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쓰는 끈으로 책을 묶기


 1995년부터 책을 끈으로 묶는 솜씨를 익혔습니다. 1995년에는 옥매듭 짓기를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1998년과 1999년에도 아직 서툴었습니다. 그러나 옥매듭 짓기가 서툴든 익숙하든 살림집을 옮겨야 했고 책을 묶어야 했습니다. 2000년 2001년 2002년이 되면서 옥매듭 짓기는 차츰 발돋움합니다. 해마다 잔뜩 늘어나는 책살림을 해마다 다시 묶고 풀면서 시나브로 손바닥에 굳은살이 두껍게 박힙니다. 2003년 2005년에는 손바닥 굳은살이 더 두꺼워지고, 책 묶는 솜씨는 한결 발돋움합니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더는 책을 묶고 싶지 않았으나 또 책을 묶고 나르면서 옥매듭 짓기는 더욱 나아졌고, 2009년과 2010년에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여기면서 또 묶고 또 풀면서 손바닥이 통째로 굳은살이 됩니다. 2008년에 태어난 첫째 똥오줌기저귀를 날마다 수십 장씩 빨면서 굳은살이 아주 단단해집니다.

 이제 내 손이 좀 쉬면서 책묶기 아닌 책읽기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2011년 다시 책묶기를 합니다. 묶고 풀기를 되풀이하면서 책을 다루는 매무새는 차츰 거듭나는데, 나는 책을 사고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인데, 책을 다루는 매무새가 이렇게 거듭나는 일이란 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책을 묶으며 땀방울이 이마에서 툭툭 떨어져 신문종이를 적시는 동안,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머니는 하루 내내 아이 곁에 붙어서 젖을 물리고 재우며 노래합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아닌 한 해 두 해 세 해입니다. 아이는 세 해쯤 되니 이제 스스로 마음껏 뛰놀며 제 살아갈 길을 찾아나서려는 모양새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이 스스로 뭔가 일거리를 찾을 수 없으니, 더 오래 어버이가 곁에서 밥과 옷과 집을 사랑과 믿음으로 베풀어야겠지요.

 2011년에 또다시 책묶기를 하며 예전에 쓰던 끈을 꺼냅니다. 1995년부터 쓰던 끈 가운데 버린 끈은 얼마 안 됩니다. 너무 오래되거나 낡아 끊어지면 버리지만, 웬만해서는 안 버리고 1995년 끈까지 꽤 남아, 이 끈을 새로 잇고 덧대면서 2011년까지 고이 씁니다. 예전 끈을 늘 되쓰지만 되쓰는 끈으로는 해마다 새로 책묶기를 할 때면 으레 많이 모자라서, 지난날 쓰던 끈하고 견주면 곱배기로 장만해서 씁니다. 2010년에는 푸른끈을 아마 80개쯤 사다 썼지 싶어요.

 고뿔을 앓는 첫째는 새벽녘에 코피를 잔뜩 쏟고도 그냥 곯아떨어집니다. 얼굴 닦는 천에 물을 묻혀 아이 얼굴과 코 둘레를 닦고 코에 물을 몇 방울 넣습니다. 태어나던 병원에서 억지로 맞힌 철분제와 항생제 주사 때문에 몸앓이를 하는 둘째는 밤새 끄에끄에 소리를 내면서 잠투정을 하고 잠꼬대를 합니다. 아침이 되어서도 끄에끄에 소리는 그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곁에서 토닥이며 젖을 물려 새근새근 재웁니다. 이제 아버지는 간밤 똥오줌기저귀 빨래를 신나게 해대면서 아침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해야겠지요. (4344.6.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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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숲길 어린이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면사무소를 다녀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논둑길로 접어든다. 더 빠른 길로 달리지 않는다. 자동차는 아예 들어서지 못할 논둑길에서 자전거를 달린다. 아이가 아버지를 부른다. “벼리 걸을래.” 하고 노래한다. 아이를 자전거수레에서 내린다. 아이는 흙길을 하얀 고무신으로 달리다가 걷다가 달리다가 걷다가 멈추다가 노래하다가 걷는다. 논둑에서 자라는 풀은 어느새 아이 키보다 훌쩍 자랐고 어른 키만큼 된다. 이 풀이 처음 씨앗에서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고작 두 달만에 이만큼 자란다. 아이한테 이 논둑길 풀숲이 어떻게 느껴질까. 논둑길 풀숲 사이로 걷는 아이 마음에는 무엇이 자랄 수 있을까. 아이 아버지는 요즈음 아이한테 그림책을 거의 못 읽힌다. 읽힐 만한 그림책이 잘 안 보인다. (4344.6.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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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1
이철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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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64



고운 손길로 즐거운 일을 가르치고 배워요

―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이철수·박현희·송승훈·배경내·하종강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1.5.16. 12000원



  쓸고 닦는 일을 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청와대이든 국회의사당이든 삼성이나 에스케이 회장실이든 쓸고 닦는 일을 안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여느 살림집이든 높직한 수십 층짜리 시멘트집이든, 날마다 쓸고 닦지 않고서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만하지 않습니다.


  대학교 건물이나 잔디밭이든, 서울 신촌이나 홍대 앞 술집골목이든, 어김없이 쓸고 닦으며 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 청소 일꾼이 없으면 대학교이든 신촌이나 홍대이든 어마어마하게 지저분하겠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버리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입니다. 버리는 사람은, 치우는 사람 아들이나 딸일 수 있습니다. 치우는 사람은, 버리는 사람 아버지나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청소 일꾼을 이 사회에서 깎아내리든 하찮게 여기든, 이 나라 어디에나 청소 일꾼은 대단히 많으며, 이들 청소 일꾼이 없을 때에는 도시 문명 사회는 쓰레기 사회로 나뒹굴고 맙니다.


  청소 일꾼은 아주 적은 일삯을 받습니다. 청소 일꾼은 무척 오래 일합니다. 청소 일꾼 이름을 떠올리거나 되새기는 지식인이나 기자나 정치꾼은 없습니다. 청소 일꾼 이야기를 위인전이나 전기나 평전으로 쓰려는 글쟁이나 사진쟁이는 없습니다.


  청소 일꾼한테는 쉼터가 따로 없습니다. 도심지 길을 쓸고 치우는 일꾼은 길바닥 아무 데나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쉽니다. 땡볕이든 그늘이든 가릴 몸이 안 됩니다. 그나마 몇 분쯤 느긋하게 쉬어도 된다는 겨를이 마땅히 없습니다. 치워야 할 몫은 날마다 못박히지만, 몇 분 일하고 몇 분 쉰다는 말미란 딱히 없습니다. 기계 아닌 사람인 청소 일꾼이지만, 주어진 일만 하도록 내몰립니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라든지, 일터에서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든지, 이들이 집에서 정갈하게 쓸고 닦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밖에서는 지저분해도 안에서는 정갈할는지 모르고, 밖에서는 정갈하다지만 안에서는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예부터 학교에서 학생한테 모든 청소를 맡깁니다. 뒷간부터 책걸상과 교무실과 교장실과 창고까지, 온통 학생이 쓸고 닦으며 치워야 합니다. 너른 운동장에 날리는 비닐봉지나 돌도 주워야 합니다. 학교 문 둘레 널브러진 쓰레기도 치워야 합니다. 교실을 비롯해 골마루 유리창까지 말끔히 닦아야 합니다. 요사이는 옛날처럼 마구 두들겨패지는 않겠지요. 예전에는 국민학교에서도 유리창이나 창틀에 자그마한 티끌 하나 묻으면 어김없이 몽둥이나 빗자루나 주먹발길이 날아오곤 했습니다. 티끌 하나 때문에 청소를 한 시간 더 해야 하기 일쑤였습니다. 즐겁게 하는 청소가 아니라 지겹고 짜증나게 받아들여야 하는 짐덩이였습니다.



.. 나중에 올려 주면 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최저임금 이상으로 돈을 주었어야 하는 거죠. 일자리를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라면서 법이 정한 최저 기준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조건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 학생들 이름표는 왜 이렇게 박음질되어 있을까요? 눈에 띄기 쉬워야 통제하기가 쉽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학생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인식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학생이 죄수와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생각해요 ..  (115, 131쪽/배경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나 학교에서 숱하게 이루어지는 몽둥이찜질은 조금 줄었습니다. 아마 예전처럼 학생한테 끔찍하게 청소를 시킨다면 인권을 짓밟았대서 금세 시끄럽겠지요. 알맞게 함께하는 청소라면 좋습니다. 교사와 학생이 나란히 즐기며 맞아들이는 청소라면 아름답습니다. 학생한테만 억지로 시키는 청소는 늘 나쁩니다.


  교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서기 앞서, 학생은 학교에서 배우는 자리에 서기 앞서, 저마다 살림집에서 쓸고 닦으며 치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초등학교에 들든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들든 대학교에 들든 다르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대서 못할 청소가 아니라, 나이가 어리면 어린 나이에 걸맞게 할 만한 청소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살아가니까 모든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학교라는 곳은 돈벌이를 하는 솜씨나 매무새만 키우는 데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슬기와 매무새를 다스리는 곳이어야 해요.


  돈을 벌어야 하는 까닭은 밥과 옷과 집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돈을 벌어 밥을 사고 옷을 사며 집을 삽니다. 으레 바깥밥을 사먹으며, 저잣거리가 되든 할인마트가 되든 먹을거리를 돈을 치러 장만한 다음 집에서 요모조모 손질해서 먹습니다.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않아요. 돈을 안 벌 수 없습니다. 돈을 안 벌면 굶어죽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돈만 번대서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잠을 잘 수 있지 않습니다.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합니다. 옷을 빨고 널어 말린 다음 개서 갈무리합니다. 바느질을 하거나 뜨개질을 합니다. 집안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끔 돌아봅니다. 늘 새 물건을 사다 쓰지 않고, 헌 물건을 잘 손질해서 오래오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알뜰히 씁니다.


  누구나 집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집에서 살림을 해야 합니다. 어린이나 푸름이라고 해서 집일이나 집살림을 안 하거나 모르는 척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잠을 자잖아요.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어야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집일을 건사할 줄 알고 집살림을 보살필 줄 알아야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집일이 어떠하고 집살림은 어떠한가를 또렷이 깨달아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만합니다. 여자만 해서 될 집일이 아니고, 여자 아닌 남자만 해서 될 집일이 아닙니다. 집식구라면 누구나 할 집일입니다. 집일이 없이는 밥·옷·집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집살림이 있어야 아이키우기·함께살기·사랑하기가 이루어집니다.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집일과 집살림을 배워야 합니다. 영어나 한자를 일찍부터 깨칠 노릇이 아니라, 걸레질과 빨래와 설거지와 개키기와 자리깔기 들을 일찍부터 옳게 배울 노릇입니다. 걷는 매무새와 절하는 몸가짐과 말하는 숨결을 알뜰히 다스릴 노릇입니다. 먼저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틀을 깨우쳐야, 이러한 밑틀을 바탕으로 앞으로 무슨 일을 찾아들여 어떻게 즐기며 살아가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 핀란드의 부자들은 수입의 60%까지, 스웨덴에서는 85%까지 세금으로 내요. 부자들은 그렇게 세금을 많이 내도 여전히 부자예요. 이런 나라들은 기업 경영이 투명해지고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결국 높은 세금이 나라 경제에 유익한 영향을 미쳤어요 …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한국의 대학생들이 자기 부모의 노동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초·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거의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 지위가 높거나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비정상적인 현상이에요 ..  (하종강/178, 192, 197쪽)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철수와영희,2011)라는 책을 읽습니다. 서울 한쪽에 자리한 길담서원이라는 책방에서 마련한 청소년인문학교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마당을 갈무리해서 엮은 책을 읽습니다. 여러 어른이 푸름이 앞에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는구나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따로 마련하는 청소년인문학교가 아닌 ‘여느 집과 여느 학교’에서 먼저 들을 노릇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보금자리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집에서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이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따스히 들려주지 못합니다.


  집에서는 여느 어버이가 들려줄 이야기이고, 학교에서는 여느 교사가 들려줄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살림집과 배움터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따로 ‘청소년인문학교 이야기책’을 엮어야 합니다. 조금 더 헤아려 본다면, 이런 청소년인문 강의가 있기에 ‘집에서 배울 대목을 못 배우는 아이들이 삶을 배우는 길을 마주할 수 있다’고 할 만하지요.


  핀란드와 스웨덴은 부자가 세금을 더 내는 나라가 아닙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사람마다 제 깜냥과 재주껏 ‘일삯을 누릴 줄’ 아는 나라입니다. 세금을 많이 내도 똑같이 부자이지 않습니다. 세금을 많이 내도 똑같이 부자라면, 가난뱅이는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안 내더라도 똑같이 가난뱅이가 되겠지요?


  핀란드와 스웨덴은 가난뱅이가 되든 부자가 되든 푸대접이나 따돌림이나 괴롭힘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누구나 밑삶을 꾸릴 틀거리가 잘 마련되었고, 이러한 밑틀에 따라 돈을 더 벌고 싶으면 돈을 더 벌 수 있고, 아름다운 숲과 사람을 사귀고 싶으면 아름다운 숲과 사람을 사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벌어들이는 돈에서 85%나 세금으로 바치는’ 셈이 아니라, ‘15%를 벌든 1%를 벌든 부자 삶이든 가난뱅이 삶이든 즐거이 맞아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벌어들인 돈 100%를 세금으로 내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는 곳이 핀란드와 스웨덴이라는 뜻입니다.



- 제가 거둔 ‘이철수 표 쌀’이라고 비싸게 사 주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요. 옆집 할아버지 거나 제 거나 똑같은 쌀일 뿐입니다. (26쪽/이철수)


- 인류의 조상은 원래 일을 안 했어요. 풀뿌리, 나무 열매 등 자연물을 채취하며 살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어요. (59쪽/박현희)


- 여러분들도 잘 아는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 씨가 거기에 자원봉사를 갔다 와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고도 감회-부여신궁어조영 봉사 작업에 다녀와서〉라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217쪽)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대한민국 살림집과 배움터에서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일과 살림과 사랑과 삶을 참다이 들려주거나 가르치거나 함께하기란 어렵기만 할 노릇일까요? 앞으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같은 책이 없어도 저마다 집에서 삶을 가르치고 배울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 예쁜 책을 곁에 두면서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철수 쌀과 할아버지 쌀은 똑같지 않을 텐데요. 어느 모로 보면 똑같은 쌀이라 할 수 있지만, 같은 쌀이라 하더라도 논자락 자리에 따라 다 달라요. 같은 마을 논이라 하더라도 흙일꾼마다 논에 바치거나 들이는 땀과 품이 달라요. 약을 안 치는 사람과 약을 더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쌀이란 있을 수 없지요. 다만, 마음으로 고이 여기면서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쌀은 사랑스러운 쌀이 돼요.


  그리고 이원수 님을 놓고 조금 더 깊이 헤아려 보아야지 싶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한 이원수 님은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썼습니다. 〈고향의 봄〉은 이원수 님이 푸름이일 때에 썼고요. 친일시를 쓴 사람 가운데 해방 뒤에 독재정권 해바라기를 안 한 사람은 오직 이원수 님입니다. 친일시를 쓴 사람 가운데 서슬퍼런 독재정권 때에 권력바라기를 안 하면서 민주와 자유와 평화와 평등과 통일을 지키거나 이루려고 땀흘리거나 피흘린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요. 오로지 이원수 님입니다.


  이원수 님은 1980년에 병으로 숨을 거두기 앞서 ‘반성문’을 안 썼을 뿐입니다. 반성문을 쓰지 못하고 죽었대서 이원수 님을 친일작가로만 내모는 일은 너무 섣부른 몸짓이리라 느낍니다. 이원수 님이 해방 뒤에 보인 몸짓이나, 해방 뒤에 아이들한테 들려준 수많은 창작동화와 번역동화는 바로 ‘반성문 쓰기와 같은 삶’이라고 바라볼 만하리라 느낍니다. 1970년대 서울 청계천에서 전태일 님이 몸을 불사르면서 노동자 권리를 외칠 적에, 이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에 씩씩하게 맨 처음으로 쓴 사람은 바로 이원수 님입니다. 요즈음은 누구나 전태일 님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으로 쓰지만 서슬퍼런 독재정권이 휘몰아치던 때에 전태일 님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으로 써서 널리 알리려 한 사람이 이원수 님인 줄 오늘날 푸름이도 잘 알아야지 싶어요. 2011.6.20.달/2016.2.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청소년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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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생각
― 사진과 사람


 사진은 사람입니다. 찍는 사진은 찍는 사람 얼굴입니다. 보여주는 사진은 보여주는 사람 눈빛입니다. 나누는 사진은 나누는 사람 사랑입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나라밖으로까지 ‘출사’를 다니고, 누군가는 가난하다는 동네로 ‘출사’를 다닙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출사를 하며 찍는 사진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사진으로 찍으려는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스스럼없이 찍는 사진만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 할 수 있고, 취미로 야구를 즐긴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취미는 취미이지, 취미가 사진이거나 야구가 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살아가야 사진이고, 야구로 살아가야 야구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되어야 사진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프로 야구선수가 되어야 야구라는 소리 또한 아닙니다. 내 삶을 사진으로 맞추면서 사진하고 한몸이 될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는 소리입니다. 내 삶을 야구와 맞물리면서 야구하고 한마음이 될 때에 바야흐로 야구라는 소리입니다. 아이키우기일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이고, 살림살이를 꾸릴 때에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사진’의 ‘사’ 자도 모르는 주제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진하고 한몸이 되지 않을 때에는 전문 사진쟁이가 되든 취미 사진쟁이가 되든 사진하고 동떨어질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프로이든 아마이든 대단하지 않고, 직업이든 취미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이 사진길을 걷느냐 아니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진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진에는 사진기를 쥐어 살아가는 사람들 말과 넋과 꿈과 삶과 생각과 매무새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 또한 착하게 찍습니다. 사진만 착하게 찍고, 삶은 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과 삶이 다르면서 사진만 착하게 군다면, 겉과 속이 다른 매무새는 어김없이 사진에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여느 사람이 쉬 알아채지 못할 뿐입니다. 거꾸로 사람은 착한데 사진은 안 착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안 착하지만 사람이 착할 수 없습니다. 사진이 착하지 않은 사람은 당신 삶 또한 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쁘장한 모습을 찍는대서 예쁘거나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슬프거나 고단한 삶자락을 찍는대서 밉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사진에 서리는 기운과 넋과 마음과 꿈과 뜻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착함과 나쁨이에요.

 사진은 사람이고 다시 사람이며 또 사람입니다. 내가 살아가려는 길에 걸맞게 내 사진기를 장만하고 내 사진감을 찾으며 내 사진솜씨를 냅니다. 더 낫다는 장비로 틀림없이 더 낫다는 사진을 얻을 수 있겠지만, 더 엉성하다는 장비로도 얼마든지 더 낫다는 사진을 얻을 수 있어요.

 질감이 더 보드라울 때에 더 나은 사진이 아닙니다. 초점이 잘 맞거나 흔들림이 없을 때에 더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밝거나 환하거나 맑은 웃음이 피어나야 아름다운 사진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깃들일 때에 비로소 좋은 사진이고 착한 사진이며 참다운 사진입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하루를 곱씹습니다. 나 스스로 흐뭇하면서 기쁘게 맞이하는 하루일 때에 내가 즐기는 사진이 어떠한가를 헤아립니다. 나 스스로 괴로우면서 힘겨울 때에 내가 이루는 사진이 어떠한가를 되뇝니다.

 더 하거나 덜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모습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내 삶 그대로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내 사진입니다.

 사람이고 사진이면서 삶입니다. 오늘 먹은 밥이 오늘 찍는 사진입니다. 오늘 내 살붙이하고 마주하는 모습이 오늘 내가 마주할 사진입니다. 내 아이랑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아이를 바라보며 찍는 내 사진입니다.

 사진기를 쥐기 앞서 내 됨됨이를 다스려야 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하기 앞서 내 살림살이를 보듬어야 합니다. 사진기로 바라보기 앞서 내 삶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려는 내 나날인가를 돌이키면서, 내가 손에 쥔 사진기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려 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넣는대서 아이가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낸대서 아이가 더 많이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가 머리속에 이런 앎조각이나 저런 앎부스러기를 더 채운대서 더 슬기롭지 않습니다. 아이는 저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어른)를 바라보면서 삶을 배우고 사랑을 물려받습니다.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빚으려는 사람들은 사진기를 쥘 때까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모든 발자국과 손길이 그러모여 사진삶으로 이루어집니다.

 배우려 하기에 배우지 않습니다. 살려고 하기에 살아냅니다. 가르치려 하기에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살아가려 할 때에 살아갑니다.

 큰소리로 꾸짖는 일은 큰소리로 꾸짖는 일입니다. 사랑도 아니지만, 가르침도 아닙니다. 몽둥이나 회초리를 드는 일도 몽둥이나 회초리를 드는 일이지, 사랑이나 가르침이 되지 않아요. 몸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몸으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합니다. 한마음 한몸 한삶이어야 합니다. 아이키우기일 때이든 책읽기일 때이든 사랑나누기일 때이든 사진찍기일 때이든, 한결같이 한마음 한몸 한삶이어야 합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는 사진이고, 사진으로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4344.6.1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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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씨 꽂는 피아노


 봄이 한창 무르익을 때에 꽃이 피는 단풍나무는 한 달 즈음 꽃을 잇다가 한 달 즈음 씨앗을 매답니다. 아이하고 멧길을 오르내리면 아이는 어김없이 단풍꽃이나 단풍씨를 하나씩 꺾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이는 저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단풍꽃이나 단풍씨를 올려놓습니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 사이에 단풍씨와 단풍잎을 꽂고는 살며시 다른 건반을 똥똥 튀깁니다. (4344.6.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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