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인식은 결코 그와 같은 대상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그 대상을 증명할 수도 없고 그 대상을 스스로 설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인식에게 자신을 전제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며, 그 인식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식은 믿음이 승인한 개방된-진리를 뒤따를 수 있을 뿐이며, 그 진리를 <확인>하고 그 진리와 일치되려고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때 인식이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은 그러한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어떤 한도에서 그러한지>, 그리고 <사실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교적으로 믿을 것인지의 물음이다.”(62-63, 문장부호 수정인용)

 

인식은 결코 그와 같은 대상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그 대상을 증명할 수도 없고 그 대상을 스스로 설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인식에게 자신을 전제하고, 스스로를 증명하며, 그 인식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식은 믿음이 승인한 개방된-진리를 뒤따를 수 있을 뿐이며, 그 진리를 <확인>하고 그 진리와 일치되려고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때 인식이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은 그러한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교적으로 믿는 것이 오직 <어떤 한도에서 그러한지>에 관한 물음이다.”

 

독일어 원문: [...] Eben darum kann die Erkenntnis der im Glauben anerkannten Wahrheits-Eröffnung nur nachfolgen, sie »verifizieren«, ihr zu entsprechen suchen mit der Frage nicht ob, sondern nur, »inwiefern es so ist«, wie wir christlich glauben, »daß es so ist«.

 

»inwiefern es so ist«, wie A

 

= A가 오직 <어떤 한도에서 그러한지>

 

wie A [= wir christlich glauben, »daß es so ist«]

 

= <사실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교적으로 믿는 것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여기서 <인간학이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결정적인 명제들을 위한, 말하자면 인식론적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로써 <나는 그 당시에거짓 신들에게 경의를 표한 셈이 되었다.>(/1, 30)”(59, 문장부호 수정인용)

 

여기서 <인간학이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결정적인 명제들을 위한, 말하자면 인식론적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로써 <나는 그 당시에거짓 신들에게 경의를 표한 셈이 되었다.>(/1, 130)”

 

독일어 원문: Es sollte hier »eine Anthropologie ... angeblich der Erkenntnisgrund der entscheidenden Sätze über das Wort Gottes sein.« Damit »habe ich damals ... den falschen Göttern Reverenz erwiesen« (/1, 130).

 

인용문 출전의 쪽수를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기초가 놓인 그 관계의 실행이며, 신구약성서가 통고하는 하나의 <계약>의 실행이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우선 하나님 그 자체만도 아니고, 인간 그 자체만도 아니며,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즉시 인간에 관해서도 말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해 오시고 전권을 취하시는 존재다. 이 점에서 윤리학도 교의학에 속한다.”(58, 문장부호 수정인용)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기초가 놓인 그 관계의 실행이며, 신구약성서가 통고하는 그 유일한 <언약>의 실행이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는 우선 하나님 그 자체만도 아니고, 인간 그 자체만도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을 먼저 보완적으로 그 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즉시 인간에 관해서도 말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해 오시고 전권을 취하시는 존재다. 이 점에서 윤리학도 교의학에 속한다.”

 

독일어 원문: Das Theman der chlistlichen Theologie ist darum der durch Gottes Initiative begründete Vollzug deiser Beziehung, des im Alten und Neuen Testament angekündigten einen »Bundes« und darum weder Gott für sich noch der Mensch für sich, um sie dann erst nachträglich in ihrer Beziehung zu sehen. Von Gott ist darum nur so zu reden, daß sofort auch vom Menschen zu reden ist als von dem, den Gott anspricht und in Anspruch nimmt. Insofern gehöhrt zur Dogmatik auch eine Ethik [...]

 

des [...] einen »Bundes« = 그 유일한 <언약>

 

um sie[= Gott und den Menschen] dann erst nachträglich in ihrer Beziehung zu sehen.

 

= 하나님과 인간을 먼저 보완적으로 그 관계에서 파악하기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저자 오류(2)

 

바르트는 가톨릭신학을 대하는 그 당시 개신교의 지배적인 입장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개신교적 입장에서 우리가 가톨릭신학과 공동으로 주장해야 할 필연적인 것이 너무 많이 희생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로마 가톨릭적인 요소가 소리 없이 너무 많이 수용되어서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가 아닌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⁹⁰”(56, 문장부호 수정인용)

 

각주 90: Lebenslauf, 85.

 

각주 90: Lebenslauf, 193.

 

저자의 각주 출전 오류를 바로잡았다.

 

 

아울러, 위 인용문 부분을 ‘Lebenslauf’의 한국어 번역본에서 옮겨 적는다:

 

“<나는 신개신교주의의 주장이 가톨릭의 입장에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로마 가톨릭과 함께 주장해야 마땅한 필수적인 것을 너무 많이 포기해 버리고, 또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적인 요소를 스리슬쩍 너무 많이 받아들이는 바람에,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가 우연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317, 문장부호 수정인용)

Lebenslauf = 에버하르트 부쉬,칼 바르트,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4(1).

 

독일어 원문: [...] von dem ich überzeugt bin, daß es den katholischen Positionen gegenüber unmöglich ist, weil dabei teils zuviel Notwendiges preisgegeben wird, was wir mit den Römischen gemeinsam behaupten müssen, teils zuviel Römisches stillschweigend übernommen wird, wodurch dann der Gegensatz zu einem zufälligen wir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로마서 강해1판에서 등장했던 복음의 흔적은 제2판에서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배후로 사라졌다. 그러나 복음을 추상화하는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일 수는 없다. 여기서 의도되는 부정들로부터는 그 어떤 긍정의 결과도 나올 수 없다.”(54)

 

로마서 강해1판에서 등장했던 복음의 흔적은 제2판에서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배후로 사라졌다. 그러나 복음을 도외시하는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일 수는 없다. 여기서 의도되는 부정들로부터는 그 어떤 긍정의 결과도 나올 수 없다.”

 

독일어 원문: Die in der ersten Fassung auftauchende Spur des Evangeliums verschwand hier hinter einem unheimlichen Gericht. Doch wird ein vom Evangelum abstrahiertes Gericht schwerlich das Gericht Gottes sein. Lauter Negationen ergeben, wie hier wohl beabsichtigt, noch keine Position.

 

von A abstrahieren = A를 등한시하다, 도외시하다

 

ein vom Evangelum abstrahiertes Gericht = 복음을 도외시하는 심판

 

오류를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