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공장주가 아닌 공산주의자가 되고 싶었다그는 방직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엥겔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업을 이어주길 바랐지만, 사회 개혁을 꿈꾼 청년 엥겔스는 독일에 유행한 급진적 사상에 관심이 있었다엥겔스는 청년 헤겔파또는 헤겔 좌파로 알려진 젊은 급진주의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청년 헤겔파 중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바로 마르크스(Karl Marx).


















* 피터 싱어, 노승영 옮김 마르크스(교유서가, 2019)

 

* [절판] 조너선 울프, 김경수 옮김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책과함께, 2005)





젊은 마르크스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헤겔(Hegel) 철학에 딱 달라붙어있다고 썼다. 헤겔 철학의 핵심 개념은 정신(Geist)’이다. 모든 존재의 정신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완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한 절대정신은 역사의 종착점이다헤겔주의자는 절대정신의 진보와 발전에 힘입어 만들어진 세계가 합리적이며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종교는 절대적 진리이다. 청년 헤겔파는 헤겔 철학을 뼛속 깊이 받아들이는 헤겔주의자가 아니다. 청년 헤겔파는 헤겔의 철학적 관점을 이용해 자유와 참된 자기 인식을 방해하는 종교를 비판한다


종교를 비판하는 청년 헤겔파의 무신론은 종교와 관련이 깊은 정치적 권력을 공격하는 일과 비슷하다. 보수적인 기득권 계층은 청년 헤겔파의 등장을 위협적으로 느꼈다엥겔스의 아버지는 군 복무를 마친 아들을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자신의 공장으로 보냈다당시 맨체스터는 런던 다음으로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산업 도시였다엥겔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정신 개조를 위해서 엥겔스를 부르주아지(bourgeoisie, 유산 계급)의 천국으로 보낼 속셈이었다엥겔스와 급진주의자들의 교류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엥겔스가 공장을 경영하는 일을 배우도록 해서 부르주아지로 만들려고 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이재만 옮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2014)





하지만 독일 공장주의 계획은 빗나갔다오히려 엥겔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엥겔스는 죽어라 일만 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 계급)의 빈곤한 삶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은 엥겔스가 맨체스터와 영국 북부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실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저서이다그는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부르주아지였다사회주의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부르주아지 지식인들은 엥겔스의 활동을 모순에 가까운 이중성이라고 비난했다그러나 엥겔스는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을 만났다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엥겔스는 부르주아지 지식인들 앞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주는 확성기 역할을 했다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함께 씀독일 이데올로기(두레, 2015)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함께 씀, 이진우 옮김 공산당 선언(책세상, 2018)

 

* [절판]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함께 씀, 권화현 옮김 공산당 선언(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1840년대 초중반, 프랑스 파리에서 마르크스를 다시 만나면서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쌓았다두 사람이 함께 쓴 독일 이데올로기젊은 시절에 만난 헤겔 좌파와의 결별을 알리는 동시에 역사적 유물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이다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지 중심의 세상을 향해 던진 첫 번째 공산주의 강령이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심각한 건강 상태를 꽤 많이 언급한다열악한 위생 상태는 하층 계급의 수명을 빼앗는 전염병을 일으킨다대부분 노동계급 가족은 너무 가난해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부실한 식사는 자녀들의 성장과 건강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병원에 갈 수 없는 아픈 노동자들은 아주 저렴한 약에 의존하다시피 살아간다그런데 그들이 자주 복용하는 약은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킨다노동자들이 주로 찾는 약은 만병통치약으로 과장되었고돌팔이 의사들이 만든 것이다.

 

엥겔스는 노동자들의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사회라고 지적한다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은 빈민가의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의 건강권 침해 문제를 조명한 책이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5년 6월의 세계 문학]

* 토머스 드 퀸시, 김석희 옮김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시공사, 2010)





엥겔스는 액체로 된 아편이 주성분인 고드프리 강장제(Godfrey’s Cordial)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가장 해로운 약이라고 말한다(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152쪽). 당시 아편은 약국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영국 노동자들은 몸이 아픈 자녀에게 아편 팅크를 먹였다엥겔스는 노동자들이 아편을 지나치게 남용하고 있다면서 우려를 표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은 1845년에 발표된 책이다. 엥겔스의 책이 나오지 않은 24년 전에 이미 가난한 노동자들의 아편 복용 실태를 영국 사회에 알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편 중독자 토머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드 퀸시는 자신이 아편에 탐닉하게 된 이유를 1821년에 쓴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에서 밝힌다드 퀸시가 태어난 곳은 맨체스터다. 그의 아버지는 면직물 수입상이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맨체스터의 면직물 노동자들의 아편 중독을 언급한다.




 몇 년 전 내가 맨체스터를 지나가다가 몇몇 면직물 업자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직공들이 아편 복용 습관에 급속히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토요일 오후에는 모든 약종상의 계산대가 밤에 찾아올 단골손님들의 주문에 대비하여 미리 늘어놓은 1그레인, 2그레인, 3그레인의 환약으로 가득 메워질 정도라고 한다. 이런 습관을 낳은 직접적인 원인은 저임금이었다. 당시 직공들은 저임금 때문에 맥주나 위스키에 탐닉할 여유가 없었다. 임금이 올라가면 이 습관도 저절로 사라질 거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편이 주는 천상의 쾌락을 한 번 맛본 사람이 알코올처럼 조잡한 세속의 음료가 주는 즐거움으로 전락하리라고는 선뜻 믿을 수 없다.


(드 퀸시, 김석희 옮김,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중에서, 14~15쪽)



드 퀸시는 노동자들이 아편에 빠지는 원인을 저임금이라고 주장한다. 쉬지도 않고 온종일 일한 노동자들은 피로를 풀기 위해 술집을 찾았다. 그러나 술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에 가면 적지 않은 돈으로 아편을 많이 구매할 수 있었다당시 영국 노동자들은 아편을 몸에 좋은 약으로 믿었기에 아편이 술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절판] 카를 마르크스, 강유원 옮김 헤겔 법철학 비판(이론과실천, 2011)


* 미카엘 뢰비 · 엠마뉘엘 르노 · 제라르 뒤메닐 함께 씀, 배세진 옮김 마르크스주의 100단어(두번째테제, 2018)





엥겔스와 드 퀸시는 영국 사회가 방치하고 있었던 노동계급의 아편 중독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드 퀸시는 아편 중독을 비판한 의사와 지식인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드 퀸시를 비난한 지식인들은 대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 아편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편은 약국에서 퇴출당하였다약사들은 자신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아편을 쫓아냈다. 약사들이 쫓아낸 아편은 만병통치약이 아닌, 우리가 아는 마약이 되었다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대중에게 일시적인 위안을 주는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환각 상태를 유발하는 아편에 비유했다. 그 유명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문장은 마르크스가 쓴 글 헤겔 법철학 비판서문에 나온다. 이 문장은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썼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마르크스의 친구이자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이미 쓴 적이 있다(《마르크스주의 100단어》, 199쪽).

     

   



















* 트리스트럼 헌트, 이광일 옮김 엥겔스 평전: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글항아리, 2010)


* [절판] 요세프 슈페크 엮음, 원승룡 엮음 근대 독일 철학(서광사, 1986)




드 퀸시가 가장 좋아했던 철학자는 칸트(Immanuel Kant). 그는 철학자들의 말을 여러 번 인용하면서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을 썼으며, 이 글에서 자신은 과거에 칸트뿐만 아니라 피히테(Fichte)셸링(Schelling)의 책들을 탐독하면서 독일 형이상학을 공부했다고 언급한다셸링은 헤겔과 친하게 지낸 헤겔주의자였으나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헤겔 비판자가 된 독일의 철학자다헤겔을 지지한 청년 엥겔스는 셸링을 반박하기 위해 그가 강연하는 베를린 대학 강의실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드 퀸시는 대중에게 잘 팔리는 글을 주로 쓰는 매문가로 살았다. 그렇지만 철학을 혼자서 공부한 드 퀸시의 목표는 제대로 된 철학책을 쓰는 것이었다드 퀸시는 엥겔스와 같은 혁명가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젊은 시절에 위장병으로 고생했을 정도로 그의 몸은 허약했다. 드 퀸시는 불시에 자신을 습격하는 육체적 고통을 늘 경계하면서 살았다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어야만 드 퀸시가 왜 이토록 아편과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편과 철학은 육체적 고통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이자 고통을 잠시나마 막아주는 방패였다.










Thanks to books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5-06-1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가 이렇게 쓰니까 읽어보고 싶긴하다. 드 퀸시. 그의 투쟁의 과정이 긍금하네. 혹시 시간나면 읽어볼게. ㅋ

cyrus 2025-06-16 06:29   좋아요 0 | URL
글이 지루할 수 있어요. 읽다가 재미없으면 과감하게 덮으세요 ㅎㅎㅎ

yamoo 2025-06-1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아편쟁이의고백, 근대독일철학, 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겹쳐서 반갑네요..^^

cyrus 2025-06-16 06:33   좋아요 0 | URL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쌓여 있었는데, 요즘에 저에게 큰 도움을 주네요. 여러 권의 책들을 겹쳐서 읽으니까, 흥미로운 장면들이 보이면서 제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돼요. ^^
 
넥서스 -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로 보는 인류 역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점  ★★★  B








대구 독서 모임 <고라니 울고> ‘두꺼운 책 읽기

일곱 번째 책






우리는 언제나 정보를 마신다. 정보는 우리 삶에 절대로 없으면 안 되는 제2의 공기. 우리가 마신 정보는 정체성과 가치관을 만들 데 쓴다. 생각에 잠기면 머릿속에 켜켜이 쌓인 정보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온갖 정보를 뭉쳐서 만든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드러낸다. 말에 새겨진 정보는 타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은 내가 호흡한 정보를 마신다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정보는 뿌리처럼 질기게 뻗어 나가는 네트워크를 발아하는 씨앗이다네트워크는 이 세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뿌리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정보 호흡을 하고 있으며 세상의 뿌리는 쭉쭉 뻗어 나가고 있다. 거대한 네트워크 뿌리를 잡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보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들은 정보가 많을수록 세상을 더 좋은 쪽으로 발전시키는 힘이 더 커진다고 믿는다그러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네트워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네트워크의 기능을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에 반대한다. 하라리는 반문한다. 슬기로운 인간(Homo sapiens)’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는 왜 잘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를 파괴할 정도로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살육을 일으키는가?


하라리의 책 Nexus협력과 유대감을 좋아할 줄만 알았던 정보 네트워크가 잘못된 방향으로 비뚤게 되어버린 역사적인 사례들을 보여준다. 정보 네트워크 낙관론자는 슬기롭지 못한 인류의 어두운 역사를 가볍게 바라본다. 그때 그 시절에서만 일어난, 특수하고도 예외적인 상황으로 여긴다. 그리고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면 과거에 있었던 인류의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라리는 정보 네트워크 낙관론을 정보에 대한 순진한 관점이라고 말한다. 순진한 정보관은 정보가 많을수록 좋으며 정보 네트워크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연결(Nexus)하게 해주리라고 믿는다.


정보는 때론 독이 된다. 정보에 중독된 뇌는 자만심이 가득 차서 부풀어 오른다자기 수정 능력이 부족한 정보 중독자는 잘못된 정보를 의심 없이 마신다. 독성이 강한 정보가 모여서 만들어진 네트워크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은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무오류성)고 착각한다. 무오류성은 타인의 다른 견해를 존중하지 않으며, 타인의 건전한 비판을 거부한다. 민주적인 대화와 연대를 부정하는 네트워크는 전체주의가 된다. 독일 나치즘과 소련의 스탈린주의는 잘못 비뚤어진 네트워크다. 하라리는 최악의 네트워크를 망상에 기반한 네트워크라고 표현한다.


네트워크는 정보들을 연결해서 거대한 질서를 만든다. 독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독점하고, 국민의 정보 접근을 제한한다. 하라리는 반민주적인 독재 정치 네트워크가 AI와 손을 잡는 상황을 경계한다. 독재 정치와 전체주의는 지도자 한 사람의 권한에만 집중된 네트워크다네트워크를 장악한 지도자는 자신의 무오류성을 지지하는 AI를 좋아한다재자를 위한 AI는 고의로 거짓 정보와 음모론을 퍼뜨리는 선동가요, 독재 정치를 비판하는 정적과 민주 시민을 짓밟는 정치 깡패다. AI에 복종하는 독재 정치 네트워크는 민주주의의 자정 기능이 떨어지며 건실한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20세기의 독재 정치가 인간 정치라면, 21세기의 독재 정치는 컴퓨터 정치다.


NexusAI를 슬기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높인다. AI를 맹신하는 대중과 권력자가 많아지면 정보 네트워크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검은 손이 된다하라리는 본인이 직접 여러 분야를 탐사해서 발굴한 정보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적절하게 엮어서 글을 쓴다. 그의 출세작 사피엔스》(조현욱 옮김, 김영사, 2023년)를 이미 읽은 독자 대다수는 하라리의 폭넓은 지식 스펙트럼에 감탄하고 매료된다. 그러나 인기도서를 펴낸 전문가의 책은 무오류성의 책’이 아니. 한 권의 책 속에도 저자의 편견과 저자가 잘못 알고 있는 정보가 들어 있다. 하라리가 Nexus를 쓰기 위해 발굴하고 인용한 정보 중에 사실과 다른 것이 있다. 책 밖에 있는 다른 관점을 비추면서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 305


 《성경은 스스로 편집하거나 해석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 같은 종교들에서 실제 권력은 이른바 오류 없는 책이 아니라 유대교 랍비와 가톨릭교회 같은 인간의 기관이 가졌다. 반면 AI는 새로운 경전을 작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편집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인간의 개입은 전혀 필요 없다.



과거의 성경은 오랫동안 무오류성의 책으로 여겨졌다. 백인 남성 교황, 목사, 신부, 신학자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무오류의 책을 신뢰하라.”),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무오류성의 진리라고 주장했다(책을 해석하는 인간을 신뢰하라.”). 반면 종교인이 아닌 평범한 신자는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이므로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없다성경을 독차지하듯이 거머쥔 남성들은 교회 안팎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신의 대리인으로 자처한 교황은 전통에 반하는 기독교 분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기득권이 된 종교인들은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을 추구하는 신학과 종교인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16세기에 시작된 여성주의 신학 교회 안의 유리 천장을 깨뜨렸다.[주1] 퀴어 신학은 성 소수자 인권 보호에 앞장선다. 성경속 문자에 근거해서 성 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해석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주2]  


비종교인은 종교를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의 전통적인 해석에 도전하는 비판 신학과 해방 신학이 낯설다. AI가 나오기 한참 전에 이미 진보적인 종교인과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했다하라리는 비종교인을 위해 종교의 기능과 성경》 편찬의 역사를 잘 요약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에 압축된 종교는 전통을 지향하려는 과거의 모습에 가까운 반쪽 얼굴이다. 종교에 대한 하라리의 주장은 시대적 요청에 맞게 변화하는 종교의 새 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 456

 

 보수는 특정 종교나 이념에 헌신하지 않는다. 그게 무엇이든 이미 있는 것, 지금까지 대체로 합리적으로 작동해 온 것을 보존하는 데 헌신한다. [중략] 1980년대 미국에서 보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지지하고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하라리는 보수(주의)특정 종교와 이념에 헌신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보수적인 기독교와 손을 잡으면서 진보적 정치 운동을 공산주의로 몰아세우고, 성 소수자 혐오를 조장하는 극단적인 보수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하라리가 보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리숙하다. 그는 보수 우파의 한쪽 얼굴만 보고 있다1980년대 미국의 우파와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반영된 정치를 본격적으로 실행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부 시절(1981~1989)과 겹친다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기업 중심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념이자, 사회주의와 노조 운동에 대항하는 정치적 무기였다. 레이건은 남부 지역에 사는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공약들(성평등 헌법 수정안 반대 등)을 내세운 덕분에 1984년 재선에 성공했다.[주3] 공화당을 지지한 북미 기독교 우파의 강령은 신앙, 가족, 자유였다.[주4] 1980년대 미국의 보수 우파는 민주주의가 아닌 신자유주의를 지지했으며 도덕과 가족을 중시하는 기독교에 헌신했다









[1]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김항섭 옮김,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분도출판사, 2018)


[2] 월터 윙크 엮음, 한성수 옮김, 동성애와 기독교 신앙: 교회들을 위한 양심의 질문들(무지개신학연구소, 2018), 패트릭 S. 유연희 옮김죄로부터 놀라운 은혜로퀴어 그리스도를 찾아서》 (무지개신학연구소, 2020).


[주3] 스티븐 레비츠키 · 대니얼 지블랫 함께 씀, 박세연 옮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어크로스, 2024), 147~148


[주4] 피에르 다르도 · 크리스티앙 라발 외 함께 씀, 정기헌 옮김,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원더박스, 2024), 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찬 회의론자 - 신경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희망의 과학
자밀 자키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4점  ★★★★  A-





바이러스는 혼자서 살지 못한다. 세포를 만나야 살 수 있다. 바이러스는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더 큰 세포에 빌붙는다. 세포를 장악한 바이러스는 혼자 있을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인다. 바이러스는 자신과 똑같은 바이러스를 계속 만든다. 이때 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 바이러스가 증식하면 세포는 죽는다.


냉소주의(Cynicism)는 성격이 쌀쌀한 바이러스다. 냉소주의가 좋아하는 먹잇감은 마음이 가냘픈 사람이다. 마음이 가냘프면 외로움을 더 잘 느낀다. 그리고 세상이 더 어둡게 보인다교활한 냉소주의는 마음이 가냘픈 사람에게 다가가서 귀띔한다. “나만 믿고 따라오면 잘 살 수 있어.” 마음이 가냘픈 사람은 냉소주의자가 된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며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냉소주의적 처세술에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잘 일으키듯이 냉소주의자는 능수능란하게 변장한다냉소주의자는 음모론자로 변신해서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갈등과 싸움을 부추긴다.


교활한 냉소주의에 속지 않으려면 백신(vaccine)을 접종해야 한다. 냉소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최고의 백신은 회의주의(skepticism)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회의주의를 냉소주의의 동의어로 오해한다. 냉소주의에 이미 감염된 사람은 회의주의 백신 접종을 거부한다. 간사한 냉소주의자는 가짜 회의주의자로 변신해서 냉소주의에 감염된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희망찬 회의론자과학적으로 증명된 냉소주의의 위험성회의주의 백신을 꼭 맞아야 할 이유를 알려준다회의주의자는 지식을 의심한다. 지식을 의심하는 태도는 지식을 완전히 믿지 않아서 거부하는 냉소주의와 다르다. 회의주의자는 냉소주의자처럼 상대방의 견해를 매몰차게 대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존중한다. 그런 다음에 상대방의 견해가 확실한지 아닌지 판단한다. 냉소주의자는 똑똑한 척한다. 그래야 자신의 결점을 철저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회의주의자는 자신 또한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


이 책의 저자는 신경과학을 연구한 심리학자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을 똑똑하지 않은 전문가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책을 썼다희망찬 회의론자는 회의주의자의 고백록이다. 저자는 과거에 냉소주의자로 살아왔고, 지금도 가끔 냉소주의의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 생기면 고인이 된 신경과학자이자 친구인 에밀 브루노(Emile Bruneau, 1972~2020)를 생각한다고 말한다. 에밀 브루노는 이 책이 태어나게 해준 산파이자 희망찬 회의주의자. 에밀은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있지만 않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대방을 만나면 먼저 다가와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회의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최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저자는 에밀을 만난 이후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속이는 냉소주의를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냉소주의자는 공감과 연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뿐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 냉소주의자의 이중성을 잘 모르는 사람은 상대방의 약점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냉소주의자가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겉멋이 든 냉소주의자는 자기만족을 위해 지금도 요리조리 변신한다. 사이버 폭력(Cyber Bullying)을 주도하는 익명의 개인, 음모론을 퍼 나르는 정치인, 사이비 종교의 교주, 이해타산이 빠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다고 비웃는 사람들희망찬 회의론자는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냉소주의자들의 허울을 벗긴다.


백신 거부론자들은 백신을 치료제라고 우긴다. 그들의 거짓 논리를 믿는 사람들은 백신 접종자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뉴스를 꺼림칙하게 느낀다. 백신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기 시작한다. 백신은 치료제가 아니다.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는 약이다회의주의 백신은 우리의 마음 주변을 기웃거리는 냉소주의를 예방하는 삶의 태도다. 회의주의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면 회의주의로 둔갑한 냉소주의를 파악할 수 있다.


거짓 정보와 냉소주의는 끈질긴 불치병이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회의주의 백신은 죽을 때까지 계속 맞아야 한다우리는 끊임없이 정확한 정보를 만날 수 있도록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회의주의 백신의 주요 성분은 희망이다. 희망찬 회의주의자는 어려운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 사전에 냉소라는 단어는 없다. 회의주의자 사전에 있는 희망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상대방의 생각을 신뢰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진하는 마음이다. 회의주의 백신을 맞으면 상대방의 마음에서 나오는 정직한 온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회의주의자는 따뜻하다. 다정한 회의주의자는 상대방의 차가운 손을 감싸안을 수 있다.







<회의주의자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 34




 

 은행원의 아들인 디오게네스[1]는 자기 마을의 통화를 위조한 죄로 고소당해 추방됐고 아테네 거리를 전전하며 음식을 구걸하고 큰 도자기 단지 안에서 잠을 자면서 살았다.



[1] 은행원에 해당하는 원문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환전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디오게네스의 생애가 나오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의 책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6을 번역한 이정호 교수(정암학당 이사장) 환전업자로 번역했다. 당시 환전상은 돈을 빌려주거나 돈을 주조하는 일도 했는데, 은행의 원시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대부분 경제사학자들은 은행의 역사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희망찬 회의론자의 저자는 디오게네스가 화폐를 위조했다고 주장하지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디오게네스의 아버지는 나랏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돈을 위조한 죄로 추방당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환전업자인 디오게네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화폐를 맡겼는데, 일에 미숙한 디오게네스가 화폐를 위조했다. 결국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가서 죽었고, 디오게네스는 추방당했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나남, 2021, 494~495).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참고한 고대 문헌들이 전부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은 고대 철학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책이다. 라에르티오스의 책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면 고대 철학사에 해당하는 내용이 빈약했을 것이다.





* 193




 

 19세기 러시아 왕자[2]이자 자연주의자(후에는 무정부주의자로 투옥됨)였던 피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2]은 시베리아를 여행하며 야생을 관찰했다. 그는 저서 상호 원조에서 경쟁이 아닌 협력이 생명의 기본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 194




 

 오드리 로드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자기 돌봄은 공동체와 결속에 그 뿌리를 둔다. 이 현상은 크로프트킨[2]이 목격한 생명의 본성과 심리학 및 뇌과학이 인간에 대해 알려주는 사실과 일치한다.

 


[2] 왕자의 원문이 ‘prince’로 추정한다면, ‘prince’를 왕족 출신의 왕자가 아니라 군주나 귀족의 칭호로 번역해야 한다. 굳이 원문을 확인할 필요 없이 러시아 왕자는 오역이다. 왜냐하면 크로포트킨은 왕족 출신이 아니며 많은 영지와 농노를 소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크로포트킨의 이름 ‘Peter’를 러시아식으로 표기하면 표트르194쪽에 크로프트킨이라는 오자가 있다.





* 301, 302






 

프러포절 프로포절(proposal)

포르포절 프로포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25-02-18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루스님의 글에서는 주석과 정오가 제일 재미있어요. 자밀 자키라는 사람이 영어로 쓴 책인지, 혹시 다른 언어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책을 중역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요즘은 중역하는 일이 드물지만, 예전에는 제법 많았었죠.

시루스님이 지적하는 다양한 오류들을 번역자가 놓쳤다면, 편집자라도 바로 잡았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베테랑 번역자들은 나라와 시대 상황에 따른 내용들까지 찾아보면서 일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냥 원문을 우리 말로 옮기기만 하는 선에서 끝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오래전 제가 편집을 맡았던 역사책 번역자도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번역 초고가 정말 형편없었어요. 글도 비문이 많아서 아예 고쳐써야했고, 시루스님이 주로 지적하시는 이름 표기법이나 유명한 사람이나 사건의 실제 상황들이 많이 잘못되어 있었어요. 원서가 독일어 책이었는데, 나중에는 제가 아예 원서와 독일어 사전을 놓고 한 문장씩 다 검증해야 했어요. 역사적 상황들도 많이 찾아보고, 번역된 글이 검색이 안되면 영문으로 찾아보기도 했구요. 그렇게 열심히 작업했는데, 당시 번역자는 제가 뭘 얼마나 고쳤는지 알지도 못하더라구요.

cyrus 2025-02-20 09:21   좋아요 0 | URL
주석과 정오표가 많은 저의 서평은 ‘배꼽이 큰 배’라고 할 수 있어요.. ㅎㅎㅎ
번역자와 편집자들이 보라고 만든 건데 실제로 댓글로 반응을 해주신 분이 그리 많지 않아요.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번역을 해본 적이 없지만, 번역을 잘하려면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식과 표기법이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거든요.
 





철학사를 쓰는 철학 연구자들은 ‘AD’위대한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로 강조한다. 철학사의 ‘AD’는 예수가 태어난 해(Anno Domini)를 뜻하는 서력기원의 약자가 아니다. 데카르트 이후(After Descartes)’를 뜻한다. 데카르트 철학이 등장한 이후부터 철학은 신학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개인의 주체성과 이성의 가치를 강조한 데카르트 철학은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AD’를 높이 평가한 철학 연구자들은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여겼다


















* 르네 데카르트, 이재훈 옮김 방법서설: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휴머니스트, 2024)

 

*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정신지도 규칙(문예출판사, 2022)




코기토(cogito)’는 데카르트 철학의 핵이다이 단어 하나로 데카르트는 진리 앞에서 생각하고 의심하는 인간의 존재를 처음으로 깨달은 철학자로 알려지게 된다예전에 철학을 철학사 겉핥기식으로 배운 나(예전에 내가 쓴 글에 이런 유형의 사람을 철학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썼다)는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출발점에 서 있는 철학자로만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데카르트 철학을 제대로 읽어보면 데카르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그의 이름에 항상 따라붙던 최초또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떼어내야 할 낡은 꼬리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의 주저 방법서설생각하는 나’, 즉 데카르트 본인 스스로 철학을 하는 과정을 우화 형태로 쓴 책이다. 기존 철학사는 개인의 주체성을 처음으로 주목한 책으로 방법서설를 언급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데카르트가 말한 는 완벽에 가까운 합리주의적인 주체의 동의어가 아니다. ‘생각하는 나는 무지와 편견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이용할 줄 아는 존재이다데카르트는 방법서설6부 막바지에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지성은 유한하므로 모든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진리를 생각해 온 본인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면서 솔직하게 밝힌다.



 나는 사람들이 내 글들을 검토한다면 기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를 위한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하려고 나는 내 글들에 관해 반대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그 반론들이 수고스럽더라도 나의 출판사로 보내주시기를 간청한다. 출판사가 내게 그 반론들을 알려준다면 나는 나의 답변을 거기에 동시에 첨부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를 통해서 독자들은 두 가지를 함께 보면서 그만큼 더 쉽게 진리를 판단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답변을 길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내가 나의 오류를 인식한다면 그것을 아주 솔직하게 인정하겠다고 약속하며, 내 오류를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쓴 것을 변호하기 위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방법서설》 중에서, 163쪽, 이재훈 옮김)

 


방법서설에서 묘사된 생각하는 나는 합리주의적 인간이 아닌 회의주의적 인간에 더 가깝다전자는 너무나도 똑똑해서 이성을 사용할 줄 아는 존재라면, 후자는 무지해서 이성을 제대로 사용해야 하는 존재이다.

















* 미셸 드 몽테뉴, 심민화 · 최권행 옮김 에세(민음사, 2022)





신학과 고대의 고전 문헌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진리에 대해 검토하고 숙고하는 일을 실천한 철학자는 데카르트가 처음은 아니다. 데카르트보다 먼저 태어난 몽테뉴(Montaigne)가 이미 생각하는 나의 중요성을에세에 언급했다.


















* 미셸 옹프레, 곽동준 옮김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 (인간사랑, 2011)


* 미셸 옹프레, 변광배 · 김중현 옮김 《아리스토텔레스의 악어들: 그림으로 읽는 철학사》 (서광사, 2022)




피에르 샤롱(Pierre Charron)은 몽테뉴와 데카르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의 철학자다. 그는 몽테뉴와 교류를 맺었는데, 이로 인해 샤롱이 1601년에 발표한 저서 <지혜에 대하여>는 몽테뉴의 에세의 아류작 또는 모방작으로 알려졌다. 비주류 철학자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철학 세계로 이루어진 () 철학사를 쓰는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지혜에 대하여>세속 도덕의 출생 신고서라고 평가한다. 이 책의 글머리에 샤롱은 신의 지혜가 아닌 인간의 지혜를 위해 글을 썼다고 밝힌다. 샤롱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출간되기 30여 년 전에 신학과 구분되는 철학을 지지했다.


반 철학사를 쓰는 철학자답게 옹프레는 프랑스 철학의 시조 격으로 평가받는 데카르트에 낀 거품을 제거한다. 이 거품은 주류가 된 철학자들만 모여있는 철학사가 만든 것이다. 이 두꺼운 거품에 둘러싼 데카르트가 많이 주목받은 바람에 데카르트 이전에 태어난 몽테뉴가 철학자였다는 사실이 잊혔다.







몽테뉴와 데카르트는 고전을 꾸준히 탐독했지만, 그 속에 담긴 진리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진리를 의심했다. 주류 철학자들만 기억하는 철학도들은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우대했고, 몽테뉴를 은둔하는 수필가로 취급하여 철학자들의 전당에 초대하지 않았다. 철학사를 사랑하는 철학 공부는 철학자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철학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철학자들을 무시한다자신의 입맛에 맞는 철학자들만 졸졸 따라다닌다반면에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철학자를 숭배하지 않는다. 철학이 현재 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의심하고 숙고한다소크라테스(Socrates)가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진리를 검토했듯이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 짓지 않고, 철학자들의 글을 두루두루 만난다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안다. 몽테뉴와 데카르트가 순수하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er)’이었다는 사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체성과 무한 -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레비나스 선집 3
에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김도형 외 옮김 / 그린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3.5점  ★★★☆  B+



레비나스 읽기 모임 두 번째 도서

(4회 진행: 818, 91, 929, 10월 13)




철학은 오랫동안 라는 존재를 따라다닌 학문이다. ‘는 철학자들을 귀찮게 하는 질문 유발자다. ‘는 무엇인가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어떻게 하면 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나는 내가 누군지 궁금해.’ 심오한 말이지만여기서 철학이 시작되었고 철학자가 태어났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아테네에서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다본인이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 맞는지 궁금했다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대화(산파술)를 주고받은 끝에, 결국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소크라테스는 본인 또한 무지하다고 생각했다그는 세상물정을 모르고 속 편안하게 사는 알키비아데스(Alkibiades)에게 델피(Delphi)의 신전에 있는 글귀를 인용하면서 충고했다. 너 자신을 알라(gnôthi sauton).”[주1]


몽테뉴(Montaigne)무시로 를 물고 늘어지는 철학과 한평생 함께 살았다. 그는 를 알고 싶은 철학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본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책 속에서 발효된 지식은 몽테뉴가 자신의 서재에서 혼자 마시는 술이다. 하지만 몽테뉴는 진짜 를 찾을 때면 술 한 모금 눈에 대지 않는다. 그는 책 속에서 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혼자서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Que sais-je)?”[주2] 


데카르트(Descartes)도 몽테뉴처럼 책과 지식에 기대지 않은 상태에서 철학을 만났다. 그의 서재는 침대였다. 질문하는 철학과 함께 침대에 누운 데카르트는 졸음을 참아가면서 자신이 누군지 생각했다생각하는 나는 데카르트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철학의 제원리그는 생각하는 자신을 절대로 의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나는 생각한다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주3] 


를 향한 질문철학자가 되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관문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관문을 비켜서 지나간 철학자가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그는 오로지 에게만 관심이 쏠린 철학의 질문을 의심한다. 그리고 거꾸로 철학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타자(他者)는 누구야? 나는 타자가 누군지 궁금해.” 타자를 알고 싶은 욕망. 여기서 레비나스의 철학이 시작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를 알기 위한 철학은 주체(subject)’를 이해하기 위한 철학으로 성장한다. 철학자들은 저마다 주체의 정의를 내렸다주체는 단순하게 말하면, 의식을 가진 인간 또는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실체.[주4] 데카르트가 의심하지 않은 생각하는 나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는 정신 또는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지 자아 또는 주체와 같은 의미의 개념이 아니다철학 개념은 수많은 철학자의 머리를 통과하면 의미가 확장되거나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철학 개념을 한 가지 의미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주체도 마찬가지다철학자들이 개인, 자아, 주체에 대해 논의할수록 철학은 타자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철학이 오만해지면, 자기중심적 철학으로 변질된다. 오만한 철학의 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이성적 주체’인 인간이. 인간의 지식은 자연을 이용하기 위한 무기가 된다. 오만한 철학은 권력을 가진 정치인을 따라다니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에 충성한다.


레비나스는 2차 세계 대전의 참상과 전체주의 국가(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국가 파시스트당)의 등장을 목격했다. 그는 주체를 인식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철학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다. 권력에 무기력한 철학은 폭력으로 타자의 소중한 삶과 자유를 짓밟는다레비나스는 자신의 책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독일어판 서문에서 존재의 자기 보존 경향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주5] 존재로 대입하면, 자기 보존 경향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의미한다.


전체성과 무한은 기존 철학자들이 주장해 온 자기중심적 철학을 비판하면서 타자가 누군지 묻는 철학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무한에 비유한다. 타자는 나보다 더 높은 무한한 곳에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타자는 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레비나스 철학의 타자는 내가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을 건네는 사람이다. 타자를 알고 싶은 욕망은 상대방이 누군지 알고 싶어하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타자의 고통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타자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우리는 타자를 도와주어야 한다. 나와 타자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는 타자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윤리적 행위. 따라서 레비나스는 윤리를 1 철학으로 삼는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거나 철학자가 되지 않아도 우리 각자가 를 향해 질문할 수 있다. 그리고 진짜 를 만나야 한다.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나는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를 따라다니면서 계속 나에 대해서 질문하는 철학의 얼굴은 우리 각자의 얼굴이다. 우리가 만나야 할 타자가 누군지 질문하는 레비나스 철학의 얼굴은 얼굴들이다. 여기에 내 얼굴과 타자의 얼굴이 함께 있다.  







    


[1] 플라톤, 알키비아데스 I · II124d. 

(김주일 · 정준영 옮김, 아카넷, 2020, 81)


[2] 몽테뉴, 에세 212레몽 스봉을 위한 변명」 

(심민화 옮김, 민음사, 2022, 327)

 

[3] 데카르트

방법서설: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4부 

(이재훈 옮김, 휴머니스트, 2024, 82)

 

[주4] 주체 · 주체성, 철학사전편찬위원회, 철학사전

(중원문화, 2023년)


[주5]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독일어판 서문, 465.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24-10-0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이러스님 혹시 사람, 장소, 환대 읽어보셨나요?

cyrus 2024-10-05 10:13   좋아요 0 | URL
아니요. 안 읽어봤어요. 박동수의 <철학책 독서 모임>이라는 책에 <사람, 장소, 환대>에 관한 글이 있어요. 그 글을 읽고 <사람, 장소, 환대>를 안 봐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 쟝님은 <사람, 장소, 환대> 어땠어요?

- 2024-10-05 10:19   좋아요 0 | URL
인상적인 책이었는데… 이 글 읽어보니 레비나스 철학이랑 이어져있는 것 같아요. 그때 읽을 때는 몰랐어요. 암튼 고생하셨네요 ㅋㅋㅋㅋ

cyrus 2024-10-05 10:34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환대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의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