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울리히는 1535년 고지 독일 종교개혁자들과 영성주의적인 신학자들을 화해시키려고 튀빙겐에서 대담을 열고 그들을 초대했다. 이러한 사실은 슈벵크펠트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난 갈등이 얼마나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었는지를 시사해준다.(546)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울리히는 1535년 고지 독일 종교개혁자들과 영성주의 신학자 화해시키려고 튀빙겐에서 대담을 열고 그들을 초대했다. 이러한 사실은 슈벵크펠트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난 갈등이 얼마나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었는지를 시사해준다.

 

독일어 원문: Welche Beachtung Schwenckfeld und dem Konflikt um seine Person zuteil wurde, zeigt sich daran, dass der württembergische Herzog Ulrich 1535 zu einem Kolloquium nach Tübingen einlud, um einen Ausgleich zwischen den oberdeutschen Reformatoren und dem spiritualistischen Theologen zu erreichen.

 

dem spiritualistischen Theologen = 영성주의 신학자 = 슈벵크펠트

 

주의할 것:

 

복수가 아닌 단수.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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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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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벵크펠트 주위로 지지자 서클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영적인 교제를 위해 만남을 가졌다. 이로써 슈벵크펠트는 신앙공동체의 모든 형태를 거부한 프랑크와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프랑크와는 달리 슈벵크펠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적인 그리스도 인식을 전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546)

 

슈벵크펠트 주위로 지지자 서클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영적인 교제를 위해 만남을 가졌다. 이로써 슈벵크펠트는 신앙공동체의 모든 형태를 거부한 프랑크와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프랑크와는 달리 슈벵크펠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적인 그리스도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고, 중요하게 여겼다.

 

독일어 원문: [...] bildete sich rasch ein Kreis von Anhängerinnen und Anhängern um ihn, die sich zum geistlichen Austausch trafen. Damit unterschied Schwenckfeld sich deutlich von Franck, der jegliche Form von Glaubensgemeinschaft ablehnte. Anders als dieser hielt Schwenckfeld es für möglich und wichtig, die innere Christuserkenntnis anderen mitzutei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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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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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벵크펠트는 1520년대 슐레지엔에서 종교개혁의 확장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성만찬논쟁에서 영혼의 영적인 양식을 강조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츠빙글리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은 슈벵크펠트로 하여금 슐레지엔을 떠나도록 만들었지만, 울름에서 새 출발을 하도록 촉진시켜 주었을 것이다.(545)

 

슈벵크펠트는 1520년대 슐레지엔에서 종교개혁의 확장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종교개혁 내부의 성만찬논쟁에서 영혼의 영적인 양식을 강조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츠빙글리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은 1529 슈벵크펠트로 하여금 슐레지엔을 떠나도록 만들었지만, 울름에서 새 출발을 하도록 촉진시켜 주었을 것이다.

 

독일어 원문: Schwenckfeld hatte in den 1520er Jahren wesentlich zur Verbreitung der Reformation in Schlesien beigetragen. Da er in den innerreformatorischen Auseinandersetzungen über das Abendmahl die geistliche Speisung der Seele betonte, sahen ihn viele zunächst an der Seite Zwinglis. Hatte dies 1529 dazu geführt, dass Schwenckfeld Schlesien verlassen musste, so mag es seiner Aufnahme in Ulm durchaus förderlich gewesen se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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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진리는 문자적인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 진리란 내적인 신령한 말씀을 통해 단지 개인에게만 다가오는 것이므로 결국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중립적인(parteilos) 기독교를 지지하는 신앙논쟁에 반론을 제기했다.(544-545)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진리는 문자적인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 진리란 내적인 신령한 말씀을 통해 단지 개인에게만 다가오는 것이므로 결국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떤 신앙논쟁이든 반대하며 비당파적인(parteilos) 기독교를 지지했다.

 

독일어 원문: [...] wonach sich die Wahrheit der buchstäblichen Festlegung entzieht. Wahrheit war für ihn nur durch das innere Geisteswort sowie nur dem je Einzelnen zugänglich - und damit letztlich unsagbar. Von daher plädierte er gegen jeden Glaubensstreit für ein „parteiloses Christentum“.

 

für A plädieren = A를 찬성하다, 지지하다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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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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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와 서신교환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 콘라트 잠은 신학적으로 츠빙글리에 맞추어져 있었다. 비텐베르크와 취리히가 성만찬논쟁을 시작했을 때고지 독일 지대는 지리적으로만 비텐베르크와 취리히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아니다잠은 분명하게 츠빙글리를 지지했다.(541)

 

츠빙글리와 서신교환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 콘라트 잠은 신학적으로 훌트리히 츠빙글리에 맞추어져 있었다. 비텐베르크와 취리히가 성만찬논쟁을 시작했을 때고지 독일 지대는 지리적으로만 비텐베르크와 취리히 사이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아니다잠과 그의 울름 설교들 분명하게 츠빙글리를 지지했다.

 

독일어 원문: Denn der Münsterprediger Konrad Sam richtete sich theologisch an Huldrych Zwingli aus, mit dem er auch in Briefkontakt stand. Als Wittenberg und Zürich darum stritten, wie das Abendmahl zu verstehen sei und der oberdeutsche Raum nicht nur geographisch zwischen Wittenberg und Zürich lag, da positionierte Sam sich und seine Ulmer Predigten klar auf der Seite des Zürcher Reforma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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