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서(奇書)내용이 기이한 책이다. 내용이 어려워서 읽기 힘든 책을 뜻하기도 한다.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라면 잘 아는 ‘일본 추리소설 3대 기서가 있다. 오구리 무시타로(小栗虫太郎)흑사관 살인 사건(1934), 유메노 큐사쿠(夢野久作)도구라 마구라(1935), 나카이 히데오(中井英夫)허무에의 제물(1964)이다.

















* 오구리 무시타로, 강원주 옮김 흑사관 살인 사건(이상미디어, 2019)

 

* [절판] 오구리 무시타로, 김선영 옮김 흑사관 살인 사건(북로드, 2011)




올해가 《흑사관 살인 사건》이 발표된 지 90주년이 된 해다흑사관 살인 사건후리야기(降矢木) 가문의 성에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성이 중세에 유행한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건물과 비슷해서 흑사관이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이 작품에 오구리 무시타로의 탐정소설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변호사인 노리미즈 린타로(法水麟太郎)가 등장한다. 노리미즈는 박식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설명하면서 불가사의한 사건을 추리한다. 그런데 문제는 노리미즈가 아는 게 너무 많아서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장광설이 되고 만다. 노미리즈는 종교, 점성술, 과학, 범죄학 등 다양한 분야의 문헌과 용어들을 언급하면서 설명한다. 흑사관 살인 사건이 기서로 평가받는 이유가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현학적인 내용이다. 독자는 인내심 하나만으로 방대하면서도 난해한 내용을 뚫으면서 읽어야 한다.

 



















* [절판] 유메노 큐사쿠, 이동민 옮김 도구라 마구라(크롭써클, 2008년, 전 2권)





도구라 마구라유메노 큐사쿠의 유작이다. 유메노는 이 소설을 써서 탈고하는 데까지 십 년을 바쳤다. 소설이 발표된 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독특하게도 뇌와 기억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소설을 SF로 보기도 한다. 두 권으로 된 번역본이 출간되었지만, 절판되었다.

















* 나카이 히데오, 허문순 옮김 허무에의 제물(동서문화사, 2009)

 



허무에의 제물반 미스터리(anti mystery)’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번역본을 낸 출판사는 동서문화사. 허무에의 제물의 역자는 해설에서 ‘600쪽이 넘는 소설을 단숨에 읽었다라며 운을 뗀다. 읽기 까다로운 작품을 완독한 것을 자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작품인지 모르고 한 거짓말일까? 저작권을 무시하면서 책을 출판하고, 유령 역자(익명의 역자가 번역한 책에 고인이 된 역자의 이름을 쓴 것)’를 내세워 책을 펴낸 출판사의 전력을 생각하면 역자의 말이 미덥지 않다.

















* 윤영천 미스터리 가이드북: 한 권으로 살펴보는 미스터리 장르의 모든 것(한스미디어, 2021)




미스터리 가이드북을 펴낸 미스터리 전문가 윤영천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흐름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3대 기서에 도전하라고 권한다. 단순히 기서라는 단어에 혹해서 도전한다면 그 시간에 다른 작품을 읽으라고 말한다. 미스터리 마니아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서를 더 읽고 싶어진다.


















* 백휴 추리소설로 철학 하기: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나비클럽, 2024)




철학을 전공한 추리소설 작가 백휴는 추리소설로 철학 하기에서 추리소설은 오락소설이라는 통념을 깨뜨리기 위해 추리소설을 철학적으로 읽기를 시도한다나는 이 책을 프롤로그-12순으로 읽었다. 12장은 프롤로그의 심화 편이라 할 수 있는데, 추리소설을 철학적 관점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본격적으로 나온다그런데 12장에 인용된 철학자가 너무 많다. 철학 용어를 인용하면서 추리소설을 철학으로 독해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 독자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근거를 설명할 땐 단순할수록 좋다.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이 필요해 보인다.


고전 추리소설에 묘사된 탐정은 추리력과 논리력이 뛰어나다. 가장 대표적인 탐정이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다. 추리력과 논리력은 어떤 현상을 올바르게 분석하게끔 해주는 이성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능력이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서구 지식인들이 찬양했던 이성의 입지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한다. 니체(Nietzsche)로 시작해서 몇몇 철학자들이 이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추리소설 역시 이성과 반이성이 충돌하는 철학의 흐름에 맞춰 유행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나온 추리소설 속 탐정은 똑똑하지 않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거나 결국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3대 기서 중 흑사관 살인 사건을 먼저 읽어보려고 한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읽으려고 했는데, 추리소설로 철학 하기를 읽고 난 후에 생각이 달라졌다. 추리소설 3대 기서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읽어보면 어떨까? 읽기 어렵기로 악명높은 책들을 더 어려운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럽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탐정소설 속에 지혜의 알갱이들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지혜의 알갱이 한 톨이라고 찾지 못해도 좋다. 일단 흑사관 살인 사건을 끝까지 읽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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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2-15 0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인데 내용이 어렵고 그것도 철학적인 접근~~
그럼에도 어쩐지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cyrus 2024-02-23 07:00   좋아요 1 | URL
내용이 어렵거나 특이한 책은 한 번이라도 읽어보고 싶어요.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거든요. ^^

stella.K 2024-02-15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읽는다면 흑사관부터 도전할까 했는데 네 글 읽어보니 미스터리 가이드 북이랑 철학하기부터 읽어야지 싶네. 미스터리물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만만히 봤다간 큰코 다치겠군.
근데 허무에의 제물이 그런 사연이 있었군. 저 제목도 사실은 문법상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한다. ~~에의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들었거든 일본식 표현이라고 하던데. 손 좀 보면 좋을텐데ᆢ

cyrus 2024-02-23 07:03   좋아요 0 | URL
저도 ‘~에의’라는 표현이 눈에 거슬렸어요. 동서미스터리문고 개정판이 나올 가능성이 희박해서 제목이 고쳐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최근에 개정판으로 나온 기이하고 기묘한 이야기: 첫 번째 뒤표지에 보면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모파상, 러브크래프트, 스토커 등 대작가 10인의 숨은 명작

국내 최초 공개


 


국내 최초 공개라는 표현을 누가 썼는지 궁금하다사실을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고 처음 소개한 것처럼 뻔뻔스레 쓰다니.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외, 정진영 옮김, 기이하고 기묘한 이야기: 첫 번째(책세상, 2023)

 

* [구판 절판]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걸작선 1(책세상, 2004)




윌리엄 W. 제이콥스(William W. Jacobs)부적, 몬터규 로즈 제임스(Montague Rhodes James)부르시면 갈게요,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오를라, 이 세 편의 단편소설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2004년에 출간된 구판 세계 호러 걸작선 1에 수록되어 국내 최초로 공개된 것은 맞다. 하지만 2004년 이전에 한 번 번역된 사실이 확인되면 내 견해는 틀리게 된다.











* [절판, No Image] 정태원 엮음 공포특급 5 : 세계 편(한뜻, 1996)




부적의 원제는 <The Monkey’s Paw>. 가장 많이 알려진 소설 제목이 원숭이 손 또는 원숭이 발이다말라비틀어진 원숭이 손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부적이다부적1996년에 출간된 공포특급 5 : 세계 편에 수록된 적이 있다. 제목은 원숭이 손’이다. 1990년대에 장르문학 전문 번역가로 활동한 정태원(1954~2011)이 이 책의 엮은이로 참여했다. 그 이후로 부적은 1997년과 1998년에 나온 단편소설 선집에 수록되었다.


모파상은 매독으로 인해 생긴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그를 죽을 때까지 괴롭힌 정신 착란증(섬망증)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쓰게 만든 원인일지도 모른다. 오를라』(The Horla)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는 오를라라는 이름의 괴이한 존재에 필사적으로 저항해보지만 끝내 미쳐버리고 만다. 모파상은 정신이 점점 피폐해지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실감 나게 묘사했다.
















* [절판] 기 드 모파상, 한용택 옮김 모빠상 괴기소설 광인?(장원, 1996)

 



1996년에 출간된 모빠상 괴기소설 광인?에 오를라』가 수록되었다. 이 책에 총 25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여기에 모파상이 쓴 최초의 단편소설과 죽기 전에 발표된 단편소설이 포함되어 있다. 모파상은 오를라를 두 가지 버전으로 썼다. 1886년에 발표된 오를라1판의 주인공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환각 증세를 설명한다. 이듬해에 나온 오를라2판은 주인공 자신이 겪은 기이한 체험을 일기에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전개된다. 모빠상 괴기소설 광인?은 두 가지 버전의 오를라가 실린 단편 선집이다.
















기 드 모파상한용택 옮김 《박제된 손: 기 드 모파상의 판타스틱 스토리》 (우물이있는집, 2007)




2007년에 출간된 모파상 단편 선집 박제된 손모빠상 괴기소설 광인?의 역자가 번역한 책이라서 어떻게 보면 1996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이라 할 수 있다. 박제된 손도 두 가지 버전의 오를라를 만날 수 있는 책이지만, 모빠상 괴기소설 광인?에 소개된 25편의 작품 모두 수록된 건 아니다. 박제된 손에 수록된 모파상의 단편소설은 총 19편이다.
















* 몬터규 로즈 제임스, 조호근 옮김 몬터규 로즈 제임스: 호각을 불면 내가 찾아가겠네, 그대여 외 32(현대문학, 2014)

 

* 안길환 옮김 영국의 괴담(명문당, 2000)


 


몬터규 로즈 제임스의 부르시면 갈게요』(Oh, Whistle, and I’ll Come to You, My Lad)는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고대에 만들어진 청동 호각(호루라기)을 불면 유령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2000년에 출간된 영국의 괴담에 처음 소개되었다. 제목은 <피리를 불면 내가 가지>영국의 괴담괴담은 익명의 작가가 만든 도시 괴담이 아니다. 영국 출신 작가들이 쓴 단편 공포소설을 모아 놓은 책이다영국의 괴담을 펴낸 출판사는 동양 고전을 주로 펴내는 곳이다. 아무래도 한문에 제일 관심이 많은 출판사가 만든 책이라서 그런지 문장에 한문으로 된 단어가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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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5-16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도 깜놀할 듯,ㅎㅎ

cyrus 2023-05-16 06:38   좋아요 0 | URL
출판사는 제 글에 관심이 없어서 그 정도 반응은 보이지 않을 거예요. 이런 글이 있는 것조차 모를 수도 있어요... ㅎㅎㅎ
 
기이하고 기묘한 이야기 첫 번째 패닉룸
H. P. 러브크래프트 외 지음, 정진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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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기이하고 기묘한 이야기-첫 번째2004년에 나온 세계 호러 걸작선 1의 개정판이다. 세계 호러 걸작선 1서양 작가들의 단편 공포소설 선집이다. 구판에 수록된 단편소설은 총 열네 편이다이 중에서 네 편의 단편은 개정판에 실려 있지 않다. 개정판에 빠진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숨 막힘(Loss of Breath)


* 아서 매첸(Arthur Machen) - 악마의 뇌(The Immost Light)


* 로버트 체임버스(Robert Chambers) 옐로 사인(The Yellow Sigh)


* 사키(Saki) - 스레드니 바쉬타르(Sredni Vashtar)




그뿐만 아니라 (출처를 알 수 없는) 삽화와 작가를 간략하게 소개한 글도 삭제되었다. 그런데 작가 소개 글이 삭제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르문학,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서양 작가들의 공포 문학 작품을 주로 번역한 정진영 씨의 해설에 작가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윌리엄 W. 체임버스(William W. Jacobs)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구판에 있는 오탈자나 문장의 오역을 고치지 않고, 책값을 올려서 개정판이라고 펴내는 비양심적인 출판사들이 종종 있다. 개정판인 척하는 구판은 잘못 만든 책이다. 이런 책도 절대로 독자들에게 팔면 안 되는 파본이다. 출판사는 독자들을 속인 책을 펴낸 것에 사과해야 하며 그 책을 구매한 독자들에게 책값을 돌려줘야 한다.


6년 전에 나는 구판 세계 호러 걸작선 1에서 발견된 문장의 오역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다.[] 문제의 구절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사냥개에 있다.



* 세계 호러 걸작선 1228


 그 무슨 사악한 숙명이었기에, 우리는 그 오싹한 폴란드의 교회 묘지로 이끌렸던가? 그것은 오백 년 전 그 자신이 구울로서 권력자의 무덤에서 중요한 물건을 훔쳤다는 어느 인물의 이야기와 관련된 음산한 풍문이며 전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문]


 By what malign fatality were we lured to that terrible Holland churchyard? I think it was the dark rumor and legendry, the tales of one buried for five centuries, who had himself been a ghoul in his time and had stolen a potent thing from a mighty sepulchre.

 


‘Holland’네덜란드의 영어식 표기. 그런데 역자는 폴란드라고 썼다. 개정판에서는 네덜란드로 고쳐졌다.



* 기이하고 기묘한 이야기287~288


 무슨 사악한 숙명이었기에, 우리는 그 오싹한 네덜란드의 교회 묘지로 이끌렸던가? 그것은 오백 년 전 그 자신이 구울로서 권력자의 무덤에서 중요한 물건을 훔쳤다는 어느 인물의 이야기와 관련된 음산한 풍문이며 전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 세계 호러 걸작선 1종이책은 절판되었지만, 전자책은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 문제는 절판되지 않은 세계 호러 걸작선 2. 기이하고 기묘한 이야기-첫 번째책날개에 기이하고 기묘한 이야기-두 번째출간을 예고하는 글이 없다. 하지만 세계 호러 걸작선 2도 언젠가는 절판될 수 있다. 구판의 형태가 남아 있는 2권이 절판되기 전까지는 새 옷을 갈아입으면서 판형이 줄어든 1권과의 어색하고 기묘한동거는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다.






[] <네덜란드 구울> 2017115일에 썼음.

https://blog.aladin.co.kr/haesung/905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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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교령회장에서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15
레티스 갤브레이스 / 올푸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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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우리는 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않는 것을 표현할 때 미상이라는 단어를 쓴다. 여기서 잠깐 우스갯소리를 해볼까 한다. 입에서 피식이라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용서해주시라. 어렸을 때 집에 혼자 있으면 동요 비디오를 봤다. 어린 나는 비디오 영상 속에 나오는 동요의 노랫말 자막을 보면서 불렀다. 동요가 시작하기 전에 노래 제목과 작사가와 작곡가 이름이 자막으로 나온다. 동요 비디오를 계속 보면 작가 미상, 작곡 미상의 동요가 몇 곡 나온다. 나는 작사 미상, 작곡 미상이라고 적힌 자막을 보면서 이 노래는 미상이라는 사람이 만든 거구나라고 생각했다호기심이 많은 나는 어머니에게 미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미상이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초등학생이 돼서야 나는 미상의 정체, 아니 미상의 뜻을 처음 알았다. 학교에서 국어사전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국어사전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싶었던 미상을 우연히 만났다사전 보는 것을 유독 좋아했던 나는 인명사전도 탐독했다. 미생(美生: 신라의 화랑)’이상(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은 인명사전을 보면서 만난 사람들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미상이라는 이름의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


단편소설 교령회장에서(In the Séance Room)를 쓴 작가 레티스 갤브레이스(Lettice Galbraith)신원 미상의 영국인이다. 출생연도와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도 없다레티스 갤브레이스가 가명 또는 필명이라면 작가의 정체는 여성일 수 있다. 여성 작가가 선입견과 비난여성이 쓴 글은 남성이 쓴 것만큼 뛰어나지 않다, 여성이 쓴 글이 잘 썼으면 그것은 분명 남성(작가나 남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을 피하고자 남자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는 일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의 흔한 일이었다레티스 갤브레이스는 1892년에 첫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이듬해에 교령회장에서」가 수록된 단편집 새로운 귀신 이야기(New Ghost Stories)를 발표했다. 갤브레이스가 남긴 작품 수는 많지 않다. 1897년에 단편소설 한 편이 나왔으며 1901년에 발표한 또 다른 자신(Alter Idem)을 마지막으로 미지의 작가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교령회장에서는 단편으로 된 공포소설이지만, 가볍게 볼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이 반영된 현실적인 이야기다소설의 주인공 밸런타인 버크(Valentine Burke)는 야심이 많은 내과 의사다. 그는 신분 상승을 위해서 돈이 되는 일에 손을 댄다. 밸런타인이 관심이 있는 분야는 심령 현상 연구와 최면술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유한 영국 사람들은 한두 가지의 고상한 취미를 즐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심령 현상이었다. 영국의 상류층은 심령술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돈줄이었다. 밸런타인은 외모가 출중한 의사였고, 심령술을 잘 알고 있었다. 심령술 또는 신비주의 모임에 참석한 밸런타인은 부잣집 아가씨와 귀부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유명 인사였다. 그는 재산이 많은 아가씨 엘마 랭(Elma Lang)을 신비주의 모임에 끌어들였고, 자신의 약혼녀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밸런타인은 양다리를 걸친 바람둥이다. 그는 엘마를 만나기 전에 캐서린 그래브스(Katharine Greaves)라는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밸런타인은 이 여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실종된 캐서린이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한다. 그는 걸림돌 하나를 제거했다면서 안심했지만, 그 기사는 오보였다. 캐서린이 밸런타인의 집을 찾아왔다! 밸런타인은 옛 연인을 멸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캐서린은 자신의 사망 소식을 실은 기사를 확인했다. 무연고자가 된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밸런타인이었다. 그러나 밸런타인은 냉정하게 캐서린을 외면한다. 캐서린은 이제야 잔혹한 현실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남은 최후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밸런타인은 비정하게도 캐서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무언가를 말한다. 과연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밸런타인이 캐서린에게 한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밸런타인이 속삭인 몇 마디 말을 들은 캐서린의 얼굴에 경악 어린 절망(terror)’이 떠올렸다고 묘사했을 뿐이다. 밸런타인은 이제 살 마음이 없는 그녀에게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귀엣말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게 한 최악의 최면술이다.


캐서린은 강물에 뛰어들었다. 밸런타인은 또 한 번 고인을 능욕하는 일을 저지른다. 자신이 강물에 뛰어든 자살자를 구하려고 시도한 의인으로 둔갑하여 명성을 얻었다. 밸런타인은 캐서린을 확실하게 죽이려고 강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캐서린은 필사적으로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이런 와중에 밸런타인은 자신의 손에 끼고 있던 약혼반지를 잃어버린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4년 후에 그 반지가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게 만든 결정적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밸런타인은 심령술의 권위자로 승승장구한다. 그는 귀부인의 자택에서 열리는 교령회(Séance)에 참석한다. 이 자리에 심령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모였다. 밸런타인은 교령회에 나타난 영혼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 귀신에게 질문을 보낸다.



 4년 전 이 시각에 나는 뭘 하고 있었나? 혹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이니셜을 적으시오.

 

 

영혼은 밸런타인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종이에 글을 남겼다.



당신과 같이 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최면을 걸었다. - K. G.

 

 

‘K. G.’는 4년 전에 죽은 캐서린 그래브스의 머리글자.


빅토리아 시대에 남녀 불문하고 자신의 과거 신분을 세탁해서 사기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기 결혼으로 이혼하고, 경제적 파산까지 겪은 여성은 자신의 불행한 신세를 한탄하다가 끝내 강물에 뛰어들었다. 실제로 템스강 주변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거나 익사자의 시신을 건져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사자 중에 이혼해서 홀몸이 된 여성, 남편 없이 자녀를 키운 여성도 있었다. 이들 모두 빈곤에 시달리다가 끝내 극단의 선택을 했다.


비록 사회적 문제들의 현실적인 해결책이나 대안은 나오지 않지만,교령회장에서는 당시 시대상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미지의 작가가 쓴 소설이다. 이 작품은 공포소설에 대한 선입견공포소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를 다룬 허구적인 이야기을 무너뜨렸다. 내가 생각하는 정말 재미있는 공포소설은 당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특정 존재와 사회적 현상 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야기. 그러나 최고의 공포소설은 당대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현실적인 것, 그리고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했던 특정 존재와 사회적 현상 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야기. 교령회장에서는 재미있는 공포소설과 최고의 공포소설의 중간 단계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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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르곤의 머리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17
거트루드 베이컨 / 올푸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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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메두사(Medus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르곤(Gorgon) 세 자매 중 한 명이다. 세 자매는 멧돼지의 어금니 같은 커다란 이빨과 뱀으로 된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다. 세 자매의 막내 메두사는 원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말의 모습으로 변신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은 아테나(Athena, 지성의 신) 신전 안에서 메두사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 사실을 안 아테나는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었고, 메두사를 직접 본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하게 했다.


거트루드 베이컨(Gertrude Bacon, 1874~1949)이 쓴 고르곤의 머리(The Gorgon’s Head) 잘린 메두사의 머리를 소재로 한 괴담 형식의 단편소설이다이 소설은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 189912월호에 실렸다. <스트랜드 매거진>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대표작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시리즈가 연재된 월간지다베이컨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열기구 조종사(balloonist) 중 한 사람이다. 하늘과 탐험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최초의 영국 여성, 비행선을 탄 최초의 여성, 최초의 수상 비행기 탑승객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화자는 여객선에 탑승한 여성이다. 그녀의 이름은 베이커(Baker). 여객선 항해를 지휘하는 브랜더 선장(Captain Brander)은 해운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선원들은 그가 회사 내에서 가장 입담이 좋은 이야기꾼이라고 칭송한다. 베이커는 선장이 30년 전에 겪은 기이한 일을 듣게 된다30년 전의 브랜더는 삼등 항해사였다. 그가 탄 여객선은 선장의 실수로 그리스의 자킨토스(Zante, Zacynthus) 근처에 좌초되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선원들은 여객선이 완전히 고칠 때까지 섬에 정박한다.


브랜더는 일등 항해사로부터 이 섬에 마귀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동료 선원인 트래버스(Travers)와 함께 마귀굴에 가보기로 한다섬 주민은 두 사람에게 마귀굴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마귀굴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기가 넘친 두 사람은 섬 주민의 말을 무시하고, 마귀굴로 향한다브랜더는 겁에 질린 상태에서 기암으로 가득한 마귀굴의 통로를 걷다가 무언가를 보고 놀라서 외친 트래버스의 목소리를 듣는다. 브랜더는 트래버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트래버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서 있었던 자리에 따뜻한 온기가 있는 돌덩이가 있었다


브랜더가 살아서 마귀굴을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이와 관련된 힌트는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우스(Perseus) 이야기’ 속에 있다고르곤의 머리가 중편소설 분량으로 만들어졌으면, 공포에 질린 브랜더가 동굴 속에서 고생하는 장면이 좀 더 나왔을텐데. 브랜더는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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