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 반철학사 3
미셀 옹프레 지음, 곽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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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자는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인간 개개인이 가진 덕()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법과 정치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 에피쿠로스도 인간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말하는 행복은 쾌락이었다. 그는 방종한 생활 같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금욕을 통한 정신적 쾌락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절제된 쾌락을 강조했지 육체적 쾌락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쾌락을 많이 추구하면 더 큰 쾌락을 양산하기 때문에 결국 정신적 고통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대부분 사람은 쾌락주의(hedonism)를 향락과 개인적 안위의 삶을 살라고 선동하는 철학으로 오해한다.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음란하고 불순한 사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에피쿠로스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통해 미신의 현혹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자연 현상을 신들의 행위로 인식하던 당대의 관념에 비추어 보면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다. 이런 관점은 바로크 시대(Baroque period)의 자유사상가(libertins)로 이어진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은 서양 철학사에 잘 언급되지 않은 17세기 자유사상가 5명과 당대 자유사상가의 정신을 이어받은 유명한 철학자 1명을 소개한 책이다. 유명한 철학자 1은 세계가 곧 신이며 정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했던 스피노자(Spinoza). 스피노자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 피에르 샤롱(Pierre Charron), 프랑수아 라 모트 르 베예(François de La Mothe Le Voyer), 샤를 드 생 테브르몽(Charles de Saint-Évremond),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철학자이다. 사실 시라노는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의 희곡 덕분에 코가 큰 추남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시대를 앞서간 책을 쓴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무신론자, 유물론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철학사라는 작업을 통해 주류 중심 철학에 밀려나 잊힌 과거 사상가들을 호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씌워진 케케묵은 편견까지 털어내어 그들이 살아온 삶과 사상을 보여준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반철학사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자유사상가는 인간의 개인 의지를 강조하여 기독교의 교조적인 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렇다 보니 자유사상가를 무신론자로 보는 입장이 생겼고, 그들의 도발적인 생각은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하여 배척받았다. 그런데 무신론자 옹프레는 자유사상가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피에르 샤롱과 라 모트 르 베예, 생 테브르몽은 신앙절대주의자 또는 이신론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영적인 힘, 천국과 지옥 같은 개념을 비판한 사상)였다. 가상디는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친 유신론자였다. 시라노와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였다. 17세기는 전쟁과 종교 분쟁으로 혼란이 거듭했던 시대였는데, 자유사상가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군주제가 유지되면 사회적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바로크의 자유사상가 각자가 지향하는 관점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당대 시대적 흐름을 타고 등장한 학자들이었다.

 

바로크는 불완전한 진주(완벽하게 둥글지 않은 진주)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이다. 바로크 문화는 파격, 불규칙, 변화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바로크 시대의 자유사상가는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정형적인 기독교 정신을 의심한다. 성경 중심의 신앙을 실천하는 신학자나 기독교인 입장에선 자유사상가의 등장이 달갑지 않다. 그래서 그들을 과장되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인간으로 바라보면서 공격했다. 주류 학자들은 무신론과 거의 흡사한 자유사상가들의 생각을 거부했다. 자유사상가를 무신론자로 취급하면서 그들의 존재감은 서서히 잊히고, 서양 철학사에 그들의 이름조차 볼 수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피에르 샤롱을 몽테뉴(Montaigne)수상록을 표절한 얼치기로 평가했고, 가상디가 과학적 관찰을 중요하게 생각한 천문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은 인간을 위한 철학을 강조한다. 그들이 보는 신은 인간의 이성이나 육체에 개입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에 무관심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적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사상가들은 기독교적 신이 중심이 되는 사회 한가운데서 인간이라면 직접 스스로 해야 할 질문들을 화두로 던졌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좀 더 인간답게살 수 있을까? 현재는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쾌락이라고 말하지만, 자유사상가들이 지향하는 자유는 자발적 행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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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시작해서 3주 동안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나남, 2010)를 읽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4년에 나온 2판이다. 2판의 부제목은 '앎의 의지'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6권으로 펴낼 계획을 세웠다. 1976년에 1앎의 의지가 나왔고, 2쾌락의 활용(나남, 2018)3자기 배려(나남, 2004)[1]는 푸코 사후(1984)에 출간됐다. 푸코는 자신이 쓴 원고가 사후에 출판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한다. 푸코의 친필 원고는 그의 연인이었던 사회학자 다니엘 데페르(Daniel Defert)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2012년에 푸코의 친필 원고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학자들은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친필 원고를 정리할 수 있었고, 올해 초에 4육체의 고백이 공개됐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나남출판, 2010)

     

 

성의 역사푸코의 말년을 대표하는 역작이다. ‘이성권력의 관계에 천착해 온 푸코의 작업을 이해하지 않은 채 성의 역사독서에 도전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앎의 의지성의 역사시리즈의 서문에 해당한다. 2백 쪽이 되지 않은 서문(2판 번역본은 177쪽이다)이라고 해서 얕보다간 큰코다친다.

    

 

 

 

 

 

 

 

 

 

 

 

 

 

 

 

 

 

 

 

 

 

 

 

 

 

 

 

* 하상복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김영사, 2009)

* [절판] 요하나 옥살라 HOW TO READ 푸코(웅진지식하우스, 2008)

* 양운덕 미셸 푸코(살림, 2003)

* 피에르 빌루에 푸코 읽기(동문선, 2002)

    

  

푸코는 1981년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Libération)>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 작업을 자서전의 한 일부라고 말했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푸코는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병리학적 증상으로 제조되는 과정과 그 원인을 알려고 했다. 그에게 연구 작업은 자신의 온전한 삶을 찾아내 자기 역사로 새롭게 기록하는 일이었다. 푸코는 정신병을 바라보는 학계의 다양한 시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광기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권력의 실체를 추적한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

    

 

 

1961년에 발표된 푸코의 박사 학위 논문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광기가 정신병으로 분류되는 역사를 다룬 책이다. 근대는 미치광이를 이성이 상실된 자로 규정했다. 근대 이전에 살던 미치광이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합리적 이성과 과학이 버무려진 계몽의 시대’, 즉 근대 사회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광기를 본격적으로 차별하고 탄압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푸코에 따르면 광기가 결정적으로 정신병으로 판정되기 시작한 것은 1656년에 세워진 대감호였다. 한센병(나병, 문둥병)이 사라진 후 환자 수용소는 정신병자들을 가둬놓는 대감호로 탈바꿈한다. ‘이성이 상실된 자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광기는 동물성을 상징하게 되고, 미치광이는 동물 또는 괴물로 취급받는다. 그리하여 미치광이는 정신병자라는 이름으로 추방되고, 축출되며, 격리되어, 감시되며 처벌을 받는다. 푸코는 광기를 탄압하는 주동자로 서구 사회의 이성을 지목한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해 온 인류는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며 사회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켜나갔다. 그러나 자유사상, 평등 이념과 맥을 같이한 근대의 이성은 이성과 반대되는 존재를 배척했다. 푸코는 자유‘해방의 편에 섰던 이성 중심주의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나남출판, 2016)

    

 

 

권력에 맛을 들인 근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힘을 휘두른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나남출판, 2016)에서 상세하게 보여준 것처럼 근대의 권력은 효율적으로 죄수를 통제해왔다. 개인은 공간적으로 구획돼 감시되고, 시간상으로 일과표에 의해 통제되면서 권력에 예속된다. 감옥, 군대, 병원, 학교는 만인을 감시하는 근대적 공간이다.

 

푸코가 성 담론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펴낸 책이 바로 성의 역사. 섹스(sex)에 대해 말하도록(고백하도록) 부추기는 권력은 성 담론을 확산시킨다.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근대 이전에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 성찰의 목적으로 성욕에 대해서 고백했다. 17세기 이후에 부르주아 사회가 되면서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성의 장치가 작동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식을 위해서 필요한 섹스와 그렇지 않은 섹스(동성애, 사도마조히즘)를 분류하는 성 지식이 등장한다. 생식과 무관한 일탈적 성욕 또는 성행위는 교정 대상이 된다. 푸코는 성 담론이 형성된 근대를 증가의 시대로 보았으며 이때부터 성적 도착이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근대사회가 섹스를 억압한 시대였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설로 설정하여 비판한다. 푸코가 생각하는 근대사회의 섹슈얼리티는 성을 검열하고 억압하는 분위기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권력이 만든 성의 장치는 성을 알고 싶고, 말하고 싶은 근대인의 욕망을 촉진했다. 감옥, 병원, 그리고 국가는 거대한 성의 장치이다. 성 담론 형성에 관여하는 의사, 정신의학자는 이성애혼인등의 기준에 어긋난 섹슈얼리티를 분류하는 지식-권력(pouvoir-savoir)을 가지고 있다. ‘지식-권력은 관찰과 감시가 은연중에 작동되는 사회를 만들어 개인의 생활과 섹슈얼리티를 극도로 제한한다. ‘지식-권력은 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이다.

    

 

 

 

[] 알라딘에 성의 역사’ 3권을 검색하면 부제목이 자기에의 배려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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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 - 억눌리고 은밀하게 숨겨진 우리 내면의 악의 본능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문신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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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한 남자가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갇혀 지낸 세월이다. 그는 여성을 유괴해 채찍으로 때리고 그 상처에 촛농을 떨어뜨리는 등 가학 행위를 저질러 감옥에 갔다. 이미 그는 매춘부를 고문하고 학대한 죄로 투옥된 적도 있었다. 남자는 수차례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섹스를 즐겼으며 자신의 끔찍한 경험들을 책으로 남겼다. 그의 책은 모두 금서로 지정되었다. 당시 그의 이름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 남자의 이름은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 그의 이름은 지금도 ‘사디즘(sadism)이라는 용어 속에 남아 있다. 사디즘은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는 변태성욕, 즉 도착증의 한 형태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쓴 소설가 D. 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는 ‘추악한 사랑은 신이 인류에게 준 최고의 장난’이라고 말했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도착증이 숨어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감추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 쾌락을 느끼기 위해 이성과 욕망의 세계를 오간다. 도착증은 소수의 변태가 일으키는 이상 행동이 아니다.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도착증은 우리가 끊임없이 감추려고 하는 어두운 내면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이끈 파리 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인 정신분석학자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Elisabeth Roudinesco)는 이성과 도덕을 넘어선 도착증의 기원을 추적한다. 중세 시대 기독교에서 모든 성적 쾌락을 죄로 여기기 전까지 육신의 고행에서 비롯된 성적 쾌락은 정신적 해방을 주는 실천 행위였다. 수도사들은 스스로 육체를 훈육하고 통제하는 극단적인 고행(금식, 채찍질, 오물 삼키기)을 통해 각종 욕망으로부터 정화되어 영적 깨달음과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계몽주의의 시대가 오면서 도착증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과학자들의 분류가 대중의 의식에 침투했다. 과학은 ‘이성’이나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자위, 남색, 사디즘, 마조히즘(masochism)을 즐기는 개인들을 ‘변태’로 낙인찍는다. 루디네스코는 개인의 성적 욕망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아붙여서 병리적인 증상으로 만드는 지식의 권력도 도착적인 억압이라고 주장한다.

 

도덕적 명령으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억누르게 했던 권력은 인간성을 심각하게 짓밟는 도착적 상황을 연출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Birkenau)는 ‘도착적 공간’이다. 이 끔찍한 공간 속에서 일어난 나치즘(Nazism)의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국가의 이성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타락하게 만든 도착적인 범죄이다. 놀랍게도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살인마들은 ‘정상적인’ 인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학살 행위를 부정하거나 아무런 악의적 동기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 즉 ‘평범한 악(banality of evil)’을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범죄 의도가 없었고, 과격한 나치주의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었다.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듯이 도착적인 심리도 평범한 모습이다. 루디네스코가 갈파했던 ‘평범한 도착(倒錯)’은 불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정도를 크게 벗어난 범죄 수준의 경우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의 도착증은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잠자는 욕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평범한 욕망을 통제하고 제거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역설적으로 개인의 도착증을 근절시키겠다는 국가의 거국적 담론은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면서 인간행동을 억압하고 통제했다. 심지어 누구를 살게 하고 누구를 죽게 할 것인지를 정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도식이 만들어진다. ‘평범한 도착’보다 더 위험한 것은 가해자의 폭압을 폭압으로 느끼지 못하는 도착적인 사회이다.

 

 

 

 

 

※ Trivia

 

번역이 썩 좋지 않다. 아마도 원서의 문장을 직역해서 그런지 호흡이 긴 문장이 많은 편이다. 독자를 지치게 만드는 원인이다. 107쪽에 독일의 정신의학자 크라프트에빙(Kraft-Ebing)의 저서 『Psychopathia Sexualis』(1886)의 제목을 ‘성적 사이코패스’라고 번역했다. ‘Psychopathia’는 ‘정신병리’ 또는 ‘정신병질’을 뜻한다. 사이코패스(Psychopath)반사회적 인격장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크라프트에빙이 자신의 책에 다룬 ‘정신병리’에는 동성애, 사디즘, 마조히즘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성애에 위반하는 섹슈얼리티를 병리적인 변태성욕으로 정의했을 뿐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인격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물론, 독일어 사전에 있는 ‘Psychopath’도 ‘정신병리’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정신병질 환자 모두 사이코패스라고 볼 수 없다. 크라프트에빙이 정신병질 증상으로 분류했던 동성애가 오늘날에는 정상적인 성적 지향으로 인정받았다. 동성애가 부도덕한 성적 지향이라고 해서 사이코패스라고 단정할 수 없다. 크라프트에빙의 책 제목을 ‘성적 사이코패스’라고 번역해서 소개한다면 완전히 폐기 처분해야 할 성소수자에 대한 구시대적 편견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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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0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20 23:26   좋아요 0 | URL
돈이 많으면 일단 책을 최대한 많이 보관할 수 있는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원하는대로 책을 사고 싶습니다.. ㅎㅎㅎ

오늘 페미니즘 모임에 욕망에 관한 얘기가 나왔어요. 제 욕망의 대상이 책이라고 말했는데 멤버들은 욕망이 너무 건전하다고 말하더군요.. ^^;;

레삭매냐 2018-08-2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어딘가에 사두고 읽지 못하고
있는 책 중의 하나네요.

제목부터 참 거시키하여서 ㅋㅋㅋ

cyrus 2018-08-20 23:28   좋아요 0 | URL
잘 보관해두세요. 번역은 좋지 않지만, 주제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십 년 전에 나온 책이라서 언제든지 절판될 수 있어요. ^^
 

 

 

 

헤르메스(Hermes)는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전령이다. 날개 달린 모자로 유명한 그는 유창한 능변으로 신의 소식을 인간에게 해석해 준다. 그래서 헤르메스에서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말이 나왔다. 헤르메스의 로마식 이름은 메르쿠리우스(Mercurius)다. 영어로는 머큐리(Mercury)라고 한다. 수성은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행성이다. 수성은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고, 1초에 48㎞의 공전 속도로 행성 중에 가장 빨리 움직인다. 신의 소식을 빨리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수성에 ‘머큐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머큐리는 수은을 뜻하기도 한다. 연금술사들은 수은이 ‘빠르게 흐르는 은’이라고 생각했다.

 

 

 

 

 

 

 

 

 

 

 

 

 

 

 

 

 

* 헤르메스 호 트리스메기스토스 《헤르메티카 Hermetica》 (좋은글방, 2018)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 [절판] 앨리슨 쿠더트 《연금술 이야기》 (민음사, 1995)

* 안드레아 아로마티코 《연금술 : 현자의 돌》 (시공사, 1998)

* 쿠사노 타쿠미 《도해 연금술》 (AK커뮤니케이션즈, 2010)

* 하니 레이 《도해 근대마술》 (AK커뮤니케이션즈, 2012)

 

 

 

헤르메스는 연금술사의 신이기도 하다.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알려진 뱀의 지팡이(지팡이에 두 마리의 뱀이 엉킨 모습)는 치유와 독, 건강과 질병, 연금술의 용해와 응고 등과 같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의 힘을 상징한다. 연금술사들은 ‘현자의 돌’을 얻기 위해 수은과 유황을 추출한다. 이 두 가지 물질은 ‘현자의 알’이라는 밀폐된 구형 플라스크에 담는다. 플라스크에 헤르메스의 도장을 찍는다.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여 전설상 인물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Hermes Trismegistos, 약칭 ‘트리스메기스토스’)를 ‘연금술의 시조’로 추앙했다. 이런 신비주의적 학문을 ‘헤르메스 사상’이라고 부른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삼중으로 가장 위대한 자’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하는 연금술은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 알렉산드리아에서 크게 발달했다. 알렉산드리아로 온 그리스인들은 고대 이집트의 신 토트(Thot)와 헤르메스를 동일시했다. 토트 역시 헤르메스처럼 지혜로운 신이었으며 신들의 서기(書記)였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거의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신으로 알려지게 되고, 그가 3226년 동안 지상에 군림하면서 36525권의 책을 썼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파괴되어 사라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썼다고 하는 42권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헤르메티카》는 기원전 3세기경에서 기원후 3세기경에 익명의 저자가 쓴 책이다. 이 문헌이 손실된 헤르메스 문서와 관련되어 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헤르메스 문서의 일부로 알려지게 되면서 연금술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플로티노스, 조규홍 역 《엔네아데스 (천줄 읽기)》 (지만지, 2015)

* [절판] 플로티노스, 조규홍 역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 선집》 (누멘, 2009)

* 조규홍 《플로티노스 :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전달한 사상가》 (살림, 2006)

 

 

 

 

《헤르메티카》는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자신의 친아들 타트(Tat)와 제자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에게 가르침을 전수하는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반인반마 종족(Centaur, 켄타우로스)인 케이론(Chiron)에게 의술을 배워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트리스메기스토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헤르메티카》는 총 열네 권이다. 제15권은 남아있지 않고, 제16권부터 18권까지는 아스클레피오스가 썼다. 보통 연금술은 마법, 비밀 의식, 신비주의와 같은 의미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르메티카》는 각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신비주의와 고대 점성술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철학도 반영되어 있다. 《헤르메티카》의 알쏭달쏭한 글 속에 플로티노스(Plotinos)신플라톤주의, 피타고라스주의와 연관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아스클레피오스여, 신 이외에 그 무엇도 선하지 않으니 신 자체가 항상 선이라. 그런즉 선은 모든 운동과 생성의 실체로다. 선이 가진 에너지는 정지된 상태요 부족함도 넘침도 없으며 지극히 완전하나니, 모든 필요를 채우는 원천이요 만물의 원인이로다. 만물의 공급자가 곧 선이니, 그는 완전하며 항시적인 선이로다.

 

(《헤르메티카》 제6권, 61쪽)

 

 

헤르메스 사상에 심취한 연금술사들은 신이 만든 우주와 이 세상의 모든 물질 전부 단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즉, 모든 물질의 기본은 ‘제1질료’라 할 수 있다. 이 ‘제1질료’가 물질의 형태를 바꿀 수 있으며 훗날 연금술의 기본 원리가 된다. ‘제1질료’ 개념은 플로티노스의 ‘하나(hen)’ 개념과 유사하다. 플로티노스는 세계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로 시작되어 샘물이 솟아 흐르듯이 다양한 존재, 즉 만물이 생성한다고 봤다. 이처럼 세계의 생성 과정을 물의 흐름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플로티노스의 주장을 ‘유출설’이라고 한다. 플로티노스를 위시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 철학의 본질을 ‘신학’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신학은 이 세계 존재 원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이었다.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성직자들은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빛에서 신성(神性)을 찾으려고 했다. 빛은 곧 ‘선(善)’을 의미했다.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현상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그들의 생각과 시도는 현실과 동떨어졌지만, 때론 신비스러운 현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학문 사상의 발전을 앞당기기도 했다. 《헤르메티카》는 연금술과 고대 철학의 관계를 이루는 접점을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문헌이다. 사실 연금술사들은 자신을 현자, 즉 ‘철학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연금술 문서를 해독하여 궁극의 불로장생약인 ‘현자의 돌’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문서를 잘 읽어보면 ‘현자의 돌’과 같은 문장을 찾을 수 있다. 그 문장에 고대 철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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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 학문의 대표선수는 바로 신학이었죠.

그외의 학문들은 곁다리 수준이랄까요.

근대 인문과학의 기수들도 여전히 중세인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걸 까요.

금을 만들겠노라는 연금술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쓴 걸 보면 말이죠.

cyrus 2018-07-20 18:08   좋아요 0 | URL
천재인 뉴턴도 평생 연금술에 매달렸어요. 연금술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게 그들의 작업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에요.
 
리뷰 쓰는 법 - 내가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낀 것의 가치를 전하는 비평의 기본기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박숙경 옮김 / 유유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그때부터 의미를 캐내고 전달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독서는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리뷰 쓰기는 독자의 독서 체험을 공유하게 해주고 다양한 관점에서 책을 읽게 해준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아름다운 말로 상찬하는 리뷰도 좋지만, 가차 없이 비판하는 리뷰를 읽는 재미에 견줄 바가 아니다. 주로 전업 작가, 기자, 도서평론가들이 쓴 리뷰를 ‘서평’이라고 부른다. 리뷰 쓰기는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고 글쓰기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오랫동안 언론매체나 학술지에 실린 리뷰를 ‘서평’이라 부르고, 서평을 쓰려면 전문 작가나 사회적 명사여야 한다는 ‘장벽’이 있었다. 그렇다면 일반 독자는 서평을 쓸 수 없는 걸까? 독자 리뷰를 서평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리뷰를 즐겨 쓰는 독자들은 자신이 쓴 글에 큰 의미(리뷰도 ‘서평’이다)를 부여하지 않는다. 책을 소신껏 소개한 리뷰를 썼는데도 독자라는 위치 때문에 ‘내 리뷰도 서평이다’라고 말을 꺼내지 못한다.

 

리뷰는 무엇보다 독자를 위해서 쓴 글이다. 그런데 그 독자는 누구인가? 리뷰에 소개되는 책의 성격에 따라서 글쓴이가 상정한 독자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독자를 위한 리뷰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써진 리뷰의 효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는 리뷰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리뷰와 서평의 공통점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독자도 ‘서평’이라 불릴만한 리뷰를 쓸 수 있다. 《리뷰 쓰는 법》리뷰와 서평을 가르는 장벽을 허무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가와사키 쇼헤이가 추구하는 리뷰의 목표는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극히 원론적이고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책의 등장에 압도당하기 쉬운 지금이야말로 ‘가치를 전달하는 리뷰’가 필요할 때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오늘날이야말로 리뷰가 온전하게 힘을 발휘하여 ‘좋은 책’을 돋보이게 한다.

 

리뷰를 쓸 때 ‘재미있다’, ‘재미없다’, 또는 ‘좋다’, ‘나쁘다’라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책을 평가한다면 책의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 이런 리뷰는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가치를 전달하는 리뷰’를 쓰려면 객관적으로 책의 내용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책 어디가 재미있는지를 알려주고, 왜 재미없는지를 따져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글쓴이는 리뷰를 쓰면서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를 위해 ‘지침’을 제공한다. 리뷰는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책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알린다. 쇼헤이는 ‘비평으로서의 리뷰’의 성격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비평’이라는 단어도 많이 보인다. 그렇다면 리뷰도 비평인 셈이다. 저자가 비평 쓰기를 알려준다고 해서 일반 독자가 생각하는 리뷰 쓰기와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리뷰와 서평은 다르다’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의 가치를 발굴하여 그것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글쓰기 과정은 비평 쓰기의 원점이다. 따라서 리뷰가 비평과 같은 글이라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책을 명확히 관찰하면서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그 책이 담고 있는 시대적 · 문화적 가치를 전달한다면 일반 독자가 쓴 리뷰도 ‘서평’이라 부를 수 있다.

 

책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시대인데도 자연스럽게 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온 · 오프라인 공간은 여전하다. 그러나 리뷰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쯤으로 취급당한다. 독자들은 굳이 일반 독자가 쓴 리뷰를 찾아 읽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에 독자 리뷰는 넘치지만, 그것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여전히 리뷰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뷰 쓰는 법》은 리뷰의 역할과 가치, 그리고 누구나 리뷰를 쓸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리뷰 쓰는 법》을 읽으면 리뷰와 서평의 의미를 더욱 잘 알게 된다. 《리뷰 쓰는 법》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면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고, 책을 소비하는 독자들과 상호 소통하는 기회가 많아진다. 리뷰는 누구나 책을 읽고 자유롭게 논하는 독서 문화를 고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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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7 16:21   좋아요 0 | URL
아마추어도 전문가 뺨치는 독후감을 쓸 수 있어요. ‘리뷰, 서평은 전문가가 쓰는 것’, ‘독후감은 일반 독자, 아마추어가 쓰는 것’이라는 단순 이분법적 생각에 반대합니다.

stella.K 2018-07-16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같은 리뷰 쓰기의 대가가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게 넌센스야.
근데 난 좀 읽을 필요가 있는 것 같긴 해.
점점 리뷰 쓰는 게 자신없어지고 있어.
리뷰에는 채찍을 필요없고 당근이 필요한데 당근을 주는 곳이 없구나.ㅠㅋ

cyrus 2018-07-17 16:22   좋아요 0 | URL
리뷰를 매일 쓰다보면 ‘어떻게하면 더 잘 쓸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써보려고 해요. ^^

레삭매냐 2018-07-16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 서평 - 독후감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 진다고나 할까요.

자기 만족적인 글쓰기 만으로도 독후감
쓰기의 매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리뷰는 ‘나만의 방식‘으로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부담 없이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cyrus 2018-07-17 16:2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독후감에도 책을 평하는 글쓴이의 관점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독후감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독후감을 쓸 때 느낀 점을 쓰라고 가르치지, 책을 비판하는 입장을 쓰지 못하게 해요. 책을 비판하는 생각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잖아요. 비판적 감상문도 ‘나만의 방식’으로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글쓰기라고 생각해요. ^^

짜라투스트라 2018-07-1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저자만의 리뷰론으로도 볼 수 있겠네요^^

cyrus 2018-07-17 16:30   좋아요 0 | URL
네, 사람들마다 리뷰의 정의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이가 생각한 리뷰의 정의에 공감하면 거기에 맞춰서 리뷰를 쓰면 됩니다. ^^

sprenown 2018-07-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쓰기도 결국은 글쓰기의 욕망,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책읽고 나서 느낀점과 생각을 남에게 보이면서 자기만족 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가끔씩 슬럼프가 오더라도 꾸준히 써야겠다는 마음이지만,현실적으로 먹고사는 일에 치이게 되면
이젠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가 강요하는게 아닌데...애정결핍인가? 이것도 중독성이 있더군요^^.

cyrus 2018-07-17 16:35   좋아요 1 | URL
저는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자기만족’, ‘인정 욕구’ 그리고 ‘자아 성찰’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족 또는 인정 욕구로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자기 자신의 결점을 글의 주제로 삼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어요. 이러한 글쓰기 또한 ‘인정 욕구’의 일종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