따른다. 사실 아이들에게야 빵도 안 되고 휴식도 안 되는, 게다가 부모의 종교와도 다른 대불이 무슨 소용이랴. 내가 나눠 준 사탕 몇 알에 더 기뻐한다 한들 그들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60쪽.)” 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사탕을 좋아하는 줄 여깁니다. 아니, 아이들은 어른들이 내미는 사탕을 허둥지둥 받아 먹곤 합니다. 그러나, 사탕을 모르며 살아가는 아이들한테 사탕은 너무 끔찍한 먹을거리입니다. 사탕을 먹으면 밥을 잊습니다. 사탕을 내미는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사탕 한두 알이 끝이 아니에요. 사탕 한두 알은 빗물처럼 천천히 “문명 때가 묻지 않던 곳”에 “문명 때가 젖어들도록” 합니다. 사탕알을 손에 쥔 아이들 웃음이나 낯빛은 어떤 웃음이나 낯빛이라 할까요. 낯선 사람이 스치듯 지나가며 내민 사탕알은 아이들 삶에 어떤 이야기와 사랑과 꿈으로 자리할 만할까요.


  “일곱 아이들의 일곱 가지 표정! 시선을 잡을 수는 있어도 억지로 표정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89쪽).” 하는 말마따나,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사람들 낯빛은 억지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낯빛은 자꾸 억지스레 만들어집니다. “언제 이들에게 사진을 갖다주겠는가” 하는 생각은 ‘언제 이들한테 다시 찾아오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아닌, 한 번 스치고 끝나는 길손입니다.

 


  돌이키면 온누리 숱한 겨레를 담는다 하는 사진은 으레 ‘한 번 스치고 끝나는 길손이 바라보는 눈길’로 담는 사진이 아닌가 싶곤 합니다. ‘함께 살아가며 웃고 우는 이웃이 바라보는 눈길’로 담는 사진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시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나는 아직 네팔사람이 담은 네팔 사진을 못 보았습니다. 인도사람이 담은 인도 사진이라든지, 베트남사람이 담은 베트남 사진을 보기란 참 어렵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 스스로 담는 아프가니스탄 난민 삶자락 사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높다란 칠레 멧자락 마을 사람들 스스로 담은 이녁 사진을 본 일이 없어요.


  나는 아직 한국땅 흙일꾼 스스로 담은 한국땅 시골마을 사진을 본 일이 없습니다. 한국땅 철도노동자 스스로 담은 철도노동자 사진이든, 한국땅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 담은 비정규직 노동자 사진이든, 수요집회 할머니 스스로 담은 수요집회 할머니 사진이든, 이런저런 삶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일구는 사람들 슬픔과 웃음과 기쁨과 아픔과 고단함과 후련함을 이녁 스스로 알알이 담은 사진을 아직 못 봤어요.

 


  사진은 ‘누가 바라보는 눈길’입니까. 문명 저편에 있는 아이들이라는 이름은 누가 누구한테 붙일 수 있습니까. 한국사람이 한겨레 눈길로 문명 저편을 바라보며 사진을 담는다지만, 정작 ‘문명 저편에 있다는 아이들’ 모습을 ‘문명 저편 삶자락 그대로’ 보여주거나 나누는 사진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진은 그예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내 나름대로 바라보는 눈길이든, 서양사람이나 일본사람 나름대로 바라보는 눈길이든 그닥 대수롭지 않다고 느낍니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는 눈길이든, 사진 한 장이 태어나자면 사랑으로 바라보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눈길이어야지 싶습니다. 서로 믿고 아끼며 사랑할 때에 비로소 사진 한 장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서로 믿고 아끼며 사랑하는 넋으로 바야흐로 글 한 줄 쓸 수 있다고 느낍니다. 내가 찍었대서 더 그럴싸하거나 더 멋지거나 더 좋은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찍느냐’ 아니냐가 아닌,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며’ 사진기를 쥐었느냐 아니냐, 곧 내가 사랑하는 어여쁜 이웃이자 동무이자 살붙이로 느끼며 마주했느냐 아니냐를 헤아릴 때에 사진빛 한 줄기 햇살처럼 드리운다고 느껴요. (4345.4.11.물.ㅎㄲㅅㄱ)


― 문명 저편의 아이들 (박하선 사진·글,상 펴냄,2005.3.5./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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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선거 책읽기

 


  도시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온 사람은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며 푸나무를 살리겠다’는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도시에서 더 돈을 잘 벌 수 있는 길을 열고, 도시에서 더 문화와 문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밝힌다.


  시골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온 사람도 ‘흙을 살리고 사람을 사랑하며 푸나무를 아끼겠다’는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시골에서는 기껏 ‘직불금 올리기’ 한 마디만 나올 뿐, 마땅히 시골사람 삶과 살림과 삶터를 헤아리는 생각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느 국회의원 후보이든 돈을 들여 시설을 짓고 복지를 누리도록 하겠다고 밝힌다. 어느 국회의원이든 누구한테서 돈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헤아리지 않는다. 곰곰이 돌아보면, 국회의원 후보로 나온 사람 가운데 흙을 일구며 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건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회의원이 된 다음 스스로 논밭을 마련해 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돌보려 하는 사람도 없다.


  집으로 날아온 홍보자료를 읽는다. 집권당이든 야당이든 공약다운 공약을 적은 곳은 보이지 않는다. 삶다운 삶과 사랑다운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 누구한테 한 표를 주어야 할까. 옆지기가 문득 말한다. ‘찍을 사람 없으면 안 찍으면 되겠네.’


  박근혜라는 사람을 좋아한다면 박근혜라는 사람이 몸담은 정당에 한 표를 주면 되겠지. 집권여당이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야당 한 군데를 골라 한 표를 주면 되겠지. 집권여당이나 야당 모두 볼꼴사납다 여기면 진보나 민주노동을 말하는 곳에 한 표를 줄 수 있겠지. 아직 푸른 꿈을 이야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하기에 ‘녹색’이라는 일본말에 얽매이기는 하지만, 환경운동을 밝히는 곳에 한 표를 줄 수 있겠지.


  흙을 살리고 사람을 사랑하며 푸나무와 어깨동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즐겁게 한 표를 주고 싶다. 그래, 시골에서 흙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한 표를 줄 만한 사람이나 정당이 보이지 않는다면 ‘투표소에는 가되 누구한테도 아무 표를 안 주는 일’도 내 즐거운 삶을 누리는 내 좋은 민주정치가 되리라 생각한다. (4345.4.1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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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11 00:30   좋아요 0 | URL
마음가는대로 하는게 올바르다고 생각해요... ^^

파란놀 2012-04-11 05:47   좋아요 0 | URL
사람들 스스로 좋은 넋으로 일구는 삶이라면
엉터리가 국회의원으로 뽑히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카스피 2012-04-11 11:57   좋아요 0 | URL
이꼴 저꼴 보기 싫다고 투표안하면 나라가 망합니다요.꼭 투표 해야 겠지요^^
 


 도시문명은 시멘트 틈바구니처럼

 


  우리 집 뒷간 앞쪽에 조그맣게 구멍이 났다. 예전부터 이곳에서 살던 분이 흙마당에 시멘트를 넓게 발랐고, 시멘트마당 끝자락은 오랜 나날 비와 발걸음과 햇살에 바래고 닳으며 구멍이 난 데가 더러 있다.


  겨우내 구멍난 자리를 들여다볼 일이 없이 지낸다. 봄을 맞이해 들판에 푸른 물결 넘실거리려 할 무렵, 뒷간 앞 구멍에도 무언가 꼼틀거리는 빛깔이 보인다. 무얼까. 가까이 다가선다. 쪼그려앉아 바라본다. 제비꽃 세 송이 곱게 피었다. 어쩜 제비꽃 씨앗은 여기까지 퍼졌니. 다른 꽃들도 씨앗을 날려 여기에 깃들 만한데, 다른 들꽃은 아직 예까지 오지는 못하고 너희만 이곳에 깃들었니.


  고흥과 가까운 순천시로 나들이를 하며 거님길을 거닐다 보면, 시멘트돌로 깐 거님길 사이사이에서 풀이 비죽비죽 돋거나 민들레나 몇 가지 들꽃이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작은 들꽃과 들풀은 그야말로 작은 틈이 있으면 즐거이 뿌리를 내리고 기쁘게 줄기를 올리며 예쁘게 꽃송이를 피운다. 누가 바라보아 주어야 예쁘게 피우는 꽃송이가 아니다. 스스로 즐겁게 피우는 꽃송이요, 스스로 환하게 누리는 꽃송이라고 느낀다.


  도시문명은 시멘트와 같다고 느낀다. 그 어떤 다른 것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꽁꽁 발라 버린다. 숨 한 번 틀 수 없도록 꽉 틀어막는다. 그런데 이 시멘트 문명은 얼마 가지 못한다. 백 해는커녕 쉰 해조차 버티지 못한다. 남녘땅 서울 한강 둘레를 가로막은 시멘트 둑은 앞으로 몇 해를 버틸 수 있을까. 흙땅을 파고들어 시멘트를 들이부은 다음 지은 아파트는 몇 해나 버틸 수 있는가. 아스팔트로 길게 닦은 길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으려나.


  시멘트를 부은 땅에서는 아무 목숨이 살아날 수 없는데, 사람들은 집을 짓는다며 시멘트를 들이붓는다. 시멘트로 벽을 세우고 시멘트로 지붕을 얹는다. 사람이 살아갈 터를 헤아리기보다는 전기전자제품과 자가용을 걱정없이 둘 만한 자리로 꾸민다. 사람이 살아가는 집이지만 사람보다는 물질문명을 살핀다. 사람이 살아갈 나날이지만 물질문명을 건사할 뿐이다.


  촉촉히 내리는 봄비가 뒷간 앞 작은 구멍 작은 제비꽃 꽃망울과 잎사귀로도 떨어진다.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 가득하니 개구리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빗줄기 듣는 날에도 들새와 멧새는 논자락과 밭자락을 돌며 먹이를 찾는다. 봄을 맞이해 깨어난 개구리와 맹꽁이는 뭇새한테 좋은 봄밥이 되어 준다. (4345.4.1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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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11 00:30   좋아요 0 | URL
제비꽃을 사진을 통해 먼저 보게 되는군요.
저는 제비꽃을 정말 좋아해요. 이 꽃을 보면 봄이 왔구나 하고 알게 되니까요.

파란놀 2012-04-11 06:01   좋아요 0 | URL
봄이 무르익을 때에 제비꽃이 피고,
봄이 따스할 때에 민들레가 피는구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