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와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공통점이 있을까? 이 질문을 만든 내가 생각해 봐도 두 사람을 잇는 접점이 없어 보인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서동욱 옮김
《존재에서 존재자로》 (민음사, 2003년)
[레비나스 읽기 모임 두 번째 도서 (8~10월)]
* 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도형 · 문성원 · 손영창 함께 옮김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그린비, 2018년)
[레비나스 읽기 모임 첫 번째 도서 (6~8월)]
* 에마뉘엘 레비나스, 강영안 · 강지하 함께 옮김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2024년)
레비나스에게 문학은 철학을 무럭무럭 자라나게 만든 자양분이다. 레비나스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 작품을 즐겨 읽었다. 그는 타자를 환대하는 철학이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의 소설에서 드러난 사해동포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레비나스가 죽음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논할 때 자주 인용하는 작가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분석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의 주인공 맥베스(Macbeth)가 죽어가면서 내뱉는 말을 인용한다.
* 아르튀르 랭보, 한대균 옮김 《나의 방랑》 (문학과지성사, 2014년)
* 아르튀르 랭보, 김현 옮김, 황현산 감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2016년)
* [구판 절판] 아르튀르 랭보, 김현 옮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1974년)
* 폴 발레리, 김현 옮김 《해변의 묘지》 (민음사, 2022년)
* [구판 절판] 폴 발레리, 김현 옮김 《해변의 묘지》 (민음사, 1973년)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1947년에, 《전체성과 무한》은 1961년에 발표된 레비나스의 저서다. 이 두 권의 책에서도 작가와 문학 작품 속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레비나스가 태어난 곳은 과거에 러시아 영토였던 리투아니아다. 그는 독일에서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철학을 만났고, 프랑스로 건너가 후설의 현상학을 소개했다. 문학을 사랑하는 레비나스가 프랑스 문학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존재에서 존재자로》와 《전체성과 무한》에 19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프랑스 시인들이 나온다. 보들레르, 랭보(Arthur Rimbaud),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폴 발레리(Paul Valéry)다.
* 샤를 보들레르, 황현산 옮김 《악의 꽃》 (난다, 2023년)
* 샤를 보들레르, 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년)
* [절판] 샤를 보들레르, 박은수 옮김 《보들레르 시 전집》 (민음사, 1995년)
* [절판] 샤를 보들레르, 김붕구 옮김 《악의 꽃》 (민음사, 1974년)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인용된 보들레르의 시는 <여행>, <밭 가는 해골>, <심연>(Le gouffre) 등이다. 작품 출전은 시집 《악의 꽃》이다. 1857년에 발표된 이 시집은 태어나자마자 집중포화를 맞았다. 법원은 시집에 외설스럽고 부도덕한 표현이 많다는 이유를 내세워 보들레르를 재판에 서게 했다. 법원은 보들레르에게 벌금형을 내렸다. 《악의 꽃》 2판은 여섯 편의 시가 삭제된 채 1861년에 출간되었다. 보들레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악의 꽃》 3판이 출간되었다.
* 앙투안 콩파뇽, 김병욱 옮김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 (뮤진트리, 2020년)
* 이건수 《보들레르: 저주받은 천재 시인》 (살림, 2006년)
* [절판] 윤영애 《지상의 낯선 자 보들레르》 (민음사, 2001년)
레비나스가 보들레르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모습이 내게는 색다르다. 윤리를 제1철학으로 내세운 레비나스와 도덕을 경멸한 보들레르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공통점이라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철학자와 시인의 기묘한 만남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을 선한 존재로 전제하지만, 보들레르는 원죄에 물든 나쁜 존재로 봤다. 보들레르는 도덕적인 생활이 인간의 악을 감춘다고 생각했다. 레비나스는 유대인이다. 보들레르는 반유대주의자다.
* 테오필 고티에, 권유현 옮김 《모팽 양》 (열림원, 2020년)
* [구판 절판] 테오필 고티에, 권유현 옮김 《모팽 양》 (열림원, 2006년)
* 샤를 보들레르 · 테오필 고티에, 임희근 옮김 《보들레르와 고티에: 아름다움을 섬긴 두 사제》 (걷는책, 2020년)
레비나스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에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가 한 말을 ‘사물들을 즐기고자 하는 모든 욕심’으로 해석한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외부 세계가 존재하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라는 말로, 테오필 고티에는 사물들을 즐기고자 하는 모든 욕심을 표현한다. 이 욕심이 세계 내 존재를 구성한다.
(《존재에서 존재자로》 중에서, 56~57쪽)
여기서 레비나스가 말한 ‘욕심’은 타자를 지향하는 욕망과 동일하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존재가 아닌 ‘무한한 자’로 바라보면서 조건 없이 환대하는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이라고 표현한다.
고티에는 예술지상주의를 강조한 시인 겸 소설가다. 그의 대표작 《모팽 양》 서문은 예술지상주의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고티에는 이 서문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며, 유용한 것은 추하다고 했다. 예술지상주의자 혹은 유미주의자라고 부르는 예술가들의 제1철학은 ‘아름다움’이다.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누리는(향유) 것이다. 그 밖에 실용적인 사물과 도덕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어서 예술지상주의자에게는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첫 시집 《악의 꽃》 초판에 고티에에게 보내는 헌사를 남겼다. 실제로 두 사람은 친했으며 서로를 존경했다. 보들레르 사후 1868년에 출간된 《악의 꽃》 3판의 서문은 고티에가 보들레르를 만났던 일을 회상한 <샤를 보들레르>라는 글이다. 보들레르는 1859년에 쓴 <테오필 고티에>에서 《모팽 양》을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라고 평가했으며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지상주의자 고티에를 옹호한다.
레비나스의 책을 읽을 때 그가 인용한 문학 작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비나스는 철학을 만들기 위해 문학이라는 풍부한 재료를 마음껏 사용한 철학자다. 물론 몇몇 작품들은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을 도드라져 보이게 만드는 문학적 장식품일 수 있다. 그렇지만 문학으로 철학에 접근하면, 처음에 난해하게 느껴진 내용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철학자가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해석도 나올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사랑하는 방식은 무한하다. 보들레르의 시를 자주 읽은 독자로서 레비나스와 보들레르의 기묘한 관계를 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