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종이를 보면



  종이를 보면 늘 멈춘다. 글종이도 빈종이도 쪽종이도 알림종이도, 내 손에 닿으면 어김없이 책 사이로 스윽, 책살피로 바뀐다. 어릴적에 딱지치기를 되게 즐기긴 했으나, 종이를 딱종이로 접으면 언제나 아까웠다. 그냥 깨끗하고 반듯하게 모으고 싶었다. 하루종이(일력)도 달종이(달력)도 버리기 싫었다. “어머니, 1984년으로 넘어가면 1983년 달력은 역사가 되잖아요. 나중에 1994년에 돌아보거나 2004년에 돌아보면 무척 재미있을 테니, 버리지 말고 하나 남기면 어때요?” “에그, 그러면 집이 쓰레기장 되게? 달력이 뭐가 된다고 모으게?” 어쩐지 ‘과자 담은 자루’도 버리기 싫었다. 구멍가게에서 하나에 80원에 팔던 초코파이를 담은 비닐자루를 깨끗하게 헹궈서 책으로 누르고 펴서 몰래 모았다. 어머니는 내가 모으는 종이에 과자자루를 낱낱이 찾아내어 말끔히 버렸고, 나는 다시 모으고 어머니는 또 샅샅이 찾아내어 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래된 칸(책장)을 그냥그냥 다 버리려고 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버리려던 오래된 칸을 짐차를 불러서 모두 건사했다. “아니, 쓰레기를 왜 돈들여서 가져가려고 해?” “그래도 우리집에서 서른 해를 넘게 함께 지내던 살림이잖아요. 제가 시골로 가져가서 잘 쓸게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버리려던 칸을 살피니, 나랑 언니가 어릴적(1980년대 첫무렵)에 자주 앓느라 뻔질나게 돌봄터를 드나들며 내밀던 ‘병원 진찰권’이 잔뜩 나왔다.


  《결국 다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를 읽는다. 이레 앞서 부산에서 장만해서 고흥으로 데려왔고, 엊그제 고흥서 부산을 가는 길에 다시 시외버스에서 읽는데, 부산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마저 읽는다. 등짐에 깃든 책은 그야말로 나라 한 바퀴를 얼결에 같이 돈다.


  ‘승차권 집계봉투’를 본다. 이 종이를 놓칠 수 없다. “기사님, 이 귀여운 종이를 얻을 수 있을까요? 제가 국어사전 쓰는 사람이라서 하나 얻어서, 자루에 적힌 글결을 살피고 싶어요.” “네? 이 봉투요? 이 봉투를 어데 쓰게요? 쓸데가 있답니까?” “그게, 이 종이에 적힌 말 때문에…….”


  아무튼 얻고야 만다. 온누리 모든 말과 글과 책을 이 손길에 담고픈, 책벌레에 글벌레에 말벌레이기까지 한 모습을 새삼스레 느낀다. 종이 한 자락을 얻으려고 말을 거는 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본다. 한때 쑥스럽거나 부끄러워도 된다. 종이를 얻고 싶고, 종이를 건사하고 싶고, 종이에 적힌 뭇말과 뭇글을 헤아리고 싶다.


  읽고 읽고 읽는다. 쓰고 쓰고 쓴다. 좋아서 하지는 않는다. 온말에 온씨를 담아서 온사람이 저마다 온꽃으로 피어나는 온길을 그리기에 온하루를 온글씨로 다독인다. 온글에 온숨을 담아서 온이웃이 서로서로 온숲으로 일렁이는 온나무를 그리기에 온곳에서 온노래로 품는다. 2025.10.27.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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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책넋

틀린날짜



  부산에서 사흘을 보내고서 서울로 건너왔다. 저녁나절에 쉴 곳을 찾아서 길손집으로 간다. 서울 이웃님이 푹 쉬라면서 미리 한칸 잡아 주었다. 그런데 길손집에 닿고 보니 오늘 아닌 이튿날 잡았다고 알려준다. 마침 오늘 모든 칸이 찼다고도 한다. 속으로 끙 소리가 나지만 어쩔 길이 없다. 누구나 달종이 날짜를 잘못 읽을 수 있지 않은가. 나도 딴 날짜로 엉뚱하게 잡고서 헤맨 바 있을 뿐 아니라, 이름은 같은 다른 길손집으로 잘못 찾아가서 한참 돌아가느라 밤에 택시를 겨우겨우 불러서 애먼 돈을 쓴 적까지 있다.


  서울 동작구에서 1.8km 즈음 책짐을 잔뜩 지고 안은 채 걸었다. 한가을이 저무는 이즈음이 춥다고 여기면서 두툼하게 껴입은 사람이 아주 많은데, 나는 아직 민소매에 깡동바지 차림이다. 나는 늦가을 첫머리까지 민소매를 입는다. 여기에 맨발 고무신이기까지 하다. 내가 버선을 꿰려면 -2℃ 즈음은 되어야 한다. 늘 걷고 오래 걸으면 발가락이나 발바닥이 안 시리다. 걸어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면 발가락도 발바닥도 발목도 시릴 테지. 걸어다니는 사람은 두툼옷을 입을 일이 없다. 책으로 가득 채운 등짐을 즐겁게 지는 사람도 얇게 입고서 늦가을까지 보낸다.


  그런데 등짐 왼멜빵이 튿어진다. 이제 이태 즈음 메는 등짐인데 벌써 멜빵이 튿어지다니. 아니, 등짐에 책을 너무 꾹꾹 눌러담은 탓이다. 내가 잘못했다. 멜빵이 튿어질 만큼 등짐에 책을 채우지 말자. 끈으로 묶어서 시골집으로 나르자. 아니, 밤과 새벽에 길손집에서 책을 읽겠다면서 등짐을 괴롭히지 말자. 아니, 길손집에서는 일찍 자고 푹 자면서 책은 그냥 꾸러미에 담아서 시골로 보내자. 책은 시골에서 읽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잘못했다. 2025.10.27.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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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삶말/사자성어] 무사수행



 무사수행의 최종 목표는 → 가다듬는 마지막길은

 여전히 무사수행 중이다 → 아직 갈고닦는다

 재차 무사수행에서 실패했다 → 섶쓸개를 또 못 이뤘다


무사수행 : x

무사(武士) : 무예를 익히어 그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 ≒ 궁전지사·무부(武夫)·싸울아비

무자(武者) : x

수행(修行) : 1. 행실, 학문, 기예 따위를 닦음 2. [불교]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불도를 닦는 데 힘씀 3. [종교] 생리적 욕구를 금하고 정신과 육체를 훈련함으로써, 정신의 정화나 신적(神的) 존재와의 합일을 얻으려고 하는 종교적 행위



  일본말인 ‘무사수행(武者修行むしゃしゅぎょう)’입니다. 일본말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한자 ‘武者’를 씁니다. 이모저모 살펴 우리말로는 ‘가다듬다·다스리다’나 ‘갈고닦다·갈닦다·갈다·닦다’로 손볼 만합니다. ‘닦음질·담금질’이나 ‘마음닦기·마음짓기·마음돌봄·몸닦기’로 손보아도 됩니다. ‘벼리다·배우다·익히다’나 ‘길·길닦기·길뚫기’로 손보아도 될 테고요. “나를 가꾸다·나를 돌보다·나를 키우다”로 손보고, ‘나살림·나가꿈·나돌봄·나키움’으로 손봅니다. ‘불굿닦기·섶쓸개·쓴맛참기·쓴맛닦기·쓸개맛·장작쓸개’로 손보며, ‘쌓다·쌓아올리다 일배움·파다·파내다’로 손봐요. ㅍㄹㄴ



무사수행의 끝에 이 몸 드디어 무현의 경지에 도달하다

→ 갈닦은 끝에 이 몸 드디어 가락님에 이르다

→ 장작쓸개 끝에 이 몸 드디어 가락꽃에 닿다

→ 쓴맛참기 끝에 이 몸 드디어 가락빛을 이루다

《평범한 경음부 5》(쿠와하리·이데우치 테츠오/이소연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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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무현 無絃


 중국 미학의 개념인 무현(無絃)이란 → 중국멋인 가락꽃이란

 신의 미소와 같은 무현(無絃)의 음률로 →  하늘웃음 같은 노래빛살로


  ‘무현(無絃)’은 “1. 줄이 없음 2. 줄 없는 거문고. 줄이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울린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 무현금”을 가리킨다는군요. 우리말로는 ‘가락꽃·가락빛’이라 하면 됩니다. ‘노래꽃·노래빛’이라 할 만합니다. ‘노래빛살·노래빛발·노래빛꽃’이라 해도 되고요. 이밖에 낱말책에 한자말 ‘무현(武絃)’을 “1. [음악] 가야금의 첫째 줄의 이름 2. [음악] 거문고의 여섯째 줄의 이름 3. [음악] 향비파의 첫째 줄의 이름 4. [음악] 당비파의 첫째 줄의 이름”처럼 풀이하면서 싣지만 털어냅니다. ㅍㄹㄴ



무사수행의 끝에 이 몸 드디어 무현의 경지에 도달하다

→ 갈닦은 끝에 이 몸 드디어 가락님에 이르다

→ 장작쓸개 끝에 이 몸 드디어 가락꽃에 닿다

→ 쓴맛참기 끝에 이 몸 드디어 가락빛을 이루다

《평범한 경음부 5》(쿠와하리·이데우치 테츠오/이소연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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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정역 定譯


 신뢰할 만한 정역(定譯)으로는 → 믿을 만한 바른글로는

 우리가 선택한 정역(定譯)은 → 우리가 뽑은 곧은글은


  ‘정역(定譯)’은 “표준이 되는 바른 번역”을 가리킨다는군요. ‘곧은글·곧은붓·곧은소리·곧은말’이나 ‘똑바른글·똑바른글씨·똑바른붓·똑바른소리·똑바른말’로 다듬습니다. ‘맞다·맞말·맞는말·맞는말씀·맞는얘기’로 다듬을 만하고, ‘바른글·바른글씨·바른붓·바른소리·바른말’로 다듬어요. ‘옳다·옳은길·옳은뜻·옳은꽃·옳은빛’이나 ‘옳길·옳뜻·옳꽃·옳빛’으로 다듬지요. ‘옳은소리·옳은말·옳은글·옳은글씨·옳은붓’으로 다듬어도 어울립니다. ‘참글·참붓·참말·참말로·참으로·참소리·참목소리’로 다듬어도 되고요. 이밖에 낱말책에 한자말 ‘정역’을 일곱 가지 더 싣지만 다 털어냅니다. ㅍㄹㄴ



정역(丁役) : 예전에, 여러 나라의 정남(丁男)·정녀(丁女)가 중국 경도(京都)에 와서 여러 가지 일에 복역하던 일

정역(定役) : 1. 일정한 노역(勞役)이나 부역(賦役) 2. [법률] 징역형을 선고받은 재소자에게 주어지는 일정한 작업. 수형자의 연령, 형기, 건강, 기술, 성격, 취미, 직업, 장래의 생계 따위의 사정을 참작하여 부과한다 3. [역사] 새로 노비가 된 사람에게 매기던 구실. 또는 그런 일

정역(征役) : [역사]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정역(停役) : 하던 일이나 역사(役事)를 그침 ≒ 정공

정역(淨域) : 1. [불교] 절의 경내(境內)나 영지(靈地) 2. [불교]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 인간 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난 곳에 있다 = 극락

정역(程驛) : [역사] 노정(路程)과 역참(驛站)을 통틀어 이르던 말

정역(整域) : [수학] 곱셈에 대하여 가환 법칙이 성립하고, 영이 아닌 임의의 두 원소의 곱이 영이 되지 아니하는 대수의 환(環). 정수의 집합은 물론 분수·유리수·실수의 집합도 정역이 될 수 있다



의미에서 탈선한 문장이 여러 채널을 오랫동안 거치며 정역의 탈을 쓰면 문장은 물론이고 화자의 의도도 곡해된다

→ 무슨 뜻인지 모를 글이 여러 곳을 오랫동안 거치며 바른글이란 탈을 쓰면 글에다가 글쓴이 마음도 비튼다.

→ 뜻모를 글이 이곳저곳 오랫동안 거치며 바른글이란 탈을 쓰면 글이 뒤틀리고 글쓴이 뜻도 뒤틀린다

《오역하는 말들》(황석희, 북다, 2025)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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