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현장의 이모저모
김성재 지음 / 일지사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책과 함께 걸어가는 내 길
 [책읽기 삶읽기 23] 김성재,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내 길은 책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나는 이 길이 좋다고 느껴서 걸어가지 않습니다. 나는 이 길에서 책탑을 쌓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책삶으로 무언가를 이룰 뜻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책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어머니가 첫째 아이 넉 돌맞이 생일을 떠올려 주었습니다. 첫째는 음성 할머니한테서 생일돈을 받았습니다. 다만, 생일돈은 내 은행계좌로 넣어 주십니다. 이 생일돈으로 옆지기는 실꾸리를 장만합니다. 고맙습니다. 옆지기는 새로 장만하는 실꾸리로 아이 옷을 뜰 수 있고, 음성 할머니나 일산 할머니한테 드릴 옷가지를 뜰 수 있겠지요. 나는 이 생일돈으로 책을 삽니다.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춘천으로 오는 길에 서울을 들러 올들어 처음으로 헌책방마실을 했고, 헌책방에서 아이가 즐겁게 읽을 그림책을 잔뜩 삽니다. 음성 할머니가 주신 생일돈을 옆지기하고 나는 알뜰히 다 써서 아이한테 선물을 마련한 셈입니다.

 서울마실을 하는 김에 세 군데 출판사를 들러 인사를 합니다. 새 보금자리로 옮기면 서울마실은 더 뜸할 테니까, 이렇게 온 김에 들러서 인사를 하지 못하면, 내 글을 찬찬히 엮어 책으로 펴낸 아름다운 땀방울이 고마웠다는 마음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하며 입으로 말꽃을 피우지 않더라도, 서로서로 고운 마음꽃이 피면서 책 하나가 어떤 사랑인가를 느끼리라 믿어요.


.. 양질의 책을 꽤 많이 낸다 하더라도 질이 낮은 책도 아울러 내고 있다면 그 출판사의 평가는 자연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좋은 책을 냈다 하더라도 그 공급 과정에서 품위를 잃어 책의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다면 결고 높이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이다 … 수많은 편집자들이 새 맞춤법을 익히느라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른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도 새 맞춤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하고 혼동하는 편집자들도 간혹 보인다 ..  (16, 100쪽)


 출판사에 들를 때면 그동안 새로 낸 책을 선물받기도 하고, 출판사 책꽂이에 꽂힌 여러 가지 책을 둘러보기도 합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며 만난 아름다운 책을 내 가방에서 꺼내어 보여주거나 빌려주기도 합니다. 두 번 다시 장만하기 어려울 만한 책을 빌려줄 때면 언제쯤 돌려받을까 궁금하지만, 거의 돌려받은 적이 없지만, 그러니까 출판사 일꾼도 어디에선가 잃어버려 그만 사라지는 책이 되고 말지만, 이러하건 저러하건 내 손과 당신 손을 거친 책에 깃든 이야기와 느낌은 오래도록 이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선물받은 책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살며시 펼칩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내 눈을 거쳐 머리를 지나 가슴속으로 스밉니다. 착한 사람 착한 나날 착한 책이 나한테 스며듭니다. 종이에서 나는 책내음을 맡고, 종이에 깃든 이야기에서 피어나는 책내음을 맡습니다.


.. 구순이신 (정문기) 선생님은 우리 출판사에 들르시면 “참 우연히 만났지.” 하곤 하셨다. 한국의 위대한 노인들을 저자로 모신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  (45쪽)


 ‘일지사’라는 출판사를 일구는 김성재 님이 내놓은 책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일지사,1999)를 생각합니다. 일지사에서 내놓은 아름다운 책이 퍽 많은데, 이 가운데 《한국어도보》(1977,정문기 씀)는 아주 돋보입니다. 이러한 책을 펴낸 출판사가 놀랍고, 이러한 책을 생각하며 써낸 정문기 님도 놀랍습니다. 이러한 책을 내놓아 나눈 출판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책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수많은 아름다운 책이 태어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좋은 넋이 좋은 마음씨가 되어 좋은 책으로 깃들고, 좋은 책은 좋은 책씨로 거듭나서 수많은 사람들 좋은 넋을 새로 보살피면서 새로운 좋은 책이 태어나도록 이끕니다.

 사람들 아름다운 삶이 책으로 스며들고, 책 하나가 천천히 퍼지면서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북돋웁니다.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라는 책은 아름다운 삶을 스미고픈 꿈으로 책밭을 일군 한 사람 땀방울을 담습니다. 책 하나를 천천히 퍼뜨려 사람들 아름다운 삶을 북돋우려 했던 한 사람 눈물방울을 담습니다.

 책이라서 대단하거나 책이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책이어야 하거나 책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이기에 책이 태어나고, 책이 태어나면서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을 적바림합니다.


.. 학술 출판사는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넓은 의미의 학술서인 해설서나 대학교재에 치중하거나, 다른 부문의 출판물에 의한 이익으로 충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벌어 놓은 돈을 까먹거나, 이잣돈으로 지탱하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 서적의 소매가격을 서점에서 자유로이 결정한다면 무분별한 가격할인의 추악한 싸움이 벌어져 유통 질서가 문란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서점과 출판사의 도산이 속출할 것이며, 자본력이 튼튼하거나 저질 출판물을 내는 출판사만 살아남을 것이다 … 높은 질의 저작물은 저술해 봤자 서점에 꽂히지도 않을 것이며, 출판을 맡아 줄 출판사도 없을 것이니, 저작자들의 저술 의욕이 상실될 것이다 ..  (72, 122∼123쪽)


 책과 함께 살아가는 내 하루를 돌이킵니다.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내 삶을 돌아봅니다. 책을 매만지면서 살붙이들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고운 이웃 고운 삶을 어깨동무합니다. 책을 쓰면서 좋은 벗님 아프거나 슬픈 어깨를 다독이고 내 눈물을 씻으며 내 웃음을 터뜨립니다.

 값싸게 사들여서 좋은 책이란 없습니다. 헌책방은 책을 값싸게 사고파는 곳이 아닙니다. 도서관은 책을 거저로 빌려 읽는 데가 아닙니다. 내가 땀흘려 일하여 일군 돈을 세금으로 냈기에 도서관이 태어납니다. 수많은 책이 더 너른 곳에서 더 너른 새 임자를 만나도록 징검다리가 되는 헌책방입니다.

 마땅한 값을 치르며 책을 사서 읽습니다. 책을 사서 읽기에 내 삶을 더 착하게 살찌우고 싶습니다. 옳게 값을 치르며 책을 장만하여 갖춥니다. 집에 울타리를 쌓으려고 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과 함께 예쁘게 살아가며 우리 아이들이 예쁜 꿈을 사랑할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 좋은 학자들을 늘 대하게 되고, 한국학의 수준과 동향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  (270쪽)


 김성재 님은 참 기쁘게 글을 써서 당신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 하나를 내놓습니다. 자랑할 일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떠벌이거나 손가락질할 일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삶을 책으로 엮어 내놓듯, 좋아하는 책을 어떻게 아끼며 돌보았는가 하는 하루하루 이야기를 천천히 적바림해서 선물합니다.

 책마을은 사람마을이고, 사람마을은 이야기가 있는 터전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터전인 사람마을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날마다 새로운 손길로 내 살붙이를 어루만지며, 내 이웃하고 즐겁게 손을 잡습니다.

 길디긴 빗줄기가 살짝 그쳤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파랗디파란 하늘이 되면서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쬡니다. 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를 몰아 우리 식구들 새 보금자리가 어디에 어떻게 예쁘게 있는가를 살펴야겠습니다. 아버지는 춘천 멧자락을 돌아다닐 테고, 어머니는 음성 멧자락을 바라보며 둘째 기저귀를 신나게 널겠지요. 마음책이 삶책이 되고, 삶책이 사랑책으로 거듭납니다. (4344.8.18.나무.ㅎㄲㅅㄱ)


― 출판 현장의 이모저모 (김성재 글,일지사 펴냄,1999.9.15./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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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반은 꽃이다 문학동네 시집 78
박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시 한 조각은 사랑
 [책읽기 삶읽기 73] 박지웅, 《너의 반은 꽃이다》(문학동네,2007)



 내 아버지는 시를 썼습니다. 내 어릴 적 예쁜 보금자리였던 열세 평짜리 자그마한 아파트를 떠올려 봅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쓴 시를 손수 종이에 적바림하고 틀에 끼워 벽에 걸었습니다. 마루에도 큰 방에도 문간에도 이런 시틀이 여럿 걸렸습니다.

 내 어머니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머니는 글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집일하고 집살림하며 부업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손뜨개로 무엇이든 다 만들었습니다. 걸상다리 끌리지 말라며, 걸상다리에 받칠 싸개까지 손뜨개를 하셨고, 추운 겨울 손이 차가울 테니, 쇠붙이 문고리마다 싸개를 씌우려고 하나하나 뜨개질을 하셨습니다. 아주 빠른 손놀림으로 척척 빚어낸 문고리 싸개는 우리 집에 다 하고도 남아서 이웃집에 선물하기도 합니다. 꽃그릇 받침싸개도 손뜨개로 만듭니다. 형과 나와 아버지가 입을 옷을 척척 뜨개질로 만듭니다. 하룻밤만에 손뜨개로 예쁜 옷을 만듭니다. 나는 손뜨개 옷이 예쁘기는 하지만 쑥쓰러워서 이 옷을 입고 학교에 가기 부끄러웠지만, 학교에서 다른 동무들은 내 손뜨개 옷을 보며 몹시 부러워 했습니다. 부러워 하는 동무들을 볼 때마다 더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곤 했습니다.

 우리 형은 시를 썼습니다. 형이 쓴 시 가운데 하나는 형이 고등학생 때에 인천 새얼문화재단이 마련한 백일장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형이 쓴 시가 학교잡지(교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곰곰이 떠올립니다. 내 아버지가 쓴 시가 중앙일보 새봄글잔치 동시 갈래에서 뽑힌 적 있습니다. 아버지는 신춘문예라는 이름이 걸린 새봄글잔치에서 상을 받고 싶어 하셨고, 아버지 동무나 작은아버지 들은 그 나이에 무슨 그런 이름을 얻으려 하느냐고 핀잔을 했지만, 아버지는 이런 핀잔 저런 푸념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당신이 하고픈 일과 당신이 이루고픈 꿈을 바라보며 글길을 걸었으리라 느낍니다.

 나도 시랍시고 무언가를 끄적여 보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쓴 동시를 읽으며 나도 시를 쓰자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형이 쓴 시를 읽고 나서 ‘아, 그렇구나. 시란 이렇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형은 동생이 쓴 시를 읽으며 “종규야, 이건 시가 아니라 산문이네.” 하고 꼭 한 마디만 했습니다. “왜 시를 쓰려고 하니. 굳이 시를 쓰려고 하지 마.” 하는 말도 곁들였습니다.

 내가 시랍시고 무언가를 끄적이는 힘은 형이 들려준 두 마디입니다. 그래요. 나는 아직 시를 쓸 줄 모르지만 그냥 시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글을 끄적이기도 합니다. 누군가한테 읽히거나 보여주려는 시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나날을 사랑하고 싶어 문득 느낌이 꽃으로 필 때에 한 줄 두 줄 적바림합니다. 더 헤아리니, 형이 들려준 두 마디에 한 마디가 더 있습니다. “산문도 좋아.”


.. 꽁초를 버리고 침도 뱉으며 이 거리에 익숙해질 것이다 ..  (44쪽/청진동 골목에 자반고등어처럼 누워 있기)


 두 달쯤 지난 일인데, 첫째 아이를 수레에 태워 자전거를 몰며 읍내 장마당을 다녀오던 때였습니다. 빗속을 뚫으며 헉헉거리며 몹시 고단하던 날이었어요. 숯고개 오르막을 거의 다 오르며 땀을 비오듯 쏟다가 퍼뜩 한 가지가 떠올랐는데요, 나는 나대로 힘들다지만, 수레에 탄 채 아버지랑 비를 고스란히 맞는 이 어린 아이도 참말 힘들지 않겠느냐고, 자전거를 앞에서 끄는 사람 못지않게 수레에 가만히 앉아서 함께 돌아다니는 아이야말로 고단하지 않겠느냐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오르막 꼭대기를 삼십 미터쯤 남긴 자리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아이를 돌아보았습니다. 아이 얼굴에는 졸음과 고단함이 알뜰히 묻었습니다. 아이한테 살살 말을 걸었습니다. 이 시골길에 자동차 거의 없고, 이 멧자락 길 둘레로 온통 멧부리요 밭인데, 저 멧부리를 바라보면 구름이 있다고, 이제 좀 비가 그친다고. 이때에, 멧등성이에 걸린 구름이 보였고, 이 구름을 보면서 “구름이 산에 앉아서 쉬네.” 하고 얘기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하는 말을 똑같이 따라합니다. 아이는 이때부터 산과 구름을 볼 때면 아버지가 들려준 말을 되풀이합니다. “구름이 산에 앉아서 쉬네.”

 나도 좀 쉬고 싶어서, 이 힘겨운 길에서 다리쉼을 하고 싶어서, 살짝 자전거를 멈추며 저 구름과 같이 쉬고 싶어서, 가슴속에서 말이 한 마디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이 말이 좋아 조그마한 수첩에 살며시 끄적였습니다. 수첩에 끄적일 때에는 ‘산’이라는 낱말이 아닌 ‘멧등성이’나 ‘멧기슭’이라는 낱말로 바꾸었습니다.


.. 문어는 하얗게 익어가는 발을 가슴에 얹는다 ..  (46쪽/문어)


 아이하고 자전거마실을 하며 능금밭 사이로 난 시골길을 지날 때에 “여기 봐. 푸른 사과야.” 하고 말하면, 아이는 뒤에서 “푸른 사과?” 하고 묻고, 나는 “응, 푸른 사과. 푸른 능금.” 하고 말하면 “푸른 능금?” “응, 푸른 능금, 푸른 사과.” 하고 말을 섞습니다. 이때부터 능금밭을 지날 때마다 아이는 아버지하고 말놀이를 합니다. “능금이다, 능금.” “응, 능금이야, 사과.” “사과?” “능금.” “능금?” “사과.”

 나는 우리 아이가 ‘사과’라는 낱말에만 길들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얏나무를 보면서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오얏이야?” “응, 오얏이야. 자두나무.” “자두?” “응, 오얏.” “오얏?” “응, 자두.” 이 아이가 ‘자두’라는 낱말만 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겠지요. 네 식구끼리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지낸다면, 우리끼리 능금이며 오얏이며 말하며 살아가면 되고, 멧자락이니 멧부리이니 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면 됩니다. 그러나, 둘레 다른 사람들은 이 말들을 못 알아들어요. 모두 한국사람이지만 참말 한국말을 몰라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나는 아이한테 ‘두 갈래 한국말’을 들려주고야 맙니다.


.. 길에, 나비 하나 굴러다닌다 / 죽어서도 팔랑거린다 ..  (80쪽/슬프지 않은 시)


 아이하고 살아가며, 옆지기하고 살아내며, 둘째를 낳으며, 새 보금자리를 찾아 아버지 홀로 자전거를 끌고 춘천마실을 하면서, 여관에서 하루를 묵으며 지친 몸을 달래고 빨래를 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지친 몸이지만 여관에서도 어김없이 새벽 네 시에 눈을 뜹니다. 새벽 네 시에 부시시 일어나 여관 텔레비전을 켜서 ‘참으로 볼 만한 영화를 하나라도 보기를 꿈꾸’지만 볼 만한 영화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다시 끄지 않습니다. 무언가 아쉬워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이무렵, 새벽 네 시, 다섯 시, 여섯 시에, 시골집에서 두 아이하고 부대끼는 옆지기는 잠에서 깼을까 하고. 얼마나 고단하면서 달콤한 잠자리에 들었을까 하고. 밥은 알맞고 맛나게 먹겠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집안을 치우지 못해 아주 어지럽다고 하는데, 부디 옆지기가 곱게 기운을 차리면서 첫째 아이하고 집안을 예쁘고 정갈히 돌볼 수 있기를 빕니다. 예쁜 넋과 예쁜 말로 우리 예쁜 삶을 사랑하는 새 하루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빕니다. 부디 오늘은 맑은 햇살이 드리우면서 둘째 기저귀 빨래가 벅차지 않기를 빕니다. 멧자락에서 옆지기가 숲 기운과 풀 기운과 나무 기운을 어여삐 받아들여 착하며 참다운 어머니로 새 날과 새 이야기를 마음껏 길어올릴 수 있기를 빕니다.

 이 비는 마음 모두를 그러모아 시랍시고 글을 수첩에 끄적입니다. 네 삶은 그예 시요, 내 삶 또한 착하게 산문입니다.


.. 살아가다 문득, 도시 바닥에 암매장된 ‘흙’을 본다. 도시의 나무들은 흙에 뿌리를 내렸다기보다는 그 위에 꽂혀 있다. 우리가 봉쇄한 땅에서 저 나무들은 살아간다 ..  (122쪽/시인 말)


 자그마한 시를 모은 작은 책 《너의 반은 꽃이다》(문학동네,2007)를 읽었습니다.이 시책을 내놓은 분은 ㅎ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합니다. ㅎ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글쓴이를 꽤 예전부터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정작 이분이 ‘시를 써서 상도 받고 시책도 곱게 내놓은 줄’을 몰랐습니다. 시책을 한 권 선물로 받고 나서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하고 옆지기와 함께 읽으며 새삼스레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시를 쓰면서 살아가다가 책 만드는 일을 하시는구나.

 돌이키면, 책삶이란 시삶이고, 시삶이란 책삶이 되겠지요. 시를 만지고 시를 돌볼 수 있기에 책 하나 알뜰히 여밀 수 있고, 책 하나 알뜰히 여미면서 당신이 사랑하는 짝꿍하고 작은 살림집을 얻어 작은 사랑꽃을 일굴 수 있겠지요.

 여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영화나 연속극이나 만화는 왜 하나같이 소리를 빽빽 지르고 억지스레 웃거나 울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겠다고 느낍니다. 엊저녁, 전과 17범이라고 밝히는 어떤 분이 곧 18범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17범이든 7범이든 700범이든 사람은 사람이잖아요. 사람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다 좋은걸요. 이분이 하는 ‘사업’이란 ‘색시집 사업’일 텐데, 당신이 하는 ‘회사’에서 쓸 ‘사훈’을 저보고 하나 써 달라 하셔서, 이 자리에서 곧바로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라고 종이조각에 적바림해서 드렸습니다.

 내 마음이 곧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이기 때문이에요.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에요. 남들이 이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아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시책 《너의 반은 꽃이다》를 읽는 내내, 나는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 살아가고픈 내 삶길을 거듭 되뇌었습니다. ㅎ출판사에서 책을 만지며 하나하나 내놓는 글쓴이 박지웅 님 또한 종이에 아로새겨질 새로운 이야기에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러울 마음을 차곡차곡 담겠다고 느꼈습니다.

 시 한 조각은 사랑일 테니까요. 산문 한 다발은 꿈일 테니까요.

 희뿌옇게 밝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에 가득한 구름 사이사이 파란 빛깔 하늘이 얼핏 보입니다. 이 하늘 틈바구니 어디에선가 맑은 햇살이 내리쬘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이 맑은 햇살이 아무쪼록 음성땅 멧부리 한켠에도 살그머니 내려앉아 우리 옆지기하고 두 아이 가슴녘에 따사로이 스미기를 빕니다. (4344.8.18.나무.ㅎㄲㅅㄱ)


― 너의 반은 꽃이다 (박지웅 글,문학동네 펴냄,2007.12.7./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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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8-18 10:42   좋아요 0 | URL
사과, 능금, 자두, 오얏... 너무 좋네요, 예뻐요.

그리고 '맑은 아름다움으로 사랑스럽게' 라는 글 담아봅니다.
지인들이 시끌시끌해서, 맘이 편하지 않았거든요. 현실이든 가상이든 말이죠.
하지만..... 그런게 삶이겠죠. 시끌시끌 아구아구 헤헤 거리는거.

파란놀 2011-08-18 13:54   좋아요 0 | URL
한동안 시끌시끌하다가
또 조용하겠지요.

힘들다가도 느긋해지고
천천히 흐르는 삶을
잘 받아들여 주셔요~~
 


 책으로 보는 눈 166 : 책을 읽는 소리


 두 아이는 집에서 옆지기가 돌보기로 하고, 아버지 혼자 자전거를 몰고 집을 나섭니다. 옆지기는 둘째를 낳고서 두 달 넘게 아무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나빴습니다. 둘째가 백 날째가 가까운 얼마 앞서부터 옆지기가 집일을 차츰차츰 맡아서 할 수 있습니다. 멧골자락 조용한 집에서 싱그러운 풀과 나무를 맞아들이면서 맑은 바람과 고운 소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일까요. 빨래기계를 안 쓰고 자가용을 몰지 않으며 텔레비전을 켜지 않는 우리 집에서는 모든 일을 손으로 합니다. 손으로 비질을 하고 손으로 걸레를 빨아 손으로 방을 훔칩니다. 손으로 둘째 기저귀를 빨고 손으로 기저귀를 널어 손으로 기저귀를 갭니다.

 아버지는 시골집에서 자전거를 몰며 이웃 면내로 갑니다. 이십 분 남짓 달립니다. 시골버스는 한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데,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는 면내로 가자면 자전거를 몰거나 한참 시골버스를 기다리거나 택시를 불러야 합니다. 혼자 바깥마실을 하는 날이라 자전거를 몹니다. 자전거는 시외버스 짐칸에 싣습니다. 오늘은 시외버스 기사님이 차에서 내려 “자전거 안 다쳐요?” 하고 물으며 걱정해 줍니다. 참 오랜만입니다. 시외버스 기사님 가운데 1/5쯤은 자전거를 짐칸에 싣는 일을 못마땅해 합니다. 3/5은 무덤덤하고 1/5은 이렇게 따사로이 말마디를 건넵니다. “네, 튼튼하지 않으면 이 자전거를 탈 수 없잖아요.” 빙그레 웃습니다.

 시외버스에 올라탑니다. 빈자리에 앉습니다. 아버지가 찾아간 면내에서 탄 시외버스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는데, 다음 면내에서는 푸름이들이 아주 많이 올라탑니다. 널널하게 앉아 책을 읽다가 가방을 모두 무릎에 올려놓고 몸을 웅크립니다. 푸름이들 얼굴이 앳됩니다. 아이들 몇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금세 잠이 듭니다. 아이들은 다 함께 서울로 놀러 가는 듯합니다. 내 옆에 앉은 푸름이는 한손에 천 원짜리 여러 장을 꼬깃꼬깃 접어서 꼭 쥔 채 잡니다.

 시골집에서 옆지기랑 두 아이하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를 듣습니다. 벌레가 풀숲에서 풀잎을 건드리는 소리하고 벌레가 스르스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습니다. 끔찍하거나 모질다 할 만한 막비가 그치지 않기에 빗소리를 참말 지겹다 싶도록 듣습니다. 그렇지만 빗소리는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사대강사업을 한대서 망가지는 자연 터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 여느 사람들 스스로 자가용을 장만하여 자주자주 타면서 온갖 전자제품을 쓰고 쓰레기를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버리니까 자연 터전이 무너지면서 이 여름에 막비가 퍼붓습니다. 막비가 퍼붓는 소리를 들으며 햇살이 언제쯤 비칠는지 꿈을 꿉니다.

 면내로 나와 시외버스를 탈 때부터 오로지 자동차 소리입니다. 서울에 닿은 뒤에도 자동차 소리입니다.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여관에서 묵을 때에는 냉장고와 정수기가 전기를 먹으며 끙끙대는 소리에다가 술이 얹힌 사람들 떠드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루를 지새운 이듬날 새벽에 비로소 참새 몇 우짖으며 날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 이 나라 사람들 1/4이 서울에 몰려서 살아간다는데 서울사람은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벌레소리도 나뭇잎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못 들으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소다 오사무라는 일본사람이 쓴 청소년소설 《우리들의 7일 전쟁》(양철북,2011)을 여관 침대에 누워서 읽습니다. “모두 하늘 좀 봐. 별이 참 예쁘다(49쪽).” 아이들은 중학교부터 이루어지는 입시지옥에서 스스로 떨쳐나옵니다. 버려진 건물 옥상에서 한뎃잠을 자며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서울에서는 밤하늘 별을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보드라운 살내음 소리가 죽고, 책을 읽는 소리도 죽습니다. (4344.8.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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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헌책방


 착한 헌책방 아저씨가 짜장면을 시킨다. 착한 헌책방 아저씨는 짜장면을 한 다섯 달 만에 먹는다고 이야기한다. 짜장면 한 그릇에 4500원이다. 얼마 안 된다. 몇 젓가락 휘저으니 금세 바닥이 보인다.

 착한 헌책방 아저씨하고 처음 짜장면을 먹던 날을 돌이킨다. 벌써 열일곱 해나 지난 옛일이다. 열일곱 해 동안 착한 헌책방 아저씨는 헌책을 팔아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곧 일흔 나이가 될 헌책방 아저씨 두 다리는 얼마나 오래오래 이곳에서 튼튼히 버틸 수 있을까.

 나라 곳곳에서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재개발 바람이 분다. 재개발 바람이 그치면 개발 바람이 불고, 개발 바람이 멎을라치면 재개발 바람이 분다. 살가운 바람은 불지 않는다. 책을 읽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려는 알뜰한 사람들 휘파람 소리가 실리는 바람은 불지 않는다.

착한 헌책방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시끄럽다. 빗소리를 시끄럽다고 느낀다. 벌써 두 달째 햇살을 가로막기 때문에 빗소리가 시끄럽다고 느낀다. 비야, 네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는데, 자꾸 너를 탓하고 마는구나. 비야, 비야, 네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자꾸 너를 탓해야 할까. 착한 헌책방 아저씨는 올해에 양수기가 잘 돌아서 헌책방 바닥이 물바다가 되지 않았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착한 헌책방 바닥을 내려다본다. 바닥이 물자국으로 가득하다. 참말 물바다는 아니지만 물자국이 많다. 비가 퍼부을 때마다 착한 헌책방이 걱정스러웠고, 수십만 권에 이르는 이 책들이 새로운 임자를 못 만난 채 물을 먹고 말까 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둘째를 낳아 함께 살아가며 올해 들어 이 착한 헌책방을 처음으로 찾아갔다. 착한 헌책방 아저씨한테 둘째 이야기를 들려준다. 착한 헌책방 아저씨는 아주 잘 되었다며 고마운 인사말을 아낌없이 베푼다.

 착한 헌책방을 즐겨찾는 나는 얼마나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까. 나는 얼마나 착한 아버지일까. 나는 얼마나 착한 옆지기일까. 나는 얼마나 착한 동무이거나 일꾼이거나 사내일까. 착한 헌책방에서 장만한 착한 책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4344.8.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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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관 텔레비전


 여관에서 잠을 깬다. 새벽 다섯 시를 조금 넘는다. 여관에서 묵어도 새벽에 잠이 깨기는 똑같다. 침대에서 뒹굴다가 텔레비전을 켜 본다. 운동경기를 보여주는 방송이 참 많다. 드문드문 영화가 나오고, 어떤 영화는 아래쪽에 ‘아이들이 보기에 알맞지 않은 시간대이니 아이들이 보지 않도록 잘 살펴 주십시오’ 비슷한 글월을 내보낸다. 열아홉 살 밑으로는 보지 말라는 빨갛다는 영화도 흐른다. 그렇지만 이런 영화 오른쪽 윗자리에 ‘19’이라는 동그란 딱지가 안 붙는다. 그저 서슴없이 흐른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은 하나같이 죽은 얼굴이다. 이 죽은 얼굴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지능이 있는 벌레가 며칠 만에 군인 10만을 죽였다. 이 벌레들 때문에 지구별이 무너질 수 있다’는 줄거리를 보여주는 미국 영화가 흐른다. 어쩌면 이렇게 터무니없다 싶은 영화를 다 만들고 다 보여주는가 싶어 놀랍다. 게다가 이 ‘외계별 벌레 죽이기 영화’는 ‘벌레는 징그럽게 생겼으니 다 죽여야 해’ 같은 말을 거리끼지 않고 내뱉을 뿐 아니라, 벌레를 아주 모질게 고문을 하고 생체실험까지 한다. 게다가 벌레를 죽이거나 괴롭히면서 군인들이 낄낄대며 소리 높여 웃는다. 더욱이, ‘벌레를 잡는 거룩한 일’을 하도록 온 나라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군인이 됩시다’ 하고 외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패러디라는 영화인가? 아니면 참말 바보스러운 영화인가? 미국은 전쟁무기를 만들어 힘여린 나라를 짓밟아 지하자원을 빼앗을 뿐 아니라, 이렇게 전쟁영화를 끝없이 만들면서 사람들 마음에 ‘전쟁영웅’과 ‘전쟁놀이’ 마음을 심는 슬픈 짓을 언제까지 벌이려나.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 착하면서 따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송을 하나라도 찾아볼 수 있기를 빌지만, 단추를 꾹꾹 눌러 한 바퀴를 돌아도 모조리 ‘물건 사고팔기’와 ‘주식’과 ‘하느님 사랑’과 ‘대입시험 문제풀이’와 ‘연예인 뒷얘기 호박씨 까기’와 ‘운동경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러한 방송을 즐기니까 이러한 방송만 있는 셈인가. 사람들한테 이러한 방송을 보여주며 길들이려고 이러한 방송만 넘치는 노릇인가. 골이 아프다. 여관 침대에 조금 더 누워서 머리를 식혀야겠다. 가게에 들러 김밥을 산 다음, 전철을 타고 얼른 춘천으로 가서 우리 네 식구 조용히 살아갈 멧기슭 옆에 낀 조그마한 살림집을 찾아보아야겠다. (4344.8.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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