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세계사 -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엠마 메리어트 지음, 윤덕노 옮김 / 탐나는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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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점  ★★★  B





역사는 원래 색이 없다. 역사가와 정치가는 역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에 손을 갖다 댄다.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에 얼룩이 생긴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은 역사는 얼룩덜룩 더럽혀져 있. 지저분한 역사는 정치색을 띠고 있다짙은 정치색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정치색은 사실을 지워버린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낙서 쟁이다그들은 역사가 된 사람들의 얼굴에 끼적끼적 낙서한다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다.’, ‘5·18 민주화운동은 북한 특수 부대가 주도한 폭동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가 잘 살 수 있었다. 두 대통령을 독재자로 헐뜯는 사람들은 전부 빨갱이다!’ 낙서로 뒤덮인 역사는 누렇게 녹이 슬어 있다녹은 사실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낙서 내용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낙서 쟁이들은 자신이야말로 사실을 올바르게 기록하는 역사가라고 믿는다그들은 항상 오른손으로만 펜을 쥐면서 역사에 낙서한다오른손에서 나온 낙서는 역사에 거짓과 편견을 덧칠하는 오록(誤錄)이다낙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오른손에 있던 펜은 성난 칼이 된다. 날카로운 칼날로 변한 펜은 낙서를 열심히 지우는 역사가들을 공격한다낙서 쟁이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정치인을 좋아한다. 낙서는 정치색과 무척 잘 어울린다. 


역사는 연약하다. 그래서 역사 속에 있는 사실은 오랫동안 살아남기 힘들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는 물렁물렁해지고, 조그만 틈이 생긴다사실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역사적 진실이 담긴 목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다. 역사의 증언이 기록으로 남아 있으면 다행이지만, 기록 또한 역사와 마찬가지로 항상 완벽한 상태로 유지되지 않는다의미 있는 사건은 수많은 역사가와 호사가를 만나면서 과장되고, 각색되고, 조작된다. ‘진실로 꾸며진 사건은 역사가 된다우리가 배운 역사 대부분은 만들어진 것이다.


만들어진 세계사 정치색과 편견, 오해와 거짓으로 물들인 역사를 모아놓은 책이다역사 속 정치인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선정을 베푼 위대한 정치인 대 최악의 독재자사람들은 역사책에서 훌륭한 정치인을 만나면 그 사람의 좋은 점만 보려고 한다. 반면에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독재자를 만나면 눈에 거슬리는 미운털만 보인다


독일을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으로 건설한 비스마르크(Bismarck)의 별명은 철혈 재상이다. ‘(, )’은 비스마르크가 연설 중에 언급한 단어다. 철은 무기, 피는 군대를 뜻한다. 이러한 별명으로 인해 비스마르크는 무자비한 전쟁광으로 비난받는다. 하지만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적대국인 프랑스와 외교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Hitler)의 나치 정권은 비스마르크가 세운 독일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제2의 비스마르크라고 선동했다한술 더 떠서 비스마르크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분명히 자신의 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치 정권은 비스마르크를 왜곡했다. 비스마르크는 반유대주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경계한 정치인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방대하고 지루한 역사를 최대한 줄여서 재미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를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덧붙여지며 이 과정에서 진실이 축소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에 총을 든 카우보이가 항상 등장한다. 서부극에 나오는 악당은 은행을 털거나 이주민을 습격하는 강도단이거나 백인을 잔혹하게 죽이는 호전적인 아메리카 원주민이다서부극의 서부 개척 시대는 재미있게 만들어진 역사. 총을 소유한 카우보이는 많지 않았다. 권총이 비쌌기 때문이다. 백인이 주인공인 서부극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악역을 맡는다서부극은 미지의 땅을 개척한 백인을 찬양한다서부 시대의 백인들만 주목하는 역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비참한 처지를 은폐한다. 백인들은 도시와 철도를 만들기 위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쫓아냈으며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았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역사를 냉소적으로 정의한다. 그의 말은 이 책의 시작을 알리는 제사(題詞)로 나온다.



역사란 당시 그곳에 없었던 사람들이 말하는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들에 대한 거짓말 모음이다.

 


역사가 거대한 모래밭이라면 진실은 진주다. 귀중한 진실을 찾는 일은 중요하다. 문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렵다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시야를 넓혀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좁아진다. 여기에 진실을 차단하는 색안경까지 끼게 되면 역사의 얼룩진 부분만 도드라져 보인다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는 연약하고쉽게 변질되고거짓이 잘 섞인다. 진실 순도 100%인 완벽한 역사는 없다. 흠집이 생기기 쉬운 역사를 알아야 하는 우리 또한 완벽하지 않다그렇다고 해서 의문과 검토를 멈춘 채 역사를 그대로 지켜만 볼 수 없다역사를 방치하면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우리가 보는 역사는 요지경 속에 있다. 요지경 속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진실, 좀처럼 인정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 두 개의 진실은 떼어내기 힘들 정도로 포개져 있다. 우리는 역사의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복잡한 역사를 단순하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역사 전체가 아닌 반쪽짜리 역사만 골라서 본다. 보기 좋은 진실만 무조건 찬양하는 역사관은 반쪽 역사를 미화하는 일이다. 유독 불편한 진실만 건드려서 무조건 비난하는 역사관은 반쪽 역사를 무시하는 일이다만들어진 역사의 원래 제목은 ‘Bad History’. 역사는 나쁘지 않다. 역사는 억울하다. 진짜로 나쁜 건 역사에 편견과 거짓이라는 불순물을 섞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색을 칠하여 제 입맛에 맞는 역사를 만들려는 사람들이다. 역사책인 척하는 그들의 책은 거짓말 모음집이다.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만들어진 세계사2013년에 나쁜 세계사: 제멋대로 조작된 역사의 숨겨진 진실(매일경제신문사)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두 책의 역자는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역자는 나쁜 세계사에 있는 오탈자와 오역을 고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세계사를 펴냈다.










(21) 이안 몰타이머(22) 이안 몰타이어 

→ 이언 모티머(Ian Mortimer)




* 24





종교 개혁과 종교 개혁가






* 86





 철 가면의 전설은 수많은 소설의 소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알렉산더 듀마1850년에 발표한 대하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내용[주1]이다.


[원문]


 The legend of the masked prisoner has spawned countless novels and films, most famously the third instalment of Alexandre Dumas’s 1850 saga The Three Musketeers.



[1] 알렉산더 듀마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삼총사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3부작의 원제는 <달타냥 로맨스>(d’Artagnan Romances). 1부는 국내에 많이 알려진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 2<20년 후>(Vingt ans après), 3<브라즐론 자작: 10년 후>(Le Vicomte de Bragelonne Dix ans plus tard)는 번역되지 않았다.


뒤마가 쓴 철 가면1부가 아닌 3부 <브라즐론 자작>에 있는 내용이다. 3부 분량이 많아서 영문판은 3부작으로 출간되었는데, <브라즐론 자작> 3부가 바로 철 가면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 88




 

 죄수가 철 가면을 썼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은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볼테르였다. 그는 1770년과 1772년 사이에 발행된 백과전서[2]에서 죄수는 턱 아랫부분이 용수철로 고정된 철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밝혔다.


[원문]


 It was the writer and philosopher Voltaire who first claimed that the prisoner wore an iron mask ‘a movable, hinged lower jaw held in place by springs in his Questions sur l’Encyclopédie, published some time between 1770 and 1772.



[2]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디드로(Denis Diderot), 달랑베르(d’Alembert), 볼테르(Voltaire),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편찬한 책이다. 1권은 1751년에 출간되었고, 1772년에 도판이 포함된 총 30권의 백과사전이 완성되었다. 볼테르가 철 가면을 언급한 저서는 백과전서가 아니다. 정확한 제목은 <백과사전의 질문>(Questions sur l’Encyclopédie)이다.






* 126




 

 1959년 마오쩌둥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주고 있다면 방법이 없다. 전체 인민의 절반이 죽으면 나머지 절반은 배고픔을 면할 수 있다.”



굶어주고 굶어죽고






* 141





 정리하자면 최초의 증기기관은 제임스 와트의 발명품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최초의 증기기관은 고대 그리스인이 만든 수증기를 이용하는 원시 장비[주3]라고도 할 수 있다.



[3]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든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Hero of Alexandria)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헤론이 태어난 곳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으나 로마 제국에 속한 영토였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한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자신들을 그리스인이라고 여겼다.






* 146





로데지아 로디지아(Rhodesia)






* 159




 

포리피린 증상 포르피린 증상(porphyria)






* 177





 갈릴레오가 1613년에 출판했던 태양 흑점에 관한 서한교황 바오로 3에게 헌정된 책[4]이었다.



[4] 교황 바오로 3(Paulus III)1468년에 태어나서 1549년에 사망했다(재위 기간: 1534~1549). 태양 흑점에 관한 서한(Letters on Sunspots)이 발표된 시기에 활동한 교황은 바오로 5(Paulus V, 1550~1621, 재위 기간: 1605~1621).






* 181





매리를 여왕으로 인정했다. 메리를 여왕으로 인정했다.






* 200





패탱 원수 페탱(Pétain) 원수

구판에는 페탕으로 표기되어 있다.






* 203




 

프랑스와 미테랑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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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포와 도쿄 - 1920년 도시의 얼굴
마쓰야마 이와오 지음, 김지선 외 옮김 / 케포이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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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 천국의 도서관으로 떠난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별명은 ()의 거인이다. 눈만 뜨면 뇌가 고픈 거인은 엄청난 양의 책을 사 먹으면서 글을 썼다다양한 분야의 책을 고루고루 먹는 삶을 살아온 그가 절대로 눈과 뇌에 대지 않는 이 있었다. 거인이 먹지 않은 책은 바로 소설이었다지식욕이 왕성했던 젊은 시절의 거인은 소설을 즐겨 먹었다. 이랬던 그가 왜 소설을 먹지 않게 되었을까?


거인은 현 시대의 문학 속에서 현실’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책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성장했던 젊은 거인은 기자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책 밖에 펼쳐진 거대한 현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카시가 바라본 당시 일본은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다카시는 경제 성장에 눈이 멀어 정의와 도덕을 짓밟는 사회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책과 펜을 무기로 만들어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을 비판했다. 다카시는 화려한 금빛으로 물든 현실에 가려진 추악한 인간 군상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사회 문제에 민감한 다카시는 소설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거인은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다카시는 현실을 외면한 문학에 실망감을 느꼈다. 그는 현실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논픽션을 읽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다독가는 무지와 편견을 경계하기 위해서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한다. 하지만 다독가의 뇌는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다. 뇌는 게으르다. 어려운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뇌가 느슨해지면 인간의 정신 상태도 느슨해진다. 다독가도 예외가 아니다. 다독가는 스스로 못 느끼겠지만, 느슨해진 뇌의 명령을 순순히 따른다. 여기서 편견이 생긴다. 뇌는 너무나도 얇고 투명한 편견 콘택트렌즈를 만든다. 눈동자에 편견 콘택트렌즈를 낀 다독가는 왜곡된 상태로 책과 세상을 바라본다. 책과 세상은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다. 그러나 게으른 뇌에 속은 다독가의 눈에는 검은색과 흰색만 보인다다카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눈동자에 달라붙은 편견 렌즈를 떼어내지 못했다. 그는 소설은 검은 책’, 논픽션 서적을 하얀 책이라고 믿었다.


다카시는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의 소설을 읽어봤을까? 그가 란포의 소설을 읽었다면 이야기에 ‘음침하고 불쾌한 검은색이 칠해져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 생전에 란포가 사인하면서 자주 썼던 문장이다란포는 이 말을 신조로 삼아 글을 썼다. 그매혹적이면서도 기이한 환상적인 세계를 묘사했다. 란포가 묘사한 인물들은 평범하지 않다. 종이로 만든 인형을 사랑하는 남자(압화와 여행하는 남자), 신이 되고 싶어서 무인도에 지상 낙원을 만든 몽상가(파노라마 섬 기담)는 현실 도피적인 인물이다. 란포 소설에 반사회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그들은 상식을 넘어선 망상을 실현하거나 비뚤어진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


란포가 소설을 쓸 때 자주 다룬 소재를 네 가지 단어로 요약하면 환상’, ‘범죄’, ‘몽상가’, 변태. 그래서 독자들은 란포의 소설을 자극적인 이야기로 취급한다. 하지만 란포의 소설은 환상이라는 가면을 쓴 현실적인이야기. 지금까지 독자들은 란포의 글에 씌워진 가면만 보고 있었다. 란포와 도쿄: 1920년 도시의 얼굴은 란포 소설의 환상’ 가면에 가려진 현실을 주목한 책이다.


란포의 소설 속에는 다카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이야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란포가 작가로 등단한 해는 1922년이다란포와 도쿄란포의 소설들을 모아서 ‘1920년대 일본 도쿄의 얼굴을 복원한다. 1920년대 일본 도쿄는 서구식 근대화가 진행 중인 거대한 도시였다. 근대 도쿄의 얼굴은 유럽풍 문화로 분칠한 모습이었다. 도쿄로 삶의 터전을 옮긴 시골 사람들은 서구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도시인이 되어 갔다. 도시인들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고, 유흥가로 알려진 아사쿠사(浅草)를 산책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타지인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실업자로 전락했다. 그들은 빈곤에 시달렸고, 외로웠다. 고독한 도시인들은 지루한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유흥가와 사창가로 향했다. 쾌락에 절인 도시인들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란포는 독자들이 흥분할 만한 자극적인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그는 ‘환락의 도시’ 도쿄에서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사실대로 썼다


란포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커지기만 하는 근대 도쿄 중심부에 살았다. 그가 관찰한 것은 도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괴로운 현실의 무게감에 짓눌린 채 살아온 도시 부적응자들은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쾌락만 쫓아다닌다. 중독성이 강한 쾌락 올가미에 걸린 사람들의 정신은 흐리멍덩하다. 그들은 망상에 가까운 헛된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망상에 빠지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한다이 상태가 지속되면 삶이 피폐해진다. 란포의 소설에 환상만 있는 건 아니다. 그의 이야기에 우리 눈앞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불편한 현실이 있다불편한 현실이란 인간성이 매몰된 자리에 비뚤어진 욕망으로 채운 건물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란포의 소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도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도시 속 카나리아.






<정오표>



* 65

 






보이이지만 보이지만






* 109

 





 영국의 마가렛 샌거 부인이 다이쇼 11(1922) 일본으로 건너와 1개월 정도 머무르며 산아제한강연을 전국 각지에서 개최하여 관심을 모았다.



마가렛 샌거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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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7-15 1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아저씨 예리하긴한데 그 생각에도 뭔가 함정이 있지 않나 싶기도하네. 어차피 소설이 현실을 그린다해도 몇년 아니 몇달 후에 읽으면 어제의 산물 아닌가? 난 역사를 못 읽겠으면 소설이라도 읽어야 하잖나 싶기도 해. 글구 현실만을 그리는 게 소설의 전부는 아니거든. 그냥 그 양반은 소설과는 인연이 없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ㅋ
란포 뭔가 중요한 사람 같은데 일케 짚어주니까 좋다. 잘 썼네!^^

cyrus 2024-07-17 16:45   좋아요 1 | URL
란포가 살았던 1920년 일본의 사회 분위기와 현재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가 서로 비슷한 점이 있어요. 그때 당시에도 젊은 백수들이 많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고 해요. 흥미로운 사실은 1920년대 일본에서도 층간 소음으로 인한 갈등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어요.

얄라알라 2024-07-20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이이지만....
이런 실수 저도 자주 하는지라 순간 뜨끔...

cyrus 2024-07-21 20:43   좋아요 1 | URL
저도 어쩌다가 ‘보이이지만’으로 쓸 때가 있어요. ^^;;
 




페리클레스(Pericles)와 역병. 투키디데스(Thukydides)펠로폰네소스 전쟁사2을 단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하면 이렇다.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1년 차]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 투키디데스천병희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도서출판 숲, 2011)





페리클레스는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 정치가다.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라케다이몬(스파르타)이 먼저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아테네는 여러 도시 국가들과 연합하여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맞서 싸운다. 1차 전쟁은 델로스 동맹의 승리로 끝이 난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의 군주 아르키다모스 2(Archidamus II)30년 휴전 평화조약을 맺는다. 평화를 되찾은 아테네는 번영을 누린다. 이 전성기에 나온 건축물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이다. 신전 건축 공사의 총 감독을 맡은 조각가 페이디아스(Phidias)는 페리클레스의 친구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한다. 승승장구한 아테네는 하나하나씩 도시 국가를 지배하고, 속국이 된 도시 국가 지도자들에게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아테네의 지배욕에 진절머리가 난 도시 국가들은 스파르타의 편을 든다. 다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형성된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지도자들은 라케다이몬에 회동하여 아테네와의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한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처음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들은 1차 전쟁 기간에 아테네의 막강한 해군력을 몸소 경험했다. 스파르타는 동맹국들에 최대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하자고 종용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자신들의 장점인 해군력을 동원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의 해상로를 차단해 버린다. 이러면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경제력을 옥죄는 동시에 궁지에 몰린 친()스파르타 도시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해상 봉쇄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아테네는 해상 봉쇄령 철회를 거부하고, 도리어 스파르타에 불리한 제안만 내놓는다.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눈다.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다.

















[절판] 이소크라테스페리클레스데모스테네스 외김헌 외 2명 옮김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 (민음사, 2015)

[책 소개] 페리클레스의 민회 연설문 두 편과 추도사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연설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역자의 해설도 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안 읽어도 될 정도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단과 당시 아테네의 상황이 잘 정리되어 있다.




2권의 백미는 페리클레스의 추도사다페리클레스는 전사자들의 무덤 앞에서 추도 연설을 한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스러워도 아테네 민주정을 지키고헬라스(그리스전체의 번영을 유지하려면 스파르타와의 항전은 불가피하다고 호소한다


전쟁 2년 차, 아테네에 역병이 돈다. 아테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도 맞서 싸워야 할 처지에 놓인다. 많은 아테네인이 목숨을 잃는다. 혼란에 빠진 민중은 페리클레스의 지도력을 의심한다. 페리클레스는 정치생명이 끝날 수 있는 위기를 맞지만, 민회에서 자신의 유능한 무기인 (logos)’을 이용하여 아테네인들을 설득한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과 남에게 들은 것은 엄밀히 검토해서 기록’했다고 밝혔다그렇다면 사료를 철저히 검토하는 일을 중시한 투키디데스처럼 똑같이 투키디데스에 맞서보자투키디데스의 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비판적으로 읽자는 뜻이다.

















* 도널드 케이건허승일 · 박재욱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까치, 2006)




투키디데스의 그리스어 문체는 난해하다. 투키디데스는 전업 작가가 아니라 군인이다. 얼마나 문체가 어렵게 썼으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연구자들이 번역의 어려움에 불만을 토로한다. 고대 전쟁사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역사가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은 총 4권으로 구성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번역하는 일 자체가 해석이라고 말한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4권을 축약한 책이다.
















* 메리 비어드강혜정 옮김 고전에 맞서며전통모험혁신의 그리스 로마 고전 읽기》 (글항아리, 2020)




영국의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Mary Beard)어느 투키디데스를 믿을 것인가?라는 글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투키디데스의 문체가 최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더 나아가 투키디데스가 쓴 글의 신뢰성을 의심한다투키디데스는 남에게 들은 것을 참고했다고 주장만 했을 뿐 정보를 제공해준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그렇다면 투키디데스는 과연 누구로부터 연설문과 사료를 입수했을까투키디데스가 검토했어도 그에게 사료를 제공한 익명인을 100% 신뢰할 수 있는가?


도널드 케이건도 투키디데스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것을 경계한다. 투키디데스는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이 아테네의 중대한 실수’였다고 주장한다(26511~12). 페리클레스의 죽음(아테네를 덮친 역병은 전쟁 영웅마저 쓰러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이후 아테네는 적임자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1년 차]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 아리스토파네스천병희 옮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 (도서출판 숲, 2010)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이후에 등장한 아테네 지도자고만고만한 수준의 지도자라고 평가한다. 그들이 페리클레스에 못 미칠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그들이 너무나 한심해 보여서 이름조차 입에 담기 싫어했던 것일까? 지도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 아테네의 형편을 풍자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 아카르나이 구역민들을 먼저 본 독자라면 지도자들이 누군지 알 수 있다. 클레온(Kleon)니키아스(Nikias)다. 그들이 주도한 당파 싸움은 아테네의 군사력을 떨어뜨렸다. 무기력한 아테네는 항복할 때까지 승기조차 보이지 않는 전쟁을 억지로 질질 끌고 갔다. 무능한 지도자로 인해 전쟁이 길어지자 민중은 지쳐만 간다. 


하지만 케이건은 투키디데스의 견해를 반박한다. 시켈리아 원정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은 아테네인들의 소극적인 태도라고 주장한다. 투키디데스는 시켈리아 원정을 당연히 질 수밖에 없는 무모한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이건은 만약 아테네인이 제대로 된 지도자를 지지해서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했으면 승산이 있었을 것으로 예측한다.

 

비어드는 투키디데스가 페리클레스의 광팬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대중을 마음대로 주무른,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라고 평가한다(265장 8절). 그러면서 페리클레스가 명망이 높았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정부(情婦) 아스파시아(Aspasia)와의 관계 때문에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아스파시아는 소크라테스(Socrates) 교류할 재색을 겸비한 여성이었지만, 정적들은 그녀의 과거 직업을 집요하게 공격했. 아스파시아는 상류층 인사들을 접대한 고급 매춘부였다. 민중은 페리클레스의 지도력을 비난할 때마다 내연녀 아스파시아도 같이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심지어 페리클레스의 아들조차도 아버지와 정부를 싫어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경력과 연설문 전문을 여러 장에 걸쳐서 기록하는 내내 아스파시아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투키디데스는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라면 자신의 책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라고 내다봤다(1권 22장 4). 과연 우리는 이런 투키디데스를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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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의 몸 - 몸을 통해 탐색한 중세의 삶과 죽음, 예술
잭 하트넬 지음, 장성주 옮김 / 시공아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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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가 아니라 서평이다. [주1]









 “그림이 움직이는 걸 들키면 서커스단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어. 문신이 날뛰는 걸 보고 누가 좋아하겠나. 게다가 그림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네. 자세히 보고 있으면 곧 그림이 이야기를 시작할 걸세. 한 세 시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몸뚱이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스무 편쯤은 볼 수 있어. 소리도 들리고, 생각도 전해질 거야. 누가 봐주기만 기다리고 있단 말일세.”

 

(레이 브래드버리, 장성주 옮김[주2],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문신을 새긴 사나이와 열여덟 편의 이야기중에서, 13~14)

 




중세라는 이 외로운 친구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자. 어떤 이름이 잘 어울릴까. 중세는 한자 이름이고, 순우리말 이름은 미들이(Middle)’중세에게 순우리말 이름을 붙여준 작명가는 히스토리(History)’그리스 출신의 아테네 학당 소속 학생 엘 그레코(El Greco)’[주3]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교양인 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 사이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중간한 이름을 받았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509~1511




엘 그레코가 르네상스 맨보다 나이가 많다. 엘 그레코는 예수가 태어나기 전(B.C: Before Christ)부터 살았다. 두 사람은 태어난 곳이 다르고,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아주 친하다. 엘 그레코와 르네상스 맨은 고전을 좋아한다. 엘 그레코는 르네상스 맨에게 아테네 학당에 같이 가자면서 꼬신다. 아테네 학당에 가면 플라톤(Plato) 선생님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선생님을 만날 수 있어. 같이 갈래?”

 

미들이는 항상 성경을 들고 다닌다. 그 친구가 자주 가는 곳은 교회다엘 그레코와 르네상스 맨은 미들이를 싫어한다. 두 사람은 지나가는 미들이를 보자마자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쟤는 신밖에 몰라저렇게 재미없는 녀석은 처음이야.


엘 그레코와 르네상스 맨은 재미없고, 멋이 없는 미들이에게 좋지 않은 별명을 지어준다. 미들이의 별명은 암흑어둠의 자식이다두 사람은 미들이를 만날 때마다 놀린다. 미들이 어딨어? 어! 여기 있었구나. 야 이 어둠의 자식아, 암흑시대에서 태어났냐? ㅋㅋㅋ 네가 깜깜해서 안 보인다 ㅋㅋㅋ


미들이는 쓸쓸하다. 아무도 미들이를 알아주지 않는다. 공자 선생은 미들이에게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마라(不患人之不己知)’[주4]고 위로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미들이가 슬픔을 삼키면서 참아보지만, 미들이를 싫어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불어난다. 그들은 종교에 심취한 미들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미들이가 미친 마법사들[주5]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학구적인 엘 그레코와 멋쟁이 르네상스 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과묵하고 무식한 미들이를 외면한다.


우리는 중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중세의 참모습을 완전히 가린 옷이다. 온통 검은 이 옷은 중세를 미워하거나 오해한 사람들이 억지로 입힌 거추장스러운 거죽이다. 중세 시대의 몸: 몸을 통해 탐색한 중세의 삶과 죽음, 예술벌거벗은 중세를 보여주는 책이다


중세인들은 몸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 자신을 신의 피조물로 여겼으면서도 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중세인들은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의학 문헌을 참고하면서 몸에 대한 지식을 축적했다. 하지만 고대의 의학 문헌에 남아 있는 의술과 약 제조법 대부분은 전혀 효과가 없는 것들이다. 대부분 사람은 엉터리 지식을 믿은 중세인들을 비웃는다. 중세는 억울하다. 중세인들의 무능한 수준을 비웃기 전에 고대인들의 한계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순리다엘 그레코가 미들이를 비웃을 처지가 아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가 연출한

<The Simpsons> 핼러윈 특집 에피소드 오프닝의 한 장면


문신을 새기는 사람이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옆에 있는 사람은 

리처드 매드슨(Richard Matheson)




중세인들은 몸을 하나의 세계로 이해했다그들은 작은 세계를 하나하나 해부해서 관찰했고, 부위별로 등급을 매겼다머리는 세계의 꼭대기라서 가장 높은 1급이다. 2급은 심장이 있는 가슴이다. 3급은 소화 기관이 있는 복부(). 가장 낮은 4급은 노폐물이 나오는 생식기와 항문이다중세 지식인들은 펜에 지식을 묻혀서 인간의 몸에 문신을 새겼다그들은 문신으로 작은 세계를 가득 채웠다. 제각각 다른 이 문신들이 잘못 만들어진 거죽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중세의 참모습이다따라서 중세 시대의 몸은 중세의 참모습을 압축한 도상(圖像)이다.


중세인들의 육체는 땅속에 누워 있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중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은 지금도 꿈틀거리면서 움직인다살아 있는 문신에 과거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있는 이야기(story)가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역사(History)라고 불러야 한다중세라는 몸뚱이에 펼쳐지기 시작한 문신 형태의 이야기는 생명력이 강하다. 중세 이야기 속 주인공은 신이 아니다. 신의 기적을 믿지 않았고, 식욕을 참지 못했고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고, 성욕을 숨기지 않은 인간이 주인공이다. 생기 넘치는 문신은 르네상스로 쭉쭉 뻗치면서 자란다중세라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중세를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주6] 아름다운 붉은 석양이 생긴 황혼으로 비유했다. 중세가 없으면 르네상스도 없다. 중세가 저문 자리에 르네상스가 다시 태어났다. 중세는 어둡지 않다. 문신이 가득한 벌거벗은 중세는 빛나고 있다


자, 이제 알록달록 무늬들이 계속 생기는 중세를 위해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자. 나는 이 친구를 국카스텐(Guckkasten, 만화경)’[주7]이라고 불러주고 싶다.






[1] 원문은 당연히, 이것은 수기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제사(題詞).

 

[2] 중세 시대의 몸의 역자이기도 하다.

 

[3] 스페인의 화가. 그리스 출신이라서 본명보다 엘 그레코(그리스 사람)’라는 별명이 더 알려졌다.

 

[4] 논어학이, 16

 

[5, 6, 7]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에 수록된 단편소설 제목. 화성의 미친 마법사들(The Mad Wizards of Mars),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No Particular Night or Morning), 만화경처럼(Kaleidoscope).

 





* 14

 

 중세라는 시계의 작동 버튼을 공식적으로 눌러도 좋은 시점은 다름 아닌 로마 제국 붕괴 무렵이다. 이 제국은 이전 몇 세기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광대한 땅을 병합하고 지배했으나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게르만족 오도아케르[주8]에게 폐위당하면서 곧바로 중세가 시작됐고, 이로써 유럽에서는 제국 지배기가 막을 내렸다.



* 원문





[8] 원서에 ‘Germanic King Odoacer’라고 되어 있다. 역자는 게르만족 왕으로 직역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면 ‘king(왕)’은 적절하지 않은 호칭이다. 오도아케르는 게르만족 왕족 출신이 아니다오도아케르의 혈통에 관한 견해도 엇갈리는데, 몇몇 역사가들은 오도아케르가 순수 게르만족이 아니라 훈족의 피가 섞인 스키리족 출신이라고 주장한다오도아케르는 서로마 제국의 장교로 활약하다가 황제를 폐위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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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지도 -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
바이얼릿 몰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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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보통 르네상스라고 하면 천 년 동안 잊힌 고대 그리스 문화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시대순으로 단순 나열된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이 천 년중세라고 생각한다. 또 중세를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사이에 끼인 암흑기로 인식한다. 마녀사냥, 흑사병, 교황, 십자군 전쟁. 우리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중세와 관련된 것들이다. 앞서 언급된 단어들은 르네상스와 비교하면 어둡고, 답답하고,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천 년으로 뭉뚱그린 중세는 종교에 의해 과학의 발전이 발 묶인 시대, 즉 서양 지성사의 공백기로 취급받는다. 정말로 중세는 모든 것이 신과 교회가 중심이었고, 지식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꽉 막힌 어두운 시대였을까.

 

오랫동안 묻혀서 잘 지워지지 않은 중세의 어두운 덧칠을 쓱쓱 제거해보자. 편견과 오해가 뭉쳐져서 생긴 때를 벗긴 중세에 인간이 있었고, 사유하는 정신이 있었고, 여기에서 꽃 피운 과학이 있었다.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는 중세에 관한 우리의 막연한 이해와 비뚤어진 편견을 지워버리는 책이다.

 

지식의 지도저자는 고대 세계에서 존재했던 과학(수학, 천문학, 의학) 문헌들이 중세에 어떻게 살아남아 르네상스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는 지적으로 대단히 활발한 시대였다.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세운 아랍의 군주 할리파(칼리프)는 철학, 의학, 그 밖의 다른 과학 필사본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아랍 학자들은 완전히 잊힐 뻔한 고대의 지적 유산을 소화해 제 살로 만들어 단련한 뒤 유럽으로 전파했다.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 바그다드는 고대의 지적 전통과 르네상스의 지적 전통을 이어준 중세 학문의 중심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기독교, 아랍 문화가 섞이고 충돌하는 지식의 용광로였다. 아랍 학자들의 공헌으로 더욱 풍부해진 고대의 지적 유산은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면서 유럽 수도원의 필사실과 학문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른 이베리아반도의 도서관에 유입되었다. 이렇듯 중세에도 학문이 전파되고 발전되는 경로가 있었다. 저자는 중세 과학 및 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들, 유클리드(Euclid, 수학),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천문학), 갈레노스(Galenos, 의학)의 저술이 번역되고 전파되는 경로를 추적하여 지식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중세를 복원한다.

 

지식의 지도는 야만, 폭력, 억압과 같은 부정적인 말 빛깔로 덧칠된 중세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과학 대 종교’, ‘기독교 대 이슬람으로 양분하는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도 과학을 억압하는 기독교라는 오래된 통념에 벗어나지 못했다.

 


 히파티아의 사연은 고대 세계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강렬한 이야기일 것이고 그래서 그는 이 시기의 가장 잘 알려진 여성 과학자이기도 하다. [중략] 이교 문화에 적대적인 기독교도의 표적이 되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75쪽 각주)

 


히파티아(Hypatia)는 기독교가 학문의 자유를 탄압한 사례를 언급할 때면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히파티아의 죽음을 묘사한 일화를 인용하면서 고대 지적 유산의 가치를 무시한 기독교의 종교적 광신을 비판했다. 하지만 히파티아는 종교적 광신의 희생자가 아니다. 실제로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관직에 등용된 기독교인들에게 존경받는 학자였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권력에 눈이 먼 기독교 세력 내의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면서 희생당했다.[주1] 히파티아에 대한 저자의 각주는 과학 대 종교(기독교)’라는 이분법적 통념을 강화할 여지가 있다.





[1] 참고 문헌

 

* 로널드 L. 럼버스, 코스타스 캄푸러키스 엮음 통념과 상식을 거스르는 과학사: 뉴턴에서 멘델까지, 과학을 둘러싼 역사적 오해들(글항아리사이언스, 2019)

 

* [절판] 로널드 L. 럼버스 엮음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뜨인돌, 2010)






※ cyrus의 주석



* 44






 살아남은 것은 아주 일부다.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80여 편 중 전해지는 것은 7편뿐이고, 소포클레스의 작품 120편 중에서 7편만 현전하며,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 92편 중 살아남은 것은 18[주2]뿐이다.

 

[원문]


 Only a fraction has survived: seven of the eighty or so plays by Aeschylus, seven of the one hundred and twenty by Sophocles, eighteen out of ninety-two by Euripides.

 

[주2] 저자가 작품 수를 착각했다. 19이다.





* 331쪽 각주


중국에서는 13세기 초에 인쇄술이 발명되었다.[주3]



[3]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유네스코 세계유산기록에 등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작 연도가 불분명해서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이라는 기록이 외국에서는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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