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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ㅣ 살아있는 교육 2
이오덕 지음 / 보리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숲노래 책읽기 2024.12.21.
이오덕 읽는 하루
― 시키지 않고 같이 쓰기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이오덕
보리
1993.8.15.
글을 어떻게 쓰라고 굳이 가르쳐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글은 한참 못 써도 됩니다. 말부터 차근차근 펼 줄 알면 됩니다. 예전에는 누가 옆에서 말을 받아적거나 담아야 했다면, 요즈음은 손전화로 말을 그대로 담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만한가 하고 따지거나 배우려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어떻게 한집안 사람하고 동무하고 이웃한테 고스란히 말로 들려줄 만한가 하는 하루를 되새길 노릇입니다.
마음을 소리로 담아서 말입니다. 그렇기에 말을 꾸민다면 마음을 꾸민다는 뜻입니다. 나한테 없는 마음을 남한테 잘 보이려는 뜻에서 말을 꾸미면서 마음을 덩달아 구며요. 너랑 내가 한집안을 이루는 사랑으로 지내려고 고스란히 말을 합니다. 너랑 내가 동무에 이웃으로 만나면서 마음을 나누려는 뜻으로 고스란히 말을 하지요.
다만, 말은 더듬어도 됩니다. 말소리가 새거나 사투리를 써도 즐겁습니다. 글을 쓰며 맞춤길이나 띄어쓰기가 틀릴 수 있듯, 말을 하면서 더듬거나 새거나 어긋날 수 있어요. 게다가 고장마다 다른 삶결이 묻어나는 사투리를 쓸 적에는 말맛이 살게 마련입니다.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는 열일곱 살 언저리 푸름이한테 눈결을 맞춘 길잡이책입니다. ‘말하기’를 살피고 추스르면 될 열일곱 살 푸름이일 테지만, 막상 말보다는 ‘글쓰기’에 꽂힌 푸름이를 살살 타이르는 꾸러미입니다. 굳이 글을 잘 쓰려고 용쓰거나 애쓰거나 힘들지 말라고 달래는 이야기입니다. 글이란 말을 담고, 말이란 마음을 담고, 마음이란 삶을 담고, 삶이란 살림을 담고, 살림이란 사랑을 담고, 사랑이란 꿈을 담으며, 꿈이란 넋을 담습니다. 이오덕 님은 이 얼거리 가운데 ‘삶·살림’까지만 짚으시는데, 우리가 적어도 삶과 살림을 짚을 줄 안다면, 저마다 새롭게 사랑과 꿈과 넋도 짚으면서 이 길을 노래할 만합니다.
돋보이는 글이란, 남을 깔보는 글입니다. 눈에 띄는 글이란, 남을 밟고 올라선 글입니다. 여러 글 가운데 어느 글이 돋보이거나 뜨일 만합니다만, 모든 글은 ‘남보다 잘 썼구나’ 하고 느낄 적에는 영 허울스럽습니다. 모든 글은 ‘이 글을 쓴 분이 어떤 삶과 마음과 꿈이로구나’ 하고 느낄 적에 그야말로 사랑스럽습니다.
글밥을 먹건 안 먹건 ‘글이란 곧 말’이면서 ‘말이란 곧 마음’인 줄 모르는 분이 너무 많고, 모르는 척하는 분도 대단히 많고, 배운 적 없는 분이 참으로 많고, 그냥 등지는 분이 숱하게 많습니다. 예전에는 배움책(교과서)이 순 우두머리(독재자)를 치켜세우는 줄거리였다면, 오늘날에는 배움책이 그만 ‘캐릭터북’으로 바뀌었어요. 얼추 2015년 즈음부터 우리나라에는 배움책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알맹이란 사라진 채 손꼽히는 ‘웹툰작가·그림책작가’를 끌어들여서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허울책이 넘쳐납니다.
지난날에 배움터를 다닌 분이라면, 그저 외우고 시키고 나이로 줄을 매기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한자리를 거머쥐려고 용썼습니다. 이런 발버둥이 모여서 우두머리(독재자)한테 고분고분한 글담(문학단체·권력)을 한켠에서 이루고, 우두머리를 꾸짖고 나무라면서 뒤에서는 술판·계집질을 일삼는 안쓰러운 글담(문학단체·권력)을 다른켠에서 이루었습니다. 추레한 술판을 저지른 사람은 고은 한 사람뿐이 아니지만, 고은 한 사람 이름만 불거졌고, 고은하고 술판을 걸쭉하게 누리고 함께하던 이들이 여태까지 글담 한복판을 주름잡습니다. 우두머리한테 조아리는 글담도 이제껏 바보짓을 뉘우친 적이 없습니다만, 우두머리한테 맞선다면서 목소리를 높인 글담도 이제까지 얼뜬짓을 뉘우친 적이 없습니다.
왜 이런 두 갈래 글담이 생겼을까요? 우리 스스로 안 배운 탓입니다. 예전에 배운 사람은 예전대로 꼰대스러운 모습으로 글담을 움켜쥐면서 ‘스스로 마음과 말부터 안 바꿉’니다. 오늘은 오늘 배운 사람대로 꾸미고 덧바르고 매만지는 글담을 휘어잡으니 ‘스스로 마음과 말부터 안 바꾸’는 얼거리는 나란합니다.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를 곰곰이 읽어 본다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스스로 ‘어른’이라는 이름을 쓸 만한지 아리송합니다. 아마 하나같이 ‘어른 아닌 꼰대’이지 싶습니다. 꼬부라지고 꼬인 꼰대입니다. 꼿꼿하게 서서 곱게 피어나서 아이들한테 선선히 자리를 내주는 ‘꽃대’는 도무지 안 보입니다.
말끝 하나로 ‘꼰대’하고 ‘꽃대’를 가를 만한데, 말끝 하나란 무엇인지 헤아려 봐요. 예전 배움책에 익숙한 대로 외워 버릇한 늙은꼰대는 ‘시골사람이나 어린이나 학교를 덜 다니거나 못 다닌 사람 눈높이’를 살피며 쉽게 쓰는 글은 아예 안 쳐다봅니다. 오늘 배움책에 익숙한 대로 캐릭터북에 길든 젊은꼰대는 ‘꾸미고 덧붙이고 베끼고 흉내내고 멋부리는 굴레’에 사로잡혀 바쁜 터라, 젊은꼰대는 젊은꼰대대로 ‘내가 나답게 서는 나로서 나를 사랑하는 말’을 바라보는 길하고 스스로 등졌습니다.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말이라면, 모든 말마디가 오직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른이면서 오직 사랑이라면, 어린이한테 들려줄 ‘모든 말마디’를 하나씩 바로잡고 다듬고 고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른으로 무르익지 않거나, 아직 사랑이 무르익지 않았으면 “뭐 이쯤은 그냥 쓰지!” 하면서 넘어갑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가 묻는 모든 말을 함께 생각할 뿐 아니라,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한테 물어보니? 네가 아는 바가 있어서 말하고 싶지만 내(어른)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니? 내(어른)가 어떻게 보든 대수롭지 않으니까, 네가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먼저 이야기를 하면 돼.” 하며 길잡이 노릇을 합니다.
이오덕 님이 그동안 쓴 여러 책에서 밝히기도 하는데, 어쩌면 못 알아차리는 분이 많을 텐데요, 이오덕 님이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글쓰기를 가르칠 적에는 ‘쓰라고 시키기’만 하지 않습니다. 이오덕 어른도 늘 곁에서 같이 씁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글쓰기 교사’나 ‘담임 교사’를 보셔요. 아이들한테 숙제를 맡기거나 시키기만 할 뿐, 정작 같이 쓰는 분은 몇인가요? 그래도 더러 아이하고 같이 쓰는 분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글과 우리말이 아직 안 죽었다고 느껴요. 그저 너무 드물게 같이 쓸 뿐이라, 아이들 눈빛이 살아나기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가 손쉽게 사다먹는 주전부리를 돌아봐요. 주전부리 껍데기에 어떤 글이 적혔나요? 작은 동사무소·면사무소에 있는 글자락(서류)을 봐요. 배움턱을 디디지 못 한 사람한테는 대단히 어려운 일본한자말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2024년 12월에 모지리 같은 우두머리가 ‘계엄’을 폈는데, ‘계엄’은 어느 나라 말일까요? 아니 ‘대통령’이란 이름부터 일본말인 줄 아는 사람은 몇일까요? ‘국회·국회의원’도 우리말이 아닌 줄 알아보는 사람은 몇인가요? 우리말은 ‘고장·고을·마을’인데, ‘시도·구군·동읍면’ 같은 일본말을 여태 못 버리거나 못 바꾸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글쓰기란, 말쓰기이면서 마음쓰기이고 삶쓰기에 살림쓰기입니다. 바야흐로 사랑쓰기에 꿈쓰기에 넋쓰기입니다. 이리하여 글쓰기란, 숨결쓰기에 사람쓰기에 하루쓰기입니다. 글쓰기란, 오늘씨기에 나쓰기(너쓰기)에 씨앗쓰기입니다. 글쓰기란, 별빛쓰기에 해쓰기에 바람쓰기에 비쓰기에 숲쓰기에 나무쓰기에 풀꽃쓰기입니다. 머리를 쥐어짜서 겉으로 멋스러이 꾸밀 적에는 ‘글쓰기’가 아닌 ‘꾸미기’입니다. 예전에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이던 무렵에 아이들한테 ‘만들기’를 짐으로 내주기 일쑤였는데, 오늘날 적잖은 글은 ‘글만들기’에 갇혔습니다.
서로 마음을 쓰듯 글을 쓰기에 서로 반갑습니다. 서로 살림을 짓듯 글을 짓기에 함께 웃습니다. 그러나 꾸미고 만들고 멋부리는 동안에는 그만 담벼락이 높습니다.
날마다 부지런히 써도 안 나쁩니다만, 이레에 한 꼭지를 써도 아름답습니다. 보름이나 달마다 한 자락을 써도 빛납니다. 철이 바뀌거나 해가 갈 적에 하나를 써도 즐겁습니다. 손으로 짓고 발로 다니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넋으로 사랑하는 하루를 쓸 줄 안다면, 마음과 말과 글이 나란히 반짝일 만합니다.
ㅅㄴㄹ
아이들에게 저마다 삶을 바로 보게 하여 그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정직한 글을 쓰게 하지 않고, 삶을 덮어두고 삶을 등지고 돌아앉아 거짓스런 말장난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글을 흉내내는 손재주를 문예 교육이니 창작 교육이니 하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4쪽)
어른들이 길을 막고 있다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생각하니 어른들의 무지와 횡포는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나지 못하게 억누르는 온갖 교육과 문화의 조건으로 나타나고 있다. (12쪽)
아이들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한 일을 쓰게 하지 않고 책에 나온 어른들의 글을 따라 쓰게 하거나 책에 나온 낱말을 문법에 맞추어서 쓰게 하는 것을 글짓기 공부라 해서 시킬 때 아이들은 글을 못 쓰게 된다. 쓰더라도 아주 맛없는 글, 죽은 글밖에 못 쓴다. (17쪽)
우리 아이들은 오래 전부터 마음의 숨을 못 쉬고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숨구멍을 꽁꽁 틀어막는다. (25쪽)
글쓰기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데 있다. (44쪽)
정직하게만 썼으면 그만인가? 정직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정직은 진실을 얻기 위함이다. (60쪽)
죽어가는 흙과 흙 속의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이것이 삶을 가꾸는 교육이다. (72쪽)
정직하게 쓴 시인데 별로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시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거나 삶을 높여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설거지가 지겹고 신경질이 난다고만 했으니까요. (138쪽)
글을 쓴다고 하니 공연히 마음이 굳어져서 근사한 말재주를 부리고, 그래서 어렵고 재미없는 글이 된 것이겠다. 아이들이 이런 선생님의 글을 읽고 닮아갈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된다. (191쪽)
내가 알기로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자기들의 집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마음이었다. (202쪽)
아이들이 쓴 책을 내는 것은 아이들이 보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한편 어른들도 좀 읽어서 배우란 뜻이다. (246쪽)
잘못된 환경과 교육으로 현실을 도피하는 아이들은 자기의 삶과 자기의 말이 아닌 남의 삶과 남의 말로 거짓된 표현을 하는 곡예를 익혀서 그 마음이 점점 더 깊이 병든다. (324쪽)
글을 쉬운 말로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터인데 도리어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고 아이들이 읽을 수 있게 써 놓은 글은 가치가 없는 글이라 생각한다. (362쪽)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이오덕, 보리, 1993)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