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하는데 어깨죽지며 팔뚝이며 근질거립니다. ‘씻은 지 좀 되었나?’ 싶어서 도서관 문을 닫고 4층 살림집으로 올라가 찬물로 몸을 씻습니다. 몸을 씻는 김에 수건 하나 빱니다. 다 빤 빨래는 집게옷걸이로 집어서 4층 마당 한켠에 넙니다. 오늘은 햇볕이 따뜻해 잘 마르겠네요. 이제 내려갈까 하다가, 올라온 김에 아침을 먹자고 생각합니다. 된장 풀고 감자와 양파 썰어 김치와 참치 조금 넣고 간을 맞춘 칼국수 한 그릇 끓입니다. 밥을 퍼 냄비에 담아 살살 섞으면 아침 준비 끝. 책을 읽으며 느긋하게 아침을 즐깁니다.
 밥을 다 먹은 뒤에는 냄비에 물을 붓습니다. 이 물로 냄비 구석구석에 붙은 찌끄레기를 떼어냅니다. 저녁을 먹을 때에는 이 냄비를 그대로 씁니다. 제가 먹은 냄비이니까, 이 그릇에 물을 더 붓고 된장 풀고 푸성귀 조금 넣으면 아침과 마찬가지로 쓸 수 있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햇볕바라기를 잠깐 하면서 동네를 죽 휘둘러봅니다. 맑은 햇볕은 지붕 낮은 집에도 높직한 아파트에도 골고루 내리쬡니다. 다만, 높직한 아파트는 그늘을 너무 많이 만드네요.


 달리는 전철에도 내리쬐고, 자동차와 찻길에도 내리쬐는 이 햇볕은, 저기 경상도 안동땅에도 내리쬐겠지요. 기지개를 켜고 담벽에 기댑니다. 지난 5월 17일, 일흔한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권정생 할아버지를 떠올려봅니다. 몸이 나빠서 젊은 날부터 병치레를 하셨고, 오줌을 눌 수 없어 배에 누런 고무호스를 끼우며 여태껏 살아온 그분. 아프게 살아왔기에 아픈 이웃을 온몸으로 느끼셨지 싶습니다. 세상에 쓸모없이 버려진 자기 자신을 알았기에 이웃한 모든 낮은자리 사람을 껴안을 수 있었지 싶습니다. 가진 것 없이 사셨기에 책 몇 권 내어 적잖은 인세를 벌게 되었을 때, 그 돈은 자기 아닌 이웃한테 쓰며 사셨지 싶고요.


 이제 권정생 할아버지는 세상 걱정과 시름을 모두 내려놓고, 고운 흙과 맑은 물과 향긋한 바람이 감도는 하느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어떤 이는 ‘혼인해서 아이 낳고 살아야’ 어른이라고 합니다만, 혼인 안 하고(또는 못하고) 아이 안 낳고(또는 못 낳고) 살아간 권정생 할아버지야말로 어른이지 싶어요. 참 어른 말입니다. 자기 살을 깎아서 어린이한테 내어주는 사람, 자기 몸을 바쳐서 어린이를 보살피는 사람, 자기 마음을 다해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셨으니까요.


 한 어른이 저세상으로 갔으니, 이제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고 추슬러 ‘또다른 어른’이 되어 살아가야겠지요. 예전에 권정생 할아버지한테 들은 말을 곱씹습니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다고 보면 안 돼요.”, “나보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기예요. 나 대신 아파 주면 좋겠어요.” (4340.5.22.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직은 이것저것 준비만 하고 있는 도서관 ^^;;;;)


 지난 4월에 충주에서 인천 배다리 골목길로 살림집을 옮겼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도서관을 열 생각이거든요. 인천 배다리 둘레에는 ‘2014년 아시아 경기대회 유치’ 된바람이 차츰 모질게 불어서, 2013년까지 전철역과 찻길과 학교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아파트’만 빼놓고 모두 재개발, 시청과 개발업자 말을 빌면 ‘도시정비-도시정화’ 사업을 벌인다고 합니다. 인천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네를 ‘아파트 + 쇼핑센터 재개발’을 해 버리면, 이곳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까마득할 뿐인데, 10조를 투자해서 100조를 벌면 나라살림이 좋아진다고 믿는 공무원과 개발업자 목소리에 밀려날 뿐입니다. 새만금과 천성산은 자연 삶터였기에 지역사람들 문제였어도 널리 이야기가 되지만,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100년 역사가 넘는 골목길 문화를 이루어 온 배다리 같은 곳은 ‘낡고 오래되고 지붕 낮은 작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외국 관광객이 들이닥치기 앞서’ 죄 갈아엎을 곳으로 여기는 흐름도 있습니다. 그래, 오래 버틴다고 해도 2013년까지 고작 대여섯 해뿐이지만, 그 대여섯 해라도 지역사람들하고 책 문화를 나누고픈 마음에 이 자리에서 도서관을 열려고 해요.

 도서관이라 하면, 으레 돈을 들여서 새 건물을 지어야 하는 곳,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입시공부를 하거나 대학생들이 고시공부 하는 곳쯤으로 알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진짜 도서관은 한 사람(개인)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한 가지 주제로 모아 온 책을 차곡차곡 모아서 나누는 곳이기도 하며, 돈이 없더라도 자기 살림집을 고쳐서 책꽂이를 알뜰히 짜 놓은 뒤, 느긋하게 책 하나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해요. 지금 대한민국 법률에서는, 도서관사서 자격증을 갖추고 도서관위원회를 꾸리고 무슨 시설검사에 합격을 해야만 도서관을 열 수 있다고 못박는데, 돈이 없는 사람도 책을 즐길 수 있는 곳, 동네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찾아들 수 있는 곳, 멀리서도 찾아와 지역 책 문화와 지역 사람들 삶터를 함께 부대낄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요, 이런 지역 도서관이 전국 곳곳에 하나둘 문을 열 수 있으면 좋으리라 꿈꿉니다.

 저는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주제를 내겁니다. 지난 1992년부터 하나둘 모아 온 책이 얼추 3만 권 남짓 되고, 이 책 가운데 1/8쯤이 사진책입니다. 아직 얼마 안 되는 숫자이지만, 도서관이란 ‘처음부터 모든 책을 다 갖추고 여는 곳’이 아니라 ‘새로 나오는 책과 새로 알게 된 책을 꾸준히 갖추면서 조금씩 만들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 5월 끝무렵에 모자란 대로 도서관 문을 연 다음, 이곳을 찾아오는 분들한테 좋은 생각을 얻고 도움도 받으면서, 좀더 푸근하고 넉넉한 도서관으로 가꾸고 싶습니다. 한편, “사진책 도서관”이라고 해서 사진책만 갖추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그림책과 만화책, 소설책과 어린이책, 우리 문화와 말을 다룬 책, 사상과 철학과 언론과 역사와 교육 같은 인문사회과학을 다룬 책, 책을 말하는 책, 여성과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책, 환경과 생태를 다룬 책도 함께 갖출 생각입니다. 밥 한 그릇을 먹어도 골고루 먹어야 몸에 알맞듯이, 책 하나를 즐길 때에도 여러 갈래 책을 골고루 살피고 돌아볼 수 있어야 알맞다고 느끼거든요. 사진을 찍거나 공부하는 분들한테 나라 안팎 온갖 책을 구경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사진을 이루는 밑바탕이 될 인문학과 우리 문화 소양을 일깨우는 책도 함께 보도록 하고,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땅 생태계와 환경이 어떠한지 느끼는 가운데 사진감을 찾도록 도우며, 어린이책과 문학책 들을 같이 살피면서 자기 뜻과 마음을 서로서로 더 즐겁게 나누는 길을 찾아나서도록 거들고 싶어요.

 다만, 지금은 돈과 힘과 이름 모두 없는 형편입니다. 저한테 있는 것은 여태껏 모아 온 책, 그동안 만나고 어울리던 사람들, 제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과 뜻, 꿈과 뜻을 펼쳐 나가려는 몸뚱이입니다. 털어놓고 말씀드리면, 무엇보다도 집임자한테 달세를 꼬박꼬박 낼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도서관을 연다고 해서 알아줄 사람이 있을는지, 널리 알려줄 사람이 있을는지, 도서관이 열린 줄 알고 찾아올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세 걱정, 2013년까지 이루어질 재개발 걱정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못 이룬다고, 아무 뜻도 펼치지 못한다고 느껴요. 이 도서관에 딱 한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그 한 분한테 소중한 책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면 고맙다고 느낍니다. 조그마한 꿈이든, 자그마한 실천이든,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된다고 느껴요. 백 가지를 꿈꾸었으나 한 가지만 가까스로 할 수 있겠지요. 때로는 한 가지조차 못할 수 있을 테고요. 그렇지만 저는 제가 꿈꾸고 생각한 대로 제 길을 걸어갈 생각입니다. 이루어지는 것만 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루려고 애쓰는 세월과 제 몸짓과 땀방울이 바로 꿈이라고 느낍니다. 책을 믿고 살아온 대로 사람을 믿으며 살려 하며, 사람을 믿고 살아온 대로 제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을 믿으며 살 생각입니다. (4340.5.15.불.ㅎㄲㅅㄱ)

 

글쓴이 : 최종규 /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를 인터넷방(http://hbooks.cyworld.com)에 꾸준히 올리는 한편, 《모든 책은 헌책이다》와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잡지 <우리교육> 청탁을 받고 오늘 아침 막 보낸 글입니다. 오늘이 마감이었는데, 마감에 늦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제가 살아가는 이야기 그대로 적어 놓으니, 막힘없이 술술 나오더군요. 제가 쓴 글이라서가 아니라, 글을 쓸 때에는 언제나, 자기 모습을 그대로 담으면 어려움이 없고, 자기 모습을 숨기거나 덧바르려고 하면 어려움이 가득하구나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름다운 왕따들 - 민주노동당 여성지방의원 9인의 이야기
권은정 지음, 김윤섭 사진 / 이매진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아름다운 왕따들
- 글 : 권은정 / 사진 : 김윤섭
- 펴낸곳 : 이매진(2006.2.20.)
- 책값 : 1만 원


 지난 5월 3일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이날 〈시민사회신문〉이 새로 세상에 나오는 날이라고 해서, 초대를 받고 함께했습니다. 예전에 〈시민의 신문〉으로 나오던 시민단체 연합신문이었는데, 이형모 대표가 성추행 사건을 일으킨 뒤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끝내 〈시민의 신문〉은 문을 닫게 되고, 이곳 기자들이 다시 힘을 모아 새 이름으로 새 신문을 내게 되었어요.


―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정치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요. 저기 어디 높으신 분들이 하는 게 아니지요. 사회적 약자이며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의 힘, 그게 모여 정치적인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박주미 의원 / 35쪽)


 새 신문이 나오는 자리를 빛내 줄 바깥손님이 퍽 많았습니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국회의원과 무슨무슨 단체 우두머리가 많이 보입니다. 이분들은 따로 단 위로 올라와서 축하말이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축하말과 여러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문득, ‘저이들은 〈시민의 신문〉이 힘들어하고 있을 때 무엇을 했나?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축하한다고 읊는 이야기는 얼마나 마음속 깊은 데에서 우러나올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얼굴을 내밀려고 이런 자리에 오지 않았을까요. 자기 축하말을 하고는 조금 뒤에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검은 양복 중년 사내’들. 이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단체에서 우두머리로 이름쪽을 내밀기도 합니다. 그래, 이들한테는 얼굴 내밀고 악수하고 후원금 얼마 내는 일이 ‘돕는 일’일 테지.


― 사람들은 앞에다 대고 싫은 소리 잘 안 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의원의 임무가 뭐예요? 집행부에 대해서 쓴소리하라는 게 의원의 임무 아닌가요? (윤난실 의원 / 39쪽)


 축하잔치가 마무리될 무렵, 기념사진을 찍자고 합니다. 이때까지 남은 사람은 1/10쯤? 아니 이보다 적은 숫자? 시민단체 목소리를 아우르고, 우리 사회가 한결 올바른 쪽으로 굴러가도록 하자는 〈시민사회신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축하잔치에 와야 할 사람은 다름아닌 ‘보통 시민사회 단체’ 간사와 활동가와 회원이어야지 싶은데. 시민사회 단체 대표나 총무 같은 사람이 와서 얼굴 알리기와 악수하기만 하지 말고, 정작 현장에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어떻게 하면 서로 더 어깨동무를 하며 힘차고 꿋꿋하게 싸워 나가면 좋을까를 이야기해야 알맞지 싶은데.

 하긴, 이러니까 이형모라는 옛 대표는 성추행 사건을 일으키고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이 ‘피해자인 시민단체 여성이 돈을 달라고 해서 돈을 주었다. 그러면 이 일은 다 끝난 것 아니냐?’면서 큰소리를 치겠지요. 그러면서 이 사건을 기사로 다룬 옛 〈시민의 신문〉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난리법석을 피웠을 테며, 이런 사건을 놓고 ‘굵직굵직한 사회명망가와 원로’ 들은 입을 다물었겠지요.


― 울산시에 사는 시각장애 아동들이 맹학교에 다니기 위해 부산이나 대구까지 가서 교육을 받습니다. 이들 가족은 아이 때문에 온 가족이 헤어져 사는 이산가족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입니까! 울산광역시에 맹학교 하나 없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이 작은 것을 해결하면 삶의 기본조건이 해결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무엇이 가장 우선순위에 들어가야 할 사안인지 잘 살펴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홍정련 의원 / 68쪽)


 새로 태어나는 〈시민사회신문〉에서 앞으로 무게를 두어 다루거나 살필 대목으로 ‘대통령선거’가 1번으로 들어갑니다. 대통령을 누구로 뽑느냐는 앞으로 다섯 해 동안 이 나라 살림살이가 어떻게 달라지느냐를 판가름하는 만큼 참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느낍니다. 대통령을 누구로 뽑든 그다지 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대통령으로 뽑히든 허튼 짓을 못하게’ 하고, ‘어떤 정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히든 깨끗하고 올바른 생각으로 알차게 일하게’ 할 수 있는 여론매체, 진보 목소리, 〈시민사회신문〉이어야지 싶어요. 시민운동이라면, 또 사회운동이라면 이렇게 나아갈 때 비로소 더 많은 사람과 어우러지며 힘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 그래 피하지 않겠다. 시대가 요구하는 운동이 내게로 왔다. 하고 싶은 운동만 한다면 그게 운동이겠느냐. (김민아 의원 / 146쪽)


 민주노동당 여성지방의원 아홉 사람을 만나본 이야기를 묶은 《아름다운 왕따들》을 읽고 있습니다. 이들은 몇 안 되는 목소리이며 한 줌밖에 안 되는 목소리입니다만, 자기가 몸담은 정당이나 지역의원임을 떠나서, ‘아름답고 곧은 길로 가려는 생각으로 땀흘려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시민사회신문〉도 이런 길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하게 살필 대목은 ‘어떤 현안이나 사건’보다 ‘어떤 현안이나 사건을 움직이거나 이런 현안과 사건이 뿌리내린 밑바닥’일 테니까요. (4340.5.6.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소개 잡지에 어린이책 추천하는 일을 하면서 몇 군데 출판사에서 보내주어 억지로 떠안게 된 그림책 예닐곱 권을 들고 헌책방에 갑니다. “저한테는 쓸모가 없지만, 이 책을 좋다고 느끼며 사 가실 분이 있겠지요?” 하면서 드립니다. 헌책방 아주머니가 “저희는 이렇게 드릴 수 있어요.” 하면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십니다. “어, 저는 이 책을 거저로 받은 책인데요. 여기 보셔요. ‘드림’ 도장 찍혀 있잖아요.” “저희도 책을 그냥 안 받아요.”

 하는 수 없이 만 원짜리 한 장을 받습니다. 책방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일본 손바닥책 있는 자리를 두리번두리번 살핍니다. 예전에 왔을 때 돈이 모자라서 못 산 몇 가지 책을 고르려고. 무샤고오지 사네야쓰라는 분이 쓴 《人生雜感》이라는 책, 구와바라 타케오라는 분이 쓴 《文學入門》이라는 책, 일본 어린이 노래를 살핀 책, 병상에서 아흔아홉 날 동안 싸우며 적어내린 수기를 엮은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분이 쓴 《新 文章讀本》, 오에 겐자부로라는 분이 쓴 《小說のたくらみ, 知の樂しみ》라는 책 들을 고릅니다. 책값은 8000원. 어, 그래도 2000원이 남네.

 저로서는 ‘버린다’는 책을 들고 갔지만, 외려 책 여러 권과 돈 2000원까지 얻고 돌아나옵니다. 오늘은 맑은 햇살이 내리쬡니다. 어제 비가 좀 내린 뒤인지 하늘이 살짝 맑네요. 그동안 하늘에 잔뜩 끼어 있던 먼지띠 가운데 얼마쯤이 씻긴 듯합니다. 그러면 씻겨진 먼지들은 어디로 갈까요. 흙으로? 바다로? 내로? 먼지띠는 다시 땅으로 돌아갈까요?

 문득, 우리 사는 이 땅에 가랑비가 자주 내려서, 이 먼지띠를 틈틈이 씻어 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먼지띠를 만들지 않는 삶으로 몸가짐을 바꿀 우리들 사람이 아니기에, 가끔이나마 먼지띠 살짝 걷힌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우리한테 참으로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배울 수 있도록,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지 싶습니다. (4340.5.2.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캐시 호숫가 숲속의 생활
존 J. 롤랜즈 지음, 헨리 B. 케인 그림,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캐시 호숫가 숲속의 생활
- 글쓴이 : 존 J.롤랜즈
- 그린이 : 헨리 B.케인
- 옮긴이 : 홍한별
- 펴낸곳 : 갈라파고스(2006.9.11.)
- 책값 : 12000원

 
― 자작나무 꼭대기가 푸른 하늘에 깃털 모양으로 피어나는 건 오직 5월에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144쪽)


 시골집을 떠나 도시로 왔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살림을 꾸리니 짐을 풀고 둘레 삶터에 몸을 붙이느라 바쁘고 힘듭니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살던 고향이라 한결 홀가분하고 보는 골목과 사람마다 반갑습니다. 그동안 달라진 모습, 아직까지 고이 남은 모습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해가 길어짐을 느끼고, 날씨가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천에 온 지 꼭 보름이 되는 오늘까지, 맑은 햇살을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늘 날이 우중충합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에도 파란 하늘 보기 어렵습니다. 문득, 서울은 인천보다 더 지저분하면 지저분하지, 깨끗하지 않을 테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구나 부산이나 대구나 대전이라고 해서 한결 나을 구석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얼마 앞서까지 지낸 충주 시골집에서도 비슷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시골집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하늘과 물도 더러워졌습니다. 도시로 나오니 끔찍함이 더 크군요.

 봄은 틀림없이 봄이고, 머잖아 여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봄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건 무엇일까요. 사람들 옷차림? 가게에서 내놓고 파는 새봄맞이 물건들?

 새벽바람에서도, 아침햇살에서도, 낮이나 저녁 공기에서도, 또 저녁 해거름에서도 시간흐름을 못 느끼겠습니다. 거리마다 환한 등불 때문에 별을 못 보기도 하지만, 하늘엔 워낙 먼지띠가 짙어서 달빛마저도 뿌옇습니다. 이런 하늘을 머리에 진 채, 내려다보는 땅은 시커먼 아스팔트나 잿빛 시멘트. 싱싱한 흙 한 줌, 흙에서 자라나는 푸른 풀과 꽃과 나무, 풀숲에서 살아가는 뭇 목숨붙이는 만날 길 없습니다. 인천 앞바다에서 물고기를 못 잡게 된 지는 한참 되었고, 하늘을 나는 새 또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늘어나는 것은 오로지 자동차와 아파트와 높은 잿빛 건물들. 이런 곳에서 한 해 삼백예순닷새를 보내는 우리들은 5월 1일을, 7월 1일을, 또 12월 1일을, 3월 1일을 어떻게 느낄까요. 무엇이 다르다고 느낄까요. 봄이고 겨울이고 ‘돈만 내면 봄나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값만 치르면 여름열매도 먹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몸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바뀌는 몸에 따라 마음은 어찌 되었을까요.


― 문명세계에 사는 주부들의 기준에서 보면, 인디언들의 천막집이 아주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인디언 여인들이 자연에서 얻은 모든 자원을 이용해 거처를 만들고 식량을 구하는 솜씨를 보면, 도시 아낙네들의 입이 떡 벌어질 것이다. (39쪽)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돈을 버는 몇 가지 솜씨’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밤일 즐기기? 자동차 몰기? 인터넷 검색? 텔레비전 광고 줄줄이 꿰기? (4340.5.1.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