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 이안재 희곡선 1
윤영선.윤성호 지음 / 책공장 이안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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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집은 가까이, 죽음의 집은 더 가까이.




<죽음의 집>은 2007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윤영선 극작가의 미발표 희곡이다. 2012년에 낭독 공연에서 대본 일부가 낭독되면서 <죽음의 집초고가 처음으로 극장 무대의 조명을 받았다. <죽음의 집초고를 확인한 극작가 겸 연출가 윤성호가 작가 노트를 단서 삼아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새로 썼다. <죽음의 집대본의 1부는 고인의 초고이며 2부는 윤성호가 쓴 것이다죽은 자가 쓴 글과 ‘살아있는 자가 쓴 글이 포개진 희곡, 즉 미완성과 완성이 뒤엉킨 <죽음의 집>은 2017년 윤영선 극작가의 10주기 추모 페스티벌에 초연되었다. 2020년 제41회 서울연극제에 공연된 <죽음의 집>은 희곡상(윤영선윤성호)과 연출상(윤성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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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 작가의 소설집 인생 연구에 실린 베티 블루미스터리 소설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글이다.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된 베티 아줌마라는 인물의 삶을 관찰하듯이 묘사한다
















[대구 서점 <일글책> 6월 독서 모임 선정 도서]

* 정지돈 인생 연구(창비, 2023)




소설 시작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전개된다. 소설은 베티 아줌마가 병원에 입원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병원 관계자는 아줌마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인 화자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줌마를 데려가라고 한다. 어머니는 화자인 와 함께 병원에 가서 아줌마를 데려온다. 그런데 아줌마가 생각보다 이상하다.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자기 집의 벽이 말을 건다. 게다가 냄새까지 난다고 주장한다. 아줌마와 오랜 친분이 있는 어머니 역시 아줌마의 알 수 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렇게 판단할 것이다. 베티 아줌마는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구나. 왜 저렇게 됐지? 아줌마와 어머니는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기 시작했을까. 독자는 한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소설을 읽어나간다.


하지만 베티 블루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린다. 아줌마는 본인의 기억에 지우고 싶은 안 좋은 일을 겪은 시점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건 맞다. 그러나 다 읽었는데도 여전히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여운이 남는다. 아줌마는 자기가 일한 보험회사의 영업부 부장과 사랑에 빠지는데, 부장은 유부남이고 바람둥이다. 결국 둘의 관계는 부장의 아내에게 들통나버리고, 화자가 표현한 대로 작살이 났고 또 구급차 신세를 졌다.’ 부장의 아내에게 크게 혼쭐이 난 이후부터 아줌마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병원에서 퇴원한 아줌마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다. 그리고 온 방에 불을 다 꺼놓고 은박 돗자리를 담요처럼 싸맨 채 지낸다. 아줌마는 단지 전자파가 몸에 안 좋다는 이유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선택한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아줌마는 왜 갑자기 전자파를 두려워하게 된 것일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독자의 궁금증은 하나둘씩 늘어난다. 이러면 독자는 다시 한번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도대체 작가는 베티 아줌마의 삶을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걸까?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이후, 2002)




나는 원래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세세하게 분석하는 습관이 있다. 그렇지만 인생 연구만큼은 기존 방식대로 읽지 않았다. 최근에 수전 손택(Susan Sontag)해석에 반대한다를 다시 읽은 이후부터 소설 분석에 중점을 둔 읽기 방식을 잠시 멈추었다.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기를 멈춘 셈이다.


만약에 베티 블루해석하면서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면, 이 작품은 맥거핀으로 시작해서, 맥거핀으로 이어져서, 맥거핀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맥거핀(MacGuffin)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나오거나 언급되는 소품 또는 인물의 대사가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를 뜻한다. 따라서 맥거핀은 영화나 소설이 끝날 때까지 구체적인 정체나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맥거핀의 역할은 이야기가 전개되도록 하는 결정적인 장면 또는 사건인 것처럼 보여줘서 독자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맥거핀에 속은 독자는 그것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중요한 단서라고 믿으면서 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고 나서야 특별한 의미가 없는 소품 또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결국은 독자는 소설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내놓지 못한다. 


베티 블루를 다 읽고 나서도, 또 여러 번 읽었는데도 베티 아줌마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독자는 베티 블루이외에 인생 연구에 실린 다른 작품들을 끝까지 다 읽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자책감을 느낀다. 심지어 자신의 문해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본인의 읽는 방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베티 블루가 정말로 맥거핀이 가득한 소설인지 단정할 수 없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것이라면 맥거핀으로 볼 수 있다. 정 작가가 그렇게 썼다고 인정해야지만 내 견해가 사실로 판명된다.[주] 베티 블루맥거핀 소설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시간 낭비다혹시나 해서 인생 연구를 이미 읽은 분들에게 사죄한다. 아마도 이분들은 내 글이 난해한 베티 아줌마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이 글 자체가 맥거핀이다.





[] 원래 이 글에 베티 블루에 맥거핀으로 추정하는각종 설정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다. 사실은 맥거핀이라고 주장하는 데 힘을 실을 수 있는 나의 근거가 논리적으로 빈약하며 비약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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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23-07-02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티블루
영화 장면 떠오르네요

cyrus 2023-07-03 06:55   좋아요 0 | URL
독서 모임에 참석한 분 중에 한 분이 <베티 블루> 영화를 봤대요. 베티 아줌마가 영화 속 여주인공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어요. ^^
 
인생 연구 - 정지돈 소설집
정지돈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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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2: 2것은 서평2 아니다.


???: 그러면 뭔데?


글쓴2: 글쎄?




글쓴2 소개

 

서평2 아닌 2 글은 대구 출신 최해성(닉네임은 cyrus, 사2러스)과 대구 출신 정지돈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은 정지돈 마니아지만, 아직 인생 연구를 읽지 않은 서울 출신 최해성’, 줄여서 서해성(본명은 서한용)2 함께 썼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정지돈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다서해성 같은 애서광이 이 작가에게 깊은 존경을 표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이번 달에 두 번 참석하는 독서 모임 선정 도서가 인생 연구라서 서둘러 읽었지만비범하되 소략한 저 책은 내 조갈증을 돋울 뿐이었다.[주1]


누군가 말할 것이다이딴 게 소설이냐고? 나는 최해성이지만 서해성처럼 정 작가의 팬은 아니다그렇지만 나는 인생 연구가 소설이라고 말할 것이다왜냐하면 인생 연구》 앞표지에 정지돈 소설집이라는 작은 글자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맞잖아? 만약에 정지돈 소설집이 안 적혀 있었다면 사람들은 이 책이 인생철학을 주제로 한 철학책으로 착각하지 싶다.


그래도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여전히 믿는 분들을 위해서 내 나름대로 인생 연구를 소설로 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인생 연구는 이전에 나온 소설들과 비교하면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과거에 나온 소설의 형식은 정형화되어 있다. 줄거리는 시간순으로 진행된다. 소설 속(또는 소설 밖) 화자는 한 사람이다.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한결같이 설명한다. 등장인물은 가공인물이지만 독자인 우리의 성격과 거의 비슷하며 우리 삶과도 일치한다. 그래서 독자는 등장인물의 삶과 행동, 감정 그리고 발언에 공감하고 자신의 삶을 대입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에 나온 인물들에 친근감을 느끼거나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인생 연구는 그렇지 않다. 인생 연구에 실린 몇 편의 소설을 읽어보면 과거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유행하면서 등장한 파격적인 서술 방식들을 확인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은 과거의 서사 형식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전통적인 작문 형식을 의도적으로 비튼다. 무의식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서술 방식, 순차적 서술 방식 무시, 의미 없는 말장난에 가까운 인물들 간의 대화,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상천외한 기행(奇行).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은 독자들이 보기에는 난해하고, 상당히 불친절하다



평점


3.5점  ★★★☆  B+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같은 박학다식한 소설가들은 다른 책에 나온 문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정 작가도 이런 식으로 소설을 썼는데 특히 인생 연구》에 실린 소설 , 슈프림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평론가는 정 작가의 파격적인 글쓰기가 이미 과거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것이라서 새롭지 않다고 비판했다. 결국 독자는 난해한 소설을 본인만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인생 연구플럭서스 소설이다. 플럭서스(Fluxus)계속되는 변화’, ‘(물의) 흐름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1960년대에 유행한 전위예술 운동의 명칭이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자본주의에 순응한 기성 예술과 대중문화를 거부한다. 그들은 우연과 일시성을 강조하는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과거 예술 작품은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플럭서스가 지향하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들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객들도 참여한다. 결과물을 중시하는 기성 예술에 반발한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기 작품들을 파괴하고 해체했다. 여기에 관객들도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이 플럭서스가 강조하는 반예술이다. 기성 예술은 돈 많고 고상한 엘리트의 전유물이었고, 미술관은 그들만을 위한 신전이다. 하지만 플럭서스의 반예술은 순전히 우연에 맡기며 대중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행위로만 이루어진다.

 

플럭서스의 등장으로 예술가의 정의는 달라졌다. 예술가는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플럭서스 예술 운동을 이끈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주2]. 플럭서스 소설 인생 연구를 무난하게 읽으려면 독자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인생 연구는 독자의 역할을 부추기는 플럭서스 소설이다. 독자의 역할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능동적인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본인이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인생 연구를 읽는다. 그러면서 소설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부여한다. 독자의 해석은 정답이 아니다. 고정적이지 않다. 변할 수 있다. 어떻게든 작가가 좋아할만한 해석을 고집하는 독자는 종이 위의 독재자다.


서해성은 정 작가의 글이 재미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정 작가의 글을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다시 본다면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재미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최해성은 아니라고 한다. 플럭서스 소설을 읽는 순간 보통의 독자는 플럭서스 독자가 된다. 처음에 아주 재미있었던 작가의 농담은 시간이 지나면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다. 정지돈식 농담은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나타난다. 미리 한 번 알게 된 이상 다시 읽으면 처음 느낀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같은 강에 발을 담근 사람들에게 다른 강물이, 그리고 또 다른 강물이 계속해서 흘러간다라고 말했다[주3]. 어제의 강과 오늘의 강은 다르다. 어제 인생 연구를 읽은 독자와 오늘 인생 연구를 읽은 독자는 다르다우리는 플럭서스다! 인생 연구는 그런 책이다. 재밌다고들 하지만,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은 있어도 한 번 해성은 영원한 해성은 없다.

 




[1] 이 글의 첫 문단을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뒤표지에 실린 신형철의 추천사와 같이 읽어보길 권한다.


[주2] 오자키 테츠야, 원정선 옮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북커스, 2022, 373.


[주3] 김인곤, 강철웅, 김재홍 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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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2023-07-28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격적인 서술방식이란 표현이 동의가 안 되네요. 이번 작품집은 익숙한 서사 형식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요. 어떤 부분에서 파격적이라고 느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주장하시는대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 ˝무의식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서술 방식, 순차적 서술 방식 무시, 의미 없는 말장난에 가까운 인물들 간의 대화,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상천외한 기행(奇行)˝이라고 칩시다. 그런 문법이 익숙해진 이 시점에서 ‘파격‘이라는 표현은 불가능해진 게 아닌지요? 파격은 말 그대로 격식을 파 한다는 말입니다만...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은 이후에, 어떤 작가가 난로 연통을 미술관에 가져다놓았다면 그건 파격이 아니라 뒤샹을 빌려서 제도를 재승인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 스스로 파격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늬앙스로 써 두었는데도 이 작품집을 다시 파격이라는 해설로 가두는 게 동의가 안 되는군요. 글에서는 내내 자유로운 해석을 강조하시는데, 정작 이 글은 책임지지 못할 개념어에 옥죄어 있는 듯 부자유한 인상입니다. (이 독후감에 별 2개 드립니다.)

cyrus 2023-07-29 04: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나름 재미있게 쓴 글인데 제가 봐도 억지로 웃기려고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russist님 말씀대로 저의 책 소개가 엉성해 보인 점은 사실입니다. 막상 써놓고 나니 글에 문제점이 많이 보였어요. 제 글에 별점 2개를 주신다니 후하게 주셨어요. 앞으로는 리뷰를 쓸 때 책 한 권 제대로 읽고, 글에 표현하려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한 다음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안일한 제 글쓰기에 죽비를 내리치는 고견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달 <일글책> 평일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정지돈의 소설집 인생 연구. 대구 책방 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아주 따끈따끈한) 정지돈 작가의 신작 소설을 읽고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유일한 책방이 <일글책>이다. 나는 금요일 반을 신청했고, 9일과 23일 금요일 두 번 참석한다. 인생 연구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모임이 두 번 진행되므로 소설을 네 편씩 나누어 읽는다.
















[대구 서점 <일글책> 6월 독서 모임 선정 도서]

* 정지돈 인생 연구(창비, 2023)




어제 토요일 오전에 진행된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이 끝난 후에 인생 연구를 읽기 시작했다. 인생 연구의 첫 번째 소설은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첫 소설 중반을 읽으면서부터 당혹감이 엄습했다. 도대체 작가가 평범하지 않은 인물의 특이한 삶을 묘사하면서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너도 쉽지 않네.” 안젤라가 말했다.


(정지돈,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중에서, 17쪽)



정 작가의 글도 쉽지 않네.’ 정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은 나는 말했다세 번째 소설 B! D! F! W!는 처음부터 끝까지 난해의 극치를 보여준다정 작가의 글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B! D! F! W!를 읽는 순간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씨발, 이게 뭐야.

 

(정지돈, , 슈프림중에서, 144)



나뿐만 아니라 인생 연구독서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다른 분들도 B! D! F! W!를 읽는 내내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일글책> 책방지기는 인생 연구독서 모임 발제를 어떻게 내면 좋을지 엄청 고민했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그런데 다음 소설을 계속 읽어나갈수록 이상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해석하고 생각하기를 멈춘 채 그냥 쭉 읽었다어쩌면 정 작가의 소설에 익숙해지려면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스크린은...의 주인공은 안젤라. 소설 속 화자는 안젤라의 전 연인이다. 그는 안젤라의 괴팍한 행동과 자유분방한 연애 편력(양성애)을 관찰하듯이 서술한다. 그리고 안젤라의 전 남자친구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성적 도착증(신체 절단 애호증)도 언급한다안젤라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다. 안젤라는 퀴어(queer)’하다현재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퀴어는 원래 기이한’, ‘이상한을 뜻하는 단어다정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는 인생 연구를 읽으면서 익숙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으로 생각되는존재를 만난다.

















* B. 프레시아도 대항성 선언(포이에시스, 2022)




안젤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가 B. 프레시아도(Paul B. Preciado)라고 말한다(우리의 스크린은..., 30). B. 프레시아도는 스페인 출신의 철학자로 퀴어 FTM 트랜스젠더(여성남성으로 성전환)원래 이름은 베아트리즈 프레시아도였다. 남성 호르몬 요법을 통한 성전환 이후로 폴 베아트리즈 프레시아도로 개명했다작년에 프레시아도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대항성 선언(Manifiesto contrasexual)이 번역 출간되었다원서가 2002년에 출간되었으니 20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여전히 성적으로 보수적이고 성소수자들이 살기에 척박한’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 [절판]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이매진, 2015)

*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




잭 핼버스탬(Jack Halberstam, 그도 FTM 트랜스젠더다)이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처럼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며 퀴어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철학자들처럼 폴 B. 프레시아도는 이분법적 생물학적 성별(남성/여성)과 이성애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그생물학적 남성중심주의의 상징이자 남성의 성적 기관인 음경과 여기에 대조되거나(또는 대항하거나) 음경에 비해 평가절하된 여성의 성적 기관 질이 중심이 되는 섹슈얼리티 모두 거부한다. 그는 성별 이분법을 거부하고, N개의 젠더 모두가 선호하는 섹슈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 항문을 주목한다남자도, 여자도,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닌, 그야말로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sex)와 사회적으로 정의된 젠더조차도 의미 없는 대항성의 성 기관은 항문이다. 섹스(생식 행위)의 대안은 항문에 삽입하는 자위 기구 딜도대항성은 늘 변하며 유동적이다. 그래서 자유롭다.


B. 프레시아도를 좋아하는 안젤라는 대항성으로 살아가고 싶은 존재. 화자는 안젤라를 그녀라고 지칭하지만, 안젤라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다. 화자는 안젤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우리의 스크린은..., 14).’ 

















* 김멜라 제 꿈 꾸세요(문학동네, 2022)


* 전하영, 김멜라, 김지영, 김혜진, 박서련, 서이제, 한정현 2021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1)


* 사드, 성귀수 옮김 사드 전집 2: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워크룸프레스, 2018)

 

* [절판] 사드 소돔 120(고도, 2000)




B. 프레시아도는 대항성 선언딜도 그 자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에 영감을 준 작가가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이 적대하는 사드(Sade)실제로 사드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딜도로 성욕을 충족했고, 감옥에서 쓴 소설 소돔 120 원고를 지키기 위해 딜도 안에 숨겼다고 한다여담으로, 김멜라의 소설집 제 꿈 꾸세요에 수록된 나뭇잎에 마르고(12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대니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학교 수업에 가기 전에 소돔 120을 세 페이지씩 읽는다(제 꿈 꾸세요, 71).


이 글이 거의 완성되고 있을 때, 갑자기 인생 연구독서 모임을 위한 발제가 될만한 질문이 생각났다. 당신 곁에 있는 가족, 친구, 친한 이웃이 익숙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그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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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하다

 

[1] 매우 또는 여기저기가 야들야들하게 보드랍고 무르다.

[2] 사람의 몸이나 기질이 야무지지 못하고 맺힌 데가 없어 약하다.





고급 양장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가족 사진첩은 딱딱하고 무겁다. 책장 깊은 구석에 꽂힌 사진첩을 꺼내면 여간 성가시다. 사진첩에 사진을 소중히 넣어 보관한다고 해도 누렇게 변한다사진에 그날의 순간이 남아 있지만, 그날의 감정은 남아 있지 않다세월이 지날수록 사진만 변색하는 게 아니라 사진에 드러난 감정까지 탈색되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기억하려면 글로 기록해야 한다그러면 세월에 의해 닳아져서 사라지기 쉬운 내 인생의 어떤 순간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다.






이도 글 · 그림 이도 일기》 (탐프레스, 2022)




이도 일기말랑말랑한 그림첩이다[1]일상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는 대신에 이도 일기처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면 좋은 점이 있다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으며 사진 변색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리고 사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순간의 감정을 힘겹게 떠올리면서 찾지 않아도 된다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이도독립출판 단편소설 보름달》(2018)을 쓴 작가다. 출판 스튜디오 탐프레스(tampress)’에서 펴낸 문집 W. 살롱 에디션집필진으로 참여했다글이든 그림이든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개인의 삶을 기록하는 행위는 일종의 독백이다. 기록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누구든 내 이야기를 봐주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드러낸다. 저자의 독백은 자기 내면과 주변 세상을 꾸준하게 들여다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전혀 가볍지 않다


이도 일기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저자의 반려인과 반려묘. 저자는 단독 주택에서 이들과 함께 보낸 사소한 일상뿐만 아니라 살면서 불쑥 튀어나오는 걱정과 고민을 들려준다.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머리 안에서만 머물면 가슴이 짓눌린다. 삶을 압박하는 내밀한 고통은 어느 순간 일상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더 무거워지기 전에 부정적 감정을 모조리 털어내어 한 자 한 자 기록하다 보면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의 원인을 찾게 되어 고통이 옅어진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하면서 글을 쓴다. 작년부터 쓰기 시작한 저자의 글을 읽으면 그녀의 말랑말랑한 마음[2]이 점점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단어의 의미를 허투루 보지 않을 정도로 민감하다. 그녀는 작년 521일에 쓴 글에서 여성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낡은 속담들을 비판한다.






 사위 관련 속담이 궁금해 검색했다. 10개 중 하나 빼고는 긍정적인 의미였다. 다시 며느리로 검색했는데 관련 속담 109개 중 긍정적인 게 없다. 끝까지 읽기 힘들 정도였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여성의 다양한 역할 중 하나일 뿐, 결국 한 사람이다. 자아 분열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려면 오래되고 이상한 속담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109개의 속담 중 다음 세대에 남겨줄 만한 게 1도 없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51)



누군가는 개인적 생각을 일기로 써서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면 특정 대상에 편견을 덧씌우는 단어와 문장에 민감해져야 한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사전에 딱 달라붙은 그 이상한 단어를 펜으로 깨뜨려야 한다펜은 단어보다 강하다.

     




















[레드스타킹 20226월 도서] 임솔아, 김멜라, 김병운, 김지연, 김혜진, 서수진, 서이제 2022 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2)





단어에 균열을 내는 글쓰기올해 젊은 작가상 수상작김지연의 단편소설 공원에서에 나오는 주인공의 비판 의식과 닮았다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속담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전에 인간의 온갖 차별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고루한 역사가 반영된 단어를 깨부수면 빈칸이 생긴다. 김지연 작가는 공원에서의 작가 노트 제목을 빈칸을 채우시오로 정했다. 그녀는 사전에 있는 차별적인 단어를 해체하면서 생긴 빈칸에 어떤 말을 채울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무엇이든 쓸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도 작가는 20211028일 일기에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일은 개인적이고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이도 작가는 W. 살롱 에디션 Vol. 2: 쓰는 여자에 수록된 자신의 글 소설, 쓰는 사람에서 소설을 쓸 때면 소설가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글쓰기 욕망이 생기면 세상을 향해 쓰겠다고 다짐한다






* 김정희, 권지현, 이도, W.살롱 커뮤니티 참여자들 

W. 살롱 에디션 Vol. 2: 쓰는 여자_ 펜은 눈물보다 강하다》 

(탐프레스, 2020)




이도 작가는 2020년의 다짐을 올해에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도 일기는 단독 주택과 작업실을 넘어 힘차게 세상으로 나아갔다세상을 향해 꾸준히 쓰고 있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 《이도 일기정오표



* 50



 영빈은 J에 비해 나를 훨씬 많이 알고 있지만 J 영빈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할 때가 있다.


J J






* 61

 




핼로윈 핼러윈






* 152





자세히 보니 검의 때가 잔뜩 묻은 치즈 아깽이었다.

 

검의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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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2-07-0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담이 오래된 글이었기에 더욱 성차별적인 내용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속담마저도 자주 쓰지 않는 우리 세대는 과연 얼마나 성차별적인 표현들을 자주 쓰고 있나 검열해봐야겠어요. 22년 수상작품집 다 읽었었는데, 급하게 읽느라 말씀하신 문제 의식을 깨닫지 못했네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22-07-03 20:13   좋아요 0 | URL
저는 <공원에서>의 주인공처럼 사전의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식으로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책을 읽다가 미심쩍은 단어를 마주하면 그냥 못 넘어가요. 종종 사전의 의미를 나름 비판하면서 재해석한 글을 몇 편 쓴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가다’였어요.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 ‘노가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당시에 그 단어를 보자마자 ‘이건 아니다’라고 바로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