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제국의회는 1510년 함부르크를 독일 제국의 직속 자유도시로 선포하였으나 덴마크 국왕이나 네덜란드 공작은 함부르크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주장하였다.(208)

 

제국의회는 1510년 함부르크를 독일 제국의 직속 자유도시로 선포하였으나 덴마크 국왕이나 홀슈타인 공작은 함부르크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독일어 원문: Der Reichstag hatte Hamburg 1510 zur Reichsstadt erklärt, aber der dänische König bzw. der holsteinische Herzog pochten weiter auf ihre Landeshoheit; [...]

 

der holsteinische Herzog = 홀슈타인 공작

 

단어를 바로잡았다.

 

 

 

지도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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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플랑드르(Flandern)와 영국 그리고 스웨덴의 쇼넨(Schonen) 지역을 왕래하던 유사 깊은 상인사회에서는 부유한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조합을 결성한 반면, 수공업 장인들은 길드에 가입했고 배심원단이 이 길드를 관리 감독하였다.(208, 띄어쓰기 수정인용)

 

플랑드르(Flandern)와 영국 그리고 스웨덴의 스코네(Schonen) 지역을 왕래하던 유사 깊은 상인사회에서는 부유한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조합을 결성한 반면, 수공업 장인들은 길드에 가입했고 시의회가 이 길드를 관리 감독하였다.

 

독일어 원문: Während diese sich gern in den traditionsreichen Gesellschaften der Flandern-, England- und Schonenfahrer zusammentaten, mussten Handwerksmeister „Ämtern‟ (Zünften) angehören, die der Rat beaufsichtigte.

 

Schonen = Skåne = 스코네 = 스웨덴 남부에 있는 지방

 

Rat = 시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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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멜란히톤의 동생 슈바르츠에르트는 브레텐시와 그 지역에서 종교개혁의 도입과 관철에 뛰어난 역할을 감당했다.” 이러한 자발성에 근거해 아담 바르톨로매우스(Adam Bartholomäus)1541년 브레텐 교인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배분하는 성찬식을 거행했다.(122)

 

멜란히톤의 동생 슈바르츠에르트는 브레텐시와 그 지역에서 종교개혁의 도입과 관철에 뛰어난 역할을 감당했다.” 멜란히톤 동생의 주도로 아담 바르톨로메우스(Adam Bartholomäus) 목사 1541년 브레텐 교인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배분하는 성찬식을 거행했다.

 

독일어 원문: [...], „daß der Melanchthon-Bruder Schwartzerd bei der Ein- und Durchführung der Reformation in der Stadt und im Bezirk Bretten eine hervorragende Rolle spielte.‟ Auf dessen Initiative hin hatte der Pfarrer Adam Bartholomäus im Jahr 1541 der Brettener Gemeinde das Abendmahl unter den Gestalten von Brot und Wein gereicht.

 

Auf dessen Initiative hin

 

= [=멜란히톤 동생]의 주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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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한편 멜란히톤은 1518년 이후 비텐베르크에 있는 작센 선제후령 대학에서 루터 편에 서서 활동하면서도 고향 브레텐에 진심어린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멜란히톤 생가 추모관의 벽면 프레스코에서 발견된 것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데, 1524년 멜란히톤의 브레텐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119)

 

한편 멜란히톤은 1518년 이후 비텐베르크에 있는 작센 선제후령 대학에서 루터 편에 서서 활동하면서도 고향 브레텐에 진심어린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멜란히톤 생가 추모관의 뒤쪽 벽면 프레스코에서 발견된 그림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데, 1524년 멜란히톤의 브레텐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독일어 원문: [...] Dies belegt eine Begebenheit, die in der Gedächtnishalle im Melanchthonshaus ihren Niederschlag im hinteren Wandfresko gefunden hat: Melanchthons Reise nach Bretten im Jahr 1524.

 

Niederschlag = ‘표현’, 여기서는 벽화

 

120쪽 벽화를 볼 것.

 

이 벽화 및 멜란히톤 생가 추모관의 3차원 정보는 다음 사이트를 참고할 것:

 

http://www.melanchthon.com/Melanchthonhaus-Bretten/de/Virtueller_Rundgang/Virtueller_Rundgang.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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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어쨌든 브레텐의 종교개혁은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이후, 즉 선제후 오트하인리히가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가르침과 질서를 성서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따라 이행하라고 지시했을 때 비로소 관철될 수 있었다.(123)

 

어쨌든 브레텐의 종교개혁은 1555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이후, 즉 선제후 오트하인리히가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가르침과 질서를 성서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따라 이행하라고 지시했을 때 비로소 관철될 수 있었다.

 

독일어 원문: Die Reformation konnte sich allerdings in Bretten erst durchsetzen nach dem Augsburger Religionsfrieden von 1555, als Kurfürst Ottheinrich die Amtsleute anwies, die Lehre und Ordnung der Kirche nach der Bibel und dem Augsburger Bekenntnis zu gestalten.

 

빠진 곳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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