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
다오얼덩 지음, 김영문 옮김 / 알마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고전은 후세에 전범이 될 만한 옛날 작품 또는 책을 의미한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고전을 사람들이 입에는 자주 올리면서도 막상 읽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어떤 책을 두고 귀중한 지적유산이니 하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책을 읽어보았느냐고 질문하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굳이 마크 트웨인의 익살이 아니더라도, 읽자고 결심해 책장 앞에만 서면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이 고전이다.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알마, 2017)는 애서가의 마음에 떨떠름한 과제로 남아 있는, 가깝고도 멀기만 한 동양고전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꼬불꼬불하고 높기만 한 고전을 알려주는 중국인 길잡이가 까탈스럽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不必讀書目). 다오얼덩(刀爾登)비판적 고전 읽기를 중시하는 칼럼니스트이다. 그런데 그의 비판 수위가 좀 세다. 그는 그 유명한 손자병법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 손자병법전쟁 같은 사회에 승리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 사는 사람들 모두 생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손자병법의 지식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살고 있다. 손자병법을 완독하지 않아도 누구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을 기억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어구 중에서도 승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략이다. 그런데 그러한 전략은 경영학 교재에 나오는 내용이다. 상대방이 어떤 전략을 사용하는지를 알고 국제시장에서의 마케팅 기법을 파악하게 되면 그만큼 경쟁하기 쉽다. 이 때문에 전 세계 기업들은 자사의 기술 및 전략을 숨기고 경쟁 기업의 그것을 알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산해경은 중국이 자랑하는 최고(最古)의 동양 신화이다. 작년에 포켓몬 Go’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 이와 유사한 산해경 Go’가 출시된 적이 있다. 게임 이용 방식은 포켓몬 Go’과 거의 유사하다. 중국 고대의 신화집에 나오는 요괴들이 스마트폰 화면에 나타나면 손오공이 머리에 쓰는 금고아를 씌워 포획하면 된다. 산해경을 비판적으로 읽은 다오얼덩은 산해경 Go’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그는 산해경에 나오는 구절을 오독해서 근거 없는 중국 우월의식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이렇게 읽으려면 안 읽는 것이 낫다라고 일침을 가한다.

 

다오얼덩이 읽지 말라고 당부하는 동양 고전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는 것들만 소개하면, 논어, 노자, 맹자, 장자, 이백(이태백), 주역, 삼국지, 서유기, 수호전 등이 있다. 우리는 고전을 전통으로 받아들여 고전 읽기를 통해 현대 사회 문제점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다오얼덩은 공평한 마음을 가진 독자라면 고전이 제시하는 교훈이 오늘날에는 무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다오얼덩은 비판적 독서를 주저하는 독자들이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고전을 소개할 때 그것의 장점을 먼저 소개한 다음 비판점을 알린다. 고전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기보다는 주제, 문학적 의의 등 작품 해제 쪽에 무게를 둠으로써 독자들이 고전 작품을 직접 찾아 읽도록 신경을 썼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다. 다오얼덩의 책을 읽으면 굳이 안 읽어도 되는 고전을 한 번쯤이라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에 읽어야 할 책이 엄청 많다. 다오얼덩이 소개한 고전은 평생을 두고 읽어도 다 못 읽는다. 그래서 다오얼덩의 책 한 권 제대로 읽고 나면 50여 권의 동양 고전을 섭렵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 책을 읽는 독자, 바로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처럼 알맹이 없는 요란한 말로 고전이 중요하다면서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자신의 지적인 면모를 상대방에게 과시하기 위해 언변으로 치장하기에 바쁘다. 안 읽는 것보다는 한 번이라도 읽어보려는 시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읽다가 포기하면 된다. 완독 달성이 독서의 전부가 아니다. 그래야 설득력 있는 비판적 독서가 가능해진다. 이 책,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의 독서가 우리에게는 능동적 독법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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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4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25 06:15   좋아요 0 | URL
저도 안 읽은 고전이 많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조금 위안이 되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6-2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에 있는 책들중 상당수 책들을 못 읽었네요... 책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잘못 읽는다는 것도 깨달을텐데요... 한참 멀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cyrus 2017-06-25 06:21   좋아요 2 | URL
저는 삼국지를 안 읽어봤어요. 삼국지에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 저보고 삼국지 안 읽는다고 핀잔 준 녀석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읽은 삼국지가 이문열 버전입니다. 이문열 버전만 읽으면 삼국지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

AgalmA 2017-06-26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국지 안 끌려서 안 읽었어요. 그 방대한 양에 투자한 만큼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많을까 심리가 늘 끼어서요ㅎ cyrus님 일화처럼 그걸 읽은 사람들이 뭔가 대단한 걸 넌 모른다! 으스대거나 핀잔 줄 때 많이 써서 더 기를 쓰고 읽고 싶게 만들긴 하죠ㅋ 읽어보니 별거 아니던데 맞받아쳐 주고 싶기도 하고ㅋㅋ 그런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고전이 모두에게 양식이 되지는 않아요. 전공자라면 모르겠지만 모두가 다 전문가가 될 이유는 없잖아요? 사람의 한계상 현실불가능한 부분도 있고요. 인공지능 인류 인종이 되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다오얼덩이 말하는 것처럼 유통기한 지난 정보나 틀린 이론도 많아서 최신 업데이트된 책들을 더 선호하게 돼요.

cyrus 2017-06-27 07:59   좋아요 0 | URL
저도 AgalmA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비판적 읽기를 강조하지 않고, 무조건 고전을 읽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고전은 재미 없어요. 고리타분한 내용도 있고요.. ㅎㅎㅎ
 
후 WHO -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
게르하르트 핑크 지음, 이수영 옮김, 김원익 감수 / 예경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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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그랜트 《그리스. 로마 신화사전》 (범우사, 1993년)

* 아서 코트렐 《그림으로 보는 세계신화사전》 (까치, 1997년)

* 필립 윌킨슨 《세계 신화 사전》 (웅진지식하우스, 2002년)

* 피에르 그리말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 (열린책들, 2003년)

* 낸시 헤더웨이 《세계신화사전》 (세종서적, 2004년)

 

 

이 다섯 권의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담은 사전 형태의 책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부 절판되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리스 로마 신화 덕후들의 한숨 소리가 내 마음을 울린다. 덕후들이여, 아쉬워하지 마시라.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 한 권이 있으니까.

 

《Who :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가나다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유일한 사전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모르고선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신화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풍성한 극적 요소가 가득하다. 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엽기 드라마’다. 신이든 인간이든 서로 눈 한 번 맞으면 당장 몸을 섞어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다. 사랑과 야망, 그리고 복수를 위해서라면 참혹한 피의 살육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철저하게 각 인물의 복잡 미묘한 감정 변화, 상황 설정, 관계 등에 할애한다. 신화 속 인물들 역시 탐욕과 질투, 믿음과 배신, 그리고 사랑과 용기를 발휘하며 극단의 선에서 극단의 악까지 사생결단으로 내닫는 모습이 그려진다. 신화의 극적인 재미를 느끼려면 ‘신들의 족보’ 또는 복잡하게 꼬여버린 인물 관계 등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신화를 꼼꼼하게 읽어도 백 명이 넘는 등장인물을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럴 때 신화 곁에 있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사전’이다. 그리스 로마 인물 사전은 신화라는 미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데 꼭 필요한 실타래다. 아리아드네(Ariadne)가 건네준 실타래를 손에 꼭 쥔 테세우스(Theseus)는 한 번 들어간 이상 탈출이 어렵다는 크레타(Crete)의 미궁을 무사히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신화를 읽다가 낯선 인물을 만나면 사전을 찾아보면 된다. 《Who》는 1차 문헌인 고대 원전뿐만 아니라 신화에 파생된 근 · 현대 문학 및 예술 작품까지 담아냈다. 저자가 참고한 문헌의 출처까지 알려주고 있어서 풍부한 읽을거리까지 제공한다. 《Who》는 한 번 풀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실타래다. 독자가 찾은 표제어 속에 또 다른 표제어가 연결되어 있다. 메데이아(Medeia)를 찾다가 이아손(Iason)이나 테세우스에 눈길을 돌릴 수 있다. 메데이아에서 연결된 실타래를 따라 이아손을 만나면, 아르고(Argo) 호 원정대 동료인 음유시인 오르페우스(Orpheus)를 만나게 된다. 쭉 이어진 실타래를 따라가는 건 독자의 자유다.

 

 

 

 

 

 

 

 

《Who》는 들고 다니기 편한 가벼운 판형이다. 직접 책을 펼치거나 한 손으로 들어보면 정말 학창 시절에 들고 다닌 영어사전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의 단점은 글자 크기가 작다. 그리고 책을 확 펼치기가 힘들다. 책을 펼치려고 무리하게 힘을 주면 책 상태가 망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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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8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18 14:53   좋아요 1 | URL
사전도 읽어보면 재미있어요. 특히 백과사전이요. 그 속에 있는 표제어 아무나 골라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어요. 사전 속에 이야기가 있고, 사전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됩니다. ^^

단발머리 2017-05-18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을 찾아볼 때 쉽게 이용할 수 있겠네요.
실제 책 모양도 보여주시고, 내부도 보여주시고^^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cyrus 2017-05-18 14:55   좋아요 0 | URL
예전부터 이 책의 실물이 궁금했어요. 포토 리뷰가 없어서 책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서 사진을 찍어 올려봤습니다. ^^

stella.K 2017-05-1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다 좋았는데 마지막 두 문장에서 확 꺾기네.
무엇보다 글자 작은 건 이제 용서가 안 된다. 나와는 인연이 없을 것 같구만.
지금 천병희, 이윤기 씨가 쓴 책도 못 읽고 있는데...ㅠ

cyrus 2017-05-18 14:57   좋아요 0 | URL
책의 판형을 조금만 더 컸으면 보기 좋았을 겁니다. ^^
 
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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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나 집단이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관심사, 의견, 표현 방식이 다르다. 대화도 ‘차이’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의사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성숙한 의사소통에 임하는 사람들은 타자와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충돌은 어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감정의 원천이다. 선입견과 아집은 그냥 물러서지 않는다. 새로운 의견과의 충돌을 일으켜야 그 모습을 감춘다.

 

소통에 관계된 자들 사이의 차이는 대화의 전제이자 본질적 계기이다. 이 전제가 없으면 대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의 뜻대로 따르게 하는 것, 즉 타자를 동화 혹은 동일화할수록 그 사회는 안정된다. 그곳에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사회구성원끼리 서로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유일 진리와 절대 합의를 상정함으로써 타자의 존재나 대화의 가능성을 지워버리면 결국은 파국을 초래한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폐해를 날카롭게 분석한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한국 사회가 자아와 타자 사이의 부정성이 제거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피로사회》가 타자의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시도라면, 《타자의 추방》(문학과지성사, 2017)은 과잉 긍정성만 내세우는 ‘피로사회’, ‘성과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산적인 문제 해결을 제시한다.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화두를 던진다.

 

첫째,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제기한다. 다툼과 오해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져 갈등 양상이 지속될수록 누구나 ‘소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진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 참여에 소극적인 사람은 자기 생각과 다른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으며 그들에게 사회를 교란하는 ‘불순세력’ 딱지를 붙인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존 사회 체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확인하고, 배제한다. 한병철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이 현대 사회에서 ‘반옵티콘(banopticon)’으로 변화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이다.

 

누구나 SNS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좋아요’를 눌러 개인적 선호를 밝힌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아를 노출할수록 ‘같은 것의 창궐’(《타자의 추방》 9쪽)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 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61쪽)

 

페이스북, 그리고 북플은 ‘좋아요’의 공동체이다. ‘좋아요’의 긍정성은 아무 구별도 없이 모든 것을 환영한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늘 바라왔던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평화스러운 풍경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표피적 양상으로만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갈등에 대한 이해를 봉쇄하는 전략이 된다. 차이와 갈등을 사회구성원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으로 인식한다. 담론이 불가능한 사회가 훨씬 더 불안하다.

 

둘째,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경청’이라는 자세로 소통할 것을 요청한다. 소통의 시작은 경청이다. 경청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 여기서 한병철이 말하는 ‘경청’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병철의 ‘경청’은 귀로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차원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심리정치》에서 한병철은 ‘반옵티콘’에 탈출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바보’가 되라고 주문했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심리정치》 114쪽)

 

침묵이 능사는 아니다. 개인이 침묵을 선택해도 그 자체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소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불의의 상황을 침묵하는 것은 결국 그 불의를 방조하는 공범자가 된다.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정치적 입장과 가치관을 견지한다. 그래서 우린 끊임없이 논쟁하고 싸운다. 사실 우리가 서로의 입장을 진정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는 타자들의 입장을 전부 알 수 없다. 그래서 타자들의 입장에 귀 기울여야 하고 그들 각자 나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는 태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바틀비(Bartelby)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1]라고 말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반대로 ‘소통하는 편’을 택하는 경청자로 살고 싶다.

 

 

 

[1]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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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7-04-2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 분의 자칭 페미니스트들과 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최소한 침묵은 아닌 것 같고 ...

제 판단에 맞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기보다 바보로 남게 되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 같군요.

cyrus 2017-04-20 17:09   좋아요 0 | URL
입장이 다른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이 내 의견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넘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상대방의 의견이 틀렸다고 규정하면서 일말의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혹스러워요.

마립간 2017-04-21 03:56   좋아요 0 | URL
저도 사람인지라 나는 경청을 했지만
상대가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고, 내 의견이 틀렸다고 규정했고 일말의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고다고 말하고 싶지만,
제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가 미숙한 것이겠죠.^^

소통의 기술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중 입니다.

캐모마일 2017-04-2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옵티콘은 배제를 뜻하는 ‘ban‘과 판옵티콘의 합성어로, 적대적인 사람은 제외시키고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포섭하는 감시장치라는데 사실 정확히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존 사회 체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확인하고, 배제한다.˝ 이 부분에서 감이 잡히긴 합니다. 현대 사회는 갈수록 근대처럼 하드파워 중심의 눈에 보이는 감시와 처벌보다 교묘한 소프트 파워로 포장된 감시와 처벌, 배제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을 소개받았네요.

cyrus 2017-04-20 17:23   좋아요 1 | URL
‘반옵티콘’의 의미에 대한 제 설명이 미흡했어요. 부연 설명을 하자면, 판옵티콘의 사회에서 권력이 ‘판옵티콘’이 되어 ‘반대’의 의견을 지지하는 대중을 감시합니다. 판옵티콘의 사회에서는 ‘반대’ 세력을 감시하는 권력의 통치 대신에 권력에 순응하는 사회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감시합니다. 그래서 한병철은 <심리정치>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디지털 기술(SNS)이 투명한 감시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SNS 이용자들은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공개합니다. 그런데 한병철은 디지털 네트워크 관계 속 사회구성원이 서로 감시하게 만들어 기존 사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확인하여 배제한다고 주장합니다.

한병철의 글은 기존의 책들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와서 반복합니다. <타자의 추방>도 그렇습니다. <심리정치>를 먼저 읽고 난 뒤에 <타자의 추방>을 읽으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qualia 2017-04-20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통에 관계된 자들 사이의 차이는 대화의 전제이자 본질적 계기이다. 이 전제가 없으면 대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아와 타자의 정체성을 더 고차적인 통일성이나 목적에 의해서 혹은 그와 같은 것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는, 즉 차이를 유지하는 관계이다.

→ 제가 잘못 읽은 것일까요? 아무리 위 인용문을 거듭거듭 읽어봐도 셋째 문장 《왜냐하면, 서로 다른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앞뒤 문장들과 호응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혹시 《왜냐하면, 서로 같은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라고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요?

제가 터무니없는 오독을 하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cyrus 님의 위 문장들을 오독한 것이 아닌가 두렵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이 있어서 시간을 내지 못해, cyrus 님의 윗글을 오늘 밤에야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논제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반가운 글이었습니다. 제 생각과 무척 흡사한 부분이 많아요. 한병철 저자한테도 관심이 가는군요. 기회가 되면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cyrus 2017-04-20 23:08   좋아요 1 | URL
제가 잘못 적었군요. qualia님이 잘못 본 게 아닙니다. ‘같은 것’, ‘비슷한 것’으로 고쳐 써야 합니다. 짧지 않은 글을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 화면으로 읽는 것이 불편하실 텐데, 비문을 잘 보셨습니다. ^^

qualia 2017-04-22 12:13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군요. 저도 좀 긴가민가했는데요. 제가 제안한 것으로 수정해주신 cyrus 님 문장을 보니까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입니다. 근데 제가 위 cyrus 님 글을 스마트폰으로 읽었던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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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책에 대해 물을 수 있을까

그걸 정말 내가 썼는지? [1]

 

- 파블로 네루다 -

 

 

 

인터넷의 바다에 떠도는 정보는 내 것이 되기 힘들지만, 내가 읽은 책에 있는 정보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2]가 된다. 꽁꽁 얼어버린 생각의 바다 한가운데 서서 책을 읽으며 도끼질을 해야 한다. 그 얼음을 깨고 나온 펄떡이는 글은 우리에게 삶의 자양분을 선사한다. 그런데 뚜렷한 목표 없이 섣부르게 도끼질을 해대면 허송세월할 수 있다.

 

 

 

 

 

 

생각의 바다를 깨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책 속에 나열된 얼어붙은 단어들을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 무조건 읽는다고 해서 종이에 얼어붙은 단어들이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서 흘러나온 냉기는 우리의 생각마저 얼어붙게 한다. 냉기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독자의 ‘입김’이 더욱 세져야 한다. 우리는 입김을 뿜으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잘 정리된 현자의 생각보다 단순한 질문이 진리에 한층 더 가까울 때가 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원론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해 김대식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통해 자신만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입김을 불어대면서 읽었던 책들을 소개한다. 저자의 입김에 사르르 녹아내린 종이 속 단어들은 더욱 유용하고 의미 있는 해박한 통찰력이 되어 살아 숨 쉰다. 그는 책 읽기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질문’을 강조한다.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중요한 말은 그가 읽은 배철현의 책 속에 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며,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 주는 안내자다.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 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다.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38쪽)

 

질문으로 진실한 자신을 발견하는 일. 이것이 독서의 근본적인 목적이다. 질문은 한 걸음 멈추어 서서 나를 바라보게 한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종이만 보며 뛰었던 삶의 열기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종이로 만든 공간에서 얽히고설킨 생각을 가다듬는다. 계속 행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며, 잘라내야 할 낡은 지식은 어떤 것인지 간추리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어쩌면 그만큼 버거운 짐도 없다. 태어나고, 공부하고, 그리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나 자신이라는 존재와의 전쟁은 계속된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살아가는 것, 존재하는 것, 호흡하는 일상적인 반복적 삶의 모습에서 나를 또다시 발견하는 질문은 우리 머리와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건 뇌과학자에게도 만만치 않은 질문이다. 인간의 문제는 수많은 문제와 얽히는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 책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에 자기 생각을 덧붙여 해답을 찾기보다는 본질적인 질문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를 종합해서 인생의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건 불가능한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질문하는 행위는 미래로 향하면서 통과해야 하는 분기점을 발견한 사람에게 중대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미래란 늘 장밋빛이거나 잿빛이다. 턱없는 낙관주의가 유토피아(Utopia)의 환상을 부풀린다면, 근거 없는 비관주의가 디스토피아(dystopia)의 절망을 퍼뜨린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 후손들의 ‘현재’가 될 ‘미래’는 낙관과 비관 사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리란 사실이다. 그 지점이 어디쯤 될 것인지를 질문으로 조망할 수 있다. 그러면 일방적인 낙관도, 편협한 비관을 뛰어넘는 균형 감각이 유지된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인간과 신의 결합을 뜻하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라는 책에서 인류의 미래를 제시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가 바로 생각의 분기점이다! 이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김대식은 갈 길 바쁜 독자들의 손을 잡으면서 질문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나보다 먼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읽은 당신이 정말 중요한 질문을 지나치고 책을 덮었다면 321쪽을 다시 펼쳐보길 바란다. 당신이 무심코 읽은 321쪽의 단어들은 아직 깨지지 않은 검은 얼음이다. 그 얼음을 깨뜨려야 아직 오지 않은, 낯선 미래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읽고, 거기에 인생의 지침을 찾는다는 건 낭패 보는 일이다. 남들이 다 발견한 것들을 눈으로 보기만 하는 독서는 ‘설거지’ 독서[3]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꽤 많은 책들을 독파한 저자의 능력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읽었던 책들이 생소하다고 해서 불평할 이유도 없다. 그가 읽었던 책들을 따라 읽으려고 한다면, ‘설거지’ 독서를 할 가능성이 있다. 누가 읽든 간에 우리 손에 쥐어진 책은 차가운 냉동 상태다. 평범한 독자들이 ‘설거지’ 독서를 피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얼려진 책이 녹을 수 있도록 ‘입김’으로 불어야 한다. 책이 완전히 녹으면 매끄럽고 날이 선 도끼로 변신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서늘한 사유가 된다.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읽고, 제대로 질문하는 일이다. 매번 다 읽고 나서 책을 덮기만 하던 나는 이제 정색을 하고 스스로 묻는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그걸 정말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 새로운 유행의 새로운 책을 찾아 두리번거릴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책 속에서 새로운 인식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 세상을 마감하는 날이 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신 앞에 설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책 읽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할 순 없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신의 질문이 무엇인지 아는가. “세상에 있을 때 넌 뭘 했느냐?”이다.

 

 

 

 

[1] 《질문의 책》 49쪽 (정현종 역, 문학동네, 2013)

[2]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이어야만 한다.” (프란츠 카프카)

[3] ‘설거지’ 연구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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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7-04-0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늘 궁금 했거든요 ㅋ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도 알겠고 다양한 지식을 정리하는 방법도 알겠는데 그 질문 하는 방법에 대한 ‘어떻게‘란 무엇인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1인 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어떻게‘ 란 부름에 명료한 확답이 페이지 321에 있단 말씀이시죠 ㅋㅂㅋ ~당장 달려가서 펴보고 싶네요 ㅋ

cyrus 2017-04-01 10:24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명료한 확답’이 없어요. 제가 321쪽을 다시 보라는 이유는 저자가 간접적으로 제제시한 ‘질문’을 확인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은 우리 독자가 찾아내야 합니다. ^^

stella.K 2017-04-0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읽었구나. 이 책 좀 평점 주기가 애매했어.
별 넷 주기엔 많은 것 같고, 3주기엔 적고.
반 개짜리 있으면 3개 반이 적당할 듯도 한데...
이 책 여백이 너무 많다고 까는 사람도 많던데
나도 좀 그점은 아쉽더군.

cyrus 2017-04-01 21:27   좋아요 1 | URL
사실 내용도 딱히 특별한 것이 없었어요. 처음 이 책을 직접 봤었을 때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조금 당황했어요.
 

 

 

 

 

 

 

 

 

 

 

 

 

 

 

 

 

 

 

 

 

 

* 책표지 사진이 없는 책 : 《명상록 · 행복론》 아우렐리우스 · 세네카 (범우사, 1994년)

* 《명상록》아우렐리우스 (도서출판 숲, 2005년)

 

 

 

2013년 올재 클래식스 6번째 시리즈로 발간된 《명상록》은 황문수 씨가 번역했다. 이 번역자의 약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서점의 ‘작가 소개’에 따르면 황문수 씨는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고 한다. 70~80년대에 나온 철학 서적들, 특히 버트런드 러셀, 플라톤, 칼 야스퍼스, 윌 듀란트 등의 저서를 번역했다. 《명상록》도 마찬가지다. 사실 황문수 씨 번역의 《명상록》은 1974년 범우사에서 펴낸 책이다. 이때 나온 책의 부제는 ‘자성록(自省錄)’이다. 1987년에 세네카의 글과 함께 수록한 번역본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제목이 《명상록 · 행복론》이다. 《행복론》의 번역은 최현 씨가 했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범우사판 《명상록》은 최현 씨가 번역한 것이다. 거의 절판된 거나 다름없는 황 씨 번역의 《명상록》을 사단법인 올재가 재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서양 고전 번역본들은 거의 일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황 씨 번역의 《명상록》도 일역본을 중역했을 가능성이 있다. 황 씨의 문장에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많은 편이다. 한자에 생소한 젊은 독자들은 《명상록》의 진미를 느끼는 데 어려울 수 있다. 천병희 교수의 《명상록》은 그리스어 원전을 옮긴 번역본인데, 여기도 문장 속에 생소한 한자어가 몇 개 있다. 그래도 번역자 입장에서는 우리말로 풀이하기 어려운 문장을 번역하기 위해 최대한 원문과 비슷한 의미의 한자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프랭크 맥린 (다른세상, 2011년)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전성기에 등장한 5현제 중의 한 사람이다. 마르쿠스가 통치한 시기는 태평성대를 구가했지만, 역시 나라의 정세가 흔들리는 크고 작은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홍수와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해서 인명피해가 생겼고, 설상가상 전염병까지 퍼지기도 했다. 외세의 침략에도 시달렸다. 중동에 위치한 파르티아 제국과 훈 족의 위협으로 로마 제국의 국경 지역으로 이주한 게르만 족의 위협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는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학구적인 성격이었다. 마르쿠스 통치 시절의 역사학자는 내성적인 황제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고 기록했다. 19년 동안의 통치 기간은 황제 입장에서는 힘겨운 시기였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고, 전쟁을 진두지휘해 모범을 보였다. 외세로부터 로마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그는 고전 문헌들로 가득한 서재가 아닌 전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르쿠스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의 양자로 들어왔다. 어린 마르쿠스를 유난히 아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에게 ‘진실한 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마르쿠스는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착했으면 로마 전역에 아내의 추문이 알려졌는데도 결코 아내를 꾸짖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명상록》에 아내를 좋게 표현했다.

 

내 아내가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곰살궂고 검소한 것도, 내 자식들을 위하여 유능한 스승들을 구한 것도 신들 덕분이다. (천병희 역, 《명상록》 제1장 30쪽)

 

마르쿠스는 상대방의 결점을 비판하는 성격의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아우렐리우스 가문의 양자로 들어왔고, 같은 해에 공동 황제로 임명된 루키우스 베우스(Lucius Verus)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스스로 반성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대했다고 한다. 루키우스 베우스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르쿠스는 죽을 때까지 단독 황제의 자리를 유지했다.

 

 

 

 

 

 

 

 

 

 

 

 

 

 

 

 

 

* 《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 수양》미셸 푸코 (동녘, 2016년)

 

 

 

 

《명상록》을 보면 마르쿠스가 로마의 황제라는 의식과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자기성찰에 충실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셸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삶에 가장 해로운 것들, 즉 권위에 대한 탐욕, 집착,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에 ‘통치받지 않으려고’ 했다.[1] ‘황제’, ‘대통령’ 등 권위와 관련된 이름을 누구나 가지는 순간, 그 권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 이럴 때 국민의 권리는 유린당하고, 국민과 유리된 권위가 통치하는 국가는 파멸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마르쿠스의 비판적 글쓰기는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2]이다.

 

마르쿠스는 젊었을 때에 해야 할 일들 중 하나로 ‘대화편’을 써야 한다고 했다. (《명상록》 제1장) 이 ‘대화’는 나 자신을 사유하는 존재로서 스스로 묻고 답하는 행동이다. 그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일이다.

 

지금 나 자신의 영혼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떤 경우에나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하며, 지배적 원리라고 불리는 나의 이 부분을 나는 지금 어떤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를 음미해야 한다. 지금 나의 영혼은 어떤 영혼인가? (황문수 역, 《명상록》 제5장 71쪽)

 

자기 수양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성을 통해 자신의 감정 및 행동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된다. 푸코는 비판의 기능이 있는 자기 수양을 ‘배운 것을 버리는 것(de-disccere)’이라고 했다. 자기 수양은 상대방의 타당한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몸에 배야 할 기본 덕목이다.

 

내가 올바르게 생각하지도 않으며 올바르게 행동하지도 못한다고 나에게 설득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즐거이 나의 태도를 바꾸겠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진리로 말미암아 해를 입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류와 무지에 안주하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 (황문수 역, 《명상록》 제6장 85쪽)

 

배운 것을 버리는 것. 내가 스스로 발견한 결점이든 상대방이 알려준 내 결점이든 이를 과감히 떼어내는 삶의 태도는 한 인간이 평생 살면서 치러야 할 투쟁이다. 혼자 투쟁하려면 이를 실천하려는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마르쿠스와 푸코는 자기 수양을 위한 훈련법으로 ‘글쓰기’를 강조한다. 이들의 제안은 비판적 목소리를 ‘비난’으로 매도하고, 잘못에 대한 반성을 선행하지 않는 세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비판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결점을 들춰낼 줄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다. 박 씨, 최 씨,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보호하려고 매 주말마다 영혼 없이 태극기를 휙휙 휘날리는 사람들. 이들은 사회에서 배운 낡고 편협된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못 버릴 듯하다. 과거의 쓰레기들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말고, 무덤에 갈 때 남김없이 들고 가길 바란다. 이건 그들에 향한 악의에 찬 저주가 아니다. 더 나은 세상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간곡히 부탁하는 말이다.

 

 

 

 

[1]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 수양》 46쪽

[2]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불복종의 기술일 것입니다.” (같은 책,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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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1 08:0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언제 읽어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납니다. 필사하기 참 좋은 책입니다. ^^

우마우마 2017-02-21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요. 고등학교 때 왠지 멋있어 보여서 명상록을 샀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뭘 알고 읽었나 싶어요. ㅎㅎ 남기신 댓글처럼 필사를 해볼까 싶어집니다.

cyrus 2017-02-21 12:35   좋아요 0 | URL
<명상록>이 처음 읽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해보니까 곱씹을만한 글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제가 노인이 돼서 <명상록>을 다시 읽으면 책을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