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Hermes)는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전령이다. 날개 달린 모자로 유명한 그는 유창한 능변으로 신의 소식을 인간에게 해석해 준다. 그래서 헤르메스에서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이 나왔다. 헤르메스의 로마식 이름은 메르쿠리우스(Mercurius)다. 영어로는 머큐리(Mercury)라고 한다. 수성은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행성이다. 수성은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고, 1초에 48㎞의 공전 속도로 행성 중에 가장 빨리 움직인다. 신의 소식을 빨리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수성에 ‘머큐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머큐리는 수은을 뜻하기도 한다. 연금술사들은 수은이 ‘빠르게 흐르는 은’이라고 생각했다.

 

 

 

 

 

 

 

 

 

 

 

 

 

 

 

 

 

* 헤르메스 호 트리스메기스토스 《헤르메티카 Hermetica》 (좋은글방, 2018)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 [절판] 앨리슨 쿠더트 《연금술 이야기》 (민음사, 1995)

* 안드레아 아로마티코 《연금술 : 현자의 돌》 (시공사, 1998)

* 쿠사노 타쿠미 《도해 연금술》 (AK커뮤니케이션즈, 2010)

* 하니 레이 《도해 근대마술》 (AK커뮤니케이션즈, 2012)

 

 

 

헤르메스는 연금술사의 신이기도 하다.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알려진 뱀의 지팡이(지팡이에 두 마리의 뱀이 엉킨 모습)는 치유와 독, 건강과 질병, 연금술의 용해와 응고 등과 같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의 힘을 상징한다. 연금술사들은 ‘현자의 돌’을 얻기 위해 수은과 유황을 추출한다. 이 두 가지 물질은 ‘현자의 알’이라는 밀폐된 구형 플라스크에 담는다. 플라스크에 헤르메스의 도장을 찍는다.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여 전설상 인물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Hermes Trismegistos, 약칭 ‘트리스메기스토스’)를 ‘연금술의 시조’로 추앙했다. 이런 신비주의적 학문을 ‘헤르메스 사상’이라고 부른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삼중으로 가장 위대한 자’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하는 연금술은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 알렉산드리아에서 크게 발달했다. 알렉산드리아로 온 그리스인들은 고대 이집트의 신 토트(Thot)와 헤르메스를 동일시했다. 토트 역시 헤르메스처럼 지혜로운 신이었으며 신들의 서기(書記)였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거의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신으로 알려지게 되고, 그가 3226년 동안 지상에 군림하면서 36525권의 책을 썼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파괴되어 사라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썼다고 하는 42권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헤르메티카》는 기원전 3세기경에서 기원후 3세기경에 익명의 저자가 쓴 책이다. 이 문헌이 손실된 헤르메스 문서와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헤르메스 문서의 일부로 알려지게 되면서 연금술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플로티노스, 조규홍 역 《엔네아데스 (천줄 읽기)》 (지만지, 2015)

* [절판] 플로티노스, 조규홍 역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 선집》 (누멘, 2009)

* 조규홍 《플로티노스 :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전달한 사상가》 (살림, 2006)

 

 

 

 

《헤르메티카》는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자신의 친아들 타트(Tat)와 제자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에게 가르침을 전수하는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반인반마 종족(Centaur, 켄타우로스)인 케이론(Chiron)에게 의술을 배워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헤르메티카》는 총 열네 권이다. 제15권은 남아있지 않고, 제16권부터 18권까지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썼다. 보통 연금술은 마법, 비밀 의식, 신비주의와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르메티카》는 각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신비주의와 고대 점성술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철학도 반영되어 있다. 《헤르메티카》의 알쏭달쏭한 글 속에 플로티노스(Plotinos)신플라톤주의, 피타고라스주의와 연관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아스클레피오스여, 신 이외에 그 무엇도 선하지 않으니 신 자체가 항상 선이라. 그런즉 선은 모든 운동과 생성의 실체로다. 선이 가진 에너지는 정지된 상태요 부족함도 넘침도 없으며 지극히 완전하나니, 모든 필요를 채우는 원천이요 만물의 원인이로다. 만물의 공급자가 곧 선이니, 그는 완전하며 항시적인 선이로다.

 

(《헤르메티카》 제6권, 61쪽)

 

 

헤르메스 사상에 심취한 연금술사들은 신이 만든 우주와 이 세상의 모든 물질 전부 단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즉, 모든 물질의 기본은 ‘제1질료’라 할 수 있다. 이 ‘제1질료’가 물질의 형태를 바꿀 수 있으며 훗날 연금술의 기본 원리가 된다. ‘제1질료’ 개념은 플로티노스의 ‘하나(hen)’ 개념과 유사하다. 플로티노스는 세계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로 시작되어 샘물이 솟아 흐르듯이 다양한 존재, 즉 만물이 생성한다고 봤다. 이처럼 세계의 생성 과정을 물의 흐름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플로티노스의 주장을 ‘유출설’이라고 한다. 플로티노스를 위시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 철학의 본질을 ‘신학’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신학은 이 세계 존재 원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이었다.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성직자들은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빛에서 신성(神性)을 찾으려고 했다. 빛은 곧 ‘선(善)’을 의미했다.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현상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그들의 생각과 시도는 현실과 동떨어졌지만, 때론 신비스러운 현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학문 사상의 발전을 앞당기기도 했다. 《헤르메티카》는 연금술과 고대 철학의 관계를 이루는 접점을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문헌이다. 사실 연금술사들은 자신을 현자, 즉 ‘철학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연금술 문서를 해독하여 궁극의 불로장생약인 ‘현자의 돌’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문서를 잘 읽어보면 ‘현자의 돌’과 같은 문장을 찾을 수 있다. 그 문장에 고대 철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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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 학문의 대표선수는 바로 신학이었죠.

그외의 학문들은 곁다리 수준이랄까요.

근대 인문과학의 기수들도 여전히 중세인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걸 까요.

금을 만들겠노라는 연금술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쓴 걸 보면 말이죠.

cyrus 2018-07-20 18:08   좋아요 0 | URL
천재인 뉴턴도 평생 연금술에 매달렸어요. 연금술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게 그들의 작업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에요.
 
리뷰 쓰는 법 - 내가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낀 것의 가치를 전하는 비평의 기본기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박숙경 옮김 / 유유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그때부터 의미를 캐내고 전달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독서는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리뷰 쓰기는 독자의 독서 체험을 공유하게 해주고 다양한 관점에서 책을 읽게 해준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아름다운 말로 상찬하는 리뷰도 좋지만, 가차 없이 비판하는 리뷰를 읽는 재미에 견줄 바가 아니다. 주로 전업 작가, 기자, 도서평론가들이 쓴 리뷰를 ‘서평’이라고 부른다. 리뷰 쓰기는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고 글쓰기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오랫동안 언론매체나 학술지에 실린 리뷰를 ‘서평’이라 부르고, 서평을 쓰려면 전문 작가나 사회적 명사여야 한다는 ‘장벽’이 있었다. 그렇다면 일반 독자는 서평을 쓸 수 없는 걸까? 독자 리뷰를 서평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리뷰를 즐겨 쓰는 독자들은 자신이 쓴 글에 큰 의미(리뷰도 ‘서평’이다)를 부여하지 않는다. 책을 소신껏 소개한 리뷰를 썼는데도 독자라는 위치 때문에 ‘내 리뷰도 서평이다’라고 말을 꺼내지 못한다.

 

리뷰는 무엇보다 독자를 위해서 쓴 글이다. 그런데 그 독자는 누구인가? 리뷰에 소개되는 책의 성격에 따라서 글쓴이가 상정한 독자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독자를 위한 리뷰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써진 리뷰의 효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는 리뷰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리뷰와 서평의 공통점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독자도 ‘서평’이라 불릴만한 리뷰를 쓸 수 있다. 《리뷰 쓰는 법》리뷰와 서평을 가르는 장벽을 허무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가와사키 쇼헤이가 추구하는 리뷰의 목표는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극히 원론적이고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책의 등장에 압도당하기 쉬운 지금이야말로 ‘가치를 전달하는 리뷰’가 필요할 때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오늘날이야말로 리뷰가 온전하게 힘을 발휘하여 ‘좋은 책’을 돋보이게 한다.

 

리뷰를 쓸 때 ‘재미있다’, ‘재미없다’, 또는 ‘좋다’, ‘나쁘다’라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책을 평가한다면 책의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 이런 리뷰는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가치를 전달하는 리뷰’를 쓰려면 객관적으로 책의 내용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책 어디가 재미있는지를 알려주고, 왜 재미없는지를 따져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글쓴이는 리뷰를 쓰면서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를 위해 ‘지침’을 제공한다. 리뷰는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책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알린다. 쇼헤이는 ‘비평으로서의 리뷰’의 성격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비평’이라는 단어도 많이 보인다. 그렇다면 리뷰도 비평인 셈이다. 저자가 비평 쓰기를 알려준다고 해서 일반 독자가 생각하는 리뷰 쓰기와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리뷰와 서평은 다르다’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의 가치를 발굴하여 그것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글쓰기 과정은 비평 쓰기의 원점이다. 따라서 리뷰가 비평과 같은 글이라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책을 명확히 관찰하면서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그 책이 담고 있는 시대적 · 문화적 가치를 전달한다면 일반 독자가 쓴 리뷰도 ‘서평’이라 부를 수 있다.

 

책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시대인데도 자연스럽게 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온 · 오프라인 공간은 여전하다. 그러나 리뷰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쯤으로 취급당한다. 독자들은 굳이 일반 독자가 쓴 리뷰를 찾아 읽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에 독자 리뷰는 넘치지만, 그것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여전히 리뷰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뷰 쓰는 법》은 리뷰의 역할과 가치, 그리고 누구나 리뷰를 쓸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리뷰 쓰는 법》을 읽으면 리뷰와 서평의 의미를 더욱 잘 알게 된다. 《리뷰 쓰는 법》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면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고, 책을 소비하는 독자들과 상호 소통하는 기회가 많아진다. 리뷰는 누구나 책을 읽고 자유롭게 논하는 독서 문화를 고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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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7 16:21   좋아요 0 | URL
아마추어도 전문가 뺨치는 독후감을 쓸 수 있어요. ‘리뷰, 서평은 전문가가 쓰는 것’, ‘독후감은 일반 독자, 아마추어가 쓰는 것’이라는 단순 이분법적 생각에 반대합니다.

stella.K 2018-07-16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같은 리뷰 쓰기의 대가가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게 넌센스야.
근데 난 좀 읽을 필요가 있는 것 같긴 해.
점점 리뷰 쓰는 게 자신없어지고 있어.
리뷰에는 채찍을 필요없고 당근이 필요한데 당근을 주는 곳이 없구나.ㅠㅋ

cyrus 2018-07-17 16:22   좋아요 0 | URL
리뷰를 매일 쓰다보면 ‘어떻게하면 더 잘 쓸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써보려고 해요. ^^

레삭매냐 2018-07-16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 서평 - 독후감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 진다고나 할까요.

자기 만족적인 글쓰기 만으로도 독후감
쓰기의 매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리뷰는 ‘나만의 방식‘으로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부담 없이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cyrus 2018-07-17 16:2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독후감에도 책을 평하는 글쓴이의 관점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독후감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독후감을 쓸 때 느낀 점을 쓰라고 가르치지, 책을 비판하는 입장을 쓰지 못하게 해요. 책을 비판하는 생각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잖아요. 비판적 감상문도 ‘나만의 방식’으로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글쓰기라고 생각해요. ^^

짜라투스트라 2018-07-1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저자만의 리뷰론으로도 볼 수 있겠네요^^

cyrus 2018-07-17 16:30   좋아요 0 | URL
네, 사람들마다 리뷰의 정의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이가 생각한 리뷰의 정의에 공감하면 거기에 맞춰서 리뷰를 쓰면 됩니다. ^^

sprenown 2018-07-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쓰기도 결국은 글쓰기의 욕망,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책읽고 나서 느낀점과 생각을 남에게 보이면서 자기만족 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가끔씩 슬럼프가 오더라도 꾸준히 써야겠다는 마음이지만,현실적으로 먹고사는 일에 치이게 되면
이젠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가 강요하는게 아닌데...애정결핍인가? 이것도 중독성이 있더군요^^.

cyrus 2018-07-17 16:35   좋아요 1 | URL
저는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자기만족’, ‘인정 욕구’ 그리고 ‘자아 성찰’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족 또는 인정 욕구로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자기 자신의 결점을 글의 주제로 삼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어요. 이러한 글쓰기 또한 ‘인정 욕구’의 일종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지음, 에스터 레슬리 엮음, 김정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의 모든 것은 사진에 담긴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세계를 수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을 기록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하여 사진으로 찍어놓고 소유하고 싶은 게 사진 찍기의 본능이다. 그 본능을 사진가보다 더 잘 알았던 사람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위즈덤하우스, 2018)는 사진에 관한 벤야민의 글을 엮은 것이다. 이 책에 ‘사진 읽기’의 가능성을 예견한 『사진의 작은 역사』 외 5편의 짤막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벤야민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에스터 레슬리(Esther Leslie)가 6편의 글에 해제(解題)를 붙였다. 이 책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내용은 다소 복잡하다. 벤야민은 수집한 자료를 한데 몽타주(montage) 하듯 배치하면서 파편적인 것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새롭게 드러내는 작업에 천착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글을 썼다. 그가 남긴 글 대부분은 온갖 사료에서 발췌한 인용문으로 채워져 있고, 그것을 빼면, 인용문 사이사이에 끼어든 짤막한 논평이 전부다. 그런 형식상의 불완전성 때문인지 벤야민의 글은 해석하기 거의 불가능한 난해함으로 악명 높다. 다행히 이 책에는 에스터 레슬리의 해제와 상세한 주석이 있어서 벤야민의 사진론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벤야민은 수집가였다. 그는 사소하고 쓸모없는 사물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수집가의 능력이라고 했다.

 

 발터 베냐민에게 진짜 수집가의 특성이란 물건들에 의한 도취, 즉 소유에 앞서 영감을 받는 능력이다. “수집가는 물건을 손에 쥐자마자 벌써 그것을 통해 영감을 받는 것 같다. 물건을 통해 마법사처럼 그것의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 같다.”

 

(한병철, 《땅의 예찬》, 86쪽)

 

사진을 찍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특정한 지식을 새로 얻은 듯한 간접 경험을 하고, 그래서 특정한 힘을 얻은 듯 느낀다고 한다. 우리는 사진기로 마주치는 순간을 찍을 때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진은 단순히 순간의 현실성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 내면의 심상 혹은 발언의 주요 표현수단이 된다. 사진을 찍는 것이 ‘수집’의 과정이라면, 사진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수집한 것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벤야민은 사진 설명글이 ‘혁명적 사용 가치’를 만들 거로 확신한다.

 

 사진 설명글은 한창 잘 팔리는 사진으로도 혁명적 사용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사진가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은 자기가 찍은 사진에 그런 설명글을 붙이는 능력이다.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39쪽)

 

예전 사진은 보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촬영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요즈음 사진은 설명을 붙임으로써 사진의 다중적인 표층으로 인해 생기는 불필요한 오해를 제거하고 명확한 심층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제 사진은 보이는 것이 아닌 ‘읽히는 텍스트’다. 벤야민은 ‘사진으로 혁명하는 방법’으로 ‘사진 읽기’를 제시한다. 그는 사진을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해 발언하거나 사진 설명글을 통해 본다는 것에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기법인 포토몽타주에 주목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포토몽타주는 현실을 폭파한다. 사진과 글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포토몽타주는 사진 속 표층에 가려진 심층을 폭로하거나 표층으로 드러난 현실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한 장의 사진이 수십 개의 말보다 메시지 전달력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사진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진의 한계를 정확히 예언했다. 컴퓨터 합성, 연출, 도용 등의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사진은 진실을 감춘 채 허구를 전달한다. 또한 다른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마치 한 곳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대조적으로 사진 편집을 하거나 같은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해집단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상황을 표현한다.

 

사진을 오용하지 않으려면 사진을 보는 시선과 생각을 이동해야 한다. 사진의 의미가 피사체를 찍은 상황, 즉 표층을 넘어서 다른 의미(심층)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눈앞에 있는 이미지가 현혹하는 힘에 가려진 사회의 진실과 허위를 간파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사진이 사회 속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사진은 진실 전달과 진실 왜곡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벤야민은 사진이 우리 사화와 삶에 미치는 양면적인 영향력을 인식했다. 사진에 관한 벤야민의 글은 일상의 삶을 교란하는 ‘위험한 사진’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벤야민은 ‘미래에는 사진을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 문맹자’라고 했다. 이제는 사진을 오용하는 사람, 사진의 맹점을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 현실을 읽지 못하는 맹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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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3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3 17:07   좋아요 0 | URL
네. 벤야민은 예술, 특히 사진에 대해서 시대를 앞서 간 생각을 했고,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파격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어요. 미완성이 된 <파사주 프로젝트>는 정말 엄청난 결실입니다.

레삭매냐 2018-07-0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의 제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 이런
철학적 분석에 도달할 수 있는 저자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네요.

수집한 사진의 재구성 그리고 혁명적 사용
가치의 발견에까지... 대단합니다.

cyrus 2018-07-04 10:05   좋아요 0 | URL
벤야민은 사진의 예술적 가치, 그리고 사진이 우리 삶에 미칠 긍정적 · 부정적 영향력 등을 예견했어요. 사실 수전 손택, 롤랑 바르트는 벤야민에게 빚 졌다고 봐야 합니다.

suegraphic 2018-07-04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과 글이 함께있는 작품인가요? 저도 사진을 해서 궁금해지네요.

cyrus 2018-07-04 10:07   좋아요 1 | URL
책에 사진 몇 점 있는데,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에요. 19세기에 활동한 사진가들의 흑백 사진 작품이 있습니다.

suegraphic 2018-07-05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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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마음의 고향이다. 풍요로운 정원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삶에 지친 사람들은 정원에서 쌓인 피로를 훌훌 털어버린다. 정원은 또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닦는 곳이기도 하다. 땅을 파고, 화초를 심고, 잡초를 뽑는 것은 자연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노동이 주는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느낄 수 있다. 땅은 매우 현명하고도 관대하다. 땅은 아름다움의 영감과 생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평온하다. 정원 한가운데서 혼자 있는 기분과도 같다. 3년 동안 땅을 일구며 ‘비밀정원’을 완성한 철학자의 기록을 담은 이 책의 분위기가 그렇다. 《땅의 예찬》(김영사, 2018)은 땅과 식물이라는 자연의 연결고리에 향한 열렬한 사랑을 담은 책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정원을 자연과 인생이 어우러진 평화와 사색의 공간으로 가꾸고 싶어 한다. 정원 일을 하면서 철학을 접목한 그의 이야기는 정원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정밀한 사유의 깊이를 보게 된다. 저자는 시간, 행복, 세계의 디지털화, 죽음 등에 대해 명상한다. 아네모네, 미선나무, 크로커스, 옥잠화 등의 살아있는 존재들의 다양한 모습을 써 내려 간 대목에서는 자연의 솔직함이 묻어 있다. 저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화하고 성장하는 정원의 비밀을 거울에 비추며 땅의 신비로움, 아름다움, 고귀함의 품격을 보여준다.

 

저자는 땅과 식물로부터 삶의 철학을 배운다. 저자는 정원을 가꾸면서 땅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갈망을 느낀다. 그에게 정원 일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소중한 과정이다.

 

 

 나는 자주 놀라워하며 땅[흙, 지구]을 만지고 쓰다듬는다. 땅에서 나오는 모든 싹은 진짜 기적이다. 차갑고 어두운 우주 한가운데 지구와 같은 생명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보통은 생명이 없는 우주에서 우리는 작지만 꽃이 피어나는 행성에 산다는 것, 우리가 행성의 존재라는 것을 늘 의식해야 한다. [중략] 오늘날 우리는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한다. 고작해야 이나마 유지해야 할 자원으로만 여긴다. 땅을 보호한다는 것은 당에 그 본질을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31쪽)

 

 

저자에게 있어서 정원을 가꾸는 일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바라보는 사적인 행위다. 그가 정원에서 명상하고 글을 쓰는 일은 그 내면세계에서 발견한 진리, 잔인하게 착취하고 파괴된 땅을 다시 살리려는 시도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땅은 ‘행복’의 동의어이다. 한병철은 이미 여러 차례 ‘디지털 세상’을 진단하고 비판했다(《투명사회》,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 2016)에서 그는 숫자로 이루어진 디지털 문화로 인해 사람들이 지향하고 원하는 것들이 공통으로 ‘매끄러움’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매끄러움’이 관통하는 디지털 세상은 비밀과 저항을 없앤다.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디지털 세상에 남과 비슷한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고 ‘좋아요(like)’를 많이 받길 원한다. 무한정한 자유가 결국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폭력이 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개인의 자기착취를 유도하는 ‘디지털 권력’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자기 착취의 노동자’를 ‘자연(땅) 착취’의 함정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우리 스스로 행복을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생명이 있는 곳엔 그 어디든지 아름다움의 비애가 있다. 아끼던 화초가 죽어 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하는 순간이 있다. 정원보다 더 심오하게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 그 소멸의 주기를 보여 주는 게 있을까? 하지만 정원사는 영원한 성장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정원을 잠재우고 있을 때도 봄이 되면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안다. 정원을 사랑하는 한병철에게 흙을 만지는 일은 연애, 노동, 성찰이다. 《땅의 예찬》은 정원에서 그가 자연을 만나 사랑하고 일하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내밀한 기록이다.

 

이 책의 '옥에 티'꽃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지식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오독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문장)이다.

 

 

부용은 한국의 국화(國花)다. 한국어로는 무궁화. (101쪽)

 

 

부용은 무궁화와 비슷하게 생긴 꽃이다. 부용과 무궁화는 쌍떡잎식물 아욱목에 속하는 식물이지만, 학명이 다르고 생김새에 약간 차이가 있다.

 

 

 사프란 꽃 한 송이를 꺾어서 보드리야르의 책 《유혹에 대하여》에 꽂아두었다. 겨울밤 사프란 크로커스는 그 자체가 유혹이다. 138쪽과 139쪽에 아름다운 꽃모양이 찍혔다. 다음의 구절들이 사프란 색깔을 입었다.

 

 모든 범죄도 그렇지만 유혹의 과정에도 무언가 비개인적인, 어딘지 제의적(祭儀的)인, 주체를 넘어선, 초감각적인 요소가 있다. 현실에서 유혹자나 그 희생자의 체험은 그런 요소의 무의식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형식의 주체들이 소모되어 없어지는, 그런 형식의 제의적 연습. 그래서 전체는 미적 작품의 형태와 아울러 제의적 범죄의 형태를 포함한다.

 

 아름다운 소녀의 유혹하는 힘, 그녀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유혹자의 인위적인 연극론과 전략에 의해 희생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심리학, 영혼, 주체성 등이 없이 나온 유혹자의 기술이 아름다운 소녀의 자연적인 유혹하는 힘을 이긴다. 유혹자는 유혹의 제의(祭儀) 과정에 자신을 바친 사제다. (119~120쪽)

 

 

‘아름다운 소녀의 유혹하는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희생되고 파괴되어야 할까? 왜 나는 ‘아름다운 소녀의 유혹하는 힘’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순수한 모습으로 남성을 유혹하는 ‘롤리타(Lolita)’ 이미지가 생각나는 걸까? 아무튼 이 문장은 계속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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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0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시화 시인이 발견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정원사가 있으면 정원이 있다’ 고, 정원이 있고 정원사가 있는 게 아니고...즐거운 한주 시작하세요!

cyrus 2018-07-02 17:17   좋아요 0 | URL
정원사가 없는 정원에는 잡초가 많아질 거예요. 그만큼 정원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

2018-07-02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2 17:17   좋아요 1 | URL
정원을 잘 가꾸셔서 정원의 세계를 담은 사진집 한 권 내셔요. ^^

레삭매냐 2018-07-0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쌩뚱맞지만 최근 읽고 있는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에 나오는 서구의 도전과 아시아의 응전
이라는 도식이 떠오릅니다.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서구의 그것
과 자연동반 혹은 친화적인 동양의 아이디어
차이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런지요.

그나저나 부용이 한국의 국화라는 말은 정말
처음 들어 보네요.

cyrus 2018-07-02 17:24   좋아요 0 | URL
<땅의 예찬>에서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서구 중심적 시각에 대한 저자의 비판의식이 드러나 있지 않아요. 땅을 소중히 여기자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했습니다만, 자기 성찰에 골몰하는 것 같아서 뭔가 아쉬운 느낌이 많았습니다. ‘부용은 한국의 국화’라는 문장을 보자마자 저는 무궁화와 부용이 같은 꽃인 줄 알았어요. ^^;;

카스피 2018-07-0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도시에서는 정원란 말을 이제 더이상 듣기 힘든것 같아요.제가 살던 곳도 요 몇년새 작은 마당(혹은 정원)이 있던 단독주택들이 모두 빌리로 바뀌더군요ㅜ.ㅜ

cyrus 2018-07-03 06:56   좋아요 0 | URL
옥상에 작은 텃밭이나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미세먼지의 양을 생각하면 옥상 텃밭도 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
 
중세의 미학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손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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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자신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을 완성하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중세를 생생하게 구축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도서관에 파묻혀 지냈다. 에코는 그곳에서 방대한 분량의 중세 자료를 뒤적거렸다. 중세 수도원의 내부 구조를 정확하기 묘사하기 위해 건축 공부도 새롭게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종이가 아깝지 않은 작가의 치열한 예술혼이다. 그런데 《장미의 이름》 원고를 읽은 편집자들은 소설의 시작부가 너무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에코에게 충고 비슷한 제안을 했다. 소설의 시작부에 해당하는 100쪽을 줄이는 게 어떻겠냐고. 에코는 그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그들에게 낯선 수도원에 일주일 동안 묵을 작정을 한다면 그 수도원 자체가 지닌 행보(行步, pace)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코가 말한 ‘행보’는 무슨 의미인가. 소설 읽기를 ‘등산’에 비유한 에코의 말을 살펴보면 행보가 무얼 뜻하는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호흡법을 배우고,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게 낫다.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64쪽)

 

 

어떠한 목적지에 다녀오기 위해 걷는 것을 행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독자는 《장미의 이름》을 읽기 위해선 반드시 이 ‘목적지’를 다녀와야 하는데, 독자가 가야 할 ‘목적지’가 바로 《장미의 이름》의 무대인 중세 수도원이다. 수도원 내부 구조, 수도원의 규율 그리고 그곳에서 사는 수도사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는 당대를 반영하는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장미의 이름》을 완독하려면 중세 문화 및 사상을 익혀야 한다. 사전 준비 없이 소설 읽기에 도전하면 시작부터 막히게 된다.

 

에코가 26세 때 쓴 《중세의 미학》(열린책들, 2009)중세를 향한 행보를 익히는 데 유용한 기준점과 같은 책이다. 에코는 암흑의 천막에 가려진 중세의 시대를 열어젖혀 고전 시대(고대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낸 중세인들의 미적 감수성을 소개하고 있다. 흔히 중세는 ‘암흑시대’로 알려져 있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수도원에 대해서는 세상과 단절된, 폐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깜깜한 시대로 대변되는 중세는 ‘근대’의 눈으로 본 것이다. 근대인이 덮어씌운 암흑의 천막을 벗긴 중세는 ‘생기 넘친 감각적 세계’였. 그동안 우리는 중세를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고전 시대의 미학을 물려받은 중세인들은 비례와 조화로 어우러진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했다. 비례는 아름다움의 수학적 증명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가 제시하고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확립한 비례는 균제 즉 조화라는 미적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 교회의 유리창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가장 오묘한 빛을 내는 유리로 만들어진다. 중세 신학자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공식으로 ‘빛과 색깔’을 강조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자연의 빛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최고 수준의 기법으로 발전했다. 성서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한 교부와 신학자들은 ‘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으며 그 세계 속에 숨겨진 신의 섭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한 신의 섭리를 알레고리(Allegory)란 형식으로 표현했다. 알레고리는 설명할 수 없는(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신학 지식을 신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중세는 종교적 권위의 결별을 선언한 근대가 도래하면서 점점 균열하기 시작했다. 인문주의자들은 부패한 세속 교회를 무너뜨리고, 수도원의 지식 독점을 해체하기 위해 신학과 스콜라 철학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들에게 신학과 스콜라 철학은 신의 권위가 막강했던 중세를 대표하는 학문이다. 신학과 스콜라 철학이 반영된 중세 미학은 한때 서구 지성사의 반열에도 끼지 못했다.

 

에코는 중세 미학을 불러들이면서 중세에 대한 복권도 시도한다. 과연 중세는 엄격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한 청교도적인 시대였는가에 대해 에코는 회의한다. 고전 미학은 중세 고유의 학문과 종교를 통해 여러 차례 수정되다가 미적 수준을 갖춘 중세 미학으로 발전했다. 중세인의 미적 전통은 고전 문화의 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중세인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중세 미학은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중세의 미학》은 역사에서 중세와 근대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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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02 17:16   좋아요 0 | URL
현재에 있는 사람은 과거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잘 봐요. 지금 우리도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된다면 ‘현재’에 있는 사람(우리 시점에서는 그들은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죠)들은 우리의 단점을 가지고 평가할 것입니다.. ㅎㅎㅎ 문득 미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네요.

레삭매냐 2018-06-0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중세는 근세/르네상스의 도래로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일단 중세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살펴 보기 위해서
는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부터 읽어야 하는데...
항상 생각만 하도 실천에 옮기질 못하고 있네요.

<장미의 이름>도 이번에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
문트>를 읽다 보니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cyrus 2018-06-02 20:50   좋아요 0 | URL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중세와 관련이 있나요? 레삭매냐님이 <장미의 이름>을 읽고 싶어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우주지감 쌤들이 오전에 인문학 책 읽기 모임을 해요. 5월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어서 완독했고요, 이번 달부터 읽게 될 책이 단테의 <신곡>입니다. 이 책도 중세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