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성과 무한 -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레비나스 선집 3
에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김도형 외 옮김 / 그린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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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레비나스 읽기 모임 두 번째 도서

(4회 진행: 818, 91, 929, 10월 13)




철학은 오랫동안 라는 존재를 따라다닌 학문이다. ‘는 철학자들을 귀찮게 하는 질문 유발자다. ‘는 무엇인가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어떻게 하면 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나는 내가 누군지 궁금해.’ 심오한 말이지만여기서 철학이 시작되었고 철학자가 태어났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아테네에서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다본인이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 맞는지 궁금했다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대화(산파술)를 주고받은 끝에, 결국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소크라테스는 본인 또한 무지하다고 생각했다그는 세상물정을 모르고 속 편안하게 사는 알키비아데스(Alkibiades)에게 델피(Delphi)의 신전에 있는 글귀를 인용하면서 충고했다. 너 자신을 알라(gnôthi sauton).”[주1]


몽테뉴(Montaigne)무시로 를 물고 늘어지는 철학과 한평생 함께 살았다. 그는 를 알고 싶은 철학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본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책 속에서 발효된 지식은 몽테뉴가 자신의 서재에서 혼자 마시는 술이다. 하지만 몽테뉴는 진짜 를 찾을 때면 술 한 모금 눈에 대지 않는다. 그는 책 속에서 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혼자서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Que sais-je)?”[주2] 


데카르트(Descartes)도 몽테뉴처럼 책과 지식에 기대지 않은 상태에서 철학을 만났다. 그의 서재는 침대였다. 질문하는 철학과 함께 침대에 누운 데카르트는 졸음을 참아가면서 자신이 누군지 생각했다생각하는 나는 데카르트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철학의 제원리그는 생각하는 자신을 절대로 의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나는 생각한다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주3] 


를 향한 질문철학자가 되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관문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관문을 비켜서 지나간 철학자가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그는 오로지 에게만 관심이 쏠린 철학의 질문을 의심한다. 그리고 거꾸로 철학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타자(他者)는 누구야? 나는 타자가 누군지 궁금해.” 타자를 알고 싶은 욕망. 여기서 레비나스의 철학이 시작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를 알기 위한 철학은 주체(subject)’를 이해하기 위한 철학으로 성장한다. 철학자들은 저마다 주체의 정의를 내렸다주체는 단순하게 말하면, 의식을 가진 인간 또는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실체.[주4] 데카르트가 의심하지 않은 생각하는 나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는 정신 또는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지 자아 또는 주체와 같은 의미의 개념이 아니다철학 개념은 수많은 철학자의 머리를 통과하면 의미가 확장되거나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철학 개념을 한 가지 의미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주체도 마찬가지다철학자들이 개인, 자아, 주체에 대해 논의할수록 철학은 타자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철학이 오만해지면, 자기중심적 철학으로 변질된다. 오만한 철학의 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이성적 주체’인 인간이. 인간의 지식은 자연을 이용하기 위한 무기가 된다. 오만한 철학은 권력을 가진 정치인을 따라다니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에 충성한다.


레비나스는 2차 세계 대전의 참상과 전체주의 국가(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국가 파시스트당)의 등장을 목격했다. 그는 주체를 인식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철학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다. 권력에 무기력한 철학은 폭력으로 타자의 소중한 삶과 자유를 짓밟는다레비나스는 자신의 책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독일어판 서문에서 존재의 자기 보존 경향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주5] 존재로 대입하면, 자기 보존 경향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의미한다.


전체성과 무한은 기존 철학자들이 주장해 온 자기중심적 철학을 비판하면서 타자가 누군지 묻는 철학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무한에 비유한다. 타자는 나보다 더 높은 무한한 곳에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타자는 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레비나스 철학의 타자는 내가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을 건네는 사람이다. 타자를 알고 싶은 욕망은 상대방이 누군지 알고 싶어하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타자의 고통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타자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우리는 타자를 도와주어야 한다. 나와 타자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는 타자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윤리적 행위. 따라서 레비나스는 윤리를 1 철학으로 삼는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거나 철학자가 되지 않아도 우리 각자가 를 향해 질문할 수 있다. 그리고 진짜 를 만나야 한다.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나는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를 따라다니면서 계속 나에 대해서 질문하는 철학의 얼굴은 우리 각자의 얼굴이다. 우리가 만나야 할 타자가 누군지 질문하는 레비나스 철학의 얼굴은 얼굴들이다. 여기에 내 얼굴과 타자의 얼굴이 함께 있다.  







    


[1] 플라톤, 알키비아데스 I · II124d. 

(김주일 · 정준영 옮김, 아카넷, 2020, 81)


[2] 몽테뉴, 에세 212레몽 스봉을 위한 변명」 

(심민화 옮김, 민음사, 2022, 327)

 

[3] 데카르트

방법서설: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4부 

(이재훈 옮김, 휴머니스트, 2024, 82)

 

[주4] 주체 · 주체성, 철학사전편찬위원회, 철학사전

(중원문화, 2023년)


[주5]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독일어판 서문,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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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이러스님 혹시 사람, 장소, 환대 읽어보셨나요?

cyrus 2024-10-05 10:13   좋아요 0 | URL
아니요. 안 읽어봤어요. 박동수의 <철학책 독서 모임>이라는 책에 <사람, 장소, 환대>에 관한 글이 있어요. 그 글을 읽고 <사람, 장소, 환대>를 안 봐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 쟝님은 <사람, 장소, 환대> 어땠어요?

- 2024-10-05 10:19   좋아요 0 | URL
인상적인 책이었는데… 이 글 읽어보니 레비나스 철학이랑 이어져있는 것 같아요. 그때 읽을 때는 몰랐어요. 암튼 고생하셨네요 ㅋㅋㅋㅋ

cyrus 2024-10-05 10:34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환대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의했어요. ^^
 
방법서설 -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재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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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데카르트(Descartes)침대에 누워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허약했다. 그러나 공부하기 시작하면 생기가 돌았다피로감이 몰려오면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그는 책 없이 공부했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읽었던 모든 책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그가 본 책들 대부분은 오류가 넘쳐났다데카르트는 타인의 편견과 오류가 섞여 있는 책을 멀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한 권의 책으로 여기고 침대에 누워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라는 책속에 어떤 내용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라는 존재가 살아가면서 바라보고, 경험한 세계다라는 거대한 책을 활짝 열어서 보는 일은 를 제대로 알기 위한 여행이다. 데카르트의 침대 여행은 책에 적힌 진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가 거리를 둔 지식에 중세 기독교 신학도 포함된다. 중세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규정한다. 중세 신학자들이 바라보는 인간은 유혹에 약해서 타락하기 쉬운 불완전한 존재다하지만 데카르트는 진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하려고 생각하는 나를 만났다생각하는 나는 중세 기독교적인 인간이 아닌 철학을 하는 인간이다데카르트는 신학과 철학을 구분한다. 그는 더 나아가 모든 인간에게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 이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방법서설생각하는 나를 만난 데카르트가 직접 쓴 자기 자신에 대한 주석서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절대로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방법서설4부에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한다생각하는 나는 철학의 제1 원리그는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을 본성으로 이해하고 신뢰한다. 생각하기를 멈추는 는 살아있다고 볼 수 없다.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영혼(방법서설4, 83)’이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인식한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영혼은 자아 또는 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를 종종 자아와 주체의 동의어로 해석한다. 이에 따라 데카르트 철학은 이성적 인간을 찬양하는 사상으로 알려지기도 했다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정신이 인간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영혼이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동물은 생각하지 않는 존재이며 영혼 없는 기계. 그가 산 채로 동물을 해부했다는 일화까지 알려지면서 데카르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학자’ 또는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을 옹호한 철학자로 비판받았다.


방법서설5부에 데카르트는 자신이 동물과 식물, 그리고 무생물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충분한 지식을 가지지못했다고 밝힌다(114). 그는 자연학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데카르트는 동물과 식물의 활동이 영혼(정신)의 개입과 무관하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린다. 방법서설발표 이후에 데카르트는 동물과 식물의 생명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고 싶어 했다하지만 당시에 알려진 자연학 지식으로는 동물과 식물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동물을 영혼 없는 기계로 규정했다고 해서 유독 그에게만 전근대적 학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데카르트가 자연을 이용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실천적인 철학을 통해 불 · · 공기 · · 하늘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다른 모든 것의 힘과 작용을 우리 장인들의 다양한 기예를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판명하게 인식하면서 이 힘과 작용을 장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것들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우리를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처럼 만들 것이다.


(방법서설6144~145)



데카르트는 허약한 체질이라서 건강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건강해야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인간이 건강하게 살려면 자연을 이해하고, 이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연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데카르트는 앞서 동물과 식물에 대한 자연학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지 않았다면서 본인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의 겸손한 고백은 생각하는 나는 자연의 법칙 전부를 인식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영혼을 가진 인간을 긍정했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을 완전무결한 신적 존재 또는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로 인식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나는 완벽하지 않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진리 탐구에 전념한다데카르트는 이 세계에 확실한 진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든 만물이나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여기 수많은 의견 중에 편견과 오류가 있다데카르트가 이해한 세계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큰 차이가 없다. 지금, 이 세계가 가짜 뉴스들이 득실거리는 책이라면,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사람은 ‘고집이 센 오류투성이 책이다잘못된 책들에 둘러싸인 우리는 가짜 뉴스와 유사 학문(과학, 역사학)에 지쳐서 정신이 축 늘어진 상태다. 우리가 방심한 사이에 교조주의와 극단주의가 대중으로부터 열렬히 환영받는다. 이제는 누구나 선동가가 될 수 있다방법서설은 책과 진리를 의심하는 삶(회의주의적 태도의 삶)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의심하는 행위는 곧 생각하는 행위다.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다혼잡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참인 척하는 거짓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생각하기를 절대로 멈추지 않아야 한다.






<cyrus의 정오표>

 


* 145, 옮긴이 각주 4

 




 이 표현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무제약적 지배와 자연의 인간에로의 종속을 정당화지 않는다.



정당화지 정당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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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놀 -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 세창클래식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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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얼굴은 얼(정신)이 뭉쳐진 신체 부위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은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매일매일 성장한 얼굴에 한 사람이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그대로 드러난다책의 얼굴도 그렇다서문독자가 맨 처음 마주하게 되는 책의 얼굴이다. 책은 자기 얼굴을 절대로 숨기지 않는다. 책이 독자에게 알리고 싶은 본문의 핵심이 얼굴에 다 나타난다. 서문이 책의 얼굴이라면 본문은 책의 몸통이다대부분 글쓴이는 책을 쓸 때 서문부터 쓴다. 그런데 니체(Nietzsche)는 정반대의 순서로 책을 쓴 철학자다. 그는 본문을 먼저 썼으며 서문은 몇 년 지난 후에 썼다. 니체에게 서문은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마침표다.


아침놀: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은 니체가 1880년부터 쓰기 시작한 책이다. 이듬해에 나온 초판은 서문이 없다아침놀》은 얼굴이 없는 책으로 태어난다. 니체는 1886년에 아침놀서문을 쓴다. 초판이 나온 지 6년이 지난 뒤에 얼굴 있는 아침놀》 재판이 나온다니체는 책을 쓸 때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항상 글을 천천히 썼다. 곡을 직접 만들 정도로 음악을 좋아한 니체는 자신과 본인의 책을 느리게 연주하는 방식인 렌토(lento)’로 비유한다아침놀》은 잠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아침놀》이 음악이라면 잠언은 음표다. 니체의 짧은 글을 단번에 읽으려고 하면 글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성급하게 읽으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니체는 도덕을 숭배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거부한다. 그에게 도덕은 뜨겁게 빛나야 할 인간의 삶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해로운 밤안개다. 도덕으로 흐릿해진 사회 속에서 인간은 도덕의 노예’가 된다. 도덕은 자신을 따르는 노예에게 명령한다. 생각해서는 안 되고 말도 적게 하라. 여기서는 오로지 복종만 해야 한다!”[주1] 도덕의 노예는 솔직한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누른다도덕에 짓눌린 인간의 얼굴에 나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니체는 아침놀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도덕과의 한판 전쟁을 선포한다.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니체의 책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이 사람을 보라,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이다. 이 세 권의 책 또한 니체의 주저라서 아침놀니체 철학 필독서 목록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책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아침놀은 니체 철학을 이해하는 데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 권력에의 의지(힘에의 의지)’초인(위버멘쉬)’의 의미를 설명한 잠언이 나온다니체가 아침놀》 서문을 쓰기 직전인 1885년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이미 완성된 연도다1885년과 1886년은 천천히 만들어진 니체 철학이 충분히 무르익은 시기다.


아침놀느리게 읽어야 할 책이다. 니체는 천천히 읽으라고 당부한다. 아침놀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되는 책이기도 하다. 니체는 독자에게 아침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아침놀가끔 펼쳐서 읽기 위한 책이다. [2] 니체는 서문에서 완벽한 독자와 문헌학자가 이 책을 원한다고 했다. 그의 말에 부담을 갖지 말자.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니체는 논리성을 포기한 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잠언을 썼다. 니체에 맞서는 독자는 아침놀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읽을 수 있다. 잘못 읽는 최악의 독서를 한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읽어야 한다. 인간은 방황을 거듭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끔찍한 방황과 연습을 경험하면서 지식을 얻는다.[3]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 자신이 직면하는 오류와 한계를 스스로 넘어서는 인간이야말로 니체가 아침놀에서 강조하는 초인이다.





[1] 아침놀서문, 16.

 

[2] 아침놀잠언 454, 479.

 

[3] 아침놀잠언 452, 478.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 39, 옮긴이 주 43

 

 『아침놀에서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1906년에 출간되는 유고집[4]의 제목이 되기도 한다. 특히 권력으로 번역된 ‘Macht(마흐트)’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다. 권력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턴가 근대적인 어감이 더 강하다는 이유로 흔히 으로 번역됐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나, 그것만이 진리라고 틀을 정해 버리면 문제가 된다. 니체는 후기에 들어서 주인 도덕을 노예 도덕과 비교하면서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초인은 이런 주인 도덕과 주인의식으로 충만한 존재다. 니체는 그러니까 자기 삶에 주인이 되는 그런 도덕을 요구했다.



[4] 니체의 유고집 권력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초판은 1901년에 초판이 출간되었고, 1906년에 증보판이 출간되었다.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Elisabeth Förster-Nietzsche)와 니체의 친구 페터 가스트(Peter Gast)니체의 유고를 임의로 엮은 책으로, 니체의 저작물로 분류되지 않는다.





* 279, 잠언 192 

 




 그리고 또 예를 들어 프라피스트[주5] 수도회의 창시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 수도회의 창시자는 기독교의 금욕적 이상을 예외적인 프랑스인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프랑스인으로서 정말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원문]

 

 Da steht der Gründer der Trappistenklöster, er, der mit dem asketischen Ideale des Christenthums den letzten Ernst gemacht hat, nicht als eine Ausnahme unter Franzosen, sondern recht als Franzose.



[5] 트라피스트의 오자박찬국 교수가 번역한 아침놀(책세상, 2004) 206 참조.





* 340, 잠언 237 





 거의 모든 정당에는 우습기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벼이 넘길 것은 것은[6] 아닌 그런 곤경이 생겨날 수 있다.


[6] 넘길 것은 것은 것은





* 344, 잠언 240 

 




 죄 그 자체와 그 죄로 인해 발생한 나쁜 결말 따위는 셰익스피어나 아이아스, 필록테테스, 오이디푸스의 소포클레스[주7] 같은 시인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죄 자체를 연극의 지렛대로 삼는 것은 상당히 쉽겠지만, 이런 시인들은 그런 일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비극 시인도 삶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형상을 통해 삶에 등을 돌리려 한 것은 아니다!



[주7] 아이아스(Aias), 필록테테스(Philoctetes), 오이디푸스(Oedipus)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작품 제목이자 작품의 주인공이다. 홑낫표(「 」)는 작품 제목을 나타날 때 사용하는 문장 부호다. 따라서 아이아스와 필록테테스에도 홑낫표를 표시해야 한다.






* 360, 옮긴이 주 335

 




 루터는 당시 황이었던 루이 10[주8]에게 반항적이면서 교훈적 의미로 헌정했던 그리스도인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520)에서 구속의 자유라는 이념을 펼쳤다.



[주8] 루이 10(Louis X, 1289~1316)프랑스 왕이다. 1520년에 활동한 교황은 레오 10(Leo X, 1475~1521, 재위: 1513~1521).





* 558, 옮긴이 주 529

 

 콜럼버스는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탈리아의 항해사다. 그는 항해를 떠나기 전에 부호들로부터 후원받을 요량으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또 설명하기 위해 탁자 위에 달걀을 세우는 퍼포먼스를 보여 줬다고 한다. [주9]



[주9]콜럼버스의 달걀로 알려진 이 일화는 이탈리아의 역사가이자 탐험가인 지롤라모 벤조니(Girolamo Benzoni)1565년에 발표한 <History of the New World>에 언급되었다. 하지만 벤조니의 책이 나오기 15년 전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르네상스 미술가 평전(한길사 번역본 기준으로 2)에 콜럼버스의 달걀과 비슷한 일화를 언급했다. 달걀을 세운 주인공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세운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대성당 돔의 설계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달걀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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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탕아 2024-09-02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놀을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 이 번역본은 읽을 만 한가요?

cyrus 2024-09-04 22:01   좋아요 1 | URL
네, 가독성이 좋았고 옮긴이의 주석이 책세상 번역본보다 많았어요. 주석에 니체 철학을 설명한 내용이 많았어요. ^^

오후즈음 2024-09-0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천히 읽어야 한다니까 뭔가 마음이 놓이네요. 구입해서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

cyrus 2024-09-04 22:04   좋아요 0 | URL
<아침놀>을 천천히 읽으면 인용하기 좋은 문장들을 만날 수 있어요. ^^
 



철학사는 지혜를 사랑한(philosophy) 수많은 철학자를 찬양하라고 만들어진 기념비가 아니다. 철학사는 철학자라는 산봉우리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지도. 대부분 철학사 지도는 고대 그리스에 있는 산봉우리에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리스가 아닌 지역에서 활동했다. 철학사에서 언급되는 고대 그리스아테네와 스파르타로 대표되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 국가들과 이들에게 지배받은 식민 도시 국가들을 가리킨다. 서양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탈레스(Thales)는 가장 먼저 생긴 철학 산봉우리다. 탈레스는 현재 튀르키예 영토가 된 이오니아의 밀레토스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다. 이오니아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였다. 


철학사 지도의 종류가 많다. 종류가 다양한 만큼 지도에 표기된 철학자 산의 개수도 차이가 난다.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비교적 젊은 철학자 산들을 비중 있게 다루는 철학자 지도가 나오고 있지만, 이미 만들어져서 유통된 대부분 철학사 지도는 최신 정보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런 철학사 지도들은 현대 철학자로 분류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산들까지 소개한다. 철학자 산을 오르려면 철학자 산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철학 사상을 반드시 습득해야 한다. 그런데 철학자 지도마다 철학 사상에 관한 주요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아주 잘 만든 철학자 지도를 딱 하나만 고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철학사 지도에 적힌 내용은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내용이 수정될 수 있으며 새로운 정보가 추가될 수도 있다. 맨 처음 언급했듯이 철학사는 불완전한 지식이 담긴 지도이지 완벽한 기념비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철학이 아닌 철학사를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철학사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르다.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철학 지식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식을 검토하면서 숙고한다. 플라톤(Plato)의 대화 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묘사된 소크라테스(Socrates)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 플라톤, 강철웅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명(아카넷, 2020)



 최대로 좋은 일은 여기 사람들에게 그러듯 그곳 사람들을 검토하고 탐문하면서 지내는 일입니다. 그들 가운데 누가 지혜로운지, 그리고 누가 지혜롭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은 아닌지 하는 것들을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41d, 112)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철학자들을 많이 아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철학 사상을 지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으로 여기지 않는다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철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한계나 결점으로 보일 만한 내용이 있으면 검토한다. 소크라테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철학자의 견해를 검토하는 철학 공부는 모든 논변을 동원해서 저항하는 행위.

















플라톤, 전헌상 옮김 《파이돈》 (아카넷, 2020)



 자네들은, 내 말을 따를 거라면, 소크라테스는 조금 생각하고 진리를 훨씬 많이 생각해서, 내가 뭔가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자네들에게 믿어지면 동의하되, 그렇지 않다면 모든 논변을 동원해서 저항하게나


(《파이돈》 91c, 98)



철학사를 사랑하는 사람은 철학을 숙고하고 검토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의 일차적 목표는 철학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철학사를 사랑하는 사람은 철학 원전을 쉽게 가공한 철학사를 편애한다. 철학 원전에 본격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이해하기 힘든 철학 용어는 외운다. 철학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철학 사상의 정수가 담긴 용어만 알고 있으면 철학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철학사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의 어깨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앵무새. 앵무새가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이 철학 앵무새는 철학사 내용을 똑같이 흉내 낸다. 철학 앵무새는 철학자들에 저항하는 힘이 없다. 앵무새는 똑똑하지만, 철학 앵무새는 똑똑한 척한다.


철학 앵무새가 되지 않으려면 철학 원전을 직접 읽고, 철학사를 검토하면서 공부해야 한다. 사실 이런 독서 방식의 과정은 번거롭고,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오독의 위험성도 있다. 그래도 철학사 지도가 알려주는 쉬운 길보다는 철학 원전이 알려주지 않는 어려운 길에 도전하고 싶다.


항상 책을 읽으면 철학 전문 서점 <소요서가>가 만든 책갈피를 사용한다. 그 책갈피 속에 적힌 칸트(Immanuel Kant)의 말이 내게 책을 적극적으로, 좀 더 거칠게 읽으라고 부추긴다.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나는 이 책갈피에 또 하나의 용기를 눈빛으로 적는다. “나의 무지와 오류를 인정할 용기를 가져라!” 이런 용기까지 충만하면 철학을 열렬하게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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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
케네스 클라크 지음, 이연식 옮김 / 소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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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철학 전문 서점 <소요서가>에서 구매한 책입니다.




평점


2.5점  ★★☆  B-





문명은 어떻게 현재 모습이 되었을까. 지금까지 문명의 시작점과 발전 과정을 요약한 견해들이 숱하게 나왔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인류는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앞서 창출된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에 담아서 보존하고 후대에 전수했다. 이 기록들이 차곡차곡 모여지면서 문명이 계속 발전됐다지성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은 문명이 성장한 흔적을 되돌아보는 긴 여정이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역사를 세 권의 책으로 비유했다. “위대한 민족은 자신의 역사를 세 권의 책으로 보여준다. 행동의 책, 언어의 책, 예술의 책이다. 각각의 책은 다른 두 권의 책을 읽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세 권의 책 중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예술의 책이다.” 러스킨은 미술 비평문을 써서 젊은 화가들의 재능을 널리 알렸다. 전업 화가는 아니었지만,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가치를 믿었다


인류의 학문과 예술을 모아 놓은 책이 발명되지 못했으면 인류는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과 똑같이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과 같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앨범이다. 우리는 이 앨범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러스킨이 중요하게 여긴 예술의 책을 펼쳐서 문명의 역사를 읽었다그리고 본인만의 관점이 반영된 예술의 책을 다시 만들었다. 그 책이 바로 1969년에 BBC TV 시리즈로 방영된 문명: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이다.


기존 서양 역사서들은 문명을 논할 때 고대 그리스와 로마부터 시작한다. 대부분 역사가는 학문이라는 꽃이 만발한 지역을 문명의 발상지로 여긴다. 바로 이어서 고대 중동, 동아시아에 활짝 핀 학문의 꽃들을 소개한다. 문명은 서구에만 있는 정원이 아니다. 케네스 클라크는 동양에도 문명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동양 언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동양 문명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그는 서문에 문명여백이 많은 예술의 책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그는 동양 예술뿐만 아니라 독일 낭만주의 등 다루지 못한 예술사조가 너무 많다고 시인했다.







저자는 예술을 문명 성장의 기준점으로 잡은 다음에 종교와 음악, 문학, 과학, 철학까지 관심사를 쭉쭉 뻗어나간다. TV 시리즈 <문명>의 주연은 예술이다. 그동안 예술은 대하드라마 같은 역사에 조연 또는 단역으로 출연했다케네스 클라크는 위대한 문명이 생기려면 반드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천재 예술가한두 명이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명이 천재들의 업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천재를 믿는(문명270)’ 저자는 사회적인 상황이나 정치제도와 같은 외적 환경이 예술에 영향을 준다는 관점을 거부한다.


개인의 뛰어난 역량이 문명을 만든다라는 저자의 관점은 너무 밋밋하고 고리타분하다.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성장하는 인간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케네스 클라크는 러스킨이 말한 예술의 책에 영감을 얻어 문명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문명을 바라보는 클라크의 관점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영웅 숭배론》(박상익 옮김, 한길사, 2023년)에 가깝다칼라일은 영웅의 조건으로 성실성과 통찰력을 꼽았다. 그는 인류가 누리는 모든 것은 영웅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H. (Edward H. Carr)역사란 위인들의 전기라고 주장한 칼라일의 관점이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했다(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개역판, 2015, 까치, 72쪽). 이로 인해 칼라일은 영웅사관을 확립한 학자로 오랫동안 지목받았다그렇지만 칼라일이 선호한 영웅은 비범한 천재가 아니라 성실한 노력형 천재


케네스 클라크의 천재 예찬론은 영웅사관과 맞닿아 있지 않다. 그는 천재를 미화하지 않았으며 문명에 드리운 그림자도 살핀다. 그는 문명의 정점인 르네상스를 칭찬하면서도 한계를 지적한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궁정에서 활동하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의존하던 시대다. 이 책 마지막에 클라크는 문명의 위대한 성취에 눈이 멀면 생기는 ‘자만심(Hubris)’을 경계한다. 그는 문명이 무질서하게 파괴되지 않으려면 역사에서 배우려는 노력을 계속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명45년 전에 만들어진 책이다이 책 속에 담긴 모든 지식은 영원하지 않다우리가 옳다고 믿는 지식에도 수명이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항상 변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명여백이 많은 책이다. 그리고 고쳐야 할 내용도 많은 책이기도 하다



* 127





 아케이드는 리듬과 균형을 지녔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맞아들이는 개방성이 있습니다. 이는 앞선 시대에 생겨나 여전히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저 어두운 고딕 양식과 완전히 모순됩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쓴 문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철학자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 228

 




 셰익스피어 이래 오늘날까지 레오파르디(Giacomo Leopard, 1789~1839)나 보들레르 같은 위대한 염세가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쩔 수 없는 무의미함을 셰익스피어만큼 강렬하게 느꼈던 사람이 있을까요?

 


레오파르디의 정확한 알파벳 표기는 ‘Leopardi’. 책에 ‘i’가 빠져 있다. 사망 연도가 잘못 적혀 있다. 1837년이다.




* 270~271


 흔히 베살리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근대 최초의 위대한 해부학자 판 베셀은 네덜란드인이었습니다.



베살리우스(Vesalius)의 출신지에 대한 부연 설명이 있어야 한다. 베살리우스는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당시 브뤼셀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Habsburg Netherlands)에 속했다. 그래서 케네스 클라크는 베살리우스를 네덜란드인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베살리우스를 벨기에 출신 해부학자로 많이 소개되는데, 브뤼셀의 역사를 생각하면 클라크의 설명이 무조건 틀렸다고 볼 수 없다.



* 286~287


 데카르트가 빛의 굴절을 연구했다면, 하위헌스는 파동설을 내놓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네덜란드에서 이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뉴턴이 입자설을 제창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었거나 어쨌든 하위헌스의 파동설보다 나을 게 없었지만, 뉴턴의 가설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권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빛의 성질이 파동과 입자 중 어느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17세기 과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당시 뉴턴(Isaac Newton)의 권위가 막강해서 입자설이 우세했다. 그러나 맥스웰(James Clerk Maxwell)빛은 전자기파라고 주장하면서 파동설이 우위를 점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양자역학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빛은 파동과 입자 형태를 모두 갖춰진 이중적인 성질이다.



* 363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1522에 안트베르펜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알프스를 스케치했습니다. 이 그림에는 지형에 대한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는 요소가 보이며, 훗날 그의 그림 속에 이용되어 감동적인 효과를 자아냅니다.



피터르 브뤼헐의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1525년부터 153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브뤼헐이 1522에 여행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브뤼헐은 1551년에 로마로 향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아마도 원서에 고쳐지지 않은 오류이거나 역자의 실수일 것이다. 클라크는 브뤼헐이 알프스를 스케치했다고 설명했는데, 여행 기간에 산의 풍경을 그린 스케치들이 브뤼헐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출처: Wikipedia, Pieter Bruegel the Elder)




* 426





발자크(Honore de Balzac, 1597~1654)



오노레 드 발자크의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가 틀렸다. 1799년에 태어나서 1850년에 사망했다. 1597년에 태어나서 1654년에 사망한 인물의 정체는 장 루이 게즈 드 발자크(Jean-Louis Guez de Balzac). 프랑스 출신의 작가이며 아카데미 프랑세즈 창립 회원 중 한 사람이다.


옮긴이가 쓴 주석에도 오류가 있다



* 69쪽 역주 62 [안티고네]

 




 기원전 441년경 상연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의 주인공. 왕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고 그 때문에 자신도 처형당한다.



소포클레스(Sophocles)의 비극에 묘사된 안티고네(Antigone)는 감옥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 245~246, 246쪽 역주 170 [롱기누스]

 




 에라스뮈스 이래 북유럽의 지식인들이 성인의 유골에 대한 신앙을 모욕했는데, 그렇다면 성유골의 중요성을 강조해서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 안에 네 개의 대지주를 거대한 성유골함으로 만들겠다는 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들 대지주 중 하나에는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창의 일부가 들어 있고, 그 앞에는 새로운 광명에 눈이 부신 것 같은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베르니니가 만든 롱기누스 상이 서 있습니다.

 

[역주] 3세기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때 롱기누스(Longinus)라는 로마 병사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렸다. <요한복음서>에는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병사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외경 복음서로 알려진 <니코데모 복음서>에 이름이 나온다. 롱기누스와 관련된 역주에 ‘3세기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잘못 적혀 있다. 기독교 전설에 나오는 로마 군인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이다. 역자가 언급한 철학자는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os, 213?~273)로 추정되는데, 사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플라톤 철학을 계승했으나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314, 역주 197 [데모크리토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애국적 웅변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세계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원자설을 주장한 압데라(아브데라) 출신의 철학자. 아테네에 활동한 웅변가는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기원전 384~기원전 322).


보조사가 틀린 문장도 있다.



* 98






기사도 → 기사도




* 310





 현재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에는 루비야크 만든 헨델 상이 있는데, (생략)



루비야크 루비야크





* 457






쇠라의 <아니에르의 물놀이> 쇠라의 <아니에르의 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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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리니코프 2024-06-27 0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86쪽에도 편집 오류가 있습니다. 한번 보시고 내용에 추가하셔도 될 것 같네요ㅎㅎ

cyrus 2024-06-30 20:5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라스콜리니코프님이 알려주신 286쪽에 ‘몬드리안’이 어색하게 인쇄되어 있어요. 사진 찍고 정리하다가 286쪽 인쇄 오류를 포함하지 못했어요. 그것도 추가할게요. ^^