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을 꺾어서


 읍내 장마당 마실을 가는 길목, 두 시간에 한 대 오는 시골버스를 기다린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버스가 몇 분 늦는다. 아이는 “버스가 늦네.” 하고 말하다가는 버스타는곳 둘레 풀밭에서 들꽃을 꺾는다. 꺾은 들꽃을 한손에 모아 쥔다. 이윽고 시골버스가 들어온다. 읍내로 가는 십이 분쯤 되는 길을 지나고, 읍내에 닿아 우체국에 볼일 보러 가는 길에서 몇 분 더 흐른다. 아이가 손에 쥔 꽃은 그새 고개를 폭 숙인다. 더운 날씨에 금세 시들고 만다. “꽃이 벌써 시드는구나. 흙에 놓고 가자. 꽃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자.” 아이는 손에 쥐던 꽃무더기를 흙자리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4344.6.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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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顔大好き地球の子 (大型本)
田沼 武能 / 新日本出版社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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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야기하는 사진책은 안 뜨지만, 다른 사진책에서도 이분 사진결을 느끼면 좋으리라 생각해서 다른 사진책에 느낌글을 걸칩니다) 



 지구별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7]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 《地球星の子どもたち》(朝日新聞社,1994)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자랍니다.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된 아이는 저처럼 작고 어여쁜 아이를 낳습니다. 작고 어여쁜 아이는 새롭게 태어나고, 이 작고 어여쁜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다시금 저처럼 작으면서 어여쁜 아이를 낳습니다.

 온누리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아이가 새로 태어나서 자라기 때문에 나라살림을 이룹니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때라야 비로소 한 나라 살림을 이룹니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일을 하거나 돈을 벌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오직 놀 수 있을 뿐이요, 어버이한테서 사랑받을 수 있을 뿐인데, 이렇게 여리디여리며 작디작은 아이가 있어야 비로소 어느 나라이든 나라꼴을 갖춥니다.

 잠수함이 없고 군함이 없어도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군대가 없거나 경찰이 없어도 나라를 돌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돌볼 수 없습니다. 아파트가 없고 쇼핑센터가 없어도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어요.

 ‘애국’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나라사랑이 아닙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 내 넋을 사랑하며 내 말을 사랑하는 나라사랑입니다. ‘경제개발 역군’이 되자는 나라사랑이 아닙니다. 내 작은 살림집을 사랑하고, 내 살가운 살붙이를 사랑하자는 나라사랑이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집에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과 걸레질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하고 먹으려고 밥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한테 입히려고 빨래를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하고 오순도순 지내려고 비질과 걸레질을 해서 집안을 말끔히 치웁니다. 오직 사랑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을 하고, 오로지 사랑으로 집안에서 살림을 꾸립니다.

 사진책 《地球星の子どもたち》(朝日新聞社,1994)를 읽습니다. 사진책 《지구별 어린이》는 사진쟁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 님이 온누리 숱한 나라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만난 아이들을 담습니다. 한두 나라 어린이가 아니라 백 나라를 훨씬 넘는 수많은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사귑니다. 가난하다는 나라에도 찾아가 가난하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난하다는 나라에서도 제법 잘사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멸차다는 나라에도 찾아가 가멸차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멸차다는 나라에서도 퍽 가난하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많디많은 나라 많디많은 어린이를 사진책 하나로 마주하며 곱씹습니다. 다 다른 나라 다 다른 겨레 아이들 웃음꽃은 서로 닮습니다. 다 다른 나라 다 다른 겨레 눈물꽃 또한 서로 닮습니다. 아이들 눈망울은 비슷합니다. 아이들 몸짓은 비슷합니다. 저마다 즐기는 놀이가 다르고, 저마다 낳은 어버이와 키우는 어버이가 다를 테지만, 아이들 살림살이는 엇비슷합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아간대서 더 불쌍해 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싸움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지낸대서 다 가엾게 보이거나 딱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나라살림이 넉넉해서 돈 걱정이나 배곯이 걱정이 없는 곳에서 지낸다 하는 아이들이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갑갑할는지 모릅니다. 주어진 틀에 따라 학교를 다녀야 하고, 시키는 틀에 따라 시험을 치러 자격증이나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하는 아이들이 훨씬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갑갑한데다가 고단할는지 모릅니다.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그저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이 아이들 차림새를 살피면 한눈에 이 아이가 살아가는 집안살림이 어떠한지 헤아릴 만합니다. 그런데 ‘집안살림 = 돈 크기’가 아니에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겁거나 오붓하게 지내는 집안이 있습니다. 돈은 있으나 돈만 넘치게 쓸 뿐, 기쁨이나 애틋함하고는 동떨어진 집안이 있어요.

 집식구가 ‘집안일’과 ‘집밖일’만 한다면, 이러한 집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들은 끼니를 굶을 근심이 없더라도 마음속에 사랑이 피어나지 못합니다. 집식구가 집안일과 집밖일을 알맞게 나누어 서로서로 살뜰히 맡으면서 집안살림과 집밖살림을 알뜰히 여민다면, 이러한 집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가슴속 깊이 사랑씨를 뿌립니다. 아이들 웃음꽃이란 아이들을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뿌린 사랑씨에서 비롯합니다. 아이들 눈물꽃이란 아이들을 보살피며 함께 지내는 어버이가 뿌린 미움씨에서 비롯해요.

 새삼스레 《지구별 어린이》를 거듭 넘기고 다시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쟁이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지구별에서 가 보지 않은 나라가 없겠지요. 모든 나라 모든 아이를 마주하며 사귀었을 텐데, 아마 어느 나라 어느 아이를 만나더라도 아이들 낯빛과 사랑빛과 눈물빛은 매한가지로구나 하고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은 나라로 찾아가서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지 않더라도 아이들 맑은 눈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더 가난하거나 더 ‘두메’라 하는 데까지 찾아가야 아이들 밝은 웃음빛을 만날 수 있지 않아요. 일본 사진쟁이로서는 일본에서 얼마든지 만나는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입니다. 한국 사진쟁이라면 한국에서 얼마든지 만날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일 테지요.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일본부터 한국이나 중국이나 대만을 거쳐 지구별을 샅샅이 밟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 어느 겨레를 찾아가서 아이를 만나더라도 아이는 아이답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별 어린이”가 아닌 “일본 어린이”가 되어도, 또 “일본 훗카이도 어린이”가 되어도, 또 “우리 집 내 아이”가 되어도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은 똑같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나한테 있습니다. 사진감과 사진말과 사진꽃과 사진빛과 사진뜻과 사진값과 사진꿈은 늘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나를 보고 내 삶을 볼 때에 내가 걸어갈 사진길을 깨닫습니다. (4344.6.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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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ghanistan (Paperback) - Broken Promise
Moises Saman / Charta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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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진 꿈 앞에서 흔들리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6] 모이제스 사만(Moises Saman), 《Afghanistan, broken promise》(CHARTA,2007)



 한국에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알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거꾸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을 알기도 매우 힘들겠지요.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배울 일이란 없습니다. 세계사를 다루는 교과서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를 얼마나 실을까 궁금한데, 몇 줄쯤으로 이 나라 이야기를 다룰는지요. 몇 줄이든 몇 쪽이든 다루어 준다면 얼마나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는 눈썰미로 다룰는지요.

 한국사람은 이웃한 일본에서 ‘아이들한테 역사를 엉뚱하게 가르치는 교과서’를 자꾸 만든다며 나무라곤 합니다. 일본에서 정치권력을 거머쥐거나 틀어쥐려는 이들은 ‘역사 비틀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정치권력을 거머쥐거나 틀어쥐려는 이들은 일본 군국주의자하고 똑같습니다. 일본은 ‘일-한 역사 비틀기’를 하고, 한국은 ‘한국사람 여느 역사 비틀기’를 합니다.

 신문에 실리거나 방송에 나오는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는 온통 전쟁과 테러와 약탈과 가난과 파병뿐 아닌가 싶습니다. 때때로 ‘여성 권리가 아주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떠돌곤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사람도 사랑을 할 텐데, 아프가니스탄사람도 밥을 먹을 텐데, 아프가니스탄사람도 일을 하고 놀이를 즐기며 살아갈 텐데, 옷을 깁고 집을 지으며 동무를 사귈 텐데, 흙을 일구고 꽃을 사랑하며 나무를 돌볼 텐데, 아이를 낳고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용히 숨을 거둘 텐데, 숱하디숱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기란 참 어렵습니다.

 사진책 《Afghanistan, broken promise》(CHARTA,2007)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페루 리마에서 태어나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진기자나 사진작가로 일하는 모이제스 사만(Moises Saman) 님 사진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2004년에 《This is War》(CHARTA)를 내놓은 모이제스 사만 님은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서 아픈 채 살아야 하는 사람과 터전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어떻게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 어떻게 슬픈지를 사진으로 조용히 보여줍니다. 아픈 채 살아가고 슬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고즈넉히 들려줍니다.

 사람도 땅도 집도 길도 꽃도 들판도 흔들립니다. 절뚝이면서 흔들리는지 모르고, 울다가 흔들리는지 모르며, 고개를 떨구기에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폭탄이 터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르고, 탱크가 지나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르며, 군인들이 지나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얼핏, 재미나다면 재미나고 무섭다면 무서운 이야기 하나 듣습니다.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군인한테 들이는 돈이 ‘군인 한 사람 앞에 해마다 100만 달러’만큼 된다고 하더군요. 2011년 1월부터 5월까지 들인 돈은 1130억 달러라고 합니다. 1억 원이 아닌 1억 달러라 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1억 달러라 하면 1000억 원이 넘으니까요. 1130억 달러라 하면 얼마나 큼지막한 돈이 될까요.

 미국 한 나라가 고작 다섯 달 동안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한 곳’으로 보낸 ‘싸움터 군인과 무기와 군사시설’에 들인 돈이 1130억 달러라 한다면, 이제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인 군사비는 얼마나 되고, 지구별 곳곳에서 들인 군사비는 또 어떻게 될까 끔찍합니다. 지난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인 군사비는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훨씬 끔찍합니다. 소련에 앞서 아프가니스탄하고 이웃한 나라에서 퍼부은 군사비에다가 서양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들인 군사비는 또 얼마나 될는지 헤아리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미국이며 소련이며 유럽이며,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보내어 사람을 죽이고 집을 허물며 땅을 망가뜨릴까요.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 가운데 1/10000이라도 아프가니스탄 논밭과 살림집과 어린이와 교육에 보태었다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지구별 평화와 사랑은 얼마나 달라지거나 거듭났을까요.

 사진책 《아프가니스탄, 깨진 다짐》에 나오는 어린이와 어른이 흔들립니다. 아니, 아프가니스탄 어린이와 어른을 바라보는 사진쟁이 손과 눈과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니, 미국에서 살아가며 미국 언론매체에 보도사진을 보내는 노릇을 하는 ‘페루에서 태어나 에스파냐에서 자란’ 사진쟁이 몸뚱이가 흔들립니다.

 그렇지만, 아프가니스탄사람은 아프가니스탄사람대로 살아갑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아프면 아픈 대로 삽니다. 슬프거나 아프지만 어김없이 사랑이 꽃피고, 메마르거나 무섭거나 차디찬 땅에서도 새롭게 아이가 태어납니다. 더 나은 시설과 문화와 교육을 누리지 못한다지만, 이곳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는 한국 어린이나 미국 어린이하고 똑같이 착한 사랑과 고운 믿음을 온몸으로 예쁘게 맞아들이면서 자랍니다. 다만,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자라는 길에는 한결 맑은 하늘이나 한껏 푸른 들판보다 번쩍거리는 총칼을 휘두르는 군인에다가 쾅쾅 귀를 울리는 폭탄소리가 익숙할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탱크나 전투기나 폭탄이 보이지 않는 서울 시내 어린이는 괜찮은지요. 뉴욕 시내 어린이와 도쿄 시내 어린이는 걱정없는지요. 서울과 뉴욕과 도쿄 시내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는 어떠한 모습을 보고 어떠한 소리를 들으며 어떠한 나날을 보내는지요.

 어른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거나 거머쥐려는 힘센 나라 어른이 벌이거나 부추기는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믿음을 북돋우는 데에 돈을 안 쓰고, 전쟁무기 만들거나 살인훈련 받는 군인을 키우는 데에 돈을 끝없이 쓰는 ‘선진강대국’ 어른들이 저지르는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은 참으로 여리디여립니다. 사진 한 장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사진은 온누리를 바꾸지도 못하고, 아픔이나 생채기를 보여주지도 못하며, 눈물이나 웃음 또한 담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그저 흔들릴 뿐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얼룩질 뿐입니다. 깨진 꿈이라기보다 깨뜨린 꿈을 찾거나 보듬거나 다스리기에는 너무도 벅찬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총알 구멍 숱하게 생긴 벽을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그나마 이 벽은 폭탄을 맞아 송두리째 사라진다든지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4344.6.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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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 웅진 세계그림책 100
자크 드레이선 지음, 이상희 옮김, 안느 베스테르다인 그림 / 웅진주니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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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들판 양로원 할머니한테 마실 가는 아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9] 안느 베스테르다인·자크 드레이선,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웅진주니어,2006)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스스로 제금날 때까지 어버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일찍부터 어버이 곁을 떠나는 아이라면 스무 살 무렵부터 따로 살아갈 테지요. 어쩌면 스물이 안 된 나이에도 따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부터 따로 살아갈 수 있어요.

 어느 아이는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어도 어버이 곁을 안 떠날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어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아이는 젊은 나이에 어버이 곁을 떠납니다. 학교를 다닌다거나 회사를 다닌다거나 사랑하는 짝꿍을 만난다거나 하면서 어버이 곁을 떠납니다. 어버이는 제 아이가 한창 빛나는 나이에 떠나 보냅니다. 어버이는 제 아이가 가장 빛나는 나이에 곁에서 지켜볼 수 없습니다. 아이는 참으로 빛나는 나이에 어버이가 아닌 제 마음에 드는 새로운 짝을 찾아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살림을 일굽니다. 이무렵부터 어버이는 둘만 남거나 홀로 남은 채 기나긴 나날을 보냅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를 낳아 돌보던 나날보다 훨씬 긴 나날을 둘 또는 혼자서 보내야 합니다.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 흐르고 보면, 어버이가 낳은 아이도 어버이가 되어 저희 아이한테 제 어버이가 했듯이 똑같이 하겠지요. 그리고, 이 아이도 어버이가 된 만큼 이 아이가 어버이가 되어 낳은 아이 또한 머잖아 스스로 살림을 꾸리겠다며 제금을 날 테고요.


.. 기차에서 엄마와 페트라는 꼭 붙어 앉았어요. 둘은 땅거미가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봅니다. “엄마, 이다음에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 하면요, 내 아이도 엄마를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 줄 거예요.” 페트라가 말하자 엄마가 페트라를 감싸 안으며 덧붙입니다. “그래, 풀밭에서 함께 춤도 출 거야.” ..  (22쪽)


 어버이 되는 사람이 아이하고 함께 보내는 나날은 그리 안 길다 할 만합니다. 아이를 낳아 어린이를 거쳐 푸름이를 지나 어른이 되기까지 보내는 나날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고되다면 고되고 빠르다면 빨라요. 즐겁다면 즐겁고 보람차다면 보람차겠지요.

 아이는 어버이가 저를 보살피는 매무새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저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찬찬히 지켜봅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쓰는 낱말과 말투를 배웁니다. 어버이가 고우면서 착하고 참다이 말을 한다면, 아이는 고우면서 착하고 참다이 말을 합니다. 어버이가 어여쁘며 해맑고 싱그러이 살림을 꾸린다면, 아이 또한 어여쁘며 해맑고 싱그러이 살림을 꾸리는 버릇을 들입니다.

 어버이가 자가용을 몰면 아이도 자가용을 모는 어버이 매무새를 받아들입니다. 어버이가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면, 아이 또한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삶에 익숙합니다. 어버이가 책을 읽으면 아이도 책을 읽습니다. 어버이가 텔레비전을 보니 아이 또한 텔레비전을 봅니다. 어버이가 손으로 빨래를 하고 손수 걸레질을 한다면 아이 또한 손으로 빨래하기를 즐기고, 어버이 곁에서 걸레질을 도우려 합니다. 어버이가 흙을 일구면 아이도 흙을 일구려 하고, 어버이가 집일과 집살림 모두 여자한테만 맡긴다면 아이는 이러한 살림새를 시나브로 받아들입니다.


.. 페트라는 엄마하고 기차를 탔어요. 초원의 집에 가는 거예요. 초원의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창문이 많은 집이에요. 여름이면 언덕 아래가 온통 꽃과 푸른 풀밭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페트라와 엄마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  (2쪽)


 그림책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웅진주니어,2006)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양로원에서 살아갑니다. 할머니는 홀로 살아가다가 당신 아이들이 양로원에 넣었기에 이곳에서 살아갈 테지요. 할머니는 홀로 살림을 일굴 만큼 기운이나 마음이나 몸이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양로원에 들어갔겠지요.

 양로원에 들어간 할머니는 당신 딸아이와 손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당신 손녀가 당신이 당신 딸(손녀한테 어머니)한테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비로소 살짝 제 넋이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제 넋이 돌아오기는 아주 살짝일 테지요. 당신 딸과 손녀가 집으로 돌아가고 양로원에 할머니만 홀로 남는다면, 할머니는 다시금 당신 넋을 잃을 테지요.


.. 페트라와 엄마는 긴 복도를 걸어갑니다. 따각, 따각, 따각, 발자국 소리가 반짝이는 복도를 지나가요. 벽에는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어요. 온통 비누 냄새, 바닥 닦는 왁스 냄새예요 ..  (8쪽)


 그림책을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할머니네 아이하고 손녀는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가기 어렵겠지요. 어버이한테서 제금난 아이들은 어버이하고 따로 살고 다른 삶을 꾸리며 다른 살림을 일구듯,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로서는 양로원에 들어갈밖에 없습니다. 양로원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가끔 찾아오는 손님을 목빼며 기다려야 하는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지내는 요양원이라는 곳은 온통 비누 냄새와 왁스 냄새라고 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몸에서 나는 고약하다는 냄새를 가리거나 씻으려고 비누를 바르고 왁스를 문지르겠지요.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갓난아이나 어린이한테서는 보송보송하며 싱그러운 살빛과 살내라 한다면, 머잖아 흙으로 돌아갈 늙은 사람한테서는 퀴퀴하거나 고약한 빛과 내음이 감돈다 할 만합니다.

 그나저나 왜 양로원이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을 지으면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당신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을 지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낳은 아이들은 느긋하게 당신 삶을 꾸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에 가끔 마실을 가면 손자나 손녀가 될 아이들은 할머니 얼굴과 할아버지 목소리를 잊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면 서양 나라 아닌 한국은 어떠할 때가 아름답거나 즐거울까요. 우리 나라에서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물 맑고 바람 시원한 시골마을 요양원으로 보낼 때에 기쁘게 당신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눈을 감는 마지막날까지 호미를 들고 김을 매거나 흙을 일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로서는 시멘트로 콱 막힌 곳에서 흙을 일구려고 몸을 쓸 수 없을 뿐더러,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집일이든 집살림이든 맡기는 아이(어머니나 아버지가 된 어른인 아이)는 없으리라 봅니다.

 책을 덮습니다. 내 삶과 내 어버이 삶을 곱씹습니다. 내가 내 어버이한테서 제금나며 살아온 지 꽤 되었습니다. 스무 살부터 제금나며 지냈고, 머잖아 어버이하고 떨어진 채 지낸 지 스무 해가 됩니다. 내 어버이는 당신 아이를 내보내고 스무 해를 보내며 어떤 삶과 꿈과 마음을 품었을까요.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 우리 집 아이들이 제금난다면서 홀로 당차게 이 집을 박차고 나선다 한다면, 이때부터 나는 내 아이하고 어떠한 이음고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당신 아이를 잊을 수밖에 없는 삶을 보냈구나 싶습니다. 아마, 오늘날 수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당신 아이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고단하면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어머니와 아이는 할머니한테 가끔가끔 찾아간다지만, 아예 낯 한 번 비추지 않거나 목소리 한 번 들려주지 않는 어버이와 아이가 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는 늘 곁에 붙어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냈을 어버이와 아이인데, 어느 때부터 어떡하다가 서로서로 이렇게 갈리면서 살아갔을까요.

 우리들이 저마다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보금자리는 얼마나 사랑스럽거나 믿음직하거나 아름다울까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좋아하며 아낀다는 삶터는 어느 만큼 좋으며 아낄 만해서 아리따울는지 가누어 봅니다.

 푸른 들판에 예쁘게 선 요양원은 시설로서 훌륭하다 할 만합니다. 다만, 푸른 들판은 크고작은 들꽃과 들풀이 숱하게 어우러지면서 맑으며 고운 푸른 빛깔을 이룹니다. (4344.6.2.나무.ㅎㄲㅅㄱ)


―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 (안느 베스테르다인 그림,자크 드레이선 글,이상희 옮김,웅진주니어 펴냄,2006.12.5./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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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책


 백 살을 먹은 느티나무에서 꽃을 피웁니다. 이백 살을 먹은 느티나무에서 꽃을 피우고, 삼백 살과 사백 살과 오백 살을 먹은 느티나무에서 꽃을 피웁니다. 육백 살을 먹은 느티나무 밑에는 지난해에 떨군 씨앗이 뿌리를 내려 싹을 돋은 새로운 어린나무가 자랍니다. 이제 막 한 살이 된 어린 느티나무 줄기는 갓난쟁이 손가락보다 가느다랗습니다. 몇 백 살을 먹은 우람한 느티나무 줄기는 가장 키가 크거나 가장 몸집이 크다는 어른이 팔을 벌려 안아도 안을 수 없을 만큼 굵습니다.

 한 살 난 어린나무는 백 살 먹은 느티나무 밑에든 이백 살 먹은 느티나무 밑에든 마음껏 자라납니다. 햇볕을 더 듬뿍 쬐지 못하고 물을 더 실컷 마시지 못하지만, 우람한 어른 느티나무 곁에서 어린 느티나무는 즐겁게 자라납니다.

 느티나무는 느티꽃을 피우고 느티씨를 맺습니다. 느티나무가 피우는 느티꽃에서 맺는 느티씨는 새로운 느티나무를 낳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키워서 이곳저곳에 심기도 하지만, 사람이 심는 숫자와 품하고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어른 느티나무는 한꺼번에 수백 수천 새끼나무를 낳습니다.

 수백 수천 새끼나무 모두가 어른 느티나무로 자라나지 못합니다. 얼마쯤 자라다가 꺾이거나 밟히기도 하고, 말라죽기도 합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멧짐승이 잎을 뜯어먹어서 죽을 수 있고, 풀약을 치는 사람들 때문에 타죽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 손길 때문에 우람한 어른 느티나무 한 그루만 언제까지나 살아남고, 어른 느티나무 둘레에서 새로 자라나려 하는 어린 느티나무는 한 그루도 못 살아남을는지 몰라요.

 지난해에 모두 죽고 지지난해에 모조리 죽었어도 올해에 새로 씨를 맺습니다. 올해마저 몽땅 죽는다 하더라도 이듬해에 새롭게 씨를 맺으며, 다음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느티나무는 느티꽃을 피우면서 느티씨를 맺습니다. 먼먼 앞날, 어른 느티나무가 벼락을 맞아 쓰러진다든지, 또는 벌레가 파먹는 바람에 죽는다면, 해마다 수없이 맺고 떨군 느티씨 가운데 몇몇이 씩씩하게 줄기를 올리면서 새롭게 어른 느티나무가 되겠지요. 사람은 느티나무한테 느티나무라는 이름을 붙여 주지만,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라는 이름이 붙든 안 붙든 제 목숨을 고이 사랑하면서 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립니다. (4344.6.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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