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은 여전히 푸르다. 한때 개천 주변 거리에 하얀색과 누런색이 제법 많았다. 애서가들은 두 개의 색이 활짝 펼쳐진 헌책방 거리를 걸었다. 보도블록에도 깔린 헌책방 거리의 색깔은 하천과 함께 흐르는 시간에 의해 씻겨 나갔다. 먼지를 털어내면서 책을 만지작거리던 애서가들의 손길도 줄어들었다. 현재 거리에 남아 있는 헌책방 가게는 열 개도 채 되지 않는다.
내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처음으로 갔던 해는 2013년이다. 십 년이나 훌쩍 지났으니 그때 가본 헌책방 가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지난주 토요일은 독서 모임 <달의 궁전> 모임 날이었다. 아침 일찍 서울에 도착한 나는 청계천을 걸으면서 헌책방 거리로 향했다. 청계천 헌책방 가게들은 비좁다. 가게 입구부터 시작해서 사방에 책들이 쌓여 있어서 겨우 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내가 첫 번째로 들어간 헌책방은 <대원 서점>이다.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연세가 지긋한 헌책방 주인은 매입한 책들이 담긴 쇼핑백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잠시 가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대원 서점>에 만난 책들은 미국의 추리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의 유명한 장편 소설 두 권과 고전 평론가 고미숙의 대표작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다.
* [리커버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북드라망, 2023년)
* [개정 신판-절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북드라망, 2013년)
* [구판-절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2003년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해 당시에 <TV, 책을 말하다>라는 책 소개 전문 프로그램이 KBS 1TV에 방영되고 있었다. 밤 열 시에 하는 프로그램이라서 매주 챙겨 보지 않았지만, 이 프로그램에 소개된 책들을 브라운관에서 만나면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이 가슴에 솟아올랐다. 책을 마음껏 살 수 없는 중학생인 나는 도서관에서 가서 방송에 나온 책들을 빌려 읽었다. 생각이 어린 중학생 머리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책들은 끝까지 읽지 못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도 읽다가 중간에 포기한 책 중 하나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서양 철학들이 상당히 낯설었기 때문이다.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서양 작가나 사상가들의 이름은 잊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그들이 쓴 책에 다시 도전했다.
* [절판] 샤를 보들레르, 김붕구 옮김 《악의 꽃》 (민음사, 1974년)
한밤중에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TV, 책을 말하다>을 마주친 나는 그 방송 프로그램 덕분에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를 알았다. 가수 조영남이 출연해서 불문학자 故 김붕구 선생이 번역한 보들레르 시집을 추천했다.
* 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옮김 《빅 슬립》 (북하우스, 2004년)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옮김 《기나긴 이별》 (북하우스, 2006년)
* 레이먼드 챈들러, 김진준 옮김 《빅 슬립》 (문학동네, 2020년)
* 레이먼드 챈들러, 김진준 옮김 《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2020년)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체는 간결하고, 화자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챈들러의 소설을 읽은 이후로 하드보일드 문체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 장 베르나르 푸이 · 파트릭 레날 · 프랑수아 게리프 · 알프레드 에벨 · 로베르 콩라트 함께 지음, 이규현 옮김 《필립 말로》 (이룸, 2004년)
챈들러가 만든 탐정 필립 말로(Philip Marlowe)는 코난 도일(Conan Doyle)이 창조한 탐정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보다 더 냉소적이면서 거칠거칠한 남성성을 드러낸다. 《빅 슬립》은 챈들러의 첫 번째 장편이자 말로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이다. 《기나긴 이별》은 말로 시리즈의 후기 작품이다.
* 크리스토퍼 말로, 강석주 옮김 《말로 선집: 에드워드 2세 / 파리의 대학살 /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 (나남출판, 2011년)
* 크리스토퍼 말로, 강석주 옮김 《탬벌레인 대왕 / 몰타의 유대인 / 파우스투스 박사》 (문학과 지성사, 2002년)
[대구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첫 번째 책]
* 슈테판 츠바이크, 정상원 옮김 《감정의 혼란》 (하영북스, 2024년)
하드보일드 탐정의 이름은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에서 따왔다. 말로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와 동시대에 활동한 극작가다. 지금은 영국 연극사를 대표하는 작가로 셰익스피어가 많이 언급되지만, 영국 연극이 절정을 이룬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시대에 가장 인기가 많은 극작가는 말로였다. 당시 셰익스피어는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신인 극작가였다. 젊은 셰익스피어는 말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셰익스피어와 말로는 영국 연극사의 맞수로 거론되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중편소설 『감정의 혼란』이다. 소설에 나오는 늙은 교수는 셰익스피어를 찬양하고,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는 말로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선호하는 극작가가 달라서 갈등을 빚는다.
* 레이먼드 챈들러, 정윤희 옮김 《살인의 예술》 (레인보우퍼블릭북스, 2021년)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 최내현 옮김 《심플 아트 오브 머더》 (북스피어, 2011년)
* 레이먼드 챈들러, 안현주 옮김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북스피어, 2014년)
《심플 아트 오브 머더》(The Simple Art of Murder)는 미국과 영국 추리 문학 작품들에 대한 챈들러의 비평이 담긴 에세이다. 그는 모든 장르의 소설은 현실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의 첫머리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핵심이자 챈들러의 문학을 압축한 ‘챈들러레스크(Chandleresque)’의 핵심이다. 챈들러는 영국의 추리 문학을 비판적으로 비평하면서 미국에 유행한 하드보일드 추리 문학의 매력을 알린다. 영국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들은 지식을 동원해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귀족이자 학자다. 반면 하드보일드 탐정은 사건 해결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세계 또는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속 세계는 비열하고 비정하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냉정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
* 레이먼드 챈들러, 승영조 옮김 《레이먼드 챈들러: 밀고자 외 8편》 (현대문학, 2016년)
원래 《심플 아트 오브 머더》는 표제작인 에세이와 총 열한 편의 단편 소설이 함께 실린 책이다(1950년 발표). 북스피어 출판사가 출간한 《심플 아트 오브 머더》는 에세이와 단편 소설 『스패니쉬 블러드』(Spanish Blood, 1935년)만 수록된 책이다. 《살인의 예술》은 에세이는 없고,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챈들러의 몇 안 되는 단편 소설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은 단편 선집 《레이먼드 챈들러: 밀고자 외 8편》이 유일하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를 가려 뽑아서 다섯 개의 주제로 묶은 서한집이다. 이 책에 수록된 편지들은 챈들러가 지향하는 문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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