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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의미
임주혜 지음 / 행복우물 / 2023년 7월
평점 :
평점
3점 ★★★ B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 산울림 <너의 의미>(1984년) 노랫말 -
<직립보행>은 대구 삼덕동에 있는 인문학 헌책방이다. 주말에만 여는 곳이다. 책을 매우 좋아하는 부부가 책방을 함께 지킨다. 내 집 드나들 듯이 <직립보행>을 찾아간다. <직립보행> 부부와 대화할 때가 무척 즐겁다. 한 번은 내가 부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두 분은 책 한 권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을 잘하시던데 왜 서평을 안 쓰시는 거죠?” 그러자 부부는 말없이 서로 마주 보면서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그땐 그 미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부부는 집이든 책방이든 늘 붙어 다니면서 각자 읽은 책이 어떤 내용인지 이야기한다. 책 읽고 느낀 생각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 부부의 독서 취향은 다르지만,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각자만의 읽는 경험을 공유한다. 부부는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서로를 변화시키고 성장한다. 매일 머리와 마음에 책을 품고 사는 부부의 애정 온도는 늘 따뜻하기만 하다. 부부는 책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읽는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서로 확인하고 있었다.
혼자서 책을 읽기, 혼자서 책이 많은 곳에 가기, 혼자서 책 속에 깊이 파고들어 생각하기. 책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기록하기. 책을 펼치는 순간 내가 주로 하는 일들이다. 내게 서평과 독후감은 단순히 책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다. ‘읽고 기록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삶의 흔적이다. 내 글은 특별하지 않다. 내 글이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써야 한다. ‘읽고 기록하는 나’로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책에 대한 기억을 혼자만 알고 있다면 ‘기록’해야 한다. ‘기억’이 또렷한 형체로 남으면 ‘기록’이 된다. 기록하지 않으면 읽는 경험과 관련된 모든 기억은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삶의 의미도 희미해져 버린다.
방송작가로 활동 중인 임주혜의 《읽기의 의미》는 책을 읽은 후에 기록한 에세이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은 어디선가 책 읽고 글을 쓰고 있을 무명의 존재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비타민 영양제’다. 저자에게 ‘문학 읽기’와 ‘쓰는 일’은 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읽기의 의미》를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해 이렇게 읽어볼 것을 제안한다. 당연히 독서의 시작점은 서문(「즐거운 발견」)이다. 그다음은 1부 제일 마지막 글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를 읽는다. 이 두 편의 글은 저자가 글로 쓴 자화상이다. 글로 쓴 자화상은 ‘읽고 기록하는 인간’으로서 살아온 작가 자신 모습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무조건 글을 쓰라는 건 아니다. <직립보행> 부부처럼 읽는 경험을 말로 표현해서 (책을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들려주는 일 또한 희미해져서 잃어버리기 쉬운 내 삶을 알록달록 빛나게 해준다. 독서 모임은 ‘읽는 나’를 만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다.
저자의 글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 하지만 글이 서평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워서 책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은 글도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언제나 위대하다」라는 글은 저자가 C. S. 루이스(C.S. Lewis)의 《책 읽는 삶: 타인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는 독서의 즐거움》(두란노, 2021)을 읽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글에 언급된 책은 《책 읽는 삶》이 아니라 루이스의 다른 책 《순전한 기독교》(홍성사, 2018)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 2018)다. 《책 읽는 삶》은 루이스가 남긴 수많은 책과 편지 속에 있는 책과 독서와 관련된 문장을 발췌하여 엮은 책이다.
편집 상태가 엉망진창이다. 띄어쓰기가 안 지켜진 여러 개의 문장은 눈 감아 줄 수 있다. 하지만 오자가 너무 많다. 오자 발견은 읽는 이에겐 썩 즐겁지 않다. 교정을 제대로 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오자가 책에 몰입한 눈동자를 멈추게 하는 건 ‘화가 나는 일’[주]이다. 게다가 각주로 달린 책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 것도 있다.
* 43쪽
나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아마 국내에 번역 출간된 그녀의 글(세월, 진정한 장소, 사건 등)은 다 읽었을 거다.
* 88쪽
염상섭의 삼대도, 윤흥길의 장마도 읽지 않았다.
책 제목임을 알 수 있는 기호(‘《》’, ‘<>’)를 표시해야 한다.
* 59쪽
얼마 후 김화영 선생님이 번역한 장 지오노의 글을 읽게 됐는데, 다시 카뮈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자가 읽었다는 장 지오노(Jean Giono)의 글 제목이 언급되지 않았다. 김화영 선생이 유일하게 번역한 장 지오노의 글은 《나무를 심은 사람》(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민음사, 2009)이다.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하루해는 어둠의 혼란된 시각에서 시작하고 끝난다~)은 김화영 선생의 책 《행복의 충격: 지중해, 내 푸른 영혼》(문학동네, 2021)에 있는 구절이다.
* 67쪽
또렸하게 → 또렷하게
* 69쪽
나는 기억한다. 매일 밤 8시, 카메라 앞에서 조금은 흐트러짐을 허용하면서도 결코 흐트러짐이 없었던 그의 모습을.
69쪽 문장은 「남아있는 장면들」이라는 제목의 글 속에 있다. 손석희의 《장면들: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창비, 2021)에 대한 글이다. 손석희 앵커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한 JTBC 뉴스 프로그램 <JTBC news 9>는 오후 20시 55분, 즉 밤 9시에 시작했다. 손석희 앵커는 매일 밤 뉴스를 진행하지 않았다. 평일 방송은 손석희가, 주말 방송은 박성태 앵커가 진행했다.
* 149쪽
<일리야스> → <일리아스>
경계까 → 경계가
* 157쪽
문학?이라고 하면 너무 고고하게 느껴지려나,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물음표가 엉뚱한 곳에 있다.
* 164쪽
포터에벗 → 포터 애벗
* 165쪽 각주
우찬재 → 우찬제
* 175쪽
추긍하기 시작한다 → 추궁하기 시작한다.
* 193쪽 각주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임종성 옮김, 홍성사
C. S 루이스 → C. S. 루이스
역자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 역자는 두 명이며 장경철과 이종태다.
* 195쪽
굴직한 절망들을 경험하고 견뎠다 → 굵직한 절망들을 경험하고 견뎠다.
* 200~201쪽
내 주변 사람들의 언어에는 진심 어린 격려와 사랑이 늘 베어있다.
* 201쪽
<대성당>이라는 장편으로 유명한 레이번드 카버. 그의 단편 소설집을 읽으며 나는 카버가 세상을 존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베다’는 날이 있는 물건으로 끊거나 자르는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동사다. 정확한 표현은 스며 있음을 뜻하는 ‘배다(배어있다)’다.
레이번드 카버 → 레이먼드 카버
카버의 《대성당》(문학동네, 2014)은 장편이 아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열두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 220쪽
<멋진 신세계>는 다양한 철학적 의미가 담긴 글로 유명하지만 사실 나는 헉슬리의 문체가 좋아서 책을 다시 펼친다. 소설의 차가운 배경과 달리 문제는 한없이 따뜻하다.
‘문제’는 ‘(헉슬리의)문체’의 오자다. 《멋진 신세계》 번역본은 여러 권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본인이 읽은 《멋진 신세계》의 역자와 출판사 정보를 언급하지 않았다. 저자는 어떤 번역본을 읽었길래 헉슬리의 문체가 좋다고 하신 걸까? 번역본이 아니라면 《멋진 신세계》 원서의 문체일 수 있다.
* 238쪽
위플레쉬 → 위플래쉬
* 252쪽
제레미 리프킨 → 제러미 리프킨
사실 발견된 오자가 몇 개 더 있다. 하지만 이 글의 배꼽(정오표와 주석)이 배보다 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주] 책 2부에 있는 글 제목이다. 저자가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난다, 2022)를 읽고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