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어느 출판사에 들를 때


 서울로 와서 어느 출판사를 들른다. 출판사 사장님이 일하는 방에 앉는다. 열린 창문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낮에 서울에 닿아 여러 시간을 보내며 처음으로 듣는 풀벌레 소리이다. 강변역에서 버스를 내릴 때에도 듣지 못한 소리요, 한강 자전거길을 달리면서도 듣지 못한 소리이다. 출판사 사장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 귀에는 풀벌레 소리가 가득 안긴다. 아, 좋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이곳에서 나오는 책에도 풀벌레 기운이 조용히 깃들겠지. 이곳 일꾼들이 풀벌레 우는 소리를 깨닫든 못 깨닫든 풀벌레 기운은 살그머니 책마다 감돌겠지.

 풀벌레 한 마리 깃들 조그마한 수풀조차 없이 온통 시멘트와 철근으로 지은 우람한 건물만 덩그러니 잔뜩 선 책마을에서는 어떤 책이 태어날까. 줄거리가 알차고 짜임새가 훌륭하며 이야기가 멋들어진 책은 날마다 참 많이 태어난다. 그런데, 이 알차고 훌륭하며 멋들어지다는 책에 풀벌레 조그마한 울음소리가 스미지 못한다면? 값지고 뜻있으며 예쁘장한 책이라 하더라도 풀벌레 한 마리 조용히 울먹이는 소리가 깃들지 못한다면, 난 이 책을 사랑스러운 손길로 집어들어 읽어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 흐르지 않는 책을 손에 쥐면 자꾸 눈물이 나며 슬프다. (4344.8.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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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19 22:19   좋아요 0 | URL
어느 동넨가요? 요즘 서울에 풀벌레 소릴 들을만한 곳이 거의 없는듯 싶은데 말이죠.

파란놀 2011-08-22 13:18   좋아요 0 | URL
서교동 안쪽에 개인주택으로 있는 집에서요~
 



 머리띠


 옆지기가 손뜨개로 만들어 준 머리띠를 한다. 이 머리띠를 만든 첫날부터 내내 이 머리띠를 한다. 아침에 머리를 뒷꽁지 하나로 묶은 다음 머리띠에 머리카락을 여민다. 내 머리에 꼭 맞게 손수 뜬 머리띠는 하루 내내 하고 돌아다녀도 머리가 눌리거나 아프지 않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고 땀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지도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아이랑 읍내에 다녀올 때에, 숯고개 오르막을 낑낑대며 다 오른 다음 시원하게 내리막을 달릴 때에도 머리띠는 흘러내리거나 바람에 날려가지 않는다. 머리카락도 흩날리지 않는다.

 옆지기한테 고맙다는 말을 딱 한 번밖에 안 한 듯한데, 머리띠를 할 때마다 언제나 고맙다고 느낀다. 이런 머리띠를 두 차례 잃을 뻔했다. 처음에는 어디 멀리에서 떨어뜨렸나 했더니, 바로 집 앞에 떨어졌더라. 비옷을 벗으면서 비옷 깃에 걸려 나도 모르게 뒤로 떨어졌더군. 두 번째는 엊저녁. 서울로 홀로 자전거를 끌고 마실을 나와 여관에서 묵는데, 자리에 드러누우면서 머리를 만지는데 머리띠가 잡히지 않았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머리띠를 찾아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내 머리띠가 서울 어디 길바닥에 떨어진 채 울까 싶어 걱정스러웠지만, 도무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알 노릇이 없으니 마음이 참으로 무거웠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 씻으려고 하는데, 발밑에서 낯익은 머리띠가 보였다. 어, 어, 왜 여기에 있지? 곰곰이 생각한다. 아하, 웃도리를 벗을 때에 살짝 걸려서 그때 벗겨졌나 보구나. 어젯밤 머리띠 찾자며 다시 골목으로 나와 돌아다녔으면 찾지 못하며 한참 헤매기만 했겠지. 참 잘 되었구나. 참 기쁜 일이구나. 이제 끈으로 머리를 하나로 묶고 머리띠를 한다. 좋다. 이 따사로운 느낌이 좋다. 오늘 하루도 좋게 잘 살아내자. (4344.8.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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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8-19 22:18   좋아요 0 | URL
ㅎㅎ 된장님은 요즘도 머릴 길게 기르시남봐요.긴 머리엔 머리띠가 확실히 필요하지요^^
 



 잠자는 손


 낮잠 없이 놀려 하고, 새벽 일찍 깨어 놀려 하며, 밤 늦게까지 놀려 하는 첫째 아이를 바라봅니다. 내가 이 아이를 옆지기하고 함께 낳아 살아가지 않았으면, 나는 내 어린 나날을 얼마나 돌아보았을까 궁금합니다. 때때로 돌아보기는 했을 테지만, 제대로 깨닫는다든지 살가이 느낀다든지 했을까 궁금합니다. 워낙 잠이 모자란 채 놀다 보니 한번 곯아떨어지면 여러 시간 꼼짝을 않고 꿈나라를 떠돕니다. 고단히 잠든 아이를 바라봅니다. 이 아이 넋이 아름다이 흐를 수 있도록 돕는 어버이가 아니라면, 나는 이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보람이나 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윽박지르는 말이나 날선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내 아이 또한 윽박지르는 말이나 날선 말을 듣지 않도록 예쁘게 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아이 손이 이웃을 어여삐 쓰다듬는 손으로 단단해지자면, 어버이인 나부터 내 이웃을 어여쁘 쓰다듬으며 단단해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잠든 아이가 꿈나라에서 좋은 이야기 예쁘게 길어올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마를 쓰다듬습니다. (43444.8.1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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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8-16 12:08   좋아요 0 | URL
새삼 느끼는 거지만 아이가 부쩍 컸네요. ^^
책은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파란놀 2011-08-18 04:42   좋아요 0 | URL
아이는 날마다 놀랍도록 잘 커요~ ^^

마녀고양이 2011-08-17 01:33   좋아요 0 | URL
너무 이뻐요, 며칠 전 사진에서도 봤지만
머리에 핀을 여러개 꽂은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요.
정말 천사가 따로 없네요.

파란놀 2011-08-18 04:42   좋아요 0 | URL
생각해 보면,
아이가 얼마나 하늘아이다운가를
자꾸 잊는구나 싶어요...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 - 한국 근대 예술사진 아카이브 (1910~1945)
이경민.사진아카이브연구소 엮음 / 아카이브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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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네 사진은 예술이었을까
 [찾아 읽는 사진책 27] 이경민,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아카이브북스,2010)


 나한테 사진기가 없던 때이든 나한테 사진기가 있는 때이든, 사진찍기를 예술이라 여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쓰던 자동사진기를 빌려 수학여행 때에 사진을 찍었든, 후배한테서 빌린 수동사진기로 처음 작품사진을 찍었다 하든, 어떠한 사진이라 하더라도 예술이라 느낀 적이 없습니다.

 사진을 바라볼 때에 그저 사진이라 느끼지 예술이나 문화나 다른 무엇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그저 사진이라 여기지 예술이든 문화이든 다른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예술을 말하거나 사진문화를 다루는 일은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방송에서 떠들썩하게 나오는 대중노래를 놓고 노래예술을 말하거나 노래문화를 다루는 일 또한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놓고 영화예술이라든지 영화문화를 밝힌다 할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무슨무슨 예술이나 문화를 들려주거나 살피는 일은 언제나 이 나름대로 뜻이나 값이나 보람이 있어요.

 다만, 하루하루 아름다이 살아가면서 따로 예술이나 문화를 잘라서 밝히거나 따지거나 살펴야 할까 궁금합니다. 송두리째 껴안을 수 있고 남김없이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사진 그대로 껴안으면 즐겁습니다. 사진은 사진인 만큼 사진다이 살아내면 아름답습니다.

 이경민 님이 엮은 사진책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아카이브북스,2010)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은 사진 발자취를 학문으로 파고듭니다. 학문으로 이렇게 파고드는 사진책은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사진이 맨 처음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퍼졌으며 뿌리내렸는가를 들여다보면서 오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요.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을 견주면서 우리 사진삶이 어떻게 영글면 좋을까를 곱씹는 밑거름이 됩니다.

 “결국 살롱사진은 사진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예술사진의 제도화 과정에서 오인된, 그리고 공모전 명칭에서 비롯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살롱사진이라는 명칭으로부터 비롯된 예술사진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다양한 예술사진의 생산 맥락을 밝히는 작업이 요구된다(11쪽).” 같은 말마디를 읽으면서 한국 사진밭에서 흔히 쓰는 낱말이 얼마나 알맞을까 곱씹고, 얼마나 사진다울까 헤아립니다. 이윽고, “살롱사진은 앞서 언급했듯이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속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사진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 호명된 용어라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예술사진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며(12쪽).” 같은 말마디를 되뇌면서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한국사진을 하는 길이란 어떻게 나아가는 길인가 톺아봅니다.

 참말로 어떻게 걷는 내 사진길이 가장 나답다 할 사진이면서 가장 한국사진답다 할 한국사진이 될까요.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일구거나 가꿀 때에 내 사진밭을 알뜰히 여미면서 알차게 북돋울까요.

 2011년에 되돌아볼 때에 일흔두 해를 먹은 글월, “사진은 있는 그대로 백여 내인다고 하지만 촬영하는 그 자신의 눈을 통하여 마음에 비치우는 것을 백는 것인 만큼 사진 작품에는 작자의 마음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의도가 없어서는 더 발전할 수 없는 줄 압니다(200쪽/박필호 1938.6.30.).”를 되읽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글에는 글을 쓴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노래에는 노래를 부른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가장 좋은 사진이나 글이나 노래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장 흐뭇하게 받아들일 사진이나 글이나 노래란 없습니다.

 누구한테는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누구한테는 이 글이 가장 마음에 찹니다. 누구한테는 이 노래가 가장 마음에 와닿습니다.

 더 하지 않되 덜 하지 않습니다. 더 낫지 않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좋지 않되 더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찾아 일굴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믿는 고운 보금자리를 돌보며 두 다리 느긋하게 뻗을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진기를 마련해서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내 이야기를 담아 사진으로 찍을 노릇입니다.

 굳이 갈라야 하지 않으며, 애써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늘 사진이었고, 사진을 예술로 바라보고 싶으면 언제나 예술이 됩니다. 사진은 한결같이 사진이었으며, 사진을 문화로 바라보고 싶다면 노상 문화가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예술이나 문화가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면서 삶이나 꿈이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라는 알몸뚱이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손길이 됩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사진이 없이 예술과 문화만 판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예술과 문화는 없이 사진만 예쁘게 감도는지 모릅니다. (4344.8.16.불.ㅎㄲㅅㄱ)


―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 (이경민 글,아카이브북스 펴냄,2010.9.15./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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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 숙제 책읽기


 여름과 겨울을 맞이하는 초·중·고등학교에서는 독후감 숙제를 낸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책읽기를 하도록 이끌면서 느낌글을 쓰라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늘 독후감 숙제를 낼 뿐이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독후감 숙제를 하는 아이들이 내가 쓴 느낌글을 읽고는 ‘독후감 숙제에 도움이 되었다’면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퍽 자주 남기곤 한다. 여름방학이 곧 끝날 즈음이 되어서인지, 요즈음 들어 이런 인사말을 자주 듣는다. 참으로 철없이 숙제를 내고 숙제를 하는구나 싶어, 내 누리사랑방이나 누리모임에 올린 느낌글을 ‘갈무리 못하게’ 할까 싶기도 하지만, 구태여 울타리를 치고 싶지는 않다. 숙제를 하려고 내 느낌글을 읽어 주면서 아이들 스스로 저희 느낌글을 헤아릴 수 있기를 빌어 본다.

 그렇지만, 숙제에 얽매인 아이들로서는 저희 느낌을 헤아릴 겨를이 없겠지. 바삐바삐 숙제를 마쳐야 할 테지. 점수를 따져야 하고, 눈치를 보아야 하며, 시험에 휘둘려야 할 테지. 이 아이들은 독후감 숙제가 걸린 책을 제대로 읽기는 했을까. 독후감 숙제가 걸리는 책은 얼마나 읽을 만할까. 학교 교사는 아이들한테 내주는 ‘독후감 숙제’가 걸리는 책을 찬찬히 읽었을까. 교사들부터 이 책들을 차분히 읽으면서 사랑스레 느낌글을 쓴 적이 있을까. 아이들이 독후감 숙제를 내야 한다면, 교사 또한 방학 동안 어떠한 책을 읽었는가를 아이들 앞에서 밝히며 교사 나름대로 적바림한 느낌글을 교실 뒤쪽에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손이 아파도 다시 끄적이지만, 독후감은 글이 아니고 느낌글 또한 아니다. 독후감 숙제를 한다며 읽는 책이란 책이 아닐 뿐 아니라, 책읽기가 될 수 없다. 독후감을 쓰는 사람은 바보가 되려는 사람이며, 독후감 숙제를 내거나 독후감 숙제를 하는 사람 모두 삶을 뒷전으로 미루면서 아름다운 길하고 등지는 셈이다. (4344.8.1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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