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바다 곁을 걷는 어린이

 


  한여름에는 논이 풀바다를 이룬다. 오늘날에는 빽빽하게 심어 빽빽한 풀바다를 이루지만, 지난날에는 이처럼 빽빽한 풀바다는 아니었으리라 느낀다. 게다가 오늘날 벼포기는 씨알을 건드려 키가 작도록 만든다. 예전 벼포기는 키가 훤칠했다. 지난날에는 씨알뿐 아니라 볏짚도 알뜰히 건사해서 지붕을 잇거나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아서 써야 했으니, 볏짚 하나 버릴 일 없었다. 오늘날은 볏짚을 소먹이 사료로 삼거나 그냥 버리니, 굳이 벼포기가 길거나 굵어야 하지 않다.


  지난날에는 아이들이 논 사이에 숨으면 아예 안 보였겠지. 아마, 어른도 논에서 피사리 하는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겠지. 큰아이와 함께 여름논 곁을 걷는다.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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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양말

 


  큰아이는 곧잘 짝양말을 신는다. 한 짝을 맞추어 신는 양말 아닌, 짝짝이로 신는 양말이다. 틀림없에 제 짝이 한 켤레로 있는 양말인데, 짝짝이로 신으면서 어느새 한 켤레로 맞는 양말 한 짝이 사라지기도 하고, 제 짝이 사라지니 어쩔 수 없이 짝양말을 신기도 한다. 이 양말도 예쁘고 저 양말도 예쁘다면서 이리저리 신고 벗고 놀다가, 한 짝이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숨는 바람에 짝양말을 신기도 한다. 제 짝 한 켤레로 안 신고 짝양말 신은 모습을 아버지한테 들키면, 치마를 확 내리며 짝양말을 숨기고는 까르르르 웃는다. 쳇. 너 참 잘났어. 네가 빨래를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자꾸 새 양말 꺼내 신고 또 벗고 또 신고 하면서 방바닥에 네 양말을 잔뜩 늘어놓으려니. 네 마음껏 짝양말 신고 싶으면 네가 손수 빨아서 말리고 개서 건사하라구. 요 여섯 살 말괄량이야.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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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바다

 


  벼포기는 무럭무럭 자라 아이들 키보다 웃자랍니다. 옥수수포기도 씩씩하게 자라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 키보다 웃자랍니다. 수수도 해바라기도 모시도 모두 튼튼하게 자라며 높이높이 키를 뻗칩니다.


  여름날 들판에 서면, 이야 풀밭이네 하는 소리 아닌, 이야 풀바다로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자라나는 풀은 어느새 우리 키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풀숲에 깃들며 풀내음 물씬 받아먹습니다. 풀밭에 깃들며 풀소리 담뿍 받아들입니다. 바람이 불어 서걱서걱 노래를 짓습니다. 풀잎이 서로 몸뚱이 비비며 내는 싱그러운 노래를 짓습니다. 푸르게 빛나는 풀잎은 푸르게 속삭이는 노래입니다. 푸르게 싱그러운 풀잎은 푸르게 웃음짓는 노래입니다.


  풀바다에 안겨 춤을 추는 아이는 풀마음을 키웁니다. 풀바다에 뛰어들어 뛰노는 아이는 풀사랑을 보듬습니다.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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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맛 읽기

 


  오늘날 한국에서는 술을 곡식이나 물로 빚는다기보다, 화학조미료와 화학첨가물로 빚곤 한다. 이른바 소주란, 또 맥주란, 술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싶을 화학조미료덩어리요, 화학첨가물덩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어디에서 어떤 물을 길어올려 빚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한때 막걸리바람이 불었는데, 막걸리는 달달한 술이 아니다. 막걸리는 시큼한 술이요, 밥이 되는 술이다. 들일을 하며 몸이 쑤시고 결리는 일꾼들이 새로 힘을 북돋우라고 빚는 술이다. 곧, 막걸리는 집집마다 마을마다 손수 정갈히 심어 돌보고 거둔 나락으로 빚는 쌀술이지, 나라밖에서 사들인 쌀이라든지 밀로 빚는 단술이 아니다. 한국쌀 아닌 수입쌀을 써야 단맛이 더 난대서 막걸리조차 수입쌀을 쓰는데다가, 수입밀을 섞기까지 하는데, 이런 단술에 어찌 막걸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게다가 단맛 내는 화학첨가물은 또 얼마나 많이 타는가.


  들에서 힘껏 일하고 나서 한숨 돌리는 참을 먹으며 마시는 술이 아닌,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기름 좔좔 흐르는 먹을거리를 차려서 배가 터지고 골이 핑 돌도록 마시는 술이라면, 이러한 술 또한 술이라는 이름이 알맞지 않다. 골이 핑 돌도록 퍼붓는 술은 술 아닌 알콜덩어리요,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막짓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왜 이다지도 술을 많이 마시나. 한국사람은 왜 이렇게 술집 많은 마을에서 살아가는가. 삶이 너무 힘들어 술을 안 마실 수 없는 셈일까. 톱니바퀴 같은 도시요 쳇바퀴 같은 일자리라서 술로라도 몸과 마음을 달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일까. 자동차와 공장과 아파트에서 내뿜는 매캐한 바람에 휩싸여 맑은 바람이란 하나도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니까, 술로라도 몸과 머리를 달래야 할까.


  술이면 그예 술일 뿐이라지만, 시나브로 ‘참술’과 ‘거짓술’로 나눌밖에 없다고 느낀다. 어느 모임자리에 가거나 잔치자리에 가면 어김없이 술잔을 받아야 하다 보니, 이래저래 받는 술잔에서 한 모금 두 모금 입술을 적시면서 술맛을 천천히 느낀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인천에서 빚는 막걸리는 무엇보다 물맛부터 맛이 없네. 서울이나 부산이나 인천처럼 커다란 도시에는 흙을 일구어 쌀을 거두는 시골숲이 없다 보니, 서울쌀도 부산쌀도 인천쌀도 아닌 어디에서 사들이는지 알 길 없는 쌀을 쓰느라, 곡식맛도 느낄 수 없네. 화학첨가물을 얼마나 넣었는지 환히 보이네. 탄산은 또 얼마나 섞는지 뻔히 보이네. 포천 막걸리라 한들 대수롭지 않네. 조그마한 시골 면에서 조그마한 시골마을 쌀과 물로 빚는 막걸리가 아니라면, 이제 어느 막걸리도 마실 만하지 않네. 고장마다 소주가 다르다 하지만, 이곳에 간들 저곳에 간들, 화학증류 소주란 내 몸을 살리거나 살찌우는 술이 못 되네. 이런 술을 마시면서 어떤 힘을 낼 만하려나. 이런 술을 마시는 동안 새 넋이나 새 사랑이 피어날 수 있으려나.


  들일 하던 들사람이 들밥 먹고 들술 마시면서 하루하루 아름다이 누린 한겨레인데, 이제 들일 하던 들사람 없고, 들밥 먹고 들술 마시던 삶이 사라졌대서, 막술과 거짓술만 나돌아도 되려나. 아니, 들판을 메꾸거나 밀어 없애 찻길을 닦고, 도시를 넓히며 아파트를 지으니까, 이렇게 막돼먹은 터전에서는 막돼먹은 밥과 술을 퍼부을밖에 없으려나.


  정갈한 시골마을에는 정갈한 술내음이 흐르고, 조용한 시골마을에는 조용한 밥내음이 흐른다. 왁자지껄 어수선하거나 시끄러운 도시에는 어수선한 술내음과 시끄러운 밥내음이 어지럽게 춤춘다.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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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연약한 1
이쿠에미 료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198

 


내가 아는 마음
― 깨끗하고 연약한 1
 이쿠에미 료 글·그림,박선영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2006.2.25.

 


  누구나 배운 대로 살아가요. 어떤 삶을 가르쳐서 어떻게 살아가도록 이끄는가 하고 슬기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슬기롭게 생각하지 못하는 바람에 어떤 삶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잊거나 놓치면, 서로서로 힘겹거나 고단한 나날이 되고 말아요.


  누구나 배운 대로 사랑해요. 어떤 사랑을 보여주거나 나누는 하루인가를 곱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해요. 따사롭게 사랑하지 못하는 바람에 어떤 나날을 어떤 사랑으로 누릴 때에 즐거운가를 잊거나 놓치면, 서로서로 아프거나 슬픈 이야기가 자꾸 태어나요.


- ‘꾹 참고, 전철을 타고, 학교에 간다.’ (12쪽)
- ‘함께 있어 달라는 것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뭐랄까.’ (44쪽)


  그냥 먹는 밥이란 없습니다. 내 온 사랑을 담아 짓는 밥입니다. 어버이가 빚은 사랑이 깃든 밥을 먹는 아이들입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랑을 새로 지어 밥 또한 새로 짓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를 바라보며 사랑을 새로 누리고 밥 또한 새로 누립니다.


  어버이와 아이가 주고받는 말 또한 서로서로 새로 일구는 사랑입니다. 둘은 아무 말이나 섞지 않습니다. 가슴속 가장 깊은 데부터 길어올린 사랑을 담은 말을 주고받아요. 마음속 가장 너른 터에서 보듬고 건사한 사랑을 실은 말을 나눕니다.

 

 


- ‘왜 다들 그를 보지 않는 걸까. 왜 그를, 신경쓰지 않는 걸까. 이상하다. 내 눈에는, 제일 먼저 들어오는데.’ (65쪽)
- “그런데 왜 늘 넷이 붙어 다니는데?” “그야 친구니까.” (91쪽)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삶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마음이 없는데 사랑이 싹트지 않아요.


  마음으로 내 하루를 짓습니다. 마음속으로 지은 하루를 몸으로 누립니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이 마음을 아끼거나 보살피는 길을 학교에서 조금도 느끼지 못했어요.

 

  학교는 늘 시험공부에 바빠요. 학교는 늘 시험성적에 목을 매달아요. 학교는 늘 숙제와 체벌과 규칙이 판쳐요. 학교는 늘 꾸지람과 윽박지름과 주먹질이 어지러웠어요.


  학교를 벗어나면서 시나브로 내 마음을 찾아요. 학교 울타리를 떠나면서 천천히 내 마음을 느껴요. 학교 졸업장을 버리면서 드디어 내 마음을 알아요.


  생각해 보면, 학교라서 나쁠 수 없어요. 학교를 학교 아닌 감옥처럼 만들어 교사는 교사 아닌 감옥지기처럼 학생을 다스리려 하니까 나빠요. 학교도 스스로 나쁜 길로 빠지고 교사도 스스로 나쁜 길로 허덕이며 학생마저 스스로 나쁜 길에서 헤매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도 턱없이 모자란 삶이라 하는데, 왜 우리는 학교에서 시험공부에 들볶이면서 동무 아닌 시험성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함께 좋아하고 사랑하며 어깨동무하면 즐거운 나날일 텐데, 왜 우리는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힌 채 너른 숲과 들과 메와 바다하고는 동떨어진 데에서 쳇바퀴를 굴려야 할까요.


- “하지만 난 이 학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모두랑 같이 있으니까 재밌잖아.” (110쪽)
- ‘오래된 (아파트)단지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바뀐 게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내년, 내후년, 10년 후, 어떻게 변해 갈까?’ (121쪽)

 

 


  학교에서 직업훈련이나 직업교육을 할 까닭은 없어요. 학교에서 교과서 지식을 끝없이 외울 까닭은 없어요. 직업은 저마다 스스로 찾으면 돼요. 지식은 스스로 책을 읽어서 얻거나, 스승을 찾아가서 몸으로 익히면 돼요. 그러니까, 따로 학교라는 데가 없어도 돼요. 아니, 오늘날과 같은 학교는 참말 없어져야 해요. 졸업장과 시험성적으로 사람을 뭇칼질하는데, 이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거든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으니 아무것도 배울 수 없지요. 초등학교이든 중·고등학교이든 아이들은 어떤 삶도 사랑도 꿈도 배우지 못해요. 제도권학교 열두 해 동안 아이들은 주눅이 들고 풀이 죽으며 기운을 잃어요. 열두 해 학교살이를 하면서 흙하고 동떨어지고 숲하고 등지기만 해요. 열두 해 학교살이를 하느라 살림짓기하고 동떨어질 뿐 아니라 사랑짓기하고도 등지고 말아요. 학교를 다니며 스무 살이 된 아이들 가운데, 사랑을 참다이 깨달은 아이는 몇이나 될까요. 학교를 다니며 스무 살을 맞이한 아이들 가운데, 꿈을 참다이 품은 아이는 몇이나 되나요.


- ‘난 아무것도 몰라. 하루타의 마음도, 아사미가 사실은 누굴 좋아했었는지도, 아무것도, 몰라.’ (149쪽)
- ‘남자들은 다 벌레 같아. 좋은 사람도 있찌만, 이상한 사람이 더 많아. 그런데도 소중한 사람은 별로 없고, 하루타, 하루타가 없는 세상은 너무나 이상해.’ (174쪽)


  이쿠에미 료 님이 그린 만화책 《깨끗하고 연약한》(학산문화사,2006) 첫째 권을 읽습니다. 이 만화책뿐 아니라, 여느 일본만화책 어느 것을 보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이야기에 ‘사랑’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일본만화책을 보면, 일본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학교에서 사랑만 나누나 싶을 만큼, 참으로 사랑 이야기 그리는 만화가 아주 많아요.


  그러나, 일본만화만 이와 같지 않아요. 어느 나라 어느 만화라 하더라도, 중학교를 다니건 고등학교를 다니건, 아이들 삶에는 ‘시험공부’ 이야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아이들 삶에는 오직 ‘사랑’이 흐릅니다. 시험성적은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직업교육이나 직업훈련은 조금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스스로 꾸리며 가꿀 사랑을 얼마나 곱고 따사롭게 돌볼 수 있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곧, 교사나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사랑을 보여주고 가르치며 물려줄 때에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교사나 어버이한테서 저마다 스스로 일구며 빛내고픈 사랑을 여쭙고 배울 때에 아름답지요.


-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득한 저편에, 불빛이 보인다.’ (182쪽)


  어른과 아이가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수 있기를 빌어요. 어버이와 아이가 마음과 마음으로 보금자리를 일굴 수 있기를 빌어요. 의무교육 때문에 보내는 학교가 아닌, 아이들이 참말 사랑을 보고 듣고 배우며 익힐 만하다 싶으면 학교에 보낼 수 있기를 빌어요. 그러니까, 굳이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사랑을 꽃피웁니다. 아니, 학교를 보내지 않을 때에 환하고 맑은 사랑을 꽃피우는구나 싶어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말을 배우지, 교과서로 말을 배우지 않아요. 아이들은 어버이 어깨너머로 밥짓기를 배우지, 요리책이나 요리학원에서 밥짓기를 배우지 않아요. 아이들은 어버이 손길에서 빨래와 청소와 살림일을 배우지, 가정실습이나 가사수업이나 대학교 가정학과 같은 데에서 빨래와 청소와 살림일을 배우지 않아요. 아이들은 이녁 어버이가 어떤 사랑으로 저를 낳아 돌보았는가 하는 기나긴 삶을 톺아보면서 ‘육아’를 배워요. 따로 육아책이나 육아방송을 들여다보아야 아이를 사랑하며 돌보는 이야기를 배우지 않아요.


  학교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학교는 허울일 뿐이에요. 학교가 있어 따돌림이나 괴롭히기가 생긴다 할 만해요. 학교 때문에 아이들이 시들거나 아프구나 싶어요.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아요. 마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해요. 마음으로 삶을 읽으면서, 마음으로 삶을 살찌워요.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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