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Me)



No. 5











<Kim Yun Shin>

장소: 국제갤러리

전시 시간: 2024319~ 2024428

2024427일 토요일 오전 10시경에 만남.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서로 다른 둘이 만나면 하나가 되고, 하나는 다시 둘이 된다동양고전에 나올 법한 이 여덟 글자는 조각가 김윤신의 연작 제목이다김윤신은 1970년대부터 <합이합일 분이분일> 연작 조각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조각 작품의 재료는 오래되고 못생겨서 쓸모없는 나무다. 작가는 전기톱으로 나무를 잘라서 작품을 만든다합이합일은 작가와 조각 재료인 나무가 하나가 된 상태다. 작가는 나무를 자르고 쪼갠다. ‘분이는 나무는 작가의 톱질에 분해되는 과정이다. ‘분일은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다.


 

















* 후지하라 다쓰시, 박성관 옮김 분해의 철학: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사월의책, 2022)





합일합이 분이분일은 자연계의 모든 물질이 순환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서로 다른 재료를 조합하면 새로운 물건이 완성된다(합일합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건의 상태는 변하고물건의 품질이 떨어지면서 분해된다(분이분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분해는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부정적인 현상이다. 모든 존재가 분해되면 갈라지고, 부서지고, 썩어가고, 파괴되고, 쓸모없는 상태가 된다한마디로 말하면 사물이 분해되면 쓰레기가 된다하지만 생태학 관점에서 바라보는 분해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분해된 것은 망가진 것도, 쓸모없는 쓰레기도 아니다. 언제든지 재사용하거나 재활용할 수 있다분해돼서 남은 자연의 여분은 새로운 사물 또는 생명체가 탄생하는 데 이바지한다.


환경사를 전공한 일본의 철학자 후지하라 다쓰시(藤原辰史)분해의 철학에서 돈이 되는 사물을 만들어서 생산하는 사회덧셈과 곱셈의 세계로 비유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분해되고 부패해서 쓰레기가 되거나 완전히 소멸한다. 분해가 일어나는 세계는 뺄셈과 나눗셈의 세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2002-789 (2002년, 맨 왼쪽)

합이합일 분이분일 2002-790 (2002)

합이합일 분이분일 2016-3 (2016)

합이합일 분이분일 1978 (1978년, 맨 오른쪽)




후지하라 다쓰시는 부패가 더 미적이고 더 역동적인 작용(분해의 철학》 51)’이라고 말한다<합이합일 분이분일> 나무 조각 연작은 생태학적 조각이다. 작가의 나무 조각에 분해와 재생이 새겨져 있다. 못 쓰는 나무는 자연적으로 부패하거나 인간에 의해 분해돼서 생긴 부산물이다. 작가를 만난 죽은 나무 조각들은 살아있는 조각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2019-14

2019

 




지난달 4월에 종료된 국제갤러리의 김윤신 개인전에 톱으로 자른 나무 조각들을 쌓아 올려서 만든 목재 조각 작품색을 입힌 나무 조각들을 이어 붙인 작품들이 공개되었다(회화 작품도 전시되었다). 하지만 작가의 목재 조각 작품 재료에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합이합일 분이분일 2019-14>의 재료는 폐목과 못이다


















* 프랜시스 마르탱, 박유형 옮김 숲 아래서: 나무와 버섯의 조용한 동맹이 시작되는 곳(돌배나무, 2022)


* 멀린 셸드레이크, 김은영 옮김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아날로그, 2021)




나무 조각에 박힌 못은 마치 썩은 나무에 자란 버섯 또는 균류(菌類)를 연상시킨다버섯은 죽은 나무에 무리를 지어 자라며 죽은 나무의 영양분을 먹는다. 버섯은 균류에 속하는데, 균류는 동물도 식물도 아닌 독립된 생물군()으로 분류한다. 균류는 생태계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한다. 바로 부패. 균류는 죽은 나무와 동물의 사체에 있는 영양분을 흡수한다. 분해와 부패를 일으키는 균류는 무기질과 같은 여러 화학물질을 만든다. 무기질을 만드는 균류 덕분에 흙은 비옥해지고, 새로운 식물이 흙의 영양분을 먹으면서 자란다. 균류가 없으면 지구는 사람이 버려서 썩지 않는 쓰레기와 자연이 남긴 쓰레기(썩지 않은 동물 사체와 죽은 식물)가 흘러넘치는, 아주 지저분한 별이 되고 만다최근에 식물학자들은 지구 생태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나무와 버섯 또는 균류의 공생 관계를 주목한다.


김윤신의 목재 조각 작품은 ()든 탑이다. 하지만 목재 조각 작품 또한 시간의 흐름과 오직 무질서로 향하는 엔트로피(entropy)의 보이지 않는 힘을 피할 수 없다. 목재 조각 작품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분해되고, 파괴될 것이다(목재 조각 작품은 불에 약하다). 작품이 해체되는 과정은 작품 제목인 <합이합일 분이분일>분이분일에 해당한다. 가수의 운명이 가수가 직접 부른 노래 제목에 따라가듯이, 김윤신의 목재 조각 작품은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제목을 따라간다. 합쳐진 둘이 분해되면 하나가 되지만, 이 하나마저 분해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완전히 소멸되는 상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맞이하게 될 진정한 ()’이다()든 탑은 무너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으로 선보이는 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 뉴스 레터입니다.

무료로 읽는 특별한 글입니다.

글을 읽어 보시고 모임 참석을 결정하시면 됩니다.







[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 5월에 읽는 책]

박보나 태도가 작품이 될 때(바다출판사, 2019)










책 제목은 1969년 스위스에서 열린 전시회 제목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rom)’에서 따온 것입니다. 스위스 출신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기획한 이 전시회는 당시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전시회를 보러 온 관객들과 비평가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전시장에 가면 으레 볼 수 있는 그림과 조각품이 단 한 점도 없었거든요.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예술가들의 행동이었어요. 제만이 기획한 전시회에 참가한 예술가들은 스스로 작품이 된 것이죠.

 

백남준과 친했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1969년 스위스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입니다. 그는 전시장 이곳저곳에 지방 덩어리를 채웠습니다. 그는 관객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만의 예술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1965년에 보이스는 파격적인 행위예술을 이미 선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금박을 칠하고, 죽은 토끼 사체를 안은 채 관객들 앞에서 세 시간 동안 작품을 설명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남은 그의 행위예술은 <죽은 토끼에게 예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는 틀에 박힌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예술 작품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면서 치켜세우는 관객과 비평가들 모두에게 반기를 든 전시회였습니다. 그동안 예술가들은 선배 예술가들의 걸작을 모사하고, 그들이 이미 시도한 표현 방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과거 예술가들이 선보인 독창적인 표현 방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가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랄트 제만은 틀에 박힌 규칙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새롭지 않았던 것이죠. 제만은 과감하게 규칙을 위반하는 예술가의 태도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단조롭고 뻔한 아름다움을 좋아하지 않고, 기존 사회질서를 비딱하게 바라보는 예술가들을 소개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을 땐 저자의 작품 설명에 쫓아가지 마세요. , 저런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읽으세요.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만의 태도가 제일 중요합니다.


 

이런 분들도 모임에 오시면 좋겠어요.

 


내가 예술이라는 게 뭔지 직접 보여주마.”

 

본인 스스로 , 예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의 예술을 보여주세요. 본인이 직접 만든 예술 작품도 좋고요, 악기를 가져와서 연주해도 됩니다. 멋진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짧은 일인극을 보여줘도 좋습니다. 예술가로서의 나를 마음껏 드러내 주세요.

 



좋은 예술가가 있으면 소개해 줘.”

 

나만 알고 싶은 독특한 예술가아니면 나만 알기 아까운 독특한 예술가를 소개해 주세요. 책에 소개되지 않은 예술가도 좋습니다. 본인은 괜찮은데 정작 다른 사람들은 어렵고 이상하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 예술가들이 있을 거예요. 익숙하지 않고, 난해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을 테니 당신이 좋아하는 예술가들을 자랑해 주세요.

 

독서 모임에 오는 분들의 태도가 다음 달 <두루미> 모임 분위기를 결정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한 분이라도 왔으면 좋겠어요. 모임 참석자가 두 명 이상 모이지 않으면 아무 책 아무 말 대잔치를 하겠습니다.

 

독서 모임의 주인공은 책도, 모임장이 아닙니다. 낯선 모임에 호기심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당신이 독서 모임을 이끄는 주인공입니다. 당신의 태도가 그날의 독서 모임이 됩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5-02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모임인 것 같다. 특히 아무 말 대잔치라니 부담도 없고. 근데 왜 시간하고 장소는 없노?
이러고 저러고 지간에 난 넘 멀어서 못 갈 것 같다. ㅠ

cyrus 2024-05-04 10:51   좋아요 4 | URL
모임 날짜와 장소는 정해졌어요. 여기 일정 공지해봤자 홍보 효과가 없어서 안 올렸어요. 지금 딱 한 분만 모임에 참석한다고 했어요. ^^;;

페크pek0501 2024-05-04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날짜와 장소는 써 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라도 보고 문의할 수 있죠.
좋은 모임이 될 것 같아요.

cyrus 2024-05-04 19:28   좋아요 0 | URL
알겠습니다. 모임 날짜와 장소를 공지하겠습니다. ^^
 





두루미(Me)



No. 4








<Thomas Ruff: d.o.pe>

장소: PKM 갤러리

전시 기간: 2024221~ 413

202431일 오후 12시경에 만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예쁜 촛불로 그대를 맞으리

향그러운 꽃길로 가면 나는 나비가 되어

그대 마음에 날아가 앉으리

 

아 한 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를 위해 노래를 부르리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주단을 깔아놓은 내 마음

사뿐히 밟으며 와 주오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 산울림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1978) 노랫말 1-

 



나는 예술 사진(fine-art photography)을 볼 줄 모른다. 나는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아주 오래전에 예언했던 미래의 문맹자에 속한다.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


















*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도서출판 길, 2007)

 

* [절판] 발터 벤야민, 에스터 레슬리 엮음,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위즈덤하우스, 2018)




사진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나는 여전히 예술 사진이 낯설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면 습관처럼 그 작품에 담긴 내용을 찾으려고 한다. 나는 예술작품 앞에서 술래가 된다. 술래는 예술가가 작품을 만든 의도를 찾거나 작품 속에 있는 알레고리(allegory)를 해석하려고 시도한다하지만 요즘은 특별한 내용이 없는 예술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예술 사진도 마찬가지다이런 유형의 예술작품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전혀 아름답지 않고,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예술작품은 낯설면서도 어렵다


벤야민이 경계하는 상업 사진은 사람들에게 항상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만 반복해서 보여주기만 한다. 예술 사진의 가치를 알아본 벤야민은 사진작가들이 사진만 찍어서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진작가들에게 글을 쓰라고 조언한다. 상업 사진에 반기를 든 사진작가는 자신의 예술 사진에 대한 설명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벤야민과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진작가 토머스 루프(Thomas Ruff)는 사진을 글로 설명하는 행위를 거부한다사진에 붙은 설명글은 감상자가 편안하게 해석할 수 있게 깔아놓은 푹신한 매트리스다. 하지만 루프의 사진 작품에 감상자를 위한 매트리스가 없다루프는 현실을 묘사하는 사진이라는 익숙한 정의에 타협하지 않는 사진작가. ‘현실을 묘사하는 사진은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내가 찍은 세상이 어때? 멋지지?” 멋짐이 흘러넘치는 사진은 감상자 앞에 매트리스를 펼친다.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감상자는 사진을 해석한다


루프의 사진 작품에 감상자가 보고 싶은 어떤 형상이나 내용이 없다. 오로지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루프는 컴퓨터로 합성하거나 일부러 형상을 흐리게 한 사진 작품들을 선보였다그는 현실을 찍기보다는 현실을 재조작했다.


서울 삼청동의 PKM 갤러리에 전시된 <d.o.pe> 연작현실을 묘사하는 사진이 아니며, 감상자를 만족시켜 주는 작품도 아니다<d.o.pe> 연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독특하다. 루프는 벽에 거는 대형 카펫을 만드는 회사에 자신이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가 들어 있는 카펫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완성된 여러 장의 카펫 중에 본인이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골라서 설명글 대신에 ‘d.o.pe’라는 표제를 붙였다.








 

 

 










[절판] 올더스 헉슬리, 권정기 옮김 《지각의 문. 천국과 지옥》 (김영사, 2017)


* 윌리엄 블레이크, 서강목 옮김 《블레이크 시선》 (지만지, 2012)


[절판] 윌리엄 블레이크, 김종철 옮김 《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1990)





‘d.o.pe’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자전적 에세이 지각의 문과 관련이 있다. ‘d.o.pe’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의 약자. 작품 제목에 두 개의 점을 빼면 마약을 뜻하는 단어(dope)가 나온헉슬리는 1953년에 메스칼린(Mescaline)이라는 환각제를 복용하기 시작한다. 1963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메스칼린뿐만 아니라 LSD도 복용했다. LSD는 당시 기성세대의 문화를 거부한 히피족들이 즐겨 찾은 환각제였다. 헉슬리는 지각의 문천국과 지옥, 이 두 권의 책에서 환각에 빠진 상태가 되면 현실을 뛰어넘은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권의 책 제목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에서 따왔다. 블레이크는 어린 시절에 환영(幻影)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자신의 환각 상태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했다. 


































발터 벤야민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 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도서출판 길, 2008)


* 제임스 글릭, 박래선 옮김, 김상욱 감수 《카오스》 (동아시아, 2013)


* 필립 볼, 조민웅 옮김 《자연의 패턴》 (사이언스북스, 2019)


* [절판] 에드워드 로렌츠, 박배식 옮김 《카오스의 본질》 (파라북스, 2016)




루프의 <d.o.pe>에 나타난 이미지는 우연히 부서진 현실이다. ‘우연히 부서진 현실프랙털(fractal)이다. 프랙털은 우연히 부서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fragere’에서 파생된 형용사 ‘fractus’에서 유래된 단어다수학자들은 프랙털을 부분이 전체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형태로 본다






토마스 루프

d.o.pe 15

2023









루프가 만든 이미지는 프랙털 패턴이다. <d.o.pe>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술 사진을 옹호한 벤야민은 초현실적 사진에 회의적이다. 1929년에 쓴 <초현실주의>라는 글에서 그는 유령을 부르는 모임, 신비주의, 최면술을 선호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을 비판한다. 루프의 초현실적 사진은 벤야민이 비판한 비현실성과 무관하다. 우리는 프랙털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주변을 자세히 보면 프랙털을 발견할 수 있다구불구불한 해안선에서 일부 지역을 확대하면 전체 해안선과 유사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고사리의 커다란 잎은 작은 고사리 잎과 똑같이 생겼다.






토마스 루프

d.o.pe 10

2022




<d.o.pe> 연작은 익숙하면서도 아름다운 현실을 해석하게 만드는 매트리스가 깔려 있지 않은 작품이다. 루프가 갤러리 벽에 깔아놓은 것은 이상한 프랙털 주단이다. 카오스의 저자 제임스 글릭(James Gleick)은 프랙털을 마음속에서 무한을 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프랙털 주단은 무한한 이미지의 황홀경을 느낄 줄 아는 관람자를 맞이한다. 처음에 관람자는 낯선 이미지를 주시한다. 이미지에 익숙해진 관람자는 말없이 프랙털 주단을 사뿐히 밟는다. 관람자 한 사람의 눈빛에 밟힌 프랙털 주단은 예술 사진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루미(Me)



No. 3








<실패를 목적으로 한 정상적 질서>

장소: 국제 갤러리 서울

전시 기간: 202421~ 202433

202431일 오전 1120분에 첫 만남





완벽(完璧)의 원래 의미는 흠 없는 구슬(玉)이다. 완벽은 고대 중국에 존재했다는 화씨의 구슬이라는 진귀한 보물에서 유래된 단어다. 완벽의 반대말은 하자(瑕疵)’. 하자는 구슬의 얼룩진 흔적을 뜻한다

















* 플라톤, 김유석 옮김 티마이오스(아카넷, 2019)


* 마이클 벤슨, 지웅배 옮김 코스미그래픽: 인류가 창조한 우주의 역사(롤러코스터, 2024)

 



완벽한 상태는 아름답고, 완전해야 하며 조화로운 질서에 가깝다. 일단 무조건 좋은 것이어야 한다. 플라톤(Plato)에게 완벽함이란 천상에 있는 이데아(idea)’. 그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이데아를 모방한 불완전한 것들이라고 인식했다플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거인이 나온다. 이 거인은 우주를 창조한다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우주 역시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라고 봤다그에 따르면 물질의 네 가지 원소인 물, , , 공기는 무질서한 상태다. 데미우르고스는 네 가지 원소에 각각 정다면체 형태를 부여하면서 우주를 만든다. 플라톤은 우주가 정십이면체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플라톤 입체라고 알려진 우주론은 예술가와 천문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자신이 쓴 책 우주의 신비에서 플라톤 입체를 이용해서 행성의 공전 궤도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정다면체 형태로 된 우주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세계로 이해했다.


도예가는 완벽한 도자기가 나올 때까지 계속 굽고, 마음에 안 들면 망치로 깨뜨린다. 일반인이 보면 멀쩡해 보이는 도자기를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도예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인정하자. 누구나 완벽한 것을 선호한다.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생각하는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한 번쯤은 노력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별 하나를 완전한 형태로 그리려고 애쓴 적이 있다. 내 눈에는 별이 비뚤비뚤해 보여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다. 원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다. 보기 좋게 동그란 원이 나오지 않으면 여러 번 그리곤 했다. 여러 번 시도해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 마음 한구석에 실현 불가능한 벽을 세우려고 애쓴다. 그 벽의 이름은 완벽이다.


마음속에 세우고 있는 완벽을 무너뜨리려면 결국 실패를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여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굴복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패의 가치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속담을 언급하고 싶지 않다. 실패를 경험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실패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완벽해지기 위해 애쓰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김홍석

시지프스의 돌

2024년




김홍석의 개인전 <실패를 목적으로 한 정상적 질서>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완전하고 완벽한 삶(또는 예술)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완벽과 조화로움과 거리가 먼 김홍석의 작품들은 성공과 실패로 명확히 나누려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한다









김홍석

믿음의 오류(운석)

2024년


믿음의 오류(운석)국제갤러리 K3 에 따로 설치된 작품이다. K3 관에 흘러나온 음악주춤거리는 행진이었다.








김홍석

A Star

2011년





관람객이 김홍석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홍석은 관람객이 단번에 이해하기 쉬운 완벽한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이런 작가가 관람객의 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난해한 작품을 선보였다고 해서 단순히 개인전을 실패로 규정할 수 없다따라서 김홍석의 작품들은 성공과 실패라는 경계가 무의미한 뒤엉킴(entanglement)’을 보여준다전시 제목은 정상적 질서에 가까운 완벽함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절대로 완벽할 수 없기에 실패하더라도 무언가를 계속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완벽해지지 말자. 되는대로 하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24-03-1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 ‘완벽‘과 ‘하자‘ 가 그런 뜻이었다는 게 정말 너무 신기해서 놀라는 중이에요.

cyrus 2024-03-20 06:27   좋아요 0 | URL
‘완벽’과 관련된 사자성어 ‘화씨지벽’에 관한 일화는 《한비자》에 있고요, ‘하자’와 관련된 일화는 《회남자》라는 책에 있어요. ^^

페크pek0501 2024-03-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되는대로 막 살고 싶어용...

cyrus 2024-03-20 06:29   좋아요 0 | URL
사실 되는대로 살기를 안 좋게 표현하면 막 사는 거죠.. 때론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때가 있어요.. ^^;;
 




두루미()

 

No. 2



2024년 2월 24일 토요일

일글책


참석자: 너진(일글책 책방지기), 고요





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를 만들고 나면서부터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책가방 안에 <두루미> 선정 도서를 챙겨 넣고 다니는 일이다. 다 읽은 책이지만, 생각날 때마다 다시 펼쳐본다. 하지만 책을 들고 다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주말에 책방에 가서 내가 만든 독서 모임 선정 도서를 홍보하기 위해서다. 사실 홍보라기보다는 책 소개에 가깝다. 독서 모임 참석 인원 한 명 더 늘리려고 책을 소개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내가 직접 구매하고 읽은 책을 알리고 싶을 뿐이다. 평소대로 책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책에 관해 얘기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책방지기와 그곳에 자주 오는 분들에게 <두루미> 두 번째 선정 도서를 소개했는데, 그분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 두 번째 선정 도서]

() 미리엄 엘리아, 에즈라 엘리아 (그림) 미리엄 엘리아, 신해경 옮김

미술관에 갑니다(열화당, 2021)

 


이거 진짜 미술책 맞아요?”

 

애들이 보는 그림책 같아요.”

 

이런 특이한 책을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두루미두 번째 선정 도서 미술관에 갑니다 어린이용 그림책을 패러디한 미술책이다. 판형이 작고, 분량이 얇아서 금방 다 읽을 수 있다이 책에 엄마와 두 자녀가 나온다. 엄마는 현대미술을 좋아한다. 엄마는 예술을 보여주기 위해 미술관에 데리고 간다. 하지만 자녀는 엄마가 소개하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를 잘못 만난(?) 어린 친구들은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볼 때마다 충격에 빠지고, 공포를 느낀다. 


현대미술은 정말 어렵다. 미술관에 갑니다에 나온 자녀는 현대미술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혼란스러워하는 대중들의 모습을 상징한다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룬 책이라서 그런지 책을 이해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우스갯소리로 미술관에 갑니다3분 만에 다 읽을 수 있지만, 그 책을 이해하려면 평생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미술관에 갑니다는 다 읽은 책인데도 다 읽은 것 같지 않은 책이다.


미술관에 갑니다는 독자가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책이다. 이 책은 여백이 너무 많다. 그 여백은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어야 한다. 엄마와 두 자녀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석하거나 난해한 작품들로 가득한 미술관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술관에 갑니다를 여러 번 훑어볼 때마다 <두루미> 모임 시간에 꺼낼 질문들을 만들었다. 질문 만드는 일이 상당히 어려웠다. 내가 만든 질문 몇 개는 바로바로 대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질문 1] 

이해 안 되는 예술작품을 보면 어떤 반응을 해요? 현대미술을 잘 모르는 아이와 타인에게 이해 안 되는 예술작품을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질문 2]

누드가 있는 그림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끝나지 않은 미술사 대논쟁 중 하나가 누드에 대한 반응입니다. 현재 걸작으로 알려진 누드 그림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 외설 논란에 휩싸였고, 대중들의 혹평을 받았어요. 반면 예술가들은 누드를 검열하는 태도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술적인 누드와 외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질문 3]

미술관에 가서 예술작품을 봤을 때 속은 기분이 든 적이 있나요?



[질문 4]

현대미술이 어렵고 난해한데도 미술관에 가는 본인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미술관에 가서 재미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어요?



[질문 5]

철학자들은 현대미술을 철학으로 접근해서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합니다. 철학으로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장단점을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두루미> 첫 번째 모임에 이어서 두 번째 모임도 참석한 분이 계셨는데, 별칭은 고요. 고요 님은 한때 학생들에게 그림책을 읽는 것을 가르치는 일을 했고, 자녀와 함께 미술관에 가본 경험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미술관에 갑니다가 마치 하브루타 학습 방식이 적용된 그림책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고요 님은 내가 준비한 질문들을 꺼내기도 전에 질문과 관련된 견해를 밝혔다.


미술관에 갑니다의 엄마는 자녀들이 작품에 대해서 질문하면 답변하고, 가끔 자녀들이 이해하기 힘든 작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한다. 하지만 고요 님은 자녀와 미술관에 가면 자녀들에게 작품을 보고 느낀 것을 묻지 않는다고 했다. 정확하지 않겠지만, 고요 님이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은 이렇다. 그분은 작품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작품을 보고 감정을 느끼는 것을 선호한다. 나와 정반대다. 고요 님은 미술관에 갑니다의 글(부모와 자녀의 대화)보다는 그림을 유심히 봤다고 했는데, 나는 반대로 글을 반복해서 읽었다.

















* 정서연 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난해한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12가지 키워드(21세기북스, 2023)

 

* [품절] 김찬용 김찬용의 아트 네비게이션: 대한민국 1호 도슨트가 안내하는 짜릿한 미술사 여행(arte, 2021)

 



고요 님은 미술관에 갑니다와 함께 읽은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책 제목이 현대미술을 접한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맞아, 진짜로 모르겠다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의 목차만 봐서는 대략 어떤 책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미술이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 현대미술과 관련된 미술 사조와 용어를 설명한 책인데 이와 비슷한 책을 추천하자면 김찬용의 아트 네비게이션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4-02-2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 미술은 너무 작가의
주관이 강렬하게 반영되어서
그런진 몰라도 그닥 감흥이
없더라는...

cyrus 2024-03-01 09:56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저게 뭐지?’라고 반응하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조금은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저의 주관적인 해석에 가깝지만, 현대미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정답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틀리더라도 크게 신경 안 써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