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하나님과 인간을 <존재>라는 포괄적 괄호 안에 묶어 놓고, 그 힘으로 인간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와는 달리, 그 유비는 <믿음의 유비 또는 관계의 유비>(analogia fidel sive revelationis)[...]로 이해될 수 있다.”(157-158, 문장부호 수정 및 부분삭제 인용)

 

하나님과 인간을 <존재>라는 포괄적 괄호 안에 묶어 놓고, 그 힘으로 인간이 자신을 미루어 하나님을 추론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와는 달리, 그 유비는 <믿음의 유비 또는 관계의 유비>(analogia fidel sive revelationis)[...]로 이해될 수 있다.”

 

독일어 원문: [...], kraft der der Mensch von sich auf Gott schließen kann, [...]

 

von sich auf Gott schließen = 자기 자신을 미루어 하나님을 추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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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어쨌든 바르트에게는 다음의 명제가 신학의 진리다. <사유한다는 것(Denken)은 곧 차후(次後)적으로 성찰한다는 것(Nachdenken)을 의미한다.”(157, 문장부호 수정인용)

 

어쨌든 바르트에게는 다음의 명제가 신학의 진리다. <사유한다는 것(Denken)은 곧 뒤따라 성찰한다는 것(Nachdenken)을 의미한다.”

 

독일어 원문: Es gilt für Barth jedenfalls von der Theologie: »Denken heißt: Nachdenken.«

 

151쪽의 소제목을 볼 것:

 

뒤따라-성찰하기(Nach-denklich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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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누락(25)

   

“(4) 신학적인 인식은앞서 말한 자유로운 순종 가운데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실행하신 시작 안에서 우리를 배려해서 더해주시는 가산점, 곧 우리 인식보다 하나님이 앞서 가시는 것부단히 뒤따르고, 뒤따라 추격하며, 뒤따라 사유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인간에게 먼저 말해진 것을 뒤따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행위 속에서 인간은 저 차후(Nachher)적인 특성을 확증한다.”(157)

 

“(4) 신학적인 인식은앞서 말한 자유로운 순종 가운데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실행하신 시작 안에서 앞서주심, 곧 우리 인식보다 앞서시는, 지속적으로 길 위에 계시는 하나님선행(先行)을 뒤따르고, 뒤따라가고, 뒤따라 사유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인간에게 앞서 말해진 것을 뒤따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행위 속에서 인간은 저 사후(Nachher)적인 특성을 확증한다.”

 

독일어 원문: Das theologische Erkennen besteht darin, daß es in solchem freien Gehorsam der in dem Anfangen Gottes mit uns gemachten Vorgabe, dem unserem Erkennen zuvorkommenden Vorangehen Gottes in einem dauernden Unterwegssein nachfolgt, nachgeht, nachdenkt, das ihm im Wort Gottes Vorgesagte nachspricht. In diesem Erkennen bestätigt der Mensch also jenes Nachher, [...]

 

Vorgabe = 사전적 의미는 핸디캡이지만, 여기서는 다른 독해를 요구한다.

 

in einem dauernden Unterwegssein = 지속적인 도상(途上)의 상태에서

 

빠진 곳을 보완하고,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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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우리는 바로 그 은혜로운 시작을 우리의 하나님 인식의 시작이 되도록 함으로써, 즉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그 시작의 은혜는 <우리의 인간적 주체성>의 지양이 아니라 <그것의 새로운 근거를 놓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간적 주체성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 안에 근거를 마련하는 가운데 참된 주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 주체성은 우리 편에서 앞서 말한 인정의 행위를 실행하지만, 그것에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156, 문장부호 수정인용)

 

우리는 바로 그 은혜로운 시작을 우리의 하나님 인식의 시작이 되도록 함으로써, 즉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그 시작의 은혜는 <우리의 인간적 주체성>의 지양이 아니라 <그것의 새로운 근거를 놓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간적 주체성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 안에 근거를 마련하는 가운데 참된 주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 주체성은 앞서 말한 인정의 행위 가운데 우리 편에서 실행되지만, 그것에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정 행위는 맹목적인 굴복이 아니며, 인정하는 가운데 이미 인식하는 행위다.”

 

독일어 원문: [...] Diese Subjektivität wird in jenem Anerkennen unsererseits betätigt und nicht etwa eingeschränkt. [...]

 

diese Subjektivität wird in A betätigt

 

= 이 주체성은 A 안에서 실행된다

 

주체성이 실행된 것은 인정 행위 때문이다.

 

주체성이 인정 행위를 실행한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이 수동태임을 주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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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앞서 말한 자유는 그런 요소들로 인한 <제약성 안에 있는 자유>(648)이며, 그 제약성들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고 또 그런 자유여서도 안 된다. 바로 이 자유 속에서 인간은 <피부로 둘러싸인 인간적 경계선을 넘어서려고 열망할 필요가 없으며>(717), <인간 자신의 자리와 그 자리가 갖는 한계들, 문제들, 위기들, 과제들로부터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는 그보다 앞서 지정된 그 자리에, 그 자리로부터 그리고 그 자리를 향해 지속적으로 (자유롭게) 운동하게 된다.>”(155, 문장부호 수정인용)

 

앞서 말한 자유는 그런 요소들로 인한 <제약성 안에 있는 자유>(648)이며, 그 제약성들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고 또 그런 자유여서도 안 된다. 바로 이 자유 속에서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열망할 필요가 없으며>(717), <인간 자신의 자리와 그 자리가 갖는 한계들, 문제들, 위기들, 과제들로부터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는 그보다 앞서 지정된 그 자리에, 그 자리로부터 그리고 그 자리를 기준점 삼아 지속적으로 (자유롭게) 운동하게 된다.>”

 

독일어 원문: [...] In jener HFreiheit soll er »nicht aus seiner Haut zu fahren begehren« (717), »nicht seinem Ort un dessen Grenzen, Problemen, Nöten und Augaben entlaufen ..., wohl aber unter Vogabe dieses Ortes, von ihm her und an ihm orientiert in Bewegung kommen und bleiben.«

 

nicht aus seiner Haut zu fahren begehren

 

=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열망하지 않다

 

an ihm[=diesem Ort] orientiert = 이 자리를 기준점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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