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동물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전대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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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주1]은 에서 시작된다. 시각적 감각(aisthēsis)은 현상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현상을 파악하면 현상에 대한 정보가 기억에 남는다. 현상을 여러 번 기억하면 현상을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는 경험(empeiria)이 된다. 시각적 감각을 즐기는 인간은 기억과 경험을 거쳐 학문적 인식에 도달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앎의 발전 단계.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을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동물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동물은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면서 살아가지만, 경험 능력을 쌓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생각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분법 중의 하나다야생 동물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 인간은 동물을 알기 위해 그들을 포획하고 관찰했다앎의 욕구가 점점 커지는 동시에 학문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자연을 개발하고 파괴했다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유일한 전지(全知)적 존재다. 유전공학 · 나노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로 유전병을 교정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중이다호모 데우스(Homo Deus: 신이 되고 싶은 인간)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인간상이 아니다.[주2] 가장 똑똑한 지구의 주인으로 살아온 인간은 전지전능한 지구의 주님이 되려고 한다. 지구의 주님은 학문이 더 발전하면 아직 밝혀내지 못한 자연의 수수께끼들이 풀릴 거라고 낙관한다. 과거에 인간이 동물과 지구를 괴롭히면서 일으킨 여러 가지 문제들도 주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전지적 주님은 자신만만하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천사와 이름은 같지만, 지구의 주님을 섬기는 시종이 아니다.[주3] 그는 전지적 존재가 되기 위한 용도로 학문에 접근하는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다. 지구의 주님은 종교가 아닌 과학을 편애하는 과학주의자다. 과학주의는 과학만능주의와 같은 말이다. 과학주의자는 과학만 있으면 인간은 전지적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최악의 문제들(환경 파괴, 전염병 유행)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과학을 찬양하자는 지구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른다.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philosophos)이라면 죽을 때까지 만나야 하는 거대한 질문이 있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엄청 짧고 간단한 질문이지만, 정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실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만난 사람들이 밝힌 대답들은 다양하다. 그래서 인간의 정의를 알기 위한 질문은 한없이 크다가브리엘은 이 거대한 질문을 변형한다. 동물로 간주하는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이다는 마르쿠스의 변형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을 정리한 책이다이 책에서 마르쿠스는 인간을 동물로서의 인간으로 재정의한다. ‘동물로서의 인간은 겸손하다스스로 슬기로운 사람(Homo sapiens)이라고 선포한 인간은 오만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반대로 동물로서의 인간은 앓을 지향하면서도 앎을 통해 얻은 지식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그리고 자기 생각이 틀렸으면 고치려고 한다이러한 태도를 가브리엘은 인식적 겸손이라고 표현한다. 겸손한 동물로서의 인간은 차분하다. 자신이 몰랐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 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기억을 반복하면 경험이 된다호모 사피엔스는 생각의 오류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의 오류를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한다슬기롭다고 믿는 사람들은 오류를 직시한 경험을 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겸손한 동물로서의 인간은 생각의 오류가 발생하면 게 눈 감추듯 지우지 않는다. 생각의 오류를 더 나은 생각으로 고치기 위한 디딤돌로 삼는다.


최악의 호모 사피엔스는 지식을 무기로 삼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공격하고 죽인다. 그들은 타자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지식이 정확하지 않고, 틀렸음에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동물로서의 인간은 알고 싶어 하는 본능을 따르면서도 자신이 무지하다는 점을 안다. 가브리엘이 제시한 앎의 발전 단계는 무지(無知)의 윤리에서 시작한다. 무지의 윤리는 정직하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지식이 틀릴 수 있고, 그 지식을 통해 편집한 생각도 틀렸음을 인정한다. 우리가 괴물로서의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무지의 윤리를 떠올려야 한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많이 안다고 해서 잘난 척하지 않아도 되고, 모르는 것을 숨길 필요도 없다. 영국의 시인 토머스 그레이(Thomas Gray)는 생전에 자신을 시인이 아닌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레이가 남긴 시구절[주4]은 인간은 동물이다의 한 줄 평으로 쓰기에 잘 어울린다.





Where ignorance is bliss,

‘Tis folly to be wise.


무지가 행복인 곳에서, 현명해지는 것은 어리석다









[1] 아리스토텔레스, 조대호 옮김, 형이상학, 31, 도서출판 길, 2017.



[2] 유발 하라리, 김명주 옮김, 호모 데우스 , 김영사, 2017.



[주3] 가브리엘은 성경에 나오는 대천사다.

 


 천사가 그에게 대답했다. “나는 가브리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요. 그대한테 말해 주라고 나를 보내셨어요. 이 좋은 소식을 그대에게 알려 주라고요.” 


(누가복음 제119절, 새 한글 성경 신약과 시편, 대한성서공회, 136)



[주4] Ode on a Distant Prospect of Eton College (17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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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마시는 위스키가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침에 마시는 위스키의 효능에 대한 출처는 뉴로크리에이티브 연구소(Neurocreative Institute)라는 기관이 발표한 연구 논문이다뇌에 약간의 알코올이 들어가면 긴장이 풀려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른다고 한다


















*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마이클 셔머제임스 랜디 외 여러 명의 필자 참여), 김보은 · 류운 · 하인해 외 옮김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스켑틱 10주년 베스트 에세이(바다출판사, 2025)




논문이 과학자들에게 알려지려면 학술지에 실려야 한다.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과학자들의 검토 대상이 된다뉴로크리에이티브 연구소가 발표한 위스키 관련 논문 제목과 이 논문의 게재를 허락한 학술지 제목이 있는지 구글에서 검색을 해봤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연구소의 위치와 연구소 공식 홈페이지도 나오지 않는다나는 실험 과정이 상세하게 언급되지 않았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연구 결과를 믿지 않는다


애주가는 아침에 술을 마실 때면 어디인지도 모르는 연구소가 주장한 연구 결과를 언급한다어디에서 본 건데‥…”, “누구에게 들은 이야긴데‥…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연구소와 과학자 이름을 같이 언급하면 상대방은 그 견해를 과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이라고 믿는다사람들은 지적 능력이 높다고 생각하는 권위 있는 과학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에 취한 애주가는 회의주의자(skeptic)다. 낮술을 즐기면서도 아침에 마시는 술이 정말로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한다잠정 가설로 받아들이고,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에 애매모호한 점(실험 방식, 통계 자료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에 대한 설명이 빈약할 때)이 있으면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내 경험상 늦은 밤에 술을 마시면 글이 잘 써진다. 하지만 술이 나의 머리끄덩이를 잡을 때가 많다이럴 때 정말 피곤해진다직장 일에 지친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문장 한 줄을 쓰는 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글이 안 써지는 어둠의 시간은 술맛이 사라지는 지루한 안주다.


쉬는 날이나 주말에 마시는 술은 마음이 편해지고, 두뇌 회전 속도가 평일보다 빨라진다. 지난주 토요일 아침, <과학책방 갈다>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갈다>는 커피, , 맥주를 판다. 음료를 주문하면 책방 2층에서 마실 수 있다. 나는 책 한 권을 안주 삼아 맥주를 주문한다









<갈다>에 판매하는 맥주는 총 다섯 종류다. 올해 여름에 반딧불이라는 맥주가 새로 들어왔다. ‘반딧불을 마시고 싶어서 지난주 토요일에 <갈다>에 갔다<갈다>에서 고른 책 안주는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선언이다.

















* 이자벨 스탱게르스, 김연화 · 장화원 함께 옮김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선언: 상호의존의 관계를 다시 엮는 과학으로(에디토리얼, 2025)




느린 과학은 과학 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최대한 빨리 찾는 것을 거부한다. 느린 과학은 대중과 소통한다. ‘느린 과학에 익숙한 대중은 과학자들이 발견한 연구 결과에 열광하는 마니아가 아니다. 그들은 신중하다우리 삶에 필요한 과학 지식이 무엇인지 논의하며 가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과학 지식인지 판단한다.


책방 바로 맞은편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2층에 넓은 창문이 있어서 나무를 제대로 볼 수 있다이파리는 다 떨어졌고, 나뭇가지 끝에 겨울눈(winter bud)이 붙어 있었다맥주를 마시면서 창밖의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겨울눈을 알고 싶어졌다. 술에 살짝 취한 뇌에 호기심이 돋아났다겨울눈이 자란 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어졌고, 겨울눈이 왜 생기는지 궁금했다다음날인 일요일에 대구로 돌아와서 겨울눈을 언급한 책들을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



















김태영 · 윤연순 · 이웅 함께 씀 겨울나무: 우리 땅에 사는 나무들의 겨울나기(돌베개, 2022)

 

* [개정판] 소경자 · 이광만 함께 씀 겨울눈 도감: 4단계 분류법에 따라 겨울눈을 구별한다(나무와문화, 2020)



겨울눈은 겨울에 난 싹이다. 이 싹은 비늘이나 털로 덮인 상태, 추운 겨울바람을 버티면서 봄을 기다린다겨울눈의 크기는 작은 편인데, 이 속에 겨울을 지내기 위한 양분과 봄에 발아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이 저장되어 있다.







책방에서 본 겨울눈은 타원형이고, 털로 덮여 있다. 두 권의 겨울눈 도감을 같이 보면서 내가 내린 잠정 결론은 백목련 혹은 목련과 식물의 겨울눈이다.

















트리스탄 굴리이충 옮김 나무를 읽는 법나무껍질과 나뭇잎이 알려주는 자연의 신호》 (바다출판사, 2024)




탐험가 트리스탄 굴리(Tristan Gooley)식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자연의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라는 별명이 있다그는 나무가 인간과 동물, 주변의 다른 식물에 알리는 수백 가지 자연 신호(natural sign)를 알면 나무를 읽을 수있다고 말한다자연 신호는 너무나 많고,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한 것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굴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면서 겸손하게 말한다. 나무 한 그루를 제대로 식별하는 방식을 배우려면 평생을 바쳐야 한다









책을 참고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책방에서 만난 나무가 백목련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봄에 변신하는 나무의 모습을 보면 백목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과학에 (심)취하려면 성급하게 해답을 찾거나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해답과 결론을 찾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정직하면서도 차분한 여유도 있어야 한다내가 좋아하는 과학은 결론을 쫓아가는 빠른 과학이 아니다. 호기심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관찰하는 느린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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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25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를 읽는 법, 이 도서 찜합니다.

cyrus 2025-12-29 00:08   좋아요 0 | URL
나무를 관찰하는 다양한 방식을 정리한 책입니다. 호시우행님의 독서 취향에 어울리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stella.K 2025-12-2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봤더니 술꾼이었구만! 책을 안주 삼는다고 썰이나 풀고. 말이나 못하면...칫!
한 잔이 두 잔되고, 석 잔된다. 건강 생각해서 지나친 과음은 삼가하고. ㅋ 암튼 올해 사느라 고생 많았다. 토닥토닥~ 한 해 마무리 잘하고 희망찬 새해 맞아라. ^^

cyrus 2025-12-29 00:11   좋아요 1 | URL
책과 술 중 딱 하나만 고른다면 저는 책을 고르겠어요. 그런 만큼 책을 먼저 읽으면 술 한 모금이라도 입에 안 대려고 해요. 술 마시는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해 볼게요. ^^

감은빛 2025-12-26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흡연자들이라면 공감할텐데, 담배를 피우면 잠시 집중력이 올라가고 각성효과가 생겨요. 그래서 저는 아주 오래 전 대학 시절에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혼자 학교 뒷산 산책로 넓다란 바위에 앉아 가끔 담배를 피워가며 공부했던 기억이 있어요.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일을 하다가 뭔가 풀리지 않을 때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면 갑자기 풀리지 않았던 문제의 답이 떠오르기도 하죠. 물론 당연히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술도 정말 소량이라면 조금은 그럴 수 있겠다 싶어요. 한 십여년 전에 저도 맥주 마시며 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재에 음주 독서라고 글을 썼던 기억도 나구요. 언젠가부터 맥주를 거의 안 마시게 되며 그 버릇은 사라졌어요. 소주를 마시며 책을 읽기엔 도수가 너무 쎄서 책에 집중을 못하게 되죠. 술을 조금 마시고 책을 읽는 건 가능하겠지만, 술을 계속 마시며 읽는 것은 쉽지 않아요.

cyrus 2025-12-29 00:19   좋아요 0 | URL
제가 담배까지 피웠으면 벌써 건강이 나빠졌을 거예요. 그런데 밤에 잠을 늦게 자는 일이 잦아서 비흡연이라고 해도 건강 상태가 좋다고 말을 못 하겠어요. 다행히 올해는 크게 아픈 적이 없지만, 이럴 때 조심해야죠. 시간 날 때 건강 검진을 받아야겠어요. ^^
 
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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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의 탁월한 문장을 볼 때마다 감탄해서
손으로 머리를
‘탁’ 칠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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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2-22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혹시 아재 개그인가요? ㅎㅎㅎㅎ

cyrus 2025-12-25 06:30   좋아요 0 | URL
아재개그가 결합된 이행시입니다.. ㅎㅎㅎ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 삶과 문학, 읽고 쓰기에 관한 네 번의 강의
제임스 우드 지음, 노지양 옮김, 신형철 해제 / 아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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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에 박힌 문학은 고루한 학문이다. 잘난 체하는 문학은 지루하다. 독자는 거꾸로 학문이 된 문학에 다가서지 못한다. 뻣뻣하게 경직된 문학과 친해질 수 없다. 


문학의 정석(定石) 비평가와 문학 교수들이 정교하게 깎아 만든 비석이다. 학생들은 거대한 비석에 새겨진 이론과 비평 방식을 받아 적으면서 수련(修鍊)한다



문학을 학문으로 받아들인 학생들은 비석을 윤이 나게 열심히 닦는다(). 


학생들의 오랜 반복 훈련으로 단련된() 문학의 정석은 

절대로 깨질 리 없다


학생들은 문학의 정석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정답을 찾는다. 




상아탑이 편한 문학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펑퍼짐한 문학은 상아탑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뚱한 문학은 독자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독자의 눈빛을 받지 못한 문학은 쓸쓸하다. 아무리 잘 썼다고 해도 쓸모가 없다문학이 있어야 할 곳은 상아탑이 아니다문학은 반드시 독자를 만나야 한다. 독자의 곁에 있어야 한다.








영국의 비평가 제임스 우드(James Wood)는 유년 시절에 문학의 숲(wood)을 심기 시작했다한 권의 책이 문학 숲의 씨앗이다. 이 책은 시, 소설, 수필, 희곡도 아니다. 독자들에게 소설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 같은 소설과 소설가들이라는 입문서다. 어린 우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좋아했고, 그 부분만 열심히 읽었다. 전 세계 작가들의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나열하여 그들의 작품 세계를 요약한 장이었다그는 작가들의 이름과 소설 제목을 기억했고 틈틈이 그들의 작품을 읽었다. 이때부터 문학 소년의 마음속에 문학 새싹들이 모도록 돋아났다문학 소년과 함께 자란 문학의 숲은 비평가로 성장하기 위한 영양분이 되었다책을 읽고 글을 쓰는 비평가가 심어 가꾼 문학의 숲은 싱그럽다.









우드의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자신만의 문학의 숲을 가꾸고 싶은 독자, 작가들이 꾸민 문학의 숲을 거닐고 싶은 독자를 위한 안내서다. 책 제목은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 말한 예술은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에서 따왔다. 우드는 상아탑에 박힌 문학만 보는 비평을 선호하지 않는다. 상아탑에 박힌 문학은 보면 볼수록 따분하다. 상아탑을 지키는 일에 몰두한 비평가와 문학 교수는 문학을 학문으로 취급한다학구적 문학 비평은 독자와 문학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독자는 재미없는 상아탑을 보러 가지 않는다문학을 즐기기 위해 문학의 숲을 산책한다









문학의 숲에 문학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널려 있다문학의 숲을 모험하는 우리는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사용할 수 있는 것’의 이름과 형태는 무수하다. 그것은 우리가 쓰고 있는 평범한 물건이 될 수 있고, 과거에 만났던 사람일 수도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인생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금방 찾을 수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문학과 밀접하다. 우리는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도 문학을 마음껏 감상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상아탑에 달라붙은 비평가는 독자의 비평에 관심 없다. 오히려 자신이 배운 비평 방식을 가르치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우드가 강조한 문학 비평 방식은 비평가가 아닌 독자들도 따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사용하면 된다그리하여 독자는 소설의 여백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거나 문학 작품의 매력을 볼 줄 아는 비평가가 된다. 우드는 문학에 편하게 말을 걸 수 있는 독자가 되라고 권한다. 문학과 친분이 두터운 독자 문학 작품을 읽다가 발견한 것을 이야기하고(retelling), 목소리를 낸다(re-voicing). 우드는 자신의 비평 방식을 비평적 다시 이야기하기또는 책을 통과하는 글쓰기라고 표현한다.


독자가 책을 통과하려면 우선 진지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진지한 관찰자는 다른 독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아주 사소한 세부 사항(detail)’을 좋아한다. 진지한 관찰자 유형에 속한 독자는 세부 사항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이 말로 표현하지 못한 숨은 감정까지 포착한다.


문학의 정석은 무겁다. 우리가 만나야 할 문학은 가벼워야 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문학은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소박한 조각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소중한 문학 조각을 쓰다듬는다

문학 조각 위에 글을 쓰(고) 다듬는다







우리가 정답게 어루만지는 문학 조각은 문학의 정석(貞石)이다.









<세부 사항을 관찰하면서 읽는 cyrus가 만든 주석>




[1] 정석(貞石):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





* 43, 역자의 각주





라스콜리니코프: 톨스토이죄와 벌의 주인공 [주2]


 


[주2죄와 벌》을 쓴 작가는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






* 117


 



리디아 데이비스의 단편소설 <문법 질문>(Grammar Questions) [주3]

 



[주3리디아 데이비스(Lydia Davis)의 작품집 불안의 변이(강경이 옮김, 봄날의책, 2023)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된 제목은 문법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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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쓴 영화 리뷰







영화관에 가면 우리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때문에 영화를 편하게 볼 수 없다. 방해꾼은 우리의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이 귀찮은 녀석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아까 봤던 영화 장면 A, 절대로 잊지 마. 잘 생각해 보라고. 영화 장면 A는 분명 B를 의미할 거야. B는 잠깐 지나간 장면 C와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




방해꾼은 우리에게 자꾸 생각하라고 부추긴다. 생각이 많아지니까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피곤하다. 졸음이 쏟아진다. 꾸벅꾸벅 존다. 


영화관에 출몰하는 방해꾼의 정체는 해석자. 해석자는 책 속에도 살고 있으며 미술관에도 나타난다. 해석자는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예술 작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다관객은 해석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해석자의 유혹을 완강히 거부하지 못한다. 관객은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영화를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관객은 이제야 바로 옆에 해석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관객은 해석자의 반응에 순순히 따른다. 영화를 해석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쳐서 영화에 흥미를 잃는다잘 만든 영화인데도 관객은 거부감을 느낀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janov)<석류의 빛깔>(The Color of Pomegranates, 1969) 해석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이 영화가 개봉되면 영화관 좌석에 관객보다 해석자들이 더 많이 앉아 있다. 해석자들이 너무 많으면 영화를 재미있게 본 관객은 줄어든다. 대부분 관객은 비몽사몽 중에 영화를 본다잠들어 버린 관객은 영화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인상 깊은 영화 장면 한 개도 건지지 못한다. 그들은 십중팔구 영화가 수면제라고 말한다해석자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해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 허승철 코카서스 3국 문학 산책: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대표 시와 러시아 문학(문예림, 2018)


사야트 노바의 시 두 편이 실려 있다.




<석류의 빛깔>의 원제는 사야트 노바(Sayat-Nova)’. 사야트 노바(1772~1795)아르메니아의 음유시인이다. 영화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가 태어난 곳은 현재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Tbilisi, 러시아식 지명은 티플리스). 그가 태어났을 때 트빌리시는 소련의 일부였다. 사야트 노바의 출신지도 트빌리시다<석류의 빛깔>사야트 노바의 삶을 다룬 영화. 하지만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대사가 거의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은 표정과 몸짓, 춤과 같은 시각 언어를 통해 사야트 노바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노바는 궁정 악사로 활동하다가 왕의 여동생을 사랑한 죄로 추방당했다. 마르마르(Marmar)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지만, 노바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실의에 빠진 노바는 하흐파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1795년에 이란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고, 이란 군은 아르메니아 포로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한다. 개종을 거부한 노바는 이란 군에게 살해당했다. 노바는 수도사의 삶을 살면서도 세속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주제로 시를 썼다.


파라자노프는 악기를 연주하는 음유시인 노바의 모습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인생에 깊은 고뇌를 느끼는 수도승 노바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종교적 색깔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로 인해 <석류의 빛깔>은 소련 검열관의 무자비한 가위질을 피하지 못했고, 소련 정부의 탄압을 받은 파라자노프는 십 년 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영화의 매력은 종교적 상징을 표현한 중세의 이콘(icon, 성화)과 초현실주의적 예술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몽환적인 이미지의 조화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장면 뒤에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의미가 숨어 있다. 영화는 관객의 해석을 유도한다. 하지만 영화를 해석하는 일은 수월하지 않다.


















* 윌 곰퍼츠, 주은정 옮김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RHK, 2025)




관객이 <석류의 빛깔>스크린에 흐르는 예술 작품으로 바라본다면, 해석이 아닌 감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감상 행위는 영화를 생각하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해석자는 영화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감상자는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들을 채운다.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자신만의 예술을 표현하려면 이웃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당부한다. 호크니의 무심한 반응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에 적용할 수 있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사물을 정확히 보기 위해 소거의 과정을 거쳤다. 소거의 과정이란 사물의 핵심(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석류의 빛깔>을 감상할 때도 소거의 과정이 필요하다. 해석자와 비평가들은 사야트 노바의 삶을 상징하는 장면을 찾아서 영화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동성애자인 파라자노프는 소련 정부의 동성애 탄압을 피하지 못했고, 동성애 혐의를 받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해석자와 비평가들은 이 사실을 단서로 삼아 영화 속 동성애 코드로 보일 만한 장면을 찾는다. 하지만 감상자는 사야트 노바의 삶과 파라자노프의 영화 미학을 소거한다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되는 그들의 존재감을 모른 척하거나 말끔히 지워야 한다.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 해석은 영화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야트 노바와 파라자노프를 아는 해석자를 외면한 채 영화를 본다면 아르메니아 전통 악기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이다. 아니면 기쁨, 사랑, 슬픔 등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아르메니아 민속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악기 연주가 좋았다거나 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면 영화를 제대로 감상했다고 볼 수 있다.

















*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 해석에 반하여(윌북, 2025)

 

* [절판] 수전 손택,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이후, 2002)




예술을 해석하는 일에 반대한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우리 감상자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한다. 예술 작품에서 내용을 찾지 말 것, 그 대신 내용을 제거해서 예술 작품의 실체를 바라볼 것. 예술 작품과 영화를 잘 감상하려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느낄 줄 아는 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 손택이 강조한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영화의 본질은 영화감독의 마음속에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의 매력은 영화를 해석하고 비평하는 사람들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영화의 본질과 매력은 끝이 없으며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관객인 우리의 마음속에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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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12-0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의 해석자, 저도 이 분이 시시때때로 개입을 하시기 때문에 좀 속이 시끄러운 편입니다. ㅎㅎ 이건 뭐 억지로 못 들어오게 막아도 들어오는 분이라...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ㅎㅎ

cyrus 2025-12-14 13:55   좋아요 0 | URL
글 한 편 쓰기 시작하면 내 안의 해석자와 숨바꼭질합니다. 그래서 글이 완성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