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에서 자전거를 타고 전국 어느 곳이든 찾아가던 삶을 2007년 4월 22일로 끝마쳤다. 4월 15일에 끝마치려 했으나 이삿짐 옮기기 벅차고 22일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4월 23일부터 쓰는 자전거 나들이 이야기는 새로운 [자전거쪽지]로 이어나가려 한다.

[자전거쪽지]는 다른 곳에 꾸준히 올려놓고 있었는데, 두 번째 이야기로 펼쳐 나가게 되는 만큼, 따로 자리를 나누고 싶기도 해서, 이 자리에 걸쳐 본다. 먼저 예전 글을 틈틈이 옮겨놓아야겠군. 예전 글이라 하면, 4월 23일부터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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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반겨 준 것이란


- 네 시쯤, 도서관 책 갈무리를 그럭저럭 마치고 길을 나선다. 4월 한 달 동안 책짐 옮기느라 책 묶고, 인천으로 와서 책 풀고 하는 일밖에 못했다. 잠깐 숨을 돌리고 싶어 서울로 책방 나들이를 떠난다. 먼걸음이라고 해도 늘 가는 책방만 찾아가는 나인 터라, 또 자전거집도 늘 가는 데만 가는 터라, 서울에서 지낼 때에도 적잖이 먼 거리를 오가곤 했다. 자전거 크랭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동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기로. 표를 끊고 자동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용산 가는 전철이 들어와 있다. 부랴부랴 뛰어서 들어가니 이내 문이 닫힌다. 히유. 휠체어 자리에 자전거를 세우고 앞바퀴를 뗀다. 동인천에서 용산 가는 전철 맨 앞 칸은 사람이 안 많은 편이지만, 앞바퀴 떼어놓기는 예의라고 느낀다. 또 앞바퀴를 떼어놓을 때 흔들림이 적다. 부피 차지도 적다.

- 책을 읽다. 느긋하게 책 읽어 본 게 얼마만이냐. 신나게 자전거 타 본 게 또 언제 적 일이냐. 자전거도 타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서울 가는 길에 읽는 《캐시 호숫가 숲속 생활》(갈라파고스,2006). 139쪽에 “날이 따뜻해져서 요새는 거의 밤마다 늪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난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실제로 개구리를 본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라는 대목이 보인다. 이 책은 1947년에 나왔다. 그런데 1947년 미국에서도 ‘개구리를 직접 본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2007년 우리들은 어떨까? 개구리 우는 소리를 ‘개골개골’로 아는 사람은 많지만, 참말 개구리를 본 적 없는 사람, 만져 본 적 없는 사람이 많을까? 아무래도 그렇겠구나 싶다. 이 나라 사람 거의 모두가 살아가는 도시에는 개구리가 살 수 없으니까. 그림이나 텔레비전으로만 보겠지.

 그러고 보면, 자전거정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 가운데 하나도, 정책을 꾸리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몸소 타지 않기 때문에, 그저 운동이나 소일거리쯤으로 가끔 공원에서 자전거를 탈 뿐, 출퇴근을 하거나 일을 할 때 쓰는 자전거로 타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싶다. 또는 어릴 적 어렵게 자전거 빌리거나 얻어서 타 본 추억만 간직하고 있어서.

- 용산에서 내리다. 내리기 앞서 앞바퀴를 붙이다. 전철 칸에서는 앞바퀴를 떼는 편이 여러모로 낫고, 전철에서 내린 뒤에는 붙이고 다니는 편이 옮기기에 좋다.

 밖으로 나오다. 기나긴 계단을 내려오다. 이곳을 오갈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데, 나야 자전거를 이렇게 들고 내려오면 된다지만, 몸이 힘든 사람은 어찌하면 좋을꼬. 기차역이라는 걸 이렇게 지어 놓으면, ‘구경꾼이 멀리서 보기에는 멋들어진’ 건물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정작 기차역을 오가는 사람들로서는 다리힘이 많이 들고 고달프다. 휠체어로는 이곳을 어떻게 오르내리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동계단을 타라고? 꼭 전기를 먹는 그런 설비만 써야 하는가.

- 4월 들어 서울 시내에서 처음으로 몰아 보는 자전거. 신촌으로 넘어가야 하기에, 삼각지 네거리에서 꺾을 생각으로, 거님길로 달리다. 거님길에 물건 내놓고 간판 만드는 이들이 보인다. 자전거로 이 옆을 지나가기 까다롭다. 걷는 사람도 번거로우리라.

- 삼각지 네거리. 신호가 바뀌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느라 맞은편 차가 빵빵거리게 하는 자동차가 꼭 보인다. 건널목 푸른불이 들어왔으나 그냥 지나가며 사람들 발걸음을 우뚝 서게 하는 자동차 또한 꼭 있다.

- 마을버스고 시내버스고 자전거 곱게 지나가는 꼴을 못 보시는 듯. 아무 대꾸를 않고 조용히 왼쪽으로 비껴서 지나간다. 어차피 신호에 걸리고 정류장마다 멈춰야 하는 버스들이 왜 저렇게 거칠게 버스를 몰까. 저 버스에 탄 사람들 마음은 어떠할까.

- 큰길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내 앞으로 나와서 부릉부릉거리는 오토바이. 자전거를 오토바이 앞으로 끌고 간다. 내가 오토바이 차방귀를 고스란히 맡고 있어야 할 까닭이 없으므로.

- 동교동을 지나 홍대 전철역 둘레. 마을버스와 무단주정차 자가용과 택시 때문에 언제나 복닥이는 이 자리. 청기와주유소까지 아주 젬병. 버스들은 버스길에 차를 세우지 않고 꼭 비스듬하게 세워서 자전거가 지나가기 어렵게 한다.

- 서교동 안쪽 길. 이제 조금 마음이 놓인다.

- 서교동 단골 자전거집. 가게 앞에 닿아 가방을 내리니 등판에 땀이 흠뻑. 자전거 크랭크 말썽 생긴 곳 이야기를 하다. 크랭크 축을 이루는 곳 나사가 풀려 있다고 한다. 연장 몇 가지로 뚝딱뚝딱 맞춰 주신다. 덤으로 체인이 잘 돌아가는가 점검까지. 자전거집 아저씨 동무가 생활자전거 한 대를 짜맞추고 있다. 두 시간째 하고 있단다. 얼마 앞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 뒤, 다시 일자리 알아보기 힘들어, 무엇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이곳에 와서 자전거 조립을 배운다고.

 요 몇 해 사이에 서교동과 망원동 둘레에 새로 생긴 자전거집이 열 군데쯤이란다. 뜻이 있어 연 사람도 있겠지만, 회사에서 명퇴를 하거나 회사를 그만두게 된 뒤 남다른 솜씨나 재주 없이 차린 사람이 많단다. 고급자전거를 다루는 사람들도 많단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거품이라고, 기본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배우면서 익힌 다음에 자전거집을 차려야 하는데, 그런 게 없는 사람들이 많단다. 내가 가는 단골집은 당신 아버지를 이어서 2대째 꾸려 가는 곳. 이곳 아저씨는 열 해 남짓 꾸리고 있다. 아저씨 동무가 낑낑대며 “히야, 이거 하나 조립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네.” 하니까, “야, 십 년 차이를 하루아침에 뛰어넘으려고 하냐?” 하고 퉁.

 자전거집 아저씨가 일삯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발목띠 다섯 개 사다. 이곳 아저씨는 ‘공임 받는 게 어렵다’고 말한다. 잠깐 뚝딱 손보면 될 일은 그냥 해 주는 편이 낫다고.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일삯을 받아야겠지만, 어쩌면 이런 마음씀 덕분에 동네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잘되는 동네 자전거집을 가만히 보면, 작은 마음씀 하나로 더 큰 마음씀을 돌려받는구나 싶다.

 튜브에 바람 넣는 장비를 늘 길에 깔아 놓고 누구나 쓰도록 내놓고 있는 이 집. 언젠가 어떤 자동차가 바람 넣는 장비를 밟고 지나가서 망가진 적이 있다고. 바람을 넣은 누군가 길에다 그냥 팽개쳐 놓고 가는 바람에.

- 자전거집에 있는 동안, 이 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사내아이가 자전거 사러 오다. 그동안 두 대를 도둑맞고 세 번째로 사는 거란다. 부모는 아이한테 자전거를 잘도 사 준다. 아이는 자전거 간수를 제대로 못하고 잘도 잃어버린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전거는 어디에서 헤매고 있을까.

 자전거집 아주머니한테, “저런 아이들이라면 제가 타는 바퀴작은자전거가 더 낫지 않아요? 이런 자전거는 꼬맹이 때에도 타고 어른이 되어도 탈 수 있는데.” 하고 말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 그래요. 쟤네들은 친구들끼리, 그런 거 타면 쪽팔리다고, 이거 이거(손가락으로 숫자를 펼쳐 보이신다) 돼야 해요.” 하고 한 마디. 앞에 3단 기어, 뒤에 7∼8단 기어가 있어야 한단다. 바퀴가 크고 기어가 많아야 서로 주눅들지 않고 자전거를 탄다는 소리.

 아이는 자전거 몸통에 자기 이름 알파벳 앞글자를 매직으로 적는다. 저렇게 적어도 훔쳐갈 놈들은 훔쳐갈 테지. 스프레이 뿌려서 저 글씨를 지운 다음.

- 손질을 마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선다. 서교동 헌책방 〈모아북〉으로. 그런데 가게가 사라졌다. 엥? 자리를 옮겼나? 나중에 인터넷으로 알아봐야겠군. 연락도 없이 이렇게 옮겨 가다니(나중에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증산동 쪽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골목길을 달리다가, 지난해 12월 2일 문을 닫은 헌책까페 〈캘커타〉 앞을 지나다. 텅 빈 건물. 간판은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이 4월. 그렇다면 이 가게는 다섯 달째 빈 가게라는 셈. 건물임자 생각이 달랐겠지. 또 건물임자는 달세 제대로 못 내는 이 집을 두기보다는 다른 가게 들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이런 골목길 안쪽에 무슨 가게가 들어올 수 있으랴. 가게세를 좀 낮춰 주고, 좀더 안정성 있게 이 골목을 지켜 주도록 하는 편이 서로한테 훨씬 좋지 않았을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다음에 이 자리에 들어올 가게한테는 좋게 마음을 써 줄 수 있기를.

- 홍대 앞 〈한양문고〉에 들러 만화책 한 꾸러미 사다. 동교동 헌책방 〈글벗서점〉에 들러 가방에 책 채울 빈자리가 없도록 책을 고르다. 이제 가방에 책이 더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 책방 나들이는 끝이네.

- 홍제동 선배네 집으로 가는 길. 동교동 헌책방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큰길로 나오는데, 나올 때 내 뒤쪽 정류장에 가만히 멈춰 있던 버스가 빵빵거리기를 두 차례. 린나이 건물 앞 세거리. 내가 당신 버스가 못 가게 막기를 했나, 내 옆으로 돌아가면 길을 못 가나. 자전거가 조막만 해 보여서 그렇게 윽박질러 주고 싶으신가. 당신이 모는 버스보다 큰 덤프나 대형짐차가 더 큰 경적소리로 빵빵거리면 당신은 기분이 좋으신가. 당신은 당신보다 훨씬 큰 차 앞에서도 그렇게 경적을 울리실 수 있는가. 찻길 한쪽 구석에 얌전히 붙어서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를 고이 지켜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님길을 아장아장 걷는 아이한테 ‘뷁!’ 하고 소리 지르며 깜짝 놀래키는 마음결이라고 느낀다.

- 연남동께 지나는데 다른 버스가 또 빵빵. 달리는 자전거를 보고 빵빵거리는 저 버스들은, 버스정류장 앞에 무단주정차를 하고 있는 자동차한테도 빵빵거리는가?

- 홍제동 유진상가 옆을 지나는데 다른 버스가 또 빵빵. 미치겠군. 당신들은 빵빵거리지만, 당신들 차가 아닌 다른 차들은 내 옆을 아뭇소리 없이 잘도 지나가 주는데. 또 어떤 차는 일부러 내 뒤에서 멈춰 준 뒤, 내가 조금 넓은 길섶에 접어들었을 때 앞질러 가 주는데. 귀를 솜으로 틀어막고 다녀야 할까 싶은 생각.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니, 나를 반겨 주는 건, 버스기사들 귀따가운 빵빵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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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하는 재미를 모르니 세탁기를 쓰지요.
 밥하는 재미를 모르니 바깥밥 사먹지요.
 집 가꾸는 재미를 모르니 아파트 사서 살지요.
 걷는 재미를 모르니 자가용을 끌려고 하고요.
 골목길 누비는 재미를 모르니 자전거를 안 타게 되네요.
 배우고 나누는 재미를 모르니 책을 안 읽어요.
 사랑하는 재미를 모르니 치고받고 싸우며 제 욕심만 채우더군요.
 아름답게 사는 재미를 모르니 겉모습 매만지며 나이를 안 먹으려고 해요.
 늙어가는 재미를 모르니 죽음을 두려워하고 제 중심을 못 세우네요.
 웃는 재미를 모르니 자꾸 서양바라기, TV바라기가 되며.
 우는 재미를 모르니 이웃사랑 아픔에 등돌리더라구요. (4340.6.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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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 - 이주일, 나의 이력서
이주일 지음 / 한국일보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소개하고 싶은 책은 <뭔가 말 되네요>이다. 하지만 이 책은 판이 끊어진 지 스무 해가 되었지 싶다. 이제는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책이지만, 이 책과 함께, 이주일 님 다른 책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도 함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절판되어 사라진 책 소개글"을 적어 본다.

 


 - 책이름 : 뭔가 말 되네요
 - 글쓴이 : 이주일
 - 사잇그림 : 박수동
 - 펴낸곳 : 전예원(1985.11.15)


 이주일 아저씨, “뭔가 말 되네요”
 - 새책방에서 사라진 책 : 이주일 님이 남긴 책 하나



 〈1〉 거침없음


.. 돈으로 표 좀 긁어 모으시겠다구요? 요새 말로 참 ‘착각은 유엔 헌장에도 나와 있는 자유’라더군요. 그건 착각이에요. 돈으로 표 못 삽니다! 지위, 명성, 인기 전술로 표 좀 따 보시겠다구요? 그걸로 표가 따지면 이주일이는 국회의원 열두 번하고도 거스름이 남겠네. 딴 방법 아무것도 없어요. 국민과 같이 뛰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먹고 같이 잘 사람이 아니면 표는 면회도 못합니다. 그게 뭐 극장표라야 암표라도 사지, 어림도 없다구요 ..  〈26쪽〉


 전두환 독재가 서슬퍼렇던 때(1984~1985), 이주일 님은 이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았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돈도 못 벌고 지위도 없고 위엄도 없지만 그래도 이 이주일이를 제치고 애들의 표를 모을 수 있는 비결이 과연 뭐냐, 이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항상 애들과 아픔을 같이하고 애들의 고민거리를 귀담아 들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아껴 주고 애비가 야단칠 때는 막아 주기도 하고 변명도 해 주고 항상 애들 곁에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표를 따는 거 아니겠읍니까?(25쪽)” 하고도 말합니다.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투표를 하면 어머니와 아버지 가운데 누가 인기가 있겠느냐고 아내가 자신있게 말했다지요. 아내가 툭하면 그런 말을 했답니다. 하지만 이주일 님은 한 번도 집안투표를 하지 못했대요. 자기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아이들을 달래고 어르고 가르치고 키우고 사랑하고 아끼기는 아내가 훨씬 잘하는데, 어떻게 아이들한테 자기(아버지)를 찍으라고 하겠느냐 하면서요.

 한국사람이 길거리에 한국말 간판을 안 다는 모습을 보고는, “그 수많은 자장면집 중에 '뉴욕 자장면'이란 간판을 보셨읍니까, ‘아리랑 자장면집’을 보셨읍니까? 어느 중국집이든 그 간판은 완전히 중국식이에요.(43쪽)” 하고 말하는 이주일 님입니다.


.. 저도 LA에 가 봐서 압니다만 그건 사실이더군요. 바로 그 점입니다. 밖에 나가면 잘하실 수 있는 일을 안에서는 왜 못하느냐 이겁니다. 밖에 나가시면 우리 말 우리 글을 잘 쓰시면서 안에서는 왜 남의 것만 쓰느지 난 그게 이해가 안 돼요 ..  〈44쪽〉


 1980년대 첫머리에 쓴 글입니다. 2007년인 오늘 와서 다시 읽어도 가슴 뜨끔하면서 등골이 오싹할 만큼 날카롭군요. 아주 맞는 말이거든요. 아주 올바른 말이고요. 아주 맞는 말, 아주 올바른 말은 세월이 얼마가 흐르건 빛을 내고 힘을 냅니다. 하나도 맞지 않거나 조금도 올바르지 않은 말은 몇 해, 아니 몇 시간, 아니 몇 분 앞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쓰레기만도 못하고요. 금세 잊혀지거나 사라집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사람한테 장사를 하는 술집이고 찻집이고 옷집이고 밥집인데, 날이 갈수록 한국말 아닌 나라밖 말을 아주 쉽게 쓰고 있네요. 서울 노원구청은 아예 공문서를 만들어 동네 가게들한테 ‘간판을 영어 공용으로 바꾸라’고 지시까지 하는 판이에요.


 〈2〉 눈치 안 봄


.. 야구선수는 만사 제쳐놓고 야구를 잘해야 하고 그게 근본이에요. 그 다음에 자기가 당구를 치든 야구방망이로 타작을 하든 해야 이해가 되는 거 아닙니까? 어떤 여성이건 가정을 갖고 자식을 가졌으면 그것을 간수하는 게 첫 번째의 임무요, 그게 그분의 생활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호호호…… 내가 좀 바쁘잖아요? 그래서 엄마로선 빵점이에요. 호호호” 이 소리가 어디서 나옵니까? ..  <58쪽>


 사회생활 바쁘다고 여성이 어머니 노릇을 빵점으로 한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면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서, 사회생활 바쁘다고 남자가 아버지 노릇을 빵점으로 한다면?

 사회생활은 남자만 하는 일이 아니요, 여자들은 해서 안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낳지, 여자만 낳고 남자는 구경만 하지 않습니다. 낳은 아이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함께 키워야지 어느 한쪽에서만 키워야 하지 않아요. 다만, 이주일 님이 이 글을 쓴 때는 우리 사회가 남성 가부장 권위가 큰 때였습니다.

 세월이 묻은 이주일 님 책이라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지만,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받아들이면서, 반갑고 즐거운 모습을 반갑고 즐겁게 받아들이면 좋다고 느껴요. 글발 날리던 이주일 님이 아니고, 우리들한테 웃음 한 자락 선사하려면 이주일 님입니다. 예전 책이요, 묻힌 책이요, 잊혀진 책이지만, 이런 책 하나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으면서, 제 자신이 미처 모르고 지나치고 있을 ‘마음속 벽이나 굳은 껍데기’를 느끼며 하나둘 벗겨내 보기도 합니다. 지난날 이주일 님한테 깃들었던 아쉬움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추슬러 풀어내면 좋을까’ 생각하며 되짚고, 예나 이제나 훌륭하다고 보이는 대목은 ‘나도 이렇게 한결같음을 이어갈 수 있도록 더 애써야지’ 다짐하며 되새깁니다.


.. 만약 그렇다면 말입니다! 책 많이 읽는 사람은 수백 수천 권도 더 읽는데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 다 외우자면, 아이구! 수만 명 이름을 다 외워야겠네. 차라리 서울 시민 이름을 외우면 인사할 때 써먹기나 하지! 소설 주인공 다 외워서 어디다 써 먹을려고 그래? 더 웃기는 건…… 무슨 퀴즈 프로그램에도 그런 문제가 나와요. “노틀담의 곱추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이 뭡니까?” 이러면 삑- 부자가 울리고 스톱을 걸고…… 뭐라고 뭐라고 대답하고 점수 올라가고, 나 참! 웃기지도 않아 ..  〈88쪽〉


 어쩌면 독이 담긴 말이라 할 테지만, “어느 책에 어떤 구절 있는 거 그거 외우려고 책 읽었나? 그리고 그거 알면 유식한 건가요? 그럴려고 책 읽을 바에는 난 그 지겨운 고생해 가면서 책 안 읽겠네!(88∼89쪽)” 하고 덧붙입니다. 비아냥이라고 해도 될까요? 뭐, 비아냥이면 어떻고 독 담긴 말이면 어떻고 가벼운 비판이면 어떻습니까. 틀림이 없는 말을 꾸미거나 숨기거나 가리지 않고 말하는걸요. 남들 눈치를 보아가며 설렁설렁 말하지 않는걸요. 겉치레가 아닌 속치레를, 겉멋이 아닌 속멋을 찾아가자는 이야기를 하는걸요. 참은 참이라 말하고 거짓은 거짓이라 말하는걸요.

 좋은 모습은 북돋우고 얄궂은 모습은 고개숙여 가다듬습니다. 시샘을 하며 헐뜯지 않으며, 말꼬리를 잡으며 깎아내리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 누구나 살아가면 좋을 모습, 반가운 모습이지 싶어요.


 〈3〉 아뇨!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헌책방 책시렁에서 문득 찾아내어 재미있게 읽은 《뭔가 말 되네요》입니다. 이 책이 먼 뒷날 다시 태어날 날이 있을까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글쎄, 어쩌면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어쩌면 이대로 묻힌 채 ‘흘러간 옛책’으로만 남겠지요. 책에 담긴 속살을 캐내거나 잡아채려는 사람이 하나둘 나올 수 있는 한편, ‘이주일 같은 사람이 남긴 말이 뭐 볼 게 있겠어?’ 하며 코웃음을 칠 사람도 나올 테며, ‘이주일이 뭐 하는 사람인데?’ 하며 아예 잊어버릴 날도 다가오리라 봅니다.


.. 이렇게 중년 신사, 노신사란 말은 있지만, ‘중년 숙녀’라는 말 들어 보셨어요? 못 들어 보셨지? 그럼 여자는 중년이 되면 숙녀가 아니라 이겁니까? 나아가서, ‘노숙녀’라는 말은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어! 중년 신사, 노신사는 있는데 어째서 중년 숙녀, 노숙녀는 없느냐…… 이거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닙니까? 아, 여러분같이 말 잘하시는 분들이 어째서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갑니까? 정말 유감이에요! 여자의 명예를 찾아야 할 거 아니에요? ..  〈159쪽〉


 어떻든 좋습니다. 나중에 이 책을 알아보며 저처럼 가슴벅참을 느끼고, 두 번 세 번, 또는 네 번이나 다섯 번까지 찬찬히 다시 읽고 또 읽으며 눈물 한 방울 똑 흘릴 사람이 있어도 좋고, 이주일 님 이름 석 자를 아예 잊어버리는 세상이 되어도 좋습니다. 어느 쪽이 되든 우리 몫이며 우리 삶이니까요. 우리 길이요 우리 넋이니까요. 자그마한 것이라 해도 좋은 것 하나를 느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라면 《뭔가 말 되네요》는 참말 뭔가 말이 되는 이야기책이 될 테지요. 큰 것에만 값어치를 두지만 그 큰 것끼리도 치고박고 싸우고 물어뜯는 세상이라면 《뭔가 말 되네요》는 헌책방에서조차 찾는 사람이 없어 먼지만 먹다가 폐휴지로 버려지는 종이뭉치가 될 테지요.


(------)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
(이주일) 오늘이 제 사형날인가요?
(------) 그런가 봐.
(이주일) 할 말 없어요.
(------) 그럼, 마지막으로 담배나 한 대 피워, 자.
(이주일) 아뇨!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우스갯소리는 모두 우리 삶에서 나옵니다. (4337.4.25.처음 씀/4340.6.16.고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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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 - 원시의 자연습지, 그 생태 보고서
강병국 글, 성낙송 사진 / 지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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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원시의 자연습지 그 생태 보고서, 우포늪
- 글 : 강병국
- 사진 : 성낙송
- 펴낸곳 : 지성사(2003.1.15.)
- 책값 : 12000원


 이 책 하나 16 ― 내 깜냥대로 살면서 읽는 책
 : 《우포늪》을 차근차근 읽은 뒤



 충주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긴 지 두 달이 지나갑니다. 태어나기를 인천에서 태어나고,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인천에서 지냈으나, 그 뒤로 열 몇 해를 인천을 떠나 서울로, 충주로 옮겨다니며 살았어요. 이렇게 고향과 멀어진 채 지내고 돌아와 보니, 예전 가게가 그대로인 곳도 많지만, 길과 골목이 퍽 많이 바뀌었습니다. 재개발을 한다며 골목집을 싹 밀어붙이고 아파트가 들어섰으며, 어떤 골목집은 찻길로 바뀌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인천시장은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르기까지 중구와 동구에 있는 골목집을 모조리 허물고 아파트와 쇼핑센터로 새로 지을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아파트만이 살 길’인가요. 저잣거리에서 사입는 옷보다 20층이나 30층짜리 우람한 쇼핑센터에서 사입는 옷이 우리한테 더 보기 좋거나 아름다울까요. 복닥이는 저잣거리에서 사먹는 밥보다 40층이나 50층짜리 주상복합센터 식당거리에서 사먹는 밥이 우리 몸에 한결 좋거나 알맞을까요.

.. 일제시대 때 소벌을 한자로 쓰다 보니 뜻 그대로 우포(牛浦)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우포보다는 소벌로 더 많이 부르고 있지요. 참고로 목포(나무벌)는 비가 많이 오면 주변의 나무들이 떠내려오던 곳이라서, 사지포(모래벌)은 모래가 많아서, 쪽지벌은 크기가 작다고 해서 붙은 이름들입니다 ..  〈13쪽〉

 해가 떨어지는 저녁이 되면 날씨가 알맞게 선선합니다. 이 선선한 저녁나절에 아내와 골목길 마실을 나섭니다.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 한켠에 문을 연 도서관은 저녁 여덟 시에 문을 내리니, 밤마실 나가는 때하고 꼭 들어맞아요. 서울에서 지낼 때에는 저녁 여덟 시면 사람들이 한창 술마시고 떠들고 노는 때, 또는 헌책방에 손님이 가득할 때입니다만, 인천에서는, 또 배다리 헌책방골목에서는 저녁 일곱 시만 되면 가게 불빛이 하나둘 스러지고 조용해집니다. 뭐랄까요, 이웃나라 일본하고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일본만 해도 저녁 예닐곱 시면 가게마다 문을 닫잖아요. 저녁나절은 자기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서. 아침에는 일찍 문을 열고요. 이곳도 그래요. 아침 일찍 가게문 열고 저녁에 알맞춤하게 가게문 내리고.

 그래서 동네 골목길이 저녁이나 새벽에 참 조용합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들이 씽씽 달릴 때 내는 귀따가운 소리를 빼놓고는 시끄러운 소리가 없습니다. 거리 등불은 알맞게 어둡습니다. 이러다 보니 골목길에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드물고 술주정으로 떠들썩한 사람 찾아보기 어려워요. 뜨는 해를 보며 하루를 열고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접으니, 사람몸에는 자연스러움이 배고 더도 덜도 아닌 한가위 보름달 같은 마음을 품으며 산다고 할까요.

 좀더 늦게까지 가게문을 열면 살림돈을 더 벌 수야 있겠지만, 돈 몇 푼 더 벌면서 자기 시간을 빼앗기며 자기 삶을 놓친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조금 더 번 돈으로 무엇을 즐길 수 있을까요.

..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가시연은 멸종위기에 처한 식물로 엄격히 보호되고 있었지만,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면서 환경부의 보호대상 목록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환경은 점차 나빠지고 있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멸종 단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가시연도 언제 사라질 지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  〈24쪽〉

 보름쯤 앞서였나, 도원동 골목길부터 해서 신흥동과 유동께를 거쳐 경동과 율목동을 지나 싸리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싸리재 언덕길 한켠에 서 있는 길알림판을 보노라니 ‘밤나무골길’이라는 푯말이 보이더군요. ‘밤나무골길’? 이름은 참 좋은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아하, 그렇구나! 율목동 이름이 한자로 ‘밤 栗 + 나무 木’이네. 말 그대로 ‘밤나무골’이었구나, 이 동네가. 지금 같은 도시가 되기 앞서 예전에는, 지난날에는, 그러니까 수백 해, 아니 수천 해 또는 수만 해 동안 이곳 싸리재 둘레에는 밤나무가 많았겠구나.

 하지만 이제는 찾아볼 길이 없는 밤나무. 밤나무 없는 밤나무골 ‘율목동’. 무시무시한 막개발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고 있는 인천시장과 지역개발업자들. 공사는 나날이 끊이지 않으며, 공사비로 들어갈 수 조, 또는 수십 조는 모두 우리 주머니에서 나오고. 우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길닦기와 아파트 세우기와 쇼핑센터 짓기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라면 주민복지와 교육복지와 문화생태를 가꾸는 데에 쓰고도 남아, 대중교통에다가 택시까지도 누구나 거저로 쓸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테며, 의료혜택도 거의 거저로 받을 수 있을 텐데.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육도 돈없이 마음껏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2킬로미터짜리 길을 닦는 데에 수천 억을 들인다고 하는데, 그런 새길을 닦지 말고, 복지 정책과 문화 정책을 잘 추스른다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터전은 한결 아름답고 넉넉할 수 있지 싶은데.

.. 반딧불이는 깨끗한 환경에서만 살 수 있는 생물입니다. 공기와 물이 많이 오염된 오늘날 자연환경을 되살려 반딧불이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운동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애벌레 시기를 땅위에서 보내건 물속에서 보내건 물기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반딧불이에게 물과 공기가 더러워지는 것은 이들에게서 설 땅을 빼앗는 것과 같답니다 ..  〈55쪽〉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하는 일은 이불과 깔개를 옥상 담벼락에 널어 놓기. 해가 잘 드는 날 이불과 깔개를 내놓아 말리면, 저녁에 걷을 때 뽀송뽀송한 느낌과 햇볕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걸레로 방을 훔친 뒤 이불을 펴고 잠자리에 누우면 몸이 좋아합니다. 데굴데굴 구르며 깔개와 이불에 골고루 배어든 햇볕을 받아들입니다. 하루 내 고단했던 몸은, 햇볕 머금은 깔개를 깔고 이불을 덮으며 말끔하게 다시 태어납니다.

 굳이 이불 빨래를 하지 않더라도 개운하며, 꼭 무슨무슨 세제를 써서 빨아야 깨끗하거나 폭신폭신하게 되지 않습니다. 싱그러운 바람과 따순 햇볕이 있으니 넉넉합니다.

.. 황소개구리가 밤낮없이 우는 데 비해 청개구리와 무당개구리는 주로 밤에만 운답니다 ..  〈111쪽〉

 아내가 즐겨먹는 밥은 배추잎과 토마토. 아내가 바꾸어 놓은 제 밥상은 말랑말랑 두부와 선인장채, 때때로 달걀 반 삶은 것. 그동안 된장국에 콩나물 넣어 먹거나 된장국수를 먹곤 했는데, 이렇게 밥상을 바꾸어서 먹어도 몸에서 잘 받습니다. 아니, 이런 밥상이 더 반갑구나 싶어요. 따로 불을 피워서 끓이지 않아도 되는 밥이요 반찬입니다. 불을 피워서 익힌다고 해도 조금만 하면 됩니다.

 배불리 먹기보다는 알맞게 먹으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 밥을 차립니다. 하루에 세 끼니를 먹을 수 있으나 두 끼니만 먹어도 나쁘지 않고, 밥상에 반찬이 세 가지가 넘으면 젓가락질할 것이 너무 많다고 느낍니다. 두 가지 반찬만 올려놓아도 푸짐합니다. 꼭 김치를 담가서 먹어야 하지 않습니다. 배추잎을 물에 씻어서 먹어도 좋아요.

.. 습지는 단순히 숨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보전된 생태계나 먼 미래의 인류의 윤택한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좁은 국토를 가지고 있는 우리 나라에 습지가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  〈139쪽〉

 ‘먹는 게 남는다’는 옛말이 있는데, 어떻게 먹어야 남을까요. 무엇을 먹어야 남을까요. 누구와 먹어야 남을까요. 돈 많이 벌어 마음껏 쓰며 사는 일이 그렇게까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돈 많이 벌어 펑펑 쓰는 삶이라면, 참 딱하거나 불쌍하겠구나 싶어요. 돈을 걱정없이 쓸 수는 있지만, 돈을 쓰며 자기 스스로를 가꾸거나 이웃들하고 함께하는 즐거움은 얼마나 누릴 수 있을까요. 이웃사람은 돈 한 푼 제대로 못 쓰는데, 자기 혼자 돈을 마음껏 쓰는 일이란 얼마나 신나고 멋진 일이 될까요.

 저도 어릴 적 어느 때인가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일 할 거야’ 하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며 옅어졌어요. 돈벌어서 해야 할 일이 대단히 많더라구요. 우리 세상 어둡고 괴롭고 짓눌리고 고달픈 곳을 찾아서 풀어내려면 수십 조나 수백 조로는 턱도 없고(1980년대 어림셈으로도), 끝없는 돈으로도 안 되겠더라구요.

 일찍부터 철이 들었다기보다, 구구셈을 해 보니 그랬어요. 그래서 ‘돈 많이 벌 생각은 접자’고 마음을 바꾸었고,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새로 품은 생각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내 깜냥대로 나누며 살자’였습니다.

 책 하나를 읽어도 그때그때 내 깜냥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속으로 삭여서 몸소 해낼 수 있을 만큼 읽자고, 일 하나를 배워도 내 몸과 마음과 눈높이에 맞게끔만 익혀서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만 하자고.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기꺼이 나서서 하되, 할 수 있는 힘이 없거나 모자라다면, 하는 데까지만 하고 뒷일은 힘과 기운이 되는 이한테 맡기자고. (4340.6.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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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고향을 내발로 걸어 못가고 - 일본군 '위안부' 조윤옥, 역사의 증언 3
안이정선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일본군 ‘위안부’ 조윤옥, 가고 싶은 고향을 내 발로 걸어 못 가고
- 글 / 정리 : 안이정선
- 펴낸곳 : 아름다운사람들(2006.1.31.)
- 책값 : 12000원



 조용히 지내고 있던 동네 한복판으로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뚫겠다는 인천시장 정책에 반대하고자, 지난주에 인천시청하고 무슨 개발공단에 집회를 하러 갔을 때입니다. 이곳 공무원들은 두 가지로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첫째, 모른 척. 둘째, 낯찌푸리며 길 막기와 입 막기.

 시청뿐 아니라 구청 공무원들, 시골에서는 읍사무소와 면사무소 공무원들, 이들이 어떤 일을 하려고 움직일 때, 정작 그 일(정책)로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나서며 이야기를 듣거나 묻는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자신이 공무원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여태 한 번도 없으니까요.

 경찰은 예나 이제나, 또 앞으로나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블랙리스트’에 올릴 목적으로. 경찰 사진에 찍힌 사람은 나중에 ‘일반 회사나 공무원 사무소’에 일자리를 얻으려고 할 때 피해를 받습니다. 어떤 집회에 왜 나갔느냐는 따지지 않고.

 공무원들은 우리들이 내는 세금으로 달삯을 받습니다. 공무원들이 쓰는 모든 물품과 시설, 그리고 공무원이 깃드는 건물 또한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만들고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한테 우리들이 소리내어 말할 자리란 없습니다. 우리들이 소리내어 말한다 해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한두 번 듣는다고 해도 서류에 몇 글자 끄적이고 말 뿐.


.. 이 책은, 그러니까 조윤옥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위안부’ 피해자의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에 의해 해체된 가족으로 살다가 6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뛰어 사흘 밤을 함께 보내고 다시 기약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한 가족에 대한 슬픈 기록이기도 하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의 상처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고향방문이라는 간절한 소원을 위해, 부끄럽게도 우리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무력했듯이 해방 후 50년이 지난 뒤에도 수수방관, 속수무책으로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  〈22쪽〉


 일본군 성노예로 몸과 마음이 피멍든 분들은 정부가 아닌 바로 우리들 손으로 보듬고 껴안았습니다. 실태조사와 현지조사부터 아픔을 달래고 피해보상을 외치는 목소리까지도. 한편, 일본군 성노예로 다친 분들한테 등을 돌리거나 눈길을 안 두는 이들 또한 바로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4340.6.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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