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누락(14)

 

그것은 <십자가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십자가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은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사역임을 말해준다.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성 대한 부정을 하나님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역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긍정의 말씀이다.”(129-130, 문장부호 수정인용)

 

그것은 <십자가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십자가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은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사역임을 말해준다. 그 십자가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부정을 인간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이 떠맡으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역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긍정의 말씀이다.

 

독일어 원문: Es ist das »Wort vom Kreuz«. Indem Gottes Wort dieses Wort ist, sagt es, daß das am Kreuz Geschehene Gottes Werk ist. Weil Gott darin die Verneinung des von ihm gelösten Menschen von ihm und auf sich genommen hat, ist Gottes Wort als das Wort dieses Werks sein unbedingtes Jawort zum Menschen: [...]

 

 

Gott darin[=in dem am Kreuz Geschehenen] die Verneinung genommen hat

 

= 하나님은 그 십자가 사건 안에서 부정을 떠맡으셨다

 

Gott die Verneinung des von ihm gelösten Menschen genommen hat

 

= 하나님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부정을 떠맡으셨다

 

Gott die Verneinung von ihm[=dem Menschen] und auf sich genommen hat

 

= 하나님은 그 부정을 인간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이 떠맡으셨다.

 

 

빠진 단어von ihm를 보완하고 문장을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근거되고 존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파악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든 수고들은 좌초한다.>(211) 그러나 계시가 은혜라는 사실은, 더 상세하게 말하면, 그와 같은 은폐성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도록 하시며,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우리 가운데 수단으로 등장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인식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126-127, 문장부호 수정인용)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근거되고 존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파악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든 수고들은 좌초한다.>(211) 그러나 계시가 은혜라는 사실은, 더 상세하게 말하면, 그와 같은 은폐성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도록 하시며,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자신을 중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인식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어 원문: [...] Daß aber Offenbarung Gnade ist, das heißt präzis, daß in dieser Verborgenheit Gott sich durch sich selbst zu erkennen gibt, daß er so bei uns für sich ins Mittel tritt, daß er dadurch uns bekannt wird.

 

ins Mittel treten = 숙어(熟語), ‘사이에 끼어들다’, ‘중재하다

 

er[=Gott] so bei uns für sich ins Mittel tritt

 

=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자신을 중재하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인식하도록 해주실 때만 우리가 그분을 인식하게 되는 그런 분으로 여전히 머물러 계신다>(43f.)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약자인 우리의 인식에 더해주시는 [앞선-주심](Vor-gabe)에 지속적으로 의존해 있다. 하나님 인식은 우리 손에, 우리의 능력 안에 이미 주어진 소여성(所與性)으로 바뀔 수 없으며, 그런 어떤 주어진 능력 덕분에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한 번 전제하신 다음에는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을 우리의 전제로 삼을 수 있다거나 우리의 인식의 규정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며, 그 결과 우리가 그 규정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 인식의 결정적 전제의 관점에서 신학은 항상 빈속으로 서 있다.”(125, 문장부호 및 부분 수정인용)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인식하도록 해주실 때만 우리가 그분을 인식하게 되는 그런 분으로 여전히 머물러 계신다>(43f.)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약자인 우리의 인식에 더해주시는 [앞선-주심](Vor-gabe)에 지속적으로 의존해 있다. 하나님의 앞선-주심 우리 손에, 우리의 능력 안에 이미 주어진 소여성(所與性)으로 바뀔 수 없으며, 그런 어떤 주어진 능력 덕분에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한 번 전제하신 다음에는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을 우리의 전제로 삼을 수 있다거나 우리의 인식의 규정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며, 그 결과 우리가 그 규정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 인식의 결정적 전제의 관점에서 신학은 항상 빈속으로 서 있다.”

 

독일어 원문: [...] aber Gott »bleibt der, den wir nur erkennen, indem er sich uns zu erkenne gibt« (43 f.). Und so bleiben wir auf diese göttliche Vor-gabe unserer Erkenntnis angewiesen. Sie läßt sich nicht in eine Gegebenheit in unseren Händen umwandeln, in unser Vermögen, kraft dessen wir, nachdem Gott sich uns einmal vorausgesetzt hat , dann auch unsererseits Gott uns voraussetzen und zur Setzung unserer Erkenntnis machen und so mit ihr hantieren könnten. Gerade hinsichtlich ihrer entscheidenden Voraussetzung steht die Theologie immer mit leeren Händen da.

 

Sie[=diese göttliche Vor-gabe] läßt sich nicht in eine Gegebenheit in unseren Händen umwandeln

 

= 하나님의 앞선-주심은 우리 손에 이미 주어진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 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인식하도록 해주실 때만 우리가 그분을 인식하게 되는 그런 분으로 여전히 머물러 계신다>(43f.)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약자인 우리의 인식에 더해주시는 가산점(Vor-gabe)에 지속적으로 의존해 있다.”(125, 문장부호 수정인용)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인식하도록 해주실 때만 우리가 그분을 인식하게 되는 그런 분으로 여전히 머물러 계신다>(43f.)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약자인 우리의 인식에 더해주시는 앞선-주심(Vor-gabe)에 지속적으로 의존해 있다.”

 

독일어 원문: [...] aber Gott »bleibt der, den wir nur erkennen, indem er sich uns zu erkenne gibt« (43 f.). Und so bleiben wir auf diese göttliche Vor-gabe unserer Erkenntnis angewiesen.

 

Vorgabe핸디캡Vor-gabe는 다르다.

 

Vor-gabeVorgabe와는 다른 독해를 요구한다.

 

그것은 앞선-주심’.

 

vor앞에Gabe수여’, ‘주어진 것의 합성 명사.

 

 

42쪽의 번역도 수정할 것:

 

동시에 그의 신학은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우선성(Vor-gabe)에 관하여 수없이 묻지만, 그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그의 신학은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앞선-주심(Vor-gabe)에 관하여 수없이 묻지만, 그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독일어 원문: [...] und sie[=Barths Theologie] ist zugleich ihrer Sache gewiß, fragt viel aber zweifelt nicht, nämlich nicht an der göttlichen Vor-gab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적 사유에 근거한 지성적인 공로-칭의의 가능성을 직시하고 공격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삶에 근거한 도덕적 공로-칭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위와 마찬가지로 폭넓고 날카롭게, 그리고 철저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공격하지 못했다.> 전자(지성적인 공로-칭의)의 가능성에 한계를 정하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공로를 통해 할 수 없는 것만큼 자신의 인식능력을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식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은혜 덕분임을 의미한다.”(123-124, 문장부호 수정 및 누락보완 인용)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적 사유에 근거한 지성적인 공로-칭의의 가능성을 직시하고 공격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삶에 근거한 도덕적 공로-칭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위와 마찬가지로 폭넓고 날카롭게, 그리고 철저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공격하지 못했다.> 전자(지성적인 공로-칭의)의 가능성에 한계를 정하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공로를 통해 할 수 없는 것만큼 자신의 인식능력을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후자(도덕적 공로-칭의)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은혜 덕분임을 의미한다.”

 

독일어 원문: »Sie[=die Reformatoren] haben die Möglichkeit einer intellektuellen Werkgerechtigkeit in der Basis des thologischen Denkens wohl auch, aber nicht in derselben Breite, Schäffe und Grundlichkeit gesehen und angegriffen wie die der moralischen Werkgerechtigkeit in der Basis des christlichen Lebens.« Die Abgrenzung gegen jene erstere Möglichkeit bedeutet aber, daß der Mensch genauso wenig wie durch seine Werke sich durch seine Erkenntnisfähigkeit in die Gottesbeziehung zu versetzen vermag, daß sie sich auch in letzterer Hinsicht rein der freien Gnade Gottes verdankt.

 

jene erster[=der intellektuellen Werkgerechtigkeit] Möglichkeit

 

= 전자(지성적인 공로-칭의)의 가능성

 

in letzterer[=der moralischen Werkgerechtigkeit] Hinsicht

 

= 후자(도덕적 공로-칭의)의 관점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