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우리는 바로 그 은혜로운 시작을 우리의 하나님 인식의 시작이 되도록 함으로써, 즉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그 시작의 은혜는 <우리의 인간적 주체성>의 지양이 아니라 <그것의 새로운 근거를 놓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간적 주체성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 안에 근거를 마련하는 가운데 참된 주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 주체성은 우리 편에서 앞서 말한 인정의 행위를 실행하지만, 그것에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156, 문장부호 수정인용)

 

우리는 바로 그 은혜로운 시작을 우리의 하나님 인식의 시작이 되도록 함으로써, 즉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그 시작의 은혜는 <우리의 인간적 주체성>의 지양이 아니라 <그것의 새로운 근거를 놓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간적 주체성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 안에 근거를 마련하는 가운데 참된 주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 주체성은 앞서 말한 인정의 행위 가운데 우리 편에서 실행되지만, 그것에 제약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정 행위는 맹목적인 굴복이 아니며, 인정하는 가운데 이미 인식하는 행위다.”

 

독일어 원문: [...] Diese Subjektivität wird in jenem Anerkennen unsererseits betätigt und nicht etwa eingeschränkt. [...]

 

diese Subjektivität wird in A betätigt

 

= 이 주체성은 A 안에서 실행된다

 

주체성이 실행된 것은 인정 행위 때문이다.

 

주체성이 인정 행위를 실행한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이 수동태임을 주의할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앞서 말한 자유는 그런 요소들로 인한 <제약성 안에 있는 자유>(648)이며, 그 제약성들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고 또 그런 자유여서도 안 된다. 바로 이 자유 속에서 인간은 <피부로 둘러싸인 인간적 경계선을 넘어서려고 열망할 필요가 없으며>(717), <인간 자신의 자리와 그 자리가 갖는 한계들, 문제들, 위기들, 과제들로부터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는 그보다 앞서 지정된 그 자리에, 그 자리로부터 그리고 그 자리를 향해 지속적으로 (자유롭게) 운동하게 된다.>”(155, 문장부호 수정인용)

 

앞서 말한 자유는 그런 요소들로 인한 <제약성 안에 있는 자유>(648)이며, 그 제약성들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고 또 그런 자유여서도 안 된다. 바로 이 자유 속에서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열망할 필요가 없으며>(717), <인간 자신의 자리와 그 자리가 갖는 한계들, 문제들, 위기들, 과제들로부터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는 그보다 앞서 지정된 그 자리에, 그 자리로부터 그리고 그 자리를 기준점 삼아 지속적으로 (자유롭게) 운동하게 된다.>”

 

독일어 원문: [...] In jener HFreiheit soll er »nicht aus seiner Haut zu fahren begehren« (717), »nicht seinem Ort un dessen Grenzen, Problemen, Nöten und Augaben entlaufen ..., wohl aber unter Vogabe dieses Ortes, von ihm her und an ihm orientiert in Bewegung kommen und bleiben.«

 

nicht aus seiner Haut zu fahren begehren

 

=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열망하지 않다

 

an ihm[=diesem Ort] orientiert = 이 자리를 기준점 삼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여기서 전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사전에’(das Vorher)그 대상의 앞섬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대상으로 규정하실 때만, 인간도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로 세워진다.> 말하자면 <인식 대상에 대해 인식하는 인간이 서 있는 위치는 근본적으로 지양될 수 없이 그렇게 규정된 차후’(das Nachher)적 위치다그와 같은 차후적 신분은 인간의 사전’(앞섬)에 의해 결코 바뀌거나 곡해될 수 없다. [...] 여기서도 은혜보다 선행하는 인간[...]은 없다. 오직 은혜를 뒤따르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153, 문장부호 수정 및 부분삭제 인용)

 

“<여기서 전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사전에’(das Vorher)그 대상의 앞섬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대상으로 규정하실 때만, 인간도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로 세워진다.> 말하자면 <인식 대상에 대해 인식하는 인간이 서 있는 위치는 근본적으로 지양될 수 없이 그렇게 규정된 사후’(das Nachher)적 위치다그와 같은 사후적 신분은 인간의 사전’(앞섬)으로 결코 바뀌거나 의미가 바뀔 수 없다. [...] 여기서도 은혜보다 선행하는 인간[...]은 없다. 오직 은혜를 뒤따르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독일어 원문: [...] Also, »der Stand des erkennenden Menschen diesem Gegenstand gegenüber ist der Stand des grundsätzlichen unaufhebbar dazu bestimmten Nachhers, ... das in keiner Weise in ein Vorher des Menschen verwandelt oder umgedeutet werden kann. [...]«

 

A in B verwandeln = AB로 바꾸다

 

das[=das Nachher] in keiner Weise in ein Vorher des Menschen verwandelt werden kann

 

= 그 사후는 결코 인간의 사전으로 바뀔 수 없다

 

umdeuten = 해석을 바꾸다, 새로운 해석을 하다

 

차후 = ‘지금부터 이후라는 뜻이므로 앞서 일어난 일을 뒤따른다는 이 문맥에서는 부적절.

 

das Vorher = ‘사전으로 썼듯이 das Nachher = ‘사후로 맞출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여기서 인식(Erkennen)은 단순히 <인간과 마주치는 존재자에 대한 중립적인 정보나 지식, 곧 문장이나 원리나 체계를 통해 작성되는 정보나 학문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며, 현상 세계 저편에 위치하는 어떤 존재에 대한 수동적인 관조 안으로 입장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151, 문장부호 수정 및 부분삭제 인용)

 

여기서 인식(Erkenntnis)은 단순히 <인간과 마주치는 존재자에 대한 중립적인 정보나 지식, 곧 문장이나 원리나 체계를 통해 작성되는 정보나 학문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며, 현상 세계 저편에 위치하는 어떤 존재에 대한 수동적인 관조 안으로 입장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

 

독일어 원문: Erkenntnis bedeutet hier nicht etwa bloß: »die Erwerbung einer neutralen, in Sätzen, Prinzipien, Systemen zu dokumentierenden Kunde und Wissenschaft von einem dem Menschen begegnenden Seienden [...]«

 

인식의 독일어를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누락(24)

 

여기서 유익을 얻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얻는 것은 그저 단순한 (또 다른 몇 개의) 지식이 아니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계시는 은혜이며, 하나님의 화해의 계시다. 하나님은 그 연합을 자신의 사역이 되게 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바로 그것을 원하고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자로서의 자신을계시하신다.”(151)

 

여기서 유익을 얻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얻는 것은 그저 단순한 (또 다른 몇 개의) 지식이 아니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계시는 은혜이며, 하나님의 화해의 계시다. 하나님은 그 연합을 자신의 사역이 되게 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바로 그것을 원하고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자로서의 자신을계시하신다. 인간은 그 하나님과의 연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일어 원문: Der Mensch soll hier gewinnen. Und er soll nicht bloß (weitere) Kenntnisse gewinnen. Er soll in die Gemeinschaft mit Gott kommen. Offenbarung ist Gnade, Offenbarung göttlicher Versöhnung. Aber er soll in Gemeinschaft mit Gott kommen, der, indem er das sein Werk sein läßt, sich selbst sich als den, der das will und vermag offenbart.

 

Aber er[=der Mensch] soll in Gemeinschaft mit Gott kommen

 

=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빠진 문장을 보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