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신문>에 싣는 글입니다. 이 글을 속으로 잘 삭이면서 받아들여 주실 분들이 꼭 한 분은 있으리라 믿으면서, 알라딘 서재에도 함께 걸쳐 놓습니다.






 
 엊저녁, 책상셈틀을 끄고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섭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들러서 책을 잠깐 구경하고 귤 세 알 얻어먹습니다. 이곳 인천 배다리를 가로지르는 ‘너비 50미터 길이 2.41킬로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종합건설본부장이 아침에 찾아와서는, ‘내년 초에 공사를 재개할 것입니다’ 하고 말하기에, 헌책방 아주머니께서 ‘여기는 인천이라고요,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곳이 아니라고요!’ 하고 외쳤답니다. 인천시 공무원과 개발업체 사람들은, 골목집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이곳을 책상머리에 앉아 길그림으로만 보면서, ‘시 재정에 도움이 안 되는 곳이라 시 재정에 도움이 될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올려세워야 한다’는 자기들 생각을 대놓고 지역신문에 말하고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나옵니다. 예닐곱 해 앞서까지만 해도 극장이 있던 터 옆으로 난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일제강점기 때 제국주의자들이 인천 항구를 거쳐 서울로 가던, 그리고 조선땅에서 빼앗은 물건을 일본으로 실어나를 때 지나다니던 쇠뿔고개길(우각로)을 걷습니다. 조금씩 살이 빠지는 보름달을 올려다봅니다. 차 다니는 길로 잠깐 나왔다가 손수레도 들어설 수 없는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창영동 골목길을 빠져나온 다음, 숭의동 달동네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이달 첫머리, 숭의동 골목집 할배 할매가 감을 따던 나무 앞에 섭니다. 까치밥 네 알 남았습니다. 뚱뚱한 사람은 지나가기 힘들 비좁은 골목을 사뿐사뿐 빠져나가고, 꽤나 비알이 져서 고양이도 굴러떨어질지 모를 길을 지나갑니다.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 굴다리 밑으로 나오니 야구장 앞. 예순 해 가까이 된 이 ‘숭의 야구장’을 2008년 1월에 허문다는 인천시장 지시사항을 들어 보면, 야구장을 허물고 축구전용구장을 짓는다는데, 여기에 쓰인다는 돈은 10조에 가깝습니다. 야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야구장 건너편에 있는 체육사로 찾아갑니다. 국민학교 적 동무가 장사를 하는 집. 어제 징허게 술을 퍼붓느라 오늘 아침 이불에서 벗어나기 싫었다는 녀석은 하루 내 갤갤대다가 이제 일 마치고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연말이면 죽어야 돼. 업체 사람들하고 주말마다 술 마셔야 하니까. 화요일까지 죽어 있다가 목요일에나 정신을 차려. 그나저나 너, 두꺼운 책 낸 거 있다며? 나중에 그것 좀 갖다 줘 봐라, 보게. 아니다, 내가 너네 집에 갈게.”

 찬바람 부는 골목으로 다시 나와서 걷습니다. 야구장 둘레에 있는 닭집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열네 살》이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옆지기는 《동 키호테의 탈출》이라는 프랑스 그림쟁이 데생책을 보면서 콜라를 마십니다. 여러모로 칭찬과 추천을 받는 책들이지만, 책방 나들이를 해서 두 손으로 집어들어 펼쳐 넘기며 우리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를 헤아리기 앞서까지는 참말로 읽을 만한지 그냥 지나쳐도 좋을 만한지 알 수 없던 책들을 안주 삼아서 술 한잔을 마십니다. (4340.11.2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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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한 비평 - 이현식 문학평론집
이현식 지음 / 작가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곤혹한 비평
- 글쓴이 : 이현식
- 펴낸곳 : 작가들(2007.6.25.)
- 책값 : 13000원



 이 책 하나 28 ― ‘어려움’을 뚫고 나온 문학평론 하나
 : 이현식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

 

 〈1〉 한일축구, 여수박람회, 겨울올림픽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벌인다고 할 때면, 열 가지 일을 제쳐놓고 축구 경기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반칙을 해도 좋으니 이겨야 한다’. 이때 저도 한 마디 대꾸합니다. “한국이 져도 좋으니, 반칙을 안 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습니다.”

 지저분하게 경기를 한다든지, 성의 없이 땀 안 흘리는 경기를 한다든지, 일찌감치 두 손을 들고 온힘을 다하지 않을 때면,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솜씨와 재주가 몹시 뛰어나다고 해도, 맞은편 선수를 깎아내리거나 얕보거나 놀린다면, 이런 선수들은 조금도 달갑지 않습니다.

 지더라도 웃어야 하고, 지더라도 땀흘려야 하며, 지더라도 다시 애써서 다음 번에 이기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늘 이겨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경기를 치르는 줄거리가 중요하지, 지고 이기고 하는 열매는 다음 차례입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즐거운 일이 운동경기요,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흘린 땀방울을 소중히 여기는 운동경기라고 느낍니다.


.. 4ㆍ19세대의 세대로서의 정체성은 온통 한글, 다시 말해 문화사적 의미에 가려 정치적 의미는 달아나 버린다. 1980년의 항쟁과 탄압 역시 김현에게 오면 ‘폭력’이라는 불투명한 단어로 바뀌어 버린다. 그가 1980년대에 했던 작업들, 예컨대 지라르에 대한 연구나 기타 그의 비평적 행위들에서 그가 폭력의 의미를 파고들었다는 점이 갖는 의의는 물론 높이 살 일이지만, 폭력이란 말은 또 얼마나 추상적인가? 그 언어로는 1980년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건 ‘폭력’이라는 보통 명사로 지칭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현은 이 대목에 오게 되면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그 특유의 열린 반성적 사유로 파악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성으로 완강하게 움츠러들어 왜곡시켜버린다 ..  〈29쪽〉


 “관람객 795만 명이 찾아 10조 원의 생산유발과 5조원의 부가가치, 15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적인 파급효과도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나 2002년 한·일 월드컵보다 파급효과가 큰 것이다.(오마이뉴스 2007.11.27.)”는 기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습니다. 올해 4월, 충주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기며 들어야 했던 소식인 ‘아시아경기대회 인천 유치’에 못지않은 씁쓸함 때문입니다.

 10조 원을 벌어서 5조 원이 남는다고 하면, 이 5조 원으로 무슨 일을 하나요. 15만 사람한테 일자리가 주어진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이들이 얻는 일자리는 무엇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일자리이며, 이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어디에서 어떻게 쓸 테며, 이 돈은 우리 자신한테, 우리 삶터에 어떻게 보탬이 되나요.

 795만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셈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만한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더 많은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이들이 묵을 잠자리는 어떻게 풀지요? 새 호텔을 잔뜩 지으면 될까요? 새 아파트를 허벌나게 올려쌓으면 될까요? 이들이 타고다닐 교통편은 어떡하지요? 이들이 먹을 밥은 또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하나요. 식량자급율이 30%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 이들한테 팔아치울 먹을거리는 죄다 나라밖에서 사들여서 시세차익 남기기로 돈벌이를 해야 하는지요?


.. 김현은 이 글에서, 적어도 저항적 폭력에 대해서는 그 특유의 맥락적 사유, 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억압당해 온 사람들의 저항으로부터 비롯된 폭력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비판하되, 그는 그것의 맥락을 열린 자세로 접근하지 못한다. 그는 드러난 폭력에만 집착한다. 그 이유는 그것 역시 억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억압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는 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전에 그것이 폭력으로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저항에 대한 왜곡이 될 수 있다. 대항 이념과 저항이 왜 개인의 자유로운 공간을 획득하려 하기보다 폭력으로 나아갔는지, 그리고 또 그것이 왜 또 다른 억압이 될 수도 있는지를 ‘사회ㆍ역사’적 맥락에서 사유하는 쪽으로 진전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억압과 폭력의 본질이 더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훨씬 더 ‘김현’다운 모습이다 ..  〈31쪽〉


 평창 겨울올림픽 끌어들이기가 여러 차례 실패했을 때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우리들한테 ‘좋은 가르침’이 베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일 곳은 어디인지, 우리가 몸을 움직일 일은 무엇인지, 우리가 가진 돈이며 시간이며 땀방울을 쏟을 데는 어디인지를 넌지시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서 900만 원을 신나게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백만 원을 벌어서 알뜰살뜰 40만 원을 쓰고 나머지 60만 원은 내 이웃이나 내 삶터 가꾸기에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이십만 원을 벌어서 이웃돕기는 하나도 못하지만 제 앞가림하는 데에 허리띠 졸라매며 쓴다고 할 때, 어느 때가 우리한테 기쁨과 눈물과 웃음과 아름다움을 베푸는 일이 될는지요.

 저는 한 끼니에 밥 백 그릇을 먹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하지만, 하루 두 끼니여도 좋고, 하루 한 끼니여도 괜찮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만 원짜리나 십만 원짜리가 아니라 해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300원이나 500원만 들어도 좋습니다. 한 잔 술값이 십만 원이나 백만 원짜리가 아닌 천 원짜리나 이천 원짜리라 해도 좋고, 동무들한테 얻어마셔도 좋습니다.


 〈2〉 우리가 살 집


 지난 토요일, 참여연대 박원순 님이 우리 일터인 도서관 나들이를 하셨습니다. 인천에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오신 김에, 〈스페이스 빔〉이라는 전시관을 찾아오셨다가,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손수 마련한 ‘시 다락방’ 구경을 하러 가는 길에 저와 만나서 들어오셨습니다. 죽 둘러보시며 도서관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느냐고 물으시다가, “책도 파나요?” 하고도 물으시기에, “여기는 도서관인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 무렵 최일수나 정태용의 민족 인식은 커다란 반향을 얻지 못했다. 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당대의 문학계나 지성계, 넓게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들의 주장 역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한 변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40쪽〉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자리한 〈스페이스 빔〉 전시관에서  금, 토, 일, 사흘에 걸쳐서 연극 공연이 있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를 뚫어서 ‘남북축 고속화도로’로 만들고, 길 둘레 살림집을 싹 쓸어내어 아파트며 쇼핑상가로 재개발하려는 안상수 인천시장 정책이 어떻게 얼마나 말썽거리인지, 우리 삶을 갉아먹는지를 살며시 들려주는 연극마당이었습니다. 이 연극마당 구경이며 일손 거들기를 마치고 신포시장에 있는 닭집으로 가서 술을 한잔 걸치며 고단함을 풉니다. 밤 열두 시 나절, 닭집 문 닫을 때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닭집 아저씨가 같이 한잔하자고 하셔서, 우리 무리도 닭집 아저씨하고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불 다 꺼지고 조용한 신포시장을 나와 뒤쪽 상가거리를 걷습니다. 1990년대 첫머리, 이곳 신포시장 둘레를 서울 명동거리처럼 꾸미겠다는 시 정책이 있어서, 크고작은 새 건물을 무던히도 짓고 옷집이며 밥집이며 술집이며 잔뜩 들어섰으나, 거의 모든 가게가 파리를 날리다가 쫄딱 무너졌습니다. 이즈음, 인천 연수동과 청학동 들에 수십만 채에 이르는 아파트를 올려세우고, 이 둘레에 있던 학교도 터를 팔아 그리로 옮기는 바람에, 이 거리를 찾아올 사람이 확 줄었거든요(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 지역문학은 자기가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활 현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70∼80년대 리얼리즘 문학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면서도 지역문학은 생활을 구체적인 자기 삶의 문제로 인식하고, 일상의 차원과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80년대 문학이 갖고 있는 한계로부터 탈출한다. 아울러 방향 없는 일상성과도 거리를 둔다는 면에서 90년대 포스트모던 문학과 스스로를 구별한다 … 인천이 갖고 있는 정서와 부산의 정서는 다르다. 자연환경도 다를 뿐더러 지역의 역사도 다르다. 자연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도 다를 수 있다. 그런 정서와 풍토들, 거기에는 그 지역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 건강성, 그것의 문제성이 주목하자는 것이다. 80년대의 열정은 지역 안에서 구체화된 현실과 만날 수 있고, 90년대 애매한 일상의 모습이 지역 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  〈59쪽〉


 ‘건설 경기’를 북돋우면 일자리도 늘고 경제지표도 올라간다며, 온갖 건설계획이며 재개발계획이 쏟아집니다만, 이런 ‘조금 묵은 집 헐고 새 시멘트집 짓기’가 언제까지나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재개발한다며 옛집 헐고 아파트 올리는 일은 참말로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길어도 서른 해를 버티지 않게 짓는 아파트 문화는, 얼마나 우리 삶을 가꾸어 줄까요. 한 집에서 대여섯 해 살기도 힘들게 하면서 자꾸자꾸 이삿짐을 꾸리게 하는 우리 사회 우리 땅에서는, 참말로 누가 집임자요 땅임자일까요.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다섯 평짜리 작은 골목집보다, 빈 방이 남아도는 쉰 평짜리 아파트가 더 살기 낫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이미지)’은 누가 심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왜 우리들이 끄달려야 하고, 우리 사회는 왜 이런 쪽으로 흘러야 하나요.


.. 나는 두 가지 현실이 지역 차원에서 보다 첨예하게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즉 중앙의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문단구조가 더욱 극명한 형태로 뿌리깊게 존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에서 지적한 가능성들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중앙문단 중심의 보수적 문인 조직은 오랜 기간 동안 조직 차원의 개혁 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그 존재 의미는 거의 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질 만큼 문학의 창조적 역량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형해화되어 버린 제도이며 조직이고 형식화된 권력일 뿐이다 … 적어도 내가 보는 한에서는 문학에 대한 열의나 능력보다는 예산과 이권의 다툼장으로 변해버린 것이 지방의 보수적 문인 조직이다. 여기에 값싼 문인 지망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세력을 만들고 파벌이 형성되면서 지방문단 조직은 권력기관이 된다 ..  〈65쪽〉


 술집에서 나와 걷습니다. 시간은 벌써 두 시, 세 시……. 몸은 고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술은 들어갔으나 얼근하지 않고, 터덜터덜 골목골목 사잇길로 천천히 뚜벅뚜벅 걷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웃하면 집안이 들여다보이는 집들,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집안 사람들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집들, 창문 안쪽 살림살이가 훤히 보이는 집들. 스무 해 앞서도, 마흔 해 앞서도, 한국전쟁 때 미군 함포사격을 맞는 바람에 새로 올린 집도 많지만 그때에도 살아남아서 고이 이어오고 있는 골목집들. ‘독립운동을 했건 일제부역을 했건’ 아랑곳하지 않고, ‘사상분자가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해서, 일부러 온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함포사격을 오래도록 한 뒤 ‘인천상륙작전’을 하느라 애꿎은 백성들, 서민들, 밑바닥 사람들, 보통사람들 목숨이 하늘하늘 사라져 가야만 했다던 그 동네 골목길을 걷습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깃들이는 집은 1957년에 지어졌습니다.


 〈3〉 날씨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어나 보니, 방 온도는 6도. 너무 쌀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살짝 보일러를 돌립니다. 보일러 돌리는 김에 머리를 감고 빨래 넉 점을 합니다. 천으로 된 시장가방은 마당 담벼락에 널어 놓고, 긴양말 두 점은 모기장 위에 얹고, 바지 한 벌은 큰방 문고리에 겁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학상 제도는 어떤 형태로건 자본과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 권위를 온전하게 확보하기 힘들다 … 우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 해서 그것을 곧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학상 수상 작품이라는 레테르가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 인지도 높은 굵직한 문학상들의 제정과 운영에 애초의 순수한 취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자본의 논리가 훨씬 더 크고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신경숙이 훌륭한 작가가 아니래서가 아니다. 조금 지명도 있고 팔릴 것 같은 작가를, 출판사마다 문학상을 수여한다는 이름으로 서로 앞다퉈가며 끌고가려는 현실이 눈에 빤히 보여 그런 것이다 ..  〈80∼82쪽〉


 마당에 나와 둘레를 둘러봅니다. 앞집 감나무는 두 알 남고 모두 털렸습니다. 감나무 임자는 몇 알 남겨 두기를 잊지 않습니다. 앞집 옥상마당에 고인 물이 살짝 얼어 있습니다. 그 옆집 옥상마당 빨랫줄에는 담요 한 장 널리고, 하늘빛은 파랗습니다. 구름 한 점 안 보입니다. 어제 그제 살짝 비가 듣더니 12월을 코앞에 둔 11월 막바지 하늘인데도 참 맑네요. 그리 쌀쌀하지 않으면서.


.. 추상적으로 규정된 개념어들이 너무 쉽게 사용되고 있어서 일단 문장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현대성’은 과연 무엇인지도 짐작하기 전에 거기에 욕망이 결탁되고, 또 그것을 비판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개념적인 용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다가 문장을 충분히 풀어쓰지 않아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은 아니다 … 나름대로 문학에 대해 공부도 하고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고 하는 내가 잘 이해하거나 납득되기 힘든 글이라면, 평범한 문학 애호가들이 대부분일 일반적인 독자들도 이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 〈98쪽〉


 겨울이 겨울 같지 않은 미친날씨가 끝나고 추위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겨울 찬비나 겨울눈도 아닌 봄비로 느껴지는 따순 비가 내렸습니다. 겨울비 내린 뒤면 더 추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따뜻해지면서 아침에는 안개도 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날씨입니다. 덕분에 보일러는 덜 돌려도 좋아 기름 걱정은 덜할 수 있겠네요. 이만한 날씨에도 보일러를 팡팡 돌린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걷지 않고, 자가용을 끌고 일터를 오간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추우면 옷을 한 벌 더 입고, 일터에 가는 시간이 늦을 듯하면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되는데.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안 먹으면 되듯이, 꽃그릇 흙이 마르는가 싶으면 물을 주고 촉촉하면 안 주어야 하듯이, 우리 삶도 있는 그대로 있는 만큼 느끼고 받아들이고 즐기면 될 텐데.


.. 이문열의 소설은 누구에게나 소설의 재미를 한껏 북돋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지식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현실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아니면 현실의 특정 부분만 확대하여 과장한다. 그의 소설들에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방향이 잡혀 있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 삶이 흘러가는 과정은 그리 문제시되지 않는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의 힘겨움, 삶이 진행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이 세밀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되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다 ..  〈289∼299쪽〉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를 넘어섭니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옵니다. 이부자리 있는 데로 맑은 햇살이 비치니, 방 온도도 조금씩 올라가겠지요. 문득, 이 햇살을 그대로 보내기 아깝습니다. 이불 둘 걷어서 앞마당으로 나갑니다. 한손으로 뭉그러 잡고 한손으로 탁탁 텁니다. 잔먼지가 하늘에 폴폴 날립니다. 벽돌 둘을 대며 담벼락에 넙니다.

 이불을 넌 자리 옆으로 까마중 한 줄기 말라 있습니다. 봄에 줄기를 올려 여름내 까만 열매를 맺은 그 까마중. 우리 집에 놀러온 분들 가운데 도시내기는 손도 대지 않은 까마중이지만, 시골내기는 “엉? 까마중이 여기서 자라네?” 하면서 덥석 따서 먹었던 까마중. 다음해에도 고 자그맣고 까만 열매를 맺어 줄까요.


.. 작품의 배경이 조선 후기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쓰여지는 작품에서 이런 식의 언어가 과연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전후 맥락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문열 소설에는 이런 식의 구투 어린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가 지닌 한문 교양을 드러내는 데는 흠잡을 데 없겠지만, 그건 권력의 언어고 억압의 언어다 ..  〈300쪽〉


 〈4〉 문학평론 한 권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을 읽습니다. 글을 쓴 이현식 님은 문학평론 등단을 한 지 열 해 만에 묶었다는 평론책 머리말에서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책을 사는 행위가 더 이상 흔한 일이 아닌 것이 요즈음의 세태”인데, 이런 문학평론 하나 내어놓는 일이 얼마나 쓸모있겠느냐며 걱정을 합니다.


.. 한국의 시민들은 도덕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공감한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도덕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우리 사회에 제기하였다 … 《난장이》를 지배하는 언어는 단문체의 도시적 언어이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말이다. 생활 속의 살아 있는 민중의 언어가 아닌, 일반화된 언어이다. 사투리도 거의 없고 비어나 속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확하고 균형잡힌, 깔끔하게 다듬어진 언어가 《난장이》를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다. 그런 언어를 통해 시민들은 《난장이》에 친숙하게 접근한다 … 독자들이 작품을 읽어가면서 이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난장이와 꼽추, 앉은뱅이라는 육체적 조건을 제외한다면 난장이들은 시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다만 경제적으로 조금 더 궁핍할 뿐이지,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다 ..  〈315∼317쪽〉


 “야, 우리 책 보러 가자!” 하는 사람은 없고, “야! 우리 영화 보러 가자!”나, “야, 우리 놀러 가자!”나 “야! 우리 술 마시러 가자!” 하고 외치는 사람만 가득한 우리 흐름입니다. 동네 꼬마들은 고무줄놀이며 제기차기는 할 줄을 모르고, 동네 어른들은 당신 눈길을 트고 마음문을 열어 줄 일거리나 놀이감과는 자꾸만 멀어지는 우리 흐름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길에서 벗어나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자리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자리에서 멀어지는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곤혹한 비평》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온갖 힘겨움을 제 몸뚱이로 껴안으면서. (4340.11.27.불.ㅎㄲㅅㄱ)


.. 문제는 서울과 지방이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체제이며, 그것을 해체하여 자유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질서를 재창출하는 것이다 ..  〈67쪽〉

 

[글쓴이 이현식 님은] 1966년 외가인 여주에서 태어나 친가인 인천에서 자랍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마치고, 1997년 〈문학과사회〉 평론 추천으로 등단합니다. (재)인천발전연구원 문화정책 연구위원을 거쳐 인천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인하대학교에 강의를 나갑니다. 《문화도시로 가는 길》, 《제도사로서의 한국 근대문학》, 《일제 파시즘 체제하의 한국 근대문학비평》 들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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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 세 시 무렵,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셋이 쪼르르 놀러오곤 합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찾아옵니다. 한 번 놀러오면 저녁 여섯 시까지 보드게임을 하거나 저희끼리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밖에 나가 돈벌이를 하고, 집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만 계시다고 합니다. 보름쯤 앞서, 옆지기가 이 아이들한테 “너희들 고무줄놀이 아니?” 하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몰라요.” 하다가는, “(만화) 《검정고무신》에서 봤어요.” 하면서 옛날 옛적 놀이로 여깁니다. 그러다가는 “전통놀이 아니에요?” 하고 말합니다. 옆지기가 아이 둘을 세워 놓고 다리에 고무줄을 걸고는, 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옆지기는 스물여덟. 어릴 적에 고무줄놀이를 퍽 즐겼다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요즘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고무줄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노는 모습조차 거의 못 봅니다. 너덧 해 앞서도, 예닐곱 해 앞서도 고무줄놀이 하는 아이들을 못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인터넷게임을 하느라 그런다는 소리도 있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인터넷게임조차 할 겨를이 없다고, 학원에 가랴, 책 읽고 느낌글 쓰랴, 글짓기 숙제 하랴, 한문 숙제와 영어 숙제 하랴, 체험학습 다니랴, 몸뚱이가 열 몇 개라도 힘들 만큼 바쁘게 돌아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서울 나들이를 하며 홍제동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옆을 지나가는데, 손바닥 만한 운동장에 아이들이 공차기를 하거나 줄넘기를 할 뿐, 다른 놀이 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없었습니다. 그 흔한 비사치기도, 제기차기도, 구슬치기도, 땅뺏기놀이도, 말뚝박기도, 얼음땡도, 술래잡기도, 오징어도, 오재미도, 자치기도, …… 아이들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어느 때부터인가 갑작스럽게 언니 오빠 누나 형한테 물려받는 ‘동네 골목길 놀이’ 또는 ‘마을 고샅길 놀이’가 자취를 감추었으니까요. 놀이가 자취를 감춘 골목길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 있는 덩치 큰 자가용이 가득합니다. 서 있는 차가 없을라치면 배달오토바이가 씽씽 내달리고 크고작은 자가용이 쉴 틈 없이 오갑니다. 학원버스는 아이들을 집과 학원과 학교 사이를 이어줍니다. 아이들은 땅을 두 발로 디딜 겨를이 없습니다. 저나 또래 동무들은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한글을 보았고, 숫자를 셌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알파벳을 보았고, 띄엄띄엄 읽었습니다. 그래도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영어 동화책을 읽었고 고등학생 때에는 영어 소설을 읽었습니다.

 웬만하게만 만들어 내놓으면, 어린이책은 손해를 보지 않고 잘 팔립니다. 나라밖 명작동화만 잔뜩 옮겨내던 흐름이, 이제는 생활동화며 우리 문화와 철학과 사회와 역사도 다루는 테두리며 넓어집니다. 이 나라 아이들 마음과 삶을 헤아린다는 ‘참 좋아 보이는’ 어린이책은 앞으로도 꾸준히 나오겠지요. 아니, 많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어쩌지요. 이 어린이책을 볼 아이들한테는 자기 삶이 없는데, 자기 두 발로 디딜 땅이 없는데. 더욱이, 어린이에서 젊은이로 넘어가는 때에 읽을 책도 없는데. (4340.11.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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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일어나서 도서관 셈틀을 켭니다. 오늘 일거리를 생각하며 차가워진 손을 비빕니다. 먼저 잡지에 넣을 사진을 출판사로 보냅니다. 인터넷신문에 기사 둘을 띄웁니다. 어제 산 책을 추스릅니다. 몸이 떨려서 청잠바를 걸칩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손이 많이 시려워서 엉덩이 밑에 집어넣고 녹여 봅니다. 한 시간 남짓 그러고 앉아 있으나 손이 잘 녹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인터넷줄 긴 것이 위층 살림집까지 닿을까 헤아려 봅니다. 천천히 풀면서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봅니다. 방까지 죽 이어 놓고도 제법 남습니다. 문 닫을 때 줄이 걸리지 않도록 문 위쪽을 칼로 살짝 도려내 줍니다. 그러고 나서 책과 노트북을 들고 살림집으로 올라옵니다. (4340.11.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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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인간 - 해나라 어린이책 8
페르난도 알론소 글 그림, 권미선 옮김 / 해나라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종이 인간
- 그림ㆍ글 : 페르난도 알론소
- 옮긴이 : 권미선
- 펴낸곳 : 해나라(2002.7.30.)
- 책값 : 6000원

 

― 대통령 후보도, 언론도, 유권자도 ‘찌질이’
[그림책이 좋다 41] 페르난도 알론소, 《종이 인간》


 

 〈1〉 빨래


 그제부터 큰 통에 담가 두고만 있던 이불을, 아침에 가루비누를 풀어서 살짝 헹군 뒤, 두 시간 그대로 두었다가 빱니다. 오른팔꿈치가 몹시 저려서 물짜기는 고되었지만 옆지기 도움을 받으며 어느 만큼 짠 다음, 마당으로 들고 나와 탁탁탁 털어서 담벼락에 널어놓습니다.

 인천으로 살림집을 다시 옮기면서 살펴본 대목 가운데 하나는 씻는방이 얼마나 넓으냐였습니다. 그동안 혼자 살아온 살림집에서는 씻는방이 없거나 아주 좁았습니다. 마음놓고 이불빨래를 할 수 없었어요. 이불빨래는 손빨래 가운데 가장 힘들다지만, 힘든 만큼 가장 즐겁고 뿌듯합니다. 어쩌면 손이 덜 가는 빨래일 수 있고, 담벼락에 널어놓고 물방울이 줄줄줄 떨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흐뭇해지는 빨래입니다. 이제 저 빨래가 맑은 햇볕을 받아 뽀송뽀송 마르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며 아주 포근하겠구나 싶어 한결 즐겁습니다.

 씻는방이 넓기를 바란 까닭은 이불빨래 때문만은 아닙니다. 뒷날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할 때 이 씻는방에서 함께 씻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이불이며 다른 빨랫감이며 바닥에 죽 깔아 놓고 함께 씻으면서 빨래를 적실 수 있고, 하나하나 아이들과 함께 손빨래를 하면서 놀 수 있겠지요. 저는 한쪽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한쪽에서 씻는방 바닥을 빗솔로 북북 비비며 닦고. 이불빨래를 때로는 바닥에 쫙 펼쳐서 손으로 비빔질을 해서 함께 빨 수도 있고.


.. 종이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어요. 그렇지만 종이 인간이 들려주는 얘기는 모두 전쟁과 갑작스런 사고나 가난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어요. 아이들은 종이 인간이 해 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주아주 슬픈 얼굴이 되었어요. 몇몇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어요 ..  〈20∼24쪽〉


 제 어릴 적을 돌아보았을 때, 이불빨래 하는 날은 밖에 나가서 동무들과 놀 수 없어서 짜증스러웠지만, 이맛살 찌푸린 채 시키는 대로 밟고 비비고 하다 보면 어느새 이맛살이 스르르 풀리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온몸이 비누거품이 됩니다. 옷을 하나둘 벗어던지고 몸씻기까지 같이하고야 맙니다. 밖에 나가 놀자던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형하고 어머니와 낑낑거리며 물을 짰고, 툇마루 난간에 이불을 쫙 하고 널면! 또는 동네 빈 담벼락이나 울타리에 널면!


 〈2〉 옷


 아침에는 모처럼 보일러를 돌려서 몸을 씻었고, 밀린 바지 빨래 석 점을 해치웠습니다. 가을 날씨까지는 손빨래를 신나게 즐기는데, 쌀쌀해진 날씨에는 손이 얼어붙기 때문에 한 점 두 점 밀리기 일쑤가 되고, 더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빨래손을 확 붙잡으면 손이 얼어붙으면서도 어느새 두 점 석 점 해치우게 됩니다. 얼얼한 손을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녹이는데, 그러면서도 웃습니다. 좋아서. 오늘은 올해 들어 두 번째로 따순 물을 썼습니다. 따순 물로 빨래하니 손도 따숩고 빨래도 금세 되고 좋네요.


.. 빨래방 간판이 보였어요. 종이 인간은 너무 좋아서 깡충 뛰었어요. 그리고는 굳게 마음을 먹고 빨래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어요. ‘여기서는 내 몸에 쓰여진 것들을 모두 지울 수 있을 거야. 그건 모두 다 아이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뿐이야’ ..  〈28∼31쪽〉


 혼잣살림을 하거나 시집장가를 가서 살림을 하거나, 제 또래동무며 손위나 손아래 동무며, 어르신들이며 모두들 빨래기계를 집에 들여놓고 삽니다. 손빨래로만 살아가는 분은 딱 한 사람 만났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호호 손을 녹이며 손빨래를 하신답니다. 그분 차림새를 보면, 멋을 아예 안 차리지는 않지만 자기 깜냥과 주제에 맞는 멋에 맞출 뿐, 구태여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더 나아갈 까닭도 없겠지요. 자기 옷차림이란 자기가 입어서 좋을 옷을 자기 몸이 좋아하는 대로 갖추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자기 옷은 자기가 빨아서 입어야 하는 만큼, 옷 아낌새도 남다릅니다. 돈 몇 푼으로 사서 입다가 유행이 지나면 재활용수거함에 휙 던지거나 ‘아름다운가게’ 같은 곳에 슥 기부하고 마는 옷이 아니거든요. 참말로 자기가 아끼며 입을 수 있는 옷, 좋아하며 즐길 수 있는 옷, 두고두고 오래오래 입을 수 있는 옷, 뒷날 자기 딸아들한테 물려주거나 좋은 동무한테 선사할 수도 있는 옷만 알뜰히 마련해서 적은 숫자로 갖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한테는 옷이 몇 가지나 있어야 할까요. 우리들한테는 책이 몇 권이나 있어야 할까요. 우리들한테는 은행계좌 남은돈이나 달삯으로 벌어들이는 돈크기가 얼마나 되어야 할까요. 우리들이 살아가는 집터는 몇 평이나 되어야 할까요.


 〈3〉 돈과 집


 우리 도서관이나 살림집에 놀러오시는 분들은 평수가 꽤 넓은 모습을 보며 놀랍니다. “돈 많이 벌었나 봐요?” “아니에요. 이 동네가 싸요. 다들 서울에서만 살려고 하고, 번화가 도심지 가까이 살려고 하고, 아파트숲에서만 살려고 하니, 자기 살림터를 넉넉하게 즐길 수 없잖아요. 흔한 말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들 하는데, 시골에 살 때에도 욕심을 안 내면 빈집을 아주 적은 돈만 치르고도 얻어서 쓸 수 있어요. 크고 넓은 집이 아니라, 온갖 물질문명을 다 갖추어 쓸 수 있는 집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을 아늑하게 다스리면서 살고 싶은 집,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많은 자기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 집, 남한테 잘 보이려는 집이 아니라 자기 몸에 알맞고 동네사람들하고도 오순도순 복닥이고 싶은 집에서 살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값도 싸면서 괜찮은 집을 마련할 수 있어요. 뭐, 서울에서 산다고 할 때에도, 집에서 전철이나 버스 타는 데까지 걸어서 십 분이나 이십 분쯤 나가야 하는 안쪽 깊숙한 데로 얻으면 싸고 괜찮아요. ‘걸어다닐’ 생각이나 ‘자전거 타고다닐’ 생각을 하면 말이에요.”


.. 그렇지만, 종이 인간이 말하려고 하자…… 그의 입에서는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종이 인간은 자신의 몸이 온통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  〈41쪽〉


 돈으로 사는 집은 돈으로 잃습니다. 돈벌이 잘되는 나라는 돈벌이로 무너집니다. 사랑으로 나누고 믿음으로 함께하며 나눔으로 웃고 울 수 있을 때, 백 해를 꽉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우리 삶일지라도 그 백 해쯤 되는 세월을 ‘나, 이 땅에서 잘살다가 떠나네. 아무 아쉬움도 없이.’ 하고 말하며 눈감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무엇을 물려받으면 좋을까요? 큰 집? 빠른 차? 넉넉한 돈? 높은 이름?

 우리들은 우리 딸아들한테 무엇을 물려주면 좋을까요? 영어 솜씨? 한문 재주? 일류대 졸업장? 예쁜 얼굴과 멋진 몸매?


 〈4〉 사진 찍기


 사진기 하나 어깨에 메고 동네 마실을 다닙니다. 예전에는 가방에 넣고 있다가 찍을 때만 꺼냈는데, 이제는 스스럼없이 어깨에 둘러멘 채 돌아다닙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찰칵찰칵 찍습니다. 다만, 언제나 대놓고 찍지는 않습니다만, 같이 어울리고 있는 자리에서는 스스럼없이 집어듭니다. “사진을 왜 찍으셔요?” “지금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요.” “아유, 나 같은 사람을 뭐 하러 찍어요?” “할머니 같은 분이니까 찍지요.” “이 쭈그렁 주름살은 나오게 하지 말아요.” “그 쭈그렁 주름살이기 때문에 곱잖아요.”

 

.. 너무 슬퍼서 다시 길을 떠났어요. 종이 인간은 도시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들판으로 나왔어요. 들판으로 나온 순간, 종이 인간은 너무 행복했어요. 종이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종이 인간은 자기 호주머니에 새 한 마리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며 활짝 웃었어요. 그리고는 들판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색으로 온몸을 물들였어요 ..  〈42∼44쪽〉


 사진기는 늘 들고 다니지만, 단추를 누를 때까지는 시간을 퍽 두어야 합니다. 기다립니다. 제 마음이 맞은편 마음 한 자리까지 스며들도록 기다립니다. 사진기를 늘 들고 다니고 있음을 맞은편에서도 느끼게 한 다음, 이 사진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그때 바로 집어듭니다.

 사진에 담기는 분들은 모두 내 이웃이요, 그분들한테 저 또한 이웃입니다. 사진에 담기는 분들은 모두 내 식구이자 동무일 수 있습니다. 그분들한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듣고, 저도 제 나름대로 제 삶을 가만히 이야기로 들려드립니다. 오고 갑니다. 가고 옵니다.


 〈5〉 《종이 인간》이라는 그림책


 그림책 《종이 인간》을 봅니다. 꼭 알맞는 길이로 글이 담겼고 그림이 실렸습니다. 어린아이들 누구나 따라 그릴 수 있을 만치 가볍게 그렸습니다. 가벼운 그림이면서도 오래도록 이 땅 아이들을 살펴보지 않았다면, 차근차근 이 땅 삶터와 세상을 헤아리지 않았다면 빚어낼 수 없었을 그림입니다. 가벼운 그림이 가장 그리기 어려운 그림이기도 할까요?

 ‘종이 사람’이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문’이기도 하고 ‘글쟁이’이기도 합니다. ‘방송’이나 ‘인터넷’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 ‘종이 사람’,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자면 ‘언론’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내고 있을까요. 이 ‘언론’에 담기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우리 삶을 헤아리고 있을까요. 우리 삶터와 세상은 얼마나 굽어살핀 뒤 담아내고 있을까요. 얼마나 이 땅 사람들 가까이 다가와서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요.

 ‘언론’에 마주하는 우리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나요. 어떤 이야기를 찾고 있나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가슴으로 받아안나요. 우리들은 ‘언론’에 무엇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우리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어떤 모습이 언론에 담길 만하다고 느끼나요.


.. 새롭고 아름다운 단어들로 머리속을 채워 나갔어요 ..  〈45쪽〉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누가누가 당선가능성이 높다느니 지지율이 얼마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넘칩니다. 지난 선거에도, 지지난 선거에도, 지지지난 선거에도, 지지지지난 선거에도 그랬습니다. 다음 선거도 마찬가지일까요? 다다음 선거도 판박이일까요? 다다다음 선거도 돌림돌림이 될까요? 다다다다음 선거도 한결같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잘산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돌아보고 내다보고 톺아보며 함께 얼싸안거나 부둥켜안거나 껴안을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통령 후보는 없을까요. 아니, 대통령 후보가 이런 말을 꺼내지 못한다면, 대통령 후보들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록 간지럽히거나 꼬집거나 들쑤실 수 있는 ‘언론’은 없을까요. 아니, 언론이 대통령 후보를 파헤치지 못하는 모습을 깨닫고는, 언론이 언론다울 수 있도록 다그치는 우리들, 백성들, 시민들, 서민들, 국민들, 민중들, 보통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4340.11.1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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