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카우프만,종교개혁의 역사, 황정욱 옮김, , 2017(10).

 

1518년 가을에 교황청 시종으로 일하는 작센의 귀족 카를 폰 밀리츠(Karl von Miltitz, 1490~1529를 통해 레오 10세는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금제 장미장(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제후들에게 수여되는 로마 교회 수장의 훈장옮긴이)을 전달했다.(154-155)

 

1518년 가을에 교황청 시종으로 일하는 작센의 귀족 카를 폰 밀리츠(Karl von Miltitz, 1490~1529를 통해 레오 10세는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금제 장미장(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제후들에게 수여되는 로마 교회 수장의 훈장)을 전달했다.

 

독일어 원문: Durch den sächsischen Adeligen Karl von Miltitz (um 1490-1529), der als Kammerherr in päpstlichen Diensten stand, ließ Leo X. im Herbst 1518 die Goldene Tugendrose, eine einmal im Jahr in der Regel an fürstliche Persönlichkeiten verliehene Auszeichnung des Oberhauptes der römischen Kirche, Friedrich von Sachsen überbringen.

 

옮긴이를 삭제할 것.

 

독일어 원문에 있는 내용의 번역임.

 

편집자가 번역자의 번역을, ()로 오해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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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아우크스부르크의 개신교들은처음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모든 교회를 빼앗긴 후14년 동안 참을성 있게 자유로운 하늘 아래서 평화롭게 예배를 드렸다. 다른 도시들도 예배를 위해 달려가는개신교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메리안의 판화(ein Stich Merians von Wien, 1649)(32-33)

 

아우크스부르크의 개신교들은처음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모든 교회를 빼앗긴 후14년 동안 참을성 있게 노천(露天)에서 평화롭게 예배를 드렸다. 다른 도시들도 예배를 위해 () 밖으로 나가야 하는개신교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메리안의 판화(ein Stich Merians von Wien, 1649)

 

독일어 원문: Die Protestanten in Augsburg feierten, nachdem ihnen nach großen anfänglichen Erfolgen alle Kirchen genommen worden waren, 14 Jahre lang geduldig und friedlich Gottesdienste unter freiem Himmel. Auch andere Orte berichteten vom „Auslaufen zum Gottesdienst‟ der Evangelischen (so noch 1649 ein Stich Merians von Wien).

 

unter freiem Himmel = 노천(露天)에서

 

Auslaufen zum Gottesdienst

 

= 예배를 드리러 성() 밖으로 나가다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 1578년 개신교도의 도시 내 예배가 금지되었다.

 

빈의 개신교도들은 일요일이면, 도시를 빠져나와 인근 도시Hernals, St. Ulrich, Inzersdorf, Vösendorf로 가, 거기서 예배를 드렸다.

 

 

 

개신교도들의 아성, 헤르날스(Hernals)의 모습. 빈의 개신교들은 예배를 드리러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Matthäus d. Ältere Merian,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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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모의재판과 공개적인 교수형과 화형 그리고 죽은 자의 관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사후(死後) 처형을 행한 도시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도시들(안트베르펜, 아우크스부르크, 에든버러, 페라라, 옥스퍼드 등)이 되었다. 그래서 그 도시들에서는 신앙의 문제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는 도시가 되었다.(32)

 

극적인 공개재판 공개적인 교수형과 화형 그리고 죽은 자의 관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사후(死後) 처형을 행한 많은 곳이 일시적이거나 오랜 기간 도시들(안트베르펜, 아우크스부르크, 케임브리지, 페라라, 옥스퍼드 등)이 되었다. 그래서 그 도시들에서는 신앙의 문제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을 받아들였다.

 

Viele Orte wurden nach dramatischen Schauprozessen, öffentlichen Hinrichtungen und Verbrennungen bis hin zu postumen Verurteilungen mit öffentlicher Verbrennung der Särge (Antwerpen, Augsburg, Cambridge, Ferrara, Oxford u. a.) zeitweilig oder langfristig zu Städten, in denen Glaubensflüchtlinge aus vielen Ländern Aufnahme fanden.

 

Schauprozeß = 공개재판

 

단어와 지명,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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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이와 같이 예민한 갈등은 결국내적인 성령의 말씀’(Geisteswort) 그리스도인 각자의 신학적 권위에 토대를 두고[예컨대 울름의 세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ck)카스퍼 폰 슈벵크펠트(Caspar von Schwenckfeld)]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와 같은 기독교의 주요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는[예컨대 베네치아(Venedig), 폴란드(Polen), 지벤뷔르겐(Siebenbürgen)에서 나타난 반()삼위일체론, 제네바의 세르베트(Servet)]성령운동(Spiritualistische Bewegung)을 조성해주는 역할을 하였다.(31)

 

이와 같이 예민한 갈등은 결국내적인 성령의 말씀’(Geisteswort)을 내세우며 그리스도인 각자의 신학적 권위에 토대를 두고[예컨대 울름의 제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ck)카스파 폰 슈벵크펠트(Caspar von Schwenckfeld)]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와 같은 기독교의 주요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는[예컨대 베네치아(Venedig), 폴란드(Polen), 트란실바니아(Siebenbürgen)에서 나타난 반()삼위일체론, 제네바의 세르베트(Servet)]성령운동(spiritualistische Bewegung)을 조성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독일어 원문: Ebenso scharfe Konflikte bereiteten spiritualistische Bewegungen, die sich unter Verweis auf das „innere Geisteswort‟ auf die theologische Autorität des einzelnen Christenmenschen beriefen (z. B. Sebastian Franck und Caspar von Schwenckfeld in Ulm) und die zentrale Glaubensinhalte wie die Lehre von der Dreieinigkeit und von der Gottheit Christi in Frage stellten (z. B. Antitrinitarier in Venedig, Polen, Siebenbürgen; Michael Servet in Genf).

 

unter Verweis auf A

 

= A를 거론하며, 내세우며

 

Siebenbürgen = 트란실바니아 = 루마니아의 중부와 서북부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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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물음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논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필립 폰 헤센은 1529마부르크에서1526년 시작된 야고보서 논쟁 이후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서 중도(中道)의 길을 모색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양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에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536년의 <비텐베르크 협약>(부처와 멜란히톤)이 바로 그것이다. 이 협약으로 개신교는 일치에 이르게 된다.(31)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물음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논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필립 폰 헤센은 1529마르부르크에서1526년 시작된, 논박 문서를 통해 수행된 논쟁 이후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서 중도(中道)모색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양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에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536년의 <비텐베르크 협약>(부처와 멜란히톤)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1973년의 로이엔베르크 협약으로 개신교는 비로소 일치에 이르게 된다.

 

독일어 원문: Der Streit über die Gegenwart Christi im Abendmahl wurde zu einem Zentralkonflikt zwischen Lutheranern und Reformierten. Philipp von Hessen suchte in Marburg 1529 (nach einer über Streitschriften geführten Debatte, die 1526 begann) eine „Mittelstraße zwischen Lutherischen und Zwinglischen‟, was allerdings scheiterte. Ein wichtiger Schritt auf diesem Weg war die Wittenberger Konkordie von 1536 (Bucer und Melanchthon). Aber erst der Leuenberger Konkordie von 1973 gelang die innerprotestantische Einigung.

 

nach einer über Streitschriften geführten Debatte, die 1526 begann

 

= 1526년 시작된, 논박 문서를 통해 수행된 논쟁 이후

 

참고로, 루터와 칼슈타트 사이의 야고보서 논쟁 = 1519/1520

 

아울러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지명과 단어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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