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대표작이다.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신들>,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 인문학 책방 일글책 - 고전 읽기 모임 세 번째 도서]
* 아이스킬로스,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도서출판 숲, 2008)
[대구 책방 서재를 탐하다 & 읽다익다 -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21년 9월 도서]
* 천병희 옮김 《그리스 비극 걸작선: <오이디푸스 왕> 외 3대 비극 작가 대표 선집》 (도서출판 숲, 2010)
※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만 수록되었음
* 아이스킬로스, 두행숙 옮김 《오레스테이아》 (열린책들, 2012)
* 아이스킬로스, 김기영 옮김 《오레스테이아 3부작》 (을유문화사, 2015)
오레스테이아는 ‘오레스테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오레스테스(Orestes)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 미케네(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Agamemnon)의 아들이다. 고대 그리스는 여러 개의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모든 도시 국가들의 병력을 결집한다. 수많은 부대를 이끌고 출항하려는 순간 뜻밖의 문제가 생긴다. 함선들을 움직여 줄 바람이 불지 않은 것이다. 예언자 칼카스(Kalchas)는 아르테미스(Artemis)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제물을 바치면 출항할 수 있다고 예언한다. 그런데 칼카스가 지목한 제물은 바로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Iphigeneia)였다. 결국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전쟁터로 향한다.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는 딸을 죽인 남편에 앙심을 품는다. 그녀는 아이기스토스(Aegisthus)를 정부(情夫)로 삼아 아가멤논을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아이기스토스의 아버지 티에스테스(Thyestes)는 미케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복형 아트레우스(Atreus)와 다툰다. 아트레우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다. 아트레우스의 아내 아에로페(Aerope)와 티에스테스의 간통 관계가 발각되면서 아트레우스는 끔찍한 복수를 실행한다. 그는 티에스테스의 세 아들을 죽인 다음 그들의 신체 일부를 음식으로 만든다. 그리고 동생을 초대해 그에게 음식을 내놓는다. 아들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티에스테스는 인육으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이때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테스의 눈앞에 잘려 나간 시신 일부를 내밀면서 음식 재료를 밝힌다. 티에스테스를 추방하면서 아트레우스의 복수는 성공한다.
하지만 두 형제의 복수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티에스테스의 열세 번째 아들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을 죽여서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로 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십 년 만에 미케네로 돌아온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1부인 <아가멤논>은 두 사람이 아가멤논을 복수하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 2부부터 오레스테스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코로스(khoros, 노래를 부르면서 극의 전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는 사람들)의 우두머리인 코로스 장(將)은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자신의 복수가 ‘정의로운 살인’이라고 강조하면서 코로스 장의 비난에 떳떳하게 맞선다. 살인은 비윤리적 행위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독자는 코로스 장의 편에 서게 된다. 그래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는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마주한 몇몇 독자라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살인 행위를 꾸짖는 코로스 장처럼 말을 할 것이다. 나는 이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 행위를 원한과 복수, 이 두 개의 단어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결국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꼭 잔인하게 죽였어야 했냐?’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우선 1부 복수극의 발단인 아가멤논의 살인 행위에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 보자. 그러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는 단순 살인이 아닌 국가 권력에 저항한 단독 행위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아가멤논은 제단 옆에서 직접 딸을 죽여야 하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 참전을 위한 그리스 동맹의 서약을 저버릴 수 없다고 고집한다. 그러면서 딸의 희생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일이니 결코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윽고 손위 왕이 이렇게 말했다네.
“복종치 않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오.
하나 내 집안의 작은 자식을 죽임으로써
제단 옆에서 이 아비의 손을
딸의 피로 더럽힌다면,
이 또한 괴로운 일이오.
그 어느 것인들 불행이 아니겠소?
하나 어찌 동맹의 서약을 저버리고
함대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이오?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치기를 그토록
열망하는 것도 바람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나는 만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오.”
(<아가멤논> 205~217행, 천병희 옮김, 37쪽)
아가멤논은 도시 국가들의 군주 앞에서 내건 약속을 지켜야 한다. 전쟁에 승리해서 평화가 찾아오면 만사(萬事)가 잘될 것이다. 아가멤논은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정당하다’라고 인식하는 동시에 딸을 죽인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낸다. 그런데 아가멤논의 진짜 문제는 이피게네이아의 죽음 이후의 행보에 있다.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기리는 만사(輓詞: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를 공표하지 않았다. 또 그녀를 공적으로 애도할 수 있는 어떠한 장도 마련하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은 점차 미케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간다. 그들은 그리스군의 승리를 간절히 염원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한밤중에 사자(使者)가 불을 피운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불이 승전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환성을 지를 정도로 크게 기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군의 승리라고 확신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반응에 비웃는다.
얼마 전 불의 첫 사자(使者)가 밤중에 와서
일리온이 함락되고 파괴되었음을 알렸을 때
나는 기뻐서 크게 환성을 질렀어요.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로 나를 나무랐지요. “불의 신호를
믿고 트로이아가 이제 폐허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쉽게 감격하는 게 여자에게 어울리는 일이긴 하죠.”
이런 말은 나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게 했죠.
그래도 나는 제물을 바쳤고, 그들도 여자인
나를 따라 시내 곳곳에서 기쁨의 환성을 질렸어요.
신전마다 향은 머금은 불을 피우고
향기로운 그 불꽃 위에 술을 부으며 말이오.
(<아가멤논> 586~595행, 천병희 옮김, 52쪽)
미케네 사람들은 불의 신호가 정말 그리스군의 승리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의 속임수인지 의심한다(<아가멤논> 종가, 475~478행). 이 사람들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쉽게 감격해서 섣불리 판단하는 ‘어리석은 여자(두행숙 옮김, 열린책들)’라고 생각한다. 어떤 현상을 이해할 때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판단하는 행위를 중시하는 미케네 사람들이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은 왕비를 따르겠는가?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16번째 도서(2019년에 완독)]
* 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옮김 《위태로운 삶: 애도의 힘과 폭력》 (필로소픽, 2018)
만약 아가멤논이 없었던 기간에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통치력이 생겼더라면, 왕비는 이피게네이아를 애도했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폭력, 애도, 정치』라는 글에서 국가가 애도해야 하는 대상을 알리는 ‘공적 부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공적 부고에 속한 고인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했거나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 반면 공적 부고 명단에 없는 이름들은 ‘애도 불가능한 대상’으로 돼버린다. 심지어 국가는 그들을 애도하는 시간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애도할 수 있는 공간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버틀러는 애도 대상을 차등적으로 분류하는 기준이 ‘슬픔의 위계질서’까지 만든다고 비판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난 군인, 테러로 목숨을 잃은 무고한 시민, 일면식도 없는 타지 사람을 구하다가 세상을 떠난 외국인 등의 소식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함께 슬퍼한다. 하지만 성전환 수술 이후 강제 전역 처분을 받은 군인의 죽음, 국가가 미리 대처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재난을 피하지 못한 시민, 제대로 된 작업복을 입지 않은 채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뿐. 국가와 국민은 합심해서 그들만의 공적 부고 명단을 작성하고, 명단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배제한다. 평범한 우리도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상을 규제하는 국가 권력의 공모자가 될 수 있다. 버틀러는 개인 또는 집단을 위한 애도와 슬픔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야 한다면서 재차 강조한다.
우리는 어떤 조건하에서, 어떤 배제의 논리에 따라, 어떤 삭제와 이름 지우기를 통해서 애도가능한 삶이 결정되고 유지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폭력, 애도, 정치』 중에서, 《위태로운 삶》 71쪽)
이피게네이아는 잊힌 것이 아니라 지워졌다. 전쟁이 끝나면 살아남은 자들은 전사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아가멤논과 미케네 사람들은 공적 부고에 전사자들의 이름만 빼곡히 적는다. 명단에 이피게네이아의 이름을 적을 여백이 없다. 그러는 사이 이피게네이아 단 한 사람의 희생은 애도할 수 있는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분노했다. 그녀의 살인 행위는 단순히 딸을 죽인 남편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아가멤논은 불평등한 애도 분위기를 조성한 국가 권력 그 자체다. 국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가볍게 보는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클리타임네스트라였다. 그렇지만 미케네 사람들은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 허망하게 죽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가멤논을 애도한다. 아이기스토스는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피의 복수에 동참했다. 이런 그가 원수의 딸을 알기나 할까? 만약 이피게네이아가 아들이었다면? 과연 아가멤논은 자신이 죽인 아들을 어떤 방식으로 애도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