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님의 "꼭두새벽에 책장을 뒤지다가..."

김광섭 시인이 쓴 책은 <나의 옥중기>입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1976년에 나온 판입지요. 두꺼운종이로 만든 책껍데기까지 있는 게 완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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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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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하나 8 - 해바라기

 :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길이란


- 책이름 : 해바라기
- 글쓴이 : 시몬 비젠탈
- 옮긴이 : 박중서
- 펴낸곳 : 뜨인돌(2005.8.10.)
- 책값 : 10000원


 〈1〉 서울로 가는 길에

 

 새벽에 얼핏 잠이 깹니다. 방바닥이 뜨끈해졌다 싶어서 살짝 눈을 떠 보니, 보일러가 돌아갔나 봅니다. 방온도가 12도 아래로 떨어지면 돌아가도록 맞췄는데, 깊은밤에 11도로 내려가서 움직였는가 보군요.

 

 서울 나들이를 마친 뒤 돌아와 보면, 한낮에도 방온도는 12도 안팎이곤 합니다. 그러나 시골집 책상 앞에 앉아서 일을 볼라치면, 깊은밤에도 방온도는 14도쯤 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가만히 보니, 한 사람이 깨어나서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몸에 있는 따스함이 방을 채워서 이렇게 방온도도 제법 높이 올라가는구나 싶습니다.


.. 하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처형당할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그리고 끊임없이 샘솟는 갖가지 일화와 전설의 보고인 요제크가, 모든 인간은 애초부터 고난을 짊어지고 태어나는 법이라고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고 해서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  〈19쪽〉


 드디어 비가 그치고 날이 갭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따뜻하겠지요? 벌써 12월이 코앞인데, 그러니까 지금은 겨울인데, 날이 참 포근합니다. 진작 왔어야 할 눈이 안 오고 비가 내렸어요. 겨울이 겨울 같지 않으니 서울에는 아직도 모기도 살아서 왱왱거립니다. 시골에도 나방이 아직도 살아서 파닥거립니다. 날씨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참. 그래, 날씨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자연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는 셈일까요?

 

 오늘이나 내일쯤 자전거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다시 떠나 볼까 합니다. 예닐곱 시간쯤 자전거를 몰고 서울로 가노라면, 길에서 부대끼는 자동차가 참 많습니다. 시골에도 차가 참 많습니다. 평일 한낮이나 아침인 때에도 차가 참 많습니다. 주말이 따로 없고 도시가 따로 없습니다. 이 많은 차들은 다들 무엇을 하려고, 어디로 가려고 길을 나섰을까요?

 

 시골을 벗어나 도시가 가까워지면 차는 훨씬 늘어나고, 빠르기도 아주 빨라집니다. 거칠기도 대단히 거칠고 무섭기도 참 무섭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분들은 왜 이렇게 길에서 거칠게 달리고 자전거꾼을 무섭게 할까요?


..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폴란드인과 함께 살았고, 그들과 함께 자라났으며, 그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언제나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상호 이해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는 폴란드인 자신이 이미 독일에 예속된 상황 아래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유대인과 폴란드인 모두 똑같이 고난을 겪었지만, 둘 사이에는 여전히 장벽이 있었다 ..  〈113쪽〉


 시골 면만 나와도 가게가 제법 많습니다. 읍으로 나오면 훨씬 많습니다. 도시로 나오면 더더욱 많습니다. 서울로 접어들면 어디를 가든 길거리에는 가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전거를 탄 채로 생각합니다. 이 많은 가게들은 어떻게 먹고사나? 이 많은 가게에서는 무엇을 사고파나? 이 많은 가게에서 사고팔리는 물건들은 어떻게 쓰이고 남은 쓰레기는 어디로 가나?

 

 가게도 많지만 밥집과 술집도 참 많습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세상인데, 집에서 밥을 안 먹고 바깥에 나와서 밥을 사먹는가요? 도시락도 안 싸고 다니는가요? 비싼 술에 비싼 안주를 먹어야 술맛이 나는가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공장 굴뚝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소비세상, 소비천국에 물건을 대주고, 소비세상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엇이든 돈 몇 푼 내고 씀씀이를 즐기며, 자동차도 이런 씀씀이 가운데 하나라는 것. 1시간이 안 되는 거리라면 가볍게 걷는 도시사람 보기 힘듭니다(시골도 비슷). 30분이 안 되는 거리라면 마땅히 걷는 도시사람 보기 힘듭니다. 대중교통을 타는 일도 좋지만, 두어 정류장을 넘지 않으면, 네 정류장까지도 스스럼없이 걸을 수 있어야 하지만, 걷는 사람이 참 적습니다. 걷기 버겁다면 자전거를 타면 될 일인데, 자전거 타는 사람도 적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를 죽이고 있습니다.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만들고 쓰고 하면서. 아니 아무 생각 없이는 아니겠지요. 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하는 일이겠지요. 먹고살아야 하니 마구마구 생산을 하고 소비를 해야겠지요. 먹고살아야 하니 자동차 공장에서 일해서 자동차를 엄청나게 뽑아대고, 텔레비전 공장에서 일하며 텔레비전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회사 영업사원이 되어 이런 물건을 팔고, 또 이런 물건을 쓰며 그치지 않고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2〉 무시무시한 말 ‘먹고살기 힘들다’


.. 그는 자기가 땅속에 묻히면 해바라기를 한 그루 갖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이런 살인자는 죽고 나서도 뭔가를 가질 수가 있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  〈85∼86쪽〉


 박정희와 전두환이 다른 대목이 있다면 한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박정희는 독재정치를 잇고 잇고 또 이으면서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민주주의 시늉을 내다가 뭇매를 맞았습니다. 전두환도 박정희처럼 끝없이 독재를 이어갔다면, 어리석은 이 나라 사람들은 전두환도 박정희처럼 우러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둘이 저지른 일이란, 둘이 우리 사회를 비틀어 놓은 꼴이란, 그다지 다를 바 없다고 느낍니다만, 받는 대접이 참 다릅니다.


.. “그리고 자네.” 아르투르는 나를 향해 말했다. “제발 이젠 그 이야기 좀 그만하게. 그렇게 끙끙 앓는 소리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일단 우리가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고―솔직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세상이 모두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사람들이 서로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게 된 다음이라면, 그런 용서니 뭐니 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할 시간은 충분히 있을 거야. 옳다는 사람도 있고, 그르다는 사람도 있고, 자네가 그를 용서하지 않은 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도 나올 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 우리가 지금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왈가왈부하는 것만 해도, 솔직히 나는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는 말할 수 없는 사치라고 보네.” ..  〈120쪽〉


 문익환 목사님은 한겨레가 남북에서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뚜벅뚜벅 걸으면 휴전선이고 뭐고 다 무너진다고 시로 읊으셨고, 이것이 참 맞는 말이요 옳은 길인데, 정작 어깨동무를 겯자고 할 때 기꺼이 나서는 ‘보통’사람이란 썩 안 많아 보입니다. 독재정권에 눌려 있을 때에도 그랬고, 요즘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자는 목소리가 높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다들 참 바빠서 그러하지 싶습니다. 1960년대에는 1960년대대로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렇고, 2000년대에는 2000년대대로 먹고살기 팍팍해서 그렇다고들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예나 이제나 한 번도 먹고살 만한 적은 없었을까요? 그러면 얼마만큼 되어야 먹고살 만한 삶이 되는지.


.. “이 동네 사람은 모두 유대인과도 사이좋게 지냈어요. 그리고 우리가 직접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한 것도 아니었고요.” “그러시겠죠.” 내가 대답했다. “지금은 누구나 다들 그렇게 말하죠. 지금 부인께서 하시는 말씀도 수긍이 가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에는 결코 그런 변명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일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죠. 바로 독일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비록 개인적인 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수치심만큼은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죄를 저지른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승객이 전차에 올라탔다가 내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연 누가 죄를 지었는지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일인 모두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죄를 짓지 않은 독일인도 그러한 죄에서 확실히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  〈146쪽〉


 자전거를 타고 서울로 오는 동안, 또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뒤에서 빵빵거리면서 윽박지르는 자동차가 곧잘 있습니다. 일부러 자전거를 깔아뭉개려는 듯이 길섶으로 차를 바싹 들이대며 으름장을 놓는 자동차는 이보다 많습니다. 도심지에서는 자전거가 못 지나가도록 길섶을 꽉 막아선 자동차가 퍽 많습니다. 길섶을 막아선 차는 신호에 걸리고 차에 막혀서 꼼짝도 못하는 차. 자기가 못 가니까 자전거도 가지 말라고 막는지, 자기가 앞에 가고 너는 뒤에 가라는 뜻으로 막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이렇게 먹고살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다 자가용을 굴립니다. 기름값이 그렇게 올랐어도 자가용을 꿋꿋하게 몰고 다닙니다. 굴리는 자가용도 값싸고 기름 적게 먹고 세금 덜 내는 작은차가 아닙니다. 큰차들입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면서 살림을 줄이는 사람 보기 힘듭니다. 쓸 것은 다 씁니다. 영화도 참 많이 봅니다. 밥집-술집-찻집-옷집 장사는 그야말로 잘됩니다. 참 아리송합니다.


.. 가령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나치 범죄자에 대한 재판에서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는 빛을 보인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아무런 증거도 확보되지 못한 범죄 사실까지 자백했다. 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 피고들은 그저 진실을 완강히 부인할 뿐이었다. 그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즉 자신들의 범죄를 목격한 증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종종 그 SS대원이 25년 뒤에 이처럼 재판을 받게 되었더라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곤 했다. 그때 학장실에서 죽기 직전에 내게 한 것처럼, 재판정에서도 똑같은 고백을 했을까? 그때 죽어가면서 내게 참회한 것처럼,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을까? ..  〈149∼150쪽〉


 제 아침은 박새와 콩새가 깨웁니다. 까치도 깨우고 어치도 깨웁니다. 이밖에 다른 새들도 많지만 아직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뭐, 이 이름이라는 것도 사람들 마음대로 붙였으니 그냥 ‘뭇새’라 하는 편이 나을라나. 때때로 다람쥐를 보고 고라니도 봅니다만, 먹고살기 힘들다면 바로 이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먹고살기 힘듭니다. 자기들 삶터가 줄어들고 있는데, 먹잇감도 줄어들고 있는데,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날까요? 자전거로 국도를 타면 어김없이 차에 치여 죽고 깔려 떡이 된 짐승들 주검을 열∼스물쯤 봅니다(충주-서울 오가는 동안). 사람을 쳐도 뺑소니로 내빼는 년놈이 많지만, 짐승을 치고 미안해하거나 슬퍼하는 사람 보기 참 드뭅니다. 치여 죽은 짐승을 비껴 달리며 떡이 되지 않도록 마음쓰는 사람은 더더욱 드뭅니다. 모두들 찻길에서 너무도 빨리 달리기 때문에 길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거들떠보지 못합니다. 앞만 보고 빨리빨리 달리기만 하니 볼 틈도 없겠지만.

 

 일이란, 또 놀이란, 우리를 즐겁게 하며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일이든 놀이든 ‘먹고살기’만을 생각해서 하지는 않습니다. 먹고사는 한편, 즐거웁고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고달프기만 한 일을 왜 하겠습니까. 입에 풀칠만 하려는 일을 왜 하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 일이지요.

 

 나아가려는 길이 안 보입니다. 걸어가려는 길이 안 보입니다. 그저 씽씽 아슬아슬하게 내달리는 자동차를 보면,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엄청난 물건씀씀이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도무지 뭐하려고 살아가는 자기 삶인지, 그렇게 살면서 무슨 즐거움과 보람이 있는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지금 이 나라에서는 어린이였을 때부터 사람다이 살아가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사람다이 사는 길을 배우지 못합니다. 책 한 권을 읽혀도 지식을 건네는 책을, 조기교육이다 해서 이것저것 머리속에 쑤셔박는 책만 사 줄 뿐입니다. 아이들한테 읽힐 책이라면 누구보다도 어버이가 먼저 자기 가슴에 뿌듯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책을 읽혀야 할 텐데, 영어 교육에 좋다느니 이큐에 좋다느니 뭐에 좋다느니 하면서 싸구려 전집물을, 인터넷에서 40∼60%씩이나 깎아주는 책들을 골라잡아서 읽히는 판입니다. 아이가 중학교에만 들어가면 이런 책이나마 싹 치워 버리고 오로지 참고서와 교과서와 문제집만 잔뜩 안기고 학원 뺑뺑이에 밤 열 시나 열한 시까지 ‘억지 자율’학습을 시킵니다. 대학교에 가까스로 들어가면 이제는 책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놀다가, 학교 마칠 즈음 되어서 토익이나 토플이나 뭐를 대충 시험 보고, 그런 뒤 고시다 뭐다 공부도 하고…… 이렇게 해서 회사에 들어가면 또 무엇을 할까요? 부모가 좋아하는 사위나 며느리를 맞이해서 혼인하고 애 쑥쑥 낳고 ‘안정된’ 살림을 강남이나 분당이나 일산 따위에 몇 억짜리 아파트 하나 얻어서 살아가면 되나요?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길을 어버이 스스로 찾지 못하면서 아이를 낳는 형편입니다. 어릴 적에야 어쩔 수 없다지만, 머리통이 굵어진 다음에도 아무것도 못 느끼고 그저 따라만 가는 젊은이들도 자기 스스로 길을 안 찾아요.

 

 이야기책 《해바라기》에 나오는 유대인 학살과 독일사람들 죄값 문제도 크지만, 지금 우리들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누가 앞서랄 것 없이 끔찍하고 모질다고 느껴집니다. 앞을 모르는 내달림, 그저 끝간 데 없이 소비주의에 빠지고 얼과 넋조차 없이 해롱해롱거리는 우리 사회라고 느껴집니다.


 〈3〉 아쉬움

 

 시몬 비젠탈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152쪽에서 끝납니다. 그 뒤에는 ‘심포지엄’이라고 해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저마다 어떻게 느꼈는가를 이야기한 글을 붙입니다. 거의 미국사람이 쓴 글입니다. 뒤에 붙은 글을 읽다가 몇 번이나 책을 덮었습니다.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참 맞는 말이구나 싶으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거든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하고 미국이라는 나라 우두머리하고는 다르기 마련이라, 미국에서 벌이는 엄청난 침략과 독재정권 돕기를 놓고 한 마디도 안 하는 일이야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미국 여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라크로 쳐들어가는 일에 그토록 많은 이가 찬성을 하고, 쿠바나 니카라과를 비롯한 중남미에서도, 또 베트남에서, 또 한국에서 저지르고 있는 짓들을 놓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법. 책 끝에 한국사람 한 분이 글을 붙입니다. 그러나 참 아쉽습니다. 왜 일본사람 글은 하나도 없는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번역을 부지런히 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또 세계2차대전 때 모질고 끔찍한 가해자였던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 책 《해바라기》를 읽고 느낌을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안 실었는지? 어차피 세계대전은 ‘서양사람끼리 하는 싸움’이었으니, 서양사람끼리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펴낸 책인지?(책은 프랑스에서 처음 나왔는데, 프랑스판은 시몬 비젠탈 이야기까지만 있고, 번역책은 미국책으로, 미국책에는 다른 사람들 생각이 붙었다고 합니다. 한국 번역책에는 한국사람 글 하나만 더 끼워넣었구나 싶습니다.)


..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 이처럼 끔찍한 모욕을 당하는 광경을 말없이, 항의 한 마디 없이 바라보는 것 역시 악랄한 행동은 아닐까? ..  〈94쪽〉


 사람과 똑같은 목숨붙이가 이토록 괴로워하고 ‘먹고살기’ 고달파 힘들어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우리들입니다. 아니, 지켜보기는커녕 아예 모르거나 등돌리는 우리들이라고 느낍니다. 푸나무나 짐승뿐 아니라 바로 이웃사람들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해도 나 몰라라 하거나 외려 잘됐다고 키득거리는 우리들 아닌지요.

 

 나치 독일은 유대겨레 사람을 ‘눈에 잘 보이도록’ 죽이고 괴롭히고 들볶았습니다. 민주주의나라 한국에서 우리들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도록’ 서로를 괴롭히고 같은 한겨레끼리도 등처먹는 한편, 누가 더 많은 돈-이름-힘을 얻는가에만 눈이 벌건 채 돌아다닙니다.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어가는, 아니 벌써 다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해바라기》를 이야기해야지 싶습니다. ‘내 돈 내가 쓴다는데 뭔 상관이야?’ 하는 말이 힘을 내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 끔찍한 떼죽임을 돌아보는 또 다른 《해바라기》를 머리 맞대고 이야기해야지 싶습니다. (4339.11.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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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6-12-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 세트 - 전2권 - 70년대 강운구가 찍은 마을과 30년 후 권태균이 다시 찍은 그 마을 - 시간과 거리에 관한 다큐멘터리
강운구.권태균 사진 / 열화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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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

 

 사진찍는 강운구 님이 서른 해 앞서 찍은 어느 시골마을을, 서른 해 지난 뒤 후배 사진작가가 다시 찾아가서 요모조모 살피며 어떻게 마을이 달라졌는가를 좇으며 또 한 권 사진책으로 낸 판. 그래서 두 권이 한 묶음. 한 묶음은 55000원. 책은 비닐로 싸여 있어 속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고, 출판사 소개며 언론사 소개며 얼마나 칭찬이 침을 튀기던지.

 하지만 기자들이 침을 튀기며 칭찬하는 책치고 ‘건질 만한’ 책이 없음을, 더욱이 사진책은 말짱 꽝이었음을 돌이켜 본다면, 이런 책은 그저 지나쳐 버리는 편이 나았을 텐데. 지난주 서울 나들이 때, ㄱ출판사 사장이 요 사진책을 사야 하는데… 하고 자꾸 눈독을 들이시지만 선뜻 사지 못하시기에, 냉큼 사고 말았다. 값이 버거우면 내가 사서 비닐 뜯어서 구경시켜 드리면 되니까. 나야 사진책 하나 산다고 10만 원도 쓰고 12만 원도 쓰고(차마 20만 원까지는 못 쓰겠더라만. 살가도 사진책이 9만6천 원, 프랑스 아무개 사진책이 11만 얼마…) 했으니 5만5천 원은 비싸면 비싸고 싸면 싸다고 할 값.

 ㄱ출판사 사장과 술집에 들어가 술을 시켜 놓고, 요놈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를 뜯어서 보는데, 아이쿠야. 어쩜 이렇게 사진 출력을 엉망으로 해 놓았는지. 배경이 조금 어두운 곳은 아예 먹칠이 되어 버렸고, 밝은 쪽은 허옇게 날라가 버렸고. 두 쪽에 걸쳐 펼친 사진은 인쇄-제본에 신경을 안 써서 안으로 많이 접혀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되어 있고…

 이게 파주출판도시를 만든 삼형제 출판사 가운데 하나이자, 우리 나라 미술출판을 앞장서서 개척했다는 열화당 출판사에서 낸, 그것도 나라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강운구 님 사진책을 내는 정성이란 말인가? 기가 차고 혀가 차고 술이 차서 소주 세 병을 ㄱ출판사 사장하고 잇달아 마셨다.

 요즘 나오는 사진책은 그다지 두껍지도 않은 녀석이 쉽게 4~5만 원 딱지를 달고 나온다. 그러나 이 사진책들에 4∼5만 원이나 주어야 할 값어치가 있을까? 차라리 이 돈이면 일본 사진잡지 10권을 사서 본다. 지난달 《일본카메라》, 《아사히카메라》 같은 사진잡지는 한 권에 4∼5천 원. 두어 달 지나 묵은 녀석은 3천 원쯤. 인쇄-제본 훨씬 훌륭하고 사진 선명도와 인쇄출력 뛰어난 이런 잡지를 보며 내 사진눈을 키우고, 좋은 사진을 보는 게 낫지. 그래, 두 권에 55000원을 붙인 까닭이 있구나 싶다. ‘싸구려’로 만들었으니 더 높은 값을 못 붙였(?)겠지.

 예전 《샘이깊은물》 잡지에 실린 강운구 님 사진만 해도 얼마나 좋았는데, 깨끗했는데, 어떻게 낱권 사진책으로 실린 강운구 님 사진은 1980년대 잡지 겉그림에 쓰인 사진보다도 해상도나 출력상태가 떨어질 수 있을까? 파주출판도시에 출판사마다 멋들어지게 세운 그 으리으리하고 비싼 건물 문짝 하나, 창문 하나 값만 요 사진책 하나에 들였어도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는 이렇게까지 실망스러운 판으로 우리 앞에 나오지 않았으리라.

 그러고 보면, 기자들이야, 이런 잘잘못까지 기사에 쓸 자리가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있다. 또한, 이런 잘잘못을 못 느낄 수 있다. 언제 기자들이 4~5만 원이나 하는 사진책을, 또 10만~20만 원이나 하는 사진책을 자기 주머니돈을 털어서 사서 보겠는가?

 55000원이라는 돈… 생각해 보니, 독일 건축가 ‘헤르만 산더’ 사진책을 사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개화기 때 조선여행을 하며 찍은 그이 사진들, 우리 나라에 기증해서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헤르만 산더 사진을 묶어서 내놓은 자료사진책, 이것이 35000원인데, 이 사진책이 훨씬 나았지. 열화당 출판사는 사진가 강운구 선생 이름에 먹칠을 하는 몹쓸 사진책을 세상에 내놓은 죄값을 달게 치러야 할 줄 안다. (4339.11.15.물.ㅎㄲㅅㄱ)

*** 이 글이 악성 딴지라고 느낄 분이 있을지 몰라,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과, <샘이깊은물> 잡지에 실린 사진을 따로따로 스캐너로 긁어서 붙입니다. 스캐너나 포토샵으로 아무런 손질을 하지 않은 스캐너로 긁은 모습 그대로입니다. 제 스캐너는 canoscan9900F입니다 ***

 
먼저, 열화당 사진책에 실린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사진입니다.
책 겉장 사진하고도 상태가 다르지요.
 
 
잡지 <샘이깊은물> 1985년 12월호 사진.
애엄마와 아기 얼굴, 옷,
여러 가지를 함께 보시면 좋겠습니다.
잡지가 낡긴 했어도
21년 앞선 때 사진출력이
훨씬 낫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두 가지 책을 한 자리에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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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강 - 우리어린이 자연그림책
김순한 지음, 정태련 그림 / 우리교육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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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물고기를 먹나?
 [그림책이 좋다 39]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강》

- 책이름 :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강
- 그린이 : 정태련
- 글 : 김순한
- 펴낸곳 : 우리교육(2005.9.20.)
- 책값 : 15000원

 〈1〉 참조기 먹으며

 전라도에 청산도가 있습니다. 청산도에서 나서 자란 뒤 서울로 와서 만화쟁이로 일하는 위씨 아저씨가 있습니다. 얼마 앞서 위씨 아저씨 일터로 찾아간 적이 있는데, 이때 위씨 아저씨가 고향 청산도에서 가져온 ‘참조기’를 반찬 삼은 낮밥 한 그릇 대접받았습니다. 위씨 아저씨는 예전부터 저를 한번 초대해서 대접하고 싶으셨다고, 저로서는 참 고마운 말씀이고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고향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살이 통통 찐 참조기도 여러 마리 들고 오셨다고 하네요. 요즈음 조기는 제삿상에 오를 때만 구경하는데, 제삿상에 오르는 조기와 견줄 수 없이 크고 잘생긴 녀석이더군요.

 저는 물고기 반찬을 잘 안 먹는 편입니다. 글쎄, 어릴 적에 워낙 많이 먹어서 그랬을는지, 익히거나 끓이거나 구운 물고기 머리를 보고 가엾다고 여겨서 그랬는지, 먹을 때는 머리와 등뼈만 남기고 다 먹지만(지느러미며 껍질이며 잔가시까지), 손수 장만해서 먹는 일은 드뭅니다.

 음, 다른 무엇보다 요즘 물고기값이 많이 오르기도 했기에, 또 요즘은 바다며 강이며 온통 더러워지고 있는 터라 물고기도 이런 영향을 많이 받아서 줄기도 많이 준 까닭에 멀리하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나고 자란 인천에는 예전부터 게며 갈치며 조기며 갖가지 물고기가 참 많았습니다. 많은 만큼 값도 쌌어요. 다만, 오징어는 값싸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들은 말로는 꽃게는 그물만 끊어 놓는다고 해서, 잡혀도 다 바다로 다시 던져 놓았다고 했고, 게장사 하는 분들은 조그마한 통에 받아 놓고 동네 골목길에서도 팔고, 시내 모퉁이에서도 팔았습니다. 지난해 언제였던가, 오랜만에 고향(인천)에 갔을 때 보니, 어느 아파트 들머리에서, 또 건널목 앞에서 게를 파는 분이 보였습니다. 그만큼 게가 흔하고 값이 싸서 가난한 사람들도 두루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게값이, 또 서울 같은 도심지 게집(게를 파는 밥집)에서는 꽃게 한 마리에 얼마나 비싼가요.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싼데, 크기는 참 작아요. 그래서 요새는 게를 안 먹습니다.

겉그림입니다.
우리교육 

 〈2〉 우리 자연 삶터는 어떠한가

 산에 가도, 들에 가도, 바다에 가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어디든 갈 때면 맑은 바람과 물을 만날 수야 있지만, 맑다는 바람과 물도 예전 같지 않거든요. 또, 맑다고 해도 지금 사는 제 삶터로 돌아오면, 또 서울 나들이를 하노라면, 보통으로 살아가는 이 나라 많은 사람들이 복닥이는 곳 자연 삶터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망가져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나이(1988∼1990)만 해도, 인천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만 나가도 물이 제법 맑았습니다.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쯤 나가면 파란빛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예전에, 인천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굴업도’에 핵폐기물처리장을 놓는다고 할 때, 굴업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이니 핵폐기물처리장 들어선다고 얼마나 더 더러워질라고…’ 하는 따위로 말하곤 했습니다. 더욱이 환경운동을 한다는 이들조차도. 그때 굴업도는 인천에서 세 시간 반 남짓 나가야 하는 섬이었고, 바다도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작고 조용한 섬이었습니다. 뭍사람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면 그대로 깨끗하고 조용했겠지요. 그런데 핵폐기장이다 뭐다 하면서 섬사람들 마음을 두 조각으로 쪼개 놓았고 삶터를 망가뜨렸습니다. 요새는 섬에 골프장을 짓는다나 뭐라나 또다시 시끄럽게 하고.

 나라가, 이 나라 자연 삶터가 이렇게 뒤숭숭한데, 들은, 강은, 바다는 오롯이 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어디든 아파트로 숲을 이루는데, 들과 강과 바다에서, 또 산에서 살아가는 목숨붙이들은 오롯이 보금자리를 틀며 자기 삶을 꾸릴 수 있을까요. 무슨무슨 새를, 물고기를, 멧짐승을, 풀과 꽃과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면 뭐할까요. 정작 이 새며 물고기며 멧짐승이며 풀과 꽃과 나무며 살아갈 터전은 다 망가뜨리고 더럽히는걸요.

.. 강을 취재하여 책으로 엮어 보고자 맘먹었을 때, 마을 앞 작은 개울이 떠올랐고 어린애마냥 한껏 흥이 났다. 강원도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물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보고, 작은 강줄기를 쫓아가다 사이사이 물줄기들을 다시 훑어보기도 하며 마침내 커다란 강에 다다를 때까지 놀이터를 찾아다니는 아이가 되었다. 수많은 강을 돌아보며 내내 안타깝던 것은 콘크리트 옹벽으로 말끔히 꾸민 하천이 뻔뻔하게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포클레인으로 하천 바닥을 긁어내 자연스러운 물길이 끊어지면 물고기들은 살 곳을 잃게 마련이다. 한국 특산종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르는 민물고기. 금강모치, 각시붕어, 감돌고기, 동사리, 새코미꾸리, 줄납자루, 쉬리……. 이 땅의 민물고기들이 점점 사라지기 전에 사람들 발길이 뜸한 물줄기를 찾아 겨우 책 한 권 얻었을 뿐이다 ..  〈그린이 말 : 정태련〉

 우리 자연 삶터를 담아내는 사진책과 그림책이 곧잘 나옵니다. 다른 누구보다 아이들이 읽을 책으로 곧잘 펴냅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자연 삶터와 뭇 목숨붙이를 가까이하고 잘 알아야 나중에 어른으로 자라면서도 깨끗하고 곧은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럴 테고, 또 부모나 교사나 출판사사람도 이런 여러 가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진책이며 그림책이며 이야기책이며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까지만이며, 중학교에 들어갈 때부터는 읽히지 않아요. 출판사에서는 책도 안 냅니다. 학교에서는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어쩌다가 논술 문제로 환경 문제다 뭐다 하고 나오면 그때서야 머리만 딥다 굴리는 글쓰기 훈련을 시킬 뿐, 정작 아이들이 몸으로 느끼고 두 눈으로 지켜보는 자연 삶터를 보여주지 않고, 이런 자연 삶터 모습을 담은 책은 읽히지도 않습니다. 우리 형편이 이렇습니다. 이런 우리 형편을 먼저 제대로 살핀 뒤, 그림책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강》을 함께 보면 좋겠어요.

 〈3〉 그림책 이야기


 물총새가 눈깜짝할 사이에 각시붕어를 잡았어요.
 물속으로 뛰어들어 뾰족한 부리로 낚아챘겠지요.
 먹이를 찾는 중대백로도 물속을 노려보아요.
 강가에 사는 새에겐 물고기가 가장 좋은 먹이예요.
 어미새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려고 바삐 날아다니죠.
 수달이나 물새는 물고기를 먹고, 물고기는 물속 곤충을 먹고,
 물속 곤충은 물풀이나 플랑크톤을 먹이며 먹이사슬을 이루어요. 〈27쪽〉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강》은 차근차근 강가 목숨붙이와 먹이사슬과 삶터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지식을 건네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우리 둘레에는 어떤 자연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가만히 알려줄 뿐입니다. 우리 살아가는 세상은 사람만 사는 세상이 아님을, 우리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온갖 목숨붙이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세상임을 일러 줍니다.
 

두 쪽에 걸쳐 펼쳐놓은 그림들이 참 살갑고 구수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그림책들이 하나둘 나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교육/최종규 

두 쪽에 걸쳐 펼쳐놓은 그림들이 참 살갑고 구수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그림책들이 하나둘 나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작은 물줄기들이 흐르고 흘러 골짜기에서 만났어요.
 크고 모난 돌들이 세찬 물길 따라 구르며 땅을 깎아요.
 계곡가엔 버드나무, 물오리나무, 물푸레나무 들이 우거졌어요.
 나무가 햇빛을 가려 주어 물은 차고 깨끗해요.
 계곡물에 가라앉은 낙엽은
 물속 작은 생물들 먹이도되고, 집도 되어 주지요.
 물까마귀 한 마리 바위에 앉아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을 한참 바라봅니다. 〈6쪽〉


 강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강을 둘러싸고는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강 둘레에서 살아가는 목숨들은 무엇인지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어떤 꾸밈이 없이, 치레나 부풀림이 없이, 있는 그대로 수수하게 보여줍니다. “꽃은 아름답다”가 아니라 “무슨 꽃이다” 하고만 이야기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그림 한 장을 그려도 ‘열목어’가 ‘버들치’ 한 마리를 냉큼 잡아서 먹는 그림을 그립니다. 꺽지는 돌고기를, 장구애비는 송사리를 잡아먹는 그림을 그립니다. ‘자연스러운’ 자연 삶터예요. 먹이사슬입니다. 물고기 먹이는 우리가 빵부스러기를 물에 띄우는 그런 먹이가 아니라, 서로 먹고 먹히는 사이임을,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생태계 균형이 잡히며 모두 즐겁게 어울려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점점 넓어지고 점점 깊어져요.
 강물은 거침없이 도시로 흘러듭니다.
 우뚝 솟은 건물, 많고 많은 자동차.
 하수구에선 사람들이 쓰고 버린 더러운 물이 쏟아지기도 해요.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참붕어, 베스, 블루길, 누치 같은 물고기가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을 누비며 살아요. 〈36∼37쪽〉


 그린이 정태련 님은 이 땅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물줄기를 가까스로 하나하나 찾아내면서, 생태 그림책 하나에 그림을 담습니다. 글쓴이 김순한 님은 눈여겨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물속 삶터와 목숨붙이들을 가만가만 헤아리면서, 우리들(사람)하고는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글로 담습니다. 그저 책꽂이에 꽂아 두고 생물도감처럼 찾아보는 그림책이 아니라, 한낱 강 지식 생태 지식만 건네는 골치아픈 그림책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먹고 버리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흐름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는 강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이사이 석 장에 걸친 펼친그림이 있고, 앞쪽과 뒤쪽에 꼼꼼한 이야기를 붙인 대목이 있습니다. 엮음새도 참 훌륭합니다. 이런 그림책이 널리 사랑받고 두루 읽히며 아이들 마음에도, 또 어른들 마음에도 좋은 느낌을 듬뿍 선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육/최종규 

사이사이 석 장에 걸친 펼친그림이 있고, 앞쪽과 뒤쪽에 꼼꼼한 이야기를 붙인 대목이 있습니다. 엮음새도 참 훌륭합니다. 이런 그림책이 널리 사랑받고 두루 읽히며 아이들 마음에도, 또 어른들 마음에도 좋은 느낌을 듬뿍 선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이 흐르고 흘러 땅 끝이에요.
 강물이 바닷물과 만나요.
 민물과 짠물이 섞여요.
 비릿한 바다 내음, 짭짤한 소금 내음 바람에 실려 와요.
 괭이갈매기 울음소리 하늘로 퍼져나가요.
 바닷물이 빠지면서 부드럽고 푹신한 갯벌이 드러나면
 말똥게 들락날락하고 갯지렁이 굴을 파고 다녀요.
 강에서 시작한 생명이 바다로 이어졌어요. 〈42쪽〉

 강에서 비롯한 목숨이 바다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이 강은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강을 이루는 물줄기, 내며 시내며 개천이며는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또, 내며 시내며 개천을 흐르는 물은 어디에서 솟을까요. 물은 어떻게 돌고 돌면서 강도 이루고 바다도 이룰까요. 또 이런 내며 강이며 바다며에 사는 목숨들은 저마다 어떻게 다른 터전에서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들 사람은 강하고, 산하고, 바다하고, 또 온갖 물고기와 물속 벌레나 물가에 사는 짐승들하고는 어떻게 이어진 채로 살아갈까요. 강에서 비롯한 목숨이 바다로 잘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 자연 삶터를 잘 다스리고? 아니 잘 가꾸고? 아니 자연 삶터에 잘 깃들며 살고 있을까요?

 〈4〉 꼼꼼그림에 담는 뜻

 그림책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강》을 보면, 사이사이 펼친그림 석 장을 이어붙이며 좀더 꼼꼼하고 깊이있게 살펴볼 수 있도록 마음을 씁니다. 펼친그림 뒤쪽에는 펼친그림 앞쪽에 나온 목숨붙이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풀이해 보여줍니다. 그림책 맨끝에는 찾아보기와 낱말풀이도 달았군요. 작은 곳 하나하나 잘 살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쓴이 말 한 마디. ‘꼭 한번 생각해 봐요’ 하면서, “물을 더럽히고, 환경을 망치는 일”을 하는 우리들 앞날에 무엇이 있을지, 무슨 일이 다가올지 묻습니다.

 이 물음은, 이 그림책을 볼 초등학교 아이들한테만, 또 초등학교 아이를 둔 부모한테만 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이 그림책을 본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또는 학교를 그만두고 자유로이 커 나가도), 나중에 대학교를 가든 사회에 나아가 어느 일자리를 잡든 그대로 이어가는 물음입니다. 부모한테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딸아들이 몇 살 나이가 되더라도 똑같이 대답해야 할 물음이요 언제까지나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 할 물음이라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 참 값어치는 바로 이 대목, ‘이 책을 보는 데에서 그치지 말기’ 바라는 마음에 있거든요.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강》과 같은, 또는 이와 비슷한 그림책과 그림도감은 요즘 들어 하나둘 세상에 나옵니다. 예전에도 퍽 나왔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나오리라 봅니다. 이른바 ‘세밀화’라고 하는 ‘꼼꼼그림’으로 담아낸 책들인데, 이렇게 꼼꼼그림으로 자연 삶터와 목숨붙이를 담아내는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술작품을 보라고? 이제는 사라져서 없어진 목숨들을 구경하라고? 학교에서 내어준 숙제를 하는 데 쓰라고? 어른들 옛 추억을 아련히 떠올리는 이야기로 삼으라고?

 그림을 그린 이, 글을 쓴 이, 또 책을 엮어낸 이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한테도 이야기를 건넵니다. 생각과 마음을 건넵니다. 어느 자연 삶터와 목숨붙이를 이처럼 꼼꼼그림으로 담아내는 까닭은, ‘잘 그린 그림 자랑’이나 ‘도감 자료로 쓰라는’ 데에 있지 않아요. 우리 둘레에 있는 모든 대상(사람이든 자연이든 물건이든 무엇이든)을 찬찬히 살피고 마음을 쓰라고, 그래서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느끼라고, 나 자신도 제대로 느끼고 내 이웃과 동무와 식구도 제대로 느끼라고, 사람은 사람대로 사람 아닌 모든 목숨붙이는 또 이런 목숨붙이대로 소중한 자기 목숨과 삶이 있음을 느끼라고, 누구나 저마다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며 아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나 하나 욕심을 부려서 자기도 모르게 다른 이를 괴롭히거나 다른 이 삶터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느끼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니 글과 그림으로 차분히 들려주고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앞으로 즐기면서 살아갈 일을 찾을 때, 우리들이 앞으로 즐기며 어울릴 놀이를 찾을 때, 어디에서 무슨 잣대로 어떻게 이끌어 나가면 좋을지, 어떻게 자기 자신과 우리 삶터를 가꾸면 좋을지, 어떻게 남들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살아가면 좋을지 스스로 길을 찾아보라고, 넌지시 우리 어깨에 손을 얹고 말을 겁니다.
 

꼼꼼하게 잘 그려낸 그림 가운데 하나. 저는 이 그림책에 실린 그림에 99점을 줍니다. 1점은 뺐는데, 그림에 싱싱한 느낌은 좀 얕기 때문입니다.
우리교육 
꼼꼼하게 잘 그려낸 그림 가운데 하나. 저는 이 그림책에 실린 그림에 99점을 줍니다. 1점은 뺐는데, 그림에 싱싱한 느낌은 좀 얕기 때문입니다.


 〈5〉 몇 가지 말 살피기

 마지막으로 몇 가지 아쉽다고 느낀 낱말을 짚어 보겠습니다.

 ┌ 강은 어디서 시작할까요
 └=> 강은 어디부터 흐를까요

 ┌ 낙엽 밑에서
 └=> 가랑잎 밑에서

 ┌ 계곡가 / 계곡물
 └=> 골짜기 가 / 골짜기물

 ┌ 나무가 햇빛을 가려 주어
 └=> 나무가 햇볕을 가려 주어

 ┌ 물속 곤충들이
 └=> 물속 벌레들이


 ‘시작(始作)’이라는 말은 되도록 안 써야 좋습니다. ‘낙엽(落葉)’이 아닌 ‘가랑잎’으로 써야 알맞아요. 책을 보면 ‘골짜기’라는 말을 알맞게 잘 써서 반가운데, 몇 군데에서 ‘계곡(溪谷)’이란 말을 쓰네요. 물이 차갑다고 하면서 나무가 ‘햇빛’을 가렸다고 했으나, ‘빛’이 아닌 ‘볕’으로 고쳐야겠지요. 햇빛은 ‘눈이 부시’고, 햇볕은 ‘따뜻합’니다. ‘젖먹이짐승’이라는 말을 잘 살려서 쓴 이 그림책이니만큼, ‘물속 벌레’라고 해 주면 더 어울립니다.

 ┌ 물푸레나무 들이 우거졌어요
 ├ 꺽지는 몸 빛깔을 잘도 바꿔요
 ├ 물깊이가 얕아
 ├ 물풀이 우거졌어요
 ├ 물 흐름이 느려 / 물살이 느려
 └ 강가에 기다란 모래밭이 드러나요


 여섯 가지만 들었는데, 이밖에도 알뜰히 살려서 쓴 좋은 말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좋은 말’이라기보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고, 아이든 어른이든 읽는 그 자리에서, 듣는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입니다.

 여섯 가지로 든 대목에서는 ‘우거지다-몸 빛깔-물깊이-물풀-물 흐름-물살-강가-모래밭’ 같은 낱말이 반갑습니다. 학교에서만 해도 이런 낱말이 아닌 다른 한자말로 된 낱말을 흔히 쓰지요? (4339.11.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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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어린이문학
우에노 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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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지난해에 썼습니다. <현대 어린이문학>은 제가 아끼고 좋아해서 늘 곁에 두고 틈틈이 다시 보는 책인데, 이 책 이야기를 다른 자리에 쓰려고 잠깐 알라딘에 들어와서 얼마나 팔리고 있는지, 또 댓글은 얼마나 올라 있는지 보다가, 아무런 독자댓글이 없음을 보고, 두 해 앞서 쓴 글이기는 하지만, 이 책을 찾아보는 분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 걸쳐 놓습니다.

 

 - 책이름 : 현대 어린이문학
 - 글쓴이 : 우에노 료
 - 옮긴이 : 햇살과나무꾼
 - 펴낸곳 : 사계절(2003.1.28)
 - 책값 : 7500원


 어린이문학 비평으로 읽는 우리 삶
 [책읽기가 즐겁다 82] <현대 어린이문학>을 읽으며


 <1> 현실과 동떨어진 평론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요즘은 평론책을 안 읽습니다. 평론만큼 재미없는 글도 없지만, 평론처럼 작품을 자기(평론가) 눈과 입맛에 따라 칼질하는 글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론을 쓴다고 하면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서, 평론가가 어느 영화를 아주 비판하고 나무라면, 평론과 영화를 잘 모르는 여느 관객은 "그 영화가 재미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안 보기도 해요. 그러다가 얼결에 '혹평 받은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 재미있던데 평론은 왜 그래?"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태까지 읽은 평론책도 참 많았지만, 더는 읽을 만한 글이 눈에 잘 안 띄기도 하고, 저도 게을러진 한편으로, 시인 김남주 씨 말마따나 "그 따위 평론이라면 나도 쓰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김남주 시인은 "창비에 실린 시를 보고 / 이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싶어 /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써 보았다 /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린 나의 시를 보고 / 이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싶어 / 노동자와 농민이 또는 전사가 / 시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 보았으면 한다 / 그것이야말로 나의 보람이고 나의 자랑이다......" 하고 노래했거든요.

 우에노 료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지은 평론, 그것도 어린이문학을 평론한 글은 남달랐습니다. 그저 어린이문학 흐름이나 어린이문학에 담는 줄거리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겉핥기가 아니라, 어느 한 나라 문화와 교육과 사회와 정치와 역사와 예술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이 책 하나에 담았어요. 그래서 두어 달에 걸쳐서 차근차근 꼼꼼하게 곱씹으며 <현대 어린이문학>이라는 평론책을 다 읽어냈습니다. 하지만 번역은 꽝입니다(줄거리는 좋지만).


 .. 어른이 무서운 이유는 회초리를 휘두르기 때문이 아니라
 회초리를 휘두를 수 있는 입장, 휘둘러도 괜찮은 입장이기
 때문이며 어린이에 대한 절대성 때문이다 .. <11쪽>


 우에노 료는 "문제는 어른과 아이 중 누가 더 훌륭하냐가 아니라, 누가 더 인간으로서 유연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발휘하느냐이다<16쪽>"라고 말합니다. 머리말에 적은 이런 말을 보고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 '어린이'문학 비평이라기보다 어린이'문학' 비평


 "어린이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이야기할 자격도 있다<18쪽>"고 말하는 우에노 료. "성인용 잡지에 범람하는 '성'은 어른들이 '민주적 사회'에서 진정한 인간 해방을 체험하지 못했음<21쪽>"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현대 어린이문학>이라는 책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빼어나 작품 열 편을 대상으로 어린이문학에 제대로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또 어린이문학을 즐기는 우리들이 함께 느끼면 좋을 것이 무엇인지, 어린이문학이 어떤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갈 길은 어디일지를 찬찬히 살핍니다. 우에노 료가 말하는 어린이문학이 나아갈 가장 중요한 길은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어떤 형태로 무너뜨리고, 어떤 형태로 어린이의 독자적인 세계를 표현할 것인가<21쪽>"입니다.


 .. 어린이는 이러한 주제를 알기 위해 책을 읽지 않는다. 그 점
 은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에서 언급했다. 어린이는 이야기 자체
 를 즐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독서 태도이다. 만약 이야기 속의
 주제나 의도만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이미 문학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학교 교육의 일부로, 국어 공부나 독서 감
 상문을 작성하는 일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 <95쪽>


 어린이가 읽는 책뿐 아니라 어른이 읽는 책도 같습니다. "주제를 알고자" 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재미'만 얻고자 읽지도 않아요. 주제와 재미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재미'에 대한 판단은 어린이가 내린다 해도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의 상상력은 제한되고 좁은 틀 속에 갇힌다<187쪽>"고 말해요.

 일본은 우리보다 상상력이 넘친다고 할 수 있는 책을 많이 펴냅니다. 하지만 그 일본에서도 "토미 융게러가 지은 <머신 섹스>나 <포니콘>이라는 책은 낼 수 없을 것-<포스터의 위력,시각문화사(1979)>이라는 책에서-"이라고 했어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멋진 어린이 그림책을 그렸다는 '토미 융게러'라는 이름에 억눌려 버리거든요. 토미 융게러는 어린이 그림책만 그리지 않고, 사회와 정치와 모든 것을 풍자하고 비꼬기도 한 <머신 섹스>나 <포니콘>도 그리지만, 이런 책을 토미 융게러가 사는 나라와 유럽에서도 거절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내동댕이친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토미 융게러가 지은 수많은 그림책 가운데 '성과 섹스'를 다룬 그림책은 들어오지 못할 뿐더러 들어올 수도 없게 막습니다. '유익'한가를 따지거든요. 어른들, 그것도 관료주의와 제도권에 있는 어른들이 따지거든요.


 .. 어린이 독자들은 자기가 속한 일상적 세계에서 살면서 항상
 일상성에서 탈출하기를 꿈꾼다. 미지의 것에 대한 발견과 모험
 여행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설렌다 .. <85쪽>


 이런 꿈과 설레임은 어린이만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예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여기서 우에노 료는 어른들이 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주제에 짓눌린다고 말하는 한편으로, 재미가 그저 재미로만 그쳐서는 안 되는 대목도 말합니다.

 우에노 료는 '놀이'를 중요하게 여겨서 책을 읽을 때에도 '놀이' 성질을 얼마나 담아내느냐고 말하기 때문에 한국 어린이문학 평론가들이 이 대목을 곧잘 따와서 글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어린이문학 비평가들이 따오기는 많이 따오면서도, 정작 우에노 료가 중요하게 말한 다음 대목은 일부러 빠뜨립니다. 그래서 우에노 료라는 사람이 '놀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만큼 '일'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어른들이 지나치게 '주제'에 짓눌린다고는 하지만 '주제'를 완전히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알리지도 않습니다.


 <3> 놀이와 일, 일과 놀이는 한 동아리


 .. 어린이는 많은 것을 기대한다. 많은 것을 기대함으로써 공상을
 부풀린다. 공상을 부풀림으로써 인생을 생각한다. 자신 속에 인간
 을 완성시켜 간다. 인간에게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
 다. 마법의 램프나 하늘을 나는 융단에 어린이가 매료되는 것은
 현실 도피의 표현이 아니다. 일상 세계를 단숨에 뛰어넘는 공상
 이야기에 보내는 어린이들의 갈채와 박수는 반대로 일상 세계에
 대한 무한한 기대의 표현이다 .. <86쪽>


 어린이는(또는 어른은) '꿈'만 꾸지 않습니다. 꿈을 꾸면서 '현실'을 삽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도망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즐기며 꿈을 즐겨요. "자신이 속한 현실 세계와 신비한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기보다 이어져 있다"고 느끼는 어린이들은 "자기가 참가할 수 있는 재미"를 바랍니다. 그리고 "적어도 자기가 있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재미를 기대"해요.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가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면서 보여주는 '공상과학만화'나 '환상동화'를 어른들이 쥐어 주었을 때, "에이, 재미없어"라고 집어던지는 까닭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상상은 꿈이 아니라 '망상'입니다. 어른들끼리 즐기는 용두질(자위행위)일 수도 있고요.

 민화나 옛날이야기를 무척 재미있게 듣고 읽는 어린이들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자기 삶과 이어진 세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또 다른 세계가 주는 재미"로 여겨요.


 ..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 독자들은 콩나무에 올라간 잭이나 엄지
 동자(공상 이야기)보다 톰(현실 이야기)을 훨씬 친근하게 느낀다.
 자신과 톰의 입장을 동일시한다. 이윽고 신비한 일들이 벌어진다.
 자신과 톰을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
 생긴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일상 세계에서 기대하
 던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먼 옛날, 먼 곳에서 일
 어난 일이 아니다. 지금 자기 앞에 또 하나의 세계가 나타나는
 즐거움이다 .. <87쪽>


 자기 또래 어린이가 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는 어린이들입니다.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걱정도 하고 즐거워도 해요.


 <쥐 - 조혜영, 1985년 12월 9일 / 경상도 울진 온정국 3년>

 마루 위에
 메주가 있어요.
 밤에만 쥐가 와서
 깕아먹어요.
 엄마는 매일
 고노무 쥐
 고노무 쥐.
 할아버지가
 찬깨(덫)를 놓았어요.
 쥐가 꼬리에 찡겨서
 피가 묻었어요.
 쥐는 가만히
 눈만 감고 있어요.  <큰길로 가겠다,한길사(1987)>에 실린 시 가운데 하나


 자기 또래가 쓴 이런 시를 읽고 함께 걱정하고 마음을 쓰는 어린이입니다. 나도 알고 내 동무도 아는, 나도 살고 이웃도 함께 살아가는 터전을 바탕으로 펼쳐내고 이어가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인 '판타지'가 아니라, '자기가 발 딛고 선 땅'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끝없는 상상 이야기에 흠뻑 빠지는 어린이들입니다.

 어린이 자신에게 남다르게 소중한 세계가 있음을 느끼는 동안, 자기 삶을 사랑하고 더 나은 재미와 보람과 즐거움과 꿈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현실과 꿈이 하나로 이어지는 세계, 그것은 바로 놀이와 일이 하나로 이어지는 세계입니다.


 <4> 전쟁 어린이문학


 마지막으로 "전쟁 어린이문학"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귀담아듣고 생각해 볼 만한 말이 있습니다. 전쟁 어린이문학은 그냥 '전쟁문학'이라 하여 어린이와 어른 모두 깊이있게 돌아보고 살피면 좋을 비평이기도 해요.


 .. 인간성은 어제 일어난 일을 막을 수 없었다. 내일 일어날 비인간
 적 행위를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체 그런 인간성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을 규명하지 않고서는 과거의 학살을 돌이켜 생각할 수
 없다. 여기에 전쟁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하나의 이유가 있다.
 전쟁 자체를 그렸다기보다 전쟁으로 인해 왜곡된 인간, 나약한 인간
 을 그린 어린이책은 무수히 많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 사실의 전달
 이 아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닿아 있다. 그것을 밝혀 냄으로써 현재 속에서 어제에 대한 책임,
 또는 내일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거기에 있다 .. <163쪽>


 얼마 앞서 <나스 마사모토 그림-히로시마,사계절>라는 그림책이 하나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책방에서 서서 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닫았습니다. 일본이 "왜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을 일으키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통받게 했는지"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일본사람들 아픔과 슬픔, 그리고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상투성 짙은 교훈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해자는 일본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때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수많은 한국사람도 있고 중국사람도 있고 동남아시아사람도 있어요. 더구나 일본 정부는 원폭피해자로 '한국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가 2002년에 와서야 겨우 인정했지만, 국가 차원 배상이 아닌, 지금도 일본에서만 사는 피폭자만 대상으로 삼고, 그것도 몇 사람에게만 한정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책은 '전쟁 자체'만 말할 뿐, 전쟁 때문에 비틀리고 뒤틀리고 괴롭고 힘겨운 사람들 삶을 담아내지 못해요. 아예 안 한달까요? 나아가 자칫하면 역사 왜곡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맨발의 겐>이라는 만화책에서는 그나마 '한국인 피폭자' 이야기도 나오지만 그것도 그저 겉핥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히로시마>란 그림책엔 아예 나오지도 않아요.

 이런 '전쟁 어린이문학' 비평을 읽다 보면, 이것은 어린이문학에만 할 말이 아니라 어른문학에서도 할 말이에요. 그러니까 '문학'으로 할 말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헤아릴 일이고요.

 어린이도 어른도 모두 사람입니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문학이라면 바로 이 모든 사람을 헤아리고 살피고 사랑하는 문학이어야 합니다. 문학비평이라면 바로 이 모든 사람을 헤아리고 살피고 사랑하는 문학비평이어야 하고요. 그런데 우리네 문학과 문학비평은 나날이 사람과 멀어져 가지 싶어요. '재미(놀이)' 한 가지로만 치닫거나, 무거운 '주제(유익)'에만 푹 빠져요. 재미와 주제는 둘 가운데 한 가지만 있을 때는 참 심심하거나 따분합니다. 함께 있어야 가장 좋아요.

 <현대 어린이문학>이라는 책이 두루 읽을 만한 책은 못 되겠지만, 문학을 좋아하고 사람 삶을 사랑하는 이라면 찬찬히 살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낱 '어린이문학 비평'만 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문학'을 글감 삼아서 인생론을 이야기하고 철학을 말하고 사람과 삶과 사랑을 보듬습니다. 하지만 번역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너무 형편없고, 우리 말법과 말투하고는 동떨어져 있어서 아쉽습니다. 앞으로 이런 책을 펴낼 때는 부디 '우리 말 다듬기'라도 좀 해놓고 내놓으면 좋겠습니다. (4337.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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