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정취 靜趣


 고즈넉한 정취를 간직한 마을 → 고즈넉한 마을


  ‘정취(靜趣)’는 “고요한 느낌이나 맛. 또는 고요 속의 흥취”를 가리킨다고 합니다만, ‘고요하다·고즈넉하다·그윽하다’로 고쳐씁니다. ‘깊다·자분자분·점잖다’나 ‘차분하다·찬찬하다·참하다’로 고쳐써요. ‘가만히·조용하다’로 고쳐써도 어울립니다. ㅍㄹㄴ



만사에 뛰어나 있는 사람이라도 사랑이나 그리움의 정취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지 않은 사나이는 몹시 부족된 감이 있어서, 마치 아름다운 옥잔의 밑이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 틀림없다

→ 모두 뛰어난 사람이라도 사랑이나 그리움이 마음에 고요히 없는 사나이는 몹시 모자라서, 마치 아름다운 그릇인데 밑이 빠진 듯하다

《徒然草》(요시다 겐코(吉田兼好/송숙경 옮김, 을유문화사, 1975) 11쪽


확실히 나무 쪽이 정취가 있지

→ 아무래도 나무 쪽이 그윽하지

→ 누가 봐도 나무 쪽이 깊지

→ 나무 쪽이 차분할밖에

《푸른 꽃 1》(시무라 타카코/오주원 옮김, 중앙북스, 2009) 1114쪽


이처럼 풀들이 자연스럽게 덮어 있을 때가 더 역사적 정취를 느끼게 했다

→ 이처럼 풀이 곱게 덮을 때가 더 예스럽다고 느낀다

→ 이처럼 풀이 곱게 덮으니 더 고즈넉하다

→ 이처럼 풀밭으로 있으니 더 고요하다

→ 이처럼 풀밭으로 있을 때가 더 오래되어 보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유홍준, 창비, 2015)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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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영어] 칩chip



칩(chip) : 1. 목재를 가늘고 길게 자른 것. 펄프의 원료로 쓴다 2. 잘게 썰어서 기름에 튀긴 요리 3. 룰렛이나 포커 따위의 노름판에서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돈 대신에 쓰는 상아나 플라스틱 따위로 만든 패 4. [전기·전자] 집적 회로의 전기 회로 부분을 넣어 두는 케이스. 또는 케이스에 넣은 집적 회로

chip : 1. (그릇이나 연장의) 이가 빠진 흔적 2. (물건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 부스러기 3. 감자튀김(감자를 막대 썰기해서 튀긴 것), 프렌치프라이 4. 감자 칩스(감자를 얇게 저며 굽거나 튀긴 것) 5. [전자] 칩 기술 6. (도박판의) 칩 7. (공이 가까운 데 떨어지도록) 공을 높이 치기[차기]

チップ(chip) : 1. 칩 2. 목재를 잘게 자른 것, 나무토막. 나무 조각(펄프 원료가 되는 나무 부스러기 조각) 3. (노름에서 점수를 계산하는) 산가지 4. 집적 회로(IC)를 구성하기 위한 반도체의 작은 조각



영어 ‘칩’을 여러모로 보면, ‘조각·쪽·쪼가리’나 ‘도막·토막’으로 옮길 만합니다. ‘지푸라기·짚풀·부스러기·지스러기’나 ‘보풀·보푸라기·검불·검부러기’로 옮기고, ‘셈대·셈가지’로 옮기지요. ‘채’나 ‘채썰다·저미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ㅍㄹㄴ



녹슨 칩을 바꾼 채

→ 슨 도막을 바꾼 채

→ 낡은 쪽을 바꾼 채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전성호, 실천문학사, 2011) 96쪽


인도와 교외 주택 사이의 좁고 긴 풀밭에서 신선한 목재 칩 더미 앞에 무릎을 꿇는다

→ 거님길과 모퉁이집 사이 좁고 긴 풀밭에 있는 나무조각더미 곁에서 무릎을 꿇는다

《나무 내음을 맡는 열세 가지 방법》(데이비드 조지 해스컬/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2024)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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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적' 없애야 말 된다

 지정학적


 지정학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 자리에 맞춰 움직인다 / 길에 따라 나아간다

 지정학적인 위치에 의하여 → 둘레를 보고서 / 판을 살피고서


  ‘지정학적(地政學的)’은 “지정학에 바탕을 두거나 관계된 것”을 가리키고, ‘지정학(地政學)’은 “[정치] 정치 현상과 지리적 조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나치스의 영토 확장 전략으로 이용되었다 ≒ 지리정치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자리·터·터전’나 ‘길·길눈·길꽃·둘레’로 풀어냅니다. ‘짜임새·얼개·얼거리·틀·틀거리’나 ‘판·판짜임’으로 풀어낼 만합니다. ㅍㄹㄴ



한반도가 처한 이 지정학적 위치를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여, 한반도의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외세의 작용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식의

→ 이 땅이 놓인 여러 자리를 그저 받아들여, 우리 발자국은 어쩔 수 없이 바깥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며

→ 우리나라를 둘러싼 길을 그냥 받아들여, 우리 삶길은 어쩔 수 없이 남한테 휘둘릴 수밖에 없다면서

《20세기 우리 역사》(강만길, 창작과비평사, 1999) 14쪽


경제적·환경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 살림이나 둘레에다가 터도 마땅하지 않다고 밝혔다

→ 돈벌이나 터전에다가 길까지 알맞지 않다고 드러났다

《비판적 생명 철학》(최종덕, 당대, 201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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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말꽃 / 숲노래 우리말


말꽃삶 39 가맛마루

― 일본말씨 ‘산복도로’ 떠나보내기



  2000년에 처음 부산이라는 고장을 이웃으로 만난 뒤로 몇 해만 살짝 걸렀을 뿐, 해마다 꾸준히 드나들었다. 2000년에 이를 무렵까지 ‘산복도로(山腹道路)’ 같은 일본말은 아예 몰랐다. 내가 나고자란 인천에서는 ‘재’나 ‘고개’나 ‘언덕’ 같은 우리말을 썼고, 곧잘 ‘동산·뒷동산’ 같은 우리말을 썼다. ‘동산’을 ‘東山’이라는 한자로 적는 이가 제법 있는데, ‘동산’은 ‘산(山)’이라 하기 어렵다. 둥그스름(동그스름)한 언덕배기를 ‘동산’이라 일컫는다. ‘언덕’보다 낮거나 작으면서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는, 풀이나 잔디가 부드럽게 돋아서 뒹굴기에 넉넉하고 나무가 알맞게 있어서 해바라기를 하며 낮잠을 누릴 만한 자리를 ‘동산’이라 했다.


  마을에서 어울리는 아이어른은 ‘山이 아닌 동산’을 푸근한 쉼터나 뒤뜰이나 마당으로 여겼다. 인천이라는 곳은 예부터 ‘999곳에 이르는 높고낮은 메’가 있다고 여겼다. 즈믄(1000)에서 하나가 모자란다고 여기는데, 하나가 모자라서 ‘서울’이 될 수 없지만, 모자란 만큼 사람이 덜 몰리고 더 아늑하게 쉬고 숨는 터전으로 보았다. 높고낮은 메가 999곳에 이른다면, 이만큼 재나 고개나 언덕도 끝이 없다는 뜻이다. 흔히 부산을 놓고서 ‘산복도로’에 ‘168계단’에 ‘보수아파트’를 둘러싼 달마을을 꼽곤 하는데, 인천은 끝도 없이 오르고 내리는 잿길과 고갯길과 언덕길이 물결친다. 소금밭을 메운 인천 주안이라든지, 갯벌을 메운 중·동·남구 쪽 달마을은 쉴 겨를이 없이 오르면서 내리는 골목바다이다. 다만, 부산에서는 골목바다를 구경터(관광지)로 삼을 줄 아는 품이 있어서 아직 고스란한 곳이 많다면, 인천은 골목바다를 얼른 허물어 잿더미(아파트단지)로 바꾸는 삽질만 많다.


  부산에도 삽질은 많지만 인천이 훨씬 삽질이 많은데, 인천은 서울에서 가까운 고장인 탓이다. 서울사람만으로는 서울을 못 굴린다. 그래서 인천사람은 거의 서울로 죽음길(지옥철)을 새벽과 밤마다 납작쿵이 되어 오간다. 그런데 인천사람을 보태어도 서울을 떠받치지 못 하는 터라, 수원과 의정부와 구리와 부천과 남양주와 군포와 의왕와 안산과 과천에서까지 사람들을 박박 긁어모은다. 요사이는 김포에서도 허벌나게 사람들을 긁어모은다. 부산곁에서 부산으로 일하러 오가는 사람도 참 많지만, 서울곁에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서 오가는 사람에 댈 수 없다. 그래서 서울곁에 있는 여러 고을과 고장은 굴레(식민지)이다. 서울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고, 서울이 살면 같이 돈이 넘치는 흥청망청인 데가 ‘서울곁(수도권)’이다.


  2000년에 처음 들은 말 ‘산복도로’는 낯설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 뒤로 다른 고장이나 고을에서는 이 일본말씨 ‘산복도로’를 듣지 못 하다가 2015년 무렵 마산에서도 ‘산복도로’라는 말을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山腹’이라는 한자는 ‘비탈’을 뜻한다. ‘비탈 + 길’인 얼개인 ‘산복도로’는 일본에서 엮어서 쓰는 낱말이다. 여러모로 보면, 부산이웃 가운데에 일본말인데 ‘부산 사투리’로 잘못 아는 분이 제법 많다. 부산말을 쓰는지 일본말을 쓰는지 찬찬히 짚으면서 가다듬는 분도 많지만, 그러려니 지나치는 분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인천에서도 일본말을 일본말이 아니라 ‘인천 사투리’로 여겨서 쓰는 일이 이따금 있지만, 이제는 거의 ‘근현대·개항’과 얽힌 데를 가리킬 적에만 남는다. ‘구락부’나 ‘부락’ 같은 일본말을 빼면 그리 안 쓴다고도 여길 만하다.


  몰랐다면 모르고 지나갈 테고, 이웃으로 여기지 않으면 시큰둥하게 잊을 테지만, 인천내기로서 서울에서 아홉 해를 눌러앉다가 전라남도 시골에 또아리를 틀고서 부산을 이웃으로 삼는 나날이니, ‘부산말씨 아닌 일본말씨’가 자꾸 귀에 걸거친다. ‘산복도로’를 어떻게 털어내거나 씻어낼 만한가 하고 열 해 즈음 헤아리다가 수수하게 ‘고개·고갯길·언덕·언덕·언덕길·재·잿길·비탈·비탈길’ 같은 말을 쓰면 되겠거니 여겼다. 그런데 이런 수수한 말씨를 들은 부산이웃 가운데 여태 어느 한 사람도 이 수수한 말씨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산복도로’가 일본말이건 아니건 그냥 ‘부산말씨’로 삼는 듯하다.


  2025년을 앞둔 2024년 섣달에 ‘가마메(가마뫼)’라는 옛이름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한자 ‘釜山’은 ‘가마 + 메(뫼)’인 얼개이다. 부산을 이루는 여러 멧줄기는 ‘가마솥’이라 여길 만하다. 인천에 있는 동산이나 언덕하고 다르다(게다가 인천에는 ‘동산중·동산고’ 같은 배움터까지 있다). 요사이는 가마솥을 아예 모르는 분도 많지만, 가마솥이 어떻게 생긴 줄 안다면, 부산 곳곳에 있는 멧길(멧자락길·비탈길)이 어떤 얼거리인지 어림할 만하다. ‘가마 + 메’인 고장이듯, 가마메에 있는 멧길이며 비탈길이며 고갯길이며 잿길이며 언덕길이란, 부산스럽게 부산말씨로 ‘가맛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어디에서도 이 이름을 못 쓸 테지. 오직 부산에서만 ‘가맛길’을 비롯해서 ‘가맛고개·가맛골·가맛재’ 같은 이름을 쓸 수 있다. 가마메인 곳에 있는 고개요 골이요 재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가맛마루’란 이름도 어울린다. ‘마루’라는 우리말은 집에서 가장 넓고 반반하게 두면서 두런두런 모이는 자리를 가리킨다. ‘마루’라는 낱말은 ‘머리’와 ‘미루’와 ‘미르’로도 잇는다. 우리말 ‘미르’는 ‘용(龍)’을 가리킨다. ‘머리’는 ‘꼭두머리·우두머리’ 같은 쓰임새처럼 첫째나 으뜸과 큰곳을 가리킨다. ‘미루나무’에 붙는 ‘미루’는 ‘미르’하고 같은 말이다.


  고이기만 하면 썩는다. 고이기만 하기에 꼬부라지고 꼬여서 ‘꼰대’로 잇는다. 고이되 가만히 퍼지고 새롭게 솟으니 ‘샘’이다. 모든 샘은 “고이되 그저 고이기만 하지 않고서 끝없이 솟아서 새롭게 살리는 물밭”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샘 ㄱ’은 ‘샘물’이다. 들숲바다와 뭇숨결을 살리는 곱고 곧은 물줄기인 ‘샘 ㄱ’이다. 그런데 끝없이 솟기는 하지만 고약하고 꼬부라지고 꼬인 모습이라면 ‘샘 ㄴ’인 ‘시샘·시새움’이다. 그저 끝없이 솟기만 한대서 이웃을 살리거나 북돋우지 않는다. 맑고 밝게 살리는 사랑일 적에만 ‘샘 ㄱ·샘물’이다.


  나는 부산만 이웃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나라 모든 곳을 이웃으로 삼는다. 푸른별 모든 겨레와 나라도 이웃으로 삼는다. 그래서 누구나 이웃으로 삼으려고 먼저 우리 스스로 쓰는 낱말부터 사랑으로 바라보며 품으려고 한다. 내가 나로 설 수 있는 가장 작은 낱말 하나를, 마치 낟알(나락) 한 톨처럼 사랑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나사랑’을 ‘너사랑’으로 뻗어서 ‘우리사랑’으로 이루는 ‘하늘빛’으로 다가설 만하다.


  인천에는 동산과 언덕길과 잿마루가 있다면, 부산에는 가맛길과 가맛재와 가맛마루가 있기를 바란다. 낫거나 나쁘지 않은, 좋거나 싫지 않은, 그저 다르면서 하나인 숨결로 빛나는 길을 함께 생각하고 살펴서 아이 곁에 있는 즐거운 노래를 지을 수 있기를 빈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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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저작집 12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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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2.20.

인문책시렁 401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1999.1.25.



  그동안 강만길 님이 쓴 여러 책을 두루 읽었으나, 어쩐지 요 열∼스무 해 사이에 나오는 책은 심드렁했습니다. 예전에 쓴 글에서 벗어나는 결이 없기도 했지만, ‘발걸음’을 언제나 ‘자리다툼’으로 보는 틀에서 안 빠져나오는 대목에 질리기도 합니다.


  《20세기 우리 역사》는 두즈믄(2000)이라는 해로 넘나드는 길목을 돌아보자는 뜻으로 편 이야기를 꾸렸다고 합니다. 강만길 님이 여태 편 이야기를 단출히 여민 얼거리라고 느낍니다. 여러모로 헤아릴 대목이 있되, ‘발걸음’을 어느 곳에 서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책으로 담아낼 이야기는 사뭇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산미증식계획’이라는 지난일을 다룰 적에, 그무렵에 시골에서 논밭을 짓는 여러 사람은 어떤 살림이었는지 짚는 글을 이제야말로 쓸 때이지 않을까요?


  조선총독부가 벌이는 짓에 맞서며 나라밖에서 ‘임시정부’를 차린 어른이 많고, 만주에서 총을 쥐고 싸운 어른이 많습니다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나라를 떠날 길이 없습니다. 논뙈기도 밭뙈기도 없이 빌려서 짓는 수수한 시골지기가 가장 많았던 우리나라입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빌리는 땅을 지은 수수한 시골지기’가 걸어온 길을 글이나 책으로 차곡차곡 여미는 글바치는 거의 못 찾아봅니다.


  우리가 돌아볼 ‘발걸음’이라면, 바로 논밭지기 발걸음과 손길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논밭지기는 어떤 살림집을 이루었는지, 논밭지기는 어떤 밥옷집을 꾸렸는지, 논밭지기는 아이를 어떻게 낳아 돌보았는지, 논밭지기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떤 소꿉놀이를 했는지, 논밭지기 집안에서 나고자라는 아이들은 말을 어떻게 물려받았는지 같은, 수수한 논밭지기는 설거지와 밥짓기와 옷짓기를 어떻게 일구며 이어 왔는지 같은, ‘작은발걸음’을 그릴 적에 비로소 ‘역사’라고 봅니다.


  어떤 ‘그들’도 으레 윗자리에서 오가는 발걸음만 다루면서 ‘역사’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강만길 님을 비롯한 둘레에 있는 사람들도 ‘논밭자리’나 ‘시골자리’나 ‘마을자리’ 이야기를 ‘역사’로 못 느끼는 발걸음이었다고 봅니다. 2000년과 2020년 우리 발자취를 그릴 적에 무엇을 다룰 만할요요? 2024∼25년에는 ‘계엄령·탄핵’을 둘러싼 윗자리 쌈박질을 다루려나요? 아니면, 서울에서는 서울대로 시골에서는 시골대로 수수하게 살림을 짓는 ‘작은이 발걸음’을 다룰 수 있을까요?


  예전에 정몽준이라는 이도 버스삯을 몰랐지만, 김대중·노무현·문재인도 버스삯을 모릅니다. 박근혜·이명박·윤석열도 버스삯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발’ 노릇을 하는 버스삯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짚는 붓(역사학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푼돈이라 여길 버스삯일는지 모르나, 이 버스삯조차 없어서 한나절이나 두나절을 멧숲을 넘고 걸어다닌 숱한 사람들 발걸음이 어떤 ‘역사’인지 적을 줄 아는 붓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발걸음을 굳이 ‘올바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바라보기 앞서, 먼저 ‘사람살이·사람살림’을 손수 일구면서 바라볼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파 한 단에 값이 얼마인지, 달걀 하나에 값이 얼마인지, 라면 한 자루에 값이 얼마인지, 번데기 한 줌에 값이 얼마인지, 이러한 밑살림길을 읽지 않고 말할 줄 모른다면, 이제는 ‘역사 아닌 허울’일 뿐일 텐데 싶어요. 이제부터 우리가 바라볼 발걸음(역사)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짓는 오늘과 하루일 노릇이라고 봅니다.


ㅍㄹㄴ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산미증식계획’은 당초의 계획대로 추진되지 않았음에도, 일본 쪽으로서는 식민지배라는 면에서나 자국의 경제발달이라는 면에서나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습니다. (92쪽)


1920년대까지도 각급 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라 하여 주로 가르쳤지만, 우리말도 조선어라 하여 약간은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중일전쟁 도발 후 그것마저 완전히 없애버리고(1938.4.) 일본어만을 쓰도록 강요했습니다. (121쪽)


38도선을 없애고 5년간 신탁통치도 안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가, 38도선을 없애기 위해 5년간 신탁통치를 받는 것이 옳은 일인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안 받으려 하다가 38도선이 그대로 민족분단선이 되게 할 것인가 등 몇 가지의 엄중한 선택이 이 시기의 민족사회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190쪽)


농지를 제외한 과수원·임야 등은 개혁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반 지주 소유지는 물론이고, 이완용·송병준 등과 같은 반민족행위자의 토지도 소유권이 그대로 인정되어 그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유산으로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239쪽)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김규식 등 민족해방운동 우익전선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국내 지주세력과 손잡고 미군정에서 물려받은 친일 관료들을 기반으로 하여 수립되었습니다. (250쪽)


이 전쟁은 안으로는 민족분단을 더욱 고착시키고,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이후 독재체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밖으로는 동서 양 진영의 냉전을 격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257쪽)


+


《20세기 우리 역사》(강만길, 창작과비평사, 1999)


한반도가 처한 이 지정학적 위치를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여, 한반도의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외세의 작용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식의

→ 이 땅이 놓인 여러 자리를 그저 받아들여, 우리 발자국은 어쩔 수 없이 바깥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며

→ 우리나라를 둘러싼 길을 그냥 받아들여, 우리 삶길은 어쩔 수 없이 남한테 휘둘릴 수밖에 없다면서

14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성격은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그러한 삶결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 그러나 그러한 삶자취는 썩 반갑지 않았습니다

88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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