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왜 학습하는가 - AI를 움직이는 우아한 수학
아닐 아난타스와미 지음, 노승영 옮김 / 까치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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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며칠 전부터 인스타그램이 이상하다한 번 마주치면 우리 마음에 끔찍한 잔상을 남기는 잔인한 동영상이 불쑥 튀어나온다짧은 영상들(short-form)을 보여주는 플랫폼(Reels)에 들어가서 영상을 연달아 보고 나면 해로운 동영상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들, 고어(gore) 영화에 나온 장면, AI로 만들어진 기괴한 이미지들. 2월 마지막 날, 인스타그램은 불쾌한 영상들의 폭주를 멈추지 못했다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주식회사 메타(Meta)해로운 영상들을 걸러내지 못한 알고리즘의 오류 문제를 수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오늘 해로운 영상들이 또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관심사를 관찰하고, 수집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모아서 분류한다알고리즘이 모은 자료들은 모든 사람을 끌어당긴다알고리즘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관심사와 비슷한 사람들을 금방 찾을 수 있다그런데 최근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은 뜻밖의 행동을 하고 있다. 우리가 평소에 본 적 없는 해로운 영상들을 제대로 검열하지 못한 채 보여주고 있다알고리즘은 왜 우리가 원하지 않은 정보를 아무렇게나 보여주는 오류를 일으킬까?


나는 알고리즘 전문가가 아니다. 최근에 일어난 인스타그램 알고리즘 오류의 구체적인 원인을 모른다하지만 나는 알고리즘 오류와 관련된 한 가지 진실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이 진실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그것은 바로 알고리즘은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다는 진실이다. 완벽해 보이는 알고리즘도 때때로 틀릴 때가 있다. 모든 알고리즘 전문가도 인정하는 진실이다.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 실수하고 틀리는 알고리즘에 왜 수학이 필요한지를 알려준다우리에게 친숙한 알고리즘은 전산공학(컴퓨터 공학) 용어로 알려졌지만, 이 용어는 수학에서 시작되었다알고리즘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 또는 절차를 뜻한다. 수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중 하나가 패턴(pattern)’을 찾는 일이다패턴은 규칙적으로 반복된다방대한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는 알고리즘 최근린(最近隣) 또는 NN(nearest neighbor) 알고리즘이라고 한다AI가 일하는 방식은 마치 수학자들이 자연 현상에서 패턴을 찾는 일과 같다.


수학을 모르는 AI는 패턴을 식별할 수 없다. AI는 수학을 공부한다. 컴퓨터 시스템이나 기계가 패턴을 감지하고, 분류하기 위해 수학을 학습하는 과정을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이라고 한다우리에게 친숙한 컴퓨터를 포함한 대부분 기계는 수학을 학습하면서 발전했다.


매년 꾸준히 공부한 사람도 가끔 문제를 풀다가 오답을 낼 때가 있다. 틀렸으면 다시 문제를 풀어서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AI도 마찬가지다. 한 번 오류를 일으킨 AI는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수학을 공부한다. 이때 AI는 이전에 배웠던 수학을 반복하는 학습을 하지 않는다. 배운 적이 없는 새로운 수학을 공부한다. 따라서 AI가 학습하는 수학의 종류는 다양하다.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AI가 지금까지 공부한 수학 분야들을 소개한다. 기계 학습의 필수 수학 과목은 미적분, 확률 통계, 행렬 등이다.


AI는 똑똑해지려고 수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오류와 실수를 줄이려고공부한다. 대부분 사람은 점점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AI의 등장을 두려워한다영화 속 AI는 인간을 조종하는, 냉철한 악당으로 묘사된다그러나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알고리즘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한 수준에 도달해도 또다시 실수한다기계가 왜 수학을 공부하는지 이해한다면 AI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다. 한 번 실수하면 수학(數學)을 수학(修學, 受學)[주1]하는 AI. 수학으로 단련하는 AI는 차갑지도 않고, 기계적이지 않다.


AI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 속에 있는 편견을 알지 못한다. AI 기술자는 AI가 기계 학습을 할 때 자료의 편견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꾸준히 학습하고, 알고리즘을 교정하는 AI가 아니다. 스스로 학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다편견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편견을 의심하지 않고, 편견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공부하지 않으며 자신이 주장하는 오류를 고치지 않는다.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학습하는 AI, 

정확하지 않은 가짜 정보에 갇힌 답 없는 인간


, 이제 누가 악당이지?







<cyrus가 만든 주석과 정오표>




[1] 수학(修學): 학문을 닦음

수학(受學): 학문을 배우거나 수업을 받음.







* 12




 

 수학자 유지니아 쳉수학은 실재일까?(Is Math Real?)라는 책[주2]에서 수학을 배우는 과정이 점진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꼬물꼬물 발을 내디디면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듯하다가 느닷없이 뒤를 돌아보고서 어느덧 높은 산에 올랐음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약간의(때로는 다량의) 지적 막막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수학에서 진전을 거두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주2] 번역본: 유지니아 쳉, 성수지 옮김, 수학, 진짜의 증명: 우리 삶의 방정식을 구하는 수학의 즐거움(드루, 2024).





* 75




 

 오차를 제곱하여 평균하는 방법은 통계 및 미적분과 관계된 또 다른 이점이 있지만, 아직은 들여다볼 때가 아니다. 목표는 이 제곱 평균 오차(Mean squared error)’[주3]를 필터의 매개변수에 대해 최소화하는 것이다.



[주3] 정확한 명칭은 평균 제곱 오차. 제곱 평균 속도(mean square velocity)’라는 과학 용어가 있지만, 평균 제곱 오차와 관련이 없다. 제곱 평균 오차라고 단 한 번이라도 적힌 교재나 문헌이 있으면 이 주석은 틀린 것이다.





* 107




 


 토머스 베이스의 탄생 연도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에는 유쾌한 아이러니가 있다. 그는 “0.8의 확률로 1701년에 태어났다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망일은 확실하다. 1761417[주4] 영국 로열 턴브리지 웰스에서 사망했다.


[원문]




 There’s delicious irony in the uncertainty over Thomas Bayes’s year of birth. It’s been said that he was “born in 1701 with probability 0.8.” The date of his death, however, is firmly established: April 17, 1761, at Royal Tunbridge Wells in England.



[주4저자와 번역자 모두 사망 날짜를 잘못 적었다토머스 베이스(베이츠)의 사망 날짜는 47이다위키피디아(Wikipedia)‘Thomas Bayes’ 항목의 주석(Note 1)베이스의 사망 날짜가 잘못 알려진 이유가 있다.






[링크]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Ba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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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 2025-03-03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자입니다. 오류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오표에 반영했습니다.
http://socoop.net/WhyMachinesLearn/corrections/

꼬마요정 2025-03-0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도움 되는 리뷰입니다. 누가 악당일지는 바로 알겠습니다. 근데 결코 쉬운 책이 아닐텐데 cyrus 님 리뷰만 보면 읽을만 한데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ㅎㅎ
(땡투 드렸어용^^)
 
화전가 - 배삼식 희곡
배삼식 지음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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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여자는 꽃이다.” 옛날에 이 문장은 외모가 수려한 여자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성을 꽃으로 비유한 찬사는 시들해졌다. 이 말 속에 여성의 참모습을 외모로 판단하는 시선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가 ’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여성은 남성의 눈과 마음에 끼워 맞춰진 대상화(objectification)가 된다. 남성을 위해 꽃이 된 여성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하지만 극작가 배삼식 <화전가>(花煎歌)를 희곡으로 읽고, 연극으로 보고 난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빛바랜 찬사를 다시 쓰고 싶다<화전가>에 나오는 여인들은 꽃다운 인생을 살다 간 화녀(花女).







연극 <화전가>

극단 구리거울


2025221~22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연출] 

김미정



[출연진]

 

닭실 할매김 씨: 이경자

고모: 허세정

장림댁: 김정연

금실이: 석효진

박실이: 박나연

봉아: 이연주

영주댁: 이연진

독골 할매: 김미향

홍다리댁: 이혜정(극단 나무의자 소속)





<화전가>의 시간은 19504이다. 한반도 땅이 포탄을 맞고 두 개로 찢어 갈라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다닭실 할매김 씨의 환갑 잔치를 열기 위해 오랜만에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세 딸(금실이, 박실이, 봉아)두 며느리(장림댁, 영주댁), 고모 권 씨, 행랑어멈(나이 든 하녀) 독골 할매,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처럼 함께 지낸 홍다리댁여인들의 고향인 경북의 반촌(班村)에 따스한 봄의 기운이 돌아오지만, 매캐한 전운이 봄을 짓누른다마음이 미지근한 김 씨는 환갑 잔치가 달갑지 않다그러나 여인들은 화목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결국 김 씨는 자신을 위한 화연(花宴) 대신에 모두가 즐기는 화전(花煎)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여인들의 화전놀이가 시작되기 전날은 경신일(庚申日)이다. 이날 밤(庚申夜: 경신야)이 되면 잠을 자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노는 풍습이 있다. 도교 신앙에 의하면 사람 몸에 기생하는 삼시(三尸)라는 벌레가 있다. 경신일은 삼시가 승천하는 날이다. 하늘에 올라간 삼시는 천제(天帝: 최고 신)에게 자신이 기생한 사람의 죄를 일러바치는데, 그 사람은 목숨을 잃는다. 경신일에 사람이 잠들면 삼시가 하늘에 올라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시의 승천을 막아 천수를 누리기 위해 경신야에 잠을 자지 않는다. 김 씨와 여인들은 소주 한 말을 함께 마시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여인들은 각자 마음속에 뭉쳐진 여러 가지 감정들을 분출한다.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섭섭했던 순간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아홉 명의 여인 중 가장 젊은 피인 막내딸 봉아는 가족들이 잠을 못 자게 방해한다.



[봉아] 내가 몬 자게 할 기다.

[금실이] ?

[봉아] 언니 오래 살라꼬.

[금실이] 참 빌.

[봉아] 아무도 못 잔다, 오늘은. 자기만 해 바라. 가만 안 둘 기다.


(3경신야 2중에서, 92)

 


경신야에 잠을 청하는 일은 작은 죽음을 상징한다. 죽음은 인간의 수명뿐만 아니라 시간도 멈추게 한다살아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거나, 이런 행복한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봉아는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경신야와 화전놀이는 아홉 여인이 함께 경험한 화양연화(花樣年華). 아홉 여인의 화양연화는 순수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여인들은 커피를 함께 마시고, 초콜릿을 조각조각으로 나누어 먹는다그리고 쓴맛이 강한 커피에 넣으려고 준비한 설탕 가루를 손바닥에 부어 맛보기도 한다행복한 순간은 물에 녹는 설탕 가루와 같다. 결국 행복한 순간은 흐르는 시간에 금방 녹아버리지만, 달콤한 여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화전가>화녀전(花女傳)’이다아홉 명의 화녀는 어수선한 일상을 잠시 제쳐두고, 함께 행복을 느낀다. 혼자 피는 꽃보다 여러 송이의 꽃이 다 같이 활짝 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cyrus의 주석>







봉아는 극이 시작되자마자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소네트 15, 그것도 영어 원문으로 된 시를 고모 앞에서 읊으면서 등장한다. 극 중반부에 봉아는 잠에 취한 상태로 T. S. 엘리엇(T.S.Eliot)의 장시 <황무지>의 첫 구절을 영어로 낭송한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황동규 옮김, 황무지, 민음사)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 선생은 1955<황무지>가 수록된 T. S. 엘리옽 시전집(탐구당)을 펴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에 출간된 모든 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 홈페이지에 T. S. 엘리옽 시전집의 서지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에 저장된 서지정보가 무조건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양주동 선생 이전에 우리말로 번역된 엘리엇의 시가 실린 문헌(단행본이 아닌 문학잡지)이 있을 수 있다.

 

화전가의 시간적 배경은 양주동 선생의  T. S. 엘리옽 시전집》이 나오지 않은 19504월 하순이다. 봉아는 우리나라에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황무지>를 영어로 읽을 줄 아는 똑똑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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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2-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셰익스피어 소네트랑 엘리엇의 황무지까지, 흥미롭네요!

cyrus 2025-03-01 21:10   좋아요 1 | URL
봉아가 낭독하는 셰익스피어와 엘리엇의 시구는 희곡의 주제를 떠올리게 해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
 
블루 베이컨 - 프랜시스 베이컨의 파란색과 함께 통과하는 밤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야닉 에넬 지음, 이재형 옮김 / 뮤진트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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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붓질은 포악하다

그는 붓을 휘두르면서 모델의 얼굴을 때린다







붓에 맞은 입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진다

검정, 회색, 빨간색이 불길하게 뒤섞인 피부는 거칠거칠하다

베이컨이 그림을 그릴 때 자주 사용한 빨간색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보인다.







베이컨의 초상화와 인물화를 만나게 되면 지옥도(地獄圖)가 떠올린다.고어(gore: )’로 가득한 그림들이 유명해지자, 대중은 베이컨을 폭력의 화가로 기억한다.


하지만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에 폭력성이 드러난다는 대중의 감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본인은 즐거운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그는 야만과 전쟁이 판치는 이 세상이야말로 자신의 그림보다 더 폭력적이라고 비판한다베이컨의 일침은 틀리지 않았다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희곡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다. 베이컨은 한술 더 떠서 지옥은 바로 이 세상이야!”라고 말했다.


베이컨은 자신의 그림에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러나 어두침침한 그의 그림은 볼 때마다 무섭다. 여기서 베이컨 그림의 기괴한 매력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은 고민한다. 폭력잔혹. 살벌한 단어를 쓰지 않고, 베이컨의 그림이 덜 무섭게 보이도록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 주는 책이 바로 블루 베이컨(Blue Bacon)이다.


이 책을 쓴 야닉 에넬(Yannick Haenel)은 청소년 때부터 베이컨을 좋아한 작가다. 그는 베이컨의 작품들이 전시된 퐁피두 센터(Pompidou Center), 그것도 한밤중에 혼자 관람한다.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들을 혼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일은 축복이다. 하지만 저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는 베이컨의 그림들과 함께한 하룻밤이 마치 지옥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저자는 베이컨이 만든 지옥의 쓰라린 맛을 느낀 이후로 편두통에 시달린다하룻밤의 그림 감상의 후유증이다하지만 푸른 기운이 감도는 베이컨의 또 다른 그림을 보자마자 그의 머리를 콕콕 찌르던 고통이 말끔히 사라진다. 편두통에 짓눌린 저자의 마음을 치유해 준 베이컨의 그림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Water from a Running Tap)이다이 그림은 베이컨이 세상을 떠나기 십 년 전인 1982년에 완성되었다<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난폭한 베이컨이라는 수식어가 나오게 만든 검은색이 가득한 그림들과 다르게 아주 평범하다. 노란색 배경 한가운데에 푸른색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만 그려져 있다. 저자는 베이컨의 그림에서 튀어나오는 파란색에 흠뻑 젖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 앞에 서 있었다. 물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다. 물의 시원함은 우리를 가득 채워준다. 그 시원함 덕분에 유익한 빛이 내 머리 주위로 흘러들었다. 나는 점점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숨도 잘 쉬었다.


(47쪽)



그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를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기분 좋은 청량함을 느낀다저자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파란색상처 없는 나라로 이끄는 빛으로 비유한다<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파란 천국이다


블루 베이컨 그림 없는 미술 책이다저자는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단어로 이미지를 설명한다이 책을 펼치자마자 베이컨의 기괴한 그림들이 불쑥 튀어나와 독자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없다유명한 블랙 베이컨’을 만나기 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베이컨의 파란색 그림을 먼저 알고 있으면 좋다. 그러면 검은색에 가려져 있던 색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베이컨은 붓으로 자신과 인물들을 분해했다블루 베이컨베이컨의 삶에 칠해진 검은색을 분산시켜서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프리즘이다.






<cyrus의 주석>

 



* 21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1]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살아있는 사람을 잡기 위해 덫을 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 42




 

 데이빗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흠잡을 데 없이그려진 자신의 가장 완벽한 작품으로 언급한다.


[1] 데이비드 실베스터, 주은정 옮김,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프랜시스 베이컨과의 25년간의 인터뷰 (디자인하우스, 2015).





* 51




 

 앙토냉 아르토반 고흐의 까마귀가 지구를 황폐화하는 악령에 맞서기 위해 세워진 허수아비라고 확신했다. [2]

   

[2] 앙토냉 아르토, 이진이 옮김, 사회가 자살시킨 자, 반 고흐 (읻다, 2023), 조동신 옮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 (도서출판 숲, 2003, 절판)





* 58




 

 우리는 우리 삶의 질료가 갇혀 있는 이 같은 고통을 인식하지만, 베이컨은 그것에 예술이라는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경험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정도 예민함의 차원에서는 사는 것이 참을 수 없지만, 것의 극히 짧은 순간들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그림은 그 고통에 굴하지 않고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다. 랭보 나는 나의 풍요가 어디서나 피로 얼룩졌으면 좋겠어라는 싯구[3]에 그것이 있다.

 

[3] 시구(詩句)’가 올바른 표현이다. 인용된 시구가 있는 시의 제목은 착란 I: 어리석은 처녀. 출전: 랭보, 김현 옮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2016).





* 78




 

 조르주 바타유는 라스코의 벽을 마주하고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이 풍요로움의 놀라운 광채를 위해 태어났다고 느낀다.”

   

[4] 조르주 바타유, 차지연 옮김,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 (워크룸프레스, 2017).





* 119




 

 질 들뢰즈는 그가 베이컨에 관해 쓴 저서[5]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불쌍한 고기 같으니!” 이보다 더 진실한 외침은 없다. 그날 밤 베이컨의 그림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5] 질 들뢰즈, 하태환 옮김,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 128




 

 랭보의 시에 등장하는 사랑의 열쇠라는 시구[주6]는 나를 꿈꾸게 한다.

   

[주6사랑의 열쇠이라는 제목의 시에 나온다. 출전랭보김현 옮김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2016).





* 163




 

필립 솔러스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





* 166




 

 15세기에 회화 예술을 이론화한 레오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회화란 분수의 표면을 예술적으로 껴안는 것이라고 썼다. [주7]


[7]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김보경 옮김, 회화론 (기파랑에크리, 2011), 노성두 옮김, 알베르티의 회화론 (사계절, 2002년, 절판).





* 177~178







 

 1953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여러 개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레슬링 장면을 기록한 뮤브리지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두 인물또는 레슬러라는 제목으로 불린다.

 

뮤브리지 마이브리지(Eadweard James Muybridge)

 




* 217




 

 앙드레 브르통<나드자>(Nadja)[주8] 서두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라는 질문을 더 선호했다.

   

[주8앙드레 브르통, 오생근 옮김, 나자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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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회의론자 - 신경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희망의 과학
자밀 자키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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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4점  ★★★★  A-





바이러스는 혼자서 살지 못한다. 세포를 만나야 살 수 있다. 바이러스는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더 큰 세포에 빌붙는다. 세포를 장악한 바이러스는 혼자 있을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인다. 바이러스는 자신과 똑같은 바이러스를 계속 만든다. 이때 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 바이러스가 증식하면 세포는 죽는다.


냉소주의(Cynicism)는 성격이 쌀쌀한 바이러스다. 냉소주의가 좋아하는 먹잇감은 마음이 가냘픈 사람이다. 마음이 가냘프면 외로움을 더 잘 느낀다. 그리고 세상이 더 어둡게 보인다교활한 냉소주의는 마음이 가냘픈 사람에게 다가가서 귀띔한다. “나만 믿고 따라오면 잘 살 수 있어.” 마음이 가냘픈 사람은 냉소주의자가 된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며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냉소주의적 처세술에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잘 일으키듯이 냉소주의자는 능수능란하게 변장한다냉소주의자는 음모론자로 변신해서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갈등과 싸움을 부추긴다.


교활한 냉소주의에 속지 않으려면 백신(vaccine)을 접종해야 한다. 냉소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최고의 백신은 회의주의(skepticism)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회의주의를 냉소주의의 동의어로 오해한다. 냉소주의에 이미 감염된 사람은 회의주의 백신 접종을 거부한다. 간사한 냉소주의자는 가짜 회의주의자로 변신해서 냉소주의에 감염된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희망찬 회의론자과학적으로 증명된 냉소주의의 위험성회의주의 백신을 꼭 맞아야 할 이유를 알려준다회의주의자는 지식을 의심한다. 지식을 의심하는 태도는 지식을 완전히 믿지 않아서 거부하는 냉소주의와 다르다. 회의주의자는 냉소주의자처럼 상대방의 견해를 매몰차게 대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존중한다. 그런 다음에 상대방의 견해가 확실한지 아닌지 판단한다. 냉소주의자는 똑똑한 척한다. 그래야 자신의 결점을 철저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회의주의자는 자신 또한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


이 책의 저자는 신경과학을 연구한 심리학자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을 똑똑하지 않은 전문가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책을 썼다희망찬 회의론자는 회의주의자의 고백록이다. 저자는 과거에 냉소주의자로 살아왔고, 지금도 가끔 냉소주의의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 생기면 고인이 된 신경과학자이자 친구인 에밀 브루노(Emile Bruneau, 1972~2020)를 생각한다고 말한다. 에밀 브루노는 이 책이 태어나게 해준 산파이자 희망찬 회의주의자. 에밀은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있지만 않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대방을 만나면 먼저 다가와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회의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최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저자는 에밀을 만난 이후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속이는 냉소주의를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냉소주의자는 공감과 연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뿐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 냉소주의자의 이중성을 잘 모르는 사람은 상대방의 약점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냉소주의자가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겉멋이 든 냉소주의자는 자기만족을 위해 지금도 요리조리 변신한다. 사이버 폭력(Cyber Bullying)을 주도하는 익명의 개인, 음모론을 퍼 나르는 정치인, 사이비 종교의 교주, 이해타산이 빠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다고 비웃는 사람들희망찬 회의론자는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냉소주의자들의 허울을 벗긴다.


백신 거부론자들은 백신을 치료제라고 우긴다. 그들의 거짓 논리를 믿는 사람들은 백신 접종자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뉴스를 꺼림칙하게 느낀다. 백신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기 시작한다. 백신은 치료제가 아니다.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는 약이다회의주의 백신은 우리의 마음 주변을 기웃거리는 냉소주의를 예방하는 삶의 태도다. 회의주의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면 회의주의로 둔갑한 냉소주의를 파악할 수 있다.


거짓 정보와 냉소주의는 끈질긴 불치병이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회의주의 백신은 죽을 때까지 계속 맞아야 한다우리는 끊임없이 정확한 정보를 만날 수 있도록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회의주의 백신의 주요 성분은 희망이다. 희망찬 회의주의자는 어려운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 사전에 냉소라는 단어는 없다. 회의주의자 사전에 있는 희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상대방의 생각을 신뢰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진하는 마음이다. 회의주의 백신을 맞으면 상대방의 마음에서 나오는 정직한 온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회의주의자는 따뜻하다. 다정한 회의주의자는 상대방의 차가운 손을 감싸안을 수 있다.







<회의주의자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 34




 

 은행원의 아들인 디오게네스[1]는 자기 마을의 통화를 위조한 죄로 고소당해 추방됐고 아테네 거리를 전전하며 음식을 구걸하고 큰 도자기 단지 안에서 잠을 자면서 살았다.



[1] 은행원에 해당하는 원문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환전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디오게네스의 생애가 나오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의 책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6을 번역한 이정호 교수(정암학당 이사장) 환전업자로 번역했다. 당시 환전상은 돈을 빌려주거나 돈을 주조하는 일도 했는데, 은행의 원시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대부분 경제사학자들은 은행의 역사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희망찬 회의론자의 저자는 디오게네스가 화폐를 위조했다고 주장하지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디오게네스의 아버지는 나랏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돈을 위조한 죄로 추방당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환전업자인 디오게네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화폐를 맡겼는데, 일에 미숙한 디오게네스가 화폐를 위조했다. 결국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가서 죽었고, 디오게네스는 추방당했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나남, 2021, 494~495).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참고한 고대 문헌들이 전부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은 고대 철학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책이다. 라에르티오스의 책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면 고대 철학사에 해당하는 내용이 빈약했을 것이다.





* 193




 

 19세기 러시아 왕자[2]이자 자연주의자(후에는 무정부주의자로 투옥됨)였던 피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2]은 시베리아를 여행하며 야생을 관찰했다. 그는 저서 상호 원조에서 경쟁이 아닌 협력이 생명의 기본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 194




 

 오드리 로드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자기 돌봄은 공동체와 결속에 그 뿌리를 둔다. 이 현상은 크로프트킨[2]이 목격한 생명의 본성과 심리학 및 뇌과학이 인간에 대해 알려주는 사실과 일치한다.

 


[2] 왕자의 원문이 ‘prince’로 추정한다면, ‘prince’를 왕족 출신의 왕자가 아니라 군주나 귀족의 칭호로 번역해야 한다. 굳이 원문을 확인할 필요 없이 러시아 왕자는 오역이다. 왜냐하면 크로포트킨은 왕족 출신이 아니며 많은 영지와 농노를 소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크로포트킨의 이름 ‘Peter’를 러시아식으로 표기하면 표트르194쪽에 크로프트킨이라는 오자가 있다.





* 301, 302






 

프러포절 프로포절(proposal)

포르포절 프로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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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2-18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루스님의 글에서는 주석과 정오가 제일 재미있어요. 자밀 자키라는 사람이 영어로 쓴 책인지, 혹시 다른 언어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책을 중역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요즘은 중역하는 일이 드물지만, 예전에는 제법 많았었죠.

시루스님이 지적하는 다양한 오류들을 번역자가 놓쳤다면, 편집자라도 바로 잡았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베테랑 번역자들은 나라와 시대 상황에 따른 내용들까지 찾아보면서 일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냥 원문을 우리 말로 옮기기만 하는 선에서 끝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오래전 제가 편집을 맡았던 역사책 번역자도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번역 초고가 정말 형편없었어요. 글도 비문이 많아서 아예 고쳐써야했고, 시루스님이 주로 지적하시는 이름 표기법이나 유명한 사람이나 사건의 실제 상황들이 많이 잘못되어 있었어요. 원서가 독일어 책이었는데, 나중에는 제가 아예 원서와 독일어 사전을 놓고 한 문장씩 다 검증해야 했어요. 역사적 상황들도 많이 찾아보고, 번역된 글이 검색이 안되면 영문으로 찾아보기도 했구요. 그렇게 열심히 작업했는데, 당시 번역자는 제가 뭘 얼마나 고쳤는지 알지도 못하더라구요.

cyrus 2025-02-20 09:21   좋아요 0 | URL
주석과 정오표가 많은 저의 서평은 ‘배꼽이 큰 배’라고 할 수 있어요.. ㅎㅎㅎ
번역자와 편집자들이 보라고 만든 건데 실제로 댓글로 반응을 해주신 분이 그리 많지 않아요.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번역을 해본 적이 없지만, 번역을 잘하려면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식과 표기법이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거든요.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세계
댄 레빗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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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4점  ★★★★  A-





우로보로스(Ouroboros)는 질기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이 뱀은 자신의 꼬리를 삼킨다. 꼬리가 먹혀도 다시 돋아난다











뱀은 둥글게 말아서 돌고 돈다(Round and Round).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우로보로스는 무한과 순환을 상징한다.


원자(Atom)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그리스어 atomos)’ 것처럼 보여도, 잘만 쪼개진다. 한 개의 원자가 분해되면 그 안에 들어있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이 나온다. 이들은 원자보다 더 작은 아원자 입자. 세상으로 뛰쳐나온 아원자 입자들이 다시 만나면 새로운 원자가 생긴다. 만약 원자가 절대로 분해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면, 생명체는 태어날 수 없다. 분해와 재결합을 무수히 반복하는 원자의 성질은 우로보로스와 같다. 원자는 죽지 않는다(Atoms Never Die).


인간은 원자들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생명체 중 하나다. 한 사람의 몸속에 들어 있는 원자의 개수는 얼마나 될까? 전 세계 모든 사막에 있는 모래알보다 무려 10억 배나 더 많다인간이 죽으면서 나온 원자들은 또 다른 생명체를 만든다. 모든 생명체는 원자에서 태어난다그렇다면 그 많은 원자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책으로 만들어진 TV 다큐멘터리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년)에 출연한 칼 세이건(Carl Sagan) 우리가 우주에서 온 특별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별 먼지(star stuff)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별이 폭발해서 우주 사방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별 먼지 속에 원자가 있다.


따라서 원자의 역사를 알려면 제일 먼저 우주에서 시작한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큰 우주의 씨앗은 원자다. 그뿐만 아니라 지구의 씨앗, 생명체의 씨앗이기도 하다. 원자는 다재다능한 입자다.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세계는 우주와 생명체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원자의 업적들을 정리한 책이다.


수많은 물리학자, 화학자, 천문학자, 생물학자들은 태초의 씨앗을 밝히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다그들의 연구는 동시대 과학자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비난을 받았다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그리려고 했던 프랑스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보이지 않는 천사를 그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명백한 사실을 알고 싶은 과학자들은 확인 불가능한 보이지 않는 원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원자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우리는 원자의 실체를 부정한 과학자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원자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실험기구가 없었던 그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Thomas S. Kuhn)은 집단적인 인식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명명했다.[주1]









벨기에의 가톨릭 성직자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는 아주 작은 원시 원자(primeval atom)가 폭발하는 순간 우주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방정식을 이용해 우주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우주는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다고 믿은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우주 팽창설을 거부했다.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주2] 르메르트가 제시한 원시 원자 개념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빅뱅(Big bang) 우주론의 원형이다.


20세기 중반에 아원자 입자들의 정체가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당사 물리학자들은 기뻐하기보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원자의 속성을 믿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반복되는 실험과 정밀한 측정을 중시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실체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상황을 찝찝하게 여겼다. 아원자 입자들이 발견되는 상황을 지켜본 미국의 물리학자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모든 물질의 기본 입자는 원자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과감한 생각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유령과 같은 입자쿼크(quark)라는 괴상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쿼크는 독일어로 헛소리를 뜻한다.


이 책은 과학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여섯 가지 편향을 소개한다. 과학자도 인간이라서 때로는 착각하고,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그러나 가설과 이론을 의심하는 과학자들의 태도를 무조건 편향으로만 볼 수 없다. 과학적인 관점에 따라 의심하는 태도는 증거가 부실한 유사과학과 독단적인 편향에 맞서 싸우는 회의주의(scientific skepticism)’.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김동광 옮김, 까치, 2021)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과학책이었다. 15년이 지난 후에 이 기록을 깬 과학책이 빌 브라이슨(Bill Bryson)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덕환 옮김, 까치, 2020).[주3] 이 두 권의 책은 잘 만들었지만, 단점이 있다








과학책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펴낸 브라이언 클레그(Brian Clegg)에 따르면, 호킹의 책은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한 책이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2003년에 출간된 책이다. 최신 과학 정보가 반영되지 않았다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에는 기본적인 과학 개념들이 쉽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2023년에 나온 이 책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보다 10년은 젊다.


책 속에 사소하지만못 본 척하면서 지나칠 수 없는 옥에 티가 있다.



* 28쪽





 몇 년 후에 그는 교황 피우스 7에게 자신의 이론을 영적 진리에 대한 증거로 활용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원문]

 

 Years later, he would ask Pope Pius XII not to use his theory as evidence of scriptural truth.



피우스(Pius)’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교황은 총 열두 명이다. 국내 천주교인들이 많이 쓰는 표기는 비오. 비오 7(Pius VII, 1742~1823)1800년에 바티칸에 입성한 251대 교황이다. 조르주 르메트르가 살아 있었을 때 활동한 260대 교황은 비오 12(Pius XII, 1876~1958, 재위: 1939~1958).



* 55





 그는 이 기묘한 입자를, ‘quack(돌팔이)’ 또는 ‘quork(꽥꽥거림)’라는 이름을 저울질하다가 제임스 조이스피네간의 야경(Finnegan’s Wake)에 나오는 쿼크(quark)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Wake’깨어나다 또는 밤을 새다를 뜻하는 단어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고국 아일랜드에는 장례식이 끝난 후에 지인들끼리 모여 밤새도록 고인을 추억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풍습이 있다, 소설 제목의 ‘Wake’는 아일랜드의 장례 풍습을 뜻한다. 따라서 피네간의 야경은 오역이다정확한 제목은 피네간의 경야(經夜)’야경은 밤의 경치(夜景)’ 또는 밤에 순찰하는 일(夜警)’을 뜻한다.



* 92




 

 아폴로 10호 우주 비행사들이 달 궤도를 돌았던 것이 고작 두 달 전이었다. 이제는 아폴로 11호의 우주 비행사인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최초의 달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버즈 올드린(Buzz Aldrin)과 함께 아폴로 11호에 탑승한 우주 비행사 한 사람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바로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그는 두 사람과 함께 달 표면을 밟지 못했고, 우주선 조종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콜린스는 처음으로 달의 뒷면을 본 우주 비행사(넓게 보면 인간).



* 274~275






 

 1970년대에 발간된 식물의 사생활(The Secret Life of Plants) 때문에 식물 생리학은 유사 과학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식물에 거짓말 탐지기를 연결한 실험을 통해서 식물이 인간의 감정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주장하는 전직 CIA 수사관의 책이었다. 그의 실험은 재현할 수 없었고, 그 책은 저명한 생물학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결국 식물이 지능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모두 초심리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언급된 이 책의 정체는 식물의 정신세계: 식물도 생각한다(황금용 · 황정민 옮김, 정신세계사, 1993). 저자는 피터 톰킨스(Peter Tompkins)크리스토퍼 버드(Christopher Bird). 두 저자는 과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뉴에이지 관련 서적을 펴냈다.







피터 톰킨스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종군 기자와 미국의 첩보기관 OSS(미국 전략사무국,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요원으로 활동했다. OSSCIA(중앙정보국)의 전신이다. 저자는 피터 톰킨스를 전직 CIA 수사관이라고 잘못 언급했다. CIA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인 1947년에 설립되었다.





영국의 생물학자 데이비드 애튼버러(David Attenborough)1995년에 기획한 BBC 자연 다큐멘터리 제목도 식물의 사생활(The Private Life of Plants)’이다. 식물의 탄생 및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이 다큐멘터리는 책으로도 나왔는데, 애튼버러가 썼다. 다큐멘터리 제목과 같은 책의 번역본(과학세대 옮김, 1995년, 절판)을 펴낸 출판사가 까치. 따라서 유사 과학으로 비판받은 피터 톰킨스와 크리스토퍼 버드의 책 제목을 식물의 사생활로 번역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 토머스 S. , 김명자 · 홍성욱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까치, 2013)


[2] 데이비드 보더니스, 이덕환 옮김, 아인슈타인 일생 최대의 실수(까치, 2017, 절판)


[주3] 브라이언 클레그, 제효영 옮김, 책을 쓰는 과학자들: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을유문화사, 2025), 304~307쪽.






<cyrus의 정오표>



* 108





 

베르헤른 폰 브라운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성홍 성홍(猩紅熱)






* 138




 

 1940년대에 오파린은 권력에 굶주린 생물학자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마르크스주의적 유전 이론으로 스탈린의 호감을 얻은 토로핌 리센코와 손을 잡았다.


토로핌 리센코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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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1-3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루스님 글을 읽을 때마다 원문과 비교해 책의 오류들을 짚어주시는 내용이 정말 재미있어요. 근데 어쩜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인지, 볼 때 마다 신기해요.

이윤기 선생님이 옮긴 저 책, 아주 옛날에 봤던 기억이 나네요.

알라딘 서재에서 논쟁이 있었던 적도 있었고, 지금도 제가 어디 강연하러 갈 때마다 약간 논란이 되는 것이 원자력 발전과 핵 발전 이라는 단어 얘기인데요. 과거 과학자들이 쪼개지지 않는 최소 단위를 원자로 생각했던 것은 당연히 맞고, 이후 핵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나중에 핵폭탄을 개발하고, 이를 한참 후에 핵 발전으로 이어가는데요. 유독 일본과 우리나라만 핵발전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이라는 단어를 국가적으로 사용합니다. 영어로도 Nuclear power plant 가 아니라 Atomic power plant 라구요. 전세계에서 원자력 발전 이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쓰는 나라가 일본과 우리나라를 제외하면 거의 없고, 과학적으로도 핵분열(nuclear fission) 현상을 원리하는 발전이라 당연히 핵발전이 맞는데, 이걸 원자력이 맞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더라구요.

cyrus 2025-02-01 09:59   좋아요 0 | URL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단어나 표현에 호기심이 많아요. 그 단어 하나에 꽂히면 책 읽기를 멈추고, 단어를 알아보려고 조사를 해요.. ㅎㅎㅎ

일본은 두 번이나 핵폭탄을 맞은 경험이 있잖아요. 그래서 핵무기를 뜻하는 ‘Nuclear’ 사용을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찬성하는 일본 정부와 과학자들, 관료들은 국민에게 원자력 발전소의 장점을 잘 전달하고 싶어 해요. 그러려면 원자핵을 홍보하거나 설명할 때 끔찍한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Nuclear’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