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서 제가 즐겨 찾아가는 구멍가게는 ‘충인상회(-商會)’입니다. 충인상회로 가는 길목에 ‘재영슈퍼(-supermarket)’가 있습니다. 동구청으로 가는 길을 따라 곧게 걸으면 ‘금곡제일슈퍼’가 있습니다. 이 구멍가게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금곡상회’가 있습니다. 금곡제일슈퍼 건너편으로는 ‘한아름마트(-mart)’가 있어요. 저는 ‘구멍가게’에 간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가는 구멍가게마다 ‘상회’나 ‘슈퍼’나 ‘마트’라는 이름이 달려 있습니다. 적어도 ‘가게’라는 이름을 붙인 곳은 없습니다.

 동무들하고, 또는 손윗사람이나 손아랫사람하고, 또는 이웃사람하고 술 한잔 하자며 나들이를 하곤 합니다. 이때 우리들은 ‘술집’에 가지만, 그 어느 술집에서도 ‘술집’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막걸리를 팔면 ‘주점(酒店)’이고, 맥주를 팔면 ‘호프(Hof)’입니다. ‘주점’이 ‘술 + 집(가게)’을 한자로 옮긴 말일 뿐임을 헤아려 보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옷집이 줄줄줄, 또는 다닥다닥, 또는 층층이 늘어서 있는 동대문 같은 곳을 일컬어, ‘패션(fashion)의 거리’라고들 합니다. ‘옷집거리’나 ‘옷집골목’ 또는 ‘옷가게거리’나 ‘옷가게골목’ 같은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합니다. 옷을 파니까 옷집이요, 옷을 다루니 옷가게입니다. 그렇지만, ‘패션’ 아닌 말로 이와 같은 거리나 골목을 가리킬 때에는 으레 ‘의류타운(衣類town)’입니다.

 우리 식구는 집에서 밥을 먹지만, 때때로 집 밖으로 밥을 사먹으러 마실을 나가곤 합니다. 집에서 해먹을 수 없는 밥이 먹고플 때, 이래저래 바깥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날푸성귀가 하나도 없을 때, 밖에서 밥을 사먹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밥 파는 가게”를 찾아갑니다. ‘밥집’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찾아가는 곳에는 한결같이 ‘식당(食堂)’이라는 말만 붙어 있습니다. 그나마, 보리밥을 파는 곳은 ‘보리밥집’이라 하지, ‘보리밥 식당’이나 ‘보리 식당’이라고는 하지 않더군요. 더욱이, 가게를 마련하여 밥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요식업(料食業)’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우리 사회요, 정부입니다. ‘밥일’을 한다든지 ‘밥집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는 ‘집밥’입니다. 집 바깥에서 밥을 먹을 때에는 ‘바깥밥’입니다. 뭐, 바깥밥을 먹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하나같이 ‘외식(外食)’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예부터 얼마 앞서까지 흙을 바닥으로 삼아 흙으로 벽을 올리고, 흙에서 거둔 짚이나 풀로 지붕을 이어서 살았습니다. 두 발로 땅을 디디듯이 등과 배를 흙에 깔고 잠을 이루었습니다. 흙을 만지며 일을 했고, 흙을 다루어 집을 지었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이었으니 ‘흙집’입니다. 풀로 지붕을 이었으니 ‘풀집’입니다. 그런데, 흙집이나 풀집에 살던 사람은 스스로 ‘흙집’과 ‘풀집’이라 했으나, 흙집이나 풀집에 안 살던 사람들이 흙집이나 풀집에 살던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으레 ‘토담집(土-)’이니 ‘토옥(土屋)’이니 ‘초가집(草家-)’이니 ‘초가(草家)’니 ‘초옥(草屋)’이니 하는 말을 썼습니다. 한국사람이 살던 집을 가리켜 ‘한옥(韓屋)’이라 하는데, 이 한옥에는 ‘풀집’이나 ‘흙집’은 끼어들지 못합니다. 오로지 ‘기와집’ 하나만을 한옥이라고 합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앞으로 스무 해쯤만 더 지나면, 또는 서른 해쯤만 되면, 아파트(apartment)라는 곳이 한옥이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어느 프랑스사람이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이라는 책도 한 권 써내기도 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한국 집 문화’를 말할 때에는 아파트 말고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습니다. 시골 고샅집은 죄 사라졌습니다. 박씨 집안이 쇠삽날을 밀어붙여 없애기도 했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고샅집을 볼품없이 여겼습니다. 시골이 거의 사라지고 도시만 멀뚱멀뚱 남은 오늘날 도시에서는 골목집이 집 대접을 못 받습니다. 판자집이든 나무집이든 벽돌집이든 무슨 집이든, 돈과 힘과 이름이 없이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이 옹기종기(높으신 분들은 게딱지나 성냥갑이라고 가리키셨겠지만) 모여살던 골목집은 집이 아닌 집, 문화가 아닌 문화, 삶이 아닌 삶, 도시가 아닌 도시, 동네가 아닌 동네, 이리하여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시달렸고 들볶였고 떠밀렸고 쫓겨났고 짓밟혔습니다.

 우리 식구 달삯 내며 붙어사는 집은 1957년에 지어졌습니다. 동네 다른 집과 견주면, 지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집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도 벌써 쉰한 살입니다. 쉰한 살이면 그 옛날 사회와 문화와 삶을 찬찬히 헤아릴 수 있는 집인 셈입니다. 이 집, 또 우리 이웃집들마다 깃들어 있는 사회와 문화와 삶을, 우리들 시민한테 권력을 넘겨받아서 꾸려 나가는 공무원과 시장과 정치꾼들이 얼마나 보듬어 줄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우리 깜냥껏 우리들 깃든 보금자리를 잘 추스르며 살아야지 싶습니다.

 저는 자주 못 가고, 옆지기는 부지런히 가는 ‘성당(聖堂)’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 ‘거룩한집(성당)’에서 비손을 드리노라면, 모두들 일어나서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다” 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요, 거룩한집에 모였으니 ‘거룩하다’고 노래를 부르지요. 그러하오나, 거룩함을 기리거나 받드는 이 집 이름은 ‘聖堂’일 뿐입니다. 성당에서 파는 ‘거룩한 물건(성물:聖物)’을 파는 가게 이름은 얼마 앞서까지 ‘성물방(聖物房)’이었습니다. 지난달 끝머리, 거룩한집 알림판을 새로 단다고 해서, 그러면 ‘거룩한가게’로 이름을 붙여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주 뒤 다시 거룩한집을 찾아가 보니, 말끔한 판에 깔끔한 글씨로 ‘거룩한가게’ 알림판이 붙었습니다. (4341.6.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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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편해문 지음 / 소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52 ― 골목 삶터 무너지면 아이들 놀이터는 끝장
 : 편해문,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 책이름 :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 글ㆍ사진 : 편해문
- 펴낸곳 : 소나무(2007.6.25.)
- 책값 : 12500원



 (1) 지키고 싶은 골목길


 인천 동구 금곡동 밤골목을 걷습니다. 동네 골목집이 모여 있는 한복판을 가로질러 놓으려고 하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동네사람들 월요일 모임을 마친 뒤, 옆지기와 손을 잡고 거닙니다. 저녁 아홉 시가 넘은 늦은 골목길에는 오가는 차가 드뭅니다. 아침과 낮을 헤아려 보아도, 이 길을 오가는 차는 매우 적습니다. 시내버스 한 대가 편도로 다니기는 하는데, 시내버스 지나가는 무렵 여느 차 서너 대 지나간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저녁에는 자동차가 더 적습니다. 차 없고 호젓한 밤골목을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을 여럿 봅니다. 지난해 봄부터 줄곧 보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혼자생각이지만, 이 아저씨는 회사일을 마치고 이 골목길을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나 싶습니다.

 골목길을 거닐다 보니,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이웃사람도 만납니다. 서로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합니다. “여기에서 밤에 자전거 타는 모임을 만들어도 되겠다.” 옆지기가 말합니다. “그러게. 그래도 되겠네.” 마땅한 공원도 쉼터도 없는 우리 동네이지만, 차가 뜸한 이 길을 공원으로 삼아서 자전거를 탈 수 있습니다. 골목 안쪽에서는 거리등 불빛에 기대어 배드민턴을 하고요.

 막걸리집 아저씨도 배드민턴채 둘을 늘 가게에 놓아 두고 있습니다. 우리 옆집 분들도, 또 건넛집 분들도 저녁 아홉 시나 열 시쯤이면 슬슬 골목으로 나와서 배드민턴채를 휘두릅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끼리, 아이들끼리, 아이하고 어른끼리.


.. 먹고살기 위해 남의 빨래를 해 주는 어른들 곁에서 빨랫줄 거는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이들은 일상에서, 어른들의 일 가까이에서 풍부한 놀이거리를 얻어 그들만의 놀이로 바꾸어 놀고 있었다 ..  (23쪽)


 여러 달 동안 닫아 놓고 있던 동네 닭집 ㅈ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동네에서 아저씨들 맞이하는 닭집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마음 가벼이, 홀가분하게 찾아갈 수 있기도 했고, 가게 불빛도 밝으며,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시끄러운 노래가 흐르지 않습니다(아무 노래도 안 틀어 놓으니). 길가에 차도 거의 안 다녀 조용합니다. 아주머니가 마련해 주는 닭날개는, 둘레 다른 어느 닭집에서도 구경할 수 없을 만큼 맛났습니다.

 그 닭집이 다시 열었나 궁금해서 찾아갑니다. 닭집 임자가 바뀌었습니다. “요새 닭병이다 뭐다 해서 닭은 안 팔려요. 그래서 다 버렸지 뭐.” 그러면 무슨 먹을거리가 되느냐고 여쭙니다. “도토리묵도 있고, 갑오징어도 있고.” “갑오징어로 주셔요.” “맥주 드실 거여, 소주 드실 거여?” “맥주 주셔요.” “지금 맥주가 4홉들이밖에 없네.”

 ㅈ집 새로운 아주머니는 밑안주로 오이를 썰어 줍니다. 이내 갑오징어데침이 한 접시 나옵니다. 뚝딱뚝딱 금세 마련해 주시는구나. 무척 쫄깃쫄깃합니다. 여태껏 먹어 본 오징어데침 가운데 가장 훌륭합니다.

 한 접시를 다 비울 즈음, 아주머니한테 여쭙니다. “갑오징어는 한 접시에 얼마 하나요?” “그거, 사천 원에 사 오는데, 육천 원만 줘.” “네? 그러면 손해잖아요.” “만 원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받기도 그렇고, 팔천 원씩 받고 있어. 어떤 사람은 세 접시를 먹고 가더라고. 음, 그러면 두 접시 해서 만사천 원만 줘.”


.. 인도에는 놀이터가 따로 없다. 왜냐하면 온 동네가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도 않다. 하루 가운데 노는 시간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  (46∼47쪽)


 갑오징어데침 두 접시에 맥주 두 병. 저녁참 값으로 이만 원. ‘오늘 하루 벌이를 넘겼군.’ 속으로 생각하며 걷는데, 옆지기는 이 집에서 마련해 주는 먹을거리가 괜찮다며 좋아합니다. 좋아하는구나. 하긴, 나도 좋았지. 다음에 또 가자고 합니다. 아무렴, 또 가야지. 그런데 그 ㅈ집에 찾아가는 동네사람들은 얼마나 되려나.

 동네에 이와 같은 술집이 있는 줄 얼마나 알고 있으려나. 값싸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집도 좋은 한편, 값을 조금 치르더라도 입맛이 돌게 해 주는 집도 좋음을 얼마나 느껴 주시려나.





.. 오늘날 아이들이 이 정돈된 세상에서, 이 반듯하게 잘라진 시간과 공간에서 무슨 놀이를 할 수 있는지 …… 무릎이 까지고 넘어지고 구르지 않고 어떻게 놀이와 만날 수 있단 말인가 …… 나는 이 동네를 가난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도대체 가난이라는 게 무엇일까? 가난은 스쳐지나가는 타인의 편협한 평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웃이 있었고, 이웃과 함께 해야 할 일을 했고, 아이들은 너무나 많은 놀이를 풍족하게 누리고 있었다 ..  (90, 94쪽)


 그끄제 낮, 서울 공덕동에 사는 후배가 도서관에 찾아왔습니다. 쉽지 않은 걸음을 해 준 후배는, 자기 옆짝하고 신포시장을 돌고 답동성당도 둘러보는 둥 골목길 마실을 했답니다. 저녁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공덕동 갈매기살 고기집이 늘어선 자리에 있던 〈굴다리 헌책방〉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건넵니다. 〈굴다리 헌책방〉 아주머니가 꾸리는 고기집은 그대로 있다고 하니, 헌책방 깃든 건물을 재개발 한다면서 헐어버린 듯합니다. 〈굴다리〉 아저씨는 책방 지키는 일로 보람을 느끼고 즐거움을 찾으셨는데. 그예 그 건물이 헐렸네. 고기집 늘어선 헌책방 있는 코앞까지 아파트를 짓는다며 한창 부수고 뜯고 새로 짓고 법석이었는데. 끝내 그곳 헌책방까지 재개발 손길이 뻗쳤구나.

 후배는 ‘골목이 모두 허물리는 모습을 마스크 쓰고 지켜보다가는 모두 아파트로 바뀌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후배는 자기 고향을 잃었으니까요. 자기 어릴 적 놀이터를 잃었으니까요.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떠돌아야 하는 삶을 보내야 하니까요.

 집이 아닌 부동산인 아파트 삶입니다. 고향이 아닌 돈굴리기를 하는 아파트 굴레입니다. 1억이 오르고 2억이 오른다고 좋아질 아파트 삶터이겠습니까. 그렇게 올라서 앉은자리에서 얻은 돈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서 그 돈을 쓰면서 자기 삶을 아름다이 가꾸겠습니까.

 부모 스스로 고향을 버리면서, 아이들한테 고향을 잊게 합니다. 고향을 잊게 된 아이들이 자라서 사랑하는 짝을 만나 사랑하는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될 때가 되면, 당신 손주들은 ‘내 고향은 어디야?’ 하며 묻기도 할 텐데, 이 물음에 무어라 말을 해 줄는지요. 어쩌면, 당신 손주들은 고향이 어디인지 안 묻고, 고향이 있는가 없는가는 아예 생각도 않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만한 도시내기로 태어날는지요.


.. 아빠가 물건을 고치거나, 엄마가 저녁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만큼 좋은 놀이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부모들은 집안에서의 자연스런 노동과 멀어져 있다. 이런 좋은 놀이를 놔두고 우리는 돈과 시간을 따로 들여 아이들을 놀이방으로 보내고 복잡한 놀잇감을 아이들 품에 안긴다 ..  (106쪽)


 후배를 데리고 송현동 중앙시장 길을 걸어서 지나갈 때, 저잣거리에 살고 있는 아이들 너덧이 공놀이를 했습니다. 한 아이가 배구공을 던지려고 하니 세 아이가 뒤에서 받으려고 하고, 던질까 말까 움찔움찔거리니, 던지려는 아이도 받으려던 아이도 까르르 웃으면서 자빠집니다. 이 옆을 지나가는 어른들 가운데 아이들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들 굳어 있는 얼굴로 제 갈 길이 바쁩니다. 아이들은 어둑어둑한 저잣거리 한켠에서 저희끼리 공놀이를 했습니다.


.. 학교란 무엇인가? 건물인가? 시설인가? 교사인가? 무엇인가? …… 아이들은 진짜 물건을 만지고 싶고, 사람이 말하고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싶고, 제 몸으로 춤추고 싶지만 이 모든 것을 그림으로 음반으로 프로그램으로 사진으로 만나게 해 주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교육은 아이들을 어디까지 데려갈까 ..  (153∼154쪽)


 우리 집 아이도 이렇게 놀 수 있으려나. 우리 집에 아이가 태어날 무렵, 이웃 가운데 우리 아이 또래가 있으려나. 또래가 없어도 언니오빠하고 함께 뛰어놀 수 있으려나. 학원 안 다니는 동무를 사귈 수 있으려나. 텔레비전에 빠지지 않을 만큼 한갓진, 학교 숙제와 문제집 풀이에 매달리지 않을 만큼 홀가분한, 무릎이 까지고 팔꿈치가 벗겨지더라도 울지 않고 씩씩한 동무를 사귈 수 있으려나.

 망까기를 배우고 고무줄을 배우고 고누를 배우며 술래잡기를 배우고 숨바꼭질을 배울 언니오빠를 사귈 수 있으려나. 둘째가 나오기 앞서까지는 혼자 심심하지 않으려나.





 (2) 그림 할머니를 생각하며


 옆지기는 이달로 두 달째, 동구 화평동에서 ‘평안 수채화의 집’을 꾸려 나가는 ‘그림 할머니’ 박정희 님한테 그림그리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제 아침, ‘그림 할머니’가 전화를 하신 뒤, 댁부터 우리 도서관까지 지팡이를 짚고 그림 연장 바구니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아기를 밴 옆지기를 당신 수채그림으로 담고 싶다는 할머님은, 여느 어른들은 십 분쯤이면 걸을 길을, 걷다가 쉬고, 또 걷다가 쉬고 하면서 삼십 분도 넘게 걸어서 찾아오셨어요.


.. 돈으로 아이들을 놀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아이들과 내가 함께 놀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부모들이 그립다. 놀이는 평등해야 하고, 평화를 만날 수 있어야 하고, 공짜여야 하지 않겠는가 …… 심심해야 이제 한번 놀아 볼까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심심해 할 틈도 없이 온갖 장난감을 사서 안기기에 바쁘다 ..  (160∼162쪽)


 햇빛 잘 들어오는 자리에 그림 그릴 터를 마련합니다. 그림 연장을 하나하나 풀어놓습니다. 먼저 연필로 테두리를 잡습니다. 그런 뒤 자바라에 물을 받고 물감을 풀면서 조금씩 빛깔을 입힙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손은 붓을 놀리고 입은 당신과 긴긴 삶을 함께 보낸 할아버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할아버지하고 있던 일,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나중에 옆지기가 말합니다. 할머님이 할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는가 보더라고. 따지고 보면 지금 할머님한테는 할아버님하고 예순 해 남짓 함께 사셨으니 당신 부모님보다 훨씬 오래 함께 지냈을 테고, 어쩌면 부모보다 그리울 사람이지 않겠느냐고.


.. 요즘 아이들과 놀이를 해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아이들 모습이다 ..  (197쪽)


 그런가. 그러했을까. 할머님이 날마다 온힘을 쏟으며 부지런히 그려내고 있는 이 수채그림마다 당신 온삶지기였던 할아버님한테 보여드리면서 ‘여보, 내가 오늘은 이런 그림을 그렸다우, 한번 봐주시오.’ 하고 이야기를 건네셨을까. 당신 스스로 좋아서 그리는 그림이지만, 이 좋은 느낌을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온삶지기한테, 또 딸아들한테, 또 이웃들한테 함께 나누어 주고픈 마음이셨을까.


.. 오랫동안 거리의 아이들을 보아오고 그들의 현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묻고 대안을 만들고 따듯한 시선을 길러온 사람만이 아이들 모습을 온전히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진을 찍는 내내 했다. 찍을수록 세상에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것이 거꾸로 더욱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아갈 뿐이었다 ..  (226쪽)


 이리하여 그림 할머니는 스물이 넘는 큰식구가 열 평 조금 넘을까 싶은 작은 집에서 북적북적 살아야 했던 가난한 살림을 조금도 가난으로 느끼지 않으면서 즐겁게 꾸려나갈 수 있었을까. 더구나 그 집을 당신 아버님이 해 온 일을 갈무리하는 쉼터로, 또 당신이 고이 여미어 놓은 당신 발자취를 젊은이들한테 ‘우리들(할머니, 할아버지)은 예전에 이렇게 살았다우’ 하고 당신들 삶을 고스란히 남겨 주면서 보여주고픈 뜻이었을까.


..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나는 ‘웃음’이라고 본다. 한 마디로 웃으려고 논다는 말이다. 놀이를 하는데, 그것이 전래놀이든지 민속놀이든지 요즘 놀이든지 관계없이 웃음이 없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  (250쪽)





 (3)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책


 놀이를 좋아하는 어른 편해문 님은 “놀이를 가르치려 들면 재미는 그만 달아나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한때는 나 또한 그랬다(278쪽)”고 이야기합니다. 놀이라 한다면 스스로 좋아해서 즐겨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생각해 보면, 놀이뿐 아니라 일도, 우리 스스로 좋아해서 즐겨야 합니다. 동무를 사귈 때에도, 자기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가움이 있어야 사귑니다. 마음속부터 기쁨이 느껴지는 사람이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할 때에도, 우리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꿈이 몽글몽글 솟아나야 비로소 익힐 수 있습니다. 걷기나 달리기나 자전거타기가 아무리 우리 몸에 좋다고 하더라도, 저마다 스스로 나서서 해야지, 누가 시켜서 할 수 없습니다.

 지구자원을 아끼자는 목소리야 누구나 낼 수 있습니다만, 스스로 자가용을 버리고 대중교통을 타는 데까지는, 나아가 대중교통조차 버리고 두 다리나 자전거에 기대기까지는, 스스로 즐기고 좋아할 때라야만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뜻은 훌륭해도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뜻이 거룩하여도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지칩니다.


.. 작은 골목을 없애 큰 도로를 만들고, 빈틈없이 건물이 밀고 들어와 골목도, 마당도, 조무래기 아이들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골목과 마당에서 떠밀려난 아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골목과 마당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인도의 마당과 골목에서 마음껏 내닫고 뛰고 팽이 돌리고 사방치기 하고 구슬치기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이 아이들이 이렇듯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것은 마당과 골목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  (32, 36쪽)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책은 ‘어떻게 놀아야 하나?’ 하는 이야기를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무슨 놀이를 해야 하나?’ 하는 이야기 또한 마디도 건네지 않습니다. ‘어떤 놀이가 우리한테 아름답거나 고유한가?’ 하는 이야기에는 털끝만큼도 다가서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도움이 되거나 좋은 놀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에는 아예 손을 내젓습니다.

 놀이에 앞서 삶이라고 말합니다. 놀이터에 앞서 삶터라고 말합니다. 도시에서는 골목길이고 시골에서는 고샅길입니다. 자동차 씽씽 내달리는 넓은 길이 아니라,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입니다. 경운기며 트랙터가 오갈 수 있는 한길이 아니라, 지게 이고 아이 손을 잡으며 걸어갈 수 있는 좁다란 고샅입니다.

 아파트라고 놀이를 못할 곳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아파트에서도 아파트 나름대로 놀이를 북돋울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서도 아이들 꿈을 키우고 어른들 삶을 보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아이와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울리고 있는지요. 아파트 층층대에서 얼마나 아이하고 눈을 마주치고 있는가요. 내 아이뿐 아니라 이웃 아이 이름을 어느 만큼 알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받아오는 성적표 점수나 상장 갈래 말고, 학원 이름이나 영어책꾸러미가 아닌, 아이가 온몸이 땀으로 젖도록 뛰놀고 싶어하는 놀이감이 무엇인 줄을 한 번이나마 헤아려 보셨나이까.


.. 놀이보다 중요한 것은 놀이를 서로 오래도록 하다 보면 생기고 쌓이고 오고가는 따뜻한 사랑과 이해와 우정이다 …… 또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음을 깨우친다 ..  (280쪽)


 설거지는 짐이 아닙니다. 짐이 아니기에 기계에 맡길 수 없습니다. 빨래도 짐덩이가 아닙니다. 짐덩이이 아니기에 기계한테 도맡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밥하기는 짐꾸러미가 아닙니다. 짐꾸러미가 아니기에 기계 단추만 눌러 놓을 수 없습니다. 모두 몸소 합니다. 모두 품과 시간을 들여서 손수 합니다.

 설거지도 빨래도 밥하기도 일이기에 제 몸을 움직여서 합니다. 설거지도 빨래도 밥하기도 일이면서 놀이가 되기에, 저와 옆지기는 함께 즐깁니다. 설거지와 빨래와 밥하기, 여기에 집치우기와 씻고 닦기와 쓸고 가지런히 하기 또한 일이면서 놀이입니다. 앞으로 아이가 커 가는 동안, 서로서로 알맞춤하도록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와 집안 치우기를 할 생각입니다. 아니, 아이가 우리와 살아가는 한식구이니 저절로 함께하게 될 테지요.

 억지로 사귀는 이웃이 아니라, 오순도순 사귀는 이웃입니다. 잇속을 챙길 수 있기에 만나는 이웃이 아니라, 주고받는 사랑이 있기에 만나는 이웃입니다. 옆에 있으니 그냥저냥 어울리는 이웃이 아니라, 옆에 있으니 이 동네를 작은 힘 보태어 함께 지키거나 가꾸고 싶어서 어울리는 이웃입니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라는 책이름처럼, 아이들은 놀려고 세상에 왔습니다. 놀려고 온 아이들은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며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되는 동안 자기 놀이가 일이 되고, 자기 놀이터가 일터가 됩니다. 자기 놀이동무는 자기 일동무가 되고, 자기 놀이감은 자기 일감이 됩니다. 놀이를 하는 마음이 일하는 마음으로 되고, 놀이를 하던 매무새가 그대로 일하는 매무새가 됩니다. 언니오빠한테서 배운 놀이를 동생한테 물려주듯, 앞사람한테서 배운 일을 뒷사람한테 물려줍니다. 언니오빠한테서 사랑과 믿음을 받았으면, 동생한테 사랑과 믿음을 이어줍니다. 앞사람한테서 땀과 눈물과 웃음을 받았으면, 뒷사람한테 땀과 눈물과 웃음을 건네줍니다. 언니오빠한테서 주먹다짐과 욕질을 배웠으면, 동생한테도 주먹다짐과 욕질이 돌아갑니다. 앞사람한테서 돈굴리기와 대학졸업장 따위를 익혔으면, 뒷사람한테도 돈욕심과 졸업장열병만 가르쳐 줍니다. (4341.6.12.나무.ㅎㄲㅅㄱ)

 



[편해문]


 1969년에 서울 사당동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 들어가 옛 아이들 놀이와 노래와 옛이야기를 공부하며 놀이에 신이 들린다. 산동네 골목을 누비며 신나게 놀았던 어린 나날이 오늘을 살아가는 힘임을 깨닫고, ‘어린이 놀이노래이야기 연구실 〈씨동무〉’를 꾸려, 아이들 놀이와 노래와 옛이야기에 목마른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아이들과 교사와 부모님과 놀면서 살고 있다.


 한편, 공부에 시달리며 집에 학교와 학원으로 맴돌이하는 아이들한테는 놀 틈도 놀 터도 없음을 아프게 느끼게 된다. 틈과 터가 막힌 답답한 현실이 인도라는 땅으로 가도록 이끌었고, 다섯 해에 걸쳐 네 차례 인도를 드나들었다. 이러는 동안 놀이에 흠뻑 빠진 아이들마다 넘치는 생명력과 창조력을 보여주었고, 무엇이 우리 아이들한테서 이 생명력을 앗아갔을까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들과 더 잘 놀고자 하는 꿈으로, 지금은 부산대학교 유아교육과 박사과정을 다닌다. 앞으로는 ‘세계 어린이 놀잇감 도서관’을 만들 꿈을 꾸고 있다.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생태유아공동체’, ‘어린이도서연구회’에 힘을 보태면서 ‘선재학교’ 운영위원으로 일한다.


 그동안 《동무 동무 씨동무》(1998), 《가자 가자 감나무》(1998), 《옛 아이들의 노래와 놀이 읽기》(2002), 《어린이 민속과 놀이문화》(2005), 《산나물아 어딨노?》(2006), 《문경의 어른과 아이들 노래를 찾아서》(2008), 《깨롱깨롱 놀이 노래》(2008) 같은 책을 써냈다.

 인터넷방은 http://cafe.caum.net/for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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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걸었다 - 2007년 10월 고도원의 아침편지 추천도서
김종휘 지음 / 샨티 / 200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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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으로 할 수 없는 여행, 돈으로 가꾸지 못하는 삶
 [잠깐 읽기 5] 김종휘, 《아내와 걸었다》



- 책이름 : 아내와 걸었다
- 글ㆍ사진 : 김종휘
- 펴낸곳 : 샨티
- 책값 : 13000원



 (1) 여행, 걷기, 삶, 돈, 집


 옆지기하고 ‘먼 나들이’를 하기로 했으나, 좀처럼 짬을 못 내고 있습니다. 금ㆍ토ㆍ일에 도서관 문을 열어 놓고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동네를 하루빨리 재개발과 재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쓸어내 버리고 싶어하는 인천시장과 개발업자하고 싸우는 일을 거드느라 이틀이나 사흘쯤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 일도 못하는 판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없다고 해서 일손이 줄어들거나 모자라지 않겠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막상 여러 가지 일이 닥치다 보면, 참말 일손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를 글로 남겨 주는 사람도 없고, 그보다 자질구레한 온갖 일을 맡아 주는 ‘한 사람 손길’이 그립곤 합니다.

 몸이 더 무거워지기 앞서 다문 이틀이나 사흘이라도 맑은 숨과 따순 볕을 누릴 수 있는 곳에서 지내 보고 싶은데, 다른 일거리 걱정이 없이 자전거를 달리고 싶기도 한데, 풀숲이 우거진 그늘에서 실컷 단잠을 자 보고 싶은데, 내리쬐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흙길을 걸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마음이 바쁜 탓일 테지요. 스스로 느긋하지 못한 탓일 테지요. 바쁘다는 말은 핑계이고, 떠날 마음이, 움직일 마음이, 돌아다닐 마음이 없거나 얕은 탓일 테지요.


..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 웅크리고 살다가 34층 고층으로 뛰어올라 한강 야경을 누리며 살았을 때, 그리고 그 집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다시는 되돌리기 어려울 어떤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아프지 않을 집, 숨쉴 수 있는 집, 같이 꿈꾸는 집, 덜 벌고 덜 쓰며 나를 충족하고 나를 살릴 수 있는 집으로 한 발씩 나아가는 일이었다 ..  (239쪽)


 모자라나마 낮 나절에라도 한 시간 남짓 동네 골목길 마실을 합니다. 저녁 나절에도 한 시간 남짓 골목길을 떠돌곤 합니다. 흙이 아닌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발라진 길이긴 하지만, 한 층짜리 집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을 거닐면서, 차소리가 아닌 사람 사는 소리를 듣습니다. 창가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와 이야기 소리와 도마질 소리를 듣습니다. 때때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여름임에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순 넘은 나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일흔 여든 넘은 분들이 많이 사는 오래된 동네이다 보니, 여름에도 보일러를 돌리며 방을 데웁니다.


.. 온전히 하루 이상을 걸어 본 사람이라면 걷기를 조금씩 길게 거듭할수록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배낭 속 목록이 하나둘 줄어가면서 몸과 마음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맛, 불필요하게 불었던 살이 쪽쪽 빠지는 기분, 보잘것없는 한 가지라도 짐을 줄이면 몸과 마음은 환히 빛난다 ..  (20쪽)


 골목길을 거닐며 골목집 담벼락을 쓰다듬기도 하고, 늘 대문 바깥, 울타리 따라 나란히 놓아 둔 꽃그릇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새벽에 들여다볼 때, 낮에 들여다볼 때, 저녁에 들여다볼 때, 밤에 들여다볼 때 모두 다릅니다. 빛줄기에 따라서, 또 거리등 불빛에 따라서 생김새도 모양새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골목길 앵두나무가 좋아서 마냥 사진만 찍었는데, 그제 앵두나무 열매를 다시 보려고 그곳으로 갔더니 그새 아직 덜 여문 열매까지 따 버리고 없더군요. 덜 여문 열매까지 따 간 모습을 보면, 나무 임자가 그러지는 않았을 테고, 몰래 훔쳐서 먹는다고 해도, 덜 여문 열매는 남겨 놓아야지, 원.


.. 바닷가 마을에서 본 아이들은 아무도 똑바로 걷지 않았다. 왔다갔다 제멋대로 걸었다. 살아 있는 제 몸에 맞게 움직이며 길을 걸을 줄 알았다. 그런 아이를 데려다가 줄 맞추게 하고 일렬로 걷게 훈련시키는 학교를 오래 다녀선지, 또는 운전을 시작한 다음부턴지, 나는 직진의 대로를 직선 코스로 가는 것만이 길인 양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해안가의 길도 대부분 곧고 넓게 뻗은 길이 차지하고 있었다 ..  (90∼91쪽)


 골목집마다 기름보일러를 많이 씁니다. 기름이 도시가스보다 훨씬 비싸기는 하지만, 가스보일러로 바꾸랴, 도시가스를 신청하랴, 뭐 하랴 해서 들어가는 목돈을 엄두를 못 내고 그대로 쓰는 집이 제법 됩니다. 또한, 세들어 사는 사람으로서도 목돈 들여 바꿀 꿈을 못 꿉니다. 집임자는 굳이 자기 돈 들여서 바꾸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름보일러조차도 들이기 힘든 집은 연탄을 땝니다.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신흥동에는 아직도 잘 돌아가는 강원연탄 공장이 있고, 이웃 동네에서도 연탄 때는 집이 퍽 많습니다.

 나중에 골목집이 모두 허물리고 30층이 넘는 아파트로 바뀌어 버린다면, 그때 비로소 이 동네에도 도시가스가 들어오리라 봅니다. 지금 있는 이 집들 그대로 간직하고 가꾸어 주기보다는, 집장사와 땅장사로 시세차익을 얻는 데에만 마음을 쏟을 지역정부일 테지요. 삶을 사람들 어울림이 아닌 돈흐름으로 재고들 있으니까요.

 나라에서는 ‘경제성장율’을, 우리들은 ‘월급봉투 두께’에 더 눈길을 두고 있어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지 않아도, 극장에 가지 않아도, 또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들은 얼마든지 문화를 누리거나 즐기거나 기쁨으로 가득할 수 있는데, ‘문화복지’를 동네 스스로 일구어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요.

 자그마한 꽃그릇 하나 돌보고 푸성귀를 손수 심어서 뜯어먹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며 문화입니다. 공원에 갔다가 매발톱꽃이 지고 꽃씨주머니가 여문 모습을 보고는 이 꽃씨주머니를 톡톡 따다가는 주머니에 챙겨 넣고 집에 와서 비어 있는 헌 그릇을 찾아 흙을 퍼 온 뒤 이듬해에 여기에 심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자 문화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무얼 먹을까 생각하면서 저잣거리에 장바구니 하나 들고 가서 나물 천 원어치 두부 천 원어치 양파와 감자 천 원어치씩 사다가 찌개 하나 끓여서 두어 식구 함께 먹도록 밥상을 차리는 일도 문화입니다. 삶이면서 문화입니다.


.. 돈을 냈으니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손해 보지 않겠다는 기분 때문에 엄청나게 물을 낭비했다. 식당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시켰다가 기대에 못 미치면 화가 났다. 돈 버리고 입 버렸다는 감정에 쉽게 휩싸였다. 그 기준은 돈이었다. 돈 낸 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 ..  (128쪽)


 임금님 수라상만 문화이겠어요? 임금님 수라상만 ‘우리네 옛 밥 문화’이겠어요? 여느 사람들 된장찌개 올려놓은 밥상도 어엿한 ‘우리네 옛 밥 문화’입니다. 우리가 가꾸는 문화, 곧 전통이고, 우리가 일구는 삶, 곧 역사입니다.
 

 (2) 《아내와 걸었다》라는 책을 덮고


 ‘먼 나들이’는 못하고 ‘가까운 나들이’만 하고 있는 몸. 오랜만에 찾아와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눈 형은 “아, 제주도나 가 볼까?” 하면서 기지개를 켰습니다. “제주섬이라? 좋지? 좋겠네. 부럽네.” 제주섬 앞바다 파아란 물에 발을 담그고, 아니 몸을 담그면 얼마나 시원하고 개운할까. 흑흑흑. 제주시에 깃든 헌책방 〈책밭서점〉에 찾아가면 헌책방 아저씨가 오랜만에 찾아왔다고 반기면서 ‘한라산물순한소주’에다가 회 한 접시 먹자고 하실 텐데. 엉엉엉. 사진쟁이 김영갑 님이 온삶을 바쳐 누볐던 오름 아무 데나 한 곳 찾아가서 뒹굴뒹굴 구르면서 놀 수 있을 텐데. 아이고아이고아이고.

 마음은 구만 리도 아닌 백만 리이고. 몸은 4층집 씻는방에서 빨래를 북북 비벼서 빨고. 집 옆으로 지나가는 전철 소리를 들으면서 햇볕에 빨래를 널고.


.. 뭐해? 와 봐! 뭔데? 어느새 아내는 쪼그려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가지 않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끔 가 보거나 잠시 뒤에 전해 들으면 별것 아니었다. 민들레거나 이름 모를 풀꽃이었다. 불가사리나 이름 모를 조개껍데기였다. 그 자리마다 어김없이 야아- 하는 아내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  (196쪽)


 내 몸은 ‘먼 나들이’ 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담긴 책을 펼치면서 입맛을 다십니다. 쩝쩝쩝. “그냥 어느 날이었다. 답답했다.”면서 길을 떠난 이야기를 묶어낸 책 《아내와 걸었다》를 읽습니다. 그리고 덮습니다.

 이 사람은 좋겠네. 그냥 어느 날 답답해서 길을 나설 수 있었으니. 더구나 자기가 길을 나선 이야기를 책으로까지 낼 수 있었으니. 게다가 혼자도 아닌 짝꿍도 함께 손잡고 다녔으니.

 넨장. 안 되겠군. 나도 자전거를 타고 조금 멀리 나들이를 해야겠다. 조금 멀리라고 해 보아야, 요기 인천 동구에서 남구까지, 또는 부평구까지, 또는 시청 앞까지, 또는 수봉공원이나 연안부두까지일 테지만. (4341.6.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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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헌책방에는 책이 참 많습니다. 낯익은 책도 많고 낯선 책도 많습니다. 볼 만한 책도 많고 손길이 가는 책도 많으며 골라들게 되는 책도 많습니다. 인천에도 헌책방이 몇 군데 있고, 쏠쏠히 책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울에 있는 헌책방을 찾아간 다음에 헤아려 보면, 인천에는 ‘책이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구나 싶습니다. 부산에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있고, 서울 아닌 곳에도 제법 큼직하게 꾸려 나가는 헌책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 골목길 안쪽에 조그맣게 꾸리는 곳에 드나드는 책 가짓수가 한결 많거나 넓거나 깊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서울로 몰려들까요. 책 하나를 놓고도 이렇다면, 책 아닌 대목에서 서울은 얼마나 많이많이 껴안고 있는 셈일까요. 서울에서 누리는 문화는 얼마나 너르고 많고 깊을까요. 이리하여 서울 아닌 곳에서는 얼마나 조금만 껴안고 있는 셈이며, 서울 바깥쪽 사람들은 얼마나 조금만 얕게만 몇 가지만 어줍잖게 누리고 있는 셈인가요. (4341.6.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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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해 동안 사랑받을 만한 책을 엮겠다고 생각하는 책마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천 해 동안 사랑받을 만한 책을 묶겠다고 생각하는 책마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니 천 해나 백 해는 꿈꾸지 말고, 쉰 해쯤이라도, 아니 서른 해쯤이라도, 아니 스무 해, 아니 열 해쯤이라도 사랑받을 만한 책을 펴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쩌면 한 해가 채 지나지도 않았으나 고침판을 내야 할 만큼 책을 엮지는 않는지. 어쩌면 새로 펴낸 그때에만 반짝 팔아치운 뒤 또다른 책을 새로 펴내며 그때그때 반짝반짝 팔아치울 마음은 아닐는지. 출판사 도서목록에는 수많은 책이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이리하여 출판사 햇수가 길어지면서 도서목록은 두꺼워지고, 알음알이하는 작가가 늘어나지만, 자기 출판사 일꾼조차도 자기 출판사에서 낸 책을 찬찬히 읽고 아끼면서 둘레사람한테 두루 소개하고 나누는 일은 못하고 있지 않을는지. (4341.6.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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