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의무 - 정의당 이정미 정치산문집
이정미 지음 / 북노마드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4.26.

까칠읽기 66


《정치의 의무》

 이정미

 북노마드

 2019.11.11.



‘젊은순이’가 늘어나야 벼슬판(정치)이 바뀌지 않는다. 똑같이 젊은돌이가 늘어난들 벼슬판이 바로잡히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으로 돌본 아줌마’가 늘어나야 벼슬판이 바뀐다. ‘아이를 돌본 아줌마’ 곁에 ‘아이를 돌본 아저씨’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면서 일을 해야 나라도 벼슬판도 바꿀 수 있다. 나이만 적은 사람이 아무리 늘어난들 새나라로 안 나아간다. 삶은 나이만으로 짓지 않는다. 삶은 오직 사랑으로 가꾸는 살림길로 짓는다. 그런데 보라, 이 나라 벼슬판은 ‘아이를 돌본 적 없는 꼰대 아저씨’만 우글거린다. 이 나라 벼슬판에는 아직 ‘아이를 돌본 아줌마’조차 없다시피 하다.


젊은이란 새롭게 나아가는 사람이기보다는, 새롭게 부딪히며 배우는 사람이다. 아줌마란, 새길을 모조리 부딪히며 하루하루 자빠지고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아프다가도 스스로 눈물웃음을 찾아내어 사랑을 일군 어른이다. 이른바 이 나라 벼슬판이 와장창 박살이 난 까닭이라면, ‘어질고 아름다운 아줌마’를 안 품는 탓이라고 해야 할 만하다.


이정미 씨가 쓴 《정치의 의무》를 읽다가 놀란다. 먼저, 이이가 부산에서 태어나서 인천에서 어린날을 보냈다는데, 내가 어린날을 보낸 마을하고 겹친다. 나는 도화동과 송림동과 숭의동과 송학동 언저리를 골목집 하나하나까지 발바닥에 담으면서 살았다. 다만 이 책에는 작은마을 작은집 이야기는 한 줄조차 없구나. 이정미 씨는 골목집에서 살아 본 일이 없을까? 다음으로, 이이는 1984년에 서울 한국외대에 들어갔다가 그만두었다는데, 나는 1994년에 서울 한국외대에 들어갔다가 그만두었다. 이이는 노동운동을 하려고 그만두었다면, 나는 사람답게 일하며 살고 싶어서 그만두었다.


서울에서 그냥그냥 대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잘 모를 수 있는데,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어서 다닌 일’이란 ‘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요사이는 좀 바뀌었을 만하지만, 2010년 무렵에도 이러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으면 큰고장인데도 걸개천을 붙였다. 우리 아버지도 걸개천을 붙이고 싶어했기에 너무 창피해서 말렸지만, 인천에서 마친 고등학교에서는 붙였기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268쪽짜리 책인데 빈자리가 너무 많다. 134쪽이나 70쪽으로 낼 만한 작은책을 두세 곱으로 부풀렸다. 바른길(정의당)을 밝힌다는 사람으로서 종이를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나? 바른길이란 ‘그들’이나 ‘저들’하고 다르게, 푸른길을 헤아리면서 온누리를 고루 알뜰히 품는 삶길이어야 하지 않은가?



남성들은 얘기한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하지만 나는 남성들이 불편함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다. 그 불편함 속에서, 그동안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 내면화된 여성혐오를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것이 불편하다는 태도로는 현재의 젠더위계에 눈을 감아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어떠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 한다. (97쪽)



이정미 씨는 한참 잘못 본다.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가 아니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다. 때린놈이 때린놈(가해자)이고, 맞은이가 맞은이(피해자)이다. 아직 때리지도 맞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미(잠재적)’라고 붙여서는 안 될 노릇이다. 박정희는 온나라 사람한테 손그림(지문)을 받는 틀을 1962년에 세웠다.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본 군사독재 사슬이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른길(정의당)에 서려는 일꾼이라면, 사람을 갈라치기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잠재적 범죄자’로 찍지 않는 눈을 틔울 노릇이다. 일본에 일본한겨레(재일조선인)한테 ‘외국인등록 지문강요’를 오래도록 일삼으며 괴롭혔듯, 이 나라가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며 괴롭히는 짓을 이제라도 멈추고 끝장내는 일부터 마음을 써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나라이든 돌이만 있으면 망가지고, 순이만 있어도 망가진다. 순이돌이가 어깨동무하면서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일구는 작은살림을 누릴 때라야, 작은집이 작은마을로 잇고, 작은마을이 작은고을과 작은고장으로 뻗어서, 작은나라를 이룬다. 그저 사내라는 몸으로 태어났을 뿐인데 “넌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야!” 하고 못을 박으면 쌈박질만 일어난다. 거꾸로 “넌 태어날 때부터 눌려야 해!” 하고 바보짓을 해도 쌈박질일 뿐이다. 둘 다 걷어낼 적에 비로소 어깨동무(평등·평화)이다.


갈라치기로는 아무것도 못 바꾸면서, 늘 쌈박질만 불거지고, 이 쌈박질이 더 크다가는 끝내 서로 불(분노)에 휩싸여 다같이 죽는다.



한국 진보정치 1세대는 권영길, 강기갑, 고(故) 노회찬 전 의원, 심상정 의원으로 상징된다. (49쪽)



뭔 소리인가? 우리나라 ‘진보정치 1세대’는 조봉암이지 않은가? 진보정치 2세대는 ‘장준하’이고, 진보정치 3세대는 ‘백기완’이지 않은가? 이처럼 조봉암과 장준하와 백기완이 밑바닥에서 하나하나 몸을 바치다가 조봉암과 장준하는 이승만과 박정희한테 목숨을 빼앗겼고, 백기완이 늘그막까지 애쓴 땀방울이 씨앗이 되어서 권영길·강기갑·노회찬·심상정에 이르는 ‘진보정치 4세대’가 태어났다고 보아야 맞다. 앞선 진보정치 ‘1∼3세대’가 모조리 사내투성이라서 “아주 없던 일”로 지우려는 셈인지, 이 나라 바른길(정의당)을 안 배운 탓인지 그저 아리송하다.



지금까지 인천은 여성 지역구 국회의원을 한 번도 배출한 적이 없다. 내가 첫 번째 지역구 여성의원이 되려고 한다 … 나는 이곳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정의당 대표 이정미가 지역구 당선으로 재선하는 건 한국정치사에 획을 긋는 일이다. 차세대 진보정치의 초석을 닦는 일이다. (46, 47쪽)



이정미 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순이라는 몸을 입었기에 “한국정치사에 획을 긋는 일”이라든지 “차세대 진보정치의 초석” 같은 허울을 스스로 씌우지 않기를 빈다. 《정치의 의무》에는 이정미 씨 스스로 어떤 바른길을 폈거나 펴려고 하는가 하는 뜻과 꿈과 길이 거의 안 보인다. 또는 아예 안 보인다. 너무 ‘자랑’으로 가득하다.


무엇을 새롭게 하려는지 바라보려는 눈을 찾기가 어렵고, 무엇을 새롭게 하겠노라는 마음을 느끼기가 어렵다. 날선 목소리로 이놈과 저놈을 나무라기만 하는 데에 조그마한 꾸러미를 채우고 마니, 그저 안타깝다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청년들은 광화문이나 서초동에서 과연 자신의 깃발을 찾을 수 있었을까? 국제 학술지 논문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52퍼센트 비정규직 청년들에게 조국 장관 딸의 입시 문제는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청년세대의 가장 큰 좌절은 “진보건 보수건 특권층은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무력감이었다. 그것이 조국 장관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226쪽)



조국 씨는 ‘군대’도 안 나왔다. 이른바 ‘여섯 달짜리 석사장교’라는 떡고물을 날름 받아서 마치 ‘군복무’라도 했다는 듯이 감투를 얻었다. 조국 같은 사람은 그냥 ‘특권층’이다. 누가 ‘여섯 달짜리 석사장교’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몰래 마련해서 몰래 몇몇 ‘특권층’한테 베풀고는 몰래 없앤 ‘여섯 달짜리 석사장교’를 날름 받아먹은 사람한테 ‘진보’라는 허울을 입히려 한다면, 이 나라에는 그야말로 진보가 없는 셈이다.


바른길(정의당)이 왜 무너졌는지 뼛속 깊이 뉘우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바른길은 뿌리를 못 내린다. 바른길이 그야말로 바르게 서려면, 서울에서 나가야 한다. 인천과 부산에서도 나가야 한다. 시골로 가야 한다. 전라남도 시골과 경상북도 시골과 강원도 시골과 충청북도 시골로 갈 노릇이다. 시골에서 먼저 ‘군의원’부터 맡을 노릇이다. 시골 아줌마를 일으켜세워서 시골 아줌마가 ‘흙살림을 하던 손’으로 시골 군의회부터 바르게 갈아엎는 밑동을 닦을 노릇이다.


먼저 시골 군의회부터 갈아엎은 뒤에, 서울과 부산과 인천에서 ‘아줌마 구의원’이 태어나도록 힘쓸 노릇이다. 국회의원이라는 떡밥은 잊기를 빈다. 먼저 군의원과 구의원부터 온나라 곳곳에서 천천히 다스리는 길을 펼 노릇인데, 가장 낮은 곳인 시골부터 헤아리지 않는 곳(대도시)에서는 아무런 바른길(정의당)이건 참길(진보)이건 싹트지 않는다.


누구보다 바른길과 참길이 서울과 큰고장을 몽땅 떠나서 시골에서 새길을 열려고 소매를 걷어붙일 때라야 이 나라가 바르고 참다우면서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본다. 이정미 씨, 제발 서울과 인천에서 떠나십시다. 아니면 인천에서 구의원부터 하시기를 빈다. 적어도 아파트밭인 인천 연수구부터 떠나서 인천 동구 골목마을 작은집에 달삯으로 들어가서 ‘동구 구의원’부터 하시기 바란다. 모든 바른길은 밑바닥부터 튼튼해야 할 노릇인데, 밑바닥이 없이 무슨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겠습니까?


모든 ‘바름·참(진보·정의)’은 목소리가 아닌 손바닥과 발바닥이다. 손바닥으로 일을 하고, 발바닥으로 마을을 두루 걸을 때라야 바르고 참답다. 이정미 씨가 낸 《정치의 의무》(2019)도 《정치하는 마음》(2021)도, ‘자랑’에서 맴돌다가 그친다. 부디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작은마을에서 작은일을 하는 땀방울을 천천히 글로 남긴 뒤에 책을 내시기를 빈다.


ㅍㄹㄴ


《정치의 의무》(이정미, 북노마드, 2019)


모든 게 술술 풀린다고

→ 모두 술술 풀린다고

23쪽


서울에 올라와

→ 서울에 와서

→ 서울로 와

24쪽


행복과 정치의 물음에 답을 준 사람은 언니였다

→ 즐겁게 다스리는 길을 알려준 사람은 언니이다

→ 즐겁게 일구는 길을 언니가 알려주었다

27쪽


독배를 마시는 걸 많이 보아왔다

→ 고약한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 추레한 짓을 으레 보아왔다

34쪽


그다음의 정의당, 또 그다음의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고 준비하고 있다

→ 그다음 바른길, 또 그다음 더 나은 새길을 바라고 추스른다

41쪽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을 뚫고 나온 사람으로

→ 우리나라 윗굴레를 뚫고 나온 사람으로

→ 우리 삶터 하얀담을 뚫고 나온 사람으로

42쪽


경제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사자성어를 줄인 말이다

→ 살림이란 말은 살리며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261쪽


국가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요

→ 나라는 왜 있는가요

→ 나라는 뭘 하는가요

→ 무엇을 하는 나라인가요

261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기한 물꼭지 웃는돌고래 그림책 17
어영수 지음, 이광익 그림 / 웃는돌고래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그림책 / 그림책비평 2025.4.26.

그림책시렁 1567


《신기한 물꼭지》

 어영수 글

 이광익 그림

 웃는돌고래

 2019.10.2.



  2000년도 1990년도 아닌 2019년에 《신기한 물꼭지》 같은 그림책이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그림책이 다루는 ‘물꼭지’란 사내아이 고추입니다. 그림책 겉그림에 아예 대놓고 사내아이 고추를 그려 넣는데, 이래도 될까요? 그림책 겉그림에 계집아이 샅을 그려 넣는 ‘어른’은 없을 테지요. 우리가 ‘어른’이라면 계집아이뿐 아니라 사내아이 샅을 함부로 그려 넣지 않을 노릇입니다. 두 아이가 어떻게 다른 몸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다르게 자라서 어떻게 하나인 사랑을 이루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이른바 ‘성교육 그림책’이라면 이때에는 그릴 수 있지만, 이런 줄거리가 아니라 사내아이 고추를 우스갯거리로 다룬다면, ‘성차별·성폭력’입니다. 이 땅에 가시내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아이는 없습니다. 사내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아이는 없습니다. 어느 몸으로 태어났든 모든 아이는 사랑받고 살아가려는 꿈입니다. ‘몸’으로 장난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이들 몸을 놀림감으로 삼지 않기를 빕니다. 이 나라에 도사린 따돌림(차별)을 풀고 치워내려면, 장난질도 비아냥도 놀림질도 아닌 어깨동무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곁에서 참답게 어른으로 서려는 사람이어야 할 노릇입니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사전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내가 사랑한 사진책》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2
마츠무시 아라레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25.

엄마도 아빠도 아닌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2》

 마츠무시 아라레

 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3.31.



  나를 낳은 엄마도 나를 낳기 앞서는 ‘젊은이’였고, 젊은이에 앞서 ‘아이’였습니다. 나를 낳은 아빠도 나를 낳기 앞서는 ‘젊은이’에 ‘아이’였어요. 더 헤아리면, 우리 엄마아빠를 낳은 할매할배도 예전에는 젊은이에 아이였습니다.


  사랑을 그리면서 사랑으로 짝을 맺은 엄마아빠가 있을 테지만, 사랑이 아니었으나 이래저래 짝을 맺고서 아이까지 낳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짝을 맺었으나 갖은 담과 울에 가로막히면서 그만 일찍 떠난 어버이가 있고, 사랑이 없이 짝을 맺고는 아이를 팽개친 어버이가 있습니다.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2》을 읽자니, 이 그림꽃에 나오는 두 사람한테는 ‘낳은 사람’만 있되 ‘돌본 어버이’는 없는 어린날을 보낸 듯싶습니다. 그런데 ‘낳은 사람’인 두 사람은 ‘낳기’조차 매우 싫어한 듯싶군요. 억지로 누구를 낳기는 했으나, 스스로 낳았으면서도 돌아볼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었고, 두 사람은 ‘낳은 사랑도 돌본 사랑’도 도무지 느끼기 어려운 어린날을 지나오면서 어느새 스물이나 서른이라는 나이에 이릅니다.


  어린날 사랑을 느끼거나 누려 본 적이 없는 채 몸뚱이만 자랐다면, 이때에는 어떤 하루를 보낼까요? 어린날 집에서 사랑을 보거나 듣거나 배운 적이 없는 채 스물이나 서른이라는 나이까지 흘렀다면, 우리는 사람이라는 몸으로 뭘 할 만할까요?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면, 아이들이 엄마아빠 곁에 머물 틈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맡겨지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골목도 마을도 없을 뿐 아니라, 노키즈존으로 넘치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적잖은 어버이가 아이를 팽개친다(방치)고 여기지만, “어버이한테서 사랑받아 자란 어린날이 없는 채 몸뚱이만 어른이 된 사람이 짝을 맺어서 아이를 낳을” 적에 아이를 쉽게 팽개치게 마련입니다. 다만, 어릴적에 아무 사랑을 못 받은 아이라 하더라도 “난 우리 엄마아빠처럼 사랑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겠어” 하고 꿈을 그리는 아이들은 “사랑받지 못 한 나날을 보내었어도 새롭게 사랑을 지으며 아이곁에서 웃고 노래하는 오늘”을 짓더군요.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대단한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나누고 누리는 수수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펴기를 바랍니다. 개미를 구경할 틈을 느긋이 누리고 싶고, 개구리가 혀를 낼름 내밀어 잠자리나 파리를 잡아채는 모습을 지켜볼 짬을 느슨히 누리고 싶습니다. 고치를 튼 애벌레가 날개돋이를 할 때까지 보름쯤 멀거니 지켜보고 싶고, 나팔꽃이 어떻게 이른새벽에 꽃봉오리를 펴는지 새벽바람으로 아침까지 곁에 앉아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함께 자라기에 즐겁게 누리는 오늘입니다. 아이하고 어버이는 키도 몸도 다르지만, 어깨동무를 하면서 천천히 거닐기에 사랑입니다. 낳은 아이가 없더라도 누구나 어른스럽게 마을 아이를 마주할 만합니다. 아이를 꼭 안 낳더라도 온누리 모든 아이가 “우리 아이”입니다. 우리는 서로 엄마나 아빠이기도 하지만, 엄마아빠란 이름이 없더라도 ‘너·나·우리’라는 이름으로 즐겁게 수다꽃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아기는 엄마가 잘생기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기는 사랑을 품는 엄마를 바랍니다. 아이는 아빠가 돈을 잘 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는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가꾸는 아빠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른이나 어버이라는 자리에서 아이한테 무엇을 바라는지 이제부터 몽땅 다시 생각할 노릇입니다.


ㅍㄹㄴ


“누군가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22쪽)


“그렇게 지각이 몹쓸 짓인가요?” “뭐?” “으음, 사실 카와무라 씨는 차로 1시간이나 걸리잖아요?” (88쪽)


“그치만 우리 개가 위독해서 도쿄까지 바래다줘도 료헤이 군은 아무 이득도 없…….” “되게 시끄럽노, 토모짱. 손해인지 이득인지 몰라도, 토모짱이 곤란하면 도쿄에 가는 의미는 있지.” (110쪽)


“엄마 곁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지만, 이젠 찾았으니까 괜찮아.” (128쪽)


“네가 그 가게를 물려받았다니, 웃긴다. 그 정도 인물이면 기둥서방이라도 할 것이지.” “날 할배 집에 두고 갔으면서, 데리러 오겠다 캐놓고 전화도 안 하고, 속 편하게 잘도 카레 처묵고 있나?” “아무 데나 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141쪽)


#自轉車屋さんの高橋くん #松蟲あられ


+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2》(마츠무시 아라레/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


완전 꿈의 밥상이네

→ 아주 꿈같은 밥이네

→ 아주 꿈밥이네

8쪽


그런 사람한테 이용당할까 봐

→ 그런 사람한테 휘둘릴까 봐

19쪽


누군가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 누구한테도, 누가 좋아할 적에도, 얕보거나 그러진 않아요

→ 누구를 놓고도, 누가 좋아할 때도, 깔보거나 그러진 않아요

22쪽


눈이 반짝반짝거리네

→ 눈이 반짝거리네

→ 눈이 반짝반짝하네

4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터지다 : 몰라서 속터지고 머리터진다고 말하지만, 속도 머리도 펑펑 꽝꽝 터진 채 멍하니 일손을 놓고서 멈추기 때문에, 손놓고서 속과 머리가 텅 빈 그때에, 비로소 빛이 우리 속과 머리로 새롭게 스미면서 알아차린다. 속터지는 말과 머리터지는 일은 하나도 안 나쁘다. 우리가 꼭 거쳐야 할 ‘즐거운 가시밭길’이다. 머리가 터져 주어야지, 이제까지 안 멈추던 바쁜 일손을 비로소 멈추게 마련이고, 이때부터 새머리(새롭게 틔운 머리)로 나아가려고 스스로 낸 틈에 새롭게 받아들일 이야기가 흘러들 수 있다. 여태까찌 똑같은 틀로 마냥 이은 삶을 멈추고 끝내고 터뜨릴 때라야, 빈손에 빈몸으로 처음부터 하나씩 새길을 여미는 마음으로 건너간다. 고개를 건너고 고비를 넘이려면 누구나 펑펑 꽝꽝 터져야 한다. 그런데 속터지거나 머리터기를 싫어한다면, 속터질 일을 살피지 않거나 머리터질 일을 안 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그대로 고이고 갇혀서 썩다가 죽는다. 2005.4.24.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해보면 안다 : 해보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안 해보았으니 모를 뿐이다.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 없고, 말할 까닭이 없다. ‘모른다’고 뱉는 말이란, 그야말로 핑계에 달아나려는 꿍꿍이로 읊는 소리이다. 우리가 할 말이란 “해보았다.” 하나하고 “안 해보았다.” 둘이다. 해보고도 모른다면, 아직 덜 해보았다는 뜻이다. 알 때까지 해보아야 안다. 알 때까지 안 해보았으니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알 때까지 읽고 보아야 아는데, 알 때까지 거듭거듭 읽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책이나 영화를 고작 ‘1벌 슥 스치듯 훑기’만 하고서 ‘읽었다’는 뻥을 친다. 슥 스치듯 1벌을 훑고서 어떻게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몇 쪽 몇쨋줄에 무슨 글이 있다고 ‘외우기’는 ‘읽기’가 아니다. ‘읽기’란, 책마다 다 다르게 흐르는 이야기와 줄거리를 글쓴이와 나 사이에 이어서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생각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읽었다면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읽었으니 스스로 일어설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책만 사서 ‘훍’은 몸이라면, “안 해보았다.”고 해야 맞다. 글이나 노래(시)를 못 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쓰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요, 스스로 제 이야기를 고스란히 쓰려고도 안 했을 뿐이다. 2025.4.24.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