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글릭의 타임트래블 - 과학과 철학, 문학과 영화를 뒤흔든 시간여행의 비밀
제임스 글릭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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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타임머신(Time Machine)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타임머신은 시간의 벽을 넘어 과거나 미래로 여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이다. 가장 유명한 타임머신은 1895년에 발표된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동명 소설에 묘사된 기계이다. 이 소설이 나오고 난 이후 20세기 사람들은 ‘시간여행(time travel)이라는 소재로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다.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타임머신은 여전히 상상 속 기계로 남아있지만, 매력적인 소재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시간여행을 하길 원한다.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그 욕망을 부채질한다. 물론 대개는 부질없는 상상이나 몽상에 그칠 뿐이다. 전생이나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도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점집이나 역술가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질수록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의 농도도 짙어진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미래에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흐릿하게 만드는 과거에 대한 향수, 즉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레트로토피아(retrotopia)가 현대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레트로토피아는 복고풍을 뜻하는 ‘retro’와 유토피아(utopia)를 합친 말이다. 향수병은 흔히 나이가 들수록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젊은이들이 과거의 기억에 집착한다고 주장한다. 여생이 줄어들수록 추억에 빠져 놀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과거로 가든, 미래로 가든 시간여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타임머신이 실용화된다고 해도 복잡한 문제점(시간여행을 할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모순들.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 역설’이다. 시간 여행자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던 과거로 가서 자신의 아버지를 실수로 죽인다면 시간 여행자는 어떻게 될까?)이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이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을 다룬 공상과학물 마니아라서? 그러나 타임머신과 시간여행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은 시간여행이라는 공상적인 소재가 어떻게 해서 우리 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 책이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시간여행은 애초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고리타분한 주제를 가지고 책을 썼을까? 보나 마나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과학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겠지.” 그러나 ‘시간여행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라는 진부한 문제는 이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 《타임 트래블》은 시간여행의 실현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한 책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문학 작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밝혔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자들은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이유를 철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자신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음으로 과거를 여행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시간여행은 불과 백 년 전에 만들어진 근대적 판타지다. 과학기술은 근대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근대화에 접어드는 시대에 살아온 지식인들은 과학적 진보가 곧바로 사회 전체의 진보에 직결된다고 믿었다. 웰스도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사회가 더 고도로 발달하는 문명화 과정에 관심이 많았다. 웰스는 과학기술이 유럽의 미래를 유토피아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하면서도 문명이 빠르게 변화하는 속도에 의해 사라지고 잊히는 ‘과거의 유산’을 잊지 않았다. 이 ‘과거의 유산’은 지나가버린 시간을 증명해주는 소중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계속해서 ‘과거의 유산’을 발굴하였고, 그것은 눈으로 확인 가능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어도 과거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즉 근대 초기는 기차와 마차와 공존하는 시대였다. 과거와 (미래에 근접한) 현재가 겹겹으로 포개진 시대에 살던 유럽인들은 ‘시간’을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웰스가 소설에서 고안한 타임머신은 눈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싶은 근대 유럽인들의 기대심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상상 속 기계라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웰스의 타임머신에 콧방귀를 뀌면서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웰스의 《타임머신》을 평한 어느 평론가는 “이런 미래 여행이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시간여행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20세기 사람들은 ‘과거’로 남게 될 자신들의 시간(‘현재’)을 영원히 보존하여 미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타임캡슐’을 생각해냈다. 저자는 타임캡슐을 ‘희비극적인 타임머신’이라고 말한다. 땅에 묻힌 타임캡슐은 ‘가장 느린 타임머신’이다. 타임캡슐은 그것을 땅에 묻어둔 사람과 나란히 시간여행을 한다. 타임캡슐을 만든 사람은 시간 여행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주인(시간 여행자)이 없는 타임캡슐은 미래가 된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잠든다. 타임캡슐의 용도를 생각해 보면 저자가 타임캡슐을 ‘희비극적 타임머신’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다.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우리는 타임캡슐을 미래로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여행자가 될 수 없고, 타임캡슐을 바라보는 미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할 수도 없다.

 

웰스의 소설을 보면서 비웃은 평론가의 말처럼 시간여행은 정말 ‘쓸모없는 여행’일까? 시간여행이 가능한지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사람들은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물론, 유사과학에 너무 빠져버려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를 즐겨 본다. 과연 시간여행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정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인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간여행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시간여행이 궁극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죽음을 피하고 싶은 심리’에서 찾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죽는다. ‘나’라는 존재가 없는 미래를 상상해보라.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내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영원히 눈을 감는 순간 내일(미래)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서글픔을 잊기 위해 행복했던 과거를 끄집어내기도 하고, 오지 않을 미래가 어떨지 긍정적으로 상상한다.

 

“인생은 매일 매일 사는 동안 모두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We are all travel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ne)>에 나온 대사가 말해주듯, 우리는 지금도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여행을 상상하는 일만큼 삶에 활력을 주고, 혼자서 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사고 실험’ 게임은 없을 것이다. 단,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게임도 많이 하면 정신에 해롭다. 현실을 도피하는 심정으로 과거에 너무 몰입해서도 안 되며 미래를 맞춘답시고 설레발을 치고 다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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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문화론 - 사가판 私家版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인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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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똑똑하다는 건 세상이 다 안다. 노벨상 수상자 중엔 약 30%가 유대인이다. 201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포크송 가수 겸 작곡가인 밥 딜런(Bob Dylan)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뿐만 아니다. 유대인이 오래 장악해온 경제 분야는 물론 정보기술, 문화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이 수두룩하다. 구글의 공동 설립자 래리 페이지(Larry Page), 페이스북의 최고 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모두 유대인이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의 세계 정복 전략을 담은 『시온 의정서』가 진짜라고 믿는다. 위조라 판명된 이 문서가 세상에 공개된 이후 나치는 그것을 구실로 유대인을 학살했다. 지금도 이 ‘허위’ 문서를 근거로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은 로비의 천국, 유대인 로비는 최고 수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 정치권과 미국 내 유대인 로비 단체의 유착 관계는 아주 질기면서 끈끈하다. 미국과 유대인의 특별한 관계 덕분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로 몰아붙이면서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유대인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똑똑한 유대인에게 보내는 부러운 시선. 또 하나는 팔레스타인을 빼앗으려는 이스라엘 유대인에 향한 반감 어린 시선. 그런데 우리는 유대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유대인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다. “유대인은 똑똑한 민족이야.”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희생자야.” “유대인은 돈을 너무 밝혀.” 유대인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자도 ‘유대인은’이라는 주어로 시작해서 유대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를 내린다.

 

20년 동안 유대인을 연구했다는 우치다 타츠루(內田樹)“유대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도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도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완전히 배제한 채 유대인이 누군지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 누군지 설명하려면 각자의 가치 판단을 집어넣어야 한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유대인은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다양한 가치 판단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유대인이 누군지 말하게 된다. 유대인과 반유대주의를 분석한 그의 책 《사가판 유대문화론》은 그동안 유대인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해온 독자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만한 책이다. 내가 왜 이런 표현을 썼는지 이 서평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책 제목 앞에 붙은 ‘사가판(私家版)은 우리나라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사가’를 ‘사삿집’이라고 하는데, 개인이 혼자 살림하거나 개인이 소유한 집을 뜻한다. 《사가판 유대문화론》은 유대인과 그들의 문화를 알려고 하는 저자의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유대인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이나 중립적인 관점이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유대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는 “유대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대신에 “유대인은 무엇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스스로에게 질문한 끝에 그가 내린 주관적인 결론은 이렇다. 첫 번째, 유대인은 단일 국민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두 번째, 유대인은 인종이 아니다. 세 번째, 유대인은 유대교 신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단일 민족’, ‘순수혈통 민족’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정말로 그런 민족이 있다면 언어와 생활 방식이 완전히 비슷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언어와 생활 방식도 제각각이다. 나도 그렇고, 사람들은 유대인을 특정 인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다른 인종과 구분할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나 생물학적 기준은 없다. 나치는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유대인을 다른 인종과 구분되는 특정 인종으로 만들려고 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교를 믿는 건 아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상당수의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종교를 포기했다.

 

유대인은 딱히 차별을 받을 만한 특정 민족도, 특정 종교만 믿는 사람들이 아닌데도 반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을 싫어했다. 유대인은 ‘유대인을 부정하려는 자’들의 가치 판단에 여러 겹 덧씌워진 채 존재해왔다. ‘유대인을 부정하려는 자’라고 하면 악랄하기 짝이 없는 최악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반유대주의자는 악인’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자는 유대인 문제를 연구하면서 반유대주의자들의 삶을 알게 되었는데 저자가 확인해본 결과, 오히려 그들은 올바른 품성을 가진 인간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을까? 반유대주의자들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사악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을 대항하는 전지전능한 자, 즉 구세주의 등장을 갈망했다. 그래서 반유대주의자들은 그럴듯한 음모론에 현혹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앞서 언급한 『시온 의정서』다.

 

자, 이제 내가 이 책이 독자에게 파문을 줄 수 있다고 말한 이유를 언급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저자는 현재의 유대인 문제를 풀 수 있는 ‘최종적 해결’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의 ‘암울한 결론’에 당혹스러워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이 이 책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잘못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의 암울한 결론은 애초에 해결하기 어려운 유대인 문제에 단념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유대인 문제 해결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면서 ‘도덕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저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은 복잡하면서도 민감한 사회적 ·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올바른 의견’을 내세우려고 한다. 그들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이 ‘올바른 의견’은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올바른 의견’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자신을 ‘도덕적으로 올바른 위치’에 머물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사용한다. 그렇게 되면 ‘도덕적으로 올바른 위치에서 말하는 의견’에 반하는 다른 목소리는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유나 논의가 없으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은 정체되고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겉멋만 잔뜩 든 공허한 말만 남는다. 너무 단순한 생각이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상당히 해결하기 힘든 사회적 · 정치적 문제가 있다면 가끔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 중지(epoche)를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유대인 혹은 유대인 문제’를 괄호 안에 넣어두고 편견으로 그것을 접근하는 태도를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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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28 11:35   좋아요 0 | URL
사실 우리도 ‘한민족’이라는 단어를 잘못 쓰고 있어요. 대부분 사람은 ‘한민족이라면 이래야 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민족을 배타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라는 말도 민족에 대한 편견이고 자기혐오에요.

얄라알라 2019-06-2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달만에 알라딘 로그인, 서재 들어오자마자 바로 찾아보게 되는 cyrus님의 서재^^

cyrus 2019-06-28 11:35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

페크pek0501 2019-06-25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의 책을 두 권 갖고 있는데 읽어 볼 만한 저자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의견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는 저로서는 어떤 판단을 하려 할 때 보류하게 되더군요. 시간에 따라 생각이 변하기도 하고, 같은 사건도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듯이 최종 판단은 없는 것 같아요.

cyrus 2019-06-28 11:37   좋아요 0 | URL
사람이 늘 한결 같은 입장을 가지면서 살 수 없어요. 어떤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입장을 가질 수 있어요. 어떤 문제에 입장을 내되, 그 입장이 틀리거나 잘못됐다면 그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번복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2019-06-28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28 11:42   좋아요 0 | URL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에 큰 문제는 없었고요. 그냥 이번 주는 바빴어요. 어제 독서모임이 있었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페미니즘 독서모임이 타이트하게 진행하게 돼요. 독서모임과 관련된 책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반납해야 할 책들까지 몰아서 읽느라 알라딘에 접속하지 못했어요. ^^;;
 
내 안의 가부장 - 여성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
시드라 레비 스톤 지음, 백윤영미.이정규 옮김 / 사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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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인간의 삶을 감싸는 거대한 봉투가 ‘문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쓰는 문화라는 말의 의미는 아주 넓다. 전통문화, 대중문화, 음식문화, 기업문화, 청소년문화 등 ‘문화’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문화를 봉투로 비유한 것은 협소하다. 문화라는 이름의 산소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문화는 우리를 숨 쉬게 하는 산소와 같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는 문화가 존재한다. 우리는 문화로 숨을 쉬면서 자라고 문화생활을 영유하는 ‘인간’이 된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존재이다.

 

우리가 호흡하고 활동하는 동안 ‘활성산소’가 생긴다. 몸속으로 흡수되는 영양분과 산소는 활성산소를 만드는 주요 원료이다. 과도한 활성산소는 세포를 공격해 유전자를 변형시키고 암을 일으킨다. 나는 우리 삶을 지배하며 차별과 억압에 일조하는 가부장제 문화를 활성산소에 빗대어 ‘활성 문화’라고 부르고 싶다. 가부장제 문화는 오랜 세월 동안 전통과 관습이란 명목으로 여성을 남성의 말에 순종하고 보호받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게 했다.

 

우리는 가부장제라는 활성 문화를 산소 마시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자란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나고 자란 우리 중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을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에게 가부장제는 내면화되어 있다. 우리 무의식의 그림자 속에는 ‘내면 가부장’이 있다. 《내 안의 가부장》은 가부장제 문화를 지속해서 유지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자아의 실체를 보여주는 책이다. 심리학자인 이 책의 저자 시드라 레비 스톤(Sidra L. Stone)우리 안에 다양한 자아들이 있다는 관점을 전제로 하면서, 내면 가부장이라는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관점을 제공한다.

 

융 심리학에서 그림자란 우리가 외면하거나 무의식 속에 숨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그림자는 때때로 통제를 따르지 않고, 내면 밖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내면 가부장을 ‘그림자 왕(The Shadow King)이라고 부른다. 내면 가부장은 전통과 규칙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내면 가부장은 사회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만든다. 내면 가부장이 좀 권위적이어도 생각보다 좋은 일을 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전통과 규칙을 어기면 내면 가부장은 초조해지는데, 이게 심해지면 문제가 발생한다. 전통과 규칙을 어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자신을 불신하도록 만든다. 내면 가부장에 지배당한 개인은 자신이 남들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인식한다. 특히 내면 가부장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남성은 남성과 관련된 특성을 여성의 특성보다 더 우위에 둔다. 여기서부터 여성 차별과 남성 중심주의가 형성되면서 가부장제 문화가 활성화된다. 활성 문화가 된 가부장제가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할수록 그 속에서 숨 쉬면서 자란 개인은 가부장제의 가치를 내면화한다.

 

이 책은 내면 가부장뿐만 아니라 내면 가모장도 다룬다. 내면 가모장은 내면 가부장과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내면 가부장이 권력과 규칙을 좋아한다면, 내면 가모장은 감정, 사랑, 양육을 중시하며 관계 지향적인 가치를 선호한다. 그러나 내면 가모장이 ‘그림자 왕’이 되면 남성 그 자체를 싫어하고, 자신의 성별(gender)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보는 몇몇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지만, 저자는 ‘그림자 왕’이 된 내면 가모장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여성 우월주의를 넌지시 경계한다.

 

이 책을 보지도 않고, 가부장제를 빌미로 남성을 공격하는 내용이 있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저자는 내담자(상담을 의뢰한 사람)들이 들려준 경험담을 통해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의 장단점이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고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파트너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자신의 그림자(왕)를 직접 만나면서 들여다보는 일은 불편하고 낯선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초조함, 분노, 우울로 인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면 가부장과 내면 가모장의 존재를 거부하면 그것은 ‘내 안의 적’이 된다. 그림자 왕은 타인에게 자신의 특징을 그대로 투사함으로써 차별과 갈등을 유발한다.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만나고, 자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과정은 단순히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좀 더 생생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지속적인 성찰의 과정이다. 알면 달라진다.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타인에 대한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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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를 읽으니 ‘제도로 형상화된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9-06-06 14:06   좋아요 1 | URL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제도로 형상화되면, 또 다른 사회구성원들은 사회제도(관습, 규범)에 스며든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내면화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이 있어서 문화가 생기고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 - 우리의 인생과 음악심리학 이야기
빅토리아 윌리엄슨 지음, 노승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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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음악을 듣는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나 바쁜 일상의 자투리 시간이 주어질 때, 혹은 슬프고 지칠 때나 기쁘고 신이 날 때 말이다. 우리의 일상을 꾸며주는, 음악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수난의 시기를 지내온 우리 민족은 대대로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하기를 무척 즐겼다. 노래하며 위로받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밭에 김을 매면서, 논에 모내기하면서 노동요를 불렀다. 특별한 악기가 없어도 젓가락 장단에 맞춰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 흥을 돋을 줄 알았다.

 

노랫가락의 흥을 즐기던 우리의 일상문화를 반영하듯 노래방에 자주 가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노래방은 친구들을 만날 때나 직장 회식 이후에 ‘제2차’로 가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즐기며 ‘우리’라는 공동체를 다시금 확인하기도 한다. 요즘같이 혼자 노는 게 익숙해진 시대에 혼자서 노래방을 즐길 수 있는 ‘코인 노래방’도 있다. 이렇듯 노래방은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곳이 아니라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상관없이 노래를 부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놀이 공간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쓴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문명은 놀이 속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문화의 본질을 놀이에서 찾아낸 그는 삶의 의미와 행복 역시 놀이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했다. 호모 루덴스는 달리 말하면 ‘예술을 즐기는 인간’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 속에서 자라왔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음악이라는 ‘놀이’를 마음껏 누리면서 자라온 호모 루덴스에 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음악과 우리 삶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예리하게 고찰한 음악심리학 책이다.

 

저자는 태아기, 유아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음악의 힘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 책에 음악의 영향력을 증명해주는 최신 연구 결과들이 나온다. 평소에 음악을 즐기는 저자는 이 책에서 음악의 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표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음악이 그처럼 우리 일상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자 나는 내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중략] 내게 필요한 것은 음악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무척이나 알고 싶어하는 친구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었다.

 

(프롤로그, 6~7쪽)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당신은 음악이다》는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이들도, 음악을 어떻게 무엇부터 들어야 할지 막막하던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는 책이다. 독자는 우리가 살면서 음악을 꼭 들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인간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음악을 만난다. 태아는 자궁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세상의 소리를 접하는데, 이때가 바로 인간이 처음으로 음악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궁 속으로 전달되는 다양한 소리에 자주 노출된 아기는 박자와 음높이를 감지하고 구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청소년기는 음악과 정체성이 서로 일치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질풍노도’를 겪는 청소년들은 기분 좋게 만드는 노래를 찾게 되고, 이 시기에 접했던 노래를 ‘최애 노래(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이 돼서도 청소년기에 즐겨 듣던 노래를 잊지 못한다. ‘최애 노래’는 지나간 시간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가수의 음악을 한 번 듣고 나면 그 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참 속상하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다. 좌절할 필요 없다. 우리는 음악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요즘은 가사 몇 마디만 검색창에 입력하면 그 가사가 나오는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생소한 멜로디의 음악이라도 자주 들으면 멜로디 일부가 고막에 콕 박혀 귓가에 맴돈다(이게 오래 지속되면 귀벌레 현상이 생긴다). 저자는 음악에 노출되는 과정을 ‘집짓기’에 비유한다.

 

 

 음악을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출이 필요하지만, 일단 기억하기만 하면 잘 지어진 집처럼 튼튼하고 오래 지속된다. 실제로 집을 짓는 것과 달리 청취자한테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다. 마음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당신은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7장 기억 속의 음악, 241쪽)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호모 루덴스’ 정신의 복원이다. 삶의 놀이인 음악은 가수, 작곡가, 연주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로서의 음악은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기에 직업과 연관 지을 일이 아니다. ‘영원한 가객’ 김광석은 “가수란 자기가 부른 노래대로 인생이 풀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대로라면 가수가 아니어도 노래를 즐기는 우리도 노래대로 인생이 풀리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음악이 관통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흐르는 음악은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서평을 다 쓰고 나니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고 노래하던 김광석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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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3 17:09   좋아요 0 | URL
세상 정말 좋아졌어요. 절판된 앨범에 들어있는 곡을 들으려면 그 앨범을 직접 구해야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
 

 

 

 

인간은 보면서 사유한다. 하지만 인간은 부분을 전체인 것으로 단정 지으면서 세상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eye)은 ‘열린 창’이 아니라 ‘구멍’이다. 어떠한 대상에 대한 인식이 근시안적 눈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의 눈, 식민지를 배척하는 제국주의의 시선, ‘다름’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정상성의 기준 등 ‘눈의 우월성(superiority)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 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2004)

 

 

 

임철규 교수가 쓴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는 세계를 우뚝 세우고, 장악하고, 짓밟은 ‘서구인의 눈’을 검토한 책이다. 저자가 ‘서구인의 눈’에 주목한 것은 서양 문화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눈으로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그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앎의 과정을 통해 발전된 서구의 이성은 시각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문명이 건설되면서 진보에 대한 믿음이 퍼지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이자 ‘눈의 시대’였다.

 

 

 

 

 

 

 

 

 

 

 

 

 

 

 

 

 

 

 

* 제러미 벤담 《파놉티콘》 (책세상, 2007)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생각한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은 눈의 우월성으로 발전된 ‘이성의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파놉티콘은 한 곳에서 공간 내부 전체를 확인할 수 있는 죄수 교화 시설이다. 원형감옥 중간에 감시자가 있는 공간이 있고, 그 바깥쪽 둘레에 죄수의 방을 둔다. 죄수의 방은 밝게, 중앙의 감시 공간은 어둡게 유지한다.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 때문에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게 벤담의 생각이었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16)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감시와 처벌》(나남출판)에서 파놉티콘 개념을 이용해 근대체제를 ‘한 권력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만인을 감시하는 체계’라고 설명했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당시 영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실제로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파놉티콘이 설계도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푸코에 따르면 파놉티콘은 감금과 교정은 물론 훈련 · 노동 · 교육 · 치료 등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 장치로 폭넓게 활용되었고, 이와 유사한 내부 구조를 갖춘 감옥 · 군대 · 공장 · 학교 등 전문기관들이 근대 이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푸코는 만인을 감시하는 눈의 우월성을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이라 명명했다. 푸코의 파놉티콘 안에 갇힌 개인은 언제나 감시당하고 불안과 공포를 겪게 되며, 결국 자신 스스로 감시하게 하는 권력의 효과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규율 권력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은 권력에 복종하는 개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다시 임철규 교수의 책으로 돌아가 보자. 이 책에서 말하는 ‘눈의 역사’와 ‘눈의 미학’은 서구 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책은 당연히 ‘서구인의 눈’이 가진 우월성 분석에 초점에 맞춰져 있다. 임철규 교수는 ‘이미지의 문화’로 설명되는 서구 문화와 달리 동양 문화,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는 눈의 문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불교는 눈이 일으키는 ‘작란(作亂, 장난)’을 경계했다. 작란은 앞서 언급한 ‘좁은 구멍으로 보는 것’, 즉 대상의 부분만을 보고 그것을 전체라고 규정하는 반응을 뜻한다. 

 

 

 

 

 

 

 

 

 

 

 

 

 

 

 

 

 

 

 

 

 

 

 

 

 

 

 

 

 

 

 

 

 

 

* 스기우라 고헤이 《형태의 탄생》 (안그라픽스, 2019)

*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 편》 (김영사, 2010)

* 위앤커 《중국신화전설 1》 (민음사, 1998)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그러나 이 사례만 가지고 동양 문화는 눈의 문화가 아니라고 보기 어렵다. 동양 도상에서 묘사되는 좌우 두 개의 안구, 빛나는 눈은 ‘생명’이 있는 ‘형태’의 힘을 나타내는 신체 기관이다(스기우라 고헤이, 37쪽). 그리고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 창조 신화에도 태양과 달 이미지를 두 개의 눈과 연결하는 상징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반고(盤古)는 천지를 창조한 거인 신이다. 반고의 모습을 묘사한 중국 고대 그림에 보면 그의 왼쪽 눈에 태양, 오른쪽 눈에 달이 그려져 있다. 이렇듯 태양과 달이 새겨진 창조신의 두 눈을 ‘일월안(日月眼)이라고 한다. 일월안은 일본 신화와 인도 신화에도 나오는데, 외부세계(우주)의 빛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영적인 힘이 넘치는 기관으로 묘사된다. 서양에도 일월안을 묘사한 도상이 전해지는데, 재미있게도 동양과는 반대다. 왼쪽 눈이 달이고, 오른쪽 눈이 태양이다. 그리고 왼쪽 눈은 ‘밤의 눈’, 즉 과거를 상징하며 오른쪽 눈은 ‘낮의 눈’, 미래를 상징한다(진 쿠퍼, 124쪽).

 

임철규 교수는 눈물을 흘리는 예수의 눈의 긍정적 속성(‘선한 눈’)이 눈의 우월성과 폭력성이 일으키는 파국의 위기를 유보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한다. 비관적인 전망이지만, 나는 ‘나쁜 눈’의 힘이 작동하는 세계를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쁜 눈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것이 가짜 눈물인 ‘나쁜 눈물’이다. 위선적인 사람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진짜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가짜 뉴스가 무수히 나오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는 누구나 악어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탈눈물(post-tears)’의 시대이기도 하다. 가짜 눈물은 진실을 씻겨 내린다. ‘눈물을 흘리는 눈’이 ‘선한 눈’인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암울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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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8 17:01   좋아요 0 | URL
지금 나오는 CCTV에 인공지능을 더하면 정말 인간의 시력보다 더 뛰어난 기계 눈이 만들어질 거예요. 그러면 찍히면 빼도 박도 못할 것입니다. 기계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없어질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