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장 뤽 낭시 지음, 이선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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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은 다른 세계와 통하는 하나의 창이다. 색다른 경험을 간접적으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현상을 타파하고 사유의 영역을 넓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이다. 읽는 행위가 단순히 보는 행위와는 다르다. 책은 우리 뇌리에 더욱 깊이 각인시켜 준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고 크게 감명받았다면 그의 일생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기도 한다. 사고하는 능력, 인생을 만드는 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책 속에 기록해 둔 진리의 흔적을 따라가서 읽어내는 것,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잠시 여유를 갖고 길을 거닐며 사색하는 산책과 유사하다. 좀 깊이 생각하면 독서는 글을 매개체로 글쓴이의 ‘마음을 읽는 것’이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장-뤽 낭시는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자기 생각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을 ‘거래(commerce, 교류)’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독서를 통한 ‘만남’은 우리 사유의 폭을 넓히고, 유연한 사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타인(다른 독자)을 좀 더 포용할 수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한 권의 책을 만나면서 자신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선호하는 책만 골라 읽는 편식성 독서의 문제점은 다른 책들이 독자에게 말 거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결국, 이는 좁은 영역에 스스로 갇히는 우둔함을 자초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도취해 본인은 불행하게도 전혀 이를 깨닫지 못한다. 사유의 거래를 거부하거나 피하는 인간은 자기만의 철옹성을 구축해 사유의 폭을 더 이상 넓히지 못하는 완고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쯤에서 누구라도 ‘자신만의 세계’가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껏해야 자기가 속한 지리적 · 공간적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읽고 이를 토대로 느끼고 판단하고 상상하는 범주가 전부다. 지극히 제한적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과 독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려면 서점에 가야 한다. 지식의 전파와 깊은 사유의 생성 모두 서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서점에서는 여전히 책이 넘쳐나고 도서 전문 강좌나 자발적 독서 모임도 많아졌다. 이 현상만 가지고, 우리나라 독서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 우리 사회가 지식이 부족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며 소통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이끄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암울하게도 독자들을 유혹하는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독자의 눈길을 받지 못한 책은 ‘닫힌 책’이다. 즉 읽히지 않은 책이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책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독자가 ‘닫힌 책’을 열어야 한다. ‘열려라, 참깨!’ 당연히 안 열린다. 이 주문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는 패스워드다. 책 자체가 펼쳐질 뿐이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독자를 향해 펼쳐지지 않는다. 우리가 암만 ‘독서는 넘나 좋은 것, 책을 읽읍시다!’라는 진부한 주문을 강요하듯이 외쳐 봐도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책이 펼쳐지겠나. 알리바바는 동굴 속에 숨겨진 보물이 궁금해서 패스워드를 정확히 기억해내 동굴을 여는 데 성공했다. 알리바바처럼 호기심이 많고, 어떤 것이라도 궁금해 알아보려고 하는 독자가 많아야 한다. 그런 독자에게 책은 항상 펼쳐져 있다. ‘열린 책’은 시공을 초월해 자유롭게 다른 세계와의 만남을 연결해 준다. 알리바바형 독자는 자신에게 유익한 지식이라는 보물을 건져내기 위해 갖가지 세계와의 경험을 쌓으면서 사유의 거래를 시도한다. 사유의 거래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독자들이 모여서 활발하게 거래를 시도하는 곳이 ‘알라딘 북플’이다. 이곳에 독자들이 매일 리뷰를 쓰며 자신과의 대화 또는 다른 독자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양파를 까듯 끝이 없는 즐거운 사유 거래의 연속이다. 이게 꽁꽁 언 채 있는 답답한 세상을 여는 하나의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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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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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의도적으로 상대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면 말과 글을 제대로 가리는 게 배운 사람의 도리다. 애써 말과 글을 깨우치는 목적이 그렇다. 어설픈 지식을 뽐내고자 함이 아니다.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기 위함이다. 이제 학사 학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배운 사람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말과 글의 오용이 차고 넘쳐 외려 사람을 짐승보다 못하게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

 

 

 

 

 

가장 저급하게 오용된 말과 글은 한마디로 ‘개소리(Bullshit)’라고 할 수 있겠다. 국어사전에서는 개소리를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저속하게 부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형태와 소리는 글이고 말이겠으나 그것은 개 짖는 소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철학자 해리 G. 프랭크퍼트(Harry Gordon Frankfurt)는 개소리와 거짓말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개소리가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진지하게 분석한다. 그가 쓴 책 《개소리에 대하여》의 요점은 진리 또는 진실에 무관심한 사람일수록 헛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운영하는 인터넷 팟캐스트 ‘정규재 TV’와 단독 인터뷰를 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사과에 대해서 이런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냥 사과를 하면 안 된다. 그냥 잘못해도 버텨야 한다.”[1]

 

 

대국민 담화를 통해 사과한 대통령에게 ‘잘못해도 버텨야 한다’라고 충고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은 순진하게 이 말 한마디를 믿고 있다. 그리고 검찰과 특검 수사로 밝혀진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모든 범죄행위를 부정했다. 모든 탄핵사유를 인정 못 하는 것은 물론이고, 촛불 민심 자체도 부정하고 나섰다.

 

 

“국민들께서 응원을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제가 힘들지만 그 힘이 납니다.”

 

“오붓한 분위기에서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2]

 

 

대통령이 자신을 응원해준다고 믿는 ‘국민’이란 누굴까? 설마 돈 받고 친박 집회에 모인 박사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2016년 11월부터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아무리 무너져도 쉽게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희망인 ‘콘크리트 보수층’이 건재해도 대다수 국민의 뜻을 철저히 무시하는 대통령의 인식은 문제가 있다. 특히 명절 인사는 아예 가관이었다. 석 달 동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사회가 혼란스럽고 경제마저 팍팍해서 국민은 분노하는데 대통령은 천하 태평한 소리를 했다. 이 판국에 국민의 ‘분노’를 한가하게 ‘걱정’과 ‘루머’로 치부해 버리는 상황인식은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정말 심각하게도 대통령은 현상을 분별해서 인지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규재 주필은 대통령이 ‘여전히 총기가 있는 분’이라고 아부성 발언을 했는데, 그의 말은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대통령의 ‘개소리’를 대단하게 받아들이거나 쉽게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거짓말은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한다. 정 주필은 크게 떨어질 대로 떨어진 대통령의 인지도를 다시 올리기 위해서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직접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해서 크게 문제 삼고 싶지 않다. 다만, 대통령의 직무유기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정 주필의 태도가 훨씬 심각하다. 그는 대통령의 ‘개소리’를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개소리하는 사람이나 개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둘 다 공통으로 자기반성의 능력이 약하다.

 

프랭크퍼트는 사람들은 거짓말에 분노를 일으키거나 비판을 하는 반면에 개소리는 관대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사람들이 개소리를 거짓말보다 관대해지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이것을 우리 독자들을 위한 연습문제로 남겨뒀다. 사실 나는 거짓말과 개소리를 구분하는 프랭크퍼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에 무관심하거나 진실 앞에서 미적거리는 반응이 거짓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똥이니 된장인지 구분하는 아이들도 개념과 상식을 집에 놔둔 채 내뱉는 공인의 개소리에 분노할 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어이없고, 주먹을 부르는 개소리를 ‘망언’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이 정치 분야에만 있겠는가.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불편한 진실 앞에 눈감은 언론인과 지식인들, 장병이 된 대한민국 청년들을 ‘나라의 아들’로 치켜세우면서 병들거나 다치면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회피하는 군대. 더 열거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1] [2] 다섯 가지로 추려본 박 대통령 인터뷰 ‘문제의 발언’ (JTBC, 2017년 1월 26일)

 

※ 글 제목의 유래 : “야!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 (링크 참고: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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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7-02-02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발 다음엔 말과 글을 바로 쓸 수 있는 사람이 국가 원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cyrus 2017-02-02 19:19   좋아요 0 | URL
말을 똑바로 하고, 글을 잘 쓰고, 이 언어들을 실천으로 잘 옮기는 국가 원수를 보고 싶습니다.

캐모마일 2017-02-02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제가 요즘 고민하는 문제였고 전에 한번 회원분의 서평을 읽고 넘어갔는데, 오늘은 가려운 등을 누가 긁어준 기분이 듭니다. 그만큼 제목과 서평에 공감이 가네요. 요즘 시국은 두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인 주변에서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인양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진짜 자기가 그렇게 믿어서 말하는건지 임시변통으로 둘러대는건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답답한 적이 많아서

캐모마일 2017-02-0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럴까 안타까웠습니다. 스스로도 많이 돌아보게 됐구요. 주제가 시국과 어울리고 개인적으로도 놀랐습니다. 좋은 서평 읽고 갑니다.

cyrus 2017-02-02 19:25   좋아요 2 | URL
캐모마일님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밖에 나가면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특히 정치나 페미니즘을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보면 답답한 사람들을 보게 되죠. 여기 온라인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진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글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제가 잘못한 사실을 알린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여 바로 잡고 싶습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런 대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해피북 2017-02-02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순실이 억울하다며 고성을 지르는거나 아직까지도 자신을 지지해주는 국민이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대통령이나 사람의 마음이란게 얼마나 단단하면 저렇게까지 버티고 할 수 있는지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요즘 어른들은 툭하면 최순실도 그렇게 뻔뻔하게 하고 사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못하니 좀 세상을 뻔뻔하게 살어 라는 말씀 자주하셔요. 그래서 우스겟소리로 모든 이야기는 순실이로 끝난다고 하죠. 무튼 저도 시원한 글 잘 읽고갑니다^~^

cyrus 2017-02-02 19:51   좋아요 0 | URL
더 웃긴 건 여자 배구 선수가 올스타전에서 최순실 패러디했다고 그녀를 ‘좌빨‘이라고 비난한 사람들입니다. 그 선수는 최순실 패러디를 자발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라 올스타전을 주관한 배구연맹이 선수에게 하라고 지시했을 뿐입니다. 그냥 웃고 넘기면 될 일을 이념의 색안경으로 보는 사람들이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개소리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요. ^^;;

2017-02-02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2 19:59   좋아요 0 | URL
둘 다 나쁘지만, 그래도 가장 나쁘고 위험한 부류가 후자입니다. 기회주의자들입니다.

꼬마요정 2017-02-02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철판입니다. 반성하고 자중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한 푼어치의 동정도 아깝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인 줄도 몰랐습니다ㅠㅠ

cyrus 2017-02-03 12:33   좋아요 0 | URL
네. 죗값을 받아도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레삭매냐 2017-02-03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지부조화와 자기합리화를 원없이 보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요.

비정상이 정상을 대신하는 현실이 초현실적입니다 정말로.

cyrus 2017-02-03 17:28   좋아요 0 | URL
비정상적인 생각과 언행을 하는 지도자를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초현실적입니다. 가면 갈수록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1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외 옮김 / 동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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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탐구한다. 그러나 급격한 세태의 변화 속에서 인문학은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학문적 힘을 잃어가고 있다. 프랑스는 모든 학문을 철학으로 대접한다. ·고교에서 철학 과목을 가르치고 대학입학을 위해선 종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를 치러야 한다. 여기서 출제되는 철학 문제는 그 격조와 높은 수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으며 그해 국민적 관심사가 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이런 흐름과 여전히 동떨어져 있다. 아직도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주류다. 자율적, 비판적 사고 훈련이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 의견과 주장은 넘쳐나지만 음미할 만한 깊은 글은 보기 힘들다.

 

성역과 금기 없는 비판과 치열한 논쟁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요소들이다. 비판의식은 정확한 논점과 논리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대화 가능성마저 잃어버린 채 극단으로만 치닫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무기의 선명도만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크고 높은 목소리들만이 득세하게 된 데에는 지식인의 침묵이 주범이라고 하지만, 그 침묵을 만들어낸 풍토 또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현실은 자꾸 대답을, 아니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사회발전에 기여할 방안을 모색한다. 그들이 사회의 각종 문제에 대처하고,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집단화해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들은 지식권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전문적 지식이 집권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 경우가 많았고, 집권자들을 등에 업고 형성된 일부 지식인 집단이 부당한 물리적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각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들이 사회의 여타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 긴장 관계를 이루며 공존할 때 사회는 이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 논의를 거쳐 발전한다.

 

자기 뜻에 따라 타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직간접적 힘을 권력이라고 할 때 지식이 직접 권력 주의라는 옷을 입게 된다. 권력 주의는 통치를 공고하기 위한 기술이다. 권력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권력을 휘둘러 남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미셸 푸코는 1978년에 진행된 강연(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통치받지 않기 위한 기술’, 비판적 태도의 의미를 재정립하여 그 필요성을 강조한다. 푸코가 정의한 비판적 태도는 물리적 권력에 저항함으로써 대중들의 힘을 통해 반사적인 대항권력을 형성하는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코의 권력 개념은 국가 권력이나 특정한 무엇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푸코는 현대인이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온통 결박되어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규율하기에 이른다고 봤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는 일상적인 권력은 통치 체제에 순응하게 한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 미세한 권력의 영향력에 길들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스스로 교정해야 한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를 떠올리면 된다. 이 글귀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아서 자만에 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해주는 계몽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푸코는 이 글귀의 의미가 과대평가되는 바람에 정작 자기 배려(돌봄)’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자기 배려는 자신을 사유하는 존재로서 간주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자산과 관계된 타인,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분석하는 것이다. 플라톤이나 명상록의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고대 그리스 · 로마 철학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고, 성찰해 자신을 수양하는 실천적 자세를 추구했다.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려면 엄격한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 자기 수양은 비판의 기능, 투쟁의 기능이 있다. 내가 배운 지식이 잘못되었으면 인정하고, 폐기해야 한다. 또 우리를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평생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투쟁의 힘을 길러야 한다.

 

푸코의 비판적 태도자기 수양개념은 진실 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각하는 힘이다. 푸코는 자기 수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소개했다. 자기 수양을 위한 글쓰기는 자신을 혹독하게 다스릴 수 있는 성찰의 글쓰기다. 자기 수양이 결여된 글은 변명으로 변질한다. 민주주의는 부단한 자기비판과 수정을 거칠 때 살아남는다. 도덕도 필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정직성진실 된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정직성과 진실 된 삶은 자기 인생을 떳떳하게 사는 데 관련이 있다.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비판할 자격이 있다.

 

 

 

 

* 도대체 무슨 말일까??

 

눈이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눈 속에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 안에서 하지만 타자의 눈의 형태하에서 그런데 거기서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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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1-18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민들이 국가 권력을 바꿔 본 나라....네 철학의 힘이죠...
철학을 자신을 돌아보게 하죠...

박사모에서 철학이 발견되기 힘든 이유기도 하죠..

cyrus 2017-01-19 13:1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박사모는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아무 2017-01-18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리정치>에서 푸코의 자기 수양을 언급한 부분이 있는 거 같아 찾아보니 여기서는 ˝자아 기술˝이라고 번역한 것 같아요. 출처가 같은 책인지는 모르겠지만..(미주가 영어가 아니라 전 해석할 수 없습니다ㅠ) 성역과 금기 없는 비판이라는 대목이 심상치 않게 보입니다..

cyrus 2017-01-19 13:13   좋아요 1 | URL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푸코 강연집이 꽤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올해에도 미공개 선집 두 권이 나올 예정입니다. <심리정치>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

시이소오 2017-01-18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시다니
사이러스님은 정말 꾸준히 읽고 쓰십니다. ^^

이 리뷰를 읽으니 선물해주신 책 빨리 읽고 싶어요 ^^

cyrus 2017-01-19 13:15   좋아요 0 | URL
1월 초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분량이 얇아서 만만히 봤는데, 생각보다 읽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천천히 읽고, 관심 있는 내용을 반복해서 읽으니까 대충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

[그장소] 2017-01-1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표 ㅡ 눈부처 ㅡ라고 흔히 표현하는 상태
타인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가 비치는 조건 ㅡ 마주보기 ㅡ그걸 말하는거 아닌가요?
일테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 ...랄까? ㅎㅎ

cyrus 2017-01-19 13:1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이해했어요. 사실 제가 이해가 되지 않은 문장이라고 말한 것이 ˝자기 자신 안에서 하지만 타자의 눈에 형태 하에서 그런데 거기서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였어요. 문장 안에 ‘하지만‘과 ‘그런데‘가 같이 있어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

[그장소] 2017-01-19 15:56   좋아요 0 | URL
하지만 ㅡ이 접속사 하지만이 아닌 , 하는 ㅡ행위의 동사 , 로 연결된게 아닐까 ..그렇게 읽으면 ? ㅎㅎㅎ

박람강기 2017-01-1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시권력을 극복하려는 푸코의 마지막 자구책이었죠..현대에서도 곱씹어볼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cyrus 2017-01-19 13:19   좋아요 0 | URL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생각하면 이 책이 나오길 정말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치받지 않기 위한 기술’이라는 개념이 언급된 내용이 좋았습니다.

2017-01-18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9 13:25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에 접한 소식에 실망했습니다.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가 반복된다면 기업인의 도의적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가 없습니다.

우민(愚民)ngs01 2017-01-19 13:38   좋아요 0 | URL
사법부의 독립이 중요하지만 개혁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판증하는 기각판결이었습니다. 제3자인 외국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동안 지적했던 기득권 엘리트들의 부패 카르텔을 없애지 않는한
대한민국의 부패는
반복될 것입니다.
지금 인터넷에서 조판사에 대한 인신공격과 박사모의 지지선언을 보니
같은 사실 상황으로 극단적인 이분적 논리에 빠져 버린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진실을 조작 호도하는 세력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대상입니다.

oren 2017-01-18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스로 인용해 주신 대목의 핵심은, 제 판단으로는, 결국 ① ‘자기 자신 안에서‘ ② 하지만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저는 미셀 푸코의 주장이 아담 스미스가 말했던 ‘가슴 속의 동거인‘과도 얼핏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 *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253쪽)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cyrus 2017-01-19 13:28   좋아요 2 | URL
oren님이 푸코의 책을 읽어보시면 정말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자기 수양 개념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정신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명상록>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qualia 2017-01-19 1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박스 안의 인용문은 비문인 듯합니다. 너무 원문에 얽매여 번역을 서툴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략 그 뜻이 무엇인지 감은 옵니다만, 철학적 저작은 문구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가 정밀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해서 약간 어긋나게 독해하고 번역하면 원뜻에서 빗나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집니다. 저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을 아래에 옮겨놓겠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t cette connaissance, cette connaissance ontologique de soi en tant qu‘âme, elle se fait, au moins dans certains textes et en particulier dans l‘Alcibiade, sous la forme de la contemplation, de la contemplation de l‘âme par elle-même, avec la fameuse métaphore de l‘œil : comment est-ce que l‘œil peut se voir lui-même ? La réponse est apparemment très simple et, en fait, elle est très compliquée, car l‘œil, pour se voir lui-même, Platon ne dit pas : il suffit qu‘il se regarde dans un miroir; il faut qu‘il regarde dans un autre œil, c‘est-à-dire dans lui-même, mais pourtant dans lui-même sous la forme de l‘œil de l‘autre, et là, dans la pupille de l‘œil de l‘autre, il va se voir lui-même, car la pupille sert de miroir. Et de la même façon l‘âme, se contemplant elle-même dans une autre âme ou dans l‘élément divin de l‘autre âme qui est comme sa pupille, se verra elle-même et se reconnaîtra comme élément divin 24.

cyrus 2017-01-19 13:30   좋아요 1 | URL
제가 밑줄 친 문장이 어설프게 느껴졌습니다. 원문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북프리쿠키 2017-01-20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공간에 의견과 주장은 넘쳐나지만 음미할 만한 ‘깊은 글’은 보기 힘들다˝

무척 공감가는 부분입니다.
그저 센스있는 말장난이 대접을 받는 공간이죠.

싸이러스님이 읽는 책은 아직 제가 읽어보기엔 엄두가 안나네요..ㅠ
언젠가는 저도 내공이 쌓이면 따라가겠습니다 ㅎㅎ

cyrus 2017-01-20 11:59   좋아요 1 | URL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처럼 각 잡고 너무 진지한 글은 재미없게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ㅎㅎㅎ
 
취향의 탄생 -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의 비밀
톰 밴더빌트 지음, 박준형 옮김 / 토네이도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페이스북에서 ‘좋아요’가 많은 게시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된다.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더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글과 사진 또는 동영상을 올린다. 이제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타인에게 일상을 과시 · 자랑하며 주변의 공감을 얻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행위가 보편화했다.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접속해서 하는 일은 무척 단순하다. 누군가 글, 사진, 동영상을 공유한다. 우리는 그 게시물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거나 댓글을 단다. ‘알라딘 서재/북플’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페이스북이다. 사실 ‘페이스북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이스북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를 얻기 위해서 실명과 프로필 사진을 공개한다. 반면 북플은 실명을 공개하지 않아도 책과 리뷰를 통해 여러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친구 신청(팔로워, 즐겨찾기)’으로 연대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친목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친분 활동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상대방을 배려해가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이것이 소셜미디어의 의례다.

 

넉넉한 마음으로 공감과 호응을 보내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나는 ‘좋아요’를 신중하게 누르는 편이다. ‘좋아요’가 글에 드러난 상황에 따라 이상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묻고 싶다. 독감에 걸려 며칠 동안 아팠다는 상대방에게 ‘좋아요’는 진심의 위로일까, 아니면 아픈 환자를 놀리기 위해 누른 걸까. 나는 이런 글을 보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쾌유를 비는 인사말을 남겼다. ‘좋아요’가 격려의 인사를 의미하는 기호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보면 무례한 행동이다. 실제로 독감 환자를 만나면 빨리 나으라고 인사를 하지, ‘당신이 독감에 걸려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좋아요. 엄지 척!’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내가 하나도 모르는 소재나 분야의 글에 누른 ‘좋아요’는 정말로 글이 훌륭하다는 의미일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좋아요’를 누른 사람의 심리를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다. 글을 보지 않고 단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이 상황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소셜미디어의 의례’와 관련 있다.

 

‘좋아요’는 사람을 연결해주고 보통 사람들의 소통창구를 확대해준 긍정적인 혁신의 산물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소셜미디어의 의례’에 치중하면, 손쉽게 ‘좋아요’를 누른다. 과시욕으로 포장된 게시물의 ‘좋아요’ 수에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비판과 토론의 기회가 줄어든다. 인간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비판과 검증 없이 ‘좋아요’ 수를 많이 받은 게시물을 신뢰한다.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사람은 대세를 따르지 않는 고집 많고 괴팍한 존재로 취급받기도 한다.

 

‘좋아요’로 소통하는 ‘소셜미디어의 의례’는 우리의 취향을 변하게 한다. 우리는 원하는 정보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특정의 기호집단을 구성할 수 있다. 취향이 공유되는 하부문화가 형성되고, 우리는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파악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취향은 죽을 때까지 평생 유지되지 못한다. 인간은 모방 심리와 자기주장을 펼치려는 심리, 이 두 가지 심리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 하면서도 개인의 자유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의 취향이 모두 하나로 동일화될 일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성을 추구하고, 기존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특한 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공유하는 취향과 자신의 특별한 개성 사이에 고민하는 반응을 ‘수용주의자들의 성격’이라고 한다.[1] 수용주의자들을 흔히들 표현하는 말로 풀어내면, 개성이 강한 사람 또는 무리 중에 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다. 《취향의 탄생》의 저자 톰 밴더빌트는 남과 같아지고 싶을 때 취향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남과 달라질 때도 취향이 변화한다고 말한다.[2]

 

나는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취향을 속이거나 충분한 공감 없이 억지로 남의 취향을 따르면서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소셜미디어의 부작용을 키우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 글이 ‘좋아요’ 수가 많고, 댓글 수가 많이 달린다고 해서 그 글 내용이 훌륭할까? 절대로 아니다. ‘(북플) 친구’가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았다고 해서 내 글을 챙겨 보는 믿을 만한 사람인가? 절대로 아니다. 내가 추천한 책이 ‘(북플) 친구’가 읽고 싶다고 밝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독서 취향을 따르는 걸까? 절대로 아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질문에 ‘그렇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착각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착각에 취약하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상대방이 내 생각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착각에 빠져 산다. 이와 같은 인간의 속성이 바로 ‘허위 합의 효과(False consensus effect)’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일반적 상황이다.[3] 결국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은 모두 같을 수 없고, 외부적 영향에 의해 자주 바뀐다. ‘좋아요’ 수만 가지고 취향을 공유하는 행동이 진정성 있게 이루어졌는지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소셜미디어의 의례’에 조금 어긋나도 된다. 내가 선호하지 않는 상대방의 취향이 모든 이들이 따른다고 해서 여기에 억지로 따를 필요가 없다. 혹시 지금도 내 글을 보는 분들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내 글이 여러분들 개인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안 봐도 된다. 보기 싫은 글에 억지로 ‘좋아요’ 받고 싶지 않다. 친구 관계를 해제해도 된다. 절대로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여러분들의 취향이 존중되길 원하는 필자의 간곡한 부탁이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되, 내가 진짜 취향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취향이 무조건 하나여야만 하고, 고정적인 특성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히면 취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이러면 자신의 취향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취향과 비교까지 한다. 이건 정말 무의미한 생각이다.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즐길 줄 아는 사람, 즉 ‘덕후’는 자신의 취향을 먼저 존중할 줄 안다.

 

 

[1] 톰 밴더빌트 《취향의 탄생》 262~263쪽

[2] 같은 책, 267쪽

[3] 같은 책,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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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베베 2017-01-16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인이 글을 올리면 좋아요만 먼저 누른 제 자신에대해 진실성을 갖자고 말하고싶어지네요.. 또한 평소 제 글에 좋아요만 누르고 댓글을 달지않은 사람들을 보면 의아 하기도했는데.. 이런 심리였던가보네요. 저도 읽어보고싶네요~~

cyrus 2017-01-16 21:31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 활동을 한 분이라면 누구나 베베님과 같은 생각 한 번쯤 해봤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정답은 없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까 궁금증이 해소되고, 마음이 편해졌어요. 상대방 기분이나 감정에 너무 맞추면 원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친분 활동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집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것이 뭔지 알고, 그걸 자연스럽게 표출하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서재 활동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7-01-17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7 11:20   좋아요 0 | URL
저는 하루에 글 두 편을 오전과 오후 시간대로 나누어 정해서 올리거나 아니면 일부러 2~3시간 간격으로 띄워서 올립니다. 하루에 두 편 이상 글을 올리는 것에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간대에 올린 여러 편의 글을 다 보지 않습니다. 한 편 한 편 대충 읽어도 다른 분들의 글을 보지 못합니다. ***님 말씀처럼 글쓴이는 상대방이 자신의 글을 여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비종 2017-01-17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요‘를 신중하게 누릅니다. 그리고 ‘좋아요‘를 누른 글에는 댓글을 달려고 노력합니다. 그 글의 어떤 점에 공감했는가, 그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가 밝히는 것이 글을 쓴 분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의 폭을 넓혀주셨으니까요.
위로가 필요한 글에 대한 ‘좋아요‘는 대부분 위로의 마음일텐데,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겠죠. 카스처럼 버튼이 다양하면 ‘힘내요, 슬퍼요‘등을 누를 텐데 말이죠. 아님 차라리 ‘좋아요‘가 ‘공감해요‘정도였으면 나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좋아요‘가 많은 글 중에는 꽤 괜찮은 글들도 있지만, cyrus 님의 말씀대로 허탈한 내용에 실망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나의 취향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몇 번 읽으며 오래 머물게 되는 글입니다.^^

cyrus 2017-01-17 11:25   좋아요 1 | URL
댓글을 다는 일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댓글 다는 일보다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게 편하고, 효율적인 일입니다. 분명 읽어봐도 좋은 글인데도 댓글을 달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글에 대한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 읽었습니다. 글이 좋습니다’라고 댓글을 달기가 민망해서, ‘좋아요’만 누릅니다. 서재 활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글을 쓰는 서재를 방문하거나 친하게 지내면 됩니다. ^^

블랑코 2017-01-17 0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공감하는 글에 좋아요는 누르지만 정말 하고픈 말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댓글을 달지 않아요. 친구맺기라고 표현되지만 제 경우 편하게 뉴스피드에서 받아 보기 위해 구독 개념으로 팔로잉하는 거거든요. 뉴스는 매일봐도 독자편지는 자주 보내지 않는 것처럼요. ^^

전 페이스북을 안 하는게 예전에는 진짜 아는 지인들 소식만 주고받았는데 점점 좋아요 수가 많은 뉴스기사, 광고, 지인이 좋아요 누른 모르는 사람 소식까지... 넘쳐나더라고요. 그래서 끊었습니다. 북플은 지인들의 책소식, 파워(!) 독서가들의 서재를 보려고 가입한 건데 차츰 친구가 늘면서 뉴스피드에 책소식 아닌 글도 넘쳐서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이웃관계를 끊을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사이러스 님 글을 보니 미안해하지 말고 내 취향을 존중해야겠어요. ^^

cyrus 2017-01-17 11:32   좋아요 0 | URL
하루에 제 이메일 함에 페이스북 게시물 알림 메일이 두 세 개 이상 옵니다. 심지어 페이스북 친구의 생일날짜가 알려주는 메일도 와요. 이 메일 때문에 페이스북 접속하기가 싫어져요.

예전에 어느 알라디너가 자신이 친구 관계를 해제하는 것에 사죄의 마음을 드러낸 공개 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그분이 상대방을 배려할 정도로 마음씨가 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조용히 친구 해제를 해도 모르는 분도 있고, 친구 해제 했다고 욕할 사람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날 수 있는 북플 시스템상 친구 해제에 관한 일은 금방 잊기 쉽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7-01-17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누르다가 잠깐 멈칫 했습니다ㅎㅎ 이거 누르지 말아야하나? 하고요 ㅎㅎㅎ (농담입니다)
sns상의 좋아요도 일종의 인정욕구라고 하더군요. 인간은 기본욕구라고요. 현대에 오면서 강해진 욕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받는 것도 예전보다는 조심스럽게 누르고는 있는데... 그래도 고민스러울 때가 있었는데 이제 그 고민도 안 해야겠습니다.
윗분의견 처럼 좋아요가 아니라 공감합니다 가 더 좋을듯 하긴해요.

취존은 당연한겁니다^^

cyrus 2017-01-17 11:35   좋아요 0 | URL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기분이 좋은 건 사실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지만, ‘좋아요’를 누르는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도 웬만하면 시간을 내서라도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내가 몰랐거나 잘못된 생각을 알려주는 분들을 만나면 더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

달걀부인 2017-01-17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친구로 맺어진 사람들 (특히 제가 먼저 친구 신청을 한 분들과는) 거의 독서취향이 비슷한것 같아요. 오지에 있는 저에겐 그나마 소중한 정보 역할을 해 주고요. ^^ 소중한 정보든, 즐거운 글이든,감동이든 뭐든 밀려오는게 있으면.. 엄지 척... 그 정도까지만 정직할래요.

cyrus 2017-01-17 11:39   좋아요 1 | URL
다양한 취향을 접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상대방 기분 맞추려고 예전 취향을 포기하면서까지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만의 확고한 취향을 즐기되, 다른 취향을 천천히 접하고 받아들이는 서재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

:Dora 2017-01-17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첨에는 좋아요만 있다가...이거저거 생긴 게 좀 웃겨요. 감정이 그거밖에 없나 사지선답 주입식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편하긴 해요 ^^

cyrus 2017-01-17 11:41   좋아요 1 | URL
온라인 공간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이 무조건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집단으로 공유되는 감정을 억지로 따라가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

잠자냥 2017-01-17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통 정성들여 잘 쓴 글이나, 제가 몰랐던 정보를 담고 있을 경우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 같습니다. 긴 글이 아니더라도 제 기준에 괜찮은 책을 읽고싶은 책으로 등록해놨을 경우에도, 그 책 좋다는 의미에서 좋아요를 누른 적도 몇 번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저는 좋아요를 생각없이 남발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저는 좋아요를 매번 달아주는 이웃보다는, 좋아요를 달지 않아도 제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는 분이 더 고마울 것 같더라고요. (이건 확인이 불가능하지요. 하하하)

cyrus 2017-01-17 11:44   좋아요 0 | URL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군요. 잠자냥님은 ‘좋아요’를 받을 만한 글을 쓰시는 분들 중 한 분입니다. ^^

2017-01-17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7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희망 2017-01-1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은 정말 좋습니다.
전 좋은 글을 읽었지만 불쑥 댓글을 달기가 쑥스러울 땐 살포시 좋아요만 누르고 갈 때가 있거든요
뭐라고 표현할 수없이 좋거나 혼자 오래오래 음미하고싶거나 혹은 수줍어서요~~

cyrus 2017-01-17 15:4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알라딘 서재 활동했을 때 푸른희망님처럼 수줍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의 서재를 방문해서 댓글을 남기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수줍음을 잊고 자연스럽게(?) 하니까 그 이후부터는 적극적으로 서재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저에게 친구 신청을 하면, 제가 그 분 서재에 댓글을 먼저 남깁니다. ^^

stella.K 2017-01-17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다양한 문항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나서 더 이상 진전이 없네.

알라딘은 얼마 전부터 더 많은 좋아요를 유도하기 위해 누가 좋아요를 눌렀나
명단을 공개하고 있잖아. 그것도 좀 신경 쓰이는 부분이기도 해.
예를들어 친한 알라디너가 누른 것이 확인되면
기분이 좋긴 한데 없으면 아쉽고.
또 굳이 좋아요를 누를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안 누르면
괜히 오해 받는 것 같아 찜찜하고,
예전 같으면 좋아요 없이 댓글만 쓰는 것이 용이했는데
지금은 좋아요가 없으면 댓글도 못 쓰겠더군.
차라리 안 읽은 척 하는 게 낫지 댓글은 쓰면서 왜 좋아요는 없나
오해 받기는 싫거든.
이걸 내 페이퍼에 써 볼까 하다가 귀찮아 안 썼는데
여기에 댓글로 쓰게 되네.
내 말이 뭔 말인지 알겠거든 나중에 네가 페이퍼로 써 주면 안 될까?
그럼 좋아요 눌러 줄 용의 있는데.ㅋㅋ

cyrus 2017-01-17 20:34   좋아요 1 | URL
서재 활동을 하면서 알라디너분들의 장단점을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장점 : 착하다, 단점 : 착하다

대부분 알라디너분들은 예의가 아주 바릅니다. 그런데 상대방 감정과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싫어하는 점, 불편한 점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꾹 참으면 서재 활동하는데 스트레스 받을 겁니다.

서재에 대해서 쓴소리 한 마디하려면 비판을 감수해야하고, 알라디너 몇 명이 알아서 친구 해제하는 상황을 각오해야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갈등이 없는 집단 분위기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없어요.

진지하게 댓글을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져버렸군요.. ㅎㅎㅎ

누님. 그런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누르고 싶으면 누르고, 댓글 달고 싶으면 달면 됩니다. 그리고 별로 친하지 않은 알라디너가 있으면 ‘친구 해제(즐겨찾는 서재)‘하면 됩니다.

stella.K 2017-01-18 13:15   좋아요 0 | URL
장점 : 착하다, 단점 : 착하다. ㅎㅎㅎ
맞아!!!

vzvz1004 2017-01-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라딘 내에서 활동을하지는 않지만 네이버 블로그를 하고있어요..ㅋㅋ 계속 고민되던 내용이었는데... 이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cyrus님이 올리신 글을 읽다보니 제가 고민하고 약간은 우울하고 또 약간은 건방지게 오만했던 고민들에 답을 조금 주는 글이었네요.

개인적으로는...의미없는 좋아요에 뭐지? 싶을때도 있고 간절히 친해주게 싶던 사람에게 받은 좋아요에 설레기도 하고 내글을 보긴 본건가? 싶은 댓글에 힘빠지기도 하지만, 가끔 짧은 댓글이라도 아 진짜 고맙고, 감사할때가 있긴해서 끝없는 도돌이표 같긴합니다.

좋아요든, 댓글이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쿨하지 못한 감정에 지배되는건가 싶기도 하고요.....뜬금없이 주절주절 남기고 조금은 성장했다고 믿고 갑니다.

어제 사실 오프라인 알라딘 매장 다녀왔는데...이 책, 사러가야겠어요. ㅎㅎ

cyrus 2017-01-24 14: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천사님. 저는 네이버 블로그를 알라딘 서재 블로그만큼 게시물을 올리면서 활동을 한 적이 없어요. 네이버, 알라딘 블로그를 같이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어요. 아마도 네이버 블로그 활동이 알라딘 서재 블로그 활동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싶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일이 많아지면 블로그 활동에 대한 의욕이 떨어집니다. 괜히 온라인 공간에 만나서 친한 분들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요. 다들 복잡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한번쯤 저나 천사님과 같은 심경을 겪었을 겁니다.
 
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 -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것, 우리가 시간으로 하는 일
뤼디거 자프란스키 지음, 김희상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러시아의 곤충학자 알렉산드르 류비셰프는 5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 통계 노트를 작성했다. 그는 시간의 속성과 존재감을 정확히 인식했고, 자기에게 주어진 1분 1초까지도 지배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류비셰프는 철저한 시간 관리와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총 70권의 학술 총서와 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 논문을 남겼다. 류비셰프에게 시간은 곧 삶이다. 시간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버는 것임을, 부족한 시간은 없다는 것을 류비셰프에게서 배우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간 관리’는 영원한 숙제다. 시간은 화살처럼 휙 지나간다. 하지만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간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주관적인 표현이다.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한 칸트는 시간을 “시간은 모든 경험의 주관적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동등하게 흐르는 것이며 이를 시계로 확인할 수 있다. 삶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만들어진 시계가 때론 주어진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감옥이 된다.

 

시간은 불가역적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며 시간에 거역할 수 없다. 시간이 왜 과거에서 미래로만 흘러가는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의 의미는 수 천 년 전부터 현재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독일의 철학자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시간의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에 관한 다양한 상념을 펼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 철학적 작업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바라봤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의식이 다른 일에 몰두하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즐거운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반면 최악의 시간은 분노 지수를 높인다. 친구를 기다리다 지치면 화가 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정 기다리기에 고통스럽다. 이때의 지루함은 우리를 예민하게 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정해진 채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우리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다고 한다. ‘누구나 같은 시간을 가지고, 그것이 끝나면 죽는다’라고 생각하면, 주어진 시간을 이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 전체에 어떤 활동을 해야겠다는 전망이 뚜렷하지 않으면, 지루함과 불안이 동시에 나타난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새 출발에 두려움을 가진다. 죽음에 대한 이른 공포는 흘러가는 시간의 덧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어찌 보면 시간에 대한 의식은 과거와 미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보다 조금 뒤에 존재하며, 우리의 목표와 꿈이 미래에 투영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보다 조금 앞서서 존재한다.

 

자프란스키의 책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특별한 비결은 없다. 결국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저자의 결론이 너무 쉽고 평범한가. 저자의 표현 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것이 딱 하나 있다.

 

망각은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새 출발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49쪽)

 

이 문장은 특별하다. 새 출발을 시도하는 연초 분위기를 '업(up)'하게 띄워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살다가 시간 속에 죽는다. 우리는 과거를 잊지 못하면 시간이 쏜살같이 가는 것을 안타깝게 느껴진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즈음이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좌절하게 마련이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막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물을 어떻게 흘려보내느냐에 따라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과거의 부귀영화를 따질 때가 아니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한정된 시간을 의미 있게 살려면 과거를 말끔히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어떤 시간을 사느냐 생각하는 문제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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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1-09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래서 일전에 내 글에 그런 댓글을 달았구나.
그래서 답글로 내가 류비셰프 얘기했었잖아.
사실 그 책도 생각 보단 별로였어.
근데 어제 TV를 보니까 <프리한19>에 주제가 어떻게 하면
젊게 살 수 있느냔데 수위를 차지했던 게
친구와 함께 학창시절로 돌아가는 거였어.
그 시절의 말투를 쓰고 완전히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거지.
그랬더니 젊어졌다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때론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 순 뻥인 셈이지.ㅋㅋ

cyrus 2017-01-09 17:08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 친구들을 만나 과거를 추억하면서 그 때 그 시절처럼 대화를 나누면 기분은 좋은데, 문제는 만날 때마다 추억담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좋은 추억을 언급하려고 과거를 미화하거나 부풀릴 수도 있어요. 과거에 돌아갈 수 없으니, 과거를 좋게 보정하는 싶은 심리인거죠. ㅎㅎㅎ

2017-01-09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09 17:11   좋아요 1 | URL
역시 **님의 생각은 정말 진지하고, 깊습니다. 저는 **님이야말로 누구보다 삶을 알차게 보내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일찍 퇴근할 수 있으면 6시 이후에 시간이 빕니다. 조만간 제가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이 될 때 만날 시간을 조율하고 싶습니다. ^^

해피북 2017-01-09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판란스키의 책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방법은 없다‘와 ‘망각은 허허벌판에서 새 출발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라는 글귀는 정말 연초에 새겨두기 좋은 말씀이네요 ㅎㅎ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올 한해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지내보렵니다 ㅋ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7-01-09 21:48   좋아요 0 | URL
거창하고 막연한 새해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이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비결인 것 같습니다. ^^

붉은눈 2017-01-1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심해서 현재의 삶에도 종종 방해를 받는 제게 ‘망각‘에 대한 교훈은 꼭 필요한 한 마디 같습니다. 리뷰 잘 보았습니다.

cyrus 2017-01-11 18:3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좋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안 좋은 과거를 잊지 못하는 편입니다. 새 출발을 할 때 방해되는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