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쨍어,복수의 하나님?(구약사상문고 8), 이일례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4(3).

 

시편을 시로써 파악하는 관점으로부터 개별적인 시편 구절들을 누락하고 그것을 통해서 시편을 예술작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1에서 일반적으로 고찰했고, .2.5에서는 시편 139편과 137편을 그 본문으로서 증명하였다.(242)

 

시편을 시로써 파악하는 관점에서는, 개별적인 시편 구절들을 누락하고 그것을 통해서 예술작품인 시편을 파괴하는 것이 금지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1에서 일반적으로 고찰했고, .2.5에서는 시편 139편과 137편을 그 본문으로서 증명하였다.

 

독일어 원문: Dass es sich von der Perspektive her, die Psalmen als Poesie zu begreifen, verbietet, einzelne Psalmverse auszulassen und damit den Psalm als »Kunstwerk« zu zerstören, haben wir oben bereits allgemein reflektiert [...] und für die Pslmen 139 und 137 [...] vom Text her begründet.

 

damit den Psalm als »Kunstwerk« zu zerstören

 

=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작품인 시편을 파괴하는 것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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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쨍어,복수의 하나님?(구약사상문고 8), 이일례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4(3).

 

나는 나와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의 명백한 무감각(Apathie)에 반대하여, 하나님에 대한 수동적인 두려움에 반대하여,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실망과 우리 자신의 무력한 저항의 관점에서 탄원하는 시인들의 새로운 삶을 소원한다.(241)

 

나는 나와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의 명백한 무감각(Apathie)에 반대하여, 하나님에 대한 수동적인 두려움에 반대하여,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실망과 우리 자신의 무력한 저항의 관점에서 탄원하는 기도가 되살아나기를 소원한다.

 

독일어 원문: Ich wünsche mir für mich und unsere Gemeinde ein Wiederbeleben des klagenden Betens gegen unsere offenkundige Apathie und gegen die befürchtete Passivität Gottes, angeischts unserer Entäuschung über diesen Gott und unseres eigenen ohnmächtigen Protestes.

 

ein Wiederbeleben des klagenden Betens

 

= 탄원하는 기도의 되살아남

 

단어와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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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쨍어,복수의 하나님?(구약사상문고 8), 이일례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4(3).

 

그리고 만약 청원(Fürbitte)이 더욱 철저하게 신정론 탄원으로 표현된다면, 소위 말하는 청원은 더 큰 신학적인 깊이를 소유한다.(240)

 

그리고 만약 이웃을 위한 기도(Fürbitte) 신정론 탄원 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표현된다면, 소위 말하는 이웃을 위한 기도는 더 큰 신학적인 깊이를 소유한다.

 

독일어 원문: Und ebenso würden die sogenannten Fürbitten eine größere theologische Tiefe erhalten, wenn sie viel konsequenter als Theodizeeklage formuliert wären.

 

Fürbitte = 이웃을 위한 기도, 중보적 기도

 

wenn sie[=die Fürbitten] viel konsequenter als Theodizeeklage formuliert wären

 

= 이웃을 위한 기도가 신정론 탄원 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표현된다면

 

단어와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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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쨍어,복수의 하나님?(구약사상문고 8), 이일례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4(3).

 

성서의 원수시편들은 격차를 의식하지 않고 폭력에 대하여 분석적으로 담판 지으며 오히려 탄원과 고소의 형식 속에서 논쟁하고 있다.(236-237, 띄어쓰기 수정인용)

 

성서의 원수시편들은 거리를 두고 분석적으로 폭력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탄원과 고소의 형식 속에서 폭력을 다룬다.

 

독일어 원문: Die biblischen Feindpsalmen setzen sich nicht distanziert analytisch mit der Gewalt auseinander, sondern in der Form der Klage und der Anklage.

 

die biblischen Feindpsalmen setzen sich nicht distanziert analytisch mit der Gewalt auseinander

 

= 성서적 원수시편들은 거리를 두고 분석적으로 폭력을 다루지 않는다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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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쨍어,복수의 하나님?(구약사상문고 8), 이일례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4(3).

 

하나님을 하나님과 함께 찾는 그와 함께 노력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찾는 것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231)

 

하나님을 하나님과 함께 찾는 , 그와 함께 노력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찾는 것을 진즉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어 원문: Gott mit Gott suchen, es mit ihm versuchen, das ist ein Wagnis, weil man nicht schon hat, was man sucht.

 

weil man nicht schon hat, was man sucht

 

= 찾는 것을 진즉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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