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1.5.27.
 : 스스로 달리는 자전거



- 이제 아이는 세발자전거를 스스로 밟아 앞으로 달릴 줄 안다. 다만, 빨리 달린다든지 왼쪽 오른쪽 마음대로 틀며 달리지는 못한다. 엉금엉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엉금엉금 뒤로 움직일 줄 안다. 아이를 씻길 때라든지 그림책을 읽힐 때라든지 옷을 입힐 때라든지, 아이 팔뚝이나 허벅지를 만지면 아이가 날마다 힘살이 조금씩 붙는다고 느낀다. 앞으로 힘살이 더 붙고 키가 더 자라면 이 세발자전거를 아주 신나게 몰 수 있을 테지. 이제 아이는 수레에 탈 때면 몸이 꽤 커서 둘째가 큰 다음 함께 태우기는 좀 좁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둘이 수레에 함께 탄다면 수레는 뒤에서 무게를 한결 잘 받치리라 본다. 다만, 둘째가 딸이 아닌 아들이기 때문에, 둘째가 더 자라면 몸무게가 더 나가서 왼바퀴와 오른바퀴에 실리는 무게가 달라지리라. 앞으로 몇 해쯤 첫째가 세발자전거를 즐길까 모르겠으나, 첫째가 세발자전거를 떼고 두발자전거로 옮겨탈 무렵 둘째가 세발자전거에 올라타며 엉금엉금 달리기를 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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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아, 어디 사니? 과학 그림동화 20
스즈키 마모루 글 그림, 이선아 옮김 / 비룡소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내 곁에서 살아가는 조용하고 작은 이웃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5] 스즈키 마모루, 《새들아, 어디 사니?》(비룡소,2005)



 “새 둥지를 찾았다(鳥の巢みつけた)”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2002년에 나온 그림책이 2005년에 한국에서 《새들아, 어디 사니?》(비룡소,2005)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옮겨집니다. 새들이 숲속에서 둥지를 틀어 지내는 삶을 가만히 바라본 멧골사람이 따스하면서 보드라운 손길로 엮은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내놓은 스즈키 마모루 님은 숲속에 지은 작은 집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살면서 ‘새 둥지’가 집 둘레 어디에나 흔하게 퍽 많이 있었으나 그동안 거의 알아보지 못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밭일을 하던 어느 날 문득 빈 새 둥지 하나를 찾아보고는, ‘아, 새가 이곳에서 살았구나. 이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궁금하게 여겼고, 이윽고 다른 새 둥지는 어디에 어떻게 있을까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 그러고 보니 집 주위에 여기저기에 빈 새 둥지가 있었어요. 새끼들이 다 자라 둥지를 떠났기 때문이에요. ‘아, 이런 곳에도 새 둥지가 있었구나. 좀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걸.’ 나는 아쉽기도 했지만 마음은 어느새 따뜻해졌답니다 ..  (6∼7쪽)


 숲사람 스즈키 마모루 님이 밭일을 하며 새 둥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새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달리 둥지를 틀어 다 달리 한삶을 꾸리는 흐름은 아랑곳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솦속 작은 집에서 살아가는 숲사람이면서 정작 숲사람답게 숲새하고 동무하는 나날을 못 보냈으리라 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다 도시에서 삽니다. 시골에서 산다는 이들도 읍내나 면내에서 살아가지, 시골자락에서 흙과 내와 들과 바다와 메를 낀 보금자리에서 조용히 살아가지 않습니다. 흙과 내와 들과 바다와 메를 낀 보금자리에서 살아가는 시골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더욱이, 도시에서든 여느 시골에서든 사람 삶터에 온갖 새가 함께 살아가지만, 이들 온갖 새를 ‘나와 함께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은행 상징(까치)으로 여기며 아무 데나 풀어놓기도 했고, 평화 상징(비둘기)으로 다루며 함부로 풀어놓기도 했지만, 이들을 풀어놓은 다음 자연 터전이 어떻게 되고, 다른 새들하고는 어떻게 어우러질는지를 살피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풀어놓은 비둘기가 어떻게 삶을 꾸리다가 어떻게 차에 치여 떡이 되고 목숨을 앗기며 먹이를 찾는지를 헤아리지 않아요. 아마, 비둘기가 둥지를 트는지 안 트는지, 둥지를 튼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트는지를 찾아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새는 둥지를 틀지 않고 무리를 지어 서로 몸을 비비며 겨울나기를 하는데, 참새가 왜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가를 곱씹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빈터나 골목이란 하나도 남아나지 않으면서 주차장으로 바뀌는 마당에, 작은 새들 보금자리나 먹이에 눈길을 둘 사람은 없을 테지요.


.. 봄이 되자 집 주위에서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새들이 둥지를 트는 계절이 돌아온 거예요. 새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장 안전한 모양으로 둥지를 틀지요 ..  (36쪽)


 갓 태어난 둘째 아이는 밤새 똥기저귀를 내놓습니다. 옆지기는 둘째 아이한테 밤새 젖을 물리느라 고단하고, 아버지는 밤새 똥기저귀를 빠느라 고달픕니다. 그러나 둘째 아이를 보살피느라 0시·1시·2시·3시·4시·5시·6시 …… 밤부터 새벽을 거쳐 아침이 밝을 때까지 자는 둥 마는 둥 조는 채 자는 채 깬 채 얼뜬 채 지내다 보니, 때마다 어느 새가 어떻게 지저귀는지를 가만히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숱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새는 무슨 새일까. 이 새는 또 어떤 새인가.’ 하고 생각할 뿐, 어느 새인지는 모릅니다. 그저, 똑같이 우짖는 소리를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도 듣는다고 떠올리면서, 새들은 새들대로 한삶을 일구니까, 밤에는 밤대로 볼일을 보며 지저귈 테고, 아침과 낮에는 또 아침과 낮대로 볼일을 보며 지저귀겠거니 여깁니다. 둘째 아이가 돌을 지나고 첫째 아이가 제법 클 무렵에는 네 식구가 숲속으로 들어가서 ‘하루 내내 우리 귀를 해맑게 간지럽히는’ 숱한 목소리를 누가 내는지 찾아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같은 새라 하더라도 지저귀는 소리가 같은 적이 없습니다. 높낮이·길이·크기·느낌·맑기 모두 다른 소리입니다. 꾀꼬리이든 올빼미이든 뻐꾸기이든 딱따구리이든, 같은 소리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엊그제부터 가느다랗게 조금씩 들리는 풀벌레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풀벌레라 하더라도 똑같은 소리란 없습니다. 이제 밤에만 오글오글 복닥복닥 들리는 개구리소리도 매한가지예요. 수백 수천 개구리가 한꺼번에 울지만, 수백 수천 개구리는 다 다른 목소리로 웁니다. 이 다 다른 목소리가 한꺼번에 울리며 어슷비슷한 한 가지 소리로 들리려니 하고 여길 뿐이에요.


.. 나는 산속에 있는 조그만 집에서 살아요 ..  (2쪽)


 그림책 《새들아, 어디 사니?》를 곰곰이 되읽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혼자서 읽고, 아이를 불러 팔베개를 한 채 누워서 다시 읽습니다. 혼자 읽을 때에는 책이 어떻게 짜이고 줄거리와 엮음새가 어떠한가를 곱새깁니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번역글이 어떠한가를 돌아보고, 그림이 얼마나 살갑거나 올바르거나 알맞은가를 가눕니다. 혼자 읽을 때에는 미처 못 느꼈는데, 아이한테 읽히는 동안 번역글은 번역글대로 조금 엉성하고, 그림결은 그림결대로 곳곳에 잘못된 대목이 드러납니다.

 맨 첫 그림인 2∼3쪽 그림부터 엉성합니다. 2∼3쪽을 보면, 그린이가 숲속에서 나무로 집을 짓고 밭을 일구는 모습이 나오는데, 밭에서 괭이질을 하면서 괭이 잡은 손이 잘못되었으며, 괭이가 너무 짧습니다. 흙을 뒤엎을 때에 쓰는 괭이는 무척 깁니다. 무척 긴 괭이는 손잡이 끄트머리 쪽만 잡으며 땅을 폭폭 찍습니다. 손잡이 가운데나 앞쪽을 잡으며 괭이를 휘두를 수 없을 뿐더러, 이렇게 하면 힘이 많이 들고 땅을 찍지 못합니다. 괭이질을 하는 허리 모습도 잘못 그렸어요. 이어지는 4쪽 그림에서는 괭이가 아닌 곡괭이가 나옵니다. ‘응, 곡괭이로 밭을 일군다고? 이러할 수도 있지만 말이 안 되잖아?’

 곡괭이와 괭이는 길이와 크기와 모양 모두 다릅니다. 2∼3쪽 그림은 괭이 모양이지 곡괭이 모양이 아닙니다. 2∼3쪽에서 곡괭이를 그리려 했다면 날이 더 굵고 앞뒤로 삐죽하게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손잡이는 더 짧아야 합니다. 더구나, 곡괭이로 땅을 찍을 때에는 이러한 손과 허리 모습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곡괭이는 날이 무척 무겁기 때문에, 머리 위로 쳐들 때에는 한손은 날 바로 밑에 힘을 뺀 쥐 살짝 쥐고 다른 한손으로 어깨죽지 께에서 단단히 붙잡습니다. 내리찍을 때에는 날 바로 밑에 힘을 뺀 채 쥔 손을 스르르 밑으로 내리며 아래쪽에서 단단히 쥔 손 위쪽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만납니다. 땅을 찍을 때에는 두 손으로 손잡이 아래쪽을 쥐는 모양이 됩니다.

 그러나, 땅을 찍고 나서 스르르 곡괭이를 잡아당겨 다시 위로 올리는 모습을 그렸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러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림은 잘못 그렸습니다. 곡괭이질을 해 보면 쉬 알 수 있습니다.

 7쪽 그림에서 나무를 타며 둥지를 찾는 그린이 모습이 나옵니다. 이 그림에서도 어른이 타는 나무마다 줄기와 가지가 너무 가느다랗습니다. 이토록 가느다란 줄기와 가지라면 어른이 나무타기를 할 수 없어요. 나뭇줄기나 나뭇가지가 꺾이니까요. 훨씬 두꺼워야 합니다. 27쪽 까치 그림도 까치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합니다. 34쪽 꾀꼬리 그림도 꾀꼬리 맞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새들아, 어디 사니?》는 자연 터전이나 멧새나 들새를 꼼꼼히 그려내어 보여주는 도감이 아닙니다. 살짝 엉성하게 그리든 아주 빈틈없이 그리든, 따스한 느낌이 살아나도록 보드랍게 그리면서 그린이 뜻대로 사랑스러운 손길을 나누면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그리든 자연을 그리든 새를 그리든 둥지를 그리든, 조금 더 마음을 쏟아 그림을 그려 준다면, 훨씬 놀라우면서 아름답고 좋은 그림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9쪽 황새 그림에서 황새는 날개가 이보다 훨씬 더 큽니다. 32∼33쪽 까마귀 그림에서도 까마귀는 이보다 몸뚱이와 날개가 더욱 큽니다. 까마귀는 부리도 되게 커요.

 그림책 《새들아, 어디 사니?》는 ‘자연 지식’이나 ‘과학 지식’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책이름 “새 둥지를 찾았다”라는 말처럼, 숲속에서 살아가며 비로소 깨달은 새 둥지가 더없이 사랑스러우면서 반갑기에, 이들 새 둥지를 하나하나 사귀는 걸음걸이를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면, 그림을 더 예쁘게 그리려 했기에 이렇게 ‘자연 모습하고는 살짝 동떨어진’ 그림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까마귀는 그야말로 새까만 빛깔이 아주 빛나면서 우람합니다. 꾀꼬리는 그야말로 노란 빛깔이 까만 얼룩이랑 아주 아름다이 어우러지면서 멋집니다. 까치는 흰빛과 검은빛이 예쁘게 어우러진 귀염둥이입니다(밭을 다 망가뜨리니 마냥 귀염둥이일 수만은 없지만).

 새 둥지를 찾아보며 어여쁜 ‘멧새 한삶’이나 ‘숲새 한살이’를 돌아본다면, 둥지 모양뿐 아니라, 이 둥지에 깃든 작은 목숨 또한 한결 사랑스레 바라보면서 이웃으로 어깨동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림결을 예쁘게 가다듬어도 좋지만, 조금 더 옳고 바르게 마주바라보면 좋겠어요. 나무 한 그루를 그리더라도 ‘예쁘장하다고 여기는 나무 모습’이 아니라, 참말 ‘숲에서 자라는 씩씩한 나무 모습’을 그리면 좋겠어요. 들새는 들새답게, 멧새는 멧새답게, 숲새는 숲새답게 마음껏 날갯짓을 하면서 먹이를 찾고 짝짓기를 하며 새끼를 보듬는 사랑스러운 한삶과 한살이를 나눌 수 있게끔, 그림결을 더 매만지면 좋겠습니다. (4344.5.30.달.ㅎㄲㅅㄱ)


― 새들아, 어디 사니? (스즈키 마모루 글·그림,이선아 옮김,비룡소 펴냄,2005.3.3./75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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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주는 이 없어도 사진을 찍는다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2] 이인자, 《받아주는 이 없어도》(경기대학교출판국,1988)



 “과연 장애인들의 침묵의 언어를 대변할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하는 의구심(65쪽)” 때문에 오래도록 망설였지만 조그마한 책으로 묶어 살며시 태어났던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경기대학교출판국,1988)가 있습니다. 아주 조용히 나왔다가 더없이 조용히 스러진 사진책인 만큼, 이 사진책을 알아본 사람을 찾아보기란 어려울 뿐더러, 이 사진책을 놓고 사진이야기를 펼치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인자 님은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사진학과 교수 또한 아닙니다. 사진평론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신문사 사진기자도 아니에요. 그저 장애인 권리와 삶을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나라 비장애인이라 하는 사람들하고는 아주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하는 장애인은 어떤 웃음과 눈물로 하루하룰 일구는가를 보여주어 함께하고픈 마음을 담은 사람일 뿐입니다.

 똑같이 ‘장애인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도 이름난 사진쟁이가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한결 돋보이거나 널리 알려지리라 생각합니다. 다큐사진을 찍는 누군가 장애인 권리와 삶을 사진감으로 삼는다 하면 사진책으로 묶겠다 하는 출판사가 여럿 나올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장애인 권리와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 사진평론을 하는 사람도 눈여겨볼 테며, 신문사나 방송사에서도 이러한 사진책을 널리 알리겠지요. 이인자 님이 1988년에 《받아주는 이 없어도》를 내놓을 때에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강사 노릇하고 경기대학교 응용미술과 조교수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교수라 할 수 없던 강사였던 이인자 님이 거의 비매품과 같은 사진책을 대학교 출판국에서 내놓았으니, 이러한 사진책을 경기대학교 바깥에서 알아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 되면서, 경기대학교 안쪽에서조차 알아주기는 힘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이인자 님 사진과 장애인이 쓴 글을 나란히 엮습니다. 사진책에 실린 글 〈나누고 싶어요〉를 읽습니다. 첫머리에 “나의 사랑 나누고 / 싶어도 / 받아 주는 이 없네 // 나의 다정한 속삭임 나누고 / 싶어도 / 아무도 듣는 이 없네(명혜중학교 정윤수).” 하는 노래가 나옵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하고 사랑을 나누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하고 사랑을 나눌 마음이 없습니다. 비장애인은 비장애인끼리 어울리고, 장애인은 장애인끼리 어울리고 맙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끼리 어울리며, 돈있거나 이름있는 사람은 돈있거나 이름있는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저마다 고운 목숨 선물로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저마다 선 자리가 너무 다를 뿐 아니라, 울타리가 참 높습니다. 모두들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면 즐거울 텐데, 서로를 살가운 벗이나 살붙이로 느끼지 못합니다.

 《받아주는 이 없어도》라는 작은 사진책이 나왔기 때문에 이 사진책에 실리며 조금은 더 읽힐 수 있는 장애인 글 〈어머니〉를 읽습니다. 첫머리에 “어머니! / 당신이 나를 낳으실 때 / 발에 신길 내 작은 신발 / 살 돈을 그 어디엔가 / 마련해 두셨겠지요. / 그러나 내 발은 신발 냄새 / 맡을 수 없어 개미 발 하나 / 다치게 하지 않았읍니다. / 그 공로로 내 발은 개미한테 / 감사패를 받을지 모릅니다(지체부자유자 나항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진을 찍은 이인자 님은 장애인들하고 함께 어울리거나 지내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길을 마주칩니다. 생각해 보면, 장애인 권리를 외치는 일이란 남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애인 삶을 사랑해 달라는 목소리란 남다른 움직임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지구별을 생각하고, 서로 어깨동무하는 삶터를 살피면 됩니다. 좋은 동무로 지내고, 맑은 벗으로 사귀면 됩니다. 좋은 동무로 지내니까 틈틈이 찾아가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맑은 벗으로 사귀니까 꾸준히 편지를 부치면서 서로 어떻게 지내는가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라면상자를 선물하거나 쌀푸대를 건넨대서 장애인을 돕는 일이 아니에요. 지하철 나들목에 승강기를 마련한대서 장애인 권리가 지켜지지 않아요. 처음부터 지하철 아닌 ‘땅 위 전철’을 놓아야 하고, 처음부터 ‘장애인뿐 아니라 아기 밴 어머니나 늙은 할아버지’ 누구나 걱정없이 느긋하게 타고다닐 전철길이 있어야 합니다. 건널목에서 높은 소리로 울리도록 하는 장치가 없어도,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건널목에서 빠르기를 줄여 차분히 기다리며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통법규를 떠나,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골목길에서 빠르기를 줄여 어린이나 어른이나 느긋하게 골목삶을 일구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번 다음 사회시설에 척 하니 내놓는 일이 착한 일이 아닙니다. 돈을 척 하니 내놓지 않아도 돼요. 신동엽 시인이 ‘막걸리병 자전거 꽁무니에 꽂고 시인을 찾아가는 어느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시로 쓰면서 꿈을 꾸었듯이, 막걸리병 하나 들고 쭐래쭐래 걸어서 찾아가 만날 벗님으로 지낼 수 있으면 됩니다. 함께 살아가는 벗이요, 지구별 고운 목숨이며, 착하며 여린 이웃입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틀림없이 사진책입니다. 사진 갈래로 나눈다면 다큐사진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다큐사진에 넣지 않아도 되는 사진이요, 애서 사진비평이나 사진평론을 받지 않아도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사진책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책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받아주지 않는 슬픈 한국땅 모습을 살며시 보여주는 구실을 하지만, 비장애인을 꾸짖는다거나 나무란다거나 타이르지 않으니까요. 이인자 님한테 사랑스러우면서 살가운 장애인 벗님 이야기를 사진으로 가만히 담아 보여줄 뿐이니까요.

 어쩌면, 다큐사진은 목소리를 외치는 사진일 수 있고, 달리 보면 다큐사진은 목소리를 외치지 않는 사진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목소리를 외치면서 온누리 얄궂거나 슬프거나 어두운 구석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다큐사진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목소리를 외치지 않으면서 그예 따스하며 넉넉히 살아가는 사람들 꿈과 보람을 조용히 보여주는 사진일 수 있어요.

 아픈 사람을 보여주어야 다큐사진이 아닙니다. 슬픈 사람을 사귀어야 다큐사진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을 찾아다녀야 다큐사진이 아니에요. 힘겨운 사람을 널리 알려야 다큐사진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보여줄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믿음을 나눌 때에 다큐사진이에요. 따스한 손길과 넉넉한 가슴으로 어깨동무할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굳센 손으로 흙을 만지면서 함께 땀흘려 일하는 벗일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말 그대로 받아주는 이 없어도 서로서로 예쁘게 어울리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진을 찍은 이인자 님은 알아주는 이 없어도 즐거이 사진을 찍고 기쁘게 동무를 사귑니다.


― 받아주는 이 없어도 (이인자 사진·장애인 글,경기대학교출판국 펴냄,1988.10.15.)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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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텃밭 당근풀 어린이


 텃밭에서 씩씩하게 자라나는 당근풀을 바라본다. 당근씨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용케 심었고, 이 당근씨는 고맙게 하나하나 싹을 틔워 제법 잎이 돋는다. 더 기운을 내 주기를 바라면서 냇물에서 물을 길어 조금씩 붓는다. 그동안 비가 퍼붓느라 흙이 많이 깎였기에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두들기며 북을 돋운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저도 북을 돋우겠다고 나선다. 냇가에서 자라는 꽃을 한 송이 꺾어 놀다가, 한손으로는 꽃을 쥔 채 북을 돋우더니, 이내 꽃송이는 고랑에 살며시 내려놓고 두 손으로 북을 돋우며 논다. (4344.5.2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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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문장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철호 지음 / 유토피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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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말솜씨가 밥을 먹여 준다지만
 [책읽기 삶읽기 59] 김철호,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유토피아,2010)



 사람들은 나날이 학교를 더 오래 다닙니다. 가방끈 길어지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나날이 새로운 책이 쏟아집니다. 이 나라 도서관은 퍽 어설프거나 모자라다 하지만, 이곳저곳에 새 도서관이 들어서며, 사람들이 손에 쥐어들 책이 꾸준히 늡니다. 신문은 무척 많이 나오고, 방송은 온갖 이야기가 하루 내내 끊이지 않으며, 셈틀을 켜고 인터넷을 열면 갖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말이며 글이며 어마어마하다 싶도록 넘칩니다. 잘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못난 사람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름난 사람만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이름 안 난 사람도 쓸 수 있는 글입니다.

 ‘문장작법’에서 ‘작문’을 거쳐 ‘글짓기’를 지나 ‘글쓰기’로 오면서, 여느 사람들 여느 말씨로 여느 사람하고 나누는 이야기를 글로 담아 나눌 수 있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과 지식과 학력과 정보를 뽐내려고 잔뜩 힘을 주거나 멋을 부리는 말씨로 엮는 책이 새삼스레 쏟아집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 같은 책은 지난날에는 꿈을 꿀 수 없던 책입니다. 지난날 같으면 이와 같은 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글 바로쓰기》(이오덕 씀)가 처음으로 ‘여느 우리 말로 사랑하는 여느 우리 삶’ 이야기문을 연 뒤로 수많은 여느 우리 말 이야기책이 나왔고,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는 이러한 흐름 한켠에 야무지게 자리합니다.


.. 마지막으로, 글맛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워야 한다. 문장이 뜻도 분명하고 표현에도 군더더기가 없는 데다 ‘맛있는 글’이니 ‘향기 나는 문장’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한마디로 ‘문학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은 나의 일부이다. 내가 쓰는 글도 나의 일부이다. 나의 말, 나의 글은 나의 정신이자 나의 인격이다 ..  (14쪽)


 ‘낱말편’에 이어 ‘문장편’이 나온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는 책이름 그대로 ‘우리 말을 잘 쓰면 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줄거리를 담습니다. 참말 그렇겠지요.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은 온통 영어사랑에 푹 빠지는데, 영어를 제아무리 잘 하는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국사람하고 한국말로 내 생각을 나눌 수 없다’면 그토록 대단하다는 영어 솜씨라 하더라도 부질없습니다.

 영어를 잘 한다는 몇몇 사람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 모두 영어를 하면서 살아갈 수 없어요. 영어를 잘 해야 나라힘을 북돋울 수 있대서 시골 흙일꾼한테 영어를 쓰며 벼를 거두거나 배추를 기르라 할 수 없어요.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이들이 왜 영어를 써야겠습니까.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사람이 영어를 써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영어로 경기를 해야 할까요. 영어신문이나 영어방송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연속극을 영어로 듣는다든지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영어로 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건 수업을 하건 한국말로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가’를 또렷하게 주고받으면서 생각을 살찌워야 아름답습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라는 책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막대접할 뿐 아니라 짓밟기까지 하는 어설프며 슬픈 모습을 뉘우치거나 돌아보자는 목소리를 들려주어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옳게 배우자고 외치며, 한국사람인 만큼 한국말을 알맞게 쓰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좀 궁금합니다. 왜 글쓴이 김철호 님은 ‘나의’와 같은 일본 말투를 쓰지요? 이제 이러한 일본 말투는 한국 말투로 스며들었다 할 만큼 두루 쓰니까 그냥 써도 될는지요? 글쓴이 스스로 토씨 ‘-의’를 다루는 대목에서 “눈과 머리로만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또 다른 자리에서는 “말의 중요도를 높여주는” 구실이라든지 “한국어 쓰임을 넓힌”다고까지 덧붙입니다.


.. ‘한국의 문학’에서는 뒤의 ‘문학’보다 앞의 ‘한국’에 초점이 놓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의’의 효과이다. 즉, ‘의’는 자신이 붙게 되는 말의 중요도를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 이렇게 ‘의’의 쓰임이 넓어졌다는 것은 한국어에서 동사의 비중이 작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명사의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 위 예들(분홍색이 티셔츠, 34평의 아파트, 세 가지의 의문, 양쪽의 콧구멍)에서 ‘의’는 의미 전달에 공헌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읽는이들이 의미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이런 표현들이 빈발하는 까닭은, 눈과 머리로만 글을 쓰기 때문이다 ..  (62∼63, 65, 68쪽)


 말은 하는 사람 나름입니다. 글 또한 쓰는 사람 나름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 나름대로 사랑스레 잘 하면 되는 말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나름대로 올바로 잘 쓰면 되는 글입니다.

 말을 잘 한대서, 곧 말솜씨가 뛰어나다 한다면 아마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지요. 글을 잘 쓴대서, 그러니까 글재주가 훌륭하다 한다면 아마 책을 꽤나 팔 수 있겠지요.

 다만, 말을 좀 못 하거나 글을 퍽 못 쓰더라도 말에 담는 넋과 글에 싣는 얼이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울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솜씨로 부리는 말이 아니라, 착하게 나누는 말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재주를 피우는 글이 아니라 참다이 주고받는 글이어야 한다고 느껴요.


.. 그런데 우리가 글을 쓸 때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고유어와 한자어는 친화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  (229쪽)


 글쓴이는 “토박이말은 토박이말끼리 잘 어울리고 한자말은 한자말끼리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토박이말을 쓰려고 애쓰는 사람은 낱말뿐 아니라 글월도 토박이 낱말과 토박이 말투로 가다듬습니다. 한자말을 쓰려고 힘쓰는 사람은 낱말을 비롯해 글월까지 한자 낱말과 한자 말투로 추스릅니다.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낱말에다가 글월까지 영어로 펼치겠지요.

 쉬우면서 바르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쉬우면서 바르다 싶은 말글을 나눕니다. 지식과 학식을 뽐내려는 사람이라면 아주 마땅히 지식과 학식을 뽐내려는 글을 쓸밖에 없습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를 읽으면, ‘쉽다고 할 만한 한국말’은 거의 안 보입니다. 이 책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에는 ‘일본 한자말이건 중국 한자말’이건, 또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이 나라 지식인한테 스며들었다 하는 ‘일본 말투’에다가 ‘서양 번역 말투’까지 골고루 드러납니다. 글쓴이는 이러한 글매무새를 다독이거나 손질하지 않으면서 “우리 말 솜씨가 밥 먹여 준다”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책을 덮으며 조용히 생각합니다. 참말, 말솜씨가 밥을 먹여 준다 할 만하며, 오늘날 수많은 글쓰기책이 나오고 말지식책이 나오는 만큼, 영어 지식 못지않게 한국말 지식을 쌓는 일도 ‘내 경력’과 ‘내 소개서’에 적바림할 좋은 보배덩이가 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식으로 얽어매려는 한국말 이야기보다는, 옳고 바르면서 착하고 참다이 꾸려 아름다운 삶으로 북돋우려는 한겨레 한글과 말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무슨 보람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말솜씨는 없어도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글재주는 없어도 믿음직하게 땀흘려 일하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반갑겠습니다. (4344.5.29.해.ㅎㄲㅅㄱ)


―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 (김철호 글,유토피아 펴냄,2010.10.15.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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