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이 잘 안 보는 책을 좋아한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못한다. 책을 즐겨 읽는 지인들은 내가 따분한 책만 골라 읽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의 독서 취향과 비슷한 독자들이 있다.
소설가와 번역가로 활동 중인 정보라 작가는 본인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정 작가의 소개말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괴상한 소설들을 쓴 작가들의 이름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이동신 옮김 《러브크래프트 걸작선》 (을유문화사, 2024년)
* 로드 던세이니, 정보라 옮김 《얀 강가의 행복한 나날》 (바다출판사, 2011년)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2021년 1월의 책]
* 레오 페루츠, 강명순 옮김 《스웨덴 기사》 (열린책들, 2020년)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2021년 3월의 책]
* 디노 부차티, 한리나 옮김 《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2021년)
*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유진현 옮김 《거꾸로》 (문학과지성사, 2007년)
* [제4 개역판] 제임스 조이스, 김종건 옮김 《율리시스》 (어문학사, 2016년)
* [절판] 아서 매켄, 이한음 옮김 《불타는 피라미드》 (바다출판사, 2011년)
일단 제일 먼저 나온 작가는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 예전에 많이 읽었고, 최근에 다시 읽고 있다. 러브크래프트에게 영향을 준 로드 던세이니(Lord Dunsany).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덕분에 알게 된 디노 부차티(Dino Buzzati)와 레오 페루츠(Leo Perutz). 그 밖에 위스망스(Huysmans),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아서 매켄(Arthur Machen). 이중에 정말 유명한 작가는 조이스 뿐이다. 나는 이 작가들의 책이 흥미로웠는데, 그래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지 않다. 작중 묘사와 작가의 문장이 상당히 독특해서 이런 작품을 선호하는 취향이 아니면 어렵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다고 느낀 정보라 작가의 소개말이 있는 책 역시 특이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쓴 작가를 아는 독자는 드물다. 나만큼 괴상한 소설을 즐겨 읽는 서한용 작가는 ‘이 작가’를 알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서울에 사는 ‘애서가’ 서한용의 서재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주1] 서한용 작가는 올해 6월 문학잡지 <현대문학> 신인 추천작 소설 부분 당선작 『성대모사는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로 등단했다. 그는 다음에 발표할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다.
* 찰스 부코스키, 황소연 옮김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민음사, 2019년)
* 찰스 부코스키, 로버트 크럼 (그림), 설준규 옮김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 (모멘토, 2015년)
서 작가는 나에게 정지돈과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 그리고 ‘이 작가’의 괴상한 소설이 좋다면서 여러 번 추천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은 서 작가가 추천한 ‘이 작가’의 특이한 소설이다. 내게 이 소설을 소개한 서한용 작가의 추천사를 공개한다. 바쁜 와중에 독서 모임을 위한 추천사를 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대구 세계 문학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
* 보리스 사빈코프, 정보라 옮김 《창백한 말》 (빛소굴, 2022년)
19세기 러시아의 모스크바 총독 암살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을 지금 이 시대에 읽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겐 아무 의미 없을지 모른다. 혁명? 허무와 사랑 사이의 고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지. 현실을 살아. 대형할인마트에서 쇼핑하기,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음식 먹기, 다이소에서 갓성비 아이템 사기, 쿠팡에서 로켓배송 상품 주문하기, 텔레비전으로 예능 보기,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접속하기, SNS로 남들이 올린 여행지 구경하기, 유튜브로 하루종일 쇼츠 영상 보기.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30평형 아파트에 들어와 잠을 청하기. 안온하고 안락한 하루. 이런 거, 이런 게 행복 아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작동할 여지가 얼마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열거한 것들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세계는 병들었고, 나는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고, 세계의 어떤 이도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고 믿는 사람, 우리는 세계의 압제와 폭력과 억압과 착취와 부조리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싸우는 것이 좋아서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어쩌면 이 책은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될지 모른다.
* 리사 크론, 문지혁 옮김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사람의 뇌가 반응하는 12가지 스토리 법칙》 (웅진지식하우스, 2024년)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픽션들》 (민음사, 2011년)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픽션들》 (민음사, 1994년)
리사 크론은 “이야기란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잘 쓰인 소설은, 주인공이 변화하는 만큼 독자를 변화시킨다. 읽은 후의 나를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소설. 이것이 좋은 소설이다. 관건은, 그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좋은 소설이 독자를 변화시킨다면, 위대한 소설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독자를 변화하게 만든다. 보르헤스는 “예술은 불과 수학의 결합”[주2]이라고 했다. 보리스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은 화염을 방사하는 수학의 정석이다.
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는 러시아 고위 관료들을 암살한 사회주의 계열의 테러리스트다. 자신의 테러 활동을 기록한 <테러리스트의 수기>를 썼고, 3년 후에 이 글은 《창백한 말》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세상에 공개된다. 당시 사빈코프는 망명 중이라 ‘빅토르 롭쉰(V. Ropshin)’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에 서로 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혁명을 꿈꾸는 테러리스트들이 나온다. 작가 본인의 성격과 가치관이 반영된 소설의 주인공은 감정 기복이 심하며 그의 인격은 세상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인용한 소설 속 문장은 주인공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요즘 나는 열병에 걸린 사람 같다. 나의 모든 의지는 단 한 가지, 살인하고 싶다는 열망에 집중되어 있다. (68쪽)
《창백한 말》은 ‘특이한 소설’이다. 소설의 원형인 <테러리스트의 수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는 어디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빈코프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작가보다는 사회주의자 또는 테러리스트로 알려졌다. ‘위험한 사상’을 가진 작가의 책을 독서 모임 선정 도서로 읽을 필요가 있는지 따지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창백한 말》을 번역한 정보라 작가는 작품 해설에 사빈코프를 민중 해방을 위해 혁명에 몸을 바친 민중주의자로 소개했다. 그러나 사빈코프가 파시즘을 지지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달에 미국의 공포 소설 작가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선집이 ‘세계 문학 전집’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번역한 역자는 러브크래프트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와 우생학 지지를 상세히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 ‘위험한 생각’이 녹아들어 있는 작가의 소설을 신중하게 읽고 비평하자고 제안한다. 《창백한 말》도 ‘비판적인 비평’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창백한 말》을 소설 또는 문학 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 처음에 수기였으니 에세이로 분류할 수 있다. 사빈코프가 왜 수기를 소설로 고쳐 썼는지 궁금하다.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알베르 카뮈 전집 4: 여행 일기.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시사 평론(1947~1950)》 (책세상, 2010년)
* [절판]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정의의 사람들 · 계엄령》 (책세상, 2000년)
사빈코프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문학의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소수의 작가만이 그를 기억했다. 특히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창백한 말》에 영감을 얻어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썼다. 《정의의 사람들》에도 러시아의 테러리스트들이 등장한다. 그중 한 사람인 이반 칼리아예프는 도덕을 중시하는 테러리스트다. 서 작가의 알라딘 블로그 필명(닉네임)은 ‘칼리아예프’다.[주3]
[주1] <서.서.서.탐: 서울 청년 서한용 씨의 서재를 탐(구)하다>
2023년 10월 4일 등록
https://blog.aladin.co.kr/haesung/14958932
[주2]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 나오는 표현이다.
[주3] 서한용 작가의 알라딘 블로그 주소
https://blog.aladin.co.kr/seohy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