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누락(5)

 

교회교의학에서 이전보다 더 분명해진 다른 한 가지는 신학의 <대상>, 즉 바르트가 <말씀> 또는 <계시>라고 부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이다.”(67, 문장부호 수정인용)

 

교회교의학에서 이전보다 더 분명해진 다른 한 가지는 신학의 <대상>, 즉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 또는 <계시>라고 부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이다.”

 

독일어 원문: Klarer als zuvor ist in der Kirchlichen Dogmatik auch, daß der »Gestand« der Theologie, das, was, Barth »Wort« oder »Offenbarung« Gottes nennt, identisch ist mit der Person Jesu Christi : [...]

 

»Wort« oder »Offenbarung« Gottes = 하나님의 <말씀> 또는 <계시>

 

빠진 단어를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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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바르트는 당시에 <의도적으로 갈라져 나간 교회(Sonderkirche)교회가 아닌 것(Unkirchliche)>으로 보았고(/2, 925), 이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더욱 분명히 밝혔다. 신학의 교회성은 <교회일치적(에큐메니칼) 교회> 안의 책임성을 의미한다(/2, 6).”(66, 문장부호 수정인용)

 

바르트는 당시에 <의도적으로 갈라져 나간 교회(das Sonderkirchliche)교회가 아닌 것(das Unkirchliche)>으로 보았고(/2, 925), 이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더욱 분명히 밝혔다. 신학의 교회성은 <교회일치적(에큐메니칼) 교회> 안의 책임성을 의미한다(/2, 6).

 

독일어 원문: Aber was er[=Barth] auch damals sah daß »das bewußt Sonderkirchliche ... das Unkirchliche« ist (/2, 925) , wurde ihm dann zunehmend klarer daß die Kirchlichkeit der Theologie die Verantwortung in der »ökumenischen Kirche« bedeutet (/2, 6).

 

독일어 철자를 바로잡았다.

 

참고로, 표제어는 문법에 맞는 온전한 형태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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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자신의 중심 저작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바르트는 많이 준비한 사전작업에 근거한 탐구 과정을 통해 이미 발견한 것을 그저 늘려서 확대하기만 하면 되는 행복한 종점에 도달했던 것이 아니었다.”(65)

 

그렇다고, 자신의 중심 저작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바르트는 많이 준비한 사전작업에 근거한 탐구 과정을 통해 이미 발견한 것을 그저 늘려서 확대하기만 하면 되는 행복한 종점에 도달했던 것이 아니었다.”

 

독일어 원문: So war Barth, als er mit seinem Hauptwerk begann, aufgrund seiner Vorarbeiten nicht mit seinem Suchen an ein glückliches Ende gelangt, um nun das Gefundene nur noch auszuwalzen.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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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그렇기 때문에 교의학은 자신의 대상을 항상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단지 <시간은 변화하고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이 매우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교의학의 대상은 그 대상을 추구하는 교의학을 지속적인 운동 상태에 놓는다. 그 운동은 끝이 없고 어떤 <결과>에 도달하지 않으며, 어떤 체계가 되는 법이 없고, 오히려 언제나 또 다시 개방된 곳으로 접어든다(/2, 860).”(65, 문장부호 수정인용)

 

그렇기 때문에 교의학은 자신의 대상을 항상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단지 <시간은 변화하고 우리는 그 시간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이 매우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교의학은 그 대상을 추구하는 교의학을 지속적인 운동 상태에 놓는다. 그 운동은 끝이 없고 어떤 <결과>에 도달하지 않으며, 어떤 체계가 되는 법이 없고, 오히려 언제나 또 다시 개방된 곳으로 접어든다(/2, 860).”

 

독일어 원문: Deshalb und nicht etwa, weil »sich die Zeiten ändern und wir uns in ihnen«, muß sie[=die Dogmatik] ihren Gegenstand unter immer wieder neuen Gesichtspunkten anvisieren. Weil ihr Gegenstand so bewegend ist, darum hält sie[1] die ihm nachgehende Dogmatik so in Bewegung, daß sie[2] eigentlich an kein Ende, nicht zu einem »Resultat« kommen, nicht zu einem System werden, sondern immer wieder nur ins Offene münden kann (/2, 860).

 

sie[=die Dogmatik] = sie[1] =sie[2] = 교의학

 

주어가 교의학의 대상이 되려면 = er = ihr Gegen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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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모든 것보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것들은 사정이 허락했다면 다루어졌을 것이지만, <내가여기서 수행해야 하는 바로 이 운동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르트를 <골방 안의 히에로니무스>라고 불렀다(비교. /1, ). 그것은 뒤러(Dürer)의 그림 제목이었는데, 사자가 발 앞에 앉아 있고, 눈앞에는 해골이, 뒤에는 모래시계가 있는 어떤 학자를 그린 그림이었다.”(64, 문장부호 수정인용)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모든 것>, 즉 그밖에 착수했던 것<보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내가여기서 수행해야 하는 바로 이 운동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르트를 <골방 안의 히에로니무스>라고 불렀다(비교. /1, ). 그것은 뒤러(Dürer)의 그림 제목이었는데, 사자가 발 앞에 앉아 있고, 눈앞에는 해골이, 뒤에는 모래시계가 있는 그 학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독일어 원문: Er konnte sagen: »Wichtiger als alles andere«, sonst Angefaßte, »war mir die Bewegung, die ich ... hier zu vollziehen hatte.« »Hieronymus im Gehäuse« nannte man ihn deswegen (vgl. /1, ), nach dem Bild von Dürer, das den Gelehrten zeigt ein Löwe zu seinen Füßen, ein Totenschädel vor Augen, die Sanduhr im Rücken.

 

alles andere«, sonst Angefaßte, = 다른 모든 것, 즉 그밖에 착수했던 것

 

Hieronymus = den Gelehr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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