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사랑이란? (2024.10.19.)

― 부산 〈카프카의 밤〉



  가을비가 조금씩 젖어드는 늦은저녁에 〈카프카의 밤〉에 깃듭니다. 오늘은 《울면서 하는 숙제》라고 하는 퍽 묵은 책을 곁에 놓고서 이오덕 어른을 되새기는 이야기꽃을 폅니다. 어느새 밤새 울면서 끙끙거리는 아이는 확 사라집니다. 예전에는 배움터마다 길잡이가 아이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도 난 듯이 괴롭히기 일쑤였습니다. 이 탓에 오래오래 목소리가 모이고 쌓여 드디어 ‘배움길빛(학생인권조례)’을 세울 수 있어요. 그런데 배움길빛을 세우려는 마음을 차츰 잊습니다. 왜 아이가 사랑받으며 자라야 하는지, 사랑 아닌 굴레를 쓰면 마을과 보금자리와 나라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차츰 잊어버리는 듯싶습니다.


  우리는 이제 ‘최선’이 없을 적에 ‘차선’을 고르지 말아야 한다고 느껴요. 그저 ‘착함’만 골라야 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가장 나은 착함’이나 ‘그다음 착함’으로 가를 수 없어요. 착하면 그저 착하고, 안 착하면 “그저 안 착할” 뿐이에요. 안 착하지만 ‘착한척·착한흉내·착한시늉’을 하는 허울과 껍데기를 모두 내려놓고서 오롯이 ‘착하고 참하고 아름다워 사랑인 길’로 하루를 살아갈 적에 누구나 스스로 빛난다고 느껴요.


  착함에는 으뜸착함이나 버금착함이 없습니다. 참다움에도 으뜸착함이나 꼴찌착함이 없어요. 사랑에도 으뜸사랑이나 딸림사랑이 없습니다. 미움과 부아와 시샘도 그저 미움과 부아와 시샘입니다.


  한자말 ‘의무’는 ‘짐’을 나타냅니다. ‘짐(의무)’을 품고 맡을 적에는 ‘몫(권리)’이 뒤따라요. 몫(권리)을 누리려면 어떤 짐(의무)을 맡아야 하고요. 이와 달리, ‘사랑’은 사람으로서 숲을 품으면서 서로 수수하게 나누는 숨빛인 사이에서 태어나며 맑고 밝은 씨앗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즐겁게 나누면서 서로 아름답게 나아가는 빛씨앗인 사랑에는 아무런 짐이나 몫이 없어요.


  사랑은 언제나 사랑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나를 나로서 나답게 바라보려면 ‘다른 것(짐·몫·자리·벼슬·돈·이름)’을 모두 내려놓거나 벗거나 씻고서 그저 사랑이어야지 싶습니다. 사람으로서 사랑을 하지 않기에 자꾸 ‘다른 것’을 살피느라, 짐과 몫 사이에서 헤매고 무겁고 벅차다가 쓰러진다고 느껴요. ‘좋은책’도 ‘좋은문학’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만, 짐과 몫이 나란하다고 느낍니다.


  짐을 싣지 않는 길로 가야지 싶습니다. 지으면서 어울리는 오늘을 열어야지 싶습니다. 몫을 바라지 않는 길을 그려야지 싶습니다. 몸과 마음이 빛나는 씨앗 한 톨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하루를 살아야지 싶습니다.


ㅅㄴㄹ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진은영, 마음산책, 2024.9.15.)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김영건, 어크로스, 2022.6.10.)

《엄마의 골목》(김탁환, 난다, 2017.3.3.)

《성수기도 없는데 비수기라니》(김택수, 지구불시착, 2021.7.20.)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우치다 타츠루/김석중 옮김, 서커스, 2020.8.5.)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오덕 읽는 “이응모임” 8걸음

― 새롭게 있고, 찬찬히 읽고, 참하게 잇고, 느긋이 익히고



때 : 2024.12.21.토. 20시

곳 : 부산 연산동 〈카프카의 밤〉

님 : 숲노래 × 곳간출판사

곁 :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를 미리읽기, 또는 〈카프카의 밤〉에서 사기



줄거리

가. 글을 읽는 눈

 ㄱ ‘소년소녀’가 아닌 어린이

 ㄴ 오누이와 언누이

 ㄷ 아이한테서 배우는 길

 ㄹ 아이 곁에 있어야 본다

 ㅁ 낳고 돌보는 아이


나. 글로 잇는 마음

 ㄱ 누구나 아기로 태어난다

 ㄴ 언제나 아이답게 자란다

 ㄷ 어떤 어른으로 서려는가

 ㄹ 어른으로서 물려줄 마음

 ㅁ 낱말을 어떻게 고르는가


다. 글로 새기는 뜻

 ㄱ ‘동심천사주의’를 깬다

 ㄴ ‘색동회’를 벗긴다

 ㄷ ‘권장도서’를 없앤다

 ㄹ ‘글쓰는 형식’을 지운다

 ㅁ ‘문인·작가 흉내’를 버린다


라. 글을 빗질하는 손

 ㄱ 아이어른을 쓰다듬는 길

 ㄴ 잘잘못을 바라보는 길

 ㄷ 좋고나쁨을 넘어서는 길

 ㄹ 씨앗글을 헤아리는 길

 ㅁ 이야기로 피어나는 길


+


일곱걸음 : 이원수가 일깨운 글빗(비평)


  ‘역사’를 배우겠다는 분이 《조선왕조실록》 한글판부터 읽겠다고 하면 얼른 말립니다. 제발 ‘임금놀이’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집안일부터 하라고 말합니다. 다들 으레 “아니, 집안일에 무슨 역사가 있어요?” 하고 되물을 텐데, “먼먼 옛날부터 손에서 손으로 이은 집안일을 해야,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하루를 어떻게 그리고 지으며 사랑으로 살림했는지 먼저 몸으로 느끼고, 이내 마음으로 돌아보고, 차분히 이 삶으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하고 대꾸합니다.


  우리 어린이문학은 거의 일본을 거쳐서 그냥 들어왔습니다. 나중에 ‘색동회’로 자란 방정환 님이 일군 《어린이》라는 잡지는 온통 ‘일본 어린이문학 + 어린이놀이 + 어린이노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뜻깊게 엮은 어린이잡지이기는 하되, 우리 어린이를 헤아린 책하고는 한참 멉니다. 이런 뿌리인 탓에 ‘색동회’는 언제나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한테 이바지하면서 거꾸로 어린이한테는 등졌습니다. 이런 슬픈 ‘역사’를 바탕으로 또아리를 튼 ‘동심천사주의’요, 오늘날 ‘창비·문학동네’ 글담(문학권력)입니다.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은 이름부터 일본말일 뿐 아니라, 그냥 일본책을 모조리 베낀 얼거리입니다. 우리는 예부터 ‘아이’라 했고, 이따금 ‘어린이’라 했습니다. ‘어린이’는 방정환 씨가 새로 지은 말이 아닙니다. 이미 있던 말입니다. ‘어린이·젊은이·늙은이’처럼 쓰던 말입니다. 방정환 씨는 ‘어린이’라는 이미 있던 낱말에 뜻을 보태었을 뿐이고, 이렇게 보탠 뜻이 깊을 뿐입니다.


  예부터 우리 옛이야기나 온겨레·온나라 이야기에는 ‘어린이’가 나옵니다. ‘소년소녀’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창비·김이구·원종찬으로 손꼽는 어린이문학평론은 ‘소년에 치우친 어린이문학을 소녀한테 돌려준다’는 말을 자꾸 퍼뜨리고 가르칩니다. 모름지기 ‘아이·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어버이’라는 이름에는 ‘남녀’나 ‘여남’을 가리는 뜻이 없습니다. 그저 아이요 어른입니다.


  낳아도 아이요, 이웃에도 아이입니다. 낳으면 낳기 때문에 하루 내내 아이하고 어울리면서 아이한테서 배웁니다. 아이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를 바로 아이가 가르치거든요. 이웃 아이를 지켜볼 적에는 ‘낳은 어버이’하고 다른 눈이기에, ‘이웃 어른’으로서 아이가 듣거나 보거나 새길 대목을 이웃으로서 새롭게 추슬러야 하는구나 하고 배웁니다.


  이러한 얼거리를 우리 어린이문학에서 제대로 바라본 사람이라면 이원수 님이고, 이원수 님은 이오덕 님한테서 ‘글빗(비평)’을 오롯이 할 만한 빛을 찾아보았습니다. 1950년대에는 웬만한 초등교사는 아이를 욱여내고 닦달하면서 돈을 거두어들이고 흠씬 두들겨패는 망나니였습니다. 이런 망나니는 1990년대까지 꽤 이었는데, 이오덕 님은 유난스레 아이한테서 돈을 욱여내지 않고 닦달을 안 하고 안 때리는 드문, 어쩌면 거의 없던 사람입니다. 이러면서 아이들한테 붓종이(필기구)를 선뜻 내주면서 글과 그림을 스스로 펴는 길을 마련하고 북돋았습니다.


  여러모로 보면, 모든 어린이를 나란히 품고 헤아리면서, 아이가 스스로 제 마음을 제 손으로 종이에 적어 보고 그려 보도록 이끈 어른이자 길잡이인 이오덕 님이기에, 글빗(비평)을 고르면서도 곱게 펼 수 있는 밑바탕을 가꾸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름값이 높다고 해서 이름값에 휘둘린다면 글빗이 아닙니다. 출판사에서 드린 책이라고 해서 치켜세운다면 글빗일 수 없습니다. ‘권장도서’가 아닌, 아이하고 함께 읽을 책을 살핀 길을 열려던 이오덕 님이기에, 여러 인문출판사가 어린이책을 제발 꾸준히 펴내기를 그토록 바라고 여쭈고 손수 꾸러미를 모아서 갖다주기까지 했다고 느낍니다.


  글빗은 어느 글이나 책 하나만 쓰다듬지 않습니다. 어느 글이나 책에 깃든 씨앗을 눈여겨보면서 살리는 손길이자 눈길입니다. 아이가 생각을 밝히도록 북돋울 낱말을 하나하나 고르면서 쓸 글이고, 스스로 어른답게 사랑하고 살림하는 오늘을 고스란히 담을 글이고, 누구 흉내를 낼 까닭이 없는 글입니다. ‘아이마음(동심)’은 ‘천사’가 아닌, ‘사람마음’은 다 ‘하늘’이라고 해야 알맞습니다.


  된장국을 끓이는데 된장을 안 넣었다면 알려주어야지요. 불을 만지고 칼을 다루는 부엌에서 불이나 칼을 함부로 휘두르거나 다루면 바로바로 따끔하게 멈춰세워야지요. 면허증을 땄더라도 섣불리 자동차를 씽씽 달리지 않도록 타이르고, 천천히 길부터 익히고 사람부터 살피라고 알려야지요. 글빗을 하려면, 누구보다 더 읽고, 누구보다 더 돌아보고, 누구보다 스스로 고요히 마음을 그리면서 이 길을 사랑하려는 하루일 노릇입니다.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다며 춤추는 매무새는 도무지 글빗일 수 없고, 몇몇 글담(문단권력)에 기대어 이름을 파는 몸짓도 영 글빗일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읽고서 새롭게 이야기를 풀어낼 적에 비로소 글빗입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살아있는 교육 2
이오덕 지음 / 보리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숲노래 책읽기 2024.12.21.


이오덕 읽는 하루

― 시키지 않고 같이 쓰기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이오덕

 보리

 1993.8.15.



  글을 어떻게 쓰라고 굳이 가르쳐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글은 한참 못 써도 됩니다. 말부터 차근차근 펼 줄 알면 됩니다. 예전에는 누가 옆에서 말을 받아적거나 담아야 했다면, 요즈음은 손전화로 말을 그대로 담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만한가 하고 따지거나 배우려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어떻게 한집안 사람하고 동무하고 이웃한테 고스란히 말로 들려줄 만한가 하는 하루를 되새길 노릇입니다.


  마음을 소리로 담아서 말입니다. 그렇기에 말을 꾸민다면 마음을 꾸민다는 뜻입니다. 나한테 없는 마음을 남한테 잘 보이려는 뜻에서 말을 꾸미면서 마음을 덩달아 구며요. 너랑 내가 한집안을 이루는 사랑으로 지내려고 고스란히 말을 합니다. 너랑 내가 동무에 이웃으로 만나면서 마음을 나누려는 뜻으로 고스란히 말을 하지요.


  다만, 말은 더듬어도 됩니다. 말소리가 새거나 사투리를 써도 즐겁습니다. 글을 쓰며 맞춤길이나 띄어쓰기가 틀릴 수 있듯, 말을 하면서 더듬거나 새거나 어긋날 수 있어요. 게다가 고장마다 다른 삶결이 묻어나는 사투리를 쓸 적에는 말맛이 살게 마련입니다.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는 열일곱 살 언저리 푸름이한테 눈결을 맞춘 길잡이책입니다. ‘말하기’를 살피고 추스르면 될 열일곱 살 푸름이일 테지만, 막상 말보다는 ‘글쓰기’에 꽂힌 푸름이를 살살 타이르는 꾸러미입니다. 굳이 글을 잘 쓰려고 용쓰거나 애쓰거나 힘들지 말라고 달래는 이야기입니다. 글이란 말을 담고, 말이란 마음을 담고, 마음이란 삶을 담고, 삶이란 살림을 담고, 살림이란 사랑을 담고, 사랑이란 꿈을 담으며, 꿈이란 넋을 담습니다. 이오덕 님은 이 얼거리 가운데 ‘삶·살림’까지만 짚으시는데, 우리가 적어도 삶과 살림을 짚을 줄 안다면, 저마다 새롭게 사랑과 꿈과 넋도 짚으면서 이 길을 노래할 만합니다.


  돋보이는 글이란, 남을 깔보는 글입니다. 눈에 띄는 글이란, 남을 밟고 올라선 글입니다. 여러 글 가운데 어느 글이 돋보이거나 뜨일 만합니다만, 모든 글은 ‘남보다 잘 썼구나’ 하고 느낄 적에는 영 허울스럽습니다. 모든 글은 ‘이 글을 쓴 분이 어떤 삶과 마음과 꿈이로구나’ 하고 느낄 적에 그야말로 사랑스럽습니다.


  글밥을 먹건 안 먹건 ‘글이란 곧 말’이면서 ‘말이란 곧 마음’인 줄 모르는 분이 너무 많고, 모르는 척하는 분도 대단히 많고, 배운 적 없는 분이 참으로 많고, 그냥 등지는 분이 숱하게 많습니다. 예전에는 배움책(교과서)이 순 우두머리(독재자)를 치켜세우는 줄거리였다면, 오늘날에는 배움책이 그만 ‘캐릭터북’으로 바뀌었어요. 얼추 2015년 즈음부터 우리나라에는 배움책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알맹이란 사라진 채 손꼽히는 ‘웹툰작가·그림책작가’를 끌어들여서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허울책이 넘쳐납니다.


  지난날에 배움터를 다닌 분이라면, 그저 외우고 시키고 나이로 줄을 매기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한자리를 거머쥐려고 용썼습니다. 이런 발버둥이 모여서 우두머리(독재자)한테 고분고분한 글담(문학단체·권력)을 한켠에서 이루고, 우두머리를 꾸짖고 나무라면서 뒤에서는 술판·계집질을 일삼는 안쓰러운 글담(문학단체·권력)을 다른켠에서 이루었습니다. 추레한 술판을 저지른 사람은 고은 한 사람뿐이 아니지만, 고은 한 사람 이름만 불거졌고, 고은하고 술판을 걸쭉하게 누리고 함께하던 이들이 여태까지 글담 한복판을 주름잡습니다. 우두머리한테 조아리는 글담도 이제껏 바보짓을 뉘우친 적이 없습니다만, 우두머리한테 맞선다면서 목소리를 높인 글담도 이제까지 얼뜬짓을 뉘우친 적이 없습니다.


  왜 이런 두 갈래 글담이 생겼을까요? 우리 스스로 안 배운 탓입니다. 예전에 배운 사람은 예전대로 꼰대스러운 모습으로 글담을 움켜쥐면서 ‘스스로 마음과 말부터 안 바꿉’니다. 오늘은 오늘 배운 사람대로 꾸미고 덧바르고 매만지는 글담을 휘어잡으니 ‘스스로 마음과 말부터 안 바꾸’는 얼거리는 나란합니다.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를 곰곰이 읽어 본다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스스로 ‘어른’이라는 이름을 쓸 만한지 아리송합니다. 아마 하나같이 ‘어른 아닌 꼰대’이지 싶습니다. 꼬부라지고 꼬인 꼰대입니다. 꼿꼿하게 서서 곱게 피어나서 아이들한테 선선히 자리를 내주는 ‘꽃대’는 도무지 안 보입니다.


  말끝 하나로 ‘꼰대’하고 ‘꽃대’를 가를 만한데, 말끝 하나란 무엇인지 헤아려 봐요. 예전 배움책에 익숙한 대로 외워 버릇한 늙은꼰대는 ‘시골사람이나 어린이나 학교를 덜 다니거나 못 다닌 사람 눈높이’를 살피며 쉽게 쓰는 글은 아예 안 쳐다봅니다. 오늘 배움책에 익숙한 대로 캐릭터북에 길든 젊은꼰대는 ‘꾸미고 덧붙이고 베끼고 흉내내고 멋부리는 굴레’에 사로잡혀 바쁜 터라, 젊은꼰대는 젊은꼰대대로 ‘내가 나답게 서는 나로서 나를 사랑하는 말’을 바라보는 길하고 스스로 등졌습니다.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말이라면, 모든 말마디가 오직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른이면서 오직 사랑이라면, 어린이한테 들려줄 ‘모든 말마디’를 하나씩 바로잡고 다듬고 고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른으로 무르익지 않거나, 아직 사랑이 무르익지 않았으면 “뭐 이쯤은 그냥 쓰지!” 하면서 넘어갑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가 묻는 모든 말을 함께 생각할 뿐 아니라,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한테 물어보니? 네가 아는 바가 있어서 말하고 싶지만 내(어른)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니? 내(어른)가 어떻게 보든 대수롭지 않으니까, 네가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먼저 이야기를 하면 돼.” 하며 길잡이 노릇을 합니다.


  이오덕 님이 그동안 쓴 여러 책에서 밝히기도 하는데, 어쩌면 못 알아차리는 분이 많을 텐데요, 이오덕 님이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글쓰기를 가르칠 적에는 ‘쓰라고 시키기’만 하지 않습니다. 이오덕 어른도 늘 곁에서 같이 씁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글쓰기 교사’나 ‘담임 교사’를 보셔요. 아이들한테 숙제를 맡기거나 시키기만 할 뿐, 정작 같이 쓰는 분은 몇인가요? 그래도 더러 아이하고 같이 쓰는 분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글과 우리말이 아직 안 죽었다고 느껴요. 그저 너무 드물게 같이 쓸 뿐이라, 아이들 눈빛이 살아나기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가 손쉽게 사다먹는 주전부리를 돌아봐요. 주전부리 껍데기에 어떤 글이 적혔나요? 작은 동사무소·면사무소에 있는 글자락(서류)을 봐요. 배움턱을 디디지 못 한 사람한테는 대단히 어려운 일본한자말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2024년 12월에 모지리 같은 우두머리가 ‘계엄’을 폈는데, ‘계엄’은 어느 나라 말일까요? 아니 ‘대통령’이란 이름부터 일본말인 줄 아는 사람은 몇일까요? ‘국회·국회의원’도 우리말이 아닌 줄 알아보는 사람은 몇인가요? 우리말은 ‘고장·고을·마을’인데, ‘시도·구군·동읍면’ 같은 일본말을 여태 못 버리거나 못 바꾸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글쓰기란, 말쓰기이면서 마음쓰기이고 삶쓰기에 살림쓰기입니다. 바야흐로 사랑쓰기에 꿈쓰기에 넋쓰기입니다. 이리하여 글쓰기란, 숨결쓰기에 사람쓰기에 하루쓰기입니다. 글쓰기란, 오늘씨기에 나쓰기(너쓰기)에 씨앗쓰기입니다. 글쓰기란, 별빛쓰기에 해쓰기에 바람쓰기에 비쓰기에 숲쓰기에 나무쓰기에 풀꽃쓰기입니다. 머리를 쥐어짜서 겉으로 멋스러이 꾸밀 적에는 ‘글쓰기’가 아닌 ‘꾸미기’입니다. 예전에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이던 무렵에 아이들한테 ‘만들기’를 짐으로 내주기 일쑤였는데, 오늘날 적잖은 글은 ‘글만들기’에 갇혔습니다.


  서로 마음을 쓰듯 글을 쓰기에 서로 반갑습니다. 서로 살림을 짓듯 글을 짓기에 함께 웃습니다. 그러나 꾸미고 만들고 멋부리는 동안에는 그만 담벼락이 높습니다.


  날마다 부지런히 써도 안 나쁩니다만, 이레에 한 꼭지를 써도 아름답습니다. 보름이나 달마다 한 자락을 써도 빛납니다. 철이 바뀌거나 해가 갈 적에 하나를 써도 즐겁습니다. 손으로 짓고 발로 다니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넋으로 사랑하는 하루를 쓸 줄 안다면, 마음과 말과 글이 나란히 반짝일 만합니다.


ㅅㄴㄹ


아이들에게 저마다 삶을 바로 보게 하여 그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정직한 글을 쓰게 하지 않고, 삶을 덮어두고 삶을 등지고 돌아앉아 거짓스런 말장난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글을 흉내내는 손재주를 문예 교육이니 창작 교육이니 하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4쪽)


어른들이 길을 막고 있다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생각하니 어른들의 무지와 횡포는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나지 못하게 억누르는 온갖 교육과 문화의 조건으로 나타나고 있다. (12쪽)


아이들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한 일을 쓰게 하지 않고 책에 나온 어른들의 글을 따라 쓰게 하거나 책에 나온 낱말을 문법에 맞추어서 쓰게 하는 것을 글짓기 공부라 해서 시킬 때 아이들은 글을 못 쓰게 된다. 쓰더라도 아주 맛없는 글, 죽은 글밖에 못 쓴다. (17쪽)


우리 아이들은 오래 전부터 마음의 숨을 못 쉬고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숨구멍을 꽁꽁 틀어막는다. (25쪽)


글쓰기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데 있다. (44쪽)


정직하게만 썼으면 그만인가? 정직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정직은 진실을 얻기 위함이다. (60쪽)


죽어가는 흙과 흙 속의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이것이 삶을 가꾸는 교육이다. (72쪽)


정직하게 쓴 시인데 별로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시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거나 삶을 높여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설거지가 지겹고 신경질이 난다고만 했으니까요. (138쪽)


글을 쓴다고 하니 공연히 마음이 굳어져서 근사한 말재주를 부리고, 그래서 어렵고 재미없는 글이 된 것이겠다. 아이들이 이런 선생님의 글을 읽고 닮아갈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된다. (191쪽)


내가 알기로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자기들의 집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마음이었다. (202쪽)


아이들이 쓴 책을 내는 것은 아이들이 보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한편 어른들도 좀 읽어서 배우란 뜻이다. (246쪽)


잘못된 환경과 교육으로 현실을 도피하는 아이들은 자기의 삶과 자기의 말이 아닌 남의 삶과 남의 말로 거짓된 표현을 하는 곡예를 익혀서 그 마음이 점점 더 깊이 병든다. (324쪽)


글을 쉬운 말로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터인데 도리어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고 아이들이 읽을 수 있게 써 놓은 글은 가치가 없는 글이라 생각한다. (362쪽)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이오덕, 보리, 1993)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4.12.17. 높임말이란



  높임말은 나를 낮추는 말이지 않다. 높임말은 나를 낮추는 듯하지만 내가 나를 노을과 노래처럼 바라보는 말이라고 여길 만하다.


  억지로 시키거나 나이로 누르거나 힘으로 옭매거나 벼슬로 휘두르는 말씨는 높임말이 아닌 ‘시킴말’이다. 이른바 ‘명령’을 마치 높임말이라도 되는듯 몰아붙이는 나라는 엉터리이다.


  높임말은 어른이 아이한테 쓰는 말이다. 어른이라면 둘레에서 나한테 높임말을 쓰지 않기를, 그저 누구나 스스로 높이기를 바란다. 보라! 참어른은 늘 아이 곁에 눈을 맞추고 서서 높임말을 쓴다. 나이로 찍어누르거나 몰아세우는 이는 죄다 꼰대에 늙은이라고 하겠다.


  어른이란 꽃대이다. 늙고 낡았으니 꼰대이다. 어른은 씨앗을 남기려고 곷대를 올리고서 겨울잠에 든다. 새봄에 아이들이 깨어나기를 바라기에 꽃대인 어른이다.


  꼰대나 늙은이는 꽃대가 안 되거나 등지거나 잊은 딱하고 슬픈 굴레이다. 꼬부라지고 꼬여서 꼰대이다. 아이 앞에서만 꼿꼿하고, 힘꾼 이름꾼 돈꾼 앞에서는 꼬박꼬박 굽히기에 꼰대이다.


  곧 어린배움터를 마칠 과역초등학교 어린씨 앞에 서서 살림말과 막말과 좋은말과 나쁜말과 높임말이 어떻게 다른지 풀어서 들려준다. 이제 이야기씨앗을 뿌렸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등허리를 펴자.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야습 夜襲


 야습 작전 → 밤치기 / 밤쓸이

 오늘 밤에 야습을 가해 → 오늘 밤에 쳐서

 야습할 줄을 모르고 → 밤에 칠 줄 모르고


  ‘야습(夜襲)’은 “밤에 적을 갑자기 덮치어 공격함”을 가리킨다고 하는군요. 이 뜻대로 ‘밤치기’나 ‘밤쓸이’라 하면 됩니다. 이밖에 낱말책에 한자말 ‘야습(夜習)’을 “밤에 익힘”으로 풀이하며 싣지만 털어냅니다. ㅅㄴㄹ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야습이라니

→ 이런 기쁜 날에 밤치기라니

→ 이런 반가운 날에 밤쓸이라니

《불새 1》(테츠카 오사무/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2002) 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