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제 것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여 맞서신다(ent-gegensteht).”(147)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제 것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여 맞서신다(entgegen-stehen).”

 

독일어 원문: [...] so, daß er, weil er Gott ist, dabei einem menschlichen Sichbemächtigen Gottes entgegen-steht.

 

독일어 동사 구분선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동사의 표제어는 아래와 같이 부정형을 쓸 것:

 

우리와 마주하여 다가오지(entgegen-kommen) 않으신다면”(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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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누락(21)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폐되심이기도 하다(비교./1, 209f.). 그러한 은폐성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 안에 전적으로 현존하시지 않는 것(H. Golwitzer)처럼 이해되어서도 안 되고, 그것이 인간의 인식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것(W. Pannenberg)처럼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146-147)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폐되심이기도 하다(비교./1, 209f.). 그러한 은폐성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 안에 전적으로 현존하시지 않는 것(H. Gollwitzer)처럼 이해되어서도 안 되고, 그것이 인간의 인식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것(W. Pannenberg)처럼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독일어 원문: [...] Das ist weder so zu verstehen, als sei Gott nicht ganz in seiner Offenbarung präsent (H. Gollwitzer), noch so, als sei das durch die menschliche Erkenntnisschwäche bedingt (W. Pannenberg).

 

Helmut Gollwitzer(1908-1993)

 

빠뜨린 철자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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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누락(20)

 

그러니까 여기서 목표가 되는 대상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데, 그 관계는 바로 그 대상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 관계 속에서 그 대상은 타자들에 대해 철저히 <자기 초월적으로 소통하는> 존재이긴 하나(/3, 9), 그럼에도 그 관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 있다.”(145, 문장부호 수정인용)

 

그러니까 여기서 목표가 되는 대상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데, 그 관계는 바로 그 대상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 관계 속에서 그 대상은 타자들에 대해 철저히 <자기 초월적으로 소통하는> 존재이긴 하나(비교. /3, 9), 그럼에도 그 관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해 있다.”

 

독일어 원문: [...] In ihr[=der Beziehung] ist er[=der Gegenstand] durchaus »transeunt kommunikativ« zu den Anderen hin (vgl. /3, 9), aber sie beruht allein auf Gottes Gnade.

 

빠진 곳vgl.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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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두 번째 얼굴은 상황(kontextuelle) 신학 프로그램이다. 여기서도 바르트는 신학이 비신학적인 상황들과 관련을 맺는 것 그 자체를 배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학이 <계시를 이성, 실존, 창조, 또는 그 외의 다른 어떤 주체와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보는 것그리고 생각하고 말하면서 그것들과 관련짓는 것>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르트는 계시를 상황과 <관련시켜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학은 계시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주체들을 해석해야지, 다른 주체들을 기준으로 삼아 계시를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142, 문장부호 수정인용)

 

두 번째 얼굴은 상황(kontextuelle) 신학 프로그램이다. 여기서도 바르트는 신학이 비신학적인 상황들과 관련을 맺는 것 그 자체를 배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학이 <계시를 이성, 실존, 창조, 또는 그 외 다른 핵심 개념이 이제 무엇이든 간에 그 개념과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보는 것그리고 생각하고 말하면서 그것들과 관련짓는 것>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르트는 계시를 상황과 <관련시켜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학은 계시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핵심 개념들을 해석해야지, 다른 핵심 개념들을 기준으로 삼아 계시를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독일어 원문: Ein anderes Gesicht ist das Programm einer kontextuellen Theologie. Nicht an sich einen Bezug der Theologie auf nichttheologische Kontexte bestritt Barth, nicht dies, daß sie »die Offenbarung in Beziehung sieht und denkend und sprachend in Beziehung setzt (in Beziehung setzen muß!) - zur Vernunft, Existenz, Schöpfung oder wie die andere Instanz nun heißen mag.« Aber dafür stritt er, »daß sie jene andern Instanzen nach Maßgabe der Offenbarung und nicht etwa die Offenbarung nach Maßgabe jener andern Instanzen interpretieren« soll.

 

wie die andere Instanz nun heißen mag = 다른 핵심 개념들이 이제 무엇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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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바르트가 그렇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자기 인식과 인간의 하나님 인식 사이에 있는 <유사성> 그 자체를 배격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미리 주어져 있다고 전제되는 존재적 동질성에 근거하여 그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유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사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하나님 자신의 인식에 상응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1, 254ff.).”(141-142, 문장부호 수정인용)

 

바르트가 그렇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자기 인식과 인간의 하나님 인식 사이에 있는 <유사성> 그 자체를 배격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미리 주어져 있다고 전제되는 존재적 동질성에 근거하여 그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미루어 하나님을 추론할 수 있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유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사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하나님 자신의 인식에 상응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1, 254ff.).”

 

독일어 원문: Dies nicht, weil er an sich eine »Ähnlichkeit« zwischen der Selbsterkenntnis Gottes und der menschlichen Gotteserkenntnis bestritt. Dies aber wegen der These, es gebe solche Ähnlichkeit aufgrund einer vorgegebenen seinsmäßigen Verwandtschaft von Gott und Mensch, so daß dieser von sich aus auf Gott schließen könne.

 

von sich aus auf Gott schließen = 자기 자신을 미루어 하나님을 추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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