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놓고 미처 못 읽는 책이 있습니다. 아직 사 놓지도 못해서 못 넘겨보는 책이 있습니다. 나온 줄도 몰라서 사 놓을 생각조차 못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 제 곁에 있으면서도 제 손길을 제대로 타지 못하는 책들은, 한편으로는 쓸쓸하지만 언젠가 저 아닌 다른 누군가한테 손길을 탈 수 있는 책입니다. 적어도 제가 잘 간수해 놓고 있으면 이 책은 제 살림집에서 고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아직 사 놓지 못한 책들은 누군가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들이지 않으면서 헌책방 책시렁, 또는 새책방 책꽂이에서 조용히 사라질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재고정리 하듯 찢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와 있을 텐데 아직 나와 있는 줄 모르는 책 또한 누군가 알아보고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어 눈물만 흘리고 기다리다가 고요히 잠들어 버릴 수 있어요.

 모든 책을 다 사서 읽을 수 없습니다. 모든 책을 고루 장만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 힘이 닿는 데까지는, 제 눈길이 끌리는 데까지는, 제 손길이 미치는 데까지는, 제 곁에 책을 마련해 놓고 싶습니다. 제가 이 책을 하나하나 넘겨보게 되든, 짬도 없고 틈도 없어서 미처 들춰보지 못하게 되든. (4341.4.10.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 말에 마음쓰기 - 골목길 거닐며 우리 말 생각
 (12) 투표의 즐거움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투표하는 곳으로 곧바로 가지 않습니다. 먼저 집 앞 헌책방에 찾아갑니다. 출판사에서 보도자료로 보내준 책 세 권을 드립니다. 저한테는 쓸모가 없을 테지만, 누군가한테는 재미있는 책이 될 수 있겠지요. 어제 들렀던 막걸리집으로 갑니다. 잔돈이 없어서 이천 원을 치르지 못하고 나왔기에 오늘 드리러 갑니다. 가게 문이 닫혀 있습니다. 아직 안 여시는 듯합니다. 창영초등학교 옆 분식집 앞을 지나갑니다. 국회의원을 뽑는 오늘은 학교가 쉬니까 학교 앞 분식집도 쉽니다. 백 해가 넘은 초등학교 건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학교 건물 옆에 조촐하게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를 봅니다. 언덕배기를 지나고 나오는 골목집마다 대문 위며 울타리 앞과 위며 꽃그릇이 가득 놓여 있습니다. 꽃그릇마다 새줄기가 솟고 새잎이 돋습니다. 노란 꽃과 잇빛 꽃과 발그스레한 꽃이 올망졸망 어울려 있습니다. 무슨 꽃인지는 모릅니다만, 보기에 좋아서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봅니다.

― 투표의 즐거움은 물론! 다양한 문화체험까지∼ (열여덟째 국회의원 뽑기를 하면 한 장씩 나누어 주는 ‘투표확인증’에 적힌 말)




 빈 차가 서 있지 않으니 널찍하게 느껴지는 골목을 걷습니다. 동사무소 가는 간판이 서 있습니다. 아차, 이제는 ‘동사무소’가 아니지요. ‘주민센터’이지요. 동사무소 이름에 영어를 섞어서 쓰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전국 동사무소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간판이 바뀌고 푯말이 바뀌고 길그림이 바뀝니다. 이름 하나 갑작스레 바뀌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갑니다.

→ 투표하는 즐거움에다가! 온갖 문화를 누리기까지∼




 걷다 보니 어디선가 밥 냄새가 나는 듯. 뭔가? 코를 킁킁거리며 두리번두리번 살피니, 아하, 금창동 사무소 앞에 뻥튀기 차가 서 있군요. 뻥튀기 냄새가 온 골목에 퍼지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골목 안쪽 꽃그릇에 이팝나무 한 그루 조그맣게 자라고 있습니다. 흙 한 줌 없는 시멘트 도심지 한복판에 있는 헌 꽃그릇에 자라는 이팝나무라니! 볕을 얼마 못 쐴 듯한 자리에 자라는 이팝나무.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사진 한 장에 살그머니 담습니다.

→ 투표하는 즐거움 더하기! 듬뿍듬뿍 맛보는 문화∼

 동사무소 계단 앞입니다. 굴렁걸상을 밀어서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옆으로 나 있기는 한데, 이런 계단을 왜 만들어야 했을까 잠깐 생각합니다. 계단 없이 살짝 비알을 주기만 해도 빗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을 텐데.

 계단을 하나 둘 셋 밟고 들어섭니다. 문간에 풍선으로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투표하는 곳에 풍선문이라, 국회의원 뽑기를 동네잔치로 즐기자는 소리일 테지!




 신분증을 보여주어 표를 받고, 흰종이와 푸른종이를 한 장씩 받은 다음, 6번과 13번을 꾹꾹 누릅니다. 반으로 접어서 흰상자와 푸른상자에 넣습니다. 앞문으로 들어와서 뒷문으로 나가는데, 누군가 종이 한 장을 건넵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서 쓸 수 있다는 ‘투표확인증’입니다. 주차장에서도 쓸 수 있다고 나옵니다. 그렇지만 책방에서는 쓸 수 없군요.

 투표확인증은 주머니에 쑤셔넣습니다. 둘레를 보니 동네 어르신들이 투표확인증을 한 손에 들고 휘저으면서 걸어다닙니다. 이분들한테 이 투표확인증을 쓸 자리가 있을는지? 차 없는 사람은 어디에 쓸는지? 아, 우리 동네에는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 있으니 거기서 쓸 수 있을 텐데, 그곳은 어른 한 사람이 500원인데. 뭐, 동네에 미술관이라도 있고(창영동에는 ‘스페이스 빔’이 있으나 거의 다 공짜이니 쓸 수도 없군!), 박물관이라도 있어야지. 우리 나라에 지정문화재가 얼마나 있다고, 그와 같은 곳에서 쓰나? 국립공원 들어가는 삯도 2007년부터는 사라졌는데, 차라리 극장값 깎아 주기라도 하든지.




 한낮에도 전기를 켜 놓아야 하는 동사무소를 나오니, 바로 앞은 기와집. 기와집 안쪽 마당에는 우람하게 자라난 목련나무 한 그루. 하얀 꽃이 사랑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동네에 길너비 50미터가 넘는 끔찍한 산업도로를 내 버리면, 이 기와집은 문화재도 뭣도 아닌 ‘낡아빠지고 지저분한 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아파트로 바뀔 테지요. (4341.4.9.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선생님께 배영사 교육신서 36
성내운 / 배영사 / 1988년 9월
평점 :
절판




성내운 씀, 《다시, 선생님께》


 국회의원 선거를 코앞에 둔 어젯밤, 우리 동네 후보 가운데 한 분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 동네 이웃으로 지켜보았을 때, 지난 여러 해 동안 동네일을 부지런히 하던 분이지만, 지지율은 높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다른 후보 사무실로 전화를 넣습니다. 이분들이 그동안 무엇을 말해 왔고 무슨 정책을 내놓고 있는지 알아봅니다. 신문기사를 훑고 후보자 인터넷방을 살펴봅니다. 진보를 말하는 정당 후보를 빼놓고는, 모두들 ‘돈 들여서 개발하는 공약과 정책’으로 가득합니다. 돈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공약과 정책은 없습니다. 동네 재개발, 항구 개발, 인천 지하철 이야기는 있으나, 동네사람들 삶과 문화와 복지를 헤아리는 눈매와 손길은 없습니다.

 수백 또는 수천이라는 억을 들여서 문화회관이나 도서관을 짓는다고 문화나 복지가 넉넉해지지 않습니다. 아시안경기를 치른다며 큰 운동장 수십 곳을 지어 놓는다고 생활문화나 복지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쉼터가 없다면.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는 느긋한 어울림터가 없다면. 도서관을 짓는 데에 100억을 들여도, 책을 사서 갖추는 돈으로 1억도 안 쓰거나 못 쓴다면. 문화회관을 짓는다고 200억을 들여도, 동네 골목길에서 배드민턴 칠 만한 자투리땅이 없다면.

 1000원짜리 막걸리를 한 병에도, 650원짜리 라면 한 봉지에도, 100원짜리 소시지에도 세금이 붙습니다. 이 세금으로 공무원과 국회의원과 대통령 일삯을 치릅니다. 새 찻길을 닦든 새 아파트를 올리든 새 철길을 깔든 새 도시를 만들든, 우리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이루어냅니다. 법원과 경찰서도 세금으로 꾸리고, 군인과 전경도 세금이 없으면 둘 수 없습니다. 서울부터 인천까지 내려는 물길과 서울부터 부산까지 내려는 물길도 우리들 주머니에서 거둔 세금으로 내야 합니다. 끊임없이 토목공사를 하면, 틀림없이 일자리는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일자리는 어떤 돈으로 일삯을 치러 주는 자리인가요.

 책시렁을 뒤져서 《다시, 선생님께》(성내운 씀,배영사 펴냄,1977)라는 조그마한 책을 뽑아듭니다. 세월이 흘러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안타까움, 세상이 바뀌어도 다시금 꿈틀거리는 슬픔을 가슴속에 접어 두고 읽습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머니도 교사입니다. 아니, 어릴수록 어머니야말로 교사입니다. 한 어린이를 두 교사가 가르치고 있는 셈이지요.(113쪽) …… 학생에게 학습을 보장하자고 교단에 선 교사이지, 교사에게 교과서 떼게 하고 월급을 보장하자고 앉아 있는 학생들은 아닌 것입니다.(153쪽)”

 한 표를 얻자고 길거리에 나선 국회의원 후보들은 책 한 권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예비후보 경선을 치렀을 때에는 책 넘길 틈이 있었을까요. 선거에 나서야겠다고 다짐하던 때에는 책 구경할 짬이 있었을까요. 선거를 마친 다음에는 책방이나 도서관 나들이를 할 만한 느긋한 마음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4341.4.3.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데기 죽데기 (컬러판) - 작은 등불 1
권정생 지음 / 바오로딸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하나 45 ― 내 몸이 아파서 내 이웃한테 사랑을
 : 권정생, 《밥데기 죽데기》를 읽고



- 책이름 : 밥데기 죽데기
- 글쓴이 : 권정생
- 펴낸곳 : 바오로딸(1999.8.10.)
- 책값 : 5500원



 (1) 사람 삶이란


 이웃에 사는 양조장 할머님이 당신 삶을 조곤조곤 풀어냅니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 있을 때에도 당신을 괴롭히더니, 병이 들어서 욕창까지 다 씻어 주고 닦아 주고 하는 짓을 열다섯 해나 해야 되느냐고. 참으로 괴롭고 못살겠다고 마음앓이를 하며 지내는데, 어느 날 문득, 욕창을 닦아 주는 당신보다도 아무 소리 못하고 몸에 욕창이 나며 드러누워 있는 저이가 더없이 불쌍한 사람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당신이야 몸에 욕창이 날 일 없고, 힘겨우나마 당신 삶을 이끌어가지만, 병자리에 누운 사람은 그저 아기처럼 받아먹고 씻김받으면서 지내야 하는데, 정작 불쌍하고 괴로운 사람은 누구이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 “이 약초는 아주 깊은 산에서 캔 것이니 딴 데 것보다 갑절은 받아야 하오.” 할머니는 아주 당당하게 값을 정했습니다. “하지만 약초 값이 지난 장날보다 떨어졌습니다.” 장사꾼도 값을 떨어뜨리기 위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얼마 줄 건가요?” “삼만 원 드리지요.” “싫소. 오만 원은 받아야 하오.” “삼만 원도 비싼데 오만 원을 달라면 이 물건 팔기는 글렀어요.” “오만 원도 싼데 삼만 원이라니 당신 이것 사기는 글렀소.” 할머니도 지지 않고 맞받았습니다 ..  (9쪽)


 그제, 도서관에 ㅈ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님이 찾아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해묵은 사진첩을 함께 넘겨봅니다. 박정희 독재정권 때 왼팔 노릇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 집안에서 나온 사진첩입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던 권력을 누리던 ㅈ씨 집안에서 사진첩이 세 상자 나왔고, 저는 이 가운데 셋째 상자를 헌책방에서 장만했습니다. 앞 두 상자에는 어떤 사진이 깃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셋째 상자를 열어 보았을 때, ㅈ씨가 어떤 모습과 매무새로 권력 단맛을 실컷 누렸는지 남김없이 드러납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스무 권이 넘는 사진첩 가운데에는, 1960년대 국가대표 테니스 여자선수를 시골로 불러서 시범경기를 치르고 저녁에는 술잔치를 한 다음, 이튿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물장구를 치며 노는 사진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사진 옆에는 ㅈ씨 비서가 빼곡한 글씨로 권력 앞잡이를 우러르는 말을 달아 놓습니다.

 그러나 ㅈ씨는 이제 죽어서 이 땅에 없습니다. ㅈ씨 딸아들은 이 땅에 있을까요. 이 땅 어디메쯤에서 아버지 권력을 물려받아서 한 자리 큼직하게 차지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당신 아버지 발자취가 물씬물씬 담긴 이 사진첩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 나라를 떴을까요.


.. “똥통에서 한 달 만에 건져내어 이번에는 깨끗한 개울물에 한 달 동안 담가 뒀지. 아무리 원수를 갚아야 할 달걀귀신이지만 물처럼 깨끗하고 정직해야 하니까. 너희는 그러니까 저 흉측한 인간들처럼 비겁하거나 더러워서는 안 된다. 원수를 갚아도 정당하게 갚고 깨끗하게 행동해야 한다, 알았지?” “예!” “예!” 밥데기 죽데기는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  (16쪽)


 포근한 사월 날씨를 느끼는 하루하루입니다. 삼월 들어 확 풀렸던 날씨가 이레 남짓 다시 쌀쌀해졌으나, 사월을 넘기면서는 내내 포근합니다. 비를 뿌린 뒤에도 따사롭고 먹구름이 끼었다가 걷히는 날에도 따뜻합니다. 동네 골목길 꽃그릇에 늦철쭉이 피어 있고, 벚꽃도 흐드러지려고 합니다. 손바닥 만한 텃밭은 골골이 잘 갈려서 나물씨가 심기고, 벌써 새싹이 오른 텃밭도 보입니다.

 이제는 옥상마당에 책걸상을 올려놓아도 되겠구나 싶어서, 아침나절에 책상 하나 걸상 둘 올려놓습니다. 저는 도서관을 지키고 옆지기는 옥상마당에서 햇볕을 쬐면서 글을 씁니다.

 한참 일을 보다가 어깨가 뻑적지근해서 살림집으로 올라갑니다. 찬물로 머리를 감고 이불 빨래를 하나 담가 놓은 뒤 웃도리 빨래 하나를 해치웁니다. 탁탁 털어서 옥상마당 한쪽에 걸어놓습니다. 햇볕이 좋아 금세 마르겠습니다.


.. 할머니는 화가 나서 주먹으로 순경 아저씨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오십 년 전에 죽은 걸 지금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러세요?” “오십 년 전에 죽은 건 아무 소용 없다는 거요?” “아무리 흉측한 살인범도 삼십 년만 지나면 시효가 끝나 버립니다.” “시효가 뭐요?” ..  (44∼45쪽)


 덮고 자는 이불 한 채를 방에서 꺼내어 담벼락에 널어놓습니다. 담벼락 한쪽에 비둘기똥이 굳어 있습니다. 깨진 벽돌을 주워서 북북 벗겨냅니다. 마지막으로는 손바닥으로 쓱 닦습니다. 이불을 얹고 벽돌 둘을 올려놓습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전철이 건너편으로 지나갑니다. 나도 듣고 옆지기도 듣고 배속 아이도 듣는 전철 소리입니다.

 그제는, 옆지기 배속에서 자라는 아이가 발차기를 해서 밤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 어제는 아직 발차기할 때가 아닌가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직 배속에 있다고는 하지만, 지어미가 따순 햇볕을 받으면서 느긋하게 봄날씨를 즐기고 있는 동안에는, 작은 목숨붙이도 따순 햇볕과 봄날씨를 느긋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 사는 동네에 공장이 많아서 공장 매연을 우리들이 쐬어야 한다면, 우리 어린 목숨도 이 공장 매연을 쐬어야 합니다. 우리 사는 마을에 자동차가 많이 드나들어서 자동차 빵빵 소리와 배기가스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우리 어린 목숨도 이 빵빵 소리와 배기가스를 남김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버섯과 시금치를 볶고 무쳐서 먹은 아침밥은 우리한테 피와 살이 되는 한편, 새로 자라나는 아이한테도 피와 살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이 터전에서 맑은 바람을 쐬고 밝은 햇볕을 쬘 수 있다면 어린 목숨한테도 맑은 바람과 밝은 햇볕이 스며들 테고, 지금 우리가 디디고 지내는 이 땅에서 매캐한 바람과 찌뿌둥한 햇볕만 쬘 수 있다면 어린 목숨한테도 매캐함과 찌뿌둥함이 고이 파고들 테지요.


.. 늑대 할머니는 울고 있는 할머니 손을 꼭 잡았습니다. 늑대 할머니가 이렇게 사람 손을 따뜻하게 잡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할머니들이 이런 일을 숨기고 있다가 몇 해 전부터 세상에 알렸지요. 못된 짓을 한 일본 군인들을 고발하고 원수를 갚고 싶었지요. 하지만 지나간 일이 그리 쉽게 되나요. 거리에서 할머니들이 깃발을 들고 일본이 저지른 못된 짓을 사과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들은 척도 않고 있어요.” “맞아요, 원수 갚는다는 건 쉽지 않아요.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하면 당한 사람만 가슴에 한을 품고 살 수밖에 없어요. 아아, 이제 알았어요!” ..  (122쪽)


 아침을 먹다가 생각했습니다. 어제 송현시장에 가서, 버섯 한 근 이천 원에 시금치 천 원어치를 장만했는데, 어제 저녁밥과 오늘 아침밥으로 버섯은 다 먹고, 시금치는 반쯤 남았으니 두 사람 먹는 한 끼에 천 원쯤 치였나. 가스와 물과 쌀을 빼고, 나중에 숟가락 하나 더 놓아야 한다면 한 끼니에 얼마쯤 치이게 될까.

 봄부터 가을까지는 여러 가지 나물을 실컷 즐기면 되고, 올겨울에는 어떤 푸성귀로 밥거리를 삼으면 좋으려나. 천기저귀 얼마쯤은 이웃집 할머니가 선물해 준다고 했지만,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중앙시장에서 기저귀천을 떼어와야겠고, 앞으로는 빨래가 세 사람 몫일 테니 비누도 많이 들겠지. 겨울에는 보일러를 돌려야 할 텐데 올겨울 기름값은 더 올라갈 텐데, 지금이라도 일찌감치 기름을 받아놓아야 할까.

 오늘 날아온 전기값 고지서를 보니 3층 도서관은 51kw 3630원, 4층 살림집은 50kw 3610원. 겨울에는 냉장고를 안 돌려도 되었지만 이제 슬슬 돌려야 할까. 아니, 올해에는 여름에도 아예 냉장고 없이 나 볼까. 그런데 냉장고를 돌리지 않으면 된장은 어찌하지. 된장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까.

 지금은 옆지기가 밥을 하면 나는 빨래를 하면 되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밥과 빨래를 혼자 맡아야 할 텐데, 기저귀 빨래를 밀리지 않고 해낼 수 있을까.


.. “헤어지기 싫으면 우리하고 같이 솔뫼골로 가서 살자꾸나.” 늑대 할머니가 시큰둥하게 말했습니다. “솔뫼골엔 가고 싶지 않아요.” “왜 싫으냐? 이 시끄러운 서울보다는 훨씬 좋지. 거기는 자동차도 없으니 차에 치으는 일도 없고, 땅을 갈고 열심히 농사지으면 먹을 걱정 안 해도 되고, 공장 같은 데서 쫓겨나지 않아서 좋고.” 늑대 할머니가 이렇게 점잖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는 아직 서울에서 할 일이 있어요.” ..  (137쪽)


 이웃집 할머니들 이야기를 곰삭이고, 옆집 아주머니들 젊었을 적 이야기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 어머니 젊었을 적을 떠올려 봅니다. 세탁기가 있다고 해서 집일을 덜지 않습니다. 세탁기가 옷을 더 깨끗이 빨아 주지 않으면서 물과 전기는 물과 전기대로 많이 먹습니다. 우리 두 식구, 앞으로 세 식구는 먹을거리를 쟁여 놓고 먹는 사람이 아니라 그때그때 시장 나들이를 하면서 바구니 반쯤 채울 만큼만 푸성귀를 사다가 먹으니, 잘하면 도시에서도 냉장고 없이 거뜬히 보낼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기 옷이 걱정이지만, 송림동에 있는 재봉틀집에 가서 발디딤 재봉틀이 얼마쯤 하는지 여쭈어 보고, 형편이 되면 들여놓을 생각입니다. 우리가 입던 옷을 치수 줄여서 아이한테 입히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기를 키워낸 동무한테 얻어도 되고. 무엇보다도 겨울에 몹시 추운 집을 따뜻하게 해 주는 일이 근심인데, 옷상에 작은 툇마루 같은 칸막이를 하나 만들어 볼 수 있을까. 벽에 스티로폼을 두 겹으로 대어 볼까. 바닥에도 스티포롬을 깔고 깔개나 담요를 얹어 볼까. 창문을 모두 틀어막고 지내야 할까.


 (2) 사람과 사람 아닌 목숨


 새끼 길고양이를 거두어서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다가, 어느 만큼 자라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 있다고 느껴지는 때에 길에 풀어놓았습니다. 산업도로 예정터라며 파헤쳐 놓은 땅에 수풀이 우거져 있고, 동네사람들 마음씀이 너그러워서 길고양이들마다 살이 토실토실합니다. 동네 밥집에서는 남은 밥을 따로 그릇에 담아서 길고양이한테 주기도 합니다.

 골목을 걷다 보면, 마주오는 길고양이를 으레 만납니다. 깜짝 놀라며 자동차 밑으로 기어드는 녀석이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길가 여느 집 대문 밑으로 들어가는 녀석이 있습니다. 총총총 발걸음을 옮기며 샛골목으로 접어드는 녀석이 있고, 껑충 지붕으로 뛰어올라간 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녀석이 있습니다.

 길개는 드물고 길고양이가 많습니다. 우리가 풀어놓은 길고양이를 다시 만나기도 하는데, 길고양이답게 흙먼지를 온몸 가득 뒤집어쓴 채로 돌아다닙니다. 길고양이 주검은 아직 구경하지 못했는데, 길고양이는 어디에서 깃을 들이고 어디에서 숨을 거두고 있을는지.


 .. “이 세상 인간들이 우리 짐승들을 어떻게 했는지 아니? 활로 쏘아 죽이고 총으로 쏘아 죽이고, 덫을 놓고 독약을 놓고 산 채로 잡아다 우리 안에 가둬 놓고 잡아먹고 부려먹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있단다.” “……” “너희는 아직 몰라서 그렇지, 내일이라도 나하고 현장에 가면 그걸 알 수 있을게다.” ..  (20쪽)


 틈을 내어 서울 나들이를 할 때에도 길개나 길고양이를 보곤 합니다. 서울도 동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쩐지 서울에서 살아가는 길개나 길고양이는 가엾어 보입니다. 인천에서 갈매기와 함께 하늘을 누비는 비둘기와 달리, 서울에서 땅걸음만 디디는 비둘기를 보노라면, 얘야, 너도 우리 동네로 와서 살지 않으련? 하고 부르고 싶습니다. 틀림없이 먹을거리는 서울이 넘칠 테고, 버려지는 밥찌꺼기도 많을 텐데, 그냥 쓰레기차가 주욱 실어가기만 하나요.

 밥그릇을 나누는 일이 평화이고, 밥그릇을 혼자 차지하는 일이 전쟁이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밥그릇 나눔이란, 다 먹지 못해서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밥그릇 독차지는 홀로 다 먹지 못하고 버리면서도 이웃과 나누지 않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남녘사람은 남녘사람대로 홀로 다 먹지 못하고 음식물쓰레기로 버리면서 북녘사람하고 밥그릇을 나누지 않습니다. 남녘사람끼리도 밥그릇을 나누지 않고, 한뎃잠을 자는 떨꺼둥이한테도 밥그릇을 나누지 않습니다. 한뎃잠은 아니지만 달셋방에서 쪽잠을 자는 가난이한테도 밥그릇을 나누는 일이란 드뭅니다. 죽어 흙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많은 돈을 두 손에 움켜쥐고 돌아간다고. 이웃들한테 기꺼이 나누어 주는 자기 재산은 세금공제도 된다고 하는데, 그냥 세금 더 내면 내지 이웃나눔은 달갑지 않은 일인지.


.. “그래요. 그렇게 많은 짐승들이 죄없이 죽었으니 슬픈 일이죠.” “그런데 어째서 그 사마귀 할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란 거죠?” “그 할아버지가 좋은 분이라는 건, 그렇게 나쁜 짓을 했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 아파하고 계시니까요.” “?” “세상엔 그보다 더 끔찍한 죄를 짓고도 뉘우치기는커녕 도리어 큰소리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뭐, 아무리 뉘우친들 죽은 짐승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  (81쪽)


 지난해 우리 집 옥상마당 담벼락에 까마중이 자라서, 우리 집에 놀러온 사람한테 입가심거리가 되기도 하고,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참새나 비둘기한테 먹이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옥상 담벼락만이 아니라 창턱에도 까마중이 자라던데, 올해에도 씨를 뿌려서 옆자리에 새로운 풀줄기를 올릴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귤이나 양파 따위를 벗기며 나오는 껍데기를 모아서 옥상 한켠에 쌓아놓습니다. 나중에 거름으로 만들려고. 동네 비둘기들은 요 껍데기더미로 찾아와 자기한테 먹이가 될 만한 것이 있는가 콕콕 집곤 합니다. 저 비둘기들을 생각해서 껍데기더미 옆에 헌 그릇 하나 놓고 쌀 한 줌씩 올려놓을까 싶습니다.


.. “에고 답답해라. 그래, 그런 길고 복잡한 역사 같은 건 그만두고, 그래, 남한 군인하고 북한 군인하고 누가 못된 짓을 했냐?” “그게 말이에요, 누가 잘못한 걸 설명 못 해요. 사람들은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했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누가 더 힘이 센지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 알았다!” ..  (129쪽)


 인천시에서 산업도로를 닦는다며 밀어놓은 땅 한켠에 동네 분 누군가가 울타리를 치고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지난주에 요 텃밭을 보았습니다. 줄맞추어 곱게 갈아 놓은 텃밭을 보면서, 이 골에는 무엇을 심고 저 골에는 무엇을 심었을까 궁금합니다. 파헤쳐진 한쪽 귀퉁이에 또 어느 분이 다른 텃밭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로도 가 보고 그분은 무엇을 심었는가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두어 평쯤만 땅을 일구어 콩이라도 심어 볼까 생각해 봅니다. 자동차 있는 동네 분들은 이 너른 터를 주차장처럼 쓰고 있는데, 주차장으로 쓰기보다는 동네사람 너도나도 찾아들면서 텃밭으로 일구면 한결 낫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이따가 시장 나들이를 할 때 자리를 한번 봐야겠습니다.

 시장 나들이를 하는 김에 송림초등학교 옆길로 가면서, 그곳 골목집 앞에서 기르는 해바라기밭에 올해도 해바라기를 심으셨나 살펴봐야지요.


 .. “아니에요, 저는 사람보다 늑대가 더 좋아요. 훨씬 착하게 살고 있잖아요.” “자꾸 그런다고 내가 속을 줄 아니?” “정말이에요. 늑대도 그렇고 너구리도 오소리도, 산에 사는 짐승들은 사람들처럼 총도 안 만들고 폭탄도 안 만들고 전쟁도 하지 않잖아요. 자동차도 안 만들고 학교도 없고 교회당도 절간도 안 만들어도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잖아요.” “……” “쓰레기도 안 버리고 농약도 안 치고, 모두 깨끗하게 살고 있어요.” ..  (141쪽)


 (3) 《밥데기 죽데기》라는 이야기책


 지난해 봄 5월 17일에, 경상북도 안동땅에 살던 권정생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찾아간 하늘나라는, 할아버지 어머님이 먼저 가 계신 하늘나라이고, 할아버지 형제들이 먼저 찾아간 하늘나라입니다. 할아버지 살던 마을에 함께 살던 이웃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일찌감치 찾아갔던 하늘나라이며, 할아버지네 집 앞 마당에 자라던 푸성귀가 할아버지 밥거리가 되면서 찾아간 하늘나라이기도 합니다.

 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토끼가 하느님처럼 이슬과 바람만 먹으면서 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쓰러진 뒤 찾아간 하늘나라입니다. 한 핏줄 한 겨레를 넘어서 한 식구요 한 이웃이며 한 동무였던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미워하고 손가락질하면서 다 함께 찾아간 하늘나라입니다. 할아버지가 찾아간 하늘나라는 우리들이 아직 발을 붙이고 있는 땅나라처럼 싸움이 없을까요. 다툼질이 없을까요. 빼앗음과 괴롭힘은 없을까요.


.. “안 되겠어요. 119에 알려야겠어요.” 할머니는 도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산동네 이웃들이 또 바빠졌습니다. 모두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한꺼번에 바빠지는 것입니다 ..  (85∼86쪽)


 권정생 할아버지는 몸은 몸대로 힘겹고 마음은 마음대로 무거워서, 여느 사람들처럼 연필을 손에 쥐지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댁에 찾아온 손님하고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면 그예 힘이 다 빠져서 그 뒤로 하루 내내 죽은 듯 쓰러져서 쉬어야 겨우 일어날 힘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늙고 아픈 이한테 한 말씀 올리는 이보다 한 말씀 얻으려는 사람이 훨씬 많아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때까지도 고달프게 보냈습니다.

 원고지 한 장 채우는 데에 꼬박 하루를 들여도 힘들다고 하셨는데, 할아버지한테 힘이 넘쳐서 날마다 원고지 열 장씩 채울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처럼 우리들이 웃음과 눈물로 가슴으로 담아내고 받아들이는 이야기책에 몇 권이나 나왔을까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힘이 넘치고 아프지도 않은 권정생 할아버지한테는 아무런 이야기책이 못 나오지는 않았을까요.

 내 몸이 아프면서 내 이웃 아픔을 느끼는 삶이었기에, 내 몸이 무너지면서 내 이웃 무너짐을 깨닫는 삶이었기에, 힘들고 벅찬 마지막때까지 피를 뱉으면서 원고지 한 칸 두 칸을 채워 나갈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밤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울긋불긋 반짝이는 불빛이 눈이 부시게 예뻤습니다. “서울의 불빛이 참 예쁘지?” “정말 예뻐요.” “먼 곳에서 보니까 그런 거야. 저렇게 아름다운 불빛 속에서 지금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잖니?” “……” “지금도 어둡고 추운 지하철 시멘트 바닥에서 떨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  (160∼161쪽)


 더 많은 글도 좋고 더 많은 책도 좋습니다. 더 많은 돈도 좋으며 더 많은 이름값도 좋습니다. 더 많은 물질문명과 더 많은 전기제품도 좋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누리는 우리들은 서로서로 얼마나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달콤하게 와닿는 좋은 것을 혼자서만 많이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는가요. 나한테 달콤하다면 내 이웃한테도 달콤할 텐데, 이웃과 함께 달콤함을 맛보기보다는 홀로 달콤함에 푹 젖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달콤함에 깊이 빠져든 나머지, 씁쓸함과 서운함과 안쓰러움과 고달픔이란 무엇인지 잃어버리거나 놓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못 느끼는 씁쓸함과 서운함 들을 내 이웃이 온통 떠안고 있지는 않은지요. (4341.4.8.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타샤 튜더 캐주얼 에디션 2
타샤 튜더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43 ― 할머니한테 듣는 ‘사람 사는’ 슬기
 : 타샤 튜더,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 책이름 :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 글 : 타샤 튜더
- 사진 : 리처드 브라운
- 옮긴이 : 공경희
- 펴낸곳 : 윌북(2006.8.20.)
- 책값 : 9800원



 (1) 비와 술과 골목가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저녁입니다. 이제 막 여섯 시를 넘겼는데 날은 꽤 어둡습니다. 매지구름이 짙게 깔렸습니다. 이번 비는 지난주에 내린 비처럼 차갑지는 않습니다. 조금 쌀쌀하기는 하지만, 참말로 봄을 부르는 비로구나 싶습니다.

 봄내음 맡으면서 밟아 줄 흙이 없는 도시이지만, 나긋나긋한 바람을 느끼면서, 집에서 가까운 송현시장으로 걸어가 보면, 아주머니랑 할머니랑 차려놓은 고무다라이에는 풋풋한 봄나물이 가득가득. 찬거리로 무엇을 살까 망설이다가 나물다라이 앞에 멈추자, 나물집 아주머니는 “이거는 냉이고, 이거는 진달래고, 이거는 취나물이고 ……” 하면서 하나하나 알려줍니다. 이름을 알아보는 나물이 있지만, 언뜻선뜻 아리송한 나물이 있는데, ‘젊은이가 고것도 모르남?’ 하는 투는 조금도 없습니다. 마치 어린아이한테 가르쳐 주듯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 1830년대의 미국인들은 젊은 조국에 대해 열등감을 지녔다. 그들은 유럽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나라면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보면 안다. 이 순결한 나라를 상상해 보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밑에 덤불이 자라지 않는 숭고한 나무들, 순수한 강과 호수, 하지만 우리는 이 나라의 숲을 없애버렸다. 나무는 사람들의 적이었고, 땅을 개간하느라 거대한 뿌리와 밑동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에 자욱했다. 우리 국민은 받은 것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다 ..  (130쪽)


 시장을 죽 둘러보니 봄나물을 이곳처럼 가지가지 늘어놓고 파는 데가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사고, 앞으로도 이 집에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묻습니다. “어떻게 주세요?” “한 근에 1500원씩이요.” “음…….” 무슨 나물을 할까 망설입니다. 쑥을 할까? 냉이를? 홑잎나물을? 그래도 이때 아니면 먹기 힘든 나물을 먹자는 생각으로, 진달래 한 근과 냉이 한 근, 취 천 원어치를 삽니다. 취나물은 천 원어치만 사는 데에도 거의 한 근만큼 담아 줍니다. 가만히 보면, 한 근어치 산 다른 나물도 말이 한 근이지, 아주머니가 저울도 안 달고 담아 주는 품새가 한 근 반이나 두 근쯤 될 듯.


.. 20∼30년 간 기른 화초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설레는 일이다 ..  (34쪽)


 집으로 돌아와서 옆지기하고 나물무침으로 밥을 먹습니다. 큰 그릇에 된장을 비벼서 나물밥을 먹습니다. 취나물은 물에 씻어서 그냥 먹습니다. 물에 씻을 때 보니, 나물집 아주머니가 먼저 손질을 깔끔하게 해 두셨습니다. 흙도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문득, 한 근 천오백 원은 무척 싼값이 아니냐 싶습니다. 봄철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나물을, 하나하나 손질해서 파는데, 아주머니 품삯을 헤아리면 다문 500원이라도 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 어머니와 오빠는 내가 중요한 일에 무관심하자 몹시 실망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 청년 연맹(상류 여성들의 사회봉사 단체)’과 ‘빈센트 클럽’을 심드렁해 했으니까. 보스턴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도 그렇고. 난 오로지 정원에서 일하고 소젖을 짜고 싶어했다 ..  (42쪽)


 냠냠짭짭 맛나게 밥을 먹다가 또다른 생각이 듭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아주머니는 저한테 내내 높임말을 쓰셨습니다. 아주머니 나이를 헤아리면 저는 아들 뻘일 텐데, 아들도 맏아들이 아니라 막내아들쯤 될 텐데, 어쩌면 손주를 본 할머니일지 모르는데.

 아주머니는 당신 나물집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한테 높임말을 쓰지 않았을까요. 또한, 나물이름을 제대로 모르는 젊은내기한테도 높임말로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저 돈 몇 푼으로 사먹을 줄은 알아도 손수 들판이나 산으로 가서 뜯거나 캐어 먹을 줄 모르는 우리들 젊은내기를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나, 귀엽고 애틋하게 돌아보아주는 마음결은 아니었을까요.


.. 나는 개들을 제대로 먹이려고 무척 애를 쓴다. 깡통에 든 사료는 먹이지 않는다. 꿈에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녀석들에게 집에서 만든 수프나 염소 고기를 먹이고, 마늘을 듬뿍 먹게 한다 ..  (56쪽)


 우리 집 둘레에는 자그마한 구멍가게가 골목마다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우리 동네 구멍가게는 열한 군데? 아니 큰길 건너편까지 치면 열다섯? 열일곱? 스물? 걸음이 닿는 데까지 치면 서른이나 마흔 군데가 넘습니다. 전철역 둘레까지 치면 쉰 군데도 넘고 예순 군데, 아니 백 군데까지 헤일 수 있을 만큼 아주 많습니다.

 이 구멍가게는 말 그대로 ‘구멍 하나 낸 듯한’ 가게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신님들 사는 집에서 방 한 칸을 터서 만든 구멍가게로 보입니다. 달삯 받고 내어주는 그런 가게가 아니라, 조그맣게 꾸리면서 골목집 동네사람을 마주하며 장사하는 가게입니다. 골목골목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디 먼 데까지 가서 장만해 오기에는 멋쩍고 그때그때 써야 할 자잘한 물건을 갖추고 있는 가게입니다. 150원짜리 볼펜부터 귀후비개에 손톱깍이에 라면에 장기판과 바둑알에 100원짜리 소시지에 50원짜리 초콜릿과 알사탕을 갖춘 작은 가게.

 며칠 앞서였습니다. 우리 동네 골목가게 가운데 한 곳에 찾아갑니다. 저는 이곳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 발길을 끊고 있는데, 옆지기가 가 보자고 합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구멍가게거든요. 그러면 옆지기 구경삼아 가야지 하고 들어갑니다. 들어갔으니 무어라도 하나 들고 나와야겠다 싶어서, 저는 막걸리 한 병을 고르기로 합니다. 냉장고를 열고 막걸리 한 병을 꺼내는데 유통기한이 두 주 지났습니다. 헉, 두 주나 지난 막걸리……. 꺼낸 막걸리를 집어넣고 옆엣것을 봅니다. 한 주 지난 막걸리입니다. 다른 막걸리 유통기한도 비슷비슷.

 뒤에서 구멍가게 할머니가 부릅니다. “왜? 유통기한 지났어?”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말을 거듭니다. “뭘, 젊은 사람들이 눈이 좋으니까 알아보지.”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유통기한 지난 막걸리’를 치울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유통기한이 두 주가 지난 막걸리라면 석 주 앞서 들여놓은 물건일 텐데, 맥주나 소주가 아닌 막걸리를 이렇게 두고 있다니. 한두 병도 아닌 모든 막걸리가.


.. 하지만 오래된 물건들을 지닌 것은 내가 소중히 다루기도 했고, 집안 어른들이 잘 간수한 덕분이다 … 나는 다림질, 세탁, 설거지, 요리 같은 집안일을 하는 게 좋다. 직업을 묻는 질문을 받으면 늘 가정주부라고 적는다. 찬탄할 만한 직업인데 왜들 유감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가정주부라서 무식한 게 아닌데. 잼을 저으면서도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을 … 물레질, 뜨개질, 직조를 하노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자급자족하고 싶고, 내가 쓰는 물건을 어떻게 만드는지 익히고 싶다 … 내 물레는 1700년대부터 집안에서 쓰던 것이라, 페달이 많이 닳아서 매끄럽다. 혹시 오래된 나무의 감촉을 좋아하지 않는지? 쇠처럼 차지 않고 손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다 …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난 하루에 한 시간씩 천을 짠다. 이런 일은 조금씩 조금씩 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 우리는 선물을 다 직접 만들려고 애썼다. 뜨개질을 하고 종이상자를 꾸미고 나무를 깎아 엄마 거위와 아기 거위 네 마리를 만들었다 ..  (142∼158쪽)


 제가 단골로 가는 구멍가게, 가장 자주 찾아가는 구멍가게에는 냉장고에 술이 하나도 없는 날이 있습니다. 이곳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늘 알맞춤하게 물건을 갖추어 놓기 때문에, 그날 따라 잘 팔려서 금세 동이 나는 물건이 있으면 더 팔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더 많은 물건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물건이 떨어져서 없으면 “오늘은 다 팔렸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하면서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다음 구멍가게로 갑니다. 다음 구멍가게에도 우리가 바라는 물건이 없으면 또다른 구멍가게로, 그 옆에 있는 구멍가게로, 또 그 구멍가게에서 스물이나 서른 걸음 떨어져 있는 구멍가게로 갑니다.

 이 가운데 어느 집은 밤늦도록 불을 켜 놓기도 하지만, 웬만한 집들은 저녁 열 시나 열한 시면 문을 닫습니다. 더 일찍 닫는 집도 있습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있는 그대로 동네사람을 만나고 동네장사를 합니다.


.. 바랄 나위 없이 삶이 만족스럽다. 개들, 염소들, 새들과 여기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해 줄 이야기는 없다. 철학이 있다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자신 있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상상해 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라면,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만날 것이다.’ 그게 내 신조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내 삶 전체가 바로 그런 것을 ..  (174쪽)


 어제는, 단골 구멍가게 할배 할매가 저녁을 자시고 있더군요. 집에 곁달린 구멍가게에 밥상을 차려놓고 두 분이 마주앉아서 저녁을 자시더군요. 그래서, 한 말씀 여쭈었습니다. “아이고, 저녁 드시는데, 사진 한 장 찍어야겠네요!”


 (2) 몸 냄새


 오늘은 조금 나아졌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집과 도서관을 잇는 계단에 담배 연기 자욱하고 냄새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도서관은 3층에 있고, 우리 집은 1957년에 지은 집이라 그때 문화를 보여주듯이 계단이 참 많습니다. 올라오는 계단짬에는 언제나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아래층에서 일하는 학습지 도매상 아저씨들이 담배를 태운 뒤 계단에 그냥 버려 놓습니다. 이걸 어찌할까 어쩌면 좋나 한참 생각한 끝에, 빈 깡통 하나 놓으면 될까 싶어서, 큼직한 참치깡통 하나를 놓았습니다. 계단짬에 버려진 담배꽁초는 비질을 하여 깡통에 쓸어 넣습니다.

 이렇게 하니 아래층 일꾼들이 계단짬에 꽁초 버리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담배를 태울 때 깡통 옆에서 태우곤 합니다. 이웃한 다른 가게 일꾼도 우리 계단으로 놀러와서 담배를 태웁니다. 아마, 당신네들 일하는 가게 임자가 담배 태우는 모습을 싫어하는가 봐요.


.. 저녁에 염소 우리에 내려가다가 날씨가 추워지리란 걸 깨달았다. 맨발로 걸으면, 땅의 냉기가 느껴져 다음날 날씨를 짐작할 수 있다 ..  (25쪽)


 그런데 말이지요, 어제 아침에, 이 담배깡통에 불이 났습니다. 갑자기 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나 해서 들여다보니까, 누군가 불을 제대로 안 끄고 깡통에 넣어서, 그 안에 있던 종이컵이며 종이붙이(담배 태우는 이들이 버린 쓰레기)에 불이 옮겨 붙었더군요.

 콜록콜록 재채기를 하면서 물을 부어서 불을 끕니다. 그러는 사이 담배 냄새가 제 몸에 배어듭니다. 몇 초 안 되는 짧은 동안임에도 옷이며 몸이며 온통 담배 냄새가 …….


.. 내 삽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아, 본인의 창의력에 흠뻑 사로잡혀 계시는군요’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상업적인 화가고, 쭉 책 작업을 한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내 집에 늑대가 얼씬대지 못하게 하고, 구근도 넉넉히 사기 위해서! ..  (37쪽)


 계단가 창문을 활짝 열고 여러 시간 있으나 냄새가 안 빠집니다. 오늘까지도 냄새는 다 빠지지 않습니다. 하긴, 불타며 나던 냄새가 빠진다 해도 새로새로 담배를 피우실 테니, 새로운 냄새가 자꾸자꾸 올라올 테지요.

 아이고, 담배 냄새가 이리도 모진지, 이리도 오래 가는지, 이리도 안 빠지고 남는지 이번에 처음 압니다.


.. 난 항상 삽화의 가장자리에 나뭇가지나 리본, 꽃을 그린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은 적도 없다. 사람들은 가장자리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를 즐긴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나오기 때문일 터다. 젖소의 어느 쪽에서 젖이 나오는지, 말을 탈 때 어느 쪽으로 올라타야 하는지, 어떻게 건초더미를 만드는지 난 훤히 알고 있다. 그러니 적당히 짐작으로 그리지 않는다. 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내 손자들, 친구들이고, 주변 환경은 실제 내 환경이다. 꽃들은 내 정원이나 주변 들판에서 자라는 것들이다 ..  (53쪽)


 그러나, 우리 몸에 배어 있는 냄새는 담배 냄새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몸에는 술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 몸에는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과 운동선수한테는 땀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충주에서 살던 때, 자전거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할라치면, 적잖은 사람들이 제 옆에 앉거나 서기를 싫어했어요. 몸에서 땀 냄새가 너무 난다고. 하루 대여섯 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몸은 아무리 씻고 씻어도 땀내가 빠지지 않습니다. 땀내를 자연스럽게 여기거나 좋아한다면 모르되, 요즘 사람들은 몸에서 땀내가 나도록 몸을 쓰는 일이 드물다 보니까, 이 냄새가 더없이 고약하거나 괴롭다고 느낄밖에 없구나 싶어요. 여름에는 춥게 살고 겨울에는 덥게 살잖아요. 자가용뿐 아니라 버스나 전철도 에어컨 바람이 얼마나 빵빵한가요. 요즘 도시사람한테는 땀흘릴 겨를이 없어요.


.. 정원을 가꾸면 헤아릴 수 없는 보상이 쏟아진다.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다. 결혼할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가 아직도 맞고, 턱걸이도 할 수 있다. 평생 우울하거나 두통을 앓아 본 적도 없다 ..  (68쪽)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는 흙냄새와 거름냄새, 사무실에서 펜대 잡고 일하는 사람한테는 사무실 냄새와 펜 냄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기름 냄새가 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일하는 곳 냄새를 몸에 풍깁니다. 누구든 자기가 몸담은 곳 냄새가 몸에 스밉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하고 부모 삶을 몸에 받아들이듯, 우리들 어른도 우리가 깃든 곳 문화와 느낌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옳은 마음과 생각으로 옳은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저절로 옳고 아름다운 쪽으로 자리잡습니다. 우리가 얄궂은 마음과 생각으로 비뚤어진 일을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비틀리고 뒤틀리고 구린내를 풍깁니다.

 우리 생각에 따라, 우리 마음 가는 데에 따라, 우리 몸이 움직이는 데에 따라, 우리가 깃든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 냄새는 바뀝니다. 꼭 시골에서 산다고 하여 자연스러운 냄새가 가득하지 않아요.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라 해서 억지스럽거나 딱딱한 잿빛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다.


.. 가을마다 배가 열리면 나는 병조림을 만든다. 시장에서 산 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 ..  (115쪽)


 저는 충주 산골짝에 살 때부터 고무신을 신었습니다만, 도시인 인천에 와서도 고무신을 신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무신 값이 쌉니다. 한 켤레에 3000원이거든요. 그러나 값보다 좋은 대목은, 고무신을 신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땅을 한결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요. 바닥이 아주 얇으니, 제 발이 밟는 대로 땅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시골에서는 흙 느낌을 받아들이고 도시에서는 아스팔트나 시멘트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이러는 동안 제 몸부터 흙을 밟을 때 제 몸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밟을 때 제 몸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느낍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서 기를 때가 되면, 이 느낌이 고스란히 제 몸에 남아 있을 테니, 아이한테도 무엇을 가르치면 좋고, 무엇을 보여주면 좋으며, 무엇을 함께하며 살아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추스를 수 있으리라 봅니다.


 (3) 사람이 살아가는 뿌리를 밝히는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우리 옛사람한테 물려받은 우리 나라 우리 땅 우리 바다 우리 하늘 우리 산과 들 우리 논밭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입으로는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읊을 줄 알지만,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고 느낀다면, 시화호와 새만금을 어찌 ‘죽음이 떠도는 바다’로 만들 생각을 하겠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왜 이리 자꾸 늘리려고만 하겠습니까. 전기를 덜 쓰면서 발전소를 줄일 수 있는 삶으로 바꿔야지요. 찻길이 모자라다고 외치지 말고, 찻길을 줄여서 우리 삶터를 고이 지켜야지요. 자동차를 만들어 팔아야 나라살림이 북돋울까요. 자동차 만드느라 더러워지는 이 나라 삶터는 얼마나 큰돈을 들여야 되살릴 수 있는데요. 아니, 더러워지고 무너진 자연 삶터는 돈으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온전히 마음에 달려 있다. 난 행복이란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모든 것은 내게 만족감을 안겨 준다. 내 가정, 내 정원, 내 동물들, 날씨, 버몬트주 할 것 없이 모두 ..  (22쪽)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타샤 튜더 할머니 책을 봅니다. 사진이 많이 들어가서도 그렇지만, 금세 읽고 한 번 더 읽고, 두 번 다시 봅니다. 며칠 사이에 여러 번 다시 봅니다. 그러고도 아쉬워서 다시 한 번 더듬은 뒤, 이제야 책꽂이에 살며시 얹어놓습니다.


.. 조경 계획 같은 것은 없다. 난 계획해서 화초를 심지 않고, 되는대로 쑥쑥 심는다. 많은 꽃이 뒤섞여 자라는 게 좋다 … 뱀의 얼굴을 찬찬히 본 적이 있는지? 얼마나 낙천적으로 생겼는지 모른다. 늘 배시시 웃고 있다 ..  (86쪽)


 타샤 튜더 할머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당신은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고픈 대로 자기 삶을 꾸리려고 하다 보면, 어느 누구도 돈을 갖다 앵기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니 그림을 그릴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할머님은 먹고살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요, 당신이 남긴 이 책 《행복한 사람, 타샤 투더》를 읽어 보니까, 그저 당신 입만 채우는 먹고살기가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삶을 꾸려 나가는 길’ 가운데 하나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훌륭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밥은 밥이고 삶은 삶이면서 꿈은 꿈일까요. 밥을 놓을 수 없는 가운데 삶 한 자락을 다부지게 붙잡은 타샤 투더 할머님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품어 온 당신 꿈이 소록소록 묻어난 《행복한 사람, 타샤 투더》를 읽으면서, 또 책을 덮으면서, 할머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옵니다. ‘네가 아무리 기쁘게 살더라도 그 기쁨이 너한테만 기쁨이라면 너한테도 기쁨이 아닐 수 있다, 네가 아무리 슬프게 살더라도 그 슬픔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 수 있다면 너한테는 슬픔이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4341.3.29.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