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
앨리스 프로벤슨 외 지음, 김서정 옮김 / 북뱅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바람과 햇볕과 물과 흙을 사랑해 주셔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 앨리스·마틴 프로벤슨,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북뱅크,2008)


 나이가 이백 살이나 삼백 살이나 오백 살이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 이 나라 곳곳에 있습니다. 끔찍한 전쟁통에도 살아남은 나무요, 고단한 식민지살이를 견딘 나무입니다. 예나 이제나 무섭디무서운 세금을 버틴 나무라 할 만하고, 서글픈 계급과 신분을 딛고 살아온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먼 옛날, 길을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깔지 않던 먼 옛날을 떠올려 봅니다. 아득한 옛날, 논이나 밭이나 논둑이나 밭고랑에 풀약을 치지 않던 아득한 옛날을 헤아려 봅니다. 모든 먹을거리는 사람들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아서 일구던 지난날을 곱씹습니다. 그 옛날 궁궐에서는 임금님이나 신하들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았을까요, 쓰레기처럼 내다 버렸을까요. 그 옛날 한양에서는 한양사람 똥오줌을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큰 문 넷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안쪽에도 논이나 밭이 있었을까요. 오늘날 서울 북촌이라 하는 곳에서 살던 옛날 양반이나 사대부들이 누던 똥오줌은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똥장군을 지고 똥오줌 뒷간을 치우던 일꾼이 따로 있었을까요. 똥장군을 지고 양반집이나 사대부집 똥오줌을 치우던 일꾼은 이 똥오줌을 농사짓는 성 바깥 사람한테 돈을 받고 팔았을까요.

 어느 때부터인가 건축법이 바뀌어, 시골에서 집을 지을 때에도 정화조를 묻고 수세식변기를 쓰도록 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집을 마련하자면 정화조와 수세식변기를 달아야 건축허가를 내주도록 법이 바뀌었습니다. 유기농 농사란 말이 좋아 ‘유기농’이라는 한자말이지, 토박이말로 쉽게 이야기하자면 ‘똥오줌 거름으로 짓는 농사’입니다. 사람똥이든 소똥이든 똥을 모아 삭힙니다. 먹고 남은 밥쓰레기를 건사합니다. 가을걷이를 한 논자락에서 목아지 남은 벼포기를 건사합니다. 가을이 지나며 잎을 떨구는 나무들은 제 잎을 제(나무)가 크는 거름으로 삼습니다. 제(나무)가 뿌리를 내린 흙이 튼튼해야 하니까 스스로 잎을 떨구어 이 잎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어 여름이 흐르는 동안 천천히 삭아 흙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나무는 제 잎을 거름으로 삼으며 흙을 돌볼 때에 가장 튼튼하게 살아갑니다. 나무는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받아먹으면서 제 잎을 키우다가는, 겨울나기를 할 때에는 이 잎을 흙한테 돌려줍니다.

 사람은 날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바람을 들이켜고 햇볕을 쬡니다. 다만, 요즈음 사람들은 날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지만, 바람을 들이킨다는 생각을 잊습니다. 바람을 들이키지 않으면 1분조차 살아갈 수 없는 줄 뻔히 지식으로 알지만, 자가용을 지나치게 자주 멀리멀리 몹니다. 전기를 너무 많이 쓰고, 전기 먹는 물건을 너무 많이 건사합니다. 도시에서 얻는 일자리는 내 몸이 살아가도록 돕는 자연한테 무엇 하나라도 알뜰히 돌려주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아니 날마다 먹은 밥부피만큼 내놓을 똥오줌을 자연한테 예쁘게 돌려주지 않아요. 모두 쓰레기처럼 다루거나 버립니다.

 햇볕조차 거의 받아먹지 않아요. 햇볕은 없어도 되도록 땅밑에 굴을 파서 오갑니다. 높은 건물을 세워 유리창과 벽으로 꽁꽁 막은 다음 한낮에도 전깃불을 환하게 켭니다. 일을 마쳤건 볼일을 다 보았건, 건물 바깥으로 나오기 무섭게 자가용을 타거나 땅밑길로 다닙니다. 하루 5분이나마 햇볕을 쬐는 도시사람은 퍽 드물다 할 만합니다.


.. 단풍나무 언덕 농장에는 누가 살까요? 우리들이 살아요. 개 두 마리, 말 다섯 마리, 돼지 한 마리도 살지요. 그리고, 거위와 닭, 소와 염소, 양, 또, 특별한 고양이 네 마리가 산답니다 ..  (3쪽)


 도시에서 지내던 때에는 꿈을 꾸기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지낼 때에도 해마다 봄이면 느티꽃을 보려고 여기저기 쏘다녔습니다. 버들꽃을 보려고 용을 썼습니다. 골목동네 이웃들이 예쁘게 돌보던 앵두나무와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와 석류나무와 호두나무와 배나무와 대추나무 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거닐곤 했습니다. 조그마한 내 살림집에는 이런저런 나무를 돌볼 수 없기에, 아이를 걸리거나 안고 몇 시간씩 요 골목 조 골목을 쏘다니면서 숱한 골목나무를 만났습니다. 자그마한 골목집 앞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서 시멘트조각을 들어내고 밤나무 두어 그루를 돌보는 골목집이란 얼마나 예뻤는지. 인천 율목동은 한자로 지은 동네이름이 ‘율목’이지만, 우리 말로 하자면 ‘밤나무’입니다. 관청이나 나라에서는 동네이름만 율목동이라 붙이고, 동네사람은 고즈넉히 밤나무를 돌봅니다. 때때로 두릅나무를 보고 엄나무를 봅니다. 골목동네에서 감나무는 퍽 흔하다 싶은 나무이고, 포도나무를 기르는 집이 제법 있습니다.

 한두 해쯤 살다 떠날 생각이라면 나무를 심지 않겠지요. 열 해쯤 집을 묵히면 돈이 되리라 꿈꾸었다면 돌과 시멘트를 골라 애써 텃밭을 일구지 않겠지요. 스무 해를 살고 마흔 해를 깃들이려는 마음으로 나무를 심거나 텃밭을 일굽니다. 내 아이와 살붙이를 사랑하는 넋으로 나무를 돌보거나 텃밭을 보듬습니다.

 요사이, 나라안 어디를 가더라도 벚나무가 가득합니다. 봄날 벚꽃이 예쁘기는 예쁘지만 지나치게 벚나무만 왕창 심습니다. 애써 심으려 한다면 한쪽에 벚나무일 때에 맞은쪽에 매화나무라든지 복숭아나무라든지 살구나무를 심으면 좋을 텐데요. 미루나무와 꿀밤나무와 잣나무를 심어도 좋을 텐데요. 왜 벚꽃만 보아야 하고 왜 벚꽃놀이만 즐겨야 하며 왜 벚꽃잔치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꼭 잔디를 심어 잔디밭을 이루어야 예쁘지 않습니다. 쑥밭을 이루도록 해도 즐겁습니다. 꽃다지밭이라든지 냉이밭이 되도록 해도 예뻐요. 흙땅이 흙땅 스스로 온갖 풀씨와 나무씨를 받아들여 조촐한 숲이 되도록 사람 손을 멀리할 때에도 참말 예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느티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해마다 느티꽃이 지고 느티열매가 맺으면서 느티씨앗이 땅으로 떨어져 천천히 싹을 틔우고 천천히 뿌리를 내리며 새롭게 크는 숱한 느티줄기를 만날 수 있어요. 커다란 느티나무 둘레 땅바닥이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이 아닌 흙바닥일 때에는 느티씨가 사람들 발길에 밟히지 않으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주 조그맣지만, 잎사귀 모양과 가지 생김새는 고스란히 느티나무인 자그마한 느티줄기가 무럭무럭 자랍니다.


.. 개를 안아 들어요. 저울에 올라가요. 둘이 같이 무게가 얼마인지 봐요. 개를 내려놔요. 저울에 올라가요. 혼자 무게가 얼마인지 봐요 … 고양이 몸무게도 그런 식으로 잴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말 몸무게도 잴 수 있어요. 저울이 그만큼 튼튼하고, 여러분이 말을 들어 올릴 수만 있다면요 … (말) 이븐을 싹싹 손질하고, 꼼꼼히 빗질하고, 깔끔히 다듬어 깨끗하고 예쁘게 만들어 놓으면, 진흙탕에서 뒹굴어요. 말이 뒹구는 걸 보면 정말 재미있어요. 지금까지 한 일이 말짱 허탕이 돼도 웃지 않을 수가 없어요 … (숫염소) 샘은 아이들이 가득 탄 마차를 끌 수도 있어요. 그러고 싶을 때만요! 가끔은 갇혀 있는 게 지겨운지 울타리를 부수고 나가기도 해요. 그러면 모두들 화를 내요. 울타리 고치는 일 때문만은 아니에요. 뛰어나간 샘이 장미를 먹어 버리거든요. 가시까지 다 먹어요, 글쎄 ..  (16, 23, 38∼39쪽)


 그림책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북뱅크,2008)를 읽습니다. 책 겉에 “뉴욕타임즈 선정 올해의 책 수상작”이라 큼직하게 적힙니다. 언제 적에 이러한 상을 받았는지 아리송합니다. 2007년이나 2008년에 이러한 상을 받지는 않았겠지요. 미국에서는 1974년에 처음 나왔으니까, 아마 그무렵에 이러한 상을 받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하고 단짝을 이루는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 계절》은 1980년대 첫무렵에 한 번 옮겨진 적 있습니다.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는 이번에 처음으로 옮겨졌지 싶습니다. 자그마치 서른다섯 해 만에 한국에 알려지는 책이라 할 텐데요, 2010년대 미국에서 ‘단풍나무 농장’ 같은 데가 살아남았을는지 사라졌을는지 궁금합니다. 퍽 외딴 시골자락에서 전기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자그마한 살림터는 몇 군데쯤 있을까요. 아미쉬 공동체라면 있겠지요. 다만, 전기가 없으니 인터넷도 없을 테고, 어쩌면 전화조차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편지를 받거나 부칠 수는 있겠지요. 아니, 편지조차 받을 수 없도록 외져서, 우체국으로 찾아가야 편지를 받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 나무 빽빽한 숲 한쪽 조용한 구석, 눈은 높이 쌓이고 참나무는 겨우내 잎을 달고 있는 곳에 우리가 사랑했던 사냥개 존이 묻혀 있어요. 고양이 세 마리도 있어요. 처음 같이 살았던 샴고양이 웹스터, 귀엽지만 지저분하고, 식탁에서 먹을 걸 슬쩍하곤 했던 하양 고양이 크룩, 맥스랑 닮은 통통한 수코양이 보이. 이 조용한 구석에서 가장 예쁜 들꽃이 자라요. 봄이 되면 눈이 녹기도 전에 첫 번째 새소리가 들려요. 부엉이가 이른 아침 나무 우듬지에서 우는 곳도 여기고, 건방진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곳도 여기예요. 여기서 엄마 사슴은 새끼를 낳고, 날아가던 거위들은 쉬어 가요. 여우가 사냥꾼을 피할 수 있는 곳도 여기예요 ..  (54∼55쪽)


 그림책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를 펼치면 아이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 외딴 시골자락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는지 안 다닐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학교를 다닐 테고, 어쩌면 학교를 안 다니겠지요. 학교를 다닌다면 이 시골자락 아이들은 꽤 멀다 싶은 길을 서로서로 동무가 되어 뛰고 달리고 놀고 어깨동무하면서 오가겠지요. 학교와 집 사이는 한 시간 남짓 걸어야 하는 길일 수 있고, 이곳 아이들은 하루 몇 시간씩 걷는 일이 익숙하겠지요. 자동차를 탈 일이란 거의 없을 테며, 굳이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거나 놀러 다닐 일이란 없겠지요.

 한국으로 치면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같은 데에 놀러갈 까닭이 없습니다. 집이 놀이터이고 농장이 놀이터이며 들판과 멧자락이 놀이터입니다. 냇물이 놀이터이고 우람한 나무가 놀이터이며 나무로 우거진 깊은 숲이 놀이터입니다.

 동물이 동물원에 갇히지 않습니다. 모든 짐승은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 깃들입니다. 집에서 키워 알이나 고기나 가죽이나 털이나 젖을 얻으려 하는 집짐승만 우리를 마련하여 기를 뿐, 사슴이든 여우이든 멧돼지이든 곰이든 다람쥐이든 숲과 들판과 멧자락에서 예쁘게 살아갑니다.

 집에서 말을 기르고 말을 타며 말을 돌봅니다. 열 살 안팎인 아이들이 혼자서 말을 타고 혼자서 말한테 먹이를 주며 혼자서 말을 쓰다듬고 닦아 줍니다. 열 살 안팎인 아이들은 날마다 흙에서 뒹굴고 햇볕에 그을리며 시원하거나 따뜻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들입니다.

 아이들한테는 따로 지구과학이나 생물이나 화학이나 사회나 도덕이나 정치경제 같은 과목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살림터에서 저희 동무랑 어버이랑 이웃하고 삶을 배웁니다. 작은 마을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나누는 이야기가 ‘국어’가 되고 ‘문학’이 됩니다. 해와 달과 별과 구름과 무지개와 미리내가 ‘산수’가 되고 ‘제2외국어’가 됩니다. 새소리를 살필 줄 알고, 빗소리를 가늠할 줄 알며, 바람소리를 알아챌 줄 압니다. 식물도감이 아닌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 푸나무를 껴안습니다.

 훌륭하다는 자연그림책이나 자연백과를 수백 수천 권 곁에 끼고 살아간대서 자연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나날이 되지 않습니다. 손수 흙을 만지면서 흙을 살필 때에 비로소 자연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나날이 됩니다.

 엊그제 음성군 소이면에 있는 어느 냇둑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이 냇물에 둑을 쌓으며 돌을 깔아 놓느라 벌써 66억 원이라는 돈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퍽 깊다 싶은 시골자락 자그마한 냇물인데, 이 냇물에 애써 둑을 쌓고 돌을 깝니다. 마치 서울 청계천을 보는 듯합니다. 충청북도 멧골이나 시골에는 남녘땅을 통틀어 ‘커다란 물줄기 넷’이 지나지 않습니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영산강이나 금강이니를 사람 손길로 쓰다듬는다면서 몇 조인지 몇 십 조인지 몇 백 조인지를 쓴다 하더니, 이렇게 조그마한 시골자락 물줄기를 구태여 건드리면서 수십 억원을 쓰는군요. 그나저나, 자그마한 시골자락 냇물을 만지작거리면서 쓸 66억 원이라면, 이 시골자락 사람들한테 햇볕전기를 쓰도록 시설을 갖추고, ‘똥오줌 거름 농사’를 짓도록 보탤 때에 참으로 시골자락 보금자리를 아끼거나 살리는 길이 아닌가 아리송합니다.

 5월을 앞둔 4월 끝자락입니다. 벼락이 내리치며 비가 퍼붓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 전투기나 군함이나 탱크가 하나도 없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전투기 한 대를 사들여 전투기에 기름 먹이고 전투기를 몰 군인을 키우며 전투기를 건사하느라 수백 억원을 쓰기보다는, 도시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시골자락 작은 집과 텃밭과 다랭이논을 조금씩 나누어 주면서 조용하면서 호젓하게 홀로서기를 하도록 해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꿈을 꿉니다. 군함 한 척 만든다며 수천 억원을 쓸 뿐 아니라, 군함 한 척을 몰거나 건사하거나 다루느라 수많은 군인을 키우고 먹이며 돌봐야 하는 데에도 수백 억원이 드는데, 이 수천 수백 억원을 아껴, 도시에서 조촐히 텃밭을 일구는 이들을 도울 뿐 아니라,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에서도 도심지 한켠에서 논밭을 마련해서 도시사람도 도시에서 내 먹을거리를 손수 일굴 수 있게끔 사랑을 나누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꿈을 꿉니다. 탱크 한 대를 만드는 데에 드는 돈과 품에다가 탱크 한 대를 모느라 들일 돈이라면, 이 나라 모든 집에 ‘퍽 좋은 자전거’를 한 대씩 거저로 줄 만한 돈이 될 테니까, 부디 이 나라에 탱크를 키우는 군산복합체보다 자연사랑·사람사랑·삶사랑이라는 사랑꽃이 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해마다 4월 끝무렵이면 아이 새끼손톱보다 훨씬 작지만 귀여우며 사랑스러운 느티꽃과 단풍꽃이 흐드러질 ‘단풍나무 언덕 농장’ 사람들은 언제나 귀여우며 사랑스레 살아가겠지요. (4344.4.30.흙.ㅎㄲㅅㄱ)


―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 (앨리스 프로벤슨,마틴 프로벤슨 글·그림,김서정 옮김,북뱅크 펴냄,2008.3.15./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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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일은 우스우니까


 집안일을 도맡지만, 이 한 가지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집안일 말고 집밖일을 도맡는다. 올해에는 손바닥만 한 참말 작은 텃밭을 알뜰살뜰 일굴 꿈을 꾼다. 여기에 내 일을 해 보고 싶어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한다. 이러는 동안 아이는 뒷전이 되며 심심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하고 틈틈이 함께 놀거나 아이하고 이곳저곳을 다니거나 한다.

 완다 가그 님이 쓰고 그린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라는 그림책을 보면서 한동안 속이 후련했다. 그렇지만 이 그림책은 그다지 사랑받지 못할 뿐 아니라, 이 그림책을 찬찬히 읽으며 집안일을 함께 맡으며 즐긴다거나 널리 헤아릴 만한 ‘한국 남자’는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다. 내 둘레에서 마주하는 ‘한국 남자’ 가운데 집안일을 안 우습게 바라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한국 남자 가운데 스스로 집일을 맡거나 즐기면서 ‘집안일을 하는 보람과 기쁨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글로든 그림으로든 만화로든 사진으로든 춤으로든 영화로든 연극으로든 보여주는 사람을 만나기 대단히 힘들다. 그렇다고 한국 여자 가운데 스스로 집일을 맡거나 즐기면서 ‘집안일을 하는 웃음꽃과 이야기꽃과 삶꽃’을 글로나 그림으로나 만화로나 사진으로나 담아내는 사람을 만나기 또한 참 힘들다.

 집 바깥에서 일하거나 돌아다니면서 글·그림·사진 들을 이루거나 펼치는 사람들은 집안일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집안일을 할 겨를이 없이 집 바깥일로 몹시 바쁠 테니까. 언제나 집 바깥일에 둘러싸인 채 살아갈 테니, 집안일 이야기를 어디에서든 펼치지 않겠지. 그래도, 배우 김성녀 님이 쓴 손뜨개 이야기는 퍽 놀랐다. 배우로 일하면서도 손뜨개를 하며 즐겁다고 느끼니까.

 집안일은 날마다 되풀이하면서 늘 끝나지 않을 뿐 아니라 새로 생기며, 안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데다가 더 쌓이니까,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등허리가 휜다. 아니, 집 바깥으로 살짝 돌아다닐 엄두를 내기 힘들다. 집안에만 있는다 하더라도 집안일을 매조지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 나는 참말 우습다 이야기하는 집안일을 하느라 책방마실조차 제대로 못하는데다가 책읽기마저 거의 못하고, 더더구나 집안일을 한답시고 복닥이지만 집안일조차 옳게 건사하지 못한다. 나는 바보이다. (4344.4.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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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티꽃


 느티나무에는 느티꽃이 핀다. 감나무에는 감꽃이 핀다. 배나무에는 배꽃이 핀다. 복숭아나무에는 복숭아꽃이 핀다.

 해마다 찾아오는 고마운 봄에는 온갖 풀과 나무마다 피어나는 갖가지 새 꽃봉오리를 만날 수 있다. 봄철 논둑에서 쑥을 뜯으면서 이 고운 쑥을 맛나게 먹다가도 어느 때부터 쑥꽃이 피면 더는 못 먹겠지 하고 생각한다. 쇠뜨기는 줄기를 뽑아 먹는다는데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지난해에는 쑥갓꽃을 보았다. 그렇지만 아직 쑥꽃은 못 보았다. 올해에는 꼭 쑥꽃을 보리라 생각하며 텃밭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쑥은 뜯지 않는다. 텃밭 풀뽑기를 할 때에도 쑥만큼은 고이 남길 생각이다.

 바람이 꽤 세게 부는 봄날, 산수유꽃과 참꽃과 벚꽃과 오얏꽃과 단풍꽃에 이어서, 조팝꽃과 느티꽃이 흐드러진다. 조팝꽃은 금세 알아볼 만하지만 느티꽃은 쉬 알아볼 만하지 않다. 아마, 오얏꽃이나 벚꽃은 누구나 알아볼 테지만, 또 매화꽃이나 딸기꽃은 곧장 알아챌 테지만, 단풍꽃이 어떤 꽃인지 들여다보기는 만만하지 않으리라. 느티꽃 또한 눈여겨보는 사람은 드물다. 해마다 새로 돋는 느티잎을 따서 밥에 얹어 먹는다든지 다른 풀잎과 버무려 지짐이를 구워 먹는다든지 할 사람은 더욱 드물겠지.

 몽글몽글 맺힌 단풍꽃처럼 몽글몽글 맺힌 느티꽃을 바라본다. 지난해 느티나무 열매(씨앗)가 떨어져 흙에서 뿌리내려 자라난 어린 싹을 내려다본다. 사람들이 느티나무 둘레에 하도 풀약을 쳐대기에 지난해라든지 지지난해에 돋은 새싹이 살아남기란 몹시 힘들단다. 논이든 밭이든 풀약을 많이 치니까, 마을 어귀 우람한 느티나무 둘레라고 풀약을 안 칠 수 없으리라 본다.

 두 해를 작은 풀싹처럼 자란 아주 어린 나무를 하나 캔다. 두 해를 자란 어린 느티라 하지만 손가락 하나로 흙을 살살 후벼서 팔 수 있다. 가지가 둘로 갈라져 올라온 느티를 캐며 줄기를 만지는데, 나무답게 줄기가 꽤 야무지다. 여느 풀이라 하면 말랑말랑하거나 보드랍다 할 텐데, 두 해를 묵은 어린 느티는 가늘고 작지만 야물딱지구나 싶다. 이렇게 야물딱지지 않고서야 이 둘레에서 뿌리를 내리며 제 삶을 지킬 수 없겠지. 너는 이곳에 있으면 어차피 풀약에 맞아 죽거나, 풀약에도 살아남는달지라도 웬만큼 키가 자라면 ‘요 몹쓸 잡풀!’ 하면서 목아지가 뎅겅 베일 테니까 우리 집 텃밭 가장자리 한쪽에서 예쁘게 자라 주렴. 둘째 아이가 태어나 열 살쯤 되면 어린 느티줄기가 나무로 자라서 그늘을 드리울 수 있을까. (4344.4.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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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가지 책


 여기 두 가지 책이 있다. 하나는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나온 자그마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11년에 나온 도톰한 책이다. 1961년에 나온 책은 깨알같은 글씨로 세로쓰기이다. 2011년에 나온 책은 글꼴이 커지고 가로쓰기이다. 1961년에 나온 책은 1961년에 젊은 나날을 보내던 이 가운데 이 나라 참배움과 참사람에 눈길을 두던 사람이 읽던 책이고, 2011년에 나온 책은 2011년을 살아가며 내 보금자리 참배움과 참사람에 눈길을 둘 사람이 읽을 책이다.

 1961년에 나온 이 책을 읽던 사람이 스무 살이었고 아직 살았다면 일흔 나이가 되겠지. 일흔 나이가 되었을 나이든 이는 2011년에 다시 나온 이 책을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이 될까. 2011년에 다시 나온 이 책은 앞으로 2061년까지 꾸준하게 새책방 책꽂이를 지키면서 2061년에 젊은 나날을 보낼 사람한테까지 마음밭 일구는 쟁기와 같은 선물을 베풀 수 있을까. 쉰 해에 걸쳐 두 차례(사이에 한 차례 ‘간추림판’이 나온 적 있음) 나온 이 책은 《인간의 벽》(이시카와 다쓰조 씀)이다. (4344.4.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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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벽 1 - 거대한 슬픔
이시카와 다쓰조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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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하는 사람은 울타리를 세우지 않아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75] 이시카와 다쓰조, 《인간의 벽 (1)》(양철북,2011)



- 책이름 : 인간의 벽 1
- 글 : 이시카와 다쓰조
- 옮긴이 : 김욱
- 펴낸곳 : 양철북 (2011.3.30.)
- 책값 : 14000원



 (1) 사랑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이를 줄세우지 않습니다. 어버이로서 집에서건 교사로 학교에서건 아이를 줄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바라볼 때에 시험성적이 어떻다고 따지거나 무슨 좋은 재주가 있다거나 얼굴이 어떻게 예쁘다 하면서 줄세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른이라면 언제나 따스하면서 보드랍게 손을 내밀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사랑하는 손길이기에 따스합니다. 사랑어린 몸짓이기에 보드랍습니다.

 누구나 사랑받을 때에 즐겁습니다. 누구나 사랑받지 못할 때에 괴롭습니다.

 누구라도 사랑할 때에 기쁩니다. 누구라도 사랑하지 못할 때에 갑갑합니다.

 아이한테든 어른한테든 삶을 잇도록 이끄는 힘은 사랑입니다. 밥그릇에 사랑을 담고, 말마디에 사랑을 담습니다. 눈빛에 사랑을 싣고, 손길에 사랑을 싣습니다. 때로는 회초리에도 사랑을 깃들일 수 있겠지요. 온몸 가득 사랑인 사람이라면 손에 무얼 쥐거나 놓더라도 사랑이 되겠지요. 온몸 가득 감싸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면 손에 김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을 들었어도 차갑거나 메마릅니다. 돈이 없더라도 사랑이 있으면 배부르고, 돈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배고픕니다.


.. 아이들을 민주시민으로 키워 내려면 먼저 선생 자신이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 시노다 선생의 눈물은 오열로 바뀌었다. 더 따라 부르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을 더 아름답게, 밝게 살고 싶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 그것만이 행복이며 삶의 보람이다 … “선생 본인이 아이들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다면 결국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거든요.” ..  (120, 212∼213, 219쪽)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사람이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나 사랑을 못 나누는 사람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나눔이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일이란 서로를 꾸밈없이 받아들이며 아낌없이 돌볼 수 있는 매무새입니다. 틀에 가두지 않을 뿐더러 틀에 갇히지 않는 사랑입니다. 좋은 길이니까 어서 오라 부르지만, 좋은 길이니까 억지로 밀어넣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착한 길입니다. 착하지 않으면서 사랑길을 걷지 못합니다. 사랑길을 걷는데 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길은 착하게 일구며 즐기는 어여쁜 내 삶길인 셈입니다.

 사랑하기에 착하고, 착하기에 바릅니다. 바르기에 따뜻하며, 따뜻한 만큼 넉넉합니다. 넉넉한 흐름으로 보드라운 결과 무늬를 아끼고, 보드라이 아낄 줄 알면서 신나게 즐기거나 나눕니다.

 지식을 가르치려는 교과서만 있는 학교라면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고, 지식은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식을 다스리거나 익혀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채 지식을 다스리거나 익힐 때에는 슬픕니다. 사랑하고 살아갈 동무랑 이웃이랑 살붙이를 헤아리면서 다스리거나 익힐 지식입니다. 내 밥그릇을 키우거나 단단히 거머쥐려고 다스리거나 익힐 지식이 아닙니다.


.. 수신 과목이 사라지고 도덕이라는 독립된 학과도 없지만 선생들은 굳이 그런 과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과서였다 … “요즘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는 오늘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부모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훌륭하게 자란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개성이 부족한 아이일수록 시키는 일은 잘합니다 …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 혼자서는 생각할 줄도 모르는 사람, 개성도 없고 신념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모나 선생이 시키는 건 무조건 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아이들은 커서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겁니다.” … 이 사람은 월급 때문에 일하는 선생이 아니다.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선생이 아니다. 교육의 참된 의미를 알기에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안으려고 한다 … 교육을 걱정하는 사와다 선생의 열정은 지금 이 교무실에서는 오히려 고독하게 느껴졌다. 동료 교사들에게서 외떨어져 자기 혼자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다 ..  (118, 227, 327, 330쪽)


 사랑으로 가득한데 돈이 없어 쪼들린다면 퍽 힘들 만합니다. 그래요, 퍽 힘들 테지요. 그렇지만, 힘든 살림살이를 견디거나 버티거나 이기거나 받아들이는 기운은 사랑입니다. 돈이 더 있거나 돈이 넘치기 때문에 즐거운 삶이 되지 않아요. 돈이 더 있거나 돈이 넘칠 때에는 사랑을 잊습니다. 돈에 따라 흐르는 삶이 될 때에는 사랑이란 하찮거나 보잘것없습니다. 말 그대로 돈이 좋은 나날일 테니까요.

 돈이야 벌면 됩니다. 돈이야 얻으면 됩니다. 돈을 생각하기 앞서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난 보금자리에서 누구하고 어떻게 새 하루를 보낼까 하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사랑할 사람이 짊어지거나 느끼거나 품에 안은 여러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한테 가장 모자란 곳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가장 힘들거나 가장 바라는 대목이 무엇인가를 돌아봅니다.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걷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길을 걸어, 내가 걷는 이 길에 무엇이 있고, 내가 걷는 이 길을 따라 어떤 삶이 있는지를 헤아립니다. 찬찬히 찬찬히 등허리를 주무르고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아픈 이한테 도움이가 되고 튼튼한 이한테 길동무가 됩니다.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나부터 믿습니다. 믿고 손을 내밀 수 있게끔 나부터 믿으면서 손을 내밉니다. 믿고 가만히 바라볼 수 있도록 나부터 믿으면서 가만히 바라봅니다. 믿고 이야기할 수 있게끔 나부터 사랑스레 믿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 교사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아이들의 인격이 달라진다. 위험하고도 무서운 이야기다. 그런데 학부모들은 이 같은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만큼 학교와 교사를 믿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게으르기 때문이다 … 현재의 학교 제도에서는 이 아이를 다른 아이들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아이에게 매달리는 것이 선생의 마음이다 … 선생은 사랑이 아이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아이의 변화된 마음이 아이의 행동을 새롭게 이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덕교육이 아닐까 … “그럴까요?” 시노다 선생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 사람은 아이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아이들 마음속에 추함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질투심도, 허영심도, 교활함도 있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느냐, 추함을 발견하느냐 하는 것은 교육자와 비교육자를 구분하는 오직 하나뿐인 근거다 ..  (217, 325, 340, 341∼342쪽)


 저쪽에서 내 뒷통수를 후려갈기는데 내가 얌전히 참을 수 있겠느냐 할 만합니다. 저쪽에서 내 발을 밟고는 아무 거리낌이 없는데 내가 뿔이 안 날 수 있겠느냐 할 만합니다. 저쪽에서 자꾸 딴죽을 걸거나 가로막는데 내가 골이 안 나겠느냐 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면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사랑을 하고 싶으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생각을 하자면 내 몸을 움직여 내 삶을 건사할 노릇입니다.

 가는 말이 곱다지만 오는 말은 안 고울 수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곱지 않은데 오는 말만 곱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어찌 되든 가는 말이 고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는 말이 고울 때에만 가는 말을 곱게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 안 따라 준대서 아이들한테 윽박지르는 사람이라면 교사라 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 말을 잘 안 듣는대서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손찌검하는 사람이라면 어버이라 하기 힘듭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리거나 작거나 아프거나 다친 가슴을 들여다보아야 교사요 어버이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며 차츰 단단해지거나 슬기롭게 거듭나거나 아픔이 여물기를 바라는 마음결로 아이들을 보드라이 어루만져야 할 교사요 어버이예요.


.. 이 그림에는 ‘우’를 주고, 저 그림에는 ‘양’을 준다. 과연 이런 평가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는 작품이 아니다 … 담임선생이라면 이 그림에 점수를 매기기 전에 학생이 행복하지 않은 까닭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학생의 마음을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점수를 매기는 것 따위는 교육이 아니다. 58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구별하는 것은 교육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 시노다 후미코는 50∼60장이 되는 그림을 앞에 두고 어떻게 채점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다. 기계처럼 우열을 정하는 것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채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교는 교사에게 아이들을 채점하라고 명령한다. 교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마음을 ‘우’와 ‘양’으로 구별한다. 월급을 받는 ‘피사용인’의 숙명이다 ..  (185, 187, 191∼192쪽)


 누구한테든 따로 교과서로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에는 굳이 교과서나 교재가 없어도 됩니다. 온누리 모든 사람과 흙과 나무와 바람과 햇볕이 교과서이고 교재이며 책입니다.

 봄날 햇볕은 수우미양가로 나뉘지 않습니다. 겨울날 찬바람은 가양미우수로 가르지 않습니다. 입맞춤을 수우미양가로 살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마음결과 손길과 눈길은 가도 양도 미도 우도 수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스러운 마음결이거나 손길이거나 눈길입니다.

 우리 집 아이는 언제나 우리 집 아이입니다. 우리 학교 아이는 노상 우리 학교 아이입니다. 저마다 고운 아이요, 누구나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하나하나 착한 삶이요, 모두 고마운 목숨입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사랑을 즐기고 사랑을 나눌 씩씩한 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거나 도울 어른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제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를 숫자나 점수로 따지거나 재지 않도록, 오직 사랑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얼싸안도록 이끌거나 도울 어른으로 지내야 합니다.

 지식을 가르칠 어른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치며 삶을 나눌 어른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며 갖출 지식을 아이들 스스로 깨닫도록 보드라이 알려주거나 물려줄 어른입니다. 가르쳐야 한다면 사랑스러운 삶 한 가지입니다. 배워야 한다면 믿음직한 꿈 한 가지입니다.


 (2) 울타리


 울타리가 높은 곳이라면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울타리가 있어야 하느냐 없어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울타리가 높은 곳에서는 숨이 막힙니다.

 멀디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멀디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밥을 먹고 살림을 꾸리며 지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람이 있건 없건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제 삶터를 돌보았습니다. 대한민국·조선·고려·신라·백제·고구려·가야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들이 살았고, 저마다 제 살림살이를 조용히 일구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들은 땅바닥에 금을 긋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땅이고 저기부터는 너희 땅이라고 금을 긋습니다. 그러나 풀·나무·짐승·물·햇볕·바람은 금으로 그어 나눌 수 없습니다. 두루미는 한국에만 살지 않고 일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백두산부터 이어졌다는 멧줄기는 휴전선이 있대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남북녘에만 백두산 멧줄기가 아니라, 중국땅으로도 이어지는 백두산 멧줄기입니다.

 햇볕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똑같이 내리쬡니다. 바닷물은 이곳에서든 저곳에서든 같은 바닷물입니다. 음성군과 진천군 사이, 서울시와 인천시 사이, 제주시와 서귀포시 사이, 길그림책에는 금이 또렷하게 갈린 사이사이에는 무엇이 있으려나요. 벽이나 울타리 하나로 마주한 이웃집하고 우리 집은 사이에 무엇이 있으려나요.


.. 게으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선생이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은 1년 동안 재난을 겪는다. 그 재난이 평생토록 아이들의 인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다 … 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과정이야말로 지식과 사물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 마음의 교류 없이 초등학교 교육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일본의 군대에 도덕 같은 건 없었습니다. 물론 질서는 있었지요. 강제적이고 계급적인 질서는 있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은 없었습니다.” … “당신은 원래 중학교 선생이잖아요.” “그게 뭐.” “요즘엔 아무리 봐도 선생 같지가 않아요.” … “당신은 진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마음이 없어요. 당신이 말하는 조합은 선생들의 조합 아닌가요? 당신은 이미 선생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위원장이 되겠다고요?” … 이 남자에게는 이기심만 있을 뿐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없다. 애정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견뎌 냈을지도 모른다. 겐이치로는 부정한 마음 같은 것이 있다 ..  (107, 183∼184, 231, 315, 316쪽)


 예나 이제나 정부란 부질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이건 어느 살림집이건 돈을 더 많이 벌어들여 집안에 쟁여 놓을 때에 즐거운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집식구가 즐거이 밥을 먹고 즐거이 하루하루 맞이하지 못한다면, 엄청나게 쌓은 돈이건 오십만 원 즈음 쌓은 돈이건 똑같이 덧없습니다. 정부가 정책을 잘 꾸린대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정부는 여느 사람들이 보태는 돈으로 먹고사는 무리이지, 정부가 여느 사람들을 먹여살리지 않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이룬 돈으로 길을 닦든 공항을 만들든 군대를 키우든 경찰을 두든 합니다. 여느 사람들이 흙을 일구어 거둔 곡식으로 대통령이 밥을 먹든 군인이 밥을 먹든 공무원이 밥을 먹든 합니다.

 공무원이 없어도 나라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공무원이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없대서 민주주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느 농사꾼이나 여느 노동자가 없을 때에 나라 또한 없어집니다. 여느 농사꾼이나 여느 노동자가 없다면 민주주의란 싹트지 않습니다.

 투표권이 민주주의이지 않습니다. 다수결이든 만장일치이든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나 스스로 일구는 내 살림살이입니다. 내 논밭을 알차게 일구는 삶이 민주주의입니다. 내 보금자리를 깨끗하게 돌보는 삶이 정치입니다.

 지역자치란 마을자치입니다. 지역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는 얘기는 마을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는 얘기입니다. 마을 스스로 살림을 꾸린다 할 때에는, 마을 지도자가 있어 슬기롭게 이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집에서 저마다 다 다른 길로 저마다 다 다르게 착하며 사랑스러이 살림을 일군다는 뜻입니다. 지도자이고 공무원이고 정부이고 대통령이고 하나도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대수로운 한 가지라면, 나 스스로 내 살림을 얼마나 알차고 아름다이 일구면서 내 하루를 사랑하느냐입니다. 내 집이 평화요 평등이요 통일이요 민주요 꿈이면 됩니다.


.. 가난한 집 아이를 위해 나라에서 대신 교과서를 사 주겠다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교과서를 사 줬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 마음 놓고 교과서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국가는 의무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 “초등학교에서는 야간 수업이 허용되지 않아요.” “정식으로 허용되지 않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는 아이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졸업장은 못 받아요.” 교장이 다시 말했다. “졸업장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배울 기회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어른으로 자라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졸업장은 받지 못해도 그 아이에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와다 선생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 “방금 이치조 선생님은 장기 결석자는 우리 같은 평교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문부성이 해결해 줄까요.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요. 규칙이나 제도만 만들어 낼 뿐이에요. 예산은 어디에도 없어요.” ..  (172, 331, 334쪽)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하지만, 오늘날 교육이란 교육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육이란 오직 졸업장 따기입니다. 졸업장을 딸 때에 시험성적이 잘 나온 성적표를 받아쥘 졸업장 따기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학교 가운데 ‘사랑이 숨쉬는 어린이’를 ‘착하고 해맑으며 싱그러이’ 이끌어 ‘아름다우면서 올바른 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돕겠다고 하는 데는 없습니다. 허울이야 교육이지, 모두 아이들을 틀에 박힌 기계처럼 다루거나 내몰기만 합니다. 수없이 많은 지식조각을 아이들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에 집어넣기만 하는 학교이고 교육인 오늘날입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좋으며 즐거울까요. 어른들은 무엇을 가르쳐야 좋으며 즐거울까요.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자라야 기쁘며 반가울까요.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무엇을 보여주며 살아야 기쁘며 반가울까요.

 즐거움이나 기쁨은 성적표도 졸업장도 교육도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아닙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은 내 삶입니다. 참다이 교사 노릇을 하겠다는 이라면, 아이들이 하나하나 맑게 생각하고 밝게 뛰놀면서 제 결과 무늬를 찾도록 지켜보거나 거드는 길동무 노릇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옳게 어버이 노릇을 하려는 이라면, 아이가 늘 웃고 떠들면서 작은 몸뚱이에 튼튼한 힘살이 붙도록 따순 밥을 먹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도록 힘쓰는 살림꾼 노릇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제도권학교도 대안학교도 교육이 아닙니다. 모두 울타리입니다. 참다이 배움터 구실을 하자면 참다이 삶터 구실을 해야 합니다.


.. 굳이 말한다면 사회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아이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 걸까 …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학문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쳐 본들 과연 몇 명이나 그 핵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 네안데르탈인이라든가, 쥐라기, 숭문토기 같은 고고학적인 전문 용어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외울 뿐이다 … 구체적인 지식을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중학교 입학시험에서는 구체적인 지식만 알아본다. 얼마나 많이 외우고 있는지가 당락을 결정한다 … 아이에게 구도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조화로운 색채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것은 예술 교육의 일부다. 그러나 도베 유조가 그린 불이 난 그림이나 와다 고스케가 그린 불길한 자화상은 예술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아이들의 마음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비극이다. 그 비극이 여과 없이 표현된 한 편의 슬픈 시다. 이것은 아이들의 하소연이며 고백이다 ..  (149∼150, 190∼191쪽)


 돈을 벌자면서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돈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돈을 벌자면서 쓴 글이란 문학이 아닙니다. 돈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었으면서 예술이라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돌이킨다면, 돈을 벌자면서 썼기에 문학인지 모릅니다. 돈이 되도록 그리거나 찍었기에 예술인지 모릅니다. 살아가며 내 웃음과 내 눈물을 담아서 쓰는 글과 그리는 그림과 찍는 사진은 ‘문학도 문화도 예술도 아닙’니다. 그예 내 삶입니다.

 삶이 될 때에 비로소 글이라 하고 그림이라 하며 사진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삶이 되지 않고 돈이 되거나 힘(권력)이 되거나 이름값(명예)이 된다면 모조리 ‘문학·문화·예술’이라는 허울(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으랴 싶어요.

 삶이 될 때에 시나브로 배움이거나 가르침입니다. 곧, 삶이 되지 않고 돈이 되거나 힘이 되거나 이름값이 되도록 이끈다면 한낱 ‘교육’이 될 뿐입니다. 어느 교사이고 어버이이고, 아이들이 돈을 더 잘 벌도록 가르칠 수 없습니다. 돈을 더 잘 벌 일자리를 찾도록 아이들을 내모는 사람이라면 교사도 아니요 어버이도 아닙니다. 돈을 잘 벌 만한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성적표를 손에 쥐도록 닦달하는 사람은 교사일 수 없고 어버이일 수 없습니다. 교사나 어버이라 한다면, 교사와 어버이부터 사랑스레 살아가면서 아이들 누구나 사랑스레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단 한 번도 정기 승진이 실시되지 않았다. 교사는 권리마저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 치과 의사는 교사가 성직이라고 했다. 성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두고 교사의 권리를 무시한 채 완벽한 교육만 요구한다. 비좁은 교실에 정원 50명을 훨씬 웃도는 60명 가까운 아이들이 어깨를 맞댄 채 앉아 있다. 운동 장비도, 과학 교재도, 시청각교육에 필요한 설비도, 도서관도 제대로 갖춰 놓지 못하고 있다 … 이렇게 모인 교사들의 모습은 박봉에 시달리는 노동자일 뿐이었다. 더구나 여교사는 더 어둡고 초라해 보였다. 기업이나 관공서의 여직원들과 견주면 복장은 형편없었다. 머리 모습에도, 비옷에도, 신발에도 가난이 흠뻑 배어 있었다. 바로 그 여성들이 도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일본의 의무교육은 가난한 청년과 가난한 여성들이 유지해 왔다 … 교사라는 직업의 성격을 따지기 전에 그들은 분명 노동자였다. 노동자가 아닌 존재로 취급받을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선생들은 공장 노동자보다 더 무거운 마음의 부담을 강제로 짊어지고 세상의 비판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  (382, 396∼397쪽)


 착하게 살아가며 착한 마음밭을 함께 나눌 어른과 어린이입니다. 사랑스레 지내며 사랑스러운 마음자리를 서로 나눌 교사와 학생입니다. 믿음직하게 어깨동무하며 믿음직한 마음씨를 같이 맞잡을 어버이와 아이입니다.

 사람이 되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은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돈이 되거나 이름값이 되거나 힘이 되는 길 또한 하나입니다. 교육입니다.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람답게 이끌고 싶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을 바란다면 교육을 할 노릇입니다.

 내 삶을 바탕으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바라보며 껴안을 때에는 사랑입니다. 교과서와 교재에 따라 성적표를 마련하고 시험을 치르려 하면 교육입니다.

 콩 세 알을 심어 한 알은 사람이 먹고 한 알은 짐승이 먹으며 또 한 알은 어찌저찌 흙으로 돌아간다면 사랑이고 삶입니다. 콩 세 알 모두 사람만 홀로 차지하며 먹으려 한다면 교육입니다. 종이 한 장을 맞들 때에 삶이고, 종이를 똑바로 들라고 시킬 때에 정치입니다.


 (3) 삶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야기책 《인간의 벽》 1권을 읽습니다. 《인간의 벽》 1권에는 “거대한 슬픔”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습니다. 큰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몹시 슬프다는 소리입니다.

 무엇이 그리도 슬프기에 사람들이 울타리를 높직하게 쌓을까요. 아니, 사람들은 어이하여 울타리를 높직하게 쌓고, 이렇게 높직하게 쌓은 울타리는 왜 사람들을 슬프게 할까요.


.. 그 어린 마음을 겪어 보는 기쁨은 저학년을 담당하는 선생만이 느낄 수 있다 … 아이들은 애정에 민감하다. 누군가 자신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아주 기뻐한다 … 한마디뿐인 선생의 짧은 말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  (12, 154쪽)


 사람이 스스로 쌓은 울타리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가며 이루는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니, 사람으로 태어난 고마운 목숨을 참말 고맙게 여기면서 사랑을 나누어야 그야말로 사람일 텐데요.

 어린이도 어른도 사랑이 가장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학생도 교사도 사랑일 때에 가장 힘이 나고 아름답습니다. 아이도 어버이도 사랑으로 마주할 때에 애틋한 꿈결을 누립니다.

 가난한 아이들한테 장학금을 주어도 아이들은 활짝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한테 장학금 아닌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자리라면 아이들은 언제나 스스럼없이 활짝 웃습니다.


.. 힘 앞에는 도리가 없다는 논리가 지난 1000년 동안 일본 사회를 지배해 왔다 … 윗사람이라는 계급의식이 부모들의 마음속에서 쉽사리 사라질 리 없다. 도쿠가와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감정이다 ..  (166, 220쪽)


 교육소설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하지만,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며 나눌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고이 보듬고자 하는 꿈을 담은 이야기책 《인간의 벽》은 조곤조곤 속삭입니다. 서로서로 어떻게 태어난 목숨이고, 서로서로 어떻게 자라는 목숨이며, 서로서로 어떻게 부대끼는 목숨인가를 살몃살몃 들려줍니다.

 주의주장이나 강요나 교육이나 이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인간의 벽》입니다.

 참배움을 나누려는 교사한테 길잡이가 될 만한 《인간의 벽》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야기를 펼치는 《인간의 벽》입니다.


.. 시노다 선생은 목 언저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으로 모래밭 위에 서 있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바닷가 동굴에 사람이 살고 있다 … 가나야마에게 과연 학교가 필요할까. 학교보다 생활이 먼저가 아닐까. 학교보다 생활이 먼저인 아이를 억지로 학교에 데려가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아버지와 아들을 마주하자 시노다 선생은 가슴이 쓰려 왔다. 이토록 가난이라는 것이 지독할 줄은 몰랐다. 이 가정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것이라고는 건강뿐이다. 오직 건강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다 … 아키오는 아마 학교에 오지 않을 테다. 공부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만 할 수 있다. 가난한 아키오에게 공부는 사치품일 뿐이다 ..  (353, 355, 357쪽)


 모든 교사는 어른입니다. 모든 어버이는 어른입니다. 모든 학생과 어린이(와 푸름이)는 아이입니다. 어른 앞에 선 아이요, 아이 앞에 선 어른입니다.

 물지게를 지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밥숟깔을 뜨면서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아기를 업고 논둑길을 걸으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아 나무가 부러지거나 풀이 뽑히곤 합니다. 그런데, 나무가 부러지건 풀이 뽑히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싹이 돋아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새로운 풀이 돋습니다.

 지구별에서 숲이 모조리 사라질는지 모릅니다. 지구별에서 숲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사람뿐 아니라 모든 짐승이나 목숨이 나란히 사라지겠지요. 지구별은 숨을 거둘 수 있고, 지구별은 모든 생채기를 천천히 삭이거나 씻으며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비가 오기에 흙땅에 골이 패여 냇물이 흐릅니다. 바람이 불기에 모래바람이 날리고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햇볕이 내리쬐기에 새싹이 기운을 얻어 한결 푸른 빛깔을 뽐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받는 사랑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자랍니다. 사랑과 함께 지식을 받아들이면 사랑과 함께 받아들인 지식을 예쁘게 나누겠지요. 사랑은 없이 지식만 맞아들이면 사랑이 없는 지식으로 홀로 쇠밥그릇을 챙기겠지요.


.. “부모 세대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려고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아니잖아요. 부모 세대와 다르게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우려고 고생하는 거잖아요.” … 획일적인 의무교육은 이 아이에게도 영어를 가르치고,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고, 대수와 기하학을 가르칠 것이다. 미술 수업은 일 주일에 한 시간 정도. 아사이 요시오는 자신에게 없는 재능 때문에 절망해야 한다. 자신이 타고난 재능은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다. 표현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모든 어린이는 개성과 능력에 따라 교육되며” 하고 어린이헌장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의무교육은 모든 아이를 똑같이 교육한다. 아사이 요시오는 의무교육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의무교육을 마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열등의식만 자랄 뿐이다. 사회에 들어서기도 전에 패배자라는 절망을 맛본다 … 결국 아이를 만드는 것은 교과서가 아니다. 교사도 아니다. 친구도 아니다. 가정이다. 교육의 기본은 부모다. 교사는 다만 도와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자녀 교육의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만큼 부모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  (143, 241, 261쪽)


 모든 고추포기가 똑같은 크기 똑같은 숫자 똑같은 부피로 고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모든 볍씨가 똑같은 키 똑같은 알맹이 똑같은 굵기로 벼 열매를 맺지 않아요. 봉숭아 씨앗 하나에서 자라는 봉숭아는 모두 다릅니다. 돼지 한 마리가 낳는 새끼이든 고양이 한 마리가 낳는 새끼이든 다 다른 생김새이고 다 다른 모습이며 다 다른 삶이자 목숨입니다.

 스무 아이라 하든 예순 아이라 하든, 줄을 착착 맞추어 책상 앞에 앉았다 하더라도 다 다른 아이자 삶이자 목숨이자 사랑입니다. 다 다른 아이를 다 똑같은 책걸상에 앉히고 다 똑같은 급식을 먹이며 다 똑같은 교과서로 다 똑같은 교대 수업을 받은 교사한테서 다 똑같은 지식을 머리속에 담도록 하는 학교란, 말 그대로 학교가 되어 아이들한테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쥐어 줍니다. 이 졸업장이나 자격증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도록 하느냐 하고 가르는 잣대가 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고, 열 손가락 모두 다 다른 크기와 생김새로 다 다른 노릇을 합니다. 호미를 쥐든 자판을 두들기든 젓가락을 쥐든 사랑하는 사람을 쓰다듬든, 다섯 손가락 더하기 다섯 손가락은 모두 다른 구실을 합니다.

 이야기책 《인간의 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자리에서 모두 다른 삶을 꾸립니다. 누군가는 사랑과 믿음으로 웃음과 눈물을 아끼려 합니다. 누군가는 돈과 이름과 힘으로 더 큰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쥐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으로 어깨동무할 수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지식으로 울타리를 쌓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기쁘고, 사랑이 없기에 슬픕니다. 사랑받는 보람을 느끼기에 예쁘며, 사랑받는 고마움을 모르기에 가엾습니다. (4344.4.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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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책인가 봅니다, 제게 참 좋은 리뷰고요~
여러가지 말들에 아침부터 가슴 뭉클합니다.

그중 오늘 아침은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나부터 믿습니다.'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구요~^^

파란놀 2011-04-28 12:09   좋아요 0 | URL
'츠보이 사카에'라는 분이 쓴 교육소설과 함께 이시카와 다쓰조 님 교육소설은 '교육 고전'일 뿐 아니라, 무척 훌륭한 '문학'이기도 해요. 우리 나라에서 교사와 부모들이 이러한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곰곰이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을 찾아보면 좋으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