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1.7.8.
 :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바퀴



- 장날인 어제는 비가 그치지 않았다. 어제 읍내 마실을 할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어 그만두었다. 날씨 소식을 들으면 오늘은 비가 그친다 했는데 아침부터 낮까지 비가 그칠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옆지기가 먹을 미역국에 넣을 무와 여러 가지를 장만해야 하기 때문에, 비를 맞으며 읍내에 다녀오기로 한다. 장마당이 아니더라도 읍내 가게에서 무나 여러 가지를 살 수는 있으니까.

- 비옷을 챙겨 입는다. 첫째 아이가 함께 가고 싶어 한다. 안됐지만 오늘은 아버지 혼자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한다. 저번에 두 번 비오는 날에 함께 다녀온 적이 있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자전거를 몰지만, 아이는 수레에 앉기만 하니까, 내내 비를 맞으면 몸이 나빠질까 걱정스럽다. 아이가 스스로 발판을 밟으며 자전거를 밀 수 있을 때에는 얼마든지 비를 함께 맞으며 자전거마실을 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음성 읍내로 가는 길에는 빗소리 말고 드문드문 지나가는 찻소리가 있다. 자동차가 드문드문 지나가기에 비를 이끄는 바람이 숲에 우거진 나무를 흔드는 소리가 있다. 논에서 개구리를 잡는 왜가리 날갯짓 소리와 괘왝괙 소리가 있다. 논과 밭과 숲과 멧등성이로 둘러싸인 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일은 더없이 고마우며 기쁘다. 멧자락에 걸린 구름을 바라보고, 담배꽃에 서린 뽀얀 물방울을 바라본다. 저 멀리에서 내 쪽을 바라본다면 나 또한 구름이 살짝 걸린 길을 달리는 자전거일 테지.

-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누구도 느끼지 못하리라. 자동차를 몰기 때문에 멧자락 소리를 느낄 수 없으리라. 자동차를 모는 어른하고 다니는 아이 또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겠지. 비오는 날 멧등성이가 무엇을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곱게 품어 쓰다듬는지를 느낄 길이 없겠지.

- 아이는 태우지 않았어도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 실으려고 붙인 수레를 끙끙 끌며 오르막을 오른다. 길바닥을 내려다보며 달리면 발판을 더 잘 밟을 수 있지만, 오늘 같은 하늘과 멧자락을 안 볼 수 없다. 고개를 들어 왼쪽 오른쪽 갈마들며 바라본다. 발은 자전거 발판을 밟으면서 길과 오르막을 느끼고, 눈은 비에 젖은 멧자락을 바라보며 싱그러운 풀내를 느끼자.

- 호젓한 멧등성이를 오르내리면서 문득 생각한다. 네 식구 시골자락으로 옮겨 지낸 지 한 해가 지나는 요즈음, 읍내로 자전거를 몰아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 그닥 힘들지 않다. 처음 이 길을 달릴 때 느낌이 어떠했는지 헤아린다. 처음에는 빈 수레를 달고도 오르막이 꽤 벅찼을 텐데, 이제는 수레에 아이를 태우고 수박이며 여러 과일이며를 실은 다음 등에 메는 가방까지 먹을거리로 꾹꾹 눌러담더라도 오르막을 꽤 수월히 오르내린다. 몸이 맞추어지나? 몸이 가벼워지나? 몸이 몸답게 거듭나나?

- 수레까지 붙인 자전거가 오르막을 낑낑거리니 옆으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천천히 앞지르는 자동차가 있다. 자전거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씽씽 내달리는 자동차가 있다. 마주 달리는 자동차도 똑같다. 자전거가 마주 달리니까 빠르기를 살며시 늦추어 바람이 거세게 일지 않게끔 마음을 쓰는 자동차가 퍽 드물기는 하지만 더러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맞자동차는 맞바람이 일든지 말든지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 오늘날 아이들이 제 어버이가 수레에 태워 자전거마실을 하지 않는다면, 여느 길에서 자동차가 얼마나 거칠거나 무시무시한지를 느낄 수 없으리라.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자가용을 장만해서 태운다지만, 내 아이는 다치지 않을는지 몰라도 다른 아이들은 다칠 수 있다. 내 아이는 걱정없이 지킨다면서 다른 아이한테는 무시무시하게 구는 셈이 되기도 한다. 아이를 자가용에 태우고 다니는 어른은 당신 아이가 무엇을 배우거나 느낄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 장마당에서 사는 푸성귀가 아닌, 가게에서 사는 푸성귀는 좀 시들시들하면서 값이 세다. 어차피 비 맞으면서 읍내 마실을 한다면, 장날 마실을 해야 한다고 새삼스레 다짐한다.

- 집으로 돌아온다. 장본 먹을거리를 하나하나 꺼내고, 오얏 두 알을 첫째 아이한테 건넨다. 곧 저녁 먹을 때이다. 얼른 씻고 빨래를 한다. 다 마친 빨래를 넌 다음 밥을 한다. 저녁으로는 볶음밥을 한다. 감자 두 알과 호박과 당근과 느타리버섯과 양배추를 잘게 썰어 물에 볶은 다음 밥과 들기름과 간장을 넣고 비빈다. 아침에 먹고 남은 미역국에는 새우살을 더 넣고 팔팔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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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동물농장.1984년 e시대의 절대문학 6
조지 오웰 원작, 박경서 지음 / 살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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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오웰을 읽으면서 즐거운 까닭
 [책읽기 삶읽기 67] 박경서, 《조지 오웰 (읽기의 즐거움)》(살림,2005)



 조지 오웰 님 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가지 판으로 나옵니다. 예전에도 이러했고 오늘날에도 이러합니다. 조지 오웰 님 책 가운데 《동물농장》과 《1984》가 여러 사람 번역으로 나올 뿐 아니라, 《위건부두로 가는 길》처럼 당신 스스로 밑바닥 삶을 몸소 겪으며 적바림한 이야기도 여러 사람 번역으로 나옵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일찍부터 추천·명작도서로 손꼽히는 조지 오웰 님 책입니다. 논술을 헤아리든 독후감 숙제를 써야 하든, 이 나라 푸름이라면 조지 오웰 님 책 한 권쯤 읽고 느낌글을 써 본 적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거의 모든 푸름이라 할 만한 이 땅 아이들이 조지 오웰을 읽기는 읽는데, 조지 오웰이 왜 글을 썼고 무슨 글을 썼으며 어떻게 글을 썼는지를 함께 느끼거나 받아들이려나요.

 곰곰이 돌이키면, 조지 오웰뿐 아니라 김동인이든 이효석이든 김유정이든 황순원이든 서정주이든 윤동주이든 한용운이든 이육사이든 신경림이든, 학교에서 읽으라 시키면 읽고, 논술시험 공부를 하라 하면 공부를 하곤 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푸름이 스스로 조지 오웰을 알아채거나 김유정을 알아내는 일이란 없겠지요. 푸름이 스스로 책방마실을 하며 여러 가지 책을 찬찬히 돌아보다가 조지 오웰에 흠뻑 젖어든다든지, 신동엽이나 김수영한테 살며시 녹아든다든지 하는 일이란 있을까요.


.. 독자들은 작품을 직접 읽어 보지 않고 그런 식으로 내용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내용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 소설을 읽어 보았다는 착각에 빠진다 … 오웰은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이데올로기나 사회를 거부하고 거기에 과감히 맞선 작가이다 ..  (10∼11쪽)


 번역을 하는 박경서 님은 《조지 오웰 (읽기의 즐거움)》(살림,2005)을 내놓습니다. 조지 오웰 님 책을 한글로 옮기면서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깨달은 이야기를 곰곰이 적바림합니다. 조지 오웰을 더 잘 읽거나 제대로 알아채자는 이야기보다는, 조지 오웰이 어떠한 나라에서 어떻게 살면서 어떠한 글을 어떻게 써서 어떠한 사람한테 어떻게 읽히고 싶었는가를 차근차근 들려줍니다.

 예전에 나온 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든, 요즈음 다시 나오는 책을 새책방에서 마주하며 읽든, 조지 오웰 님 글자락을 하나하나 더듬으면, 박경서 님이 《조지 오웰 (읽기의 즐거움)》에서 적바림하듯이 “하층민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영혼까지 침투해 그들의 삶을 느끼고 싶어” 했습니다. 아마, 예나 이제나 이렇게 밑바닥 사람들하고 뒤엉킨 채 지낸 삶을 글로 쓴 이는 몹시 드물거나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으레 ‘밑바닥 사람은 이렇게 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대로 쓰거나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쓰거나 ‘나도 예전에 이처럼 가난해 보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쓰기 일쑤예요. ‘바로 오늘 가난하게 살아가며 힘들게 글을 쓰는’ 오늘날 글쟁이는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묻겠지요. 요즈음 글을 쓴다는 사람치고 돈을 많이 버는 이가 몇이나 되느냐고, 요즈음 글을 쓰는 사람이야말로 몸소 가난한 채 글을 쓰는 셈이 아니냐고.

 그렇지만 스스로 얼마나 어떻게 가난한가를 찬찬히 밝히는 ‘글을 쓰는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가난이 왜 가난이며, 가난한 삶이란 어떠한 삶이요, 이 가난한 삶을 누리는 내 나날이 얼마나 빛나는가를 곰곰이 돌아보며 글을 쓰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집에서 일하고 살림하는 나날을 가만히 옮겨적거나 찬찬히 되살리도록 글을 쓰는 사람도 거의 찾아볼 길이 없어요.


.. 그의 이런 행동은 문학 활동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실제 삶 속에 들어가 봄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정 알고 싶었으며, 그들의 고통과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그는 그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고, 또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 제국주의가 식민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가 배운 더 큰 교훈은 그 제도가 주인들마저도 끝없이 노예화시킨다는 사실이었다 … 그는 중산층으로서 어떤 우월감을 지니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층민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영혼까지 침투해 그들의 삶을 느끼고 싶어했고, 나아가 그러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  (29∼30, 40, 44쪽)


 조지 오웰 님은 ‘밑바닥으로 몸소 내려가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조지 오웰 님 책을 한글로 옮기는 분들도 조지 오웰 님처럼 ‘밑바닥으로 몸소 내려가서’ 번역 일을 할까요. 조지 오웰 님 책을 읽는 사람도 조지 오웰 님처럼 ‘밑바닥으로 몸소 내려가서’ 책을 읽을는지요.

 밑바닥 사람들 밑바닥 삶자락 이야기를 책으로 읽는다면서 정작 나 스스로 밑바닥 아닌 하늘 높은 구름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듯하는 매무새는 아닐까 궁금합니다. 삶과 책과 앎과 함이 한동아리로 이어지는 일이란 거의 없는 오늘날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책은 많이 읽고 책을 즐겁게 읽는다지만, ‘읽기로 끝’이고 ‘읽은 책을 곰삭여 내 삶을 거듭나도록 이끄는 길 찾기’는 안 하는 노릇 아닌가 궁금합니다.

 조지 오웰 님한테는 ‘내려가야 할 밑바닥’이 있습니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한테도 ‘더 내려갈 밑바닥’이 있을는지 모르나, 밑바닥에 있는 사람한테 조지 오웰 님은 ‘위에서 살짝 찾아와 한동안 머물다가 다시 위로 올라갈’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처음부터 밑바닥이면서 앞으로도 밑바닥이요 언제까지나 밑바닥인 채 살림을 꾸리고 글을 쓰며 사람을 사귀는 글쟁이나 지식인은 얼마쯤 될까요.


.. 오웰을 제외한 20세기 전반기의 영국 소설가들은 대부분은 인간의 소외와 내면세계의 탐구를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았을 뿐, 당대 사회와 정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 오웰이 그의 정치적 글쓰기에서 보여준 중심 사상은 ‘문학이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인간의 역사적 발전에 한몫을 하고, 진리는 반드시 믿어져야 하며, 작가는 진리인 것을 신뢰성·정확성 및 신념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 특혀 현대 전쟁의 본질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는데, 현대 전쟁이란 영토의 정복이나 그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고, 자체의 사회구조를 공고하게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  (70, 77, 124쪽)


 조지 오웰을 좋아하면 조지 오웰을 읽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많이 읽기에 읽을 까닭은 없습니다. 노신이든 루쉰이든 좋아한다면 노신이든 루쉰을 읽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널리 사랑하니까 읽을 까닭은 없어요. 서정주를 읽든 한비야를 읽든 법정을 읽든 박완서를 읽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원수를 읽든 권정생을 읽든 이오덕을 읽든 임길택을 읽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 어느 책을 읽더라도 내 삶으로 파고드는 이야기 속살을 잡아채어 내 삶이 아름다이 꽃피울 참답고 착한 길을 잘 느끼며 몸소 슬기롭게 일굴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조지 오웰을 읽으며 즐겁다면, 조지 오웰이 살아가며 글을 쓰던 매무새가 무엇을 하려는 몸짓이었나를 깨달으면서 내 하루를 더 알차게 사랑하는 길을 찾겠다는 뜻입니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가슴이 벅찼으면 벅찬 가슴 그대로 내 삶길을 사랑하면 돼요.

 책은 어디에서든 책이고, 꿈은 어디에서도 꿈입니다. 내가 발을 디딘 터전을 옳게 읽으면서 내 이웃과 동무가 몸을 바치는 보금자리를 바르게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책을 읽는 까닭은 나와 이웃을 참답게 사랑할 길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동무를 사귀며 날마다 밥을 먹고 똥을 누는 까닭은 한 번 선물받은 고마운 목숨을 착하게 사랑하면서 누리는 길을 서로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삶은 없고, 더 나은 책 또한 없습니다. 내 좋은 삶이 있고, 내 좋은 이웃과 동무가 있습니다. (4344.7.13.물.ㅎㄲㅅㄱ)


― 조지 오웰 (박경서 글,살림 펴냄,2005.6.30./7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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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말리기 지킴이


 군대에 있던 지난날, 몸이 아프다거나 고참이라거나 한다면, 날이 퍽 좋을 때에 훈련에 나가지 않고 내무반을 지키는 사람이 어김없이 하나쯤 있었다. 내가 있던 군부대는 한 해 내내 햇볕 드는 날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었기 때문에, 볕이 아주 모처럼 들며 쨍쨍 눈부실 때에는 내무반마다 모포며 침낭이며 군인신이며 옷가지이며 깔개이며 잔뜩 풀밭에 내놓아 볕바라기를 시킨다. 훈련을 나가지 않고 내무반을 지키는 사람은 풀밭에서 나란히 볕바라기를 하면서 모포며 침낭이며 군인신이며 옷가지이며 깔개를 틈틈이 뒤집는다. 넌 채 가만히 두기만 한대서 보송보송 잘 마르지 않으니까. 한 사람 아닌 두 사람이 남아서 지키면, 둘은 모포를 서로 끝에서 맞잡고 탕탕 턴다.

 기나긴 장마가 되고부터 새벽·아침·낮·저녁·밤으로 끝없이 빨래를 하고 또 해야 한다. 앞서 한 빨래가 다 마르지 않아도 새 빨래를 해야 하고, 새 빨래를 할 때면 보일러 불을 넣어 방바닥을 덥힌다. 집안 물기를 말리기도 하지만, 덜 마른 빨래가 방바닥 따스한 기운을 받아 얼른 마르기를 바란다.

 방바닥에 펼쳐서 말리는 빨래는 틈틈이 들어서 살며시 흔든 다음 뒤집어서 펼쳐 놓는다. 가만히 두기만 하면 제대로 마르지 않는다. 가만히 두기만 한대서 말릴 수 없다.

 사내들은 군대를 다녀오며 누구나 집일을 스스로 해내야 하는데, 막상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집일을 오래오래 스스로 해내면서 집식구나 어머니 어깨를 가벼이 하는 사람은 뜻밖에 몹시 드물다. 사내들은 군대를 다녀오며 말투와 몸짓이 거칠어지기만 할 뿐, 집일을 알뜰히 하는 따스하고 너른 마음과 몸가짐을 보여주지 못한다. (4344.7.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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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한테 책 읽히는 누나


 어머니가 저한테 했듯이, 아버지가 저한테 하듯이, 첫째 아이는 둘째 아이 곁에 누워서 조그마한 책을 위로 척 올린다. 석 돌을 앞둔 첫째는 한글은커녕 알파벳 하나 모른다. 한글책인지 영어책인지 모르면서 영어 그림책을 어떻게 골라내어 펼쳐 들고는 제 동생한테 읽어 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쫑알쫑알 말마디를 쉴새없이 읊는다. 펼친 쪽에서 웬만큼 쫑알쫑알 했다 싶으면 가슴에 책을 대고 다음 쪽으로 넘겨 다시 쫑알쫑알 노래를 한다.

 요즈음 들어 집일에 너무 치이면서 첫째한테 그림책 읽히기를 거의 못하며 지나간다고 새삼 깨닫는다. 어머니는 몸이 아프고, 아버지는 집일에 허덕이느라, 첫째랑 살가이 어깨동무하면서 그림책을 읽지 못하는데, 첫째 아이는 제 갓난쟁이 동생한테 어여쁜 짓을 하는구나. (4344.7.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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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도서관 책읽기


 책을 좋아하면서 살아오던 서른네 살에 도서관을 차렸다. 섣부른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으나, 좋아하는 일에는 이르거나 늦거나 할 까닭이 없다고 여겼다. 좋아하니까 훨씬 일찍 글쓰기를 할 수 있고, 좋아하기에 늦깎이에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좋아하니까 너덧 살 나이에 텃밭을 일굴 수 있으며, 좋아하는 만큼 일흔이나 여든에 시골에 땅을 얻거나 빌어 논밭을 보살필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책이 많다고 느낀 곳은 도서관이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던 2학년 때에 헌책방을 처음 찾아가고 나서는 도서관보다 헌책방이 책이 훨씬 넓고 깊다고 느꼈다. 나라밖 도서관은 모른다. 나라밖 헌책방도 모른다. 나라안 도서관과 헌책방을 다녔을 때에, 나라안 도서관에서는 너무 너덜거리는 흔한 소설책이 지나치게 넓은 자리를 차지해서 못마땅했다. 따지고 보면, 헌책방에서도 ‘팔리는 책’을 더 많이 갖출 수밖에 없으니까, 참고서나 가벼운 소설붙이가 꽤 넓게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도서관에 없거나 도서관에 들이지 않는 수많은 책이 들고 나는 헌책방이다. 이 나라 도서관은 ‘도서관 품위’와 ‘도서관 얼굴’과 ‘도서관 크기’와 ‘도서관 책 숫자’ 같은 데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긴다. 정작 ‘새로운 책을 꾸준히 사들여 누구라도 손으로 만지며 읽고 정갈히 갈무리하도록 이끄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못한다.

 헌책방에서도 책을 함부로 다루는 책손이 꽤 많다. 헌책방이니까 헌책을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줄 아는 교수님이나 지식인이 뜻밖에 참 많다. 그렇지만, 헌책방 헌책은 헌책방 일꾼이 ‘팔릴 만하다 싶은 책’을 ‘헌책방 일꾼 돈을 들여 하나씩 고르고 사서 모아 갖춘 책’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 나라 도서관이 이 나라 헌책방을 따라갈 수 없겠다고 깨달았다.

 나는 서른넷 나이에 내 이름을 걸고 도서관을 열었다. 누구보다 나부터 내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 날까지 기쁘게 누리며 즐거이 맞아들일 책으로 가득한 사랑스러운 책터를 일구고 싶기 때문이다. 더 늦기 앞서, 아니 늦는다 생각하기 앞서, 내가 조금이라도 몸에 기운이 있고, 내 주머니에 조금밖에 안 되더라도 책을 사는 데에 들일 돈이 얼마쯤 있을 때에, 씩씩하고 당차게 도서관을 마련해서 내 고맙고 좋은 책벗하고 책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이 도서관은 2007년 4월 15일에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처음 열었다. 헌책방거리 한켠에 열었대서 ‘도서관’ 아닌 ‘헌책방’이라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2010년 9월 첫머리에 인천에서 충북 충주 멧골자락으로 도서관을 옮겼다. 이제 2011년에 멧골자락에서 다른 시골자락을 찾아본다. 몸이 아픈 옆지기하고 한창 자랄 첫째를 생각하며 멧골자락으로 들어왔는데, 이 멧골자락으로 사람들이 ‘도서관 책마실’을 나오기 몹시 어려울 뿐더러, 멧골자락답지 않게 자동차가 너무 많이 드나들어 집식구한테 썩 좋지 못한 터전인 줄 나중에서야 알아챘다. 우리 도서관과 우리 집식구는 새로운 자리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새 터와 새 자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저 믿는다. 나 스스로 내가 서른일곱 해 동안 그러모아 알뜰히 아낀 이 책들을 사랑스레 품으면서 살가운 책벗하고 책삶을 나눌 만한 아름다운 시골자락이 한국땅에 아예 없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걱정거리라면, 우리 식구한테는 돈이 거의 없다. 다달이 먹고사는 데에 쓸 돈으로도 허덕이며 지낸다. 그런데 이렇게 지내면서도 책은 참 부지런히 사들인다. 어쩌면, 우리 식구는 자가용을 안 몰고 수많은 기계나 전자제품을 셈틀과 다른 한두 가지를 빼고는 하나도 안 쓰니까 이럭저럭 버티듯 이냥저냥 살림을 꾸린다 할는지 모른다. 살림돈이 빠듯할 때에 몹시 고맙게 푼푼이 보태는 벗바리가 있기도 하다. 벗바리는 어쩌면 살림돈이 바닥을 치며 해롱거릴 때에 용케 알아채어 뒷배를 해 주는지 놀랍기만 하다.

 갈 데는 마땅히 없고, 오라고 부르는 데는 아직 없지만, 방바닥에 큼지막한 길그림 종이를 척 펼친다. 여기도 참 좋은 시골이고 …… 둘레에 좋은 멧자락이 둘러쌌고 …… 금강이 흐르고 …… 가까이에 소양호가 있고 …… 외져서 호젓할 만한 시골이고 …… 뭐, 이런 생각 저런 말을 혼자 주절주절댄다. (4344.7.1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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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7-12 09:08   좋아요 0 | URL
좋은 새터를 꼭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도 책마실을 가고 싶네요.
첫아이가 벌써 저리 컸네요. 귀해라.

파란놀 2011-07-12 16:43   좋아요 0 | URL
혼자서 저 책더미에 기어 올라간답니다 @.@

마녀고양이 2011-07-12 15:04   좋아요 0 | URL
멋진 도서관 자리를 찾으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원하시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사시는 모습이 좋아보입니다.

파란놀 2011-07-12 16:43   좋아요 0 | URL
앞으로는 몇 만 권 책을 묶는 데에 시간을 들이지 않고, 몇 만 권 책을 천천히 즐기며 나눌 만한 좋은 시골자락을 찾고 싶어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