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 -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것, 우리가 시간으로 하는 일
뤼디거 자프란스키 지음, 김희상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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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러시아의 곤충학자 알렉산드르 류비셰프는 5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 통계 노트를 작성했다. 그는 시간의 속성과 존재감을 정확히 인식했고, 자기에게 주어진 1분 1초까지도 지배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류비셰프는 철저한 시간 관리와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총 70권의 학술 총서와 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 논문을 남겼다. 류비셰프에게 시간은 곧 삶이다. 시간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버는 것임을, 부족한 시간은 없다는 것을 류비셰프에게서 배우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간 관리’는 영원한 숙제다. 시간은 화살처럼 휙 지나간다. 하지만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간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주관적인 표현이다.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한 칸트는 시간을 “시간은 모든 경험의 주관적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동등하게 흐르는 것이며 이를 시계로 확인할 수 있다. 삶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만들어진 시계가 때론 주어진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감옥이 된다.

 

시간은 불가역적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며 시간에 거역할 수 없다. 시간이 왜 과거에서 미래로만 흘러가는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의 의미는 수 천 년 전부터 현재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독일의 철학자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시간의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에 관한 다양한 상념을 펼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 철학적 작업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바라봤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의식이 다른 일에 몰두하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즐거운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반면 최악의 시간은 분노 지수를 높인다. 친구를 기다리다 지치면 화가 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정 기다리기에 고통스럽다. 이때의 지루함은 우리를 예민하게 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정해진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우리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다고 한다. ‘누구나 같은 시간을 가지고, 그것이 끝나면 죽는다’라고 생각하면, 주어진 시간을 이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 전체에 어떤 활동을 해야겠다는 전망이 뚜렷하지 않으면, 지루함과 불안이 동시에 나타난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새 출발에 두려움을 가진다. 죽음에 대한 이른 공포는 흘러가는 시간의 덧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어찌 보면 시간에 대한 의식은 과거와 미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보다 조금 뒤에 존재하며, 우리의 목표와 꿈이 미래에 투영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보다 조금 앞서서 존재한다.

 

자프란스키의 책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특별한 비결은 없다. 결국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저자의 결론이 너무 쉽고 평범한가. 저자의 표현 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것이 딱 하나 있다.

 

망각은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새 출발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49쪽)

 

이 문장은 특별하다. 새 출발을 시도하는 연초 분위기를 '업(up)'하게 띄워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살다가 시간 속에 죽는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못하면 시간이 쏜살같이 가는 것을 안타깝게 느껴진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즈음이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좌절하게 마련이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막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물을 어떻게 흘려보내느냐에 따라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과거의 부귀영화를 따질 때가 아니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한정된 시간을 의미 있게 살려면 과거를 말끔히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어떤 시간을 사느냐 생각하는 문제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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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1-09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래서 일전에 내 글에 그런 댓글을 달았구나.
그래서 답글로 내가 류비셰프 얘기했었잖아.
사실 그 책도 생각 보단 별로였어.
근데 어제 TV를 보니까 <프리한19>에 주제가 어떻게 하면
젊게 살 수 있느냔데 수위를 차지했던 게
친구와 함께 학창시절로 돌아가는 거였어.
그 시절의 말투를 쓰고 완전히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거지.
그랬더니 젊어졌다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때론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 순 뻥인 셈이지.ㅋㅋ

cyrus 2017-01-09 17:08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나 과거를 추억하면서 그 때 그 시절처럼 대화를 나누면 기분은 좋은데, 문제는 만날 때마다 추억담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좋은 추억을 언급하려고 과거를 미화하거나 부풀릴 수도 있어요. 과거에 돌아갈 수 없으니, 과거를 좋게 보정하는 싶은 심리인거죠. ㅎㅎㅎ

2017-01-09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09 17:11   좋아요 1 | URL
역시 **님의 생각은 정말 진지하고, 깊습니다. 저는 **님이야말로 누구보다 삶을 알차게 보내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일찍 퇴근할 수 있으면 6시 이후에 시간이 빕니다. 조만간 제가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이 될 때 만날 시간을 조율하고 싶습니다. ^^

해피북 2017-01-09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판란스키의 책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방법은 없다‘와 ‘망각은 허허벌판에서 새 출발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라는 글귀는 정말 연초에 새겨두기 좋은 말씀이네요 ㅎㅎ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올 한해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지내보렵니다 ㅋ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7-01-09 21:48   좋아요 0 | URL
거창하고 막연한 새해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이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비결인 것 같습니다. ^^

붉은눈 2017-01-1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심해서 현재의 삶에도 종종 방해를 받는 제게 ‘망각‘에 대한 교훈은 꼭 필요한 한 마디 같습니다. 리뷰 잘 보았습니다.

cyrus 2017-01-11 18:3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좋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안 좋은 과거를 잊지 못하는 편입니다. 새 출발을 할 때 방해되는 것들입니다.
 
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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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을 지고 가던 한 노인이 지칠 대로 지쳐 짐을 땅에 내려놓고 죽음의 신을 소리쳐 불렀다. 노인의 부탁을 듣고 나타난 죽음의 신은 노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노인이 힘든 기색을 얼른 감추면서 말했다. “제가 짐을 다시 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솝(Aesop)의 입에서 구전된 것으로 알려진 이 우화는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의 심경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을 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은 모래시계에 비유된다. 모래시계 위에 있는 모래가 밑으로 떨어지듯이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줄어든다. 이처럼 인간에게 시간은 흘러가기보다는 없어진다. 어렸을 때는 세월이 너무 천천히 간다고 불평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점점 적어진다는 걸 느끼는 순간부터 세월의 빠름을 한탄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인과(因果)를 벗어날 길이 없다. 이 세상에 목숨을 받고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고야 만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죽을지는 ‘창살 없는 사형수’이다. 영생불멸의 욕구, 인간만이 버리지 못하는 지독한 욕심이다. 
 
《슬픈 불멸주의자》를 집필한 세 명의 저자 모두 심리학자다. 그들은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하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공포 관리 이론’을 제시한다. 공포 관리 이론은 삶 속에 항상 죽음이 있음을, 그리고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밝혀주는 학설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공포의 힘은 대단하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고,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세차게 몰아넣는다. 그 힘이 셀수록 인간은 쉽게 절망하고 실패하게 된다. 그렇지만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감이라는 두 개의 심리적 자원 때문에 인간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문화적 세계관은 인간이 세상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살아가기 위해 지녀야 할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자기 자신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자존감까지 더한다면,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으며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 있다.
 
이렇듯 죽음과 삶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기에, 죽음을 제대로 죽지 못하게 되면 삶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게 됨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형편은 어떠한가? 죽음을 망각하면서 지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류발전의 동인(動因)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로, 어떤 사람은 쾌락에 탐닉하여 죽음의 공포에서 도피한다. 또한, 과학 기술로 수명을 더 연장하는 법을 개발하여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인간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래 살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지혜다. 인간은 죽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자신보다 미약한 존재(동물, 사회적 약자 등)의 죽음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그들이 겪은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고의 희생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까지 생긴다.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기회가 줄어들고, 죽음의 한복판에서 삶을 생각하는 인간다운 자세마저 사라지고 있다. 스멀스멀 엄습해오는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남 이야기처럼 느낀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과 회피는 삶에 대한 불안을 더욱 짙게 만든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죽음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삶은 죽음 위에 군림하는 척하지만, 이런 집착은 삶의 황폐화를 가져온다. 세네카 같은 스토아학파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항상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죽음의 공포에 해탈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는 건 쉽지 않다. 한평생 인간이 이 두려움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인생의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 이게 왜 이리 어려울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며 언제 죽음이 오더라도 태연히 죽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나보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죽음을 생각하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남아 있는 날들의 가치를 소중하게 지키기 위해, 또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죽음 앞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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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6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07 12:5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김기춘은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심장에 문제 있어서 건강 상태가 안 좋다고 말하지 않나, 더 가관인 건 최순실입니다. 박근혜 덕분에 세계 여행 잘 하고 다녔으면서 ‘공항 장애‘ 때문에 청문회 출석 못한다고 우기더군요.

낭만인생 2016-12-07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결코 제대로 된 삶을 살수가 없을 겁니다. 비겁해 지니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는 삶이 아니라 죽음이 아닐까 싶네요..

cyrus 2016-12-07 12:59   좋아요 0 | URL
올해 들어서 죽음을 주제로 한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나이가 들어서 임종 순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비겁해질 것 같습니다. 그 순간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요.
 
THE PATH 더 패스 : 세상을 바라보는 혁신적 생각 - 하버드의 미래 지성을 사로잡은 동양철학의 위대한 가르침
마이클 푸엣.크리스틴 그로스 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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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변화이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만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 채 시대의 요구에 맞춰 변해가며 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가 아니다. 변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변화의 방향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에 변화의 시도도 좋지만, 변화의 첫발을 어느 쪽을 향해 내딛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변화하기를 두려워한다. 그것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안온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타성에 젖게 되고, 관습이 되고 습관이 되어 타성에 빠진다. 새로움의 세계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생활을 하게 된다. 현재에 안주하고 싶은 그 순간이 변화 추진력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가는 것이다.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뇌는 자극에 대한 반응성이 약해진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고 흥미가 없어질 때, 언제나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며 변화를 주지 않을 때, 현재에 안주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위기로 확산되는 조짐을 미처 알아내지 못한다. 하버드대 중국사 교수 마이클 푸엣은 현실 안주의 시대를 슬기롭게 살 수 있는 대안으로 중국 철학에 주목한다. 다양한 제자백가의 사상 중에서도 유가와 도가 철학은 호랑이의 얼굴 속의 두 눈이다. 중국철학하면 공자와 노자가 떠오를 정도다. 푸엣이 소개한 것은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의 사상, 그리고 내업(內業)이라는 오래된 문헌에 기록된 ()’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 공자와 아주 관련이 깊은 유가 사상의 이념이 보수적이며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막상 공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오래된 중국 철학이 민감한 현실 문제를 건드릴 수 있을 정도로 배울 가치가 있는지 등등 아주 간단한 문제들조차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마이클 푸엣의 하버드대 강의는 중국철학의 잃어버린 위상을 회복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것은 중국철학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커다란 복이다. 한편 중국철학은 우리의 생각을 거울처럼 정확히 비춰주는 도구가 되어 의 존재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요즘 사회는 많은 것들이 쉽게 변화하고 빨리 바뀌고 있다. 잭 웰치는 변화를 강요당하기 전에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웰치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 변화하려면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다라는 정형화된 자아 개념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고대 중국 사상가들은 인간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잡한 존재로 인식했다. 즉 우리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존재이며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맹자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안정된 세상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좋은 대학, 안정된 직업.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선호한다. 내부, 즉 나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주변 일을 해석하면 위기가 위기인 줄 모르거나 위기 앞에 쉽게 좌절한다. 내업은 맹자의 생각과 반대로 외적인 일에 휘둘려서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는 삶을 경계한다. 외부 환경의 위협적이고 불길한 기를 반사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

 

사실 나는 이 책의 내업편에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을 언급하는 내용이 너무 관념적으로 느껴져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요즘 혼이 비정상인 여자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활력을 빼앗고, 우리를 지치게 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외적인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수양하라고 권한다. 나에게 독서는 내면의 안정을 유지하게 해주는 수양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도 마음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혼이 비정상인 여자의 기가 독할 정도로 센 것일까.

 

푸엣은 내업기원전 4세기 중국에서 출간된 작자 미상의 자기 신격화 운문 모음집’(184)이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내업은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관자49편의 제목이다. 관자에 수록된 일부의 글이 후대의 식자들이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업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의 글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푸엣이 인용한 내업의 문장은 관자49편의 시작을 알리는 첫 문장이다.

    

 

무릇 만물의 정기, 그것이 곧 생명이다.

그 아래로 오곡이 생기고, 그 위로 별이 생긴다.

그것이 천지 사이에 떠다니면 귀신이라고 부르고,

가슴에 갈무리되면 성인이라 부른다.

 

(The PATH191)

    

 

무릇 사물이 지니고 있는 정기가 합하면 만물이 생성한다.

땅에서는 오곡을 낳고, 하늘에서는 뭇 별이 된다.

천지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귀신이라 한다.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을 성인이라 한다.

 

(신창호 외 공역, 소나무출판사, 관자502)

 

 

특이하게도 205내업에서 인용한 문장은 한자 원문과 같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하나를 굳게 지킨 군자만이 이를 해낼 수 있다원문에 들어간 첫 번째 한자가 잘못 표기되었다. (성품 성)’이 아니라 (오직 유)’.

   

 

기를 수정하되 바꾸지 않고, 지혜를 변형하되 바꾸지 않는 것.

化不易氣 變不易智

 

하나를 굳게 지킨 군자만이 이를 해낼 수 있다.

執一之君子 能爲此乎

 

(The PATH205)

 

    

 

모든 사물을 변화시키되 자기의 기는 바뀌지 않고,

化不易氣

 

모든 일의 변화를 촉진하되 자기의 지혜는 바뀌지 않으니,

變不易智

 

오직 하나를 굳게 지닌 군자만이 이를 해닐 수 있도다!

執一之君子能爲此乎!

  

(신창호 외 공역, 소나무출판사, 관자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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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30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변화의 시간 차....이걸 보면 정말 어느 것이든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이 변화만이 영원할 듯하더군요...변화하지 못하면 변화를 당하야 하는 것도 세상이치인듯..ㅎㅎㅎ

cyrus 2016-11-30 17:11   좋아요 0 | URL
신기한 점이 변화의 미세한 조짐을 감지 못하더라도 그 변화의 흐름에 저절로 맞추면서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

:Dora 2016-11-30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신 혼 마음 영혼에 어떻게 다른건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예~전에

cyrus 2016-11-30 21:50   좋아요 0 | URL
저도요. 철학적인 관점으로 정신, 혼, 마음, 영혼의 정의를 정리하면 꽤 머리 아플 겁니다. ㅎㅎㅎ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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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드라마보다 재미가 없다. 영화처럼 누구와 눈이 마주쳐 운명 같은 사랑을 나누는 일도 드물고 사는 일이 드라마처럼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뉴스에 등장하는 세상의 현실은 흥미롭고 복잡하고 극적이다. 뉴스가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사건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뉴스가 소설이라는 말은 아니다. 뉴스는 물론 사실의 전달이다. 하지만 단순히 있는 그대로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기자나 편집자에 의해 선택되어 가공되고 배열된다. 기자나 편집자의 시각과 선호도, 편집의 방향에 따라 뉴스의 성격이나 색깔이 달라진다. 자의적 또는 타의적으로 ‘선택되어 가공되는 것’은 프레임(Frame)으로 만들어진다. 어떤 문제를 대하는 관점, 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 세상에 대한 비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프레임은 특정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유도하지만,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 노릇도 한다.

 

만화가 닉 수재니스는 철학적인 관점으로 ‘고정불변으로 굳게 닫힌 창문’을 열려고 시도한다. 이 마음의 창문이 열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은 보통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르려는 관습의 힘, 즉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우리는 지도를 볼 때 관습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서 본다. 늘 그러한 것만 보인다. 아래에는 제주도가 있고, 위에는 백두산을 넘어 만주가 보인다. 하지만 지도를 남쪽이 위로 가게, 즉 거꾸로 보면 우리의 시선 위로 넓은 바다가 보인다. 프레임 창문이 활짝 열린 사고는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사고가 아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사고 과정을 점검하지 않으면 열린 사고를 할 수 없다. 관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다. 관점은 말 그대로 사물을 보는 시선의 위치이다.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가에 따라 사물(또는 현상)의 또 다른 면이 보인다. 더 나아가 숨겨진 면도 볼 수 있다.

 

흔히 이 세상이 개인들의 특성이 너무나도 다른 개성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개성화가 강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좋고 나쁜 것에 대한 표현을 비롯한 자신의 의사 표현이 너무나도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요즘의 실태이다. 지금은 분명 다양성이 추구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구시대적인 발상을 쉽게 버릴 수 없다. 자신의 연령층이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떨쳐버리기가 매우 어렵다. 이게 오랫동안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로 형성되면, 비판과 또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기회가 상실된다.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한다고 해놓고선 토론 댓글을 차단하는 정부의 수준을 보라. 고정관념을 좋아하는 기성세대의 권위주의는 소통과 대화를 방해하는 벽을 세우기에 급급하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고등학교는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에게 징계를 언급했다. 지진이 났을 때도 부산의 고등학교는 학생들을 대피시키기는커녕 자습을 강행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일어난 상황들, 가슴 아프지만 잊어선 안 된 ‘그날’과 닮았다. 세월호에서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변화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고정관념 밖으로 나가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들과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논쟁을 손해 보는 전쟁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고정관념에 갇힌 걸 알면서도 더 넓은 갇힘을 향해 진군한다. 그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 변화되지 않는 이상 현세대의 고정관념 또한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유지될 확률이 높다. 고정관념에 길들인 다음 세대는 단조로운 생각 밖에 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주사위를 바라볼 때 여러 가지 방향에서 숫자를 바라보듯, 새로운 눈, 참신한 생각, 깊이 있는 논쟁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보면 열린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닉 수재니스는 논쟁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전쟁이 아니라 역동적인 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맞부딪히고, 때론 부둥켜안을 수 있는 생각의 춤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누구나 참여 가능한 토론 무대를 마련해줘도 직접 나서서 생각의 춤을 추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부끄럼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온라인 무대에서 마음껏 드러낸다. 그들이 표현하는 것이 생각인지 감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냥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들을 한가득 담아 상대방의 생각을 공격하느라 바쁘다. 이 사람들이 세상에 불만을 품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단조롭고 폐쇄적인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다. 타인과 똑같이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하면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면 ‘얕은 지식의 수준’에 머무른다. 프레임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상이 단조로워지고 짜증이 나는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고 내일 또한 오늘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 것을 착각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 또한 오늘 같을 것이란 고정관념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결국,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세상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인 분노와 언어폭력으로 표출한다. 고정관념과 권위주의는 이런 상황을 더욱 고착시켜 끝없는 추락의 길로 밀어낸다.

 

《언플래트닝 : 생각의 형태》는 지혜롭게 사는 데 필요한 좋은 프레임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창의적 사고를 형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도 아니다. 저자가 알려주는 생각의 도구들을 교육 목적으로 가르친다면, 미래의 세대들의 정신적 성장을 저해하는 ‘이중 프레임’이 겹겹이 형성하게 된다. 이 책에서 자주 강조되는 시각 및 관점의 전환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먼저 생각을 왜곡하는 원천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것을 하지 못하면 언어는 가시성의 조작자가 되고 이미지는 그 독창성과 순수성을 잃게 된다. 꽉 막힌 세상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에 기죽지 말고 원 없이 실행해야 한다. 단조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숨 가쁘게 벌어지는 변화에 푹 젖어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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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6-11-12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굳이 말해서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할 필요가 있나(분란을 만든다는 뉘앙스)˝에요.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공격, 지적, 시비걸기 등으로 받아들이나 봐요. 그래서 자꾸 자기검열(?)하게 되죠. 말해도 될까, 내가 이상한가, 어조가 공격적인가, 말투가 사나운 건가, 태도가 불손(?)한가 등등. 그러다가 ‘말해서 뭐하나‘ 체념해요.
˝가만히 있으라˝는 게 말하지 말라는 거랑 같은 느낌 들어요. 이상하고 부당하고 잘못된 건데 아무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ㅎㅎㅎ

cyrus 2016-11-12 13:20   좋아요 1 | URL
제가 알라딘 서재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cobomi님처럼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서재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소심하게 지켜보기만 했어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잘못된 상황을 모르는 척하는 제 모습이 답답해보였거든요. ^^;;

지금행복하자 2016-11-12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적으로 가만히 좀 있지 라는 툭 튀어나올때 마다 이게 내 몸에 내 입에도 붙어있구나 싶어요.. 세뇌는 무서워요~ 질기구요~

cyrus 2016-11-12 13: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래서 방어적으로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 나와요.

yureka01 2016-11-12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의에 대해 가만히 있으면 능멸당하죠....역사가 그랬습니다..절대 가만있지 않았으니까요.

cyrus 2016-11-12 13:2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오늘도 집에만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
 
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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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와 르네 마그리트. 그들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때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을 이끈 앙드레 브르통과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두 사람에게 가슴 아픈 가정사가 있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몸을 던져 자살했고, 바타유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기도했다.

 

 

 

 

 

 

바타유는 마그리트의 그림 「강간」을 볼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마그리트는 여자의 신체 부위와 얼굴을 절묘하게 조합했다. 여자의 가슴은 눈, 배꼽은 코, 입은 여성의 성기로 에로틱하게 변형되었다. 이 그림 제목은 상대 여성의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섹스를 떠올리는 남성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욕은 식욕, 수면욕과 함께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이다. 섹스의 본질적인 목적은 종족 번식이다. 그러나 바타유는 섹스를 진화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에로틱한 욕망이 죽음에 이르는 황홀한 극치감이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마그리트의 「강간」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그리트가 여자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몰라 당혹해 한다. 반면 바타유는 그림을 보는 재미에 지루할 틈이 없다. 그는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자신이 정의한 에로티시즘을 발견했기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든다. 우리는 성행위 후 다시 옷을 입으면서 에로티시즘의 수치심을 가린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성욕을 금기하는 관습적인 사고를 배신했고, 금기시돼온 일탈을 「강간」을 통해서 과감하게 드러냈다. 종교가 에로티시즘을 부도덕한 감정의 일탈로 규정해도 성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굳이 잘 알려진 사례를 언급하지도 않아도 우리는 에로티시즘이 금기를 위반하게 만드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안다.

 

성욕은 오해받거나 거절되고 혹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도 하다. 때로는 ‘추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때로는 동물에 가까운 수치스러운 본능으로 인식된다. 노동은 성적 일탈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노동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노동력을 팔아 생활을 유지한다. 노동의 생산성을 지향할수록 성욕은 잊혀진다. 섹스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허용돼야 한다는 통념이 형성된다. 여기에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적 금기까지 더해지면서 성을 은밀한 곳에 꼭꼭 숨겨놓고 억압해왔다. 현실적 제약과 결핍은 성욕을 반감시키기는커녕 배가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성욕을 섹스로 풀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치환한다. 카니발리즘(식인 풍습)은 매년 노동과 금기 속에 붙잡혀있던 인간들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향락의 시간이다.

 

 

 

 

 

에로티시즘은 단순한 쾌락의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생멸(生滅)을 확인하게 만드는 감정의 증거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생명은 오직 인간뿐이다. 성적 환희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인간은 죽음, 즉 ‘작은 공포’를 깨닫는다. 마그리트는 성욕과 죽음의 연결고리를 절망적으로 묘사했다. 천으로 얼굴을 뒤집어쓴 채 입을 맞추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성욕의 불안과 공포를 전달한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으로 하얀 속옷의 천이 얼굴을 가린 어머니의 주검을 접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마그리트에게 천은 ‘작은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대상이다. 수없이 두려워하던 긴 시간의 축적이 화가 기억의 심연에 있다. 이 기억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죽음까지 인정한 에로티시즘’(《에로티즘》 11쪽)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의미 있는 삶이 연속적으로 흘러갈 것만 같지만, 죽음이 언제 우릴 가로막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연속적인 존재’이다. 죽음의 공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성적 쾌락에 탐닉해봤자 소용없다. 섹스는 ‘가장 진하면서도 의미 없는 발작’(《에로티즘》 117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종교의 힘이 희미해진 지금, 현대인은 음란함과 폭력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는 감금되고 폐기되어야 했던 성적 욕망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범죄로 규정한다. 오늘날의 에로티시즘은 ‘쾌락에 이르는 부정적 욕망’이다. 성범죄의 위험이 커질수록 에로티시즘의 본질은 왜곡되고 있다. 또다시 에로티시즘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하는 '건강하지 않은' 금기가 된다. 바타유는 여자를 물건처럼 대하는 남자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과 폭력성이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바타유가 추구했던 정상적인 에로티시즘로 회복하는 일이 아직은 요원하게 느껴진다.

 

 

 

 

책머리 8쪽에 바타유는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그가 언급한 지인 중에 자크 앙드레 부아사르라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역자가 이름 표기를 잘못 적었다. 자크 앙드레 부아파르(Jacques-Andre Boiffard)’가 맞다. 부아파르는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 그룹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으며 브르통의 소설 나자의 삽화를 그렸다. 하지만 부아파르도 브르통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그는 바타유와 함께 브르통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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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10-07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과 죽음을 포함해 사랑은 떼어낼 수 없는 존재죠.
욕망의 건강한 분출을 응원합니다.

cyrus 2016-10-07 14:54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랑보다 욕망 분출을 먼저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순간의 쾌락에 집착하면 건강뿐만 아니라 인생마저 파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