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그뿐만 아니라 불링거는 [...] 1536년에 출판된 스위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1 스위스 신앙고백서(Confessio Helvetica prior) 작성에 기여했으며, 1566년에 출판된2 스위스 신앙고백서(Confessio Helvetica posterior)를 직접 저술했고,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변호서를 쓰기도 했다. 불링거의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팔츠(Pfalz)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의 요청에 의해 쓰인 것이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스위스 연방의 개신교 지역에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프랑스, 스코틀랜드, 헝가리까지 알려졌다.(638)

 

그뿐만 아니라 불링거는 [...] 1536년에 출판된 스위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1 스위스 신앙고백서(Confessio Helvetica prior) 작성에 기여했으며, 1566년에 출판된2 스위스 신앙고백서(Confessio Helvetica posterior)일종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신학적 변호서인를 직접 저술했다. 불링거의 개인 신앙고백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팔츠(Pfalz)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의 요청에 의해 쓰인 것이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스위스 연방의 개신교 지역에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프랑스, 스코틀랜드, 헝가리까지 알려졌다.

 

독일어 원문: Er [...] trug zur Abfassung des Bekenntnisses der reformierten „Schweizer‟ Orte (Confessio Helvetica prior von 1536) bei und verfasste die 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6), eine theologische Apologie des Heidelberger Katechismus. Dieses „Privatbekenntnis‟ Bullingers, geschrieben auf Bitte des Kurfürsten Friedrich von der Pfalz, wurde nicht nur von den protestantischen Orten der Eidgenossenschaft angenommen, sondern fand europaweit, etwa in Frankreich, Schottland und Hungarn Verbreitung.

 

쉼표에 주의할 것:

 

die 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6), eine theologische Apologie des Heidelberger Katechismus

 

= 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 즉 일종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신학적 변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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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 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누락

 

취리히 의회는 1531년에두 번째 카펠 전쟁 이후 자신의고향인 브렘가르텐을 떠나야 했던27세의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를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불링거는 여러 장애물이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취리히 수석 목사’(Antistes)라는 직무를 감당해야 했다. 한편으로 취리히는로마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5개 지역으로부터 압박을 받는불리한 평화협정 아래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어야 했다.((637)

 

취리히 의회는 1531년에두 번째 카펠 전쟁 이후 자신의고향인 브렘가르텐을 떠나야 했던27세의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를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불링거는 여러 장애물이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취리히 수석 목사’(Antistes)라는 직무를 감당해야 했다. 한편으로 취리히는로마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5개 지역으로부터 압박을 받는불리한 평화협정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어야 했다. 의회는 정치적 성향의 목사가 설교단에 서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독일어 원문: Zu Zwinglis Nachfolger die Zürcher Räte 1531 den erst 27-jährigen Heinrich Bullinger, der seine Heimatstadt Bremgarten hatte verlassen müssen. Bullinger trat sein Amt als „Antistes‟ (erster Pfarrer) unter widrigen Umständen an: Einerseits litt Zurüch unter einem von den fünf katholischen Orten aufgezwungenen unvorteihaften Frieden und andererseits musste das Verhältnis von Kirche und Staat neu austariert werden. Politisierende Pfarrer auf der Kanzel waren vom Rat nicht mehr erwünscht.

 

unter A leiden = A로 고통을 받다

 

빠진 문장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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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가톨릭 지역들인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 추크(Zug), 루체른(Luzern) 그리고 두 도시 프라이부르크(Freiburg)솔로투른(Solothurn)은 스위스 연방의 전통적 숙적이던 오스트리아 왕 페르디난트와새로운 믿음의 근절을 위한협약을 체결했다.(636)

 

가톨릭 지역들인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 추크(Zug), 루체른(Luzern) 그리고 두 도시 프리부르(Fribourg)졸로투른(Solothurn)은 스위스 연방의 전통적 숙적이던 오스트리아 왕 페르디난트와새로운 믿음의 근절을 위한협약을 체결했다.

 

독일어 원문: Die katholischen Orte (Uri, Schwyz, Unterwalden, Zug, Luzern und die Städte Freiburg und Solothurn) schlossen mit dem östereichischen König Ferdinand, dem traditionellen Erzfeind der Eidgenossen, ein Abkommen zur Ausrottung des neuen Glaubens, [...]

 

Freiburg = Fribourg = 프리부르 = 스위스의 주()

 

Solothurn = 졸로투른 = 스위스의 주()

 

지명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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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취리히의 상황은 외교적으로 항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636)

 

취리히의 상황은 외교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졌다.

 

독일어 원문: Außenpolitisch wurde die Lage Zürichs immer schwieriger.

 

immer + 비교급 = 더욱 더, 점점 더

 

immer schwieriger werden = 점점 더 어려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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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누락

 

초기에 츠빙글리를 도와준 펠릭스 만츠(Felix Manz)가 취리히 림마트 강에 수장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이단의 종교적 위법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에 반()하는 위증과 완고한 불순종 때문이었다.(636)

 

초기에 츠빙글리를 도와준 재세례론자 펠릭스 만츠(Felix Manz)가 취리히 림마트 강에 수장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이단의 종교적 위법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에 반()하는 위증과 완고한 불순종 때문이었다. 츠빙글리에게 재세례 신앙은 또한 반란의 한 형태였다.

 

독일어 원문: So wurde der Täufer Felix Manz, ein früherer Mitstreiter Zwinglis, schließlich in der Limmat ertränkt, nicht wegen der „religiösen‟ Deliks der „Ketzerei‟, sondern wegen Meineids und beharrlicher Gehorsamsverweigerung gegenüber der Obrigkeit. Für Zwingli war das Täufertum ebenso eine Form von „Aufruhr‟.

 

빠진 단어와 문장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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