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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의 죽음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 더크 보가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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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 (토마스 만)

 

 

 

 

 Scene #1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예술가, 아셴바흐

 

 

            

 

G. Mahler / Symphony No. 5  Mov. IV. Adagietto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미에 사로잡힌 자는 달콤한 질식에 숨통이 조여 오는 줄도 모르고 그저 헐떡거릴 뿐이다.

 

마치 죽은 자가 지상과 저승의 경계를 이루는 스틱스 강을 건너듯 안개 낀 베니스를 건너가는 장면이 음울한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의 느린 4악장을 배경으로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자기통제야말로 한 인간이 발전해 가는 일종의 운명이라 믿고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누리며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 아셴바흐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작품에 열렬한 유희적 흥취가 결여됐다는 자각과 함께 ‘이국적인 바람’과 ‘새로운 피를 솟구치게 할 무엇’을 좇아 베니스로 향하게 된다.

 

 

 

 

 Scene #2  예술가의 정체성

 

 

 

 

 

 

언뜻 들으면 ‘열정에 우롱당해 사랑에 빠진 늙은 남자가 가당치도 않은 희망을 품은 채’ 혼란스러워 하는 감정의 때늦은 모험이야기 같다.

 

 

 

늙음과 젊음의 대비, 삶과 죽음의 대립을 테마로 예술가와 시민성, 예술적인 삶,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무질서, 절대성의 지향 등을 내포한 이 소설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늘 고민한 토마스 만의 다른 소설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 감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소설과 영화의 다른 점을 두 가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는 소설 속의 작가인 아센바흐는 영화에서는 음악가가 된다. 영화는 문인보다는 음악가를 그리는 것이 훨씬 수월함에서이다. 음악가로부터는 그의 음악을 듣게 할 수 있는 반면 문인은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간접적으로 표현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 아센바흐가 작곡가로 등장하면서 음악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두번째는 소설의 서사구조를 삭제하고 또 덧붙이는데 있다. 영화는 소설의 1, 2장을 삭제했고 3장에서 시작하여 소설 줄거리를 쫓아가면서 원작에는 없는 7번의 회상 장면을 삽입한다.

 

영화는 아센바흐가 오직 미소년을 보려는 감정의 격량속에 휘말릴 때마다 말은 사라지고 음악이 깔리면서 보고자 하는 시선의 욕망을 부각시킨다. 토마스 만이 언어를 매개로 빼어난 산문 예술을 창조했다면 비스콘티는 시각과 말러의 음악을 매개로 탁월한 영상 예술을 만들어내었다.

 

음악은 이야기를 따라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후에 진행될 복잡하고 다의적인 표현을 암시한다. 아센바흐가 타치오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소년에 대한 감정의 변화, 이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그를 동반한다. 음악은 타치오에게 결코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아센바하의 감정을 선취하여 알려준다. 이 순간부터 아센바흐는 언제나 아름다운 소년을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음악에 깊이 압도되는 장면은 아센바흐의 죽음에서이다. 그가 죽어가면서 쓰러지기 직전 관광객들이 거의 떠난 쓸쓸한 해변에서 아카펠라로 이어지는 자장가를 들으며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갈 때 뒤이어 아다지에토가 비통한 시간의 파동이 되어 죽음의 길에까지 동반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감각을 완전하게 지배하게 될 때만 성취할 수 있다. 예술이란 그렇게 고양된 정신을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은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이 하나로 겹친 미소년 타치오를 통해 신체성에 깃든 충동적이고, 감각적인 관능들은 정말 극복되고 배제되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Scene #3  결국 그는 죽어야 했다  

 

예술가는 어떤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좇아 채집하는가. 아름다움의 심연은 결코 살짝 외접해 지나가는 방식으로는 들여다 볼 수 없다. 예술가가 절대미라는 실체의 겻불이나마 쪼이려면 광기와 혼돈의 염천 아수라를 돌파해 비밀의 불씨 하나라도 챙겨 와야 한다. 그 영감의 불씨로 비로소 창작의 열탕을 끓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극단까지, 끝까지 간다는 것에는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그렇기에 제정신을 잃고 미에 침 흘리는 탐미적 예술가들은 시나브로 죽음의 향에 도취되기까지 한다. 그들은 경련적 혼돈을 일으키는 이 황홀의 느낌을 따라 죽음의 불길로 뛰어드는 부나비들이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에서 아센바흐는 예술의 불온한 광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탐미에 도사리고 있는 혼돈과 광기어린 열정은 명철한 조형적 기율의식으로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건강하고 건전한 교육적 예술을 신봉한다. 그의 신분이 이제는 창작혼이 시들해진 대학교수로 나오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던 그가 한없이 무너진다. 휴양차 방문한 베니스에서 ‘완벽하게 신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타치오를 그만 목격하고 만 것이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정체모를 돌연한 설렘의 물살이 인 바로 그 순간, 그는 아름다움의 심연에 위험한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존재를 흔드는 치명적 아름다움은 가장 오래 기다린 자를 위해 오는 건 아니다. 아름다움의 섬광은 이처럼 매복과 기습에 능하다.

 

아센바흐의 이성은 에로스의 신에 무릎 끓었다. 베니스에 콜레라가 창궐해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 와도 무감각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정열의 노예가 돼 버렸다. 관광객은 하나 둘씩 떠나거나 죽어가고, 화장기 걷힌 베니스는 썩은 내 나는 폐허로 변해 있다. 결국 그는 죽어야 했다. 콜레라에 전염된 듯 신열에 떨며, 식은땀을 흘리며, 바닷가 의자에 앉아 타치오를 바라보며 그렇게 쓰러져가야 했다.

 

 

 

 

 

 Scene #4  같지만 다른 아셴바흐의 죽음 

 

원작이 ‘예술가에 대한 성찰’이였다면, 영화는 ‘예술가를 위한 변명’이다. 따라서 똑같은 아센바흐의 죽음도 그 성격은 다를 것이며 토마스 만이 보는 아셴바흐와 루이스 비스콘티가 보는 아셴바흐는 동명이인일 것이다.

 

먼저 원작과 영화 초반부에 설정된 아센바흐의 심리적 처지부터가 다르다. 원작에서의 시인 아센바흐는 엄격하고 조화로운 고전적 예술로 이미 성공한 인물이다. 즉 그는 베니스에 올 때부터 아폴론적 요소로 자족해 있는 예술가이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쇼크로 그 자족 상태가 무너져간다.

 

이에 비해 영화에서의 음악가 아센바흐는 당초 탐미 없는 예술로 쓰디쓴 실패를 맛본 처지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결핍으로 한계를 느끼던 차였다. 베니스에서 그는 미의 충격적 광기를 접하며 이 결핍 상태가 점차 채워져 감을 느낀다. 니체가 “인간은 자기 운명이 자기를 어디로 더 데려갈지를 모를 때 가장 높이 솟는다”고 했던 바로 그 디오니소스적 고양의 황홀감을 맛보며 죽어간다. 따라서 원작의 죽음이 돌연사라면 영화의 죽음은 안락사이다. 전자가 비참한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행복한 죽음의 향을 피워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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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홀 - 할인행사
우디 알렌 감독, 다이안 키튼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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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에게 ‘로맨틱 코미디’는 ‘진부함’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 그런데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다 결국 두 사람은 맺어진다’라는 장르의 틀에다가 우연찮은 둘 사이의 첫 만남 같은 장치들이 반복되면서 그런 인식들이 굳어져 왔다. 90년대 이후 비교적 싼 제작비로 로맨틱 코미디들이 마구 양산되면서 이런 장르의 기본 룰들이 얕은 깊이로 공식처럼 재활용되면서 그런 선입견 역시 확대됐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는 장르의 틀과 언어들을 변주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진실한 사랑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 과정에 유머가 동반된 코믹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사랑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모험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이 장르의 법칙들을 진부함의 덫에서 건져내는 신선한 로맨틱 코미디 명품들은 이 장르에 대해 여전한 희망을 가지게 한다.

 

우디 앨런의 ‘애니 홀’은 내러티브적인 파격과 독특한 정서로 코미디의 역사를 새롭게 쓴 명작으로 꼽힌다.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에서 보더라도 남녀의 사랑이야기라는 장르에 대한 자기 반영적인 시각과 함께 이 장르의 관습들에 대한 과감한 파격을 이룬 혁신적인 로맨틱 코미디이다.

 

지식인의 사랑 놀음을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해낼 줄 아는 작가 겸 감독이 우디 앨런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을 그렇게 희화화할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뛰어난 예술가다. 그가 남우주연상까지 탔더라면 아카데미 사상 세 번째의 ‘빅5’(작품, 감독, 각본, 남우주연, 여우주연상)수상작으로 기록됐을 걸작이다.

 

영화는 주인공 앨비(우디 앨런)가 애니(다이앤 키튼)와의 만남과 사랑, 실연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과정에 담뿍 담긴 아이러니와 페이소스가 보는 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우디 앨런의 분신처럼 보이는 앨비는 섬세하되 소심한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질을 내고 과대망상에 시달리는가 하면 터무니없는 생떼 쓰기로 사랑을 망친다. 이 영화는 개봉 직전까지 ‘안도헤니아(Andohenia)’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행복 불감증을 뜻하는 정신의학용어다. 자고로 자의식 과잉인 자가 행복을 맛보는 경우란 없다. 차라리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를 줄 아는 자가 사랑에 훨씬 가까이 다가서는 법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애니가 앨비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바로 그 직후 앨비 최초의 희곡에 인용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연극의 내용이 현실의 그것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즉 현실에서 겪은 사랑의 좌절이 예술 속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변주된다.

 

예술은 거짓말이다? 예술가의 창작 의욕을 자극하는 것은 사랑이다? 예술은 현실을 위무한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매혹적인 텍스트다.

 

영화는 이런 열린 결말이라는 파격 외에도 이전의 로맨틱 코미디들이 강조하지 않았던 섹스에 대한 솔직한 태도와 구체적인 묘사, 관습적이지 않은 대사, 뉴욕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주인공들 못지않은 비중에 놓으면서 독창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탄생시켰다.

 

특히 신경증을 앓고 있는 남녀 주인공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을 통해 남녀의 관계와 로맨스에 대한 어려움을 상기시키고 이들이 결국은 맺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무한한 낙관과 그 결과로 결혼이라는 일부일처제의 제도로의 편입이라는 로맨틱 코미디의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던졌다.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나 어려운 것임을 토로하는 주인공들이 맺어졌다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의미를 반추하게 하는 세련됨으로 ‘애니 홀’은 로맨틱 코미디의 레벨을 한 단계 상승시켰다.

 

해피엔딩의 반대말은 ‘비터스윗(bittersweet)’엔딩이다. 나는 ‘애니 홀’처럼 ‘쓰라리되 달콤하게’ 끝나는 사랑영화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의사 선생님. 저희 형이 미쳤어요.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형을 병원으로 데려오지 그래요?”라고 말하자 동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면 좋은데... 저는 계란이 필요하거든요” 우디 앨런은 ‘애니 홀’의 이 농담이야말로 연애의 속성을 관통하는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미련하게 반복하고 있는 연애라는 행위 역시 “불합리한, 광기의, 부조리한 일이지만 계속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계란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자서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는 어린 시절 우디 앨런의 비관적 인생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린 시절 ‘인간은 모두 죽는다’ 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 후 “심술궂은 아이로 살수 밖에 없었다”는 우디 앨런은 그 이후로도 삶의 완벽한 당위나 희망으로 가장한 낙관 따위를 믿지 않았던 사람이다. 인생은 그저 “맛이 최악인데 게다가 양까지 적은 휴양지 음식”같다고, “외로움, 비참함, 고통,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나마도 너무 일찍 끝나버리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투덜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관객들은 우디 앨런 영화의 비관으로 인해 유쾌함을 얻어왔다. 이토록 불완전한 삶을 두려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보려고 애쓰는 작고 볼품없는 남자의 악전고투는 자조적 농담과 버무려지면서 대책 없는 위로의 말보다는 더 큰 응원의 메시지로 다가왔던 것이다. 어차피 죽을 인생, 어차피 별 볼 일 없겠지만, 그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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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프레드 진네만 감독, 메릴 스트립 외 출연 / 영화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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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매우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릴리안(제인 폰다 분)은 다소 다혈질적이고 자신만의 세계를 소중히 하는 구심적 인간임에 비해, 줄리아(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분)는 침착한 자신감에 차 있고 부당한 세상을 바꾸려는 흐름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원심적 인간이다. 그들이 영화상의 ‘현재’라고 설정된 시점에서 함께 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즉 회상 속에서만 같이 있을 뿐이지만 두 사람은 잠재의식 속에 서로 단단히 엮여 있는 채 상대방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퍼부으며, 자신에 대한 모욕보다 상대방에 대한 것을 더 참을 수 없어 하는 소울메이트. 영화 속에서 그들, 줄리아와 릴리안이 현재 시점에서 만나는 시간은 고작해야 몇 분, 길어야 십 몇 분을 넘지 않겠지만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줄리아>인지 납득이 갈 것이다. 극중 내레이터가 릴리안이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작가인 릴리안 헬만의 자서전을 기초로 한 이 영화는, 실화가 주는 특유의 느낌을 릴리안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유도한다.

 

인상적으로 아름다운 영상-모든 것이 새벽빛으로 푸른 호수 위의 작은 조각배에서 혼자 낚시 대를 드리운 한 여자. 센티멘털한 표현이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쓸쓸해서 가슴이 아려올 정도다-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릴리안이라는 한 여성의 관점으로 모든 사건들이 서술되고 있다. 배 위에서 읊조리는 그녀의 독백에는 질풍의 시기를 살아남은 생존자의 죄책감과 외로움, 사랑하는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과의 관계와 상실감, 역사의 격변과 맞물린 개인의 경험, 기억의 문제는 우리를 충분히 영화에 감상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생존자들이 가진 일종의 부채감은 바로 우리들 스스로가 경험으로부터 만들어낸 집단적인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믿을 만한 기록으로 당시에 받아들인 역사와 이것이 사회적으로 수용 또는 승인된 집단적 기억은 우리 개인 및 집단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것을 돕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릴리안의 현재를 지배하는 줄리아와의 관계는 기실 과거에 같이 경험한 것들의 기억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바로 거기에서 그 관계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릴리안이 겪은 2차 대전 전후 시기의 유럽은 적어도 줄리아와 그녀의 동지들, 일련의 사건들과 뗄 수 없는 어떤 복합적인 덩어리와 같다.

 

릴리안이 정치범들을 구해낼 자금운반책으로 나섰을 때에도 어떤 정치적인 사명보다는 줄리아와의 우정이 유태인인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을 경유하고자 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난받을 이유는 물론 없다. 그녀는 작가이고 평범한 소시민이다. 줄리아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범인류적이고 사회의식에 눈을 뜬 소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옥스퍼드 의과대학을 그만두고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가 된 것은 어쩌면 그 상황에서 필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는 그 정도다. 그러나 릴리안의 시선과 삶을 통해 줄리아의 비중이 얼마나 크고 서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는지 잘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줄리아의 인생도 거의 아는 듯한 느낌이 들며, 그녀에 대한 친근감까지 느낄 수 있다. 바로 릴리안이 줄리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애정이 화면 밖에까지 뻗어 나와 많은 관객들이 가지고 있을법한 기억과 감정들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곁에 있지는 않지만, 잊지 못할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아름다운 친구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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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이유 없는 반항 : 리마스터링 - 아웃케이스 없음
니콜라스 레이 감독, 나탈리 우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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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3편의 영화만 남겼음에도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제임스 딘은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다. 좌절하고 반항하는 청춘의 표상으로서. 그 같은 딘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확고부동하게 만들어 준 작품이 <이유 없는 반항>이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지만 물론 이유는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즉 영화에서 딘이 보여주는 반항은 오로지 권위적이며 고루한 의식에 사로잡혀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공처가로서 어머니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밤늦게 귀가한 아들에게 밥을 차려주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도 있다. 가부장의 권위를 상실한 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반항의 또 한 축이다. 그럴 것이 영화가 제작된 1950년대만 해도 미국에는 청교도적 관습에 의해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우리 가정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도 사 주고 네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 “10년쯤 뒤면 너도 다 알게 될 텐데….” “너를 위해 날마다 기도했는데….” 영화에서 고등학생 짐(제임스 딘 분)의 부모가 개탄하는 내용들이다. 부모로서는 아들에게 해줄 만큼 해 줬는데 뭐가 불만이어서 허구한 날 사고만 치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부모가 보기엔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쯤 아무것도 아닌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일인데,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수 있는 일인데, 그처럼 하찮은 것들에 인생을 거는 아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이유 없는 반항’일 뿐이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겁쟁이 소리를 듣느니 죽는 게 나으며, 10년 뒤가 아니라 당장 해답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반항하는 것이다. 모두가 널 위해서라는 부모의 일방적 사랑마저도 아들에겐 속박일 뿐이다.

 

영화로서 각별한 기술적 우수성이나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60년대의 청춘 반란을 선취하고 있는 예고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겨우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요절하고 만 제임스 딘은 스크린 위에서나 사회사적으로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딘이 분한 주인공 짐은 말수가 적고 섬세하며 내향적인 성격이다. 이를 보상이나 하려는 듯 때로 난폭해지는 수가 있다. 새로 온 전학생은 어디에서나 집단적 골탕 먹이기나 ‘왕따’의 대상이 되기가 쉽다. 전학생인 그에게 불량학생의 우두머리가 싸움을 건다. 두 학생은 칼부림 대결을 하지만 마침 경관이 발견하고 이들을 제지한다. 그 결과 두 학생은 ‘간 크기 시합’을 하게 된다. 차를 몰고 벼랑을 향해 달리다가 차에서 뛰어내리는데 먼저 뛰어내린 쪽이 패배 판정을 받는 시합이다. 불량학생들의 언동이나 이 ‘간 크기 시합’은 그 박진감 때문에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결국 불량학생두목이 탈출에 실패해서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다. 다 잊어버려도 이 장면만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 광경을 목도한 나탈리 우드가 실신할 판국이어서 제임스 딘이 그녀를 잡아준다. 나탈리 우드는 불량학생 두목과 가까운 처지였다. 그날 밤 제임스 딘은 경찰에 자수하러 가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선도계원이 부재중이어서 그냥 나오다가 불량학생들의 눈에 띄고 이 때문에 경찰에 밀고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불량학생들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몰리어 제임스 딘과 나탈리 우드는 빈집으로 도망친다. 딘의 친구가 도움을 주기 위해 불량소년들에게 권총을 난사하고 세 학생은 한곳에 모여 있다. 공포 분위기의 하룻밤이 지나자 경찰이 주위를 에워싼다. 딘은 권총에서 탄환을 빼버리지만 공포에 질린 나머지 이성을 잃은 그의 친구는 경찰에게 덤벼들다 사살되고 만다. 딘은 처음으로 자기를 이해해주는 부친의 품에 안기어 울음보를 터뜨린다.

 

문제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부모와 문제 가정이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의 수용도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딘의 집안에서는 부친이 도무지 영이 서지 않는다. 앞치마를 두른 채 바닥에 꿇어앉아 떨어진 음식을 주워 담는 부친을 아들은 민망한 낯빛으로 바라본다. 모친은 조부와 늘 신경전이다. 집안에서 그의 심정이 편안할 리 없다. 한편 나탈리 우드 집안에서는 부친이 폭군이다. 부활절 파티에 참석했다가 늦게 들어왔다고 ‘더러운 바람둥이’라 딸을 몰아붙인다. 안녕히 주무시라고 볼에 입맞춤을 하자 딸의 따귀를 갈겨 결국 가출하게 한다. 거기 등장하는 불량학생들은 더욱 문제 많은 집안의 자녀일 것이다.

 

고소공포증 소유자는 그랜드 캐니언 벼랑 끝에 서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사진만 보아도 아찔한 생각이 드는 법이다. 영화에 나오는 불량학생들의 섬뜩한 언동은 심약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 여린 영혼이 온전하게 성장하기는 어렵다. 사춘기의 위기를 다룬 이 영화는 <이유 없는 반항>이 그 뒤에 전개되는 ‘대의(大義) 있는 반란’의 선구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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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03-26 11:42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얼마전에 ebs에서 이 영화 해 주더라고요. 나탈리 우드 참 예쁘죠. 저는 그 절벽신만 좀 보다 다 못 봤어요. 제대로 봤다면 아주 재미있었겠어요. 이러한 내용의 영화였군요!

cyrus 2014-03-26 12:01   좋아요 1 | URL
요즘 금요일 밤에 하는 EBS 고전영화극장을 즐겨 보고 있어요. 하필 그 시간대에 KBS 1TV에서 명화극장을 하는데 가끔 한 편만 선택해서 봐야하는 고민이 올 때가 있답니다. 지난 주에 명화극장에서는 '병 속에 담긴 편지'를 보여주더군요. 그래서 고민 끝에 요즘 보기 힘든 제임스 딘의 영화를 보게 됐어요.
 
바스키아
줄리앙 슈나벨 감독, 게리 올드만 외 출연 / 무비홀릭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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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회랑. 희뿌연 빛줄기를 따라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넓은 방에 들어선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 한 점. 일그러진 얼굴, 상처 입은 말, 세상을 버티고 선 소 등이 뒤틀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분노와 슬픔, 격정이 뒤섞인 그림이다.

 

엄마는 울고 있다. 흑백의 단색에 아이들 그림처럼 단순한 그림인데도 말이다. 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엄마를 울릴 수 있는 화가가 되리라. 그가 바로 ‘검은 피카소’로 불리던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이고, 그때 본 그림이 피카소의 「게르니카」이다. 영화 <바스키아>의 첫 장면이다.

 

바스키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화가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27세에 요절한 흑인 화가이다. 뉴욕의 거리를 전전하며 벽에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였다. 뉴욕 현대미술관 앞에 앉아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 담배 종이에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지하철역과 거리의 낙서로 ‘공공의 적’이었던 그는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비장을 들어낸 적이 있다. 그 때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그레이의 해부학> 책에서 영감을 얻어 전통적인 미술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내키는 대로 닥치는 대로 그려낸다. 시멘트벽, 분수대, 양철벽, 보도블록 등 틈만 보이면 그림을 그렸다.

 

 

 

 

 

바스키아 「교활한 자들에 에워싸인 성 조 루이스」 1982년

 

그는 자신의 우상이자 흑인들의 우상이었던 재즈뮤지션 찰리 파커, 야구선수 행크 아론 등 미국 사회의 흑인 영웅들을 왕관을 씌운 모습으로 그려냈다. 거칠고 강렬하게, 때론 천진하고 심각하게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현실과 기존의 가치에 감자를 먹이기도 한다.

 

바스키아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그림이 그려진 벽을 모조리 뜯어내 팔기도 했다. 뉴욕 뒷골목, 가난한 흑인들과 숨 막힐 듯 억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는 최고의 우상이었다. 4개월 만에 유명해지고, 6개월 만에 떼돈을 버는 예술가의 초단기 성공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영화는 화가의 꿈을 가지고 뉴욕의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식당 웨이트리스로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바스키아의 여자 친구 지나, 40세 넘어서도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화랑의 전기 기술자 등 ‘꿈의 도시’ 뉴욕을 찾아온 무수한 무명화가들을 대변한다.

 

그 중에 바스키아는 단연 ‘걸인’의 모습이다. 머리는 새집처럼 감아 올렸고, 때가 꼬질꼬질한 옷에 다 떨어진 운동화를 끌며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앤디 워홀이 들어간 레스토랑을 찾아갈 때도 이 모습이다. 딱지처럼 그린 그림을 워홀 앞에 내며 “1장당 10달러에 사라”고 한다. ‘걸인’의 모습에 내칠 만도 하지만 워홀은 그림을 찬찬히 보고는 몇 장을 산다. “응, 괜찮군. 근데 손이 별로 가지 않은 그림인데?”라고 묻자 바스키아는 “당신 그림도 그렇지 않으냐?”고 한다.

 

 

 

 

앤디 워홀과의 운명적 만남이다. 어느 날 파티에서 그의 그림을 본 미술 평론가 르네의 눈에 띄면서 주류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르네는 타임스퀘어 전시에서 그를 처음 만나 후견인이 될 것을 자청하고 나서 그를 스타로 키워낸다. 뉴욕 뉴웨이브 전시회에 참가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얻는다. 화랑업자 브루노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워홀과도 재회하게 된다. 그 후 브르노를 만난 그의 화랑에 전속작가가 되어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과 교유하면서 성공한 예술가들의 대열에 동참한다. 그의 이러한 성공의 바탕은 그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탓에 흐르는 감정에 따라 몸을 맡기는 힙합 리듬 같은 자유로움에 있다.

 

바스키아는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벼락 성공(?)을 한다. 아이들 그림처럼 천진난만한 그림과 낙서풍의 휘갈겨 쓴 글 등은 아프리카의 원시적 예술과 이집트의 벽화에 비유되면서 9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바스키아 「자화상」 1982년

 

 

그러나 예술적 경계를 뛰어 넘었지만, 현실적 벽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흑인 예술가라는 타이틀은 영원히 그를 '블랙' 속에 갇히게 했다. 근사한 옷을 입고, 최고급 레스토랑에 가지만 여전히 그는 흑인이었다. 뒤에서 수군대는 백인 남자들의 조소를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이미 성공했지만, 더 큰 성공에 대한 압박감도 이겨내야 했고, 그의 예술에 대한 비평도 이겨내야 했다. 감수성 예민한 어린 천재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앤디 워홀과 함께 예술 자본주의의 마스코트로 불렸지만 앤디 워홀이 콩쥐였다면, 그는 팥쥐였다. 성공의 대가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옛 친구 베니와도 멀어지면서 이제 그는 외로운 젊은 흑인일 뿐이다.

 

무명 시절 벽에 낙서를 하면서 쳐다본 하늘에는 거대한 푸른 파도를 타는 서퍼가 등장한다. 새로운 물결에 대한 그의 희망이고, 열망이다. 이제 그에겐 푸른 지폐는 있지만, 푸른 파도는 없다.

 

 

 

 

그래도 그를 견디게 한 것은 앤디 워홀이란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에도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그러나 1987년 2월 워홀이 죽자 바스키아는 실의에 빠진다. 그리고 마약에 빠져 거리를 방황하다 거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거리에서 태어난 천재 화가는 결국 거리에서 끝을 맺은 것이다.

 

28년이라는 짧은 생, 코카인 중독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은 그의 삶과 예술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화가였던 줄리앙 슈나벨에 의해 영화로 그려지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와 작가에 대한 신비화, 미술시장의 속성과 화상들의 인기 작가를 만들기 위한 작전 등등을 소상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에는 데이빗 보위, 게리 올드먼, 데니스 호퍼 등 대 배우들이 출연한다. 뉴욕에서 명멸한 한 천재 화가를 기리는 뜻이다. 화가 출신답게 줄리앙 슈나벨은 감각적인 영상과 애정 넘치는 감수성으로 바스키아의 삶을 기린다. 바스키아를 선택해서 처음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어린나이에 분에 넘치는 자리에 올라 오랜 친구들과 헤어지고 매스컴과 화상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섬세한 감성이 멍들기 시작하면서 외로움을 타는 성공의 이면과 문화계의 위선과 방탕 속에서 번민하고 방황했던 바스키아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고독한 천재’ 바스키아를 그려낼 수 있었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어린 아이가 낙서를 한 듯, 자유롭고 제멋대로다. 미술에 관한 한 정규 교육을 받은 바 없는 그의 작품에 구도의 개념이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의 공간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는 그 어떠한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이 이토록 장난스러움만이 가득해 보이는 바스키아의 낙서에 열광해온 것은 단지 그의 독특한 세계관 때문일까?

 

바스키아의 그림에 등장하는 ‘SAMO’(‘Same Old Shit’란 욕의 약자)는 그가 조직한 낙서 그룹이다. 세상에 대한 통렬한 낙서 정신(?)이라고 할까. 그러나 '무지한 동풍의 탄원처럼', '세이모는 신의 대안책이다' 등 그의 글은 많은 상징을 담고 있다. 어느 날 기자가 물었다.

 

"그림 안에 있는 글을 해석해 주시죠?" "그냥 글자예요." "압니다. 그런데 어디서 따온 겁니까?" "모르겠어요. 음악가에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보세요. 그건 그렇고, 당신의 말은 어디서 따옵니까?"

 

끊임 없이 자유를 갈망하던 바스키아. 예술계의 거대한 빛을 너무 일찍 잃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예술성을 발휘하기에는 오히려 나쁘지 않은 시대였던 것 같다. 바스키아 본인에게는 거칠고 험난한 세상이었겠지만, 그 어둠과 장애물 덕분에 검은 피카소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라는 조금은 잔인한 생각을 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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